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一相
1612 - 1666
1. 개요
조선의 문신. 연안 이씨이며, 호는 청호(靑湖). 시호는 문숙(文肅)이다.이정구의 손자, 이명한의 아들, 이단상의 형이다.[1] 조부, 부친처럼 문명(文名)이 높았고, 본인까지 3대가 대제학을 지냈다.[2] 병자호란 이후 척화신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가, 부친이 이조판서가 되며 고관 자제들의 압송 요구로 청나라의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기도 했다.
2. 생애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이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1595 - 1645)과 반남 박씨[3] 사이의 큰아들이다.[4] 김장생의 제자인 민응건에게 소학을 배웠고, 정홍명 문하에서 수학하였다.[5] 태종의 서자 경녕군파 5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李聖求, 1584 - 1644)의 딸 전주 이씨와 혼인하였다.[6]17세인 1628년(인조 6년) 알성시(謁聖試)에서 급제하였다.[7] 너무 어린 나이에 문과 급제를 하여 소년 등과는 불행할 수 있다고 여겨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5년간 조부와 부친의 지도 아래에서 더 학문을 닦은 후 22세에 첫 출사하였다.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시작으로 언관 등 청요직을 거치며 출세길을 밟는다. 1635년 4월 조부 이정구가 사망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5월에는 젊은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였고, 링크, 대사간 윤황[8]에게 관사의 물품 절약으로 군비를 충당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9월에는 조정에서 청과의 우호를 위해 사신을 보내려할 때 당시 헌납이던 이일상은 유황(兪榥), 홍전(洪瑑)과 함께 척화의 입장을 뚜렷하게 밝혔다. 링크 그러나 불과 4개월 후 병자호란이 터졌고 척화는 답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이일상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할 때 어가를 따랐으나, 조정이 강화로 향한다는 말에 입성 다음 날 위중한 모친을 뵈러 성을 먼저 떠났다. 그러나 조정은 강화로 향하지 못했고 남한산성의 문도 닫혀 들어갈수도 없게 되었다. 역시 모친을 뵈러 갔던 심지원과 만나 함께 강화에 가려했으나 강화도 함락되며 갈 곳을 잃었다. 당시 이일상의 집안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부친 이명한[9]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 가족을 데리고 강화로 피신하였다. 이일상의 부인 전주 이씨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이일상의 바로 아래 동생인 이가상은 모친을 찾아 적진을 돌아다니다 죽었다. 이가상의 부인 안정 나씨도 그 소식을 듣고 곧 사망하였다. 셋째, 넷째 동생인 이만상과 이단상은 함께 포로가 되어 개성까지 끌려갔다가 풀려날 수 있었다. 이일상의 모친도 이만상과 이단상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호란 이후 척화를 주장한 죄로 파직되었다. 링크 그리고 1637년 2월 영암에 정배되었다가 평안도 위원으로 이배되었다. 당시 이일상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이 있어 인척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10]가 시로 위문하기도 하였다. 링크 같이 척화를 주장한 유황은 10월에 석방되었으나 이일상은 어가를 호종하지 못한 죄가 더해지며 모친상의 3년복을 벗은 1639년(인조 17년) 5월에야 해배되었다. 이일상 유배 당시 청은 이명한을 의주로 불러 심문을 했다. 이일상의 척화 죄에 대한 것인데 이명한, 이일상이 이정구의 아들, 손자인 것이 큰 도움이 되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11] 하지만 이일상은 아직 죄적에 등록되어 바로 출사하지 못하였다. 1639년 10월 이명한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1640년 8월 부친을 따라 동생 이단상과 함께 금강산과 영동의 명승을 유람하였다.
1641년 부친이 대제학[12]을 거쳐 1642년(인조 20년) 1월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청과의 강화 조항으로 삼공육경의 자제를 인질로 심양에 보낸다는 것이 있어 형제들 중 한 명이 가야했는데, 이일상은 죄적에 등록되었고 이가상은 사망하였으며, 이만상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PTSD로 발작에 시달리고, 이단상은 15세에 불과했다. 결국 몸이 좋지 않아도 이만상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3월 심양으로 출발하기 전 배사까지 했으나 피를 토하고 통증이 심해 출발하지 못했다. 결국 가망이 없어보이자 집안에서는 이일상이 떠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을 했다. 결국 3월 25일 이일상(당시 30세)은 전 헌납이던 직첩을 돌려받기도 전에 사직 직함을 달고 심양으로 떠났다. 청은 남자 혼자 심양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가속도 함께 보내라고 했는데 이일상은 당시 아내는 호란 당시 자결해서 없었으며 둘 사이에는 딸 하나만 있었다. 이일상은 청에 인질로 가는 것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13], 부친이 남긴 말은 전하지 않으나 작은 아버지 이소한(李昭漢)은 장조카에게 '만고의 이름을 생각하지 말고 일신을 지키라'는 당부를 했다. 5월에 세자시강원 사서 유경창[14], 형조 판서 원두표의 아들 원만년과 함께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에 억류된 이일상은 자신을 '죽지 못한 자'로 표현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수행하고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 관리들[15]과 함께 사적인 시간에 서로 시를 수창하며 시름을 달랬다. 이일상은 인질로 심양에 갔고 세자시강원 관리가 아니었으나, 유일하게 이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시를 남겼다. 1642년 이 모임에서 나온 280여 수의 시를 모은 '심관창화록(瀋舘唱和錄)'이라는 책이 전한다.[16] 이일상은 국은 덕에 살아남다고 생각하고 척화를 후회하지 않았으나, 현재 상황에 대해 특별한 대책은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도 느꼈던 듯 하다. 심양 생활은 전염병[17]과 식량 부족, 청의 감시로 매우 힘들었고, 이일상은 시름과 자괴감을 시와 술에 의지해 해결하려고 했다.
청은 명과 조선이 내통한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김상헌과 이명한을 포함한 5명이 척화 5신으로 지목되었다. 1642년 12월 이명한은 파직된 후 심양으로 압송되었으며[18], 이일상은 부친이 육경에서 내려오자 인질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1643년 4월에 한양으로 돌아와 바로 출사하였다. 교리를 거쳐 김제군수로 나갔다가 1645년(인조 23년) 4월에 한양에 전염병이 돌았고 예조판서를 역임중이던 부친 이명한이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돌보던 동생 이만상과 형조참판이던 숙부 이소한도 얼마 안있어 사망하였다. 3년상을 치르며 1646년에 이단상과 함께 부친의 문집 '백주집(白洲集)' 초간본을 간행하였고,[19] 묘비명도 김상헌에게 받았다. 링크 상을 마치고 사간, 필선을 거쳤고 궁궐 보수에 참여한 후 좌승지에 올라 통정대부가 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였고 효종이 즉위한다.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링크, 1651년(효종 2년) 8월 세자 책봉례에서 죽책문을 지었다. 링크 12월에 발생한 김자점의 역옥에서 국청에 참여하여 종결 후 포상받았고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겸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링크 1653년(효종 4년) 6월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문제를 하나 제기한다. 링크 옷을 이상하게 입은 사람이 있어 체포했는데 예조판서 이후원(李厚源)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금리에게 체포되었다가 도망가 모친을 대신 잡아왔는데, 이후원이 금리가 뇌물을 받고 풀어줬다가 다시 집에가서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를 조사하라고 했다. 대질 신문했더니 금리는 죄가 없어 보였기에 이후원을 추고할 것을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들과 장관(=대사헌=이일상)도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이일상은 금리가 그의 옷만 가지고 왔기에 불태우라고 하고 다시 체포하라고 명했고, 모친을 체포해왔기에 장을 쳐서 석방했다고 했다. 링크 추후 이후원이 이일상에게 금리가 뇌물을 받았다고 하기에, 사헌부에서 그 금리를 잡아왔는데 그가 자신이 뇌물을 받았다면 왜 모친을 잡아왔겠느냐고 했다 한다. 그래서 사헌부 내에서 논의를 하였고 금리를 무소로 다스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뇌물을 안받았다는데 받았다고 처벌한다면) 석방한 것이라고 했다. 효종은 이야기를 모두 들어본 후 임금을 속였다 하여 이일상을 삭탈관직하고 이후원도 파직시켰다. 링크[20]
1654년(효종 5년) 8월 정조 부사(正朝副使)에 임명되어 사은사인 인평대군과 함께 청에 다녀와 1655년(효종 6년) 3월에 귀국하였다. 링크 링크 당시 인평대군과 나눈 시에서 '죽지 못한 신하의 고통'을 표현하기도 했다.[21] 청에 다녀와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 링크 1656년(효종 7년) 부제학, 경기감사, 대사성, 이조참판을 거친다 링크. 부제학 시절 김집의 시호를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는데, 송준길이 그에 대해 이일상에게 문의한 바가 있다.[22]
1657년(효종 8년) 인조실록을 편찬하는 수정청의 당상이 되었고, 링크, 1658년(효종 9년) 경기 관찰사일 때 인평대군 사후 효종이 몸이 좋지 않아 송시열을 불러 올릴 때 승지 김좌명과 함께 연결고리가 되었다.[23] 그리고 마침내 1659년(효종 10년) 3월에 대제학이 되었다.[24] 이일상은 다섯번 상소하여 자신은 대제학에 합당하지 않다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효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의 상소에 가족을 잃고 무너져 내렸던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밝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으나 이일상의 문명은 당대 제일이었다. 김수항 만사
"신은 본디 바보처럼 머리가 텅 비어 일개 쓸모 없는 위인일 뿐입니다. 비록 가정에서 저절로 단련된 덕으로 요행히 과거 시험에 붙어 일찍 벼슬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만, 본성이 또 게을러 세월만 마냥 보내다 보니 공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정축년부터 10여 년 동안 전후로 가족을 잃는 처참한 재앙을 당하여 실로 사람의 도리로는 차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혼자 외로이 형체만 남아, 마치 넘어지지 못한 마른 나무가 겉에는 가지와 잎이 달렸어도 속은 벌레가 먹어 생기를 다 잃은 상태와 같습니다. 평상시 남과 이야기하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무슨 정신으로 다시 서책을 대하여 공부하겠습니까. 쓸데없이 반평생을 보냈고 학문에 뜻을 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신의 일가 친척이 다 아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친구나 모든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보고 듣기에 크게 놀라운 일이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조정에서 인재를 임용하는 도리와 신하로서 기량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리는, 한산하고 느긋한 직위가 있더라도 본래 구차히 충원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 대제학의 직위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데 감히 천만 부당하게 저처럼 같잖은 위인이 갑작스레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과거 시험에 요행히 합격한 사람은 더러 있지마는 대제학의 자리를 요행히 차지한 이는 결코 없었습니다. 신이 임명의 소식을 들은 이후 무거운 죄를 진 것처럼 부끄러워 땀이 흘러내렸으며, 잠자다가도 놀라 산이나 바다로 곧장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염치없이 영화를 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무릅쓰고 나아갈 의향이 있다면, 온 조정 사람들의 비난은 우선 접어 두더라도, 그것이 사림(詞林)에까지 욕을 끼치고 사방 천지에서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어찌합니까. 국가의 관직을 훔쳐 더럽히는 일이 신한테서 비롯될까 두려운데, 어찌 저의 사문 중에만 두려움이 가득할 뿐이겠습니까. 결코 받들 수가 없으니, 내리신 분부를 속히 거두어 감당할 만한 인물에게 돌려 제수하시면 참으로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링크
조정에서 인재를 임용하는 도리와 신하로서 기량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리는, 한산하고 느긋한 직위가 있더라도 본래 구차히 충원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 대제학의 직위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데 감히 천만 부당하게 저처럼 같잖은 위인이 갑작스레 맡아서야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과거 시험에 요행히 합격한 사람은 더러 있지마는 대제학의 자리를 요행히 차지한 이는 결코 없었습니다. 신이 임명의 소식을 들은 이후 무거운 죄를 진 것처럼 부끄러워 땀이 흘러내렸으며, 잠자다가도 놀라 산이나 바다로 곧장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염치없이 영화를 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무릅쓰고 나아갈 의향이 있다면, 온 조정 사람들의 비난은 우선 접어 두더라도, 그것이 사림(詞林)에까지 욕을 끼치고 사방 천지에서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어찌합니까. 국가의 관직을 훔쳐 더럽히는 일이 신한테서 비롯될까 두려운데, 어찌 저의 사문 중에만 두려움이 가득할 뿐이겠습니까. 결코 받들 수가 없으니, 내리신 분부를 속히 거두어 감당할 만한 인물에게 돌려 제수하시면 참으로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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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3개월 후 의료사고로 급사하였다. 효종 사후 송시열과 슬픔을 나눈 정황도 보인다. 링크 이일상은 대제학으로서 효종을 영릉에 천장한 후 애책문을 지어 올렸다. 링크[25] 현종 즉위 후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대제학으로서 '효종실록' 편찬에 전념하게 된다.[26]
그런데 1660년(현종 1년) 6월, 이일상에게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호남 수사(湖南水使) 이동현(李東顯)이 군포(軍布)와 관미(官米)를 가득 실은 배를 이일상에게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이일상은 부정한 수뢰를 받았다는 혐의로 대간의 탄핵을 받게 된다. 링크[27] 조정은 난리가 났고 이일상을 비방하는 논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이일상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고 결국 이일상의 집에 드나들던 초관(哨官) 양영남(梁穎南)이 당시 이조 참판이던 이일상의 간찰을 위조하여 이동현에게 배를 요구한 것으로 드러나 무혐의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동생인 이단상은 이 일을 '치욕'이라고 표현하였다. 송시열과의 편지 이단상은 형에게 편지를 보내 변명하지 않고 행실을 닦고 술을 줄이고 언어를 삼가자고 조언하였다. 링크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경기 감사이던 조형(趙珩)이 이일상의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이일상을 공격했던 이정기를 초청해 화해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이정기가 술잔을 들어 이일상에게 넘기자 이일상은 화를 내며 "사대부(士大夫)도 정기 술을 마신다던가?" 하자 이정기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정기는 이후 관운이 사실상 끝났다. 링크
1661년(현종 2년) 5월 효종실록이 완성되어 포상을 받았으며, 6월 공조판서에 올랐다. 9월에 태백산 사고에 실록을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풍부사이던 이단상을 만나 함께 배를 타고 도담(島潭)과 구담(龜潭) 등의 여러 승경을 두루 유람하였다. 링크 9월에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사건을 재론하며 불을 지폈고[28] 링크, 이경석[29], 김수항, 유계[30]가 문제 없으니 문제가 있다면 자신들의 사직을 받아들여달라고 현종에에 요청하였으나 현종은 사직하지 말라 비답하였고, 링크 이일상과 함께 남한산성도 강화도 가지 못했던 심지원도 이지익이 패거리라고 지목한 사람 중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으니 제대로 다시 조사해보자고 주장하였다. 링크 1662년(현종 3년) 3월이 되어서야 조정의 논의는 결말이 난다. 현종은 "양영남(梁穎南)의 옥사(獄事)가 이미 8개월이 경과했는데도 아직껏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 영남이 일단 서간을 위조했다고 승복(承服)한 뒤로 여러 차례 엄한 형신(刑訊)을 받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 있으니, 이를 본다면 이일상의 수서(手書)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영남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며 이일상은 죄가 없다고 확인해주었다. 이일상은 이 일에 얽혀 7개월간 출근하지 못하고 대죄하고 있었으며, 결론이 나자 대제학을 사직한다고 요청하여 자리에서 내려왔다. 링크[31][32]
1663년(현종 4년) 5월 다시 예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및 대사헌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그리고 11월 예송논쟁과 함께 현종 시대를 달구었던 공의(公義), 사의(私義) 논쟁이 발발한다. 절친한 벗인 서필원과 동생 이단상이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 사안을 유발한 수찬 김만균은 이일상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일상은 자신의 이름도 언급되었지만 논쟁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으며 지켜보기만 했다.[33] 이후 이일상은 호조, 예조판서, 좌참찬, 대사헌을 역임하다가 1666년(현종 7년) 55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현종실록졸기 현종개수실록졸기 이단상에게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박세채가 형의 사망을 위문하는 편지를 보냈다. 링크
문집으로 '청호유고(靑湖遺稿)'가 전한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14년 숙종 시절 시호로 문숙(文肅)을 받았다. 링크 경기도 가평 상면 태봉리의 연안 이씨 선영에 묻혔으며,[34] 신도비문은 박세채가 짓고, 동강(東岡) 조상우(趙相愚, 1683 ~ 1718)[35]가 글을 썼으며, 김창협[36]이 전액하였다.[37] 묘지명은 조카 이희조가 지었다.[38]
이일상은 연려실기술에서 조익, 김육, 이시백 등과 함께 효종 시기의 상신(相臣)[39] 중 하나로 올라가 있다.
3. 일화
- 1652년(효종 3년) 한 차례 효종의 분노를 산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 3차례 왕이 공부하는 경연이 있는데 5월 12일 아침 경연인 조강(朝講)에 왕과 다른 신하들이 모두 와있는데 특진관인 윤강(尹絳)이 계속 오지 않았다. 효종이 분노하여 도승지인 이일상에게 조강을 파하라고 하자, 이일상이 윤강 잘못이 아니라 즉시 알려주지 않은 관리의 문제였다고 대답하였다. 효종은 다음 경연인 주강에서 윤강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고 하며 두 대관(臺官) 심노와 박수문을 파직하고 윤강을 잡아와 추문하라 명했다. 마지막 경연인 석강에서 신하들이 잘못을 논핵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하고 추고하는 것은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계초가 들어오자, 효종은 화내며 계초를 찢어던지며 소리쳤다. 그리고 계초를 기초한 승지가 이일상임을 알고 "도승지 이일상(李一相)은 애국하는 마음이 사사로운 벗을 아끼는 마음만 못하여 이에 감히 이러한 무리들을 구해주려 하였으니, 방자하게 구는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체직하고 뒤에 추고하라."며 파직하라는 명을 내렸다. 다음날에도 효종은 경연을 열지 말라고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김육, 부제학 민응형이 들어와 그건 불가하다고 아뢰었다.[40] 링크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경연을 열라 하였고, 윤강은 고신을 빼앗고 곤장을 치고 석방하였다. 4개월 후인 9월에 대사헌 홍무적이 이일상의 벌이 무겁다고 아뢰자 다시 서용하도록 하였다.[41] 3일 후 이일상은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 1652년(효종 3년) 10월에 생원시, 진사시가 있었는데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정유악(鄭維岳)을 효종이 불러서 만났다. 정유악은 정뇌경(鄭雷卿, 1608 - 1639)의 아들인데, 정뇌경은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현재의 효종)을 보위하는 세자시강원 관리였다. 그는 청과 조선 사이에서 정명수의 농간을 잘 알고 있었고, 중간에서 조선이 청에 보내는 세폐(歲幣)의 일부를 슬쩍하는 것을 알게 되자 청나라 사람을 시켜 고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소현과 봉림은 당시 그의 처벌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하였고, 그의 시신에 친히 자신들의 옷을 벗어 염해주었다. 효종은 "정뇌경이 죽을 때에 내가 심양에 있었는데 살리려 하였으나 할 수 없었고.."라고 언급한 바 있다. 효종은 정뇌경의 아들이 장성한 것을 보고 슬픔과 기쁨을 견디지 못한다고 하며 반드시 입신양명하여 원대한 것을 기약하라 하였다. 정유악이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하고, 도승지 이일상도 당시 심양에 있던 것은 아니나[42] 자신이 들었을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으며 효종은 정유악에게 상을 내린다. 실록 링크[43] 정유악은 14년 후 (현종 7년) 문과 급제하여 도승지, 공조참판까지 올라갔다.
4. 여담
- 동생 이단상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20년을 옆집에 나란히 살았고, 이단상은 이일상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부군은 형제가 넷이었는데, 중씨(仲氏=이가상(李嘉相))와 숙씨(叔氏=이만상(李萬相))가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부군 및 백씨(伯氏=이일상(李一相))만이 옆집에 나란히 살면서 20년을 하루같이 늘 의지하며 지냈다. 부군은 백씨를 섬길 때에 성심과 사랑을 지극히 하여 즐거움이 넘쳤다. 간혹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낼 때 경계하는 말을 다하면 백씨가 또한 기뻐하며 그것을 수용하였다. 말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사람 중에 참으로 부형에게 엄숙하고 공경하는 자는 있지만, 부군 형제처럼 지성으로 사랑하여 완전히 틈이 없는 경우는 대개 쉽게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백씨는 늘 부군을 사랑하고 중시하여 일이 있으면 꼭 물어보았으니, 비록 시를 읊조리는 하찮은 일까지도 반드시 의논한 뒤에 남에게 보였다. 평소 잠깐이라도 이별하면 못내 그리워하여 편지를 계속 보냈고, 부군도 그 뜻을 받들어 감히 멀리 떠나지 않았다. 항상 말씀하기를 “나는 백씨에 대해 의리로는 형제지간이나 은혜로는 부자지간과 같다.”라고 하였다.
백씨가 병이 들자 부군은 좌우에서 모시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대변을 맛보았으며 선조의 사당에 울면서 기도하였으니, 성심을 다하기를 거의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을 당해서는 허둥지둥 슬피 울부짖는 것이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 같았고, 장례를 지내고 돌아와서는 항상 의기소침하여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왕왕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동안에는 만사(挽詞)나 송별시, 수응(酬應) 문자를 모두 폐하고서 말씀하기를 “중제(重制)를 당한 몸이어서 감히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일상의 조카, 이단상의 아들인 이희조의 기록. 링크
백씨는 늘 부군을 사랑하고 중시하여 일이 있으면 꼭 물어보았으니, 비록 시를 읊조리는 하찮은 일까지도 반드시 의논한 뒤에 남에게 보였다. 평소 잠깐이라도 이별하면 못내 그리워하여 편지를 계속 보냈고, 부군도 그 뜻을 받들어 감히 멀리 떠나지 않았다. 항상 말씀하기를 “나는 백씨에 대해 의리로는 형제지간이나 은혜로는 부자지간과 같다.”라고 하였다.
백씨가 병이 들자 부군은 좌우에서 모시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대변을 맛보았으며 선조의 사당에 울면서 기도하였으니, 성심을 다하기를 거의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을 당해서는 허둥지둥 슬피 울부짖는 것이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 같았고, 장례를 지내고 돌아와서는 항상 의기소침하여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왕왕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동안에는 만사(挽詞)나 송별시, 수응(酬應) 문자를 모두 폐하고서 말씀하기를 “중제(重制)를 당한 몸이어서 감히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일상의 조카, 이단상의 아들인 이희조의 기록. 링크
- 장남으로서 요절한 동생들도 챙기며 둘째 동생 이가상에게는 자신의 조졸한 차남 이중조를 입적시켰고, 장남 이성조의 차남 이주신을 이중조에게 입적시켜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주신의 아들이 이천보이다. 셋째 동생 이만상의 아들 이봉조[44]에게는 조부 이정구의 집을 주어 살게 하였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었다.
- 낙동계(洛東契) 라는 모임의 핵심 멤버로 부친 사후 시사를 운영하였다. 낙동계는 한양의 동부인 낙산(駱山) 아래에 거주하며 세교하던 문인들의 모임이다.[45] 1643년 이명한이 낙동 지역 3개 방(坊)에 거주하는 문인 50여 명을 모아 계를 결성하여 서첩을 만들고 서문을 썼다. 인평대군과 그 아들 복창군을 포함하여 이정구와 친했던 오윤겸, 홍서봉, 조익, 최명길의 후손들이 모두 근처에 살며 계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용익, 서필원 등도 모임의 일원이다. 이 모임에서는 금속활자인 '낙동계자(洛東契字)도 주조하여 책을 간행하기도 했고, 낙동계자는 '현종실록' 간행을 위해 궁중에 들어가서 사용되기도 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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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과 술은 빼놓을 수 없는데 좋은 말로는 풍류 있는 사람이고, 남인들이 그를 비난할 때 항상 동반되는 말은 주정뱅이였다. 유배 시기,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할 때도 술에 의지하였다. 17세에 문과에 급제하는 타고난 머리와 대제학을 맡은 문장의 재능에 명문가의 장손으로 태어나 배경도 빵빵했던 인물이
고작판서에 그쳤다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다.
5. 가족 관계
신 안동 김씨에 육창(六昌)이 있다면, 연안 이씨에는 팔상(八相)이 있었다. 이정구의 장남 이명한의 아들 넷(이일상, 이가상, 이만상, 이단상), 차남 이소한의 아들 넷(이은상, 이홍상, 이유상, 이익상)이 해당한다. 일찍 사망한 이만상을 제외하면 일곱 명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47] 이일상은 팔상의 필두이다.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이 이들의 선조인 이석형, 이정구, 이명한, 이소한의 문집이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들의 작품들이 아직 문집으로 나오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음을 안타깝게 여겨 시단의 친구들인 김수흥, 김수항과 상의하여 팔상의 시를 모아 편찬한 작품집인 '이씨연주집(李氏聯珠集)'도 전한다.[48] 송시열의 발문병자호란시 강화에서 순절한 전주 이씨와의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다. 장녀는 김만균과 혼인하였다. 이일상의 장녀의 딸, 곧 외손녀가 조인수(趙仁壽)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조현명이다. 전주 이씨 사후 문화 유씨[49]와 재취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문화 유씨는 이일상이 죽고 20년 후에 사망하였다.[50]
장자 이성조(李成朝, 1648 - 1696)는 1673년 진사시에 입격하여 1680년 서인 집권 후 전설사 별검, 의금부 도사, 호조 정랑, 금산 군수(錦山郡守), 예천 군수(醴泉郡守)를 역임한다.[51] 차남 이중조(李重朝)는 조졸하였으며, 삼남 이해조(李海朝, 1660 - 1711)의 호는 명암(鳴巖)이며 부친의 문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4대 대제학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언관일 때 철저히 노론의 관점에서 여러차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상소를 올리며 견제도 많이 받았고, 본인도 벼슬길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1707년에는 윤증을 조정에 불러오라는 상소를 두둔한 최석정을 배척하다가 숙종의 화를 사기도 했다. 안동 김문의 육창(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즙)과 친하게 교류했고, 특히 산수를 좋아하여 김창흡과 유독 관계가 깊었다. 김창흡이 이끈 백악시단에 속한 인물로 꼽히며, 이해조가 시를 지어보내면 김창흡이 비평하고 화창시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해조 사후, 그의 문집도 김창흡이 산정하였다. [52] 다른 딸은 예조참판 조한영(曺漢英, 1608 - 1670)의 막내 아들 조헌주와 혼인하였다. 조한영 묘지명
이성조의 큰아들 이우신(李雨臣, 1670 - 1744)은 당숙부 이희조의 제자이다. 음보로 출사하여 정읍, 의성현감, 부평부사를 거쳐 호조참판까지 제수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이우신의 아들 이정보(李鼎輔, 1693 - 1766)도 문과 급제 후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다른 아들인 이익보(李益輔, 1708 - 1767)도 문과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판서, 좌참찬을 역임했다. 이성조의 둘째 아들 이주신(李舟臣)은 진사이며 옥천군수를 지냈으며, 중부 이중조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배우자는 광산 김씨 김만기의 딸이다.[53] 이주신의 아들은 노론의 영수 계보를 잇고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시인인 진암(晉庵) 이천보(李天輔, 1698 - 1761)이다.[54] 삼연 김창흡의 제자이며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사도세자가 1761년에 평양으로 조울증 치료를 위해 여행을 다녀왔는데, 평양 군사를 통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탕평 정국을 이끌던 삼정승 이천보, 이후, 민백상은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이들은 탕평 정국의 붕괴 위기에서 자신들이 모두 죽어 이 일이 거론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들은 두달 사이에 모두 사망하였고 자살로 추정된다. 이천보 묘지명
[1]
16세 연상
[2]
조선 최초.
[3]
외조부는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 중 한 사람인 박동량이다. 박동량의 손자는
박세채이며, 곧 이일상 형제와 박세채는 외사촌이다.
[4]
동생 3명이 있으며 이가상(李嘉相), 이만상(李萬相),
이단상이다.
[5]
鄭弘溟, 1592 - 1650, 호는 기옹(畸翁),
정철의 아들이며
윤근수의 제자이다.
서필원, 박세교가 이일상과 함께 정홍명 문하에서 배운 동문들이다. 기옹은 본인 자신도 빼어난 문인으로 대제학에 올랐던 바 있다.
[6]
둘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고, 훗날 공의, 사의 논쟁의 시발이 된 김만균과 혼인하였다. 김만균은
김장생의 손자이다. 한편 이성구의 동생이 그 병자호란 때
강화도 방어전 말아먹은 이민구이다.
[7]
김장생이 이일상의 조부인 당시 우의정
이정구 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고, 그에 대한 이정구의 답신이 전한다. '어린 손자는 무슨 바쁜 일이 있기에 열일곱 살에 등제(登第)하였을까요. 이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분에 넘치는 복이 가득하여 과도한 재앙이 닥쳐오려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온 집안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지금 보내 주신 편지에서 축하한다고 희롱을 하셨으니, 그 때문에 한 번 웃었습니다.'
링크
[8]
윤선거의 부친,
윤증의 조부이다. 대표적인 척화신이다.
[9]
대사성이던 이명한은 부친 사망 후 3년상을 치르고 있었다.
[10]
장인 이성구의 동생.
김경징과 어울리며 비판 받았던 적이 있다.
[11]
청 태종이 강화를 함락하고 나서 이정구와
최명길의 집안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바가 있다.
[12]
이정구에 이은 2대째 대제학
[13]
대표적인 척화신이던
삼학사는 청에서 처형되었고, 이일상도 척화신 중 하나였다. 병조판서이던
신경진의 아들은 청에 가는 길에 사망하기도 했다.
[14]
'심관창화록'에 함께 시를 남겼다.
[15]
이들의 공적인 기록은 비밀 보고서인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세자 일행의 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瀋陽日記)'가 있다.
[16]
참가자는
이경석, 한형길, 박서, 이경상, 유경창, 이일상이다. 이경석이 가장 높은 직위였으며, 이일상은 30세로 가장 어리고 직책도 낮았다. 이경석은 부친 이명한과 동갑인 친구였다. 이들은 한양에서 모두 교류해온 사이였으며, 시가 뛰어나고 풍류로 이름이 높았던 이일상을 초대한 셈이다. 이경석, 한형길, 이경상은 이일상의 시가 화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고 했다. - 참고: 남은경, 瀋舘唱和錄의 체제와 내용, 2012
[17]
천연두
[18]
명과 통교할 때 글을 지었다는 죄목. 그리고 다음해 4월 은 천냥을 바치고 풀려났다.
[19]
서문은 이일상의 부탁으로 김상헌이 작성하였다.
백주집 서문
[20]
동생 이단상의 친구이자 사돈으로 당시 정언이던
김수항이 상소하여 실드했으나 실패하고 사직하였다.
링크
[21]
인평대군은 이일상이 부친의 뒤를 이어 주도한 시 모임 '낙동계(洛東契)'의 일원이기도 하다. 오고가며 서로 차운한 시가 인평대군의 '송계집(松溪集)'에 여러 수 전한다.
링크
[22]
송준길과 송시열은 문원(文元)을 원했는데, 결국 기존 논의대로 문경(文敬)으로 결정되었다.
링크
[23]
정유년부터 다음해 무술년 여름까지 생각하시는 뜻이 융중(隆重)하기 이를 데 없어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끝내 조정에 들어오라는 명(命)이 있어 감히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7월에 진위(振威)에 이르러 상께서 병환이 있다는 소리를 은밀히 듣고 희도원(希道院)에 이르자, 경기도 관찰사인 이함경(李咸卿 이일상(李一相))이 은밀히 편지를 보내 상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것을 알리고, 이어 서둘러 올라오라는 교지(敎旨)를 전하였다. 이는 대개 상이 의관을 불러 진맥할 때 입시(入侍)했던 승지(承旨) 김좌명(金佐明)을 통해 비밀리에 경기 감사에게 전유(傳諭)한 것이다. 신문(新門) 밖에 있는 첨정(僉正)인 숙부 집에 머물렀는데, 상이 또 김 승지(金承旨)를 보내어 병 때문에 즉시 접견(接見)하지 못한다는 뜻을 권유하였다. 며칠 뒤에 승지를 시켜 들어오라고 권유하였는데, 그때 인평대군(麟坪大君 효종의 동생)의 상(喪)을 당한 터라 내가 들어가자 상(上)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가 인평(麟坪)과 함께 지난날 경(卿)에게 학문을 배웠으므로, 매양 조만간 서로 만나 함께 옛날처럼 강학(講學)을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그가 갑자기 죽어서 나 혼자 경을 만나게 될 줄 알았겠는가.” 하며, 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다. 다음으로 이 미천한 신하의 상중(喪中)과 탈상(脫喪)에 관한 일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상께서 몸에 병이 생기게 된 곡절을 언급하였다. 이때 승지가 성후(聖候)에 오랫동안 문답을 하는 것은 몸을 더욱 상하게 할까 두렵다고 하여, 신이 물러가기를 청하였더니, 상이, “나는 병 때문에 경연(經筵)에 나가 강학(講學)을 할 수 없으나, 세자(世子)는 모름지기 매일 서연(書筵)을 열 것이니, 번거롭지만 그를 교도(敎導)하라.” 하였다. 그후로 상의 병환이 오래도록 차도가 없어,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는 동안 간혹 인견(引見)하셔도 조용히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송자대전 잡록
[24]
3대 대제학. 48세
[25]
'가선 대부 이조 참판 겸 수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신 이일상(李一相)이 지어 올렸다.'
[26]
이일상이 비변사 제조를 겸하고 있던 것이 이경석의 언급으로 드러난다.
링크
[27]
탄핵은 대사간 이정기(李廷夔)가 주도하였다.
[28]
'...여러 신하들이 노여워하는 마음을 품고 좌우로 길목을 막고는 제멋대로 저격(狙擊)하면서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일상의 세력이 이토록까지 엄청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29]
함께 심양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30]
이일상의 친한 친구이다. 이단상이 유계의 아들 유명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링크
[31]
서인이 작성한 현종개수실록은 간단히 사직하여 체차했다고만 기록했지만, 남인이 작성한 현종실록은 이일상에 대한 비난이 심하다. '...일상은 일찍 등제(登第)했으면서도 술 마시기만을 좋아했을 뿐 문장에는 힘을 쏟지 않았으니, 문형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실로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전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시론(時論)에 빌붙어 아첨한 나머지 별안간 천망(薦望)하고 말았으므로 물정(物情)이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재직한 지 4년 만에 체직된 것이다. 감식안(鑑識眼)이 부족하여 사자(士子)들로부터 많은 조롱을 받았는데, 유후의 그런 행동이야말로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의자(議者)들 모두가 비난하였다.'
[32]
이일상의 뒤를 이은 대제학은
김수항이다.
링크
[33]
자세한 내용은
서필원 항목 참조.
[34]
이정구, 이명한의 묘와 함께 있다.
[35]
풍양 조씨. 우의정 역임. 조상우의 손자인 조귀명은 시대의 문장가이나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조상우의 형인 조상정(趙相鼎)의 손자가
조문명,
조현명이다.
[36]
동생 이단상의 제자이자 사위.
[37]
본문은 신도비의 많은 내용을 참고하였다.
다운로드 링크
[38]
'지촌집(芝村集)' 卷之23, 墓誌銘, 백부 청호 부군묘지(伯父靑湖府君墓誌)
[39]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
[40]
민응형은 "......이일상(李一相)이 아뢴 것은 훌륭한 일이라 할 만한데 전하께서는 그가 당여(黨與)를 비호한다고 의심하여 너무 지나치게 배척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갈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41]
윤강은 가벼이 풀어주면 안된다고 했다.
[42]
정뇌경 사건 3년 후에 심양에 끌려갔다.
[43]
공이 화를 당했을 때에 효종(孝宗)이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그 일을 알았다. 임진년(1652, 효종3) 가을에 정유악이 진사(進士)에 장원(壯元)으로 뽑히자, 편전(便殿)으로 인견(引見)하여 이르기를, “네가 이처럼 장성했단 말이냐. 얼굴을 들어 보아라.” 하였다. 정유악이 얼굴을 드니, 상이 이르기를, “너의 모습이 자못 너의 아비와 비슷하구나. 너는 부디 노력해서 이 정도로 그치지 말고 원대한 목표를 이루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리고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이일상(李一相)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의 아비가 나라를 위해 몸을 돌아보지 않다가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구하지 못하였고 나도 힘이 미약해서 구할 수가 없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이어서 호피(虎皮) 1장(張)과 종이(紙) 2권(卷)과 붓(筆) 5지(枝)와 먹(墨) 5홀(笏)을 직접 하사하고, 주식(酒食)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또 이르기를, “고아(孤兒)와 과처(寡妻)의 생계가 필시 어려울 것이니, 해당 조(曹)에서 은(銀) 1백 냥(兩), 미곡 10섬(石), 포(布) 10필(疋)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그 이듬해에 정유악을 특별히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임명하였으나, 정유악이 바야흐로 유업(儒業)에 독실하게 뜻을 두었기 때문에, 단지 숙사(肅謝)만 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정뇌경 묘비명
[44]
조카
[45]
이정구의 집터는 종로구 명륜동 4가 성균관대 총동창회 앞이다.
[46]
참고: 이재정, 洛東契字를 통해 본 조선시대 文人들의 지적 교류, 2013
[47]
이만상은 진사시에서 1등 2위로 합격할 정도로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진사시에서도 시험관들이 모두 장원으로 예상했으나, 시험을 주관한 부친 이명한은 장원을 주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 몸이 이미 상했고, 부친을 극심히 돌보다 몸이 상하여 조졸했다. 참고로 이만상의 후손들은 8상의 후손들 중 가장 번창했다.
[48]
참고: 이명희, 李氏聯珠集 硏究 - 李廷龜 家系의 文學傾向을 中心으로, 2015
[49]
군수 유인성(柳仁聲)의 딸
[50]
김수항의 만사가 전한다.
링크
[51]
사촌 동생 이희조가 묘지명을 남겼다. '지촌집(芝村集)' 卷23 從氏僉正公墓誌銘
[52]
참고: 김형술,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의 시문학 연구, 2009 + 이명희, 月沙(월사) 李廷龜家系(이정구가계)의 文學 傳承 硏究(문학 계승 연구) - 月沙·白洲·靑湖(월사 백주 청호)가 鳴巖(명암)에게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2016
[53]
연안 이씨에 이어 광산 김씨 또한 김만기 - 김진규 - 김양택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김만기의 동생은
김만중이다. 김만중은 이일상의 사촌 동생 이은상의 딸과 혼인하였다.
[54]
3대 대제학 가문의 결합 결과가 이천보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