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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18:50:34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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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미하일로브나 파블리첸코
Людми́ла Миха́йловна Павличе́нко[1]
Lyudmila Mikhailovna Pavlichenko
파일:류드밀라 파블리첸코.jpg
출생 1916년 7월 12일[2]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바실코프구 벨라야체르코브
(現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벨로세르코프군 빌라체르크바)
사망 1974년 10월 27일 (향년 5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부모 아버지 미하일 이바노비치 벨로프
어머니 옐레나 트로피모브나 벨로바
신장 156cm
복무 소비에트 지상군
1941년 ~ 1946년
소비에트 해군
1946년 ~ 1956년
최종 계급 소위 (소비에트 지상군)
소령 (소비에트 해군 참모)
주요 참전 오데사 전투
세바스토폴 공방전
주요 서훈 레닌훈장 (2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1. 개요2. 생애
2.1. 전쟁 전2.2. 제2차 세계 대전2.3. 전후
3. 기타4.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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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저격수. 결혼 전 본명은 류드밀라 미하일로브나 벨로바(Lyudmila Mikhailovna Belova). 잘 알려진 성씨인 파블리첸코는 사실 첫 번째 남편이였던 알렉세이 파블리첸코의 성씨다. 무척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이혼 후에도 류드밀라는 성씨를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저격수 36명을 포함한 독일군 309명을 사살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이는 여성 저격수로서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이러한 전적 덕분에 Lady Death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여사신, 죽음의 여사, 죽음의 부인/숙녀 정도.

2. 생애

2.1. 전쟁 전

1916년 7월 16일 러시아 제국(지역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빌라체르크바(Bila Tserkva)에서 페트로그라드(Petrograd) 출신의 자물쇠공 미하일 벨로프(Mikhail Belov)와 엘레나 트로피모브나 벨로바(Elena Trofimovna Belova)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회고하길 톰보이였으며 경쟁적인 운동경기에 열심히였다고 한다. 14세 시절에 가족들과 함께 키예프로 이주한 뒤 낮에는 키예프조병창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가사를 도왔는데, 이때 OSOAVIAKhIM(현재 명칭은 DOSAAF)라는 준군사조직 겸 스포츠클럽에 가입하여 사격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의 사격 훈련이 그녀의 미래를 결정짓게 되는 결정적 한 수가 되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블리첸코는 키예프 대학에 다니는 역사학도였다. 그러다 1941년 6월, 독일 소련을 침공하면서 붉은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었다. 대학 출신 인텔리에, 여자로서 전방에 나서서 싸우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군대 측에서는 그녀에게 간호병직을 제의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격 클럽에서 사격 훈련으로 받은 수료증을 꺼내보이며 자신을 소총부대로 배치해주길 희망했다. 결국 군은 그녀의 요구를 수용, 군대 훈련 이후 그녀는 저격수 보직을 받게 되었다.

파블리첸코는 전쟁터로 나가서 처음 2명을 사살한 이래로[3] 오데사 근교에서 187명 사살을 달성하고,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싸우면서 300명 가까이를 저격했다. 하지만 1942년 6월, 박격포에 맞아 부상을 당하게 되어 전장에서 물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후배를 미끼로 쓰던 현역 시절과는 다르게 말년엔 교관으로서 후배 저격수 양성에 힘쓴다.

당시 소련은 2000명의 여자 저격수를 키웠는데, 전쟁이 끝나고 확인을 해보니 그 중 4분의 1에 불과한 500명만 살아남았다. 사실 포로로 잡힐경우 저격수의 경우에는 더 끔찍했다.[4] 비교적 더 안전한 자리로 갈 수도 있었는데도 굳이 자원하여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에 등록한, 거기다 적군 309명을 침착하게 요단강 건너로 보내버린 파블리첸코의 멘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박격포에 의한 부상 이후엔 실전에 나가지는 못했고[5][6] 교관으로서 후배 저격수들을 양성하는 것과 대외적인 홍보를 위해 전국을 다녔다. 이 중에는 미국 백악관에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 영부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를 접견한 일도 있었다.

종전 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2.3. 전후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키예프로 돌아가서 다 못했던 대학 공부를 마저 끝냈고 소련 해군본부의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소련 노병위원회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베트남 전쟁(1955-1975)이 한창인 시기에도 쭉 활동을 하다가 1974년 10월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7]

3. 기타

애용하였던 저격총은 4배율 PE 스코프[8]를 장착한 모신나강 M1891/30.[9] 그녀는 이 총과 함께 309명을 사살하여 영웅으로 거듭났다.

전체 남녀 통합 전체 저격수 전과로는 309명 사살로 23위에 랭크되어 있고 여성 중에서는 1위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첫 전과를 올린 것이 1941년 8월이고 부상으로 전선에서 빠져나온 날이 1942년 6월로 총 10개월 동안 달성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시모 해위해의 100일동안 542명을 사살한 기록 다음으로 많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부상을 입지 않고 종전까지 쭉 활동했다면 독일군 장성 여러 명 뒷목잡게 했을 거라는 말도 나온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결혼을 3번 했다. # # #[10] 첫번째 결혼은 그녀가 16세 때 알렉세이 파블리첸코(Alexey Pavlichenko, 1916?~1950?)[11]라는 남자와 하였고, 아들 1명[12]을 두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녀를 버렸고, 아들은 류드밀라의 부모가 키웠다.

두 번째 결혼은 1942년에 친구이자 동료 저격수였던 레오니드 키첸코(Leonid Kitsenko, 1915~1942)와 했지만, 그는 2달 뒤에 독일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사망했다. 전투하면서 생긴 전우로서의 정과 서로의 애정이 무척 각별했던 만큼 류드밀라는 그의 죽음에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3번째 결혼은 10살 연상인 콘스탄틴 셰벨료프(Konstantin Shevelyov, 1906~1963)와 했는데, 결혼할 당시 둘 다 나이가 많아서 자식은 두지 않았다.

전쟁으로 겪은 수많은 트라우마와 첫번째 남편으로 인해 생긴 상처, 사랑하던 사람들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강고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생 우울증과 PTSD,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이는 아마도 그녀의 단명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4. 미디어

4.1. 영화

영화 '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 영웅과 전략, 패배의 절망과 승리의 기쁨이 아닌 전쟁으로 인한 소중한 것들의 파괴와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본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흘러간다. 다만 작품 내에서는 소련이 소총병으로 강제 징집을 하는데 본인은 간호사로 징집되는 걸 거부하고 소총병으로 전장에 나간 게 현실과 차이점이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도 주인공인 바실리 자이체프와 함께 활동하는 류드밀라라는 이름의 여성 저격수가 나오는데 엄청난 전공을 세우고 종전 후에도 살아남아서 남은 삶을 이어간 실존 인물과는 달리 제대로 활약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바실리 자이체프의 만류에도 루프트바페의 폭격에 겁을 먹고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다가 쾨닝스에게 사살 당한다. 이름과 여성 저격수라는 점은 같지만 약간의 모티브가 되었을 뿐 실존 인물을 묘사한 캐릭터는 아니다.

4.2. 만화 및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DARKER THAN BLACK -유성의 제미니-의 여주인공 스오우 파블리첸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는데, 다만 모신나강을 사용하던 류드밀라와 달리 스오우 파블리첸코는 PTRD-41을 사용한다.

4.3. 게임

4.3.1. 로드 투 발러:월드워2

소련군 영웅카드인 '리디야 리발코'로 등장한다.

4.3.2. 도미네이션즈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레이디 데스(도미네이션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3.3. 엘라의 2048

파블리첸코의 DNA를 복제한 클론 소녀 니콜이 등장한다. 말 한마디 없이 저격을 수행하는 전장의 사신이라는 듯.

4.3.4. 콜 오브 듀티 시리즈

4.3.5. 소녀전선

소녀전선의 대형 이벤트 세로변형의 주역중 한 명인 '류드밀라 파블리첸코'의 모티브가 되었다.

실제 류드밀라 파블리첸코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인 "고통은 너무나도 끈질겨, 참을성 있게 나아가는 달팽이와 같고, 기쁨은 너무나도 짧아, 가을의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꼬리와 같구나"라는 문구 또한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등장했다.

4.4. 소설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본 소설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에 등장한다.

4.5. 기타

4.5.1. Miss Pavlichenko

포크송 가수 우디 거스리의 노래 Miss Pavlichenko의 주인공이다. 가사 속 "300명의 파시스트가 당신의 총에 쓰러졌다네." 등으로 표현됐다. 이 곡은 위에서 언급된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1] 혼전 성은 벨로바 (Бело́ва) [2] 율리우스력 기준 6월 29일 [3]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블리첸코는 처음 전투에 나갈 때는 무기 부족으로 수류탄으로만 무장했었다. 그러다가 1941년 8월 8일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동료가 그녀에게 모신나강을 주었고, 이를 들고 앞서 언급된 2명을 사살했다. 이후로 사격술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저격수로 전투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파블리첸코는 나중에 이 사건을 '포화의 세례'(Baptism of Fire, 병사가 처음으로 전장에 나가는 순간)라고 불렀다. [4] 이는 저격수에 대한 증오감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비단 독일군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군대나 매한가지였다. 이 때문에 저격수들은 혹시나 포로로 잡히게 될 시에는 저격수로서 받은 장비를 모두 숨기거나 파기하고 평범한 소총수로 위장했다. 소련 여군 저격수의 경우에는 잡혔을 때 남성들보다 더 끔찍한 수모를 당할 것은 기정사실이였기에 이를 대비하여 기존에 지급 받는 수류탄 말고 따로 자폭용 수류탄을 한 개 더 지급받기도 했다. [5] 소련 입장에서는 전쟁 영웅인 그녀가 잘못해서 독일군에게 죽는다면 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실전에서 제외한 상태로 홍보 및 교관으로서의 후진 양성 쪽으로 돌리는 게 최선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대표적으로 225킬을 달성했던 '토끼' 바실리 자이체프도 부상을 입은 이후에는 교관으로서 후배 ' 토끼'들을 양성하는 데 더 매진했다. [6] 이는 독일이나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전도구로도 톡톡히 활약한 에르빈 롬멜은 동부전선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후방의 서부전선으로 발령났고, 명예훈장 수훈자인 존 바실론은 아예 전시채권 홍보로 돌렸으나 본인이 자원해서 부트캠프로 발령 후, 이오지마 상륙전에 참가해 전사한다. 미국은 전투기의 에이스들도 전선에 계속 남기는 것보다는 후방으로 배치하여 신참 파일럿을 교육하는 데 활용했고 이는 미군의 새내기 조종사들의 실력을 상향평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7]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했는데, 이유는 밑에도 적혀있지만 PTSD로 인한 알코올 중독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녀도 한 명의 인간이었던 셈. [8] PU가 사용되기 전에 쓰인 4배율 조준경이다. [9] 흔히들 SVT-40을 썼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모신나강을 썼다. # 이렇게 잘못 알려진 이유로는 그녀가 전선에서 물러나고 교관으로 활약할 때 SVT-40을 들고 찍은 사진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SVT-40은 소련의 여성 저격수들 사이에서 노리쇠 후퇴를 할 필요 없이 바로 재조준을 할수 있다는 점 덕에 널리 쓰였다. [10] 알려진 정보가 각각 달라서 무엇이 제일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11] 파블리첸코라는 성씨는 이 남자와 결혼한 이후에 바뀐 것. 아내와 반대로 정보가 알려진 것이 전혀 없어서 이 남자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알려지는 정보가 다르다. 류드밀라 또래의 남학생, 의대생, 의사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여기에선 기록이 있었다고 하는데 류드밀라 또래의 1916년생이며 1950년 이전 전쟁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여하튼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내와 자기 자식까지 버리고 떠났다. 기억이 좋게 남지 않아서인지 류드밀라는 알렉세이와의 결혼생활에 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또 무슨 감정이 남아있었는지 성씨는 이혼 후에도 그대로 유지했다. 이 스캔들 때문에 류드밀라의 가족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이사를 가야 했다. [12] 이름은 로스티슬라프 파블리첸코(Rostyslav Pavlichenko, 1932~2007). 류드밀라가 무려 16살에 낳은 아들이다(물론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그것도 아직 발전 전이라 낙후됐던 소련의 사정을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류드밀라는 이후 대학까지 진학한 인텔리였다). 아버지는 첫 번째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세이와 류드밀라 양쪽 둘 다 어리고 철없던 나이에 연애를 하다가 2달 후 실수로 생긴 자식이었는데, 이로 인해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알렉세이는 그와 아내를 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로스티슬라프는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류드밀라와 그의 부모님이 양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