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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4호 |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增石塔 |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2길 37 (술정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시설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건축시기 | 통일신라시대 |
|
<colbgcolor=#31528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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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述亭里東三層石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에 위치한 통일신라기의 삼층 석탑.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2. 역사
당초 이 석탑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정보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같은 창녕읍 내 교리에 탑금당치성문기비(인양사조성비, 보물 제227호)에 언급된 대곡사(大谷寺)나 인양사(仁陽寺)의 탑으로 추정되었으나, 2008년 송림사(松林寺)명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절의 이름이 송림사였음을 알 수 있다.창녕권은 신라 진흥왕조 가야가 신라에 귀속됨에 따라 이 지역은 정치/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창녕 지역에 왕실의 다양한 후원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사찰 건립이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그 조형미 또한 뛰어나다는 점에 있어서, 본 석탑이 세워진 곳은 왕실 사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5년도 문화재청의 해체공사 때 3층 탑신석 상단의 방형(方形) 사리공에서 동제잔형사리기, 황색유리사리병 등을 비롯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3. 특징
2중기단 위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기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상륜부재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옥개의 각 모서리에 풍탁공이 남아 있다. 과거 풍경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권에서 벗어난 탑 중에서는 그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비례미 또한 뛰어나다. 혹자는 이 탑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에 비견시킬 정도이니...
4. 기타
탑의 이름이 술정리 동 삼층석탑인 관계로 보물 제520호인 술정리 서 삼층석탑과 종종 비교되는데, 사실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동 삼층석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탑으로, 서로 5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고 그저 같은 술정리 안에 위치해 있어 구분을 위해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 뿐이다. 서탑이 동탑에 비해 그 수법이 다소 뒤떨어지는 건 맞지만, 동탑이 워낙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지라 서탑을 엄청난 졸작으로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놀랍게도 00년대 중반까지는 탑을 강아지 높이만한 철제 울타리로만 둘러싸고, 경비인력이 머무는 집 한 채만 있어 창녕읍 내의 초중학생들이 하교 후에 탑을 올라타고 노는[1], 첨성대에 사람이 올라타는 60~70년대 수학여행 사진을 재현하는 듯한 황당한 광경도 볼 수 있었다. 현재는 국보에 맞게 재정비되었으며, 술정리 서 삼층석탑도 동 삼층석탑 재정비 덕을 많이 봤다.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 두산백과 :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6. 국보 제34호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군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2008년의 기사인데 '제법 너른 기단은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인지 번질거리는데 진흙빛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고, 패인 홈도 곳곳에 보인다.' 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창녕읍 내의 꼬마, 초중고생, 취객들이 탑에 벌인 기행은 그냥 탑 기단에 앉아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사에서도 '한때 동탑의 관리가 엉망진창이었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탑 위에 올라가는 것은 예사였고, 창녕 시장이 가까워 어른들의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가 몰려다니며 똥을 무더기로 싸놓을 정도였다. 국보 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라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