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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16:19:25

노태공

파일:노 전서체.png
노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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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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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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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ACD32> 노(魯)나라 초대 국군
태공
太公
희(姬)
노(魯)
백금(伯禽)
아버지 주공단(周公旦) 희단(姬旦)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998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998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노나라의 초대 군주. 주공단(周公旦)의 아들. 노고공, 노양공(魯煬公)의 아버지. 그는 서융(徐戎)의 난을 평정하고 주례(周禮)로써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1]

2. 생애

원래는 아버지 주공 단이 노나라에 봉지를 받아 다스려야 했으나, 그는 상국인 주나라의 정사를 돌봐야 해서[2] 아들인 노태공이 대신 가게 된다. 이때 주공 단이 아들인 공자 백금에게 충고했다.
"가거라! 너는 노나라에 가서 선비들에게 교만하지 말거라. 나는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이고, 금상[3]의 숙부이다. 또한 천자를 보필하며, 내가 천하에서 맡은 지위 역시 가볍지 아니하다. 그러나 나는 머리 한 번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채를 잡고, 밥 한 번 먹을 때 세 번이나 뱉어내더라도, 오히려 천하의 선비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 겸손치 아니하여 천하를 잃고 그 몸을 망친 자가 (桀)과 (紂)이니, 삼가지 않음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그리하여 노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노 태공이다. 이후 그가 노나라를 다스릴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노 태공이 3년 간 나라를 다스리고 주나라에 노나라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주공 단이 아들 노 태공을 꾸짖었다.
"너는 어째서 보고가 늦었느냐?"
노 태공이 대답했다.
"제가 풍속과 예의를 다듬고, 어머니 3년 상을 치르느라 늦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은 5개월 만에 일을 마쳤다.[4] 주공 단이 물었다.
"제후께서는 어째 일처리가 이리 빠르시오?"
강태공이 대답했다.
" 예의를 간소화해 그 풍속에 익숙하게 하는데 그렇게 걸렸다오."
거기까지 들은 주공 단이 탄식했다.
"노나라는 필시 제나라의 손에 잡혀 살 것이다. 예의가 간소화 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쉬우면 백성들은 모이게 되어 있다."[5][6]

후일 노 태공의 백부 관숙 선, 숙부 채숙도 등이 주공 단의 주나라 왕실 섭정에 불만을 품고 그들이 감시하는 상나라 왕족 무경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니 이른바 '삼감의 난'이라 한다. 게다가 서융들과 회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노나라를 치자, 노 태공은 힐서를 지어 병사들을 소집해 그들을 물리쳤다.

노 태공이 죽고 아들 공자 유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노 고공이다.


[1] 다만 후술되어있듯 노 태공이 그 적용을 빡빡하게 해서 부친인 주공 단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2] 자신의 봉지인 소주(小周)도 소주거니와, 종주국인 주나라의 재상인지라 그곳 정사도 무시할 수 없었다. [3] 당시는 주성왕(周成王) 대였다. [4] 3개월이라는 말도 있다. 헌데 주나라에서 제나라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5개월조차 당시 기술을 감안시 거의 왔다가 돌아간 수준이 아닐까도 싶다. [5] 노나라 출신으로 예악을 강조한 공자가 존경한, 주공 단조차 과한 허례허식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인지했음을 알 수 있다. [6] 참고로 이렇게 제나라와 노나라는 그 시조의 성향이 극단적으로 달라서인지 제나라는 제후국들 중에 가장 실리를 따지는 편이었고 반대로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법이 잘 살아있었다. 당장 공자의 고향이 노나라였다. 허나 한편으로 주공 단의 탄식대로 정말로 노나라는 이웃한 제나라가 강해지고 내부적으로도 군주와 유력가문들의 힘싸움이 이어지며 쇠퇴하다가 전국시대 후기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훗날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나라를 두고 예는 보존되었으면서 나라 운영은 왜 그랬냐는 식으로 디스하기도 했다. 사기 노주공세가 출전. 다만 노나라는 항목에도 있듯 그 끝은 나름 호상이었던데 반해, 제나라는 중간에 전씨가 강씨를 몰아내서 대가 끊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