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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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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공방전
Оборона Севастополя и битва за Крым
Оборона Севастополя (1941ー1942)
Die Schlacht um Sewastopol
Siege of Sevastopol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의 일부
파일:attachment/uploadfile/tpqktmxhvhfwlsrurfh.jpg
독일 국방군의 세바스토폴 진격로
날짜
1941년 10월 30일 ~ 1942년 7월 4일
장소
소련,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세바스토폴)
교전국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불가리아 왕국|]]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크로아티아 독립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게오르게 아브라메스쿠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프란체스코 밈벨리
[[틀:깃발|]][[틀:깃발|]][[이반 페트로프|]]
[[틀:깃발|]][[틀:깃발|]][[필리프 옥탸브리스키|
필리프 옥탸브리스키
]]
결과
추축군의 승리
영향
청색 작전 실시
전력 203,000명 118,000명
피해규모 총 사상자 35,866명
[[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 사망/실종 5,786명
- 부상 21,626명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군|]]
- 사망 1,597명
- 부상 6,571명
- 실종 278명
사망 18,000명 이상
- 부상 5,000명
- 포로 95,000명(이중 2/3이 부상)

1. 개요2. 배경
2.1. 크림 전역2.2. 세바스토폴
3. 과정
3.1. 전투 준비3.2. 초기 공격3.3. 케르치 반도 전투3.4. 2차 세바스토폴 공방전-철갑상어 낚시 작전(Unternehmen Störfang)3.5. 공격 시작
3.5.1. 초토화3.5.2. 시가전
4. 결과5. 현재6. 기타

[clearfix]

1. 개요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크림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강력한 요새이자 군항인 세바스토폴 독일군이 공격하여 1941년 10월 30일에서 1942년 7월 4일까지 약 10개월 동안 일어난 전투. '공방전'이 아니라 '포위전'이라고도 한다.

이 전투로 소련군은 3배에 달하는 독일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95,000명의 사상자와 함께 전멸하고 패배했다. 그러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10개월에 달하는 긴 포위는 청색 작전의 지연을 초래했다.

2. 배경

2.1. 크림 전역

파일:attachment/krym.gif

1941 6월 22일,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소련 곳곳으로 신나게 나아갔다. 이런 와중에 소련 남부를 공략하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1941년 9월에 남쪽으로 뻗어 있는 크림 반도를 거의 점령하고 집단군의 측방 호위를 위해 11군을 배치하는데, 11군 사령관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게다가 크림 반도의 입구인 페레코프 지협은 좁디 좁은 데다 그나마도 호수가 밀집되어 대규모 병력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곳의 소련군 입장에선 이곳만 잘 사수하면 무난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계속 공세를 벌이라고 독촉했고, 안 그래도 대숙청으로 전투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소련군은 지협 수비 병력까지 긁어모아 공세를 해보았지만 별 피해도 주지 못한 채 모두 손실당했다. 그 후 독일 11군은 소련군의 병력 공백을 틈타 페레코프 지협을 돌파해 크림 반도로 들어왔고, 반면 소련군은 1941년 11월 중순 즈음엔 100,000여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며 동서로 양분돼 동쪽으로는 케르치 반도에, 서쪽으로는 세바스토폴에 고립된다.

그리고 11월 16일, 케르치 반도가 점령당함으로서 세바스토폴만 홀로 저항하게 된다.

2.2. 세바스토폴

파일:attachment/tpqktmxhvhf.jpg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흑해 함대의 모항이었으며 크림 전쟁 당시 세바스토폴 포위전 때 박살난 과거가 있어서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긴 시간에 걸쳐 요새화가 진행된 상태였다.[1]

3겹에 걸친 튼튼한 방어선과 암반 속에 감추어진 대구경 요새포와 해안포가 존재했는데, 일단 문서로 기록된 것만 따져도 세바스토폴의 소련군은 305㎜ 3연장포탑을 갖춘 막심 고리키 1, 2호 포대[2]를 포함하여 무려 645문의 각종 견인포와 2000여 문 이상의 박격포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서 공방전 직전까지 소련 해군이 주기적으로 대량의 물자와 장비를 운반해왔으며, 오데사에서 격전을 치르다가 후퇴한 정예병력과 장비까지 합쳐져서 공방전 직전의 무장상황은 문서상의 내용을 상당히 상회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서 직접적인 포격지원을 해줄 수 있는 전함들이 정박해있는 요새 중의 요새였다.
파일:attachment/uploadfile/DefenseMap.jpg
세바스토폴의 방어태세.

3. 과정

3.1. 전투 준비

이렇게 10월 말까지 독일군이 세바스토폴로 밀려올 동안 이반 페트로프 소장의 3만 2천 명에 달하는, 서쪽에서 전투경험도 쌓은 육군 독립해안군(Separate Coastal Army)이 오데사에서 해로를 통하여 세바스토폴에 도착했다.

페트로프 장군은 세바스토폴에서 16km에 달하는 곳까지 군인들과 11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동원해 3개의 방어라인을 형성하여 요새화했다. 또한 11월에서 12월 사이, 패잔병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세바스토폴로 흘러들어왔다.

반면 독일군 제11군과 루마니아군은 9월 26일에서 11월 16일까지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드디어 세바스토폴 공격을 준비했으나 11군은 최전선에 있는 군 중에서 가장 약체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루마니아군 자체가 빈약한 점도 있어서 사람 머릿수만 채웠고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았으며, 경무장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중순부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해 그나마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했으며 이는 소련군이 노보리시스크에서 해상보급으로 충실히 무장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12월 17일이 되자 날씨가 맑아졌다.

3.2. 초기 공격

파일:attachment/uploadfile/firstattack.gif

첫번째 공방전은 1941년 10월 30일에 일어났다. 세바스토폴에 가깝게 접근한 독일 육군 제132보병사단의 선봉은 해안포 사격을 받았다. 132사단은 동쪽에서 세바스토폴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428명의 사상자와 함께 물러났다. 만슈타인 장군은 1주일간의 공격 중단을 명했고, 54군단을 비롯해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집결시켰다.

소련군은 캅카스에서 23,000명을, 또 11월 9일 19,894명의 병력과 10대의 T-26 전차와 200문의 박격포 152문의 야포를 해상수송했고, 흑해함대는 항구에 정박해 도시 수비를 준비했다.

그러자 독일 공군은 흑해함대를 공격해서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격침시키고[3] 흑해함대에 어느 정도 의미있는 공격을 했으나, 모스크바 전투 때문에 재배치 되어 크림반도에서 소련군은 다시 공군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독일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으로 인해 병참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남쪽과 중부를 압박하고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4km를 전진했으나 해안포와 함포사격 지원을 받는 소련군의 반격에 다시 밀려나야만 했다.

그 동안 세바스토폴 남쪽의 발라클라바항을 향해 독일 육군 제72사단과 제22보병사단이 진격했으나 경순양함 2척과 전함 1척의 포격지원을 받는 소련군이 이를 막아냈다. 소련군의 반격이 멈추자 만슈타인은 다시 공격 중단을 명했고 독일군은 2,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폭우가 내렸다.

파일:attachment/uploadfile/secondattack.gif

독일군은 상황이 심각해졌다. 포병 사격과 계속된 공격으로 육군 제54군단에서는 15,551명의 병력만이 남았고 굉장히 지쳐있었다. 또한 포병 탄약이 부족했다. 독일군은 이렇게 약해진 병력들을 이미 확보한 케르치 포위망에서 얄타까지의 방어선에 돌렸다.

12월이 되자 독일군은 이 항구가 쉽게 함락될 항구가 아닌 것을 깨닫고 제대로 된 작전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독일 11군은 보유한 야포는 물론 다른 부대에서 빌려가면서까지 1,275문의 각종 화포를 긁어 모았고 관련 군수품을 축적해 놓았다. 그리고 총 6개 보병사단을 동원한 데다 루마니아 육군 1개 여단까지 합세시켰다.

독일군은 일단 세베르나야 만으로의 돌파를 목표로 삼았다. 소련군은 육군 제388소총사단을(11,000명의 보병병력) 12월 7일에서 13일 동안 해상수송했고 또 많은 군수품을 운송했으며 지뢰 지대와 철조망 지대를 구축했다.

12월 17일이 되자 날씨가 맑아졌고 충원병력들을 포함하여 독일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5일간 1,275문의 야포가 방어선을 타격했다. 포격이 끝나자 독일군의 주공인 북안에서 54군단은 세바스토폴 북안에 위치한 벨벡강의 소련 육군 제40기병사단의 방어선 측면을 타격하는데 성공했으나, 소련군은 벨벡 시 북안에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고 독일군 제30군단과 루마니아군은 세바스토폴 남동쪽을 타격하는데 실패했다.

그 사이에 소련군은 육군 제345소총사단의 11,000명의 병력과 해군 제79해군보병여단을 해상으로 수송해서 반격을 개시했고, 방어선은 다시 정비되었다.

3.3. 케르치 반도 전투

파일:attachment/uploadfile/ll-2kerch.jpg
케르치 반도의 Il-2 공격기

1941년 12월 25일에서 1942년 1월 2일까지 세바스토폴 구원과 크림반도 해방을 위해 케르치 반도에 소련군이 상륙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 함대에게는 전용 상륙주정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4] 상륙은 전투함으로부터 보트에 옮겨타서 해안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어 해안으로 질주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겨울에 마침 바람도 거셌고 상륙주정도 없었다. 따라서 부실한 보트에 승선한 상륙군은 표류하다가 물에 빠져 익사, 동사하는 일도 잦았다.

조공인 오푸크 곶에 상륙한 소련군의 병력은 2개 지점은 고작 중대급 병력이, 3개 지점은 대대급 병력이 상륙하고, 1개 지점만이 연대급 병력이 올라선 수준이었다. 거기에 기관총 이외에는 변변한 중화기 상륙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상륙한 소련군은 순식간에 상륙 교두보에 고립되었다.

하지만 주공방향인 페오도시야에서는 독일군의 병력이 별로 없었다. 소련군이 상륙해오더라도 가장 가까운 케르치 방면에 집중될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진짜로 소련군이 올 때는 겨우 2개 건설중대, 1개 곡사포대, 1개 대전차중대, 케르치 반도로 이동 중인 1개 공병대대만 있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페오도시야의 부두에 화물선과 수송선을 직접 접안한 후 병력이 우루루 내리는 등 기습에 성공했다. 소련군은 30일까지 이틀간 2만명의 병력이 상륙에 성공하였으며, 이튿날까지는 제63산악사단, 제157, 236소총사단 등 총 4만명의 병력과 야포 236문, 전차 43대, 트럭 330대를 위시한 전투력을 페오도시야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독일군은 세바스토폴 공략을 사실상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유빙들이 증가하고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소련군은 더 이상의 상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나중에 수송하기로 했던 중화기가 부족해졌다.

상륙했던 소련군 제44군과 제51군이 보급의 어려워지자 전선 돌파를 위한 전력을 축적하기 위해 진격을 멈춘 동안 전선은 안정되었다. 그러자 숨을 돌린 시간을 번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2년 1월 15일, 제11군 소속 3개 보병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반격은 소련군으로서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한번 일격을 얻어맞은 이후 수세로 남아있으리라 예상하고 대대적인 다음 단계의 돌파 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상태에서 당한 공격이었으며, 소련군은 밀려나기 시작해 자캅카스(크림) 전선군은 4개월간의 전투 끝에 총 20여만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기록하고 물러났다. 독일군은 3,397명의 사상자만 기록했다.

그 뒤 독일군은 5월 8일 느시사냥(Trappenjagd) 작전을 개시하여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을 격파하고 5월 20일, 케르치 반도를 완벽히 장악했다. 만슈타인에게 격파당한 자캅카스 전선군은 17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 및 포로와 함께 동쪽으로 물러났다.[5] 이로서 독일군은 케르치 반도에서의 위협을 분쇄하고 세바스토폴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바스토폴 역시 케르치 반도에서의 분전으로 5개월 가까운 시간을 벌면서 더더욱 요새화되었다.

3.4. 2차 세바스토폴 공방전-철갑상어 낚시 작전(Unternehmen Störfang)

3.4.1. 청색 작전

1941년 겨울이 시작되자 전 전선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케르치 상륙도 그 중 하나였다. 패배를 모르던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20만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물론 소련군의 피해는 더욱 컸기 때문에 1942년 여름이 오자 소련군의 반격은 일단 멎었다.

그 동안 독일군은 차기 작전을 논의하며 1941년 탈취하지 못했던 목표인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의 북중부 지역을 노리기로 했으나, 히틀러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남부의 캅카스 지역을 점령하여 소련군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자는 것이었고, 결국 작전이 결정되었다.

소련 남부로 몰려갈 독일군에게는 강력하게 요새화되었으며, 작전에 방해가 될 흑해함대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모항인 세바스토폴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3.4.2. 먹어랏 구스타프

그 전에도 우주방어였던 세바스토폴은 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이후, 시간을 벌었으며 겨울동안 세바스토폴의 방어선은 더욱 더 보강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요새화된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야포 정도로는 세바스토폴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12월 공격에서 증명되었고, 그러자 독일군은 " 커다란 대포 잔뜩 갖다가 뼈빠지게 때려부수면 답이 나오겠지."라는 결론을 내린다.

독일군은 주공인 세바스토폴 북부의 강력한 요새지대 공략을 위해 54군단에 포병을 트럭과 기차에 꽉꽉 태워 집결시키기 시작했고. 여러 부대마다 야포를 꾸어와 굼락 비행장 근처 기차역에 집결시켰고 이미 수송된 야포 중에 남동부 지역에는 그나마 적은 포를 배치했다.

총 화력은 야포 600여 문에 다연장포( 네벨베르퍼)도 100여 문에 달했다. 방사포가 다연장인 점까지 고려하면, 대략 1500여 개에 이르는 포열이 35㎞의 전선에 걸쳐 세바스토폴 요새를 향해 포탄과 로켓탄을 날릴 준비를 갖춘 셈이었다. 즉 평방㎞당 40여 문의 화력.

제306상급포병지휘부(HArko 306)는 크게 2개 포병지휘부 예하로 포병전력들을 세바스토폴로 집결시키기 시작했으며 대략 이러한 전력이었다.

거기에 지휘부 직속 각종 괴물 공성포들이 있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ellung_einer_42cm-Haubitze._Besichtigung_des_K.H.L.15_durch_den_Armee-Kommandanten_im_Kanaltal_bei_Cucco%2C_Slowenien.jpg

제458포병포대 : 체코 스코다제 42㎝ 곡사포
중량 105톤, 포구초속 435㎧, 포탄중량 1,020kg, 최대사정거리 14,600m

파일:external/9f6f0729c00e4ff4ea56346af55a16f65861b6a06e7e2a3e93a07bf42666f68d.jpg

제459포병포대 : 42cm 감마(Gamma) 구포 1문
중량 140톤, 포구초속 420㎧, 포탄중량 1톤, 최대사정거리 14,200m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anger_21_cm_morser_hameenlinna_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koda_305_mm_Model_1911_side.jpg

제624중포병대대 : 21㎝, 30.5㎝ 구포
21cm 구포 : 9문
중량 6.68톤, 포구초속 393㎧, 포탄중량 120kg, 최대사정거리 11,100m

30.5㎝ 구포 : 6문
중량 20.8톤, 포구초속 340㎧, 포탄중량 384kg, 최대사정거리 11,300m

파일:external/gangu.cocolog-nifty.com/carl1.jpg
파일:external/www.aviationgraphic.com/karl-gerat-600mm-thor-kp-007.jpg

제628포병포대 : 60cm 자주박격포 칼 2문 오딘(Odin)과 토르(Thor)
중량 124톤, 포구초속 220㎧, 포탄중량 2,180㎏, 최대사정거리 4,200m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cmBrunoRailwayGunCanberra1939.jpg

제688철도포병포대 : 28.3cm 랑에 브루노(lange Bruno) 열차포 3문
중량 156톤, 포구초속 785㎧, 포탄중량 284㎏, 최대사정거리 27,500m

제741-743포병포대 : 28㎝ 곡사포
제744포병포대 : 28cm 해안포, 도합 14문
포구초속 376㎧, 포탄중량 340kg, 최대사정거리 11,000m

파일:external/www.wehrmacht-history.com/24-cm-haubitze-39-1.jpg

제814포병연대 1대대 : 24cm 곡사포; 3개 포대에 5문의 포
중량 27톤, 포구초속 600㎧, 포탄중량 166kg, 최대사정거리 18,000m

제815포병연대 2,3대대 : 30.5㎝ 구포 11문

파일:external/img09.deviantart.net/spg_by_prinzeugn.jpg

제917포대 : 프랑스제 19.4cm Canon de 194 mle GPF "자주"곡사포 3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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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2철도포병대대 : 80㎝ 구경 Schwerer Gustav(중(重) 구스타프) 열차포

이렇듯 각종 공성포들과 그 외에도 제1차 세계 대전에나 쓰이던 거포, 엄청나게 많은 야포, 방사포들이 세바스토폴 외곽에 배치가 시작되었다.

3.5. 공격 시작

3.5.1. 초토화

6월 2일 독일 공군은 폭격을 시작했다. 제8항공군단은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같은 때 제1훈련항공단은 중폭격기를 동원해 도시 내의 대공포들을 제압했다. 이때 주요 물자 집적소, 잠수함 기지들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데 성공했고, 첫날에만 525톤의 고폭탄을 투하했다. 거기에 조밀하게 형성된 대공포 화망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의 손실은 슈투카 한 대에 불과했다.

또한 소련군의 해상로를 끊기 위해 III./KG 26는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한 척의 유조선을 격침시켰으나 소련군은 2,785명의 병력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독일 공군은 육군이 공격을 시작한 6월 7일까지 3,069소티를 띄워 2,264톤의 고폭탄과 23,800발의 소이탄을 도시 내로 투하했다.

위의 포대들 또한 6월 2일부터 6월 7일까지 포격을 시작했다 105mm 견인곡사포 포대는 벙커를 노렸고, 37mm나 50mm 대전차포는 기관총 진지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을 성공시켰다. 또한 88mm 대공포는 벙커 안에 직사로 포격을 했고 앞서 말한 공성용 구포들과 대형 공성포들도 사격을 개시했다. 특히 무시무시한 열차포들과 자주박격포 칼도 물자 저장고와 항구에 포격을 가했으나, 대부분이 빗나갔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지근탄이 80m이상 떨어졌다.

다만 스탈린, 몰로토프, 막심 고리키 1, 2호라고 독일군이 이름을 붙인 요새화된 진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공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자주박격포 칼 2문 중 토르가 막심 고리키 요새의 2번째 포대를 손상시켰던 것이다. 구스타프도 이 기간 동안 철갑탄 29발을 발사했고, 그 중 6월 6일에 세베르나야 만의 수중 탄약고를 포격해 27m 두께의 천연 암반을 뚫고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근처에 정박 중이던 배까지 한 척 침몰시킨[6] 전과를 올렸으나 사실상 큰 의미는 없었으며 오히려 피해를 주는 데는 공습이 더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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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막심 고리키 요새의 해안포. 원래 흑해 함대 소속 전함 임페라트리사 마리야의 12인치 주포탑 중 하나였지만, 1차대전 중 침몰했기에 주포만 빼내서 해안포로 재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독일 11군은 물자량 중 9%에 달하는 공격을 2일에서 6일까지, 닷새간 퍼부었고 닷새 동안 치열한 공격을 받은 세바스토폴은 초토화된데다 강력했던 요새진지들도 상당히 손상되었고 인명피해도 컸다. 그러나 소련군은 방어선을 지켰다.

3.5.2. 시가전

6월 6일 밤부터, 독일 육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독일 육군 54군단이 진격했고 남쪽에서는 육군 30군단이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청난 공습과 포격으로 인해 얼핏 아무도 살아남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던 세바스토폴에서는 그 때까지 살아남은 대규모 소련군이 숨을 죽이고 남아 있었으므로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가자마자 대규모 시가전이 전개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비록 포격으로 인하여 보급품도 부족하고 지휘체계도 붕괴되었으나, 폐허로 변한 도시 곳곳에 방어진지와 박격포 진지를 재빠르게 구축했고 이런 방어진지에서 저항하는 소련군을 소탕하기 위해 독일군은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1차 방어진지를 돌파하는 데 구스타프가 고폭탄으로 일곱 발의 포격 지원을 해 주는 와중에도 이틀이 걸렸으며 6월 중순까지 이런 소련군의 방어진지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6월 말까지 이런 공방전이 계속되자 독일군은 다시 포격을 시작했고, 소련군의 북쪽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27일, 30군단과 54군단의 연계가 성공했고 28일에는 체르나야 강을 건너 세바스토폴 항 초입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러자 소련군은 체르나야 강 근처의 인케르만(Inkerman)에서 독일군을 끌어들여 자폭하는 극단적인 저항까지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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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소련 선전 기록화. 군항에서 마지막 우라돌격에 나서서 백병전을 펼치는 해군 장병들을 묘사하였다. 또한 전설적인 세바스토폴 가사 2절이 해군 장병들이 독일군에 돌진하여 자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독일군에게 있었고, 30일에는 독일군이 보급기지인 서쪽 항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얼마 남지 않은 방어병력의 후퇴를 허락했다. 남아있는 군함과 잠수함 등 각종 선박을 통해 해상을 통한 후퇴가 시작되었으며, 이 병력의 철수를 호위하던 조직적인 저항군은 결국 7월 3일에 전멸하고 잔여병력들도 7월 9일에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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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방위 메달. 1942년 12월 22일에 제정되어 해당 전투에 참전한 소련 군민 52,540명에게 수여되었다. 에메랄드색 바탕에 파란 줄이 들어간 리본과 수병 병사 각 1명이 새겨진 금색 코인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독일군 역도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참전한 군인들을 위한 전용 훈장을 제작하였다. 자세한 것은 작전 방패 문서 참조.[7]

추축군은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합해 3만 5천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소련군은 9만 5천여명이 포로가 되고 최소한 2만 3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세바스토폴 전투는 독일군이 예상하던 것보다 길어졌으며 독일군 남부집단군이 청색 작전을 개시를 약 8개월 정도 늦추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이런 처절한 전투를 치러 2만 7천여명의 사상자를 입은 11군을 청색 작전에 투입할 수 없었으며 이를 대신하여 독일 제6군을 청색 작전에 투입하게 되는데...

이 전투가 끝나고 시간이 흘러 1944년 세바스토폴은 결국 해방되었고, 1945년 전쟁 종결 직후 영웅 도시의 칭호를 얻은 최초 4개의 도시 중 한 곳이 되었다.[8] 1954년 소련에서는 이 도시를 기리는 뜻에서 전설적인 세바스토폴이라는 군가를 작곡해주었으며 세바스토폴 왈츠라는 노래도 만들어졌다.

5. 현재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패망과 함께 세바스토폴은 그냥 평화로운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 관할로 편입된 뒤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고 도시 일부를 러시아가 해군 기지로 쓰기 위해 계속 임차했는데, 한동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시절 내내 계속 임차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2014년 2월 친러 대통령 야누코비치의 탄핵 및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사태가 일어나고 포로셴코의 반러 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가 이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고 군대를 출병시킨다. 이에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미국도 출병할 것이라며 러시아가 철군하지 않을시 무력·외교적인 보복을 가할 것이라 선언했다.

결국 러시아 해군의 흑해함대 소속 해군보병연대를 필두로 러시아의 본격적 개입이 시작되어 주민투표를 비롯해 크림반도가 러시아 편입을 위한 수순을 밟은 이후 사실상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2014년 크림 위기 참조.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해군은 함정과 육상 장비 및 시설 상당수를 그냥 두고 와야 했으며, 지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이런 소동으로 크림이 러시아에 편입된 뒤에는 세바스토폴의 혈전이 러시아 매체에서 더욱 자주 다뤄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분쟁 같은 거 없던 확실한 자기 나라 영토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서의 혈전에 비하면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면이 없지 않았다고. 위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소련군, 특히 해군(그리고 러시아 해군)에게는 장렬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승리의 날 열병식에서 우크라이나를 의식해 자주 연주되지 않던 전설적인 세바스토폴 역시 2014년을 기점으로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돌직구(...)로 자주 울려퍼지고, 크림 사람들 사이에서도 더 자주 불리고 있다.

6. 기타



[1] 크림 전쟁 당시의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잠깐 소개하면, 1855~56년에 걸쳐 세바스토폴을 포위공격하던 영, 프, 오스만 제국 연합군에 맞서 러시아 해군은 노후 군함을 자침시켜 적 군함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하며 필사적으로 버틴 전투이다. 하지만 전투보단 전염병 및 엉망인 위생환경으로 사망자가 더 엄청났는데 결국 먹을 것이며 무기도 탄약도 바닥난 러시아군이 항복하여 전투가 끝났다. [2] 이 명칭은 독일군이 붙인 것으로 소련측의 공식 명칭은 각각 제30, 35번 해안포대(Башенные батареи)였다. [3] 왜 강조가 되어있냐면, 아르메니아 호가 격침당하면서 무려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군이 아르메니아 호에 가한 공격은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었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아르메니아(병원선) 항목 참조. [4] 그나마 쓸만한 배라곤 러시아 제국 해군 시절부터 굴리던 초창기 동력 바지선형 상륙정 중 하나인 볼린데르급 다목적 상륙정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이들 중 세척은 M3L/M3A1을 각 10량씩 30량+보급트럭까지 싣고 오제레이카 상륙전을 벌이다 해안에서 싹 격파당했다. [5] 이 대참사의 책임자인 레프 메흘리스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정치군인이었으나 다시는 실전에서 지휘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 파블로프처럼 사형당하고도 남을 참패를 당했으니 살아남은 것만으로 감지덕지 해야겠지만. [6] 이에 대해서 이견이 없지는 않은데,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 측에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명중당한 탄약고는 이미 내부의 탄약이 거의 소개되어 심각한 수준의 전력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7] 단 이 경우는 비단 세바스토폴 공방전 뿐만이 아니라 크림 반도 전역의 전투를 통틀어서 수여한 것이다. [8] 참고로 나머지 3개의 도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 포위전 레닌그라드, 오데사 공방전의 오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