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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바이에른 왕국 국왕 이탈리아 왕국 국왕 카를로만 Karlmann |
|
제호 | 카를로만 (Karlmann) |
출생 | 830년 |
사망 |
880년
4월 12일 (향년 50세) 바이에른 |
재위 | 바이에른 왕국의 왕 |
865년 ~ 880년 | |
동프랑크 왕국의 왕 | |
876년 ~ 880년 | |
이탈리아 왕국의 왕 | |
877년 ~ 879년 | |
배우자 |
노르가우의 에르네스트의 딸 (861년 이전 결혼) |
자녀 | 아르눌프 ( 사생아) |
아버지 | 루트비히 2세 |
어머니 |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
형제 | 힐데가르트, 에르멩가르트, 기젤라, 엠마, 루트비히 3세, 버사, 카를 3세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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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왕국, 동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2. 생애
830년경 루트비히 2세와 알트로프 백작 벨프 1세의 딸인 볼프의 엠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 자매로 힐데가르트, 에르멩가르트, 기젤라,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가 있었다. 842년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아 증원군을 이끌고 로타리우스 1세에 대적하는 아버지에게 가세했으며, 848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참여해 슬라브 사령관 프리비나가 바이에른 국경 방어에 기여한 공로로 영지를 수여받는 문서에 서명했다. 856년 카란타니아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858년 동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공공연히 저항하는 모라비아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았다.861년 여러 사령관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그들을 해임하고 추종자들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인사권을 행사한 아들을 질책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빠졌고, 급기야 862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어 모라비아의 라스티슬라프 편에 서서 모든 남동부 지역을 장악하고 바이에른으로 나아가 인강까지 이르렀다. 양자간의 화해와 휴전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863년 루트비히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카를로만을 굴복시키고 구금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억류된 그는 864년 탈출에 성공한 뒤 카란타니아로 돌아와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카를 3세와 루트비히 3세도 가세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865년 바이에른에서 어떠한 간섭을 받지 않고 국왕으로서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고, 작센과 프랑코니아, 튀링겐은 루트비히 3세에게 주어졌고, 슈바벤, 라에티아는 카를 3세에게 주어졌다.
870년 라스티슬라프의 친척인 스바토플루크 1세가 라스티슬라프를 체포한 뒤 동프랑크 왕국에 넘길 때 직접 가서 라스티슬라프의 신변을 확보했다.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푸르트로 끌려간 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루트비히 2세는 평결을 실명형으로 완화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871년 프랑크군이 모라비아로 출격했으나 스바토플루크의 매복에 걸려 몰살당했다. 872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라비아로 쳐들어갔지만 중도에 매복에 걸려 참패했다.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모라비아인들과 평화 협상을 벌이기로 하고, 874년 양자간의 10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875년 이탈리아 국왕 루도비코 2세가 두 딸만 남기고 사망하자, 샤를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루트비히 2세는 아들 카를로만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세우려 했고,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가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샤를 2세가 파비아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해 12월 25일에 교황 요한 8세의 주관하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자, 프리울리 변경백 베렝가리오 1세는 샤를 2세를 지원하는 베르가모 백작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876년 8월 28일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후, 세 아들 카를로만, 루트비히 3세, 카를 3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분할했다. 이때 그는 장남으로서 동프랑크 국왕을 맡아 두 형제를 이끌었다. 877년 6월 샤를 2세가 아내 리실드와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 베르첼리에서 교황 요한 8세와 접견하고 있을 때, 그는 상당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브래너 고개를 통과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보소를 포함한 영주들은 바이킹들의 침략이 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히 이탈리아로 오라는 샤를 2세의 명령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샤를 2세는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귀국하다가 877년 10월 6일 브리데레벵에서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렇게 샤를 2세를 축출한 그는 파비아로 가서 이탈리아 국왕에 추대되었다.
879년,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이탈리아 왕국을 동생 카를 3세에게 넘기고 자신은 독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880년 4월 12일 바이에른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사생아 아르눌프를 정식 아들로 삼으려 했지만 형제 루트비히 3세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실패했고, 결국 루트비히 3세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이후 아르눌프는 카란타니아 변경백으로 근무하다가 루트비히 3세와 카를 3세가 잇따라 사망한 뒤 동프랑크 국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