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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11:44:55

니잠 알 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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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zam al-Mulk (1018 ~ 1092)
페르시아어: خواجه نظام الملک طوسی

1. 개요2. 생애3. 종교 정책4. 사망5. 사상6. 어록

1. 개요

셀주크 왕조의 페르시아인 학자. 셀주크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명재상이다. 니잠 알 물크라는 이름은 셀주크 왕조에서 국가의 행정 체계를 구축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붙인 칭호로, '왕국의 질서'라는 뜻이다.

2. 생애

1018년 이란의 투스에서 태어났고 가즈나 왕조의 행정관에 등용되었다. 1063년 이후로 쇠퇴하고 있던 가즈나 왕조를 떠나 셀주크 왕조의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을 섬기기 시작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대부분의 통치를 군사 원정으로 보냈기 때문에 니잠 알물크가 사실상 셀주크 제국의 내정을 관리했다.
교역의 편리를 위해 건설된 수많은 대상 숙소야말로 셀주크 제국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물이다. 셀주크 건축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저 메르브 사락스, 발흐, 니샤푸르로 이어지는 도로 위에 지어진 12개 대상 숙소 가운데 아무 곳이나 방문하면 된다. 셀주크 제국은 동서남북 교역로 중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지나가는 지점에, 급증한 카라반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국영 숙소들을 건설했다. 거대한 라바티 말리크(Rabai-i-Malik)처럼 이 여행 산장 중 일부는 견고한 요새였고 그 외 다른 것들도 너무 커서 성곽도시로 오해받을 정도였다. 이 모두는 니잠 알 물크의 주도 아래 상업과 예술이 수월하게 융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그는 재상으로 재임하면서 도로와 역참을 건설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왕이 선정을 펼치는 것을 도왔다. 또한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그의 치세 하에 메르브와 니샤푸르는 후에 다시 없을 번영을 누렸다.

알프 아르슬란의 사후 3대 술탄인 말리크 샤가 즉위하자 삼촌인 카부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말리크 샤는 카부르트의 군대를 격파한 후에 그를 살려주려고 했으나 니잠 알물크가 후환을 남기면 안 된다고 반대하였으며 결국 카부르트와 그의 아들들은 전부 사형당했다.

이후 니잠 알물크는 말리크 샤를 보좌하면서 제국의 중앙 집권과 투르크인들의 정착, 투르크 지도자들의 권력 억제, 페르시아 관료제의 확립, 수니파와 시아파의 중재, 아바스 칼리프와의 관계 개선 등의 정책을 펼치며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 종교 정책

그는 서쪽의 파티마 왕조 이스마일파 신학교였던 알 아즈하르 대학교의 신학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셀주크 제국이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로부터 새로 정복한 지역의 12이맘파 신학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 각지에 '니자미야'라는 학교를 여럿 세우고 샤피이파의 아슈아리 신학파를 후원하였다. 당시 셀주크 제국의 중심지였던 호라산 일대는 샤피이파 마드하브보다는 하나피파 마드하브가 우세하였으나, 시아파와의 교리 싸움에는 좀 더 보수적인 순니 법학파인 샤피이파가 더 적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가 니자미야를 세우기 이전부터 중동과 중앙아시아 각지에는 웬만한 도시마다 학교들이 널려있었으나, 기존 학교들은 지방 유력자들의 후원을 받았다면 그가 세운 니자미야는 정부로부터 직접 유지금을 받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니자미야에서는 권위있는 수니파 신학자인 알 주와이니와 알 주와아니의 제자인 알 가잘리 등 유명 학자들이 정부가 주는 봉급을 받으며 강연을 진행하고 책을 저술했다. 당시 셀주크 제국의 중심지 호라산 지역에서는 샤피이파와 하나피파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샤피이파의 입지를 안전하게 다지려면 돈을 투자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치세에 샤피이파와 한발리파의 보수 성향 신학자들은 니잠 알 물크의 정책에 환호했던 반면 하나피파는 압바스 칼리파와 손을 잡고 니잠 알 물크의 아슈아리 신학파(Ashari Aqeeda) 옹호 정책을 비판하였다. 11세기 말 1090년대 바그다드에서는 샤피이파와 한발리파들이 하나피파 및 세속주의자들과 갈등 과정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니자미야의 지원을 받는 일군의 남성들이 술집과 매춘부들을 공격하고 체스판을 부수어버렸으며,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자들을 시장에서 쫓아내었다. 니자미야 신학생들은 하나피파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바그다드 시 당국은 니자미야 학생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폭력 행위를 제재하지 않고 넘어갔다. 니잠 알 물크의 사망하고 니자미야로 향하는 재정 지원이 폐쇄되고 나서야 바그다드에서는 종파 간의 패싸움이 진정되었다.

종교 정책 하나만 놓고 보면 니잠 알 물크 그리고 알 가잘리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의 기원이 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잠 알 물크는 엄연히 900년 전 사람이다. 그의 니자미야가 세워질 당시에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에 수도원과 분리된 새로 대학들이 들어서던 시점이었으며,(다시 말해서 당시 유럽의 학문이 아직 수도원에 종속되어 있던 시점이다.) 같은 시대 오마르 하이얌이 잘만 활동하던 것에서 보듯, 니잠 알 물크는 국고를 털어 보수 율법학자들을 지원한 것이지 온건파나 철학자들을 무력으로 강제로 때려잡은 것이 아니었다. 상술한 것처럼 니잠 알 물크는 부국강병책에 혼신을 쏟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어용 신학자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알 가잘리 역시 갓 수피즘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1] 중동으로 이주해오는 상황에서, 보수 율법학자 입장에서 수피즘을 포용함으로서 투르크인들이 중동 이슬람권 각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애초에 근현대 이슬람 극단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와 보편 칼리파 제국의 붕괴, 이슬람 세계의 지정학적 분열과 경제적 저개발, 세속주의 표방하는 족벌 독재 vs 민주주의에 기생하는 극우 종교적 포퓰리즘의 적대적 공존 같은 근현대의 사회문제와 엮여있지, 무슨 900년전 개개인들한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니잠 알 물크나 알 가잘리는 이런저런 실수를 만들었지만 무슬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며, 이런 인물들을 오늘날 탈레반의 기원이 된 아불 알라 마우두디 같은 위선자에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4. 사망

1092년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가는 도중에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 유명한 설로는 술탄의 토사구팽 설이 있지만 실제로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기 때문에 술탄 배후설은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그 외에 이스마일파를 박해했기 때문에 어쌔신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당시 니잠 알물크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중재에 실패했고 결국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말리크 샤의 후계 다툼에 휘말렸다는 설 등이 있으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지막 설이 유력하다. 니잠의 살해자로 지목된 그의 경쟁자 타즈 알 물크 역시 이듬해인 1093년 니잠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1095년, 니잠이 지지하던 바르키야루크가 셀주크 제국의 대술탄으로 즉위한다.

5. 사상

재상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사상가로도 유명한데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중동의 한비자 군주론이라 할 수 있는 시야사트나마가 있다.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의 왕비 등등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기 때문에 저작 시야사트나마에 “여성은 절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았으며, 그의 후원을 받던 알 가잘리 역시 여성은 집 안에서 집안일이나 하며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남긴 바 있다.

6. 어록

세상은 신앙이 없어도 돌아갈 수 있지만 정의가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
순종하는 노예 하나가 아들 300명보다 낫다. 후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지만 전자는 주인의 장수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1]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전통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수피들을 영험한 무당으로 보고 수피즘으로 개종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