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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오혁(吳赫) |
자 / 호 | 경숙(景琡) / 손암(巽菴) |
본관 | 해주 오씨[1] |
출생 | 1865년 11월 18일 |
전라도
강진현 대곡면 덕천리 (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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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6년 12월 24일 (향년 51세) |
경기도
경성부 권농동 우거(寓居)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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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62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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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한 인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오원석은 그의 장남이다.
2. 생애
1865년 11월 18일 전라도 강진현 대곡면 덕천리(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에서 아버지 오영환(吳英煥, 1838. 1. 19 ~ 1929. 5. 10)과 어머니 경주 김씨(? ~ ?. 7. 28) 김달련(金達璉)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3]30세 때인 1894년 상경하여 지사들을 사귀었고 1900년 궁내부 주사(主事)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정국이 날로 혼란해지자 공직에서 물러나 나철, 이기(李沂) 등 지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구국의 길을 도모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 나철과 함께 러시아, 일본 양국의 평화 협상 회담이 열리는 미국 포츠머스로 가서 조선의 독립 자주권을 보장받고자 했지만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방해로 미국에 가지 못했다. 그러자 나철, 이기 등과 의논해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글을 보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기호는 나철과 연명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천황에게 각각 장문의 글을 보내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어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급전을 보내 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여 을사조약은 강제 체결되었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다. 오기호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귀국한 뒤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오적 암살단'을 결성한 그는 1906년 3월 25일 나철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여러 곳에서 일제히 거사하여 을사오적을 동시에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이홍래, 강원상(康元相) 등이 사동(寺洞)에서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습격하는데 그치고 많은 참가자들이 곤혹을 겪게 되었다. 이에 오기호는 나인영, 김인식 등과 함께 자현장(自現狀)을 가지고 평리원(平理院)에 나가 자수하여 모든 일은 자신들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소위 모살 혐의로 유배형 5년을 선고받고 지도(智島)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908년 2월 23일 고종 황제의 특사로 징계를 면하여 유배 7개월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한성부로 돌아왔다. 그 뒤 1909년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한 후 대종교 포교에 의한 종교 보국 운동에 진력했다. 그러던 1916년 12월 24일 경기도 경성부 권농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권농동) 우거(寓居)에서 별세했다.[4]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0년 6월 9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