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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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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숭고국
دولت علیّه ایران
Dowlat-e Elliye-ye Irān
파일:카자르 왕조 국기(1907-1933).svg 파일:카자르 왕조 국장.svg
국기[1] 국장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Map_Iran_1900-en.png
1794년 ~ 1925년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잔드 왕조 팔라비 왕조
아프샤르 왕조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국가 <colbgcolor=#fff,#000>Salamati-ye Shah
(왕의 행진, Marcia Reale)
수도 테헤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1789~1906)
입헌군주제(1906~1925)
국가원수 샤한샤
주요 샤햔샤 아가 모하마드 샤(1789~1797)
파트 알리 샤(1797~1834)
나스레딘 샤(1848~1896)
아흐마드 샤(1909~1925)
언어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민족 페르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종교 이슬람 시아파
통화 토만
면적 1,300,000km2
주요 사건 1794년 건국
1796년 테헤란 천도
1813년 굴리스탄 조약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
1892년 담배 폭동
1906년 입헌혁명→헌법제정
1925년 왕조 교체
현재 국가
[[이란|]][[틀:국기|]][[틀:국기|]]

[[조지아|]][[틀:국기|]][[틀:국기|]]

[[아제르바이잔|]][[틀:국기|]][[틀:국기|]]

[[아르메니아|]][[틀:국기|]][[틀:국기|]]

[[투르크메니스탄|]][[틀:국기|]][[틀:국기|]]

[[아프가니스탄|]][[틀:국기|]][[틀:국기|]]
언어별 명칭
페르시아어 دولت علیّه ایران
(Dowlat-e Elliye-ye Irān)
아제르바이잔어 ممالک محروسه ایران
Məmalik-i Məhrusə-yi İran
영어 Sublime State of Persia, Qajar Iran[2]
러시아어 Пе́рсия (Pérsija)

1. 개요2. 역대 샤한샤3. 상징4. 역사5. 군사6. 문화7. 만연한 부패와 무능8. 평가9. 미녀?10. 대중매체에서 등장

[clearfix]

1. 개요

1794년~ 1925년 사이에 이란에 존속한 튀르크 아제리계 카자르 일족이 세운 페르시아 왕조.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하던 사파비 왕조는 전쟁영웅 나디르 샤 아프샤르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가 암살되고 아프샤르 왕조가 힘을 잃자 잔드 왕조가 세워졌는데, 잔드 왕조 역시 카림 칸 사후 시름시름하며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아가 모하마드 칸이었다. 아제르바이잔계의 카자르 일족 출신이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프샤르 왕조, 잔드 왕조를 모두 꺾고 분열되었던 페르시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으며, 무자비한 정복 전쟁으로 조지아 왕국, 캅카스, 호라산 지방까지 정벌하며 카자르 왕조의 강역을 최대로 넓히는 큰 업적을 남겼다. 페르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테헤란이 수도가 된 것도 이 아가 모하마드 칸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을 이은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무능한 암군들 밖에 없었다.[3] 2대 샤한샤인 파트 알리 샤 카자르 러시아 제국에게 두 번씩이나 전쟁을 연달아 패배하며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등 막대한 영토를 죄다 빼앗겼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맛봤다. 야심차게 추진한 헤라트 원정도 영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날로 축소되었다. 이후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카자르 왕조는 영국 러시아 제국이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의 주요 각축장으로 떠오르며 열강들의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카자르 왕조는 근대화에 실패했다. 개혁주의자 '아미르 카비르' 재상이 서구화를 시도했지만 기득권층에 밀려 실각당했고, 이후 카자르 샤한샤들은 망할 때까지 제대로 된 개혁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려 담배 전매권, 석유 무상 채굴권, 철도 · 전신 부설권, 광산 채굴권, 조세권 등 핵심적인 이권들을 몇 푼의 뇌물을 받고 아낌없이 팔아치우는 데 앞장섰다. 페르시아인들은 중세 시절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왕족들은 성직자들과 결탁해 시위를 억누르고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카자르 왕조의 인기는 수직으로 곤두박질쳤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추락했다.

1906년에는 샤의 호화 생활과 외세 개입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 '입헌 혁명'을 일으켜 의회를 세우고 샤의 권력을 일부 빼앗아왔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누리던 샤와 귀족들이 이에 극렬히 반발했고, 영국 러시아가 페르시아 내부에 대놓고 개입해 나라를 세 조각내면서 페르시아의 혼란은 날로 가중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페르시아가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리는 최악의 상황까지 일어났다. 당시 카자르 왕조의 아흐마드 샤는 이를 해결하기에는 어리고 무능했으며, 입헌 혁명으로 세워진 의회도 유약하고 결단력이 없었다. 카자르 왕조 말기에는 수도 테헤란 일대를 제외하곤 왕실의 영향력도 닿지 않는 거의 지방 정권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레자 샤 팔라비가 1921년 혁명을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팔라비 왕조를 개창하면서 카자르 왕조는 13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팔라비 왕조가 토착 이란계 왕조이므로, 이란 최후의 튀르크계 왕조이기도 하다. 궁정 언어도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어였다.

2. 역대 샤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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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칸 카자르 파트 알리 샤 카자르 모하마드 샤 카자르 나스레딘 샤 카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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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파렛딘 샤 카자르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 아흐마드 샤 카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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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징

카자르 왕조 국기
파일:카자르 왕조 국기.svg 파일:카자르 왕조 국기(1852~1906).svg 파일:카자르 왕조 국기(1907-1933).svg
1848 ~ 1852 1852 ~ 1907 1907 ~ 1925
혼란스러웠던 왕조답게 국기도 매우 여러 차례 바뀌었다. 카자르 왕조는 나스레딘 샤 시기 근대화 개혁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국기가 없었고, 대신 샤들의 개인용 깃발을 사용했다. 카자르 왕조가 당시 썼던 국기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가 남아있는 게 없어서 서양의 우표나 삽화에 의존해서 당시 깃발의 모습을 추정만 하는 수준이다. 초대 샤인 아가 모하마드 칸은 붉은 바탕에 노란 원, 그 원에 칼을 든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을 썼다고 한다. 파트 알리 샤는 3가지의 깃발을 사용했다. 전쟁 시에는 붉은 바탕에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을, 외교 시에는 하얀 바탕에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을, 평시에는 녹색 바탕에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깃발을 썼다.

나스레딘 샤가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대재상 아미르 카비르는 위의 첫 번째 깃발을 공식적인 깃발로 채택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아미르 카비르가 실각하며 4년 정도 밖에 못썼고, 이후 1852년부터 1907년까지는 두 번째의 하얀 바탕에 녹색 테두리가 그려진 깃발을 따로 썼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 내에서 이 국기만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카자르 왕조는 다양한 종류의 깃발을 차용해서 사용했고 종종 이스파한이나 쉬라즈의 요새에는 테헤란과 전혀 다른 종류의 깃발을 게양하기도 할 정도였다. 국기에 큰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페르시아의 특성이었다. 모든 깃발의 비율은 가로:세로가 4:3이었다.

이렇게 피아를 구분하고 영토를 표시할 정도로의 목적으로만 쓰던 국기는 1906년 입헌 혁명이 일어나면서 크게 바뀐다. 1907년 10월 채택된 헌법에 카자르 왕조의 공식적인 국기를 '녹색, 흰색, 붉은색의 바탕과 중앙에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삼색기'로 정의내렸다. 국기의 색이나 사자와 태양의 비율도 정해지지 않았던 이전과는 달리 1910년 9월 4일자 법령에는 사자의 꼬리 모양, 사자가 들고 있는 검의 위치 등 국기의 세부 사항도 정확하게 명시해놓았다. 이로써 전국적에서 모두 통일된 국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군기와 상선기는 색과 비율은 똑같지만 국기에서 사자와 태양만 뺀 모습이었다. 딱 보면 알겠지만 붉은색이 핑크색으로 보일 정도로 색깔이 매우 옅어진 게 특징이다. 이 깃발은 1925년 카자르 왕조가 망하고 팔라비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8년이나 더 쓰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색을 더 짙게 만들고 팔라비 왕조의 왕관을 넣고 비율을 4:7로 재조정하면서 이 국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자르 왕조 국장과 왕관
파일:카자르 왕조 국장.svg 파일:Kiani_Crown_of_Imperial_Iran_(heraldry).svg.png 파일:c41ebf4f8fad37670991fd216a71f059.jpg
국장 국장 속 왕관 키아니 왕관
카자르 왕조의 국장 모티브 자체는 이미 사파비 왕조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다. '사자와 태양'은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는데, 각각 사회의 두 기둥인 국가와 이슬람교를 상징했다. 사파비 왕조 시대에도 가장 대표적인 왕실 문양들 중 하나였지만 공식적인 국장으로 자리잡은건 카자르 왕조 시대 들어서부터였다. 파트 알리 샤는 국장에 카자르의 공식적인 황관인 '키아니 왕관'을 추가했다. 이후 페르시아 궁정을 방문하는 유럽인들을 이 사자와 태양 문장 속에 무언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심오한 뜻이 있는게 아닐까 착각했고, 이후 유럽에 페르시아의 상징으로 널리 퍼지며 페르시아 민족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국장 속에 그려진 왕관은 카자르 왕조의 군주들이 대관식이나 공식적인 행사 때 착용했던 '키아니 왕관'이다. 왕관 자체는 카자르의 초대 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스스로를 옛 사산 왕조의 샤한샤들과 전설적인 '카야니 왕조'[4]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었다. 왕관은 붉은 벨벳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수 천개의 보석들이 세팅됐다. 무려 1,800여 개의 작은 진주들이 붙어있는데 그 직경이 커봤자 7mm도 되지 못할 정도로 세밀하다고. 약 300개의 에메랄드와 1,800여 개의 루비로 장식되었으며 높이 32cm, 너비 19.5cm로 현재 테헤란의 수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4.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자르 왕조/역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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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군사

카자르 왕조의 군사력은 페르시아의 덩치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약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즉위한 1850년대 페르시아의 중앙군은 겨우 3천여 명에 불과했다.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기 위해선 지방 토후들에게 병사들을 꾸어와야 했고 중앙군은 지방군 세력에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당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건 아니었다. 부족 세력이 강한 페르시아에서 군사력은 곧 왕조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아가 모하마드 칸 시절까지만 해도 중앙군의 위력이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이후 암군들이 연달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군사력을 말아먹으면서 갈수록 약화된 것이다. 게다가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같은 서구 열강들도 카자르 왕조의 군사력을 최대한 빼놓는 데에 집중했기 때문에 1800년대 중반 이후의 페르시아 군사력은 보기 처참할 정도였다.

빈약한 페르시아 군대에서 그나마 봐줄만한 게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بریگاد قزاق)'이었다. 1879년 나스레딘 샤의 근대화 개혁 과정에서 탄생한 여단으로, 러시아 제국 카자크 연대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나스레딘 샤는 1878년 러시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깊은 감명을 얻은 카자크 기병대를 페르시아에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나스레딘 샤는 러시아에서 장교를 초빙해 페르시아 병사들을 훈련하도록 시켰고, 이를 페르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여긴 러시아 측에서는 대단히 호의적으로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증강에 도움을 줬다. 어찌나 러시아 장교들이 많았던지 1910년대 후반까지도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총사령관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었을 정도였다.[5]코사크 여단은 페르시아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러시아의 도구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파일:7a44e1e5eb0e8b6bef0d4c26579aaea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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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st-8734-0-54968800-1332798661.jpg
코사크 여단의 지휘 장교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모습 코사크 여단의 고위 장교들
코사크 여단이 탄생하기 전 샤의 친위 부대는 훈련도 안하고 규율도 잡히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에 불과했다. 보다못한 샤는 1879년 400명의 체르케스인과 무슬림 캅카스인들을 가려뽑아 코사크 여단을 창설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이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자 러시아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소극적으로 변했고, 재정 부족으로 병사들에게 급료도 주지 못하는가 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하며 한때는 러시아 장교 1명, 병사 150여 명 수준까지 규모가 추락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교 코사고스키 대령이 러시아로부터 도착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코사고스키 대령은 기존 코사크 여단의 엘리트 의식을 박살내고 규율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규모도 확충하여 제대로 된 그럴듯한 군대를 재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나스레딘 샤가 살해당하자 코사크 여단이 테헤란을 점거, 새로운 샤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의 즉위에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진다.

코사크 여단은 이후 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1903년 코사크 여단의 규모는 러시아 장교 200명, 규모 1,500여 명에 달했다. 기형적일 정도로 러시아인 장교의 비율이 높았는데,[6] 이는 코사크 여단이 사실상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이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은 페르시아 정규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러시아 사령관의 독점적인 지휘를 받았다. 이후 1906년 입헌 혁명이 터지자 코사크 여단은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를 왕좌에 앉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모하마드 알리 샤가 의회를 폐지하려 시도하자 그의 충실한 종이 되어 의회를 포격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민중군이 결국 코사크 여단과 샤를 쫓아내는데 성공하며 약간 기세가 주춤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이 페르시아인들보다는 러시아 제국의 의도에 훨씬 충실한 조직이었다는 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코사크 여단은 페르시아 전역에서 러시아의 대리인으로서 오스만 제국 군대와 전쟁을 벌였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때 러시아 장교들이 대거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러시아 장교들이 코사크 여단에서 빠지자 그 자리는 영국 장교들이 빠르게 꿰차고 들어오면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이 돌아가지는 못했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카자르 왕조가 날로 망해가자 페르시아 내부의 거의 유일한 군사조직인 코사크 여단의 중요성은 급부상했다. 1921년 1월 14일 영국의 아이언사이드 장군이 타브리즈 대대를 이끌던 레자 칸 팔라비에게 여단 전체의 통제권을 맡겼고, 그 직후 레자 칸 팔라비는 3~4,000여 명의 여단을 이끌어 테헤란을 점령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레자 칸 장군은 자신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코사크 여단을 당연히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는 여단을 페르시아 정규군으로 완전히 편입시켰고, 이후 코사크 여단의 힘을 등에 업어 아흐마드 샤 카자르를 폐위시킨 뒤 자신이 직접 로 즉위했다. 카자르 왕조의 입장에서는 개혁의 결과로 만들어진 군대가 결국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자충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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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해군의 유일한 순양함이었던 '페르세폴리스'.

나름 해군도 있었으나 역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빈약했다. 원래 페르시아는 그렇게 해군력이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해군력을 집중육성했던 나디르 샤 시절에는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오만 제국을 패퇴시키기까지 할 정도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 시절들어 샤들이 해군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재정도 후달리자 자연스레 해군은 소멸하기 직전 수준까지 내몰렸다. 그나마 1885년에 독일로부터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와 경비정 '수사'를 사왔지만 이마저도 초라했다. 페르시아 해군의 핵심이었던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의 경우 2개의 돛대와 1개의 연돌. 충각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크지도 않은 소형함이었다. 1904년 페르시아 해군이 소유한 배는 이 두 척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1920년대 들어서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선박들이 페르시아 정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거대한 선박이었으며, 당대 페르시아의 해군력은 국제적으로 봤을때, 그리고 페르시아의 규모에 비하면 비참할 수준으로 약했다.

6. 문화

카자르 왕조가 아무리 썩어빠진 나라였다지만, 일단 페르시아를 하나로 통일하고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기는 했던 덕분에 사파비 왕조의 멸망 이래 정체되어 있었던 페르시아 문화는 다시 한번 발전할 수 있었다. 카자르 왕조의 예술문화는 기본적으로 옛 사파비 왕조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근대화가 진행되고 유럽과의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유럽풍 화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당대 유럽은 렘브란트, 루벤스 같은 대가들이 활동하는 사실주의의 시대였는데, 이런 화풍을 페르시아의 화가들이 그대로 영향받아 그림을 그렸다. 이 덕분에 카자르 왕조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이전 페르시아 미술품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된 게 특징이다. 옛날까지만 해도 변두리 미술 취급받던 유화가 인기를 끌었고 색깔을 깊고 풍부하게 사용하면서 미적 감각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사치를 즐겼던 카자르 왕조의 샤들은 개인의 초상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엄격하고 세련된 예법을 선호했던 2대 샤 파트 알리 샤 카자르는 생전 수많은 초상화들을 그린 걸로 유명하다. 그의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다란 수염과 깊게 표현된 눈, 길쭉한 팔다리를 묘사한 초상화가 가장 유명한데, 이전 페르시아 화풍에 비교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샤의 우상화를 위하여 약간 오리엔탈리즘적인 색채를 집어넣은 게 특징이다. 마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처럼 묘사해서 샤의 권위를 높이려 시도한 것이었다. 파트 알리 샤는 생전 유럽을 단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 유럽에 보내는 걸 좋아했다. 유럽인들에게 보일 것이었으니 미화시켜서 그리는게 당연했다.[7] 샤 뿐만 아니라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을 후원하는 것 빼곤 할일이 없던 귀족들이 막대한 자금을 예술계에 퍼부었고, 이는 페르시아 미술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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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가슴을 드러낸 두 소녀들의 초상화 파트 알리 샤 카자르 귀족 소년소녀의 초상화[8]
카자르 왕조 미술계는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특히 여성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600년대 이슬람 사산 왕조를 멸망시킨 이래 페르시아 미술계는 여성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았다. 여성이 감히 초상화를 그린다는 건 극히 불명예스러운 짓이었으며 여성은 미술에도 마음껏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훨씬 자유로웠던 몽골이 페르시아를 침략하고, 튀르크계 혈통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여성들에 대한 묘사도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특히 카자르 왕조 시대 들어 유럽 문화가 유입되며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들어서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고,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는 등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을 있는대로 묘사한 그림도 나타났다. 특히 카자르 왕조 후기에는 여성의 맨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그림마저 그려졌는데, 이는 일반적인 현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로 당대 카자르 왕조의 사회적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음을 암시한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 사진을 사랑했다. 그는 최초의 페르시아인 사진가들 중 하나였고 처음으로 여성을 찍은 페르시아 사진가이기도 했다. 사진술에 반해버린 샤가 이리저리 사진들을 찍다가 자신의 하렘 후궁들을 찍었던 것이다.[9] 그는 자신의 사진을 직접 찍는 것도 좋아했고 시종들에게도 사진 찍는 법을 베울 것을 장려했다. 처음에는 돈이 많은 귀족층들만, 그리고 남성들만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유럽인들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인들과 여성들의 사진 찍는 빈도가 증가했다. 예전에는 가족사진에도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나오는 수준이었다면 나중에는 어머니와 딸들도 모두 등장했다. 이후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며 1900년대 테헤란에 여학교가 세워졌고, 1909년 사진술을 교과목으로 채택하면서 사진술은 페르시아 사회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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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아함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페르시아 건축 역시 카자르 왕조 시대에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카자르 왕조의 정궁이었던 '골레스탄 궁전'이다. 원래 사파비 왕조 시절에 처음 지어졌고 잔드 왕조 시기에 개조되었다가 카자르 왕조의 공식 왕궁으로 쓰였다. 현재의 모습은 1865년에 개건한 것으로, 카자르 왕조 시대의 페르시아 건축미를 여실없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궁궐이다. 거울과 샹들리에 장식으로 유명한 '브릴리언트 홀', 서구식으로 지어진 '거울의 전당', 바닥에 모자이크가 깔린 '살람 홀', 골레스탄 궁전의 얼굴인 '태양의 전당' 등이 유명하며 하나같이 페르시아식 전통미와 서구식 건축술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다만 팔라비 왕조 시대에 테헤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몇 백년 된 유적 따위가 도시 확장을 방해하면 안된다'라는 이유로 궁전의 상당부분이 철거되어 나간 것은 아쉬운 부분. 400년된 궁전이 철거된 자리에는 50~60년대식의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섰다.

쉬라즈에 자리한 '나시르 올물크 모스크' 역시 유명하다. 1876년 쉬라즈의 토후에 의하여 건축이 시작되어 1888년에 완공된 이래 아직까지도 이슬람 모스크로 멀쩡히 쓰이고 있는 중이다.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하면 중세 성당에 있는 것들만 유명하지만 사실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먼저 쓰인 곳은 7세기 경의 시리아 지방이었다. 페르시아 역시 이 영향을 받아 스테인드글라스를 모스크 건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페르시아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르시'라고 따로 부르며 나시르 올물크 모스크는 페르시아식 스테인드글라스 사용의 정점으로 꼽힌다. 서양식 스테인드글라스와의 차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야기 전달의 목적으로 활용했던 서양과는 다르게, 빛을 알라의 상징으로 보았던 페르시아는 빛 그자체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 모스크의 오르시는 수 백개의 작은 유리조각들을 철틀에 박아서 만들었으며 천장과 바닥, 벽면까지 모두 빼곡한 장식들로 채워넣어 보기 어지러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7. 만연한 부패와 무능

'이 나라는 우리가 나가는 순간 바로 무너질 것입니다.'

1880년대 '나스레딘 샤'의 궁정을 방문한 한 영국인의 보고서 중(中).[11]
카자르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시대는 전통적인 중앙아시아 내륙 무역이 급속히 붕괴되던 시점[12]이었으며, 동시에 수천년간 농사를 지어온 많은 농토들이 염화와 사막화로 버려지면서 경제적으로 오히려 퇴보하던 시점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담배 농사를 열심히 지은 나머지 농업 생산성도 가파르게 감소하고 담배마저 영국으로부터 비싼 값에 수입해야 했다. 당시 서민층은 수입의 3분의 1을 가장의 담배를 구입하는데 썼다.[출처]

또한 당시 페르시아의 유목민족 출신 카자르 왕가를 위시한 지배층들은 대항해시대 이후 대세가 된 해상무역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했으며, 유럽 국가에서 뇌물만 조금 찔러주면 항구 이용권 및 자원 채굴권 등을 공짜나 다름없이 퍼주었다. 이 와중에 페르시아인 농부들은 점점 사막화되는 땅에 담배나 경작하며 지력이나 소모시키는 등, 마치 오늘날의 예멘[14]이나 석유 판매 이권이 극소수 부패 지도층들의 뇌물 및 서구 다국적기업의 이윤으로 분배되는 나이지리아 같은 막장 국가로 치달았다. 카자르 왕조의 역사는 영토 상실과 이권 침탈의 과정으로 점철되었다.
<rowcolor=#fff> 이름 재위 기간 비고
아가 모하마드 칸 1789 ~ 1797 고자. 페르시아를 통일했지만 괴팍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다.
파트 알리 샤 1797 ~ 1834 러시아 제국에게 두 번 연패하며 캅카스 전역을 러시아에 뺏겼다.
모하마드 샤 1834 ~ 1848 영국의 압박으로 해상 노예무역 폐지.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지만 페르시아는 점점 쇠락했다.
나스레딘 샤 1848 ~ 1896 개혁을 시도했지만 중간에 때려쳤다. 이후 50년 간 페르시아의 담배 전매권을 팔아넘겼다.
모자파르 앗딘 샤 1896 ~ 1907 유럽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느라 60년 간 석유를 무제한으로 뽑아쓸 수 있는 권리를 영국에 팔아치웠다.
모하마드 알리 샤 1907 ~ 1909 입헌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민중들에게 쫓겨난 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러시아의 힘을 빌려 왕좌를 되찾으려다 죽었다.
아흐마드 샤 1909 ~ 1925 정신질환 환자였다. 꼭두각시 황제라서 특별히 남긴 업적이 없다.
위의 표만 봐도 왜 카자르 왕조가 현대 이란인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카자르 왕조의 샤들은 개국군주 아가 모하마드 칸을 빼면 모조리 암군들이나 혹은 범군에도 못미치는 군주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보통 일반적인 왕조라면 오스만 제국 셀림 3세, 청나라 광서제처럼 실패했더라도 끝까지 개혁을 시도한 군주가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한데 카자르 왕조는 그런 사람도 없다. 그나마 낫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은 분열된 페르시아를 하나로 통일했다는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듣기 시끄럽다는 이유로 시종들을 죽여버리는 등 성질이 굉장히 괴팍했고, 원정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렸을 정도로 인성파탄자였던 사람이다. 성군이었던 잔드 왕조 최후의 샤인 로트프 알리 칸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도 있다.[15]

전근대 국가였던 만큼 신분제 국가였고 카자르 왕족, 울라마(시아 성직자), 상공업인, 농민, 유목 부족들의 다섯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유럽의 성직자 - 귀족 - 부르주아 - 농민 체제와 유사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중 12이맘파 율법학자와 지주들은 소작농이나 일용직 노동자, 소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줄 때 연이율을 무려 30~75%을 받는 방식으로 신분 이동을 차단시켰다. 이슬람에서 고리대를 강력 금지하는데 어떻게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직접 고리대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명목상으로는 이자가 아니라 빚을 빌린 벌금(...), 빨리 갚지 못한 벌금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합법화시켰다...오늘날 시아파 율법학자들은 물론 이란 교과서에선 성직자들은 고리대금업을 한 적이 없고 야만스런 튀르크계 왕조와 외국인들이 유대인들과 손을 잡고 고리대금업을 해서 농민들이 고통받았다고 써놓았으나, 전통적인 이란의 상공업계는 유대인이 아닌 아르메니아인이었다.[16]

임기가 짧았던 지방관들은 제한된 기간동안 최대한의 수탈을 행하기 위해 갖은 세금을 신설했고, 많은 반란을 초래했다. 일례로 1902년 시라즈 총독은 필수재인 빵을 독점하여 고가로 판매하여 큰 반발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들을 감독해야 할 샤 역시 사치스러운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공명첩을 남발한 결과, 웬만한 자산가들은 술탄, 앗 다울라, 말리크[17] 등의 칭호들을 지니게 되었다. 주로 종교계 인사들이 맡았던 사법부 역시 부패하여, 뇌물을 더 많이 바친 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기 일수였다. 제국의 근간이던 군대 역시 단기 복무라곤 하지만 봉급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처우도 매우 열악했지만 샤의 절대 권력에 저항하지 못했다. 일례로 모자파르 앗딘 샤는 겨울 여행 중 막사에서 잘 때 폭풍으로 천막이 흔들려 잠을 설치자, 병사들에게 줄을 붙잡아 고정하게 했다. 다음날 꿀잠을 자고 일어난 샤는 수십명의 병사들이 막사의 줄을 붙든채 얼어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마저도 나디르 샤에 의해 재건되었던 페르시아 해군은 카자르 샤들의 무관심 속에 사실상 해체되었다.

앞서 언급된 믿기 힘들 정도의 부패와 무능함 속에서 수세기간 이슬람 학문의 중심이던 이란의 지적 유산도 쇠퇴했다. 1905년 수도 테헤란 시민 중 95%가 문맹이었다. 그나마 1848년 즉위한 나세르 앗딘 샤가 유럽 순행과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에 경도되어 제한된 개혁에 나섰지만, 근대화는 정부 조직 정도에 국한되었다. 첫 신식 학교도 1888년에야 프랑스의 지원으로 타브리즈에 세워졌을 정도. 근대화와 동시에 나세르 앗딘 샤는 영국, 러시아 등에게 각종 이권을 양도했으며 프랑스 등에는 치외법권을 주었다. 이에 따라 진정한 혁신을 원하던 이란의 개혁파들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상당히 반외세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1890년에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는데 국민 대부분이 골초인 나라의 왕실이 담배 전매권을 영국 기업에 뇌물 몇 푼 받고 팔아버렸다. 당시 이란인들이 골초이고 말고를 떠나서 담배 전매권은 국가의 주요 세금 수입원 중 하나인데, 위스키랑 바꿔마셨으니 이란 국민들이 뒷목을 잡는 것이 당연했다. 수입 담뱃값 인상에 분노한(...) 이란 민중의 저항으로 담배 전매권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내줬던 몇몇 특혜가 취소되는가 했더니, 영국은 상실한 담배 전매권에 대한 위약금을 요구했고, 위약금을 일시불로 낼 수 없었던 카자르 왕조는 여러 번에 나눠서 이자와 함께 원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는 페르시아 경제가 영국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얼마 안 가서 왕족들이 페르시아 국토 대부분에서 60년 동안 무상으로 석유를 채굴할 권리를 영국에 헐값에 판 뒤 그 돈마저 술 마시고 놀면서 금세 탕진해버렸다(...) 한편 담배 독점에 대한 반영 투쟁 중 시아 울라마가 내린 <금연령>[18]에 민중들이 동참한 모습은 계층을 초월한 개혁의 열망을 드러냈다.

8. 평가

카자르 왕조의 존속 시기가 하필이면 제국주의 식민주의가 절정을 찍던 19세기 20세기인 탓에 어떤 왕조가 버티고 있었더라도 후대인들로부터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타이밍이긴 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카자르 군주들은 지나칠 정도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웠다. 카자르 왕조의 왕공들은 성직자 계급과 결탁해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패가 만연하였으며, 대외 무역에도 실패했고 외세에 연패하며 막대한 영토를 뜯기고 반쯤 식민화되었다.

카자르 왕조는 근대화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였지만 결코 충분하지 못했다. 4대 샤인 나스레딘 샤의 재위기에 대재상 아미르 카비르가 열성적인 현대화 개혁을 추진했고 일정 부분 성과도 보였지만, 이에 반발한 기득권층들이 샤를 꼬드겨 아미르 카비르를 쫓아내면서 미약한 개혁의 움직임마저 스스로 박살내버렸다. 아미르 카비르가 실각한 이후 카자르 왕조는 서구 기술이나 교육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폐쇄적이고 정체된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아미르 카비르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 '다르 올 포눈'은 그가 쫓겨난 직후 신하들의 건의로 문을 닫을 위기까지 몰렸을 정도였고 아미르 카비르가 기껏 마련해놓은 세수 개혁은 세리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뒷구멍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카자르 왕조가 가장 욕을 먹어 마땅한 부분은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아낌없이 이권을 내다 팔았다라는 점이다. 물론 망해가는 나라의 지배층들이 멍청하게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퍼주는 일은 지구 어디에서나 일어났던 일이지만 카자르 왕조의 경우 정도가 많이 심했다. 전국민이 골초인 나라에서 50년 동안의 담배 전매권을 뇌물 몇 푼 받고 영국인에게 팔아치우질 않나, 1900년대에 석유가 발견되자 샤의 유럽 여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60년 간 국토 대부분에서 석유를 무상 독점 채굴할 권리 영국에게 팔아먹는 초대형 삽질을 터뜨리는 등 카자르 왕조의 무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눈에 봐도 중요할 것 같은 이권들을 아무 생각 없이 팔아버리는 왕조였으니 무역권, 광산 채굴권, 철도, 전신 부설권 같은 웬만한 이권들은 있는대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에게 헐값으로 팔아제꼈다. 카자르 왕공들은 이 돈으로 사치품을 수입하고 호화사치를 누리기에만 바빠서 근대화를 할 역량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차라리 군사력이라도 강했으면 몰랐겠지만 카자르 왕조는 군사력도 터무니없이 약했다. 부족 사회 성향이 강했던 페르시아 특성상 중앙 정부의 군사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긴 했지만, 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국고가 텅텅 비어가던 상황이라 있던 군사력도 사라지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850년대 페르시아의 중앙상비군은 3,000여 명이 끝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의 반독립적인 자치군이나 자경단이었다. 해군도 별다를 바 없었다. 옛 나디르 샤 시절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페르시아 해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철덩어리로 전락해 버려졌으며, 카자르 정부는 해군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해군에 별다른 신경을 쏟지 않았다. 그나마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와 경비정 '수사'를 독일에서 사왔지만 숙련병 부족과 경제난으로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퇴역시켰다.[19] 그나마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최초로 창설한 근대식 군대가 '코사크 여단'이었다. 페르시아 내의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약 3천 명의 규모를 유지했다. 그러나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코사크 여단은 오히려 나중에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는(...) 기반이 되어버린다. 마치 청나라 북양함대와 비슷한 느낌.

현대 이란에서 그나마 팔라비 왕조는 이란 내에서도 그때가 현 이란 정부보다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분위기라도 있지, 카자르 왕조 시절은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다. 이란 혁명과 상관없이 모든 쪽에서 까이고 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이란 혁명 이후 국외로 도피, 망명 중인 황족들에 대해 현 이란 정부에서 귀국이나 입국 허용조차 불허하고 있는 팔라비 왕가와는 달리 카자르 구 왕가의 후예들은 이란 정부에게 정치적 탄압을 받지 않으며 이란 국내에서도 시민권자로 생활하고 있다. 어차피 아무도 카자르 왕조의 복귀를 바라지 않으니 이런 자비로운 처우가 가능한 것이다.

여러모로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파탄 국가들을 연상시키는 왕조였지만 서구 열강 입장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본의 아니게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왕조이기도 한데, 1900년대 초반에 영국인 사업가에 의해 발견되어 영국이 카자르 왕조에서 거의 공짜로 뽑아쓴 석유[20]가 영국을 비롯한 협상국의 1차 대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21]

9.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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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여인은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11남 10녀 중 8번째 공주 '자라 카놈 타지 에스-살타네'로, 당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주의 아리따운 미모에 구혼자가 줄을 섰고 그 수는 무려 145명에 이르렀다.

심지어 도도한 공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태우던 구혼자들 중 13명은 공주가 자신을 거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고 한다.

공주의 미모가 너무나도 유명했기에 당대 최고의 유명시인 '아리프 카즈빈'이 그녀를 뮤즈로 삼아 시를 남겼을 정도였다.[22]
카자르 왕조가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유들 중 하나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카자르 미녀의 기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저 공주가 페르시아 최고의 미녀라는 사실은 가짜다. 일단 자라 카놈 공주는 이미 8~9세에 약혼을 맺었다. 8~9세의 어린아이가 미모 덕분에 145명에 달하는 구혼자들의 청혼을 받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23] 1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증거를 찾아보기 힘든 완전한 날조다. 다만 콧수염이 19세기 카자르 왕조에서 미녀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건 맞다. 두꺼운 콧수염이 아니라 솜털처럼 살짝 난 콧수염이 아름답게 여겨졌다는 것인데, 이는 여성이 남성과 닮고 남성이 여성을 닮은 걸 선호했던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었다.[24] 다만 이같은 풍조는 19세기 서양의 미적 기준이 유입되며 자연스레 사라졌다.

참고로 자라 카놈 공주는 페르시아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민주주의 도입, 노예제 폐지를 옹호하는 개척자였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약혼해 13세에 결혼했고, 이후 4명의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고통스러웠는데, 남편의 외도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중 스스로 낙태를 선택할 정도였다. 그녀는 페르시아의 금기를 깨고 이혼한 최초의 왕실 여성이기도 했다. 지적으로도 뛰어난 여성이라 일주일에 한번 집에서 문학 샬롱을 개최했으며 아랍어,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페르시아인들의 빈곤, 대중 교육 부족, 여성 권리 부족을 무능한 샤의 탓이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했으며 끝까지 이란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남겼다. 노예들의 시중 아래 자란 그녀는 노예제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며 노예제도 폐지를 촉구한 선구론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자라 카놈 공주는 현대의 이란인들도 그 막장스런 카자르 왕가 내에서 유일하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이란 내 세속주의자와 개혁파들은 아예 국모로 숭앙하기도 한다. 상술한 카자르 왕조 시기의 독특한 미적 기준과 더불어, 자라 카놈 공주의 영웅적인 행적으로 인해 그녀가 당대 최고의 미녀라고 잘못 알려진 것도 있다[25].

카자르 왕조가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왕조이다 보니 후궁이나 공주들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데, 후궁들이 콧수염이 많이 나 있는 상태에서 면도도 안 하고 찍은 사진이라던지,[26] 고도비만 상태의 공주가 미니스커트를 입어 무다리가 훤히 드러나보이는 상태로 찍은 사진 등이 많다.[27] 이런 사진들은 중동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 그로테스크한 것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종종 이란을 싫어하는 외국인들이 이란인들을 놀리고 약올리는 용도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카자르 왕조 최고의 미인이라던가, 13명의 남자가 청혼했다가 거절당했고 자살당한 사람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근거없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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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oman_holding_a_cup,_Qajar_Iran,_first_quarter_19th_centur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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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의 이상적인 미인도. 날씬하고 얼굴이 작은 일반적인 페르시아식 미인의 모습이다.
당대 미의 기준이 현재와 약간 차이가 있는 건 맞다. 앞서 말했듯이 콧수염이 약간 나있는 것이 아름답게 여겨졌고,[28] 눈썹을 과할 정도로 진하게 그려서 꼭 송충이 눈썹처럼 만들었다. 달덩이처럼 둥근 얼굴, 하얀 피부에 도톰한 입술이 선호되었다. 여성들은 집 안에 갇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기에 살이 찌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문에 비만 역시 현대처럼 지탄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미의 기준이 위의 극단적인 사진이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카자르 하렘에 그려진 이상적인 미인들의 그림들만 봐도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페르시아식 미인이다. 비만이 손가락질 받는 건 아니었지만 페르시아인들도 당연히 날씬한 몸매를 더 좋아했다. 콧수염 정도만 제외하면 어느 정도 현대적인 미의 기준과 엄청나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19세기 카자르 미녀의 기준'이라는 뚱뚱한 공주들의 사진에 그럴듯한 이야기만 갖다붙인 완벽한 날조다.

10. 대중매체에서 등장



[1] 가로:세로 비율이 3:1 정도로 굉장히 길쭉한 것이 특징이다. 1906년 일어난 입헌 혁명 이후 1907년부터 사용했으며, 1925년에 카자르 왕조가 망하고 팔라비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무려 8년 동안이나 더 이란의 국기로 사용됐다. 이후 1933년에 새롭게 국기가 제정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색깔이 연한 것이 특징으로 붉은색이라기보다는 핑크빛에 가까운 것이 눈에 띈다. [2] 한국에서도 '이란 숭고국'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그냥 '카자르 왕조'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듯이 영미권에서도 'Qajar Iran'이라고 부른다. [3] 심지어 아가 모하마드 칸 조차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단기간에 카자르 왕조를 크게 키운 능력자임은 틀림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도 오래 재위하며 왕조를 반석위에 다져놨다면 모를까 겨우 8년만에 암살당했다. [4] 페르시아 구전 설화에서나 전해지는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상의 왕조. 페르시아의 민족 기반을 확립한 전설집 샤나메에 등장하는 왕조이기도 하다. [5]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본국에 불이 떨어지자 그때서야 러시아 장교들이 대거 되돌아가며 페르시아인에게 코사크 여단의 지휘권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때도 완전한 페르시아 군대라 보기는 어려웠다. 러시아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영국이 빠르게 메워버렸기 때문이었다. [6] 일반적인 기병대의 장교:병사 비율은 1:30이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은 그 비율이 1:7.5 정도로 매우 컸다. [7] 하지만 이후 나스레딘 샤 카자르부터는 아예 샤들이 유럽으로 직접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초상화의 중요도가 떨어지며 그림에 대한 황실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8] 저 그림에 등장하는 것처럼 수염을 기르지 않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남성을 따로 '무칸나(مُخَنَّث)'라고 부른다. 동성애자와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며 그저 욕망이 부족하거나 성별 구분이 어려운 남자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카자르 왕조 미술에는 초반에 등장하다가 나중에는 '여성을 닮은 남성'이 아닌 '여성 그자체'에 집중하며 점점 등장 빈도가 줄어든다. [9]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이미 사진술에 심취해있던 샤는 그냥 무시했다. [10] 맨 위 사진은 골레스탄 궁전의 정원, 두번째와 세번째 줄의 사진은 나시르 울물크 모스크다. 골레스탄 궁전의 정원의 경우 나스레딘 샤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장소로, 이 곳에서 조용히 물담배를 피우며 사색하기를 즐겼다. [11] 처음에는 영국 러시아 제국이 최대한 카자르 왕조에게서 많은 이권을 뜯어내고 페르시아의 힘을 빼는 데에 주력했지만, 페르시아가 지나치게 약화되고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자 나중에는 되려 껍데기만 남은 카자르 왕조를 최대한 길고 가늘게 존속시키는 데 신경을 쏟게 된다. 영국이 철수하면 바로 왕조가 엎어져 역성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할 정도로 카자르 왕조의 인식이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12] 무굴 제국에 말을 수출하며 번영하던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무굴 제국의 말 수요가 감소하자 말 그대로 거지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쳐들어가자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중앙아시아 무역의 이득은 전부 러시아 제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출처] : 흡연의 문화사 / 샌더 L 길먼, 저우 쉰 외 지음 [14] 카자르 왕조 시절 페르시아인들은 소득의 3분의 1을 담배 구입에 썼다. 오늘날 예멘에서 까트 중독으로 나라 망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15] 기록에 남은 건 아니지만, 미남으로 소문난 로트프 알리 칸을 강제로 실명시킨 뒤에 병사들에게 윤간을 하게 한 후에 숱한 고문을 가해 죽였다고, 야사에서는 전한다. 주류 역사학계는 이 기록이 아가 모하마드 칸에 대한 증오로 인해 어느 정도 과장되어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도, 그의 포악한 성정으로 미루어서 실제로도 로트프 알리 칸이 야사의 내용에 필적하는 잔혹한 처분을 받았을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16] 이란의 아르메니아인들은 20세기 이란의 경제적 구성과 문화적 구성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사진, 연극, 영화 산업의 선구자였으며 이란의 정치 문제에서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북부 이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6년 이란의 자유주의자와 혁명가들은 이란에 헌법을 요구했고, 1909년에는 왕이 권력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아르메니아 민족인 예프렘 칸은 페르시아 헌법 혁명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학자 말라키아 오르마니안(Malachia Ormanian)은 1911년 아르메니아 교회에 관한 저서에서 약 83,4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페르시아에 거주하며, 그 중 81,000명은 사도 교도이며 2,400명은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라고 추정했다. [17] 앗 다울라 국가를 갱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말리크이라는 뜻이다. [18] 정확히는 <파트와> (《 쿠란》 해석)를 통해 담배가 이슬람에 어긋난다고 선언함 [19] 두 척의 군함 모두 팔라비 왕조 때 제적, 스크랩처리되었다. [20] 그리고 이 석유를 뽑아대던 기업은 훗날 영국의 대표적인 에너지 기업 BP의 전신이 된다. [21] 1차 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따로 유전지대를 갖춘 식민지도 없었을 뿐더러(나이지리아의 유전은 195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는 가격도 비싼데다가 그마저도 독일 제국 해군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문에 충분한 양을 공급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22] 참고로 아리프 카즈빈은 그녀의 연인이었다. [23] 다만 그때 당시 자라 카놈 공주의 사진을 보면 성인 시절보다 훨씬 날씬하긴 하다. [24] 그래서 카자르 왕조의 여성들을 보면 중성적인 미를 강조한다는 의미로 눈썹을 과할 정도로 진하게 그렸다. 반대로 남성들은 날씬하고 여성스러운 용모로 묘사된 경우가 종종 있다. [25] 비슷하게 간호학에 일대혁명을 일으키고,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않고 부상병들을 간호하여 '백의의 천사'로 널리 칭송받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외모만 보면 깡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의 백인 여성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수한 업적때문에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의 미녀라고 왜곡되어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26]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 콧수염이 당시 카자르 미녀들의 표상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27] 이 것은 나스레딘 샤가 사진을 워낙 좋아했던 탓이 크다. 샤가 사진기를 들고 하렘이나 왕실의 여인들을 마구잡이로 찍어대는 걸 좋아해서 공주들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28] 당시 기록을 보면 이것마저도 개인차가 있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인들 중에서는 콧수염이 나있는 여자를 선호하지 않는 남자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