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역인 " 한반도의 지리적 단점에 대한 책임은 한반도에 자리잡은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에게 있다" 라는 인터넷 밈. 즉 한반도는 지리적 입지가 좋지 않다(=터가 안 좋다)는 것이다.사실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조선의 영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로 현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 남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단군이 언급되는 이유는 기록된 한국사의 군주 중 단군왕검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단군이 한국사 한민족의 시조로서 국가의 터를 잡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현재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인구 집단이 터를 잘못 잡았다" 라는 주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전제를 바탕에 둔 관점이다. '한민족 국가의 시조 단군'이라는 민족국가로서의 관념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개념 자체를 배제 혹은 부정한다면 '단군'은 커녕 '단군에게 책임을 물' 주체인 한민족조차 상정할 수 없을 것이다. 흔히 한민족을 "단군의 후손" 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태어나기 전 주어진 입지와 배경이 자기 인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 단위 수저 계급론이라 볼 수도 있다. "단군이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게임 중 가장 유명한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용어에 빗대어 단군이 처음으로 자리잡은 것을 두고 '스타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주장
2.1. 인근 지역에 비해 적은 한반도의 부족한 생산력과 자원
우선 한반도 자체가 산지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나 자원이 풍부한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다.2.1.1. 농업
농업의 경우 상식적인 선에서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세계적으로 불모지라는 것은 물론 아니고, 한국의 주된 비교 대상이 되는 동아시아 이웃국, 아메리카 대륙 등의 국가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특히나 옆에 있는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면 생산력의 열세가 확연하다.- 중국: 중국 대륙은 농토의 면적이 한반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대륙이다. 특히 농경 생산력이 월등한 강남 지역 개발이 마무리된 당나라, 송나라 이후부터는 한 지역의 단위면적당 생산력도 한반도를 압도한다. 괜히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황하 문명이 있는게 아니다.
- 일본: 일본 열도는 전체적으로 한반도보다 위도가 낮고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난한 편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삼남보다도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 더 넓고 농토 자체도 많다. 이런 이유로 전근대 인구 추정에서도 일본 열도의 인구가 더 높게 추정된다. 이후 간토평야가 생긴다.
-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아메리카 대륙은 기후도 아시아에 비해 덥지 않고 평야가 많기에 대규모 곡창지대로 활용 할 수 있으므로 대량 생산을 해서 싸게 공급이 가능하다. #
그나마 쌀과 김 같은 경우는 자급률이 상당해서[1] 미국과 일본에 김밥을 수출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만, 반대로 밀[2]과 옥수수[3], 콩같은 잡곡이나 커피, 카카오 등 열대기후[4]에서 자라는 작물 등은 자급률이 매우 낮다.
이에 따라 한국의 현 식량 자급률은 50% 미만에 불과하다. 해외에서 식량을 구매할 만한 산업력을 갖췄기에 더 생산성이 좋은 곳에서 구매하는 것이기는 하지만[5] 세계적으로 두드러지는 식량 생산성을 가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2.1.2. 지하자원
자원도 부족하다. 그나마 나오는 자원들은 광물의 표본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종류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품질이 좋은 편이 못 되거나, 매장량이 적거나, 채산성이 부족해 내수를 충당하기에도 힘든 수준이다. 예를 들어 석탄은 나오긴 나오는데 막상 산업에 필요한 역청탄은 전무하고, 텅스텐[6]이나 희토류도 있지만 중국산이 압도적으로 싸다 보니 한국에서 안 캐는 케이스다.[7] 심지어 동해 앞바다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도 나온 적 있지만 이 역시 매장량이 매우 부족하다. 그나마 예외가 되는 것이 석회석 정도뿐이다. 결국 자체적으로 구할 수 없는 자원들을 구하려고 막대한 돈을 들여서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형편이다. 때문에 지하자원의 자급률은 10% 정도에 불과하다.2.2. 불균형한 기후
편서풍으로 인해 대륙 동안은 대륙 서안에 비해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로 생활 여건이 좀 더 열악하다. 특히나 북대서양 해류의 도움을 받는 유럽과 비교해보면 기간이 긴 것은 아니지만 시베리아급으로 추워지는 한반도의 북단은 유럽에서 매우 온난한 이탈리아와 위도가 비슷하다. 그나마 아래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의 생산량은 중간 그 이상이어서 어느 정도 인구 규모는 되는데, 그 때문에 한반도 ~ 만주 일대는 인구 밀집 지역 가운데 제일 추운 지역 중 하나이다.때문에 미합중국 해병대 37대 사령관 로버트 넬러가 '대한민국은 온갖 기후가 다 있어서 훈련하기 좋다'고 한 말이 떠돌기도 하고, 실제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무더위만 경험하고 겨울 준비를 하지 않아 장진호 전투에서 크게 고전하기도 했다. 35도 가까운 찜통더위와 -10도까지 떨어지는 동장군을 같은 지역, 그것도 어디 산간오지가 아니라 시민이 다수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생활에 좋지 않은 부분이다. 사실 지구에서 35도 이상의 폭염, 영하 10도 미만의 혹한 자체는 흔한데,[8] 이게 동시에 나타날 정도로 연교차가 큰 인구밀집 지역은 한국(한반도 중부)과 중국(서부, 베이징), 미국( 시카고, 네브레스카) 정도로 드문 편이다. 앞의 예에도 하얼빈은 지구 온난화 이전에 25도 이상의 기온이 잘 나타나지 않았고,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남부는 영하 날씨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분이 본의 아니게 이점이 되기도 하는데, 왜냐 하면 한국에서 쓸 물건은 추운 곳에서도 더운 곳에서도 모두 작동해야 하기에 기술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내용이 계절 문서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사계절이 뚜렷하다"라는 게 그다지 좋은 점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밖의 기후 문제는 다음과 같다.
-
강우량
강우량이 여름에만 치중되어 있어서 여름철에는 홍수에 취약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화재와 가뭄에 취약하다. 게다가 강우량이 뒤죽박죽이어서 수력 발전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
미세먼지
2020년 이후로는 그나마 덜 부각되지만, 중국 동북부의 사막 지대와 인접해 있어서 황사까지 날아온다. 게다가 중국 동북부에는 다수의 석탄 화력 발전소까지 존재해서 발전소에서 생기는 대기 오염 물질들까지 날아온다.
2.3.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
2.3.1. 교통 문제
반도의 교통상의 우위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일본과 중국과 둘러싸인 형국도 중국이 일본으로 진출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만 그렇지, 한반도 주민으로서는 중개무역 같은 걸로 둘 사이에서 이득을 본 역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양쪽에서 지나가겠다고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기 일쑤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임진왜란 등)게다가 일본과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 외부와의 교류로부터 조선을 틀어막는 병풍처럼 기능했다. 일례로 유럽에서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던 대항해시대에 일본은 일찍이 16세기에 가톨릭 전파로 인한 마찰을 겪었지만 조선에는 조선이 쇄국하고 말고를 떠나서 애초에 그런 선교사가 오질 않았다. 그나마 왔다는 서양인인 벨테브레나 헨드릭 하멜 같은 사람도 조선에 오려고 해서 온 게 아니라 표류해서 온 것이었다.
그나마도 중화권 중원 세계가 역사의 주도권을 계속 쥐어나갔다면 중국과 가장 인접한 변방의 이웃나라 겸 동아시아 문명의 선진국으로서 안정적인 자리를 계속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9] 근대 구한말 서구의 우위가 확고해지고 서구와 빠르게 접촉해야지만 사회 개혁을 촉구할 수 있었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런 고립된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다. 조선과 일본을 가른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도 어쩌면 이것이다. 유교 성리학적 경직된 이념과 체제, 화이관이나 상업 경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서구권과 만날 기회 자체가 절망적으로 적었다. 이런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확실한 시장 가치를 증명해야 했지만, 앞서 나열한 수많은 악조건을 뚫고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속적인 북방의 위협으로 인해 그나마의 육로 활용도 침략을 우려하여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육로를 정비할 경우 우수한 기병 전력을 보유한 북방 민족이나 한족 왕조가 침입했을 때 주요 도시가 바로 함락당할 위험이 컸고, 우려에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털린 적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에서 도로 확충에 힘쓰기보다 강과 해안 운송에 집중한 것은 선박의 우월한 수송 능력뿐 아니라 이러한 국방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통적 열세는 해양 운송이 활발해진 대한민국 시대에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10] 육로는 여전히 최악의 폐쇄국가 북한의 존재로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의 섬이나 다름없는 지경이다. 현재 국방부에서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의 육성에도 신경쓰는 이유가 유일한 보급로가 바다밖에 없기 때문이다.
2.3.2. 적성국 및 강대국들의 위협
현재 한반도의 북쪽에는 현대판 나치 독일 또는 민주 캄푸치아로 불리는 북한이 있고, 거기에다 북한만 있는 게 아니라 서쪽에는 중국이, 동쪽에는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이 존재하며, 특히 중국은 북한의 후견국 노릇을 하며 한국의 안보를 직간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나마 일본은 명목상으로는 한국과 같은 친서방 민주국가여서 미국의 중재 아래 우방으로 엮이지만, 실상은 역사적/정치적인 이유로 갈등의 골이 워낙 깊은 관계인지라 서로에게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이다. 게다가 비슷하게 러시아라는 강국으로부터 위협받는 폴란드나 핀란드와 달리 유사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접한 동맹국[11]도 없어서 더욱 불리하다.이는 과거에도 다르지 않아서 과거부터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계, 퉁구스계 등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 끼어 있어 항상 양면전선 혹은 그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12] 중국-만주 쪽에는 압록강과 개마고원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고, 일본은 바다가 막고 있다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쳐들어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잘만 쳐들어 왔다.[13] 되려 반도의 지리적 입지상 교통의 요충지였던 탓에 수많은 침략에 시달렸다. 이렇게 주변에 나라를 많이 낀데다가 요충지이고, 규모조차도 어중간하거나 작은 나라들은 주변국들 등쌀 때문에 강국으로 성장하기 힘들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당하기 때문이다.[14]
다만 이것은 민족 정체성의 유지 측면에서[15] 반드시 악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다른 국가들이 다수 가지고 있는 분리주의 문제가 전무한 이유가 바로 적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뭉쳐도 살까 말까 하는 마당에 분리주의 세력이 발생해서 여러 세력으로 분열까지 되면 결국 모두가 공멸한다는 위기 의식이 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민족의 성립은 시발점은 삼국통일에 있으나 실제 민족성의 확립은 고려 시대 북방민족에 대항하면서 생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덧붙여 외세의 침입으로 지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에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들이 중앙 정부에 맞설 정도의 세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2.4. 결론
결국 이러한 형세가 이어져 한반도는 인구와 자원이 모두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지형적 단점까지 더해져 한반도는 개화까지 한참 늦게 된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끝내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을 겪었고, 그 잔재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한민국도 한반도 주변 4대 강국, 그 중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16]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단군 책임론의 내용이다.3. 반론
3.1. 중간은 가는 농업 생산량
한반도의 농업 생산량은 중국의 사천 분지,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나, 우크라이나의 초르노젬, 북미의 대평원, 남미의 팜파스 같은 기름이 철철 넘쳐흐르는 땅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사람이 사는 땅들 가운데 평균은 간다. 평야 지역이 많으며 바다와 인접해 해산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었던 서부와 남부 지역은 전근대에도 그럭저럭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먹고 살만한 땅이었다.산지가 많은 건 교통에 악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산지에서 강이 흘러내려와 평야를 이루는 지형 자체는 일반적인 평야보다 생산성이 높다. 프리츠 하버가 20세기 초에 질소를 잡아 두는 화학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인류는 농사를 지으면 지력을 회복시키고자 땅을 휴식시켜야 했다. 매년 쉬지 않고 농사가 가능한 건 나일강 하류, 황하 하류처럼 수시로 강이 상류에서 토양과 미네랄을 가져와 지력을 회복시켜주는 곳뿐이었다.[17] 그런데 한국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나일강이나 황하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에 해당되고, 모든 강이 산에서 흘러나오므로 수량도 안정적이다. 또 한반도 같은 온대기후면서 한번에 비 쏟아지는 지역은 사막화가 잘 되지 않는다. 쌓인 염류와 토양 독성이 금방금방 다 씻겨내려가서 토양 염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반도는 아주 비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척박하지도 않은 것이다.[18]
한반도 중남부가 일단은 인구를 부양하기 좋은 작물인 벼 재배가 가능한 지역이었다는 점도 한반도가 높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요인이다.[19] 물론 한반도가 고려 후기에 도입된 이앙법의 본격적 보급이 보나 저수지 등의 수리시설이 대거 확충된 조선 후기에나 시작됐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봄과 겨울에 강수량이 부족하고 서리가 자주 내려 열대 저습성 작물인 벼의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지역이지만,[20] 일조량이 많고 강우가 장마철에 집중되어 논농사가 가능은 한 지역이다. 벼가 열대성 작물이다보니 강수량이 고른 편이고 기후가 상대적으로 온화해 한반도보다 논농사에 유리한 일본이나 이기작, 삼기작도 하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한반도의 생산량이 초라해보일 수 있지만[21], 오히려 여름에 집중적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논농사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해충이나 수인성 전염병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런 건 겨울철 추위가 모두 자동으로 처리해 주기 때문이다.[22] 결국 한반도 자체의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 벼를 기르면서도 문제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조건 덕분에 조선 후기 한반도에는 적어도 1,600만명 정도는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정도면 동시기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당장 비옥한 영토로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딸리지 않았고 전근대 유럽의 인구 대국으로 한반도보다 훨씬 컸던 프랑스 왕국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와 비슷한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추정 인구가 2,460만명이었으니 말이다. 한반도는 한민족이 저 정도 인구를 가지고도 생업을 영위하며 당시 동북아의 지역강국으로써 소 기르면서 소가죽을 수출할 정도의 인구 부양력은 제공해 줬다. 애초에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의 농업 생산력이 아니었으면 조선이 고립적 농본주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나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3.2. 풍부하고 깨끗한 물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문명이 발전하는 데에 물은 필수 요소다. 세계 4대 문명으로 꼽히는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 문명, 중국 문명 모두 강을 끼고 발달한 문화들이며, 이들만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로마 제국 등의 많은 문명들이 물을 반드시 끼고 발달했고, 실제로 많은 국가들의 수도 및 주요 도시들은 항상 물이 근처에 있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반대로 물이 부족한 장소들은 잘해야 부족 사회 이상의 수준으로 발전하질 못했다.우선 한반도는 면적 대비 꽤 많은 강들이 존재해서 수자원 자체도 풍부한데다가, 국토가 화강암 산지 투성이인데 화강암에는 물을 걸러 주는 기능이 있다 보니 이 물들을 깨끗한 상태로 공급받을 수 있었고, 여름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호우 덕에 연평균 강수량 또한 적당한 수준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농사같은 경우에도 더운 여름에 물까지 집중적으로 공급되니 논농사가 수월해진 점도 있다.[23] 세계적으로 볼 때 이처럼 깨끗한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문화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국어에 있는 표현 중에서 무언가를 지나치게 낭비한다는 뜻에서 사용하는 "물 쓰듯 사용한다"는 표현은 의외로 전세계를 통틀어서 매우 드문 표현 중 하나인데 대다수의 다른 문화권에서는 물은 있어도 '깨끗한' 물은 풍부하지 않아서[24] 물처럼 낭비한다는 표현이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강우량이 무조건 많으면 좋은건 또 아닌데 지나친 강우량은 농사에 필요한 양분이 쓸려나가도록 만들어서 농사를 오히려 망친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딱 그렇다. 이 지역은 전근대에도 지금처럼 농사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고 현재도 동아시아에 비하면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지 않다. 참고1 참고2 한반도가 강우량이 많은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너무 많거나 반대로 너무 적어서 농사를 망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농사에 유용한 정도는 된다.
3.3. 자원 관련
근대 들어와서는 지하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박토 취급이긴 하지만, 이것도 좀 과장된 부분이 있는 게 애초에 지하 자원이 철철 넘치는 땅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자원의 저주라 해서 자원이 풍족한 땅은 국가들 간의 자원 쟁탈전이 벌어지기 쉬운 땅이고 자원으로 인해 분쟁 지역이 되는 경우도 잦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자원 위주 경제에 너무 의존하다가 여타 산업 인프라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나라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인 게 러시아로, 땅도 크고 자원도 풍부하지만 자원 의존 경제 탓에 관련 자원 값이 폭락하다가 서방 제재 등으로 수출길이 막히자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 나우루 역시 자원 덕에 한때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원 때문에 망할 위기에 놓인 나라로 유명하다.
반면에 일본처럼 연료용 자원이 부실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타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의 반열에 오른 케이스도 있다. 즉, 자원이 있다면 물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자원이 풍부하다고 반드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거나, 반대로 자원이 없다고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4. 근현대에 치중된 지정학적 관점
지정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은 오로지 근현대에 국한된 주장이다.동아시아의 세력 구도가 이렇게 서로를 직접적으로 침략할지도 모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1800년대 후반부터로,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산업 기술과 운송 수단이 발전하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를 침탈하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모두 내부의 혼란으로 북방 유목민족이나 왜구 등 외부 세력이 날뛰거나 군사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이를 해소해야 할 상황이 아닌 이상 대체로 고립주의를 지향했고, 한중일간 무력충돌이 발발한 사례도 19세기까지는 대부분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25] 따라서 한반도 또한 지난 19세기 중반까지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긴 해도 그냥 각자 알아서 살다가 가끔씩 교류하는 정도로만 보았지 당대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잠재적 적국으로 생각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았다.[26]
그러다 최근 150여년 간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인한 서양 - 특히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 두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등장, 일본의 빠른 근대화로 인한 제국주의 전환, 이에 맞선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 전환 등으로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관계자가 늘어나면서 긴장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따라서 근 100~200년 사이의 지정학을 근거로 '애초에 흥성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 전체중 일부 부분만의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3.5. 산지의 효용성
산지는 일견 불편해보이기만 하지만 인간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다.앞선 문단에서 말했듯이 산지는 물 공급을 원활하게 한다. 직접적인 농업 생산 측면에서도 비록 곡물 등 농작물을 생산하기는 어렵지만 산지에 자라는 나무로부터 목재와 땔감을 얻을 수 있으며, 더욱이 산지는 하천의 발원지가 되기에 필요에 따라 물길을 막아 저수지로 활용하거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방아나 발전용 터빈을 돌릴 수도 있다.[27]
또 한반도에 토네이도[28]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이유도 산악 지형이 토네이도의 발생을 막아 준다는 분석도 있다.
산지는 양날의 검으로써 교통은 불편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삼국시대 국경지역 또한 이러한 산맥으로 형성되어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한때 동유럽의 강자였던 폴란드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국토를 몽땅 털리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데에는 나라가 동유럽 대평원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적의 침입을 막거나 지연시켜 줄만한 천연 장벽이 없기에 방어에 불리했던 점도 작용한다. 그런 이유로 지구상에는 산뿐인 국가, 산을 방어막으로 끼고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지 산이 전혀 없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4.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인 랴오닝은?
한반도 지역의 지리적 문제점을 거론하는데 단군의 책임론을 운운하는 것은 단지 단군이 한국, 한민족의 시초라서 그런 것일 뿐이고, 사실 단군조선의 맨 처음 중심지는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요동- 요서, 즉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일대에 있었다. 그래서 단군 책임론 비슷한 드립이 나오면, 거의 100% 확률로 "단군 할아버지는 만주벌판과 한반도에서 제대로 스타팅했는데, 무능한 후손들이 못 지켜내면서 만주에서 쫒겨난 것이다!" 같은 또 다른 드립이 소환되곤 한다.일단 단군조선으로 알려진 십이대영자 문화권을 기반으로한 초기 고조선을 기준으로 하면 요서 지역에 터를 잡다가 한반도로 밀려난 것이 맞다. 기원전 3세기 고조선-연 전쟁에서 패하면서 요서 지방이 연나라의 세력권으로 재편되고, 요동 지방도 연나라가 온전히 지배했는지는 다툼이 있지만(즉 고조선계 재지세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세력권에서 이탈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 다만 그 사실 자체도 '요서는 방어하기 어렵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고, 한반도와 요서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좀 더 국가 발전에 유리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실제 고조선이 있었던 랴오닝성의 지리적 특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4.1. 풍부한 농업 생산량과 자원
랴오닝성은 랴오허 및 쑹화강 유역 사이에 둥베이 평원, 일명 만주 평원이라는 한반도보다도 드넓고 독일 면적과 맞먹는 수준의 평야지대(35만 ㎢)가 있다. 또한 둥베이평원이 그냥 평야지대도 아니라 비료 없이도 농사가 가능한 비옥한 흑토지대가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성도 매우 높다. 벼농사는 부적합하지만 밀과 보리는 풍부하게 나와, 과거 식량부족 사태 때문에 곡물 수출에 제한이 많은 중국임에도 곡물을 수출하는 지역이다.[29] 이 곳은 과거에도 곡창지대여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시 이성계가 군량부족을 핑계로 대자, 최영이 요동정벌 강행을 요구하면서 "요동은 곡창이라 점령만 하면 군량부족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일화도 있다.이 지역은 자원도 풍부하다. 중국의 주요 천연가스 산지 중 하나인데다가 발해만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유전지대가 있으며, 2021년에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다. # 이곳은 예전에 육지였기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전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랴오닝 성의 철광석은 유명하며, 석탄도 풍족하게 나 대규모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랴오닝성은 아니지만 북만주 헤이룽장성에는 중국 최대의 유전의 하나였던 다칭유전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민족이 고구려, 발해처럼 요녕을 계속 영역으로 보유했으면, 한반도와 합쳤을 때 365,000 km2로 독일(360,000)이나 일본(380,000) 급의 국토 면적을 보유하고, 인구도 1억 2천만[30]이 넘는데다가, 세계구급 농업지대와 석유를 포함해 웬만한 자원은 다 나는 자원부국으로서의 포텐셜도 가진다. 중원 본토의 압도적인 생산량 때문에 중국을 능가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일본과 대등한 수준의 국력은 확보할 수 있다.
다만 이는 현대 시점에서의 이야기다. 요동반도는 한반도처럼 산이 많아 전근대 시점에서는 평안도와 대동소이한 수준이었고, 요동과 요서 사이의 드넓은 둥베이 평원은 요택이라는 거대한 늪지대여서 농업에 부적합했다. 반대로 요택을 메꿔서 농업지대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기도 하거니와) 중원 세력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또한 단군이 터를 잡을 때쯤엔 석유나 석탄은 고사하고 철광석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4.2. 기후와 인구 부양력
랴오닝성은 성도 선양의 1월 평균기온이 섭씨 -10도 이하로 한반도에 비해 겨울이 매우 춥다. 이 정도 추위는 현대 인구 밀집 지역 중에서는 한반도와 더불어 가장 추운 축에 속하지만, 사람이 못살 만한 추위까진 아니다.[31] 이곳의 성도인 심양은 경기도보다 약간 면적이 넓지만[32] 인구는 800만이며 바로 옆의 무순시까지 합하면 인구가 천만에 육박하니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구 밀집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더 추운 하얼빈시에도 천만 명이 사는 등 중국 자체가 전반적으로 인구가 매우 많기에 그런 것이지만[33] 어쨌든 일자리 등의 요인이 있다면 충분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다만 이 점 역시 현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전근대 시기에는 추위와 여러 지정학적 요소 때문에 딱히 살기 좋은 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예를 들어 (본 위키 문서의 서술이긴 하나) 틈관동 문서를 확인하면 청나라 성립 이전까지 만주 일대의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만주족( 여진족)은 100만 명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 한반도 인구가 1000만 명은 거뜬히 넘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지금보다 기후가 따뜻한 편이었던 원삼국시대(전한·후한)에도 요동반도에 위치했던 요동군이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보다 인구가 적었다.
특히나 지금이야 지구 기후가 ( 지구 온난화로 인해 더더욱) 좀 따뜻한 편이지만 기후가 한랭해지는 시기에는 더더욱 인구부양력이 떨어진다. 근래의 가장 가까운 소빙하기 시기였던 17세기에는 세계의 유수의 곡창지대에서도 기근이 빈발했고 조선에서도 경신대기근을 맞은 바 있다. 전근대 농업 기술력으로 이 시기를 무리없이 넘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3. 방어 난이도
우선 지형 자체는 방어가 쉬운 축에 속한다. 북서부 지역인 창춘, 눙안 방면은 평야 지대이지만, 중남부지역은 오히려 첸산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랴오허 동안 유역으로 북진하지 않는 이상은 랴오허의 제1지류인 훈허와 타이즈허가 중간에 횡측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부지역으로는 쑹화강과 지류인 후이파 강이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도 요동 지역에 난공불락의 방어선인 천리장성을 세운 이후 수, 당이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의 60년 간 중국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고, 게다가 발해 시절에도 거란이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공략하는데 20년 가까이 세월을 허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부여부 쪽으로 우회하여 발해의 수도 홀한성 참수작전에 성공하여 발해를 멸망시킨다. 천리장성 위치만 보더라도 요하강이 있는 곳에 쌓았다는 점. 송화강쪽에는 장성을 쌓지 않았다. 요하강과 송화강 사이에 강이 없는데 결정적으로 여기 때문에 발해가 함락되었다. [34] 물론 발해는 멸망 이전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 한반도 북부는 진작에 통치권을 잃어 말갈족들이 스스로 독자 세력으로 국가를 세워 신라에게 화친하자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이처럼 지형상으로만 보면 방어하기 쉬운 축에 속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주변에 세력이 너무 많고, 이들 모두가 랴오닝을 탐낸다는 것이다.[35] 일단 랴오닝을 점령하면 국경 방어가 쉬워지기 때문이다.[36] 게다가 만주지역을 지키는 것은 국경도 매우 넓어져 병력과 국가 예산 역시 많이 필요하다.[37] 그냥 세력들도 아니고 근대 이전까지 그 엄청난 인구 수의 통일 중국조차도[38] 위협하고 멸망시킨 북방 유목민족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말갈(이후 여진, 만주족), 서북쪽으로는 몽골 고원의 흉노, 선비, 돌궐, 거란족, 몽골족이 있었다.[39] 서남쪽의 중국 본토의 한족도 고대 이래로 이곳을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기어코 차지하지 못하고 만주족이 몰락한 근현대에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녕 지역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력들이 노리던 전쟁터였다. 이 지역을 거쳐간 세력과 민족은 대충 세어 봐도 고조선, 한나라, 선비족( 전연- 전진- 후연), 고구려, 당나라, 소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족, 몽골 등의 기마민족, 명나라, 만주족( 청나라),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만주국), 중국까지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즉 이곳을 안정적으로 차지하려면 주변의 유목 기마 전투민족들을 제압하고 중원 한족까지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한데,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한 한국계 국가는 랴오닝을 제패할 이런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중원 대륙의 생산력을 보유한 한족의 중원정권도 랴오닝을 쉽게 장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한민족 특히 한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계 국가가 장악하기에는 애당초 역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때 군사력이 강했던 것은 북방민족(주로 퉁구스계)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인데, 거란에 의해 발해 멸망 및 발해부흥운동 전후로 크게 성장한 퉁구스계 북방민족들은 고려와 조선이 상대하기 버거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대로 둥베이 평원 자체는 흑토지대가 있을 정도로 농사짓기에는 괜찮은 땅이었지만 중간에 산 하나 찾기 힘든 개활지였으므로 거란족, 여진족과 몽골족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고려 말 만주에서 제일 가치가 있던 요동 반도 일대를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남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황야와 산악지대뿐이었고, 이 지역들에는 여진족들만 난무하니 매력이 떨어졌다는 것도 큰 요인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나 그 많은 민족들이 지나쳤고 이렇게 비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 만주 일대에 독자적 민족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한 민족은 없다는 역사 역시 랴오닝 지역의 방어상의 어려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몇백 년 동안 거주하면서 ' 만주'라는 이름의 유래까지 된 만주족 역시 근대에 중국, 러시아, 일본, 심지어 한국에게까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중국에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한반도보다 더 풍요롭고 한반도만큼의 지형적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간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어야 정상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 지역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이 근세기까지 운 좋게 만주를 지니고 있었다 한들 근대에 만주 지역에 펼쳐진 각축장을 버틸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4.4. 결론
결론적으로 요녕 지역은 좀 춥긴 하지만, 토지도 비옥하고 자원도 풍부한 지역이므로 이 지역을 개척하고 안정화할 수 있다면 지리적 이점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이후 한국계 왕조들이 만주에 미련을 크게 가지지 않은 이유는, 그 안정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데 만주에 그만큼의 가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기술 발전으로 농사도 잘 되며 석유와 철광이 풍부한 곳이 되었지만, 전근대 시점에서 보면 만주는 사람이 살기에는 춥고, 기후변화가 일어나기 전인데다 작물 종자도 한정되었던 당시 기술로는 농사를 짓기도 어려우며[40], 동호, 선비, 말갈 등 북방 이민족들이 수시로 침략하는 곳이라 방비하기도 어려운 계륵같은 땅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상당한 개척이 이루어진 한반도 본토와 달리, 발해가 멸망한 이래로는 정주민이 거주하지 않은 채 유목민족의 터전이 되어 관개 시설이 망가진 지역인지라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기반 시설을 처음부터 쌓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4군 6진 개척의 사례를 봐도, 개척을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죄인들을 이주시켰다는 것에서 조건이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에 하나 전근대에 감자라도 더 빨리 들어왔다면 북방 개척의 큰 동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당장 이 지역의 패권국가로 꼽히던 고구려도 한반도로 진출한 이후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 남쪽으로 지속적으로 남하했고 요서지방으로는 북진이나 정착 정책보다는, 예방전쟁 개념으로 요서의 주요 군사기지를 선제 공격해서 초토화시키거나[41] 인근 부족들을 친 고구려 세력으로 만들어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후대의 조선도 같은 이유로 북진 정책에 영 적극적이지 않았다.[42]
5. 사회문화적 요소와의 관계
지정학보다 사회문화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반론도 있으나, 사회문화 역시 지정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조선의 폐쇄성을 비판하지만 중국과 일본 역시 서양에 폐쇄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단지 그들은 지리적 이점 덕에 16세기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반면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서양과의 접촉을 개시했다는 큰 차이가 있을 뿐.근데 사실 일본도 17세기부터 쿠로후네 사건 때까지 200년 넘게 쇄국 정책을 시행했다.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단언하기도 곤란하다.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지만, 일단 정립된 후에는 지정학적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똑같이 만주 땅에 자리잡았던 고구려, 발해와 후금 역시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고구려는 나당연합군, 발해는 문왕 이후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유목민족인 거란에게 망했지만, 후금은 명나라와 대립했으며 해서 여진, 몽골, 준가르 등의 유목민들을 전부 복속시켰다.
6. 유사 개념
6.1. 신라 책임론
일부 사람들은 현재 한민족이 만주에서 쫓겨나 한반도에서의 세력구도가 정립된 역사가 삼국통일부터라는 인식에서 신라 책임론, 신라 민족배반설 따위의 사이비 역사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인,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일신라 형성 이전까지[43]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언어만 비슷하지 그냥 타국 수준이 아니라 거의 경쟁국 겸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중앙집권국가는 아니었지만 연맹 체제와 비슷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 금관국, 반파국, 안라국, 고자국 등)도 마찬가지였다.[44] 당대 시점에서는 같은 민족을 팔아먹고 타민족(중국)과 붙어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적국을 다른 국가와 연합해서 정벌한 것에 불과하다.또한 '민족 배반'의 기원이 되는 단일한 민족성 자체가 사실 신라의 통일을 거침으로써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민족적 문제에 대해 신라를 탓할 수는 없다. 신라의 통일이 없었으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별개의 국가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45] IF 역사로 고구려 삼국통일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지만 여하간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한 IF 역사들은 어디까지나 상상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려운 것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신라/평가 문서 참고.
6.2. 이스라엘의 모세 책임론
이스라엘 버전으로 모세가 석유가 나는 땅이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는 유대판 '모세 책임론'도 있다. 아직까지 웹상의 개드립인 단군 책임론과는 달리 이 모세 책임론은 실제 이스라엘 정치인이 언급한 바 있다. 듣보잡도 아니고 이스라엘 총리이던 골다 메이어가 "우리 이스라엘인이 모세에 대해 불만이 좀 있다. 그는 우리를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한 뒤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땅으로 이끌었다."라고 한 적이 있다.그런데 메이어의 푸념이 무색하게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본토와 연안에서 채산성있는 가스전이 하나 둘씩 발견되면서 모세가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게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그 덕에 이제는 모세가 떠나온 애굽 땅에 가스를 수출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 해도 모세 시대에 석유는 별 쓸모가 없었으니[46] 모세가 그걸 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라고 한 건 당연히 아니다. 일단 가나안 및 레반트 문서를 참고하면 농업 생산량은 그닥이지만 근동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가나안의 주요한 이점이라고 한다.[47]
6.3. 공룡 책임론(?)
<nopad> |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늘날 이론에서 석유는 주로 해양 플랑크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현재는 아예 석유의 무기물 기원설도 힘을 얻고 있으며 유전 대부분은 공룡시대 중생대 이후 신생대에 생산되었다. 그러니 중생대의 공룡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다. 물론 알고 있더라도, 농담의 간결함과 수사학적 임팩트상 그냥 쓰는 말이겠지만.
정말 진지한 게 아니라 그냥 밈에 가까운 농담으로 하는 얘기긴 하지만 설령 죽어서 진짜로 석유가 된다고 해도 공룡 입장에서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미래 이종족의 편리함을 위해 땔감이 되어줘야 할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7. 관련 문서
- 만물XX설
- 원죄론
- 자국 혐오
- 사이비 역사
- 한국사
- 한반도
- 한민족
- 지정학
- 단군
- 고조선
- 이웃나라/한반도 주변 4대 강국
- 대한민국/자원
- 대한민국/물가
- 총, 균, 쇠
- 지리의 힘
- 수저계급론
- 방장 사기맵 - 대한민국의 절망적인 지정학적 위치나 지리적 특성과 완전히 대비되는 미국의 사기적인 지리적 특성.영토.토지생산량.자원매장량.천혜의 지정학적 조건과 비교하는 용도로 끌고오는 경우가 많다.
[1]
다만 쌀의 경우 정부가 지속적으로 가격을 조절하고 수입은 엄청난 관세를 매겨 가격 경쟁력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사실상 봉쇄하면서 국가가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쌀 재배에 수익을 보장해서 자급률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것에 가깝다. 물론 주식량의 자급률이 높을수록 해외 의존도가 감소하고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되며 위기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식량 비축의 역할도 겸하므로 이로 얻는 이익이 부담을 상회한다고 볼 수도 있다. 김은 일단 농업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주식이 아니라 기호품이며 특히 고급품은 한국 내의 가격의 수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수출되는 등 자급률이 높다고는 해도 준상업작물로 대량재배되는 것이기에 수익 면에서는 긍정적일지 몰라도 자급률이 높다고 정말 생산성이 뛰어나서인지는 의문이다.
[2]
과거부터 중국에서 수입했으며 이 때문에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고려도경에 나와 있긴 한데, 실제로 한국에서 밀 농사 규모가 작은 이유는 6.25 이후 대량으로 들어온 미국산 밀가루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려 밀농사를 포기한 농민이 많았고, 이모작 밀조차도 통일벼의 개발로 모내기 시기가 앞당겨져 밀의 수확기가 모내기 시기보다 늦어지게 되어 재배가 기피된 데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밀 요리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데, 이것도 밀 자체가 귀해서라기보다는 기후 문제로 제분에 중요한 시설인
수차 보급이 미비해 밀가루의 대량 제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3]
옥수수의 자급률은 2020년 기준 0.7%밖에 되지 않는다. (
관련 칼럼)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경에도 남부지방에서는 해충(조명나방으로 추정) 때문인지 많이 기르지 않았다고 한다. (
관련 자료)
[4]
한국의 국토 중 열대 기후에 속하는 곳이 없어서 노지 재배가 불가능하다. 온실에서 난방을 해서 재배하거나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한다. 반면 중국은 남부 지방,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열대 작물의 노지 재배가 가능하다.
[5]
때문에 경제 성장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진 지역은 농업 생산성과는 별개로 식량 자급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이 모자라면 아예 절대 빈곤으로 굴러떨어져 바로
인구 감소 위기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6]
이쪽은 채굴을 중단한 현재까지도 매장량이 상당하다고 전해진다.
[7]
그리고 희토류는 사실 선진국들이라면 다들 직접 캐다쓰지 않는다.
희토류 문서에서 보듯 선진국에서는 직접 캐기에는 채산성이 안 나오고 캐더라도 추출 과정에서 벌어지는 환경오염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8]
예를 들어 미국의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은 여름에 35도가 기본이고 극단적인 경우 50도 이상까지 올라간다. 반대로 얼음 축제로 유명한 중국의
하얼빈은 영하 40도 밑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9]
일본만 해도 중국과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끊어진 때가 비일비재했으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끊어진 적은 거의 없다. 때문에 중국에게 있어 한국은 적어도 중국 주변의 다른 이민족에 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변방이었다. 오늘날에는 중국이 다시금 주도권을 회복했지만, 서구의 침탈에 대한 방어 의식이 지나치게 작용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중국은 오늘날
매우 공격적인 외교로 인해
한중관계에서 그러한 오랜 인연을 잘 활용하진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같은 소리나 하면서 속이나 긁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10]
이는 이웃국인
일본이 한국과 함께
제1세계가 됨에 따라 한국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덕도 있다. 지금도 일본 열도와
류큐 제도는 한국의 남쪽 출구인
동중국해를 감싸고 있어 충분히 한국을 봉쇄할 수 있을 만한 입지이다. 현대에는 같은 제1세계 (간접적) 동맹으로서 그럴 필요도 없고 큰형님
미국이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테니 그러지 않을 뿐이다. 즉, 근대에 태평양 너머 동쪽에서 등장한
미국이라는 새로운 축이
한일관계의 긴장을 완화하는 등 한국의
안보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11]
폴란드, 핀란드의 경우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거의 붙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가깝다.
[12]
한민족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만주를 회복하려 할때 발목잡는 것이 바로 중국, 북방민족 그리고 일본의 존재였다. 고려의
요동 정벌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왜구의 침입이었다.
[13]
중국:
나당전쟁,
여요전쟁,
병자호란,
6.25 전쟁 등. 일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몽골:
여몽전쟁.
[14]
일설에 조선에서 고립적 농본주의를 추구한 이유 중 하나로 적당히 빈곤한 상태를 유지해서 주변국에서 노릴 게 없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주장하곤 한다. 국가적으로 영세함을 추구했는지까진 확실치 않지만
도로 확충에 소극적인 것은 확실히 이민족의 침탈을 우려한 면이 컸다.
[15]
상기한 대로 본 문서의 주제가 되는 단군 책임론이라는 담론은 민족국가를 전제하고 있다.
[16]
미국은 한반도와 거리가 멀고
러시아는 근원이
유럽(
동유럽) 세력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역점을 두고 있다. 2020년대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일으키면서 더더욱 아시아에는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17]
그나마도 황하의 경우에는 상류에서 토양과 미네랄을 끌어다 쓰는 셈이라 황하 상류는 늦어도 당나라 시기에는 토지 염화와 토양 유실로 급속도로 척박해졌고, 이로 인한 황하의 토사 유입으로 인해 황하는 툭하면 수해가 터지고 강의 흐름이 바뀌는 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8]
실제로 위에서 한반도보다 낫다고 언급된 지역들은 대부분 건조기후라서
장강 상류 지류의 수많은 강들이 내부에서 흐르고 관개 시설이 잘 구비된 사천 분지나
드니프르 강 같은 큰 강이 배후 하천이 되어 주고 적당한 강수량을 가진 초르노젬을 제외하면 이런 위협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19]
한반도에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 된 벼농사 유물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물론 벼의 원산지가 한반도라는 설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체로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퍼졌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긴 하나, 어느 쪽이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를 지어 온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농업기술의 한계 때문에 논농사는 물을 구하기 쉬운 산골짜기나 언덕에서 이루어졌으며, 벼보다는 건조한 토양에서도 쉽게 기를 수 있는
조가 더 많이 재배되었다. 논 유적의 북한계선도 끽해봐야
경기도
화성까지였고 그 이북 지역에서는 밭농사를 지었다.
[20]
실제로 조선시대 전기의 농서 《
농사직설》에서는 가뭄으로 인한 흉작을 우려하여 물을 대지 않고 늦벼를 파종해 기르다가 장마철이 되면 물을 대어 기르는 건경법(乾耕法)을 권장하였으며,
이앙법을 할 경우 가물 때도 물이 마르지 않는 지역에서 시행할 것을 권장했다.
[21]
하지만 중국이나 동남아의 경우 벼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한국보다 낮다. 중국이나 동남아가 벼 생산량이 많은 이유는 한국에 비해 경지면적이 넓기 때문.
[22]
반면 연중 고온다습한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
인도 아대륙 등
아열대기후/
열대기후 지역들은 일 년 내내 논에 물을 채워서 삼모작, 사모작을 했기에 수많은 해충이나
병원균이 서식할 최적의 장소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말라리아나
뇌염 등의
곤충,
기생충 혹은 수인성 전염병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중국
왕조들의
기록을 보면 남부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의 수명이 유의미하게 짧은 편이다.
[23]
물론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장마철을 제외하면 비가 드물게 와서 봄이면 가뭄에 자주 시달렸다.
[24]
전술한 4대 문명만 예시로 들어도 이집트 문명의 나일 강이나 중국 문명의 황하 같은 경우에는 물은 많은데 이게 전부 흙탕물이라서 농사에는 유리해도 식용으로서는 부적합했고 이 때문에 물을 먹기 좋게 가공하고자 맥주와 차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 문명의 갠지스 강은 원래는 깨끗했는데 '신성한 물이니 닿으면 부정한 것을 씻겨준다'는 믿음이 인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보니 그 많은 수의 인도인들이 여기에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하고 똥이나 산업 폐기물 같은 각종 오염물들도 여기에 갖다 버리고 심지어는 사람 시체도 여기에 흘러보내버리기 때문에 식용은 커녕 농업용으로도 못 쓸 만큼 오염되었다(...). 이 외에도 유럽 지역의 물은 석회질이 심해서 그냥 마시기에는 부적합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물은 기생충이 심해서 그냥 마실 수가 없다.
[25]
화약을 더 먼저 사용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화포류 무기 발전이 유럽보다 뒤처진 것도 이러한 오랜 평화 때문으로 볼 수 있다.
[26]
사실 이는 전근대에 세 나라 모두 서로를 완전히 정복할 역량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중국은 역사상 여러차례 한국사 국가들을 공격했지만 전 지역을 점령한 적도 없고 그나마 성공적이었던 병자호란도 복종을 받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일본도 왜구의 노략질이라면 모를까 전면전에서는
임진왜란의 결과가 보여주듯 역시 무리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 때문에 이동이 비교적 까다로웠고 결정적으로 보급이 어려운 바다를 건너가느니 국내의 미개간지를 개간하거나 북방에 영토를 개척하는 것이 훨씬 리스크가 적고 보급 난이도가 낮았기 때문에 일본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중국 쪽도 오늘날로 치면 랴오닝 성을 비롯한
만주까지가 최대 관심치였다. 그리고 반대로 방어하는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너무 넓었고 한반도는 지형이 대군을 효율적으로 침투시키기 좋지 못했고 일본은 섬이었다. 오히려 전통적으로 중원 정세에 개입할 역량은 있으면서 바로 붙어있던 한반도, 역량이 있다 쳐도 멀고 섬인 일본이었기에 한반도는 늘상 중원 정세에 따라서 공격당하곤 했다.
[27]
다만 한반도는 기후상 하상계수가 커서 수력발전에는 불리하다.
[28]
반대로 미국의 경우 토네이도로 인한 인명 피해가 매우 많다.
[29]
한국에 들어오는 밀과 보리도 상당량이 랴오닝 산이다.
[30]
한반도 7700만, 랴오닝 4400만
[31]
비슷한 기후로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이 있는데, 미국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매우 추운 지역이기는 하다.
[32]
경기도는 약 11700 km2이고, 심양시는 약 13000 km2다.
[33]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한 국가로
중국 대륙이 통일된 현 시대에는 중국 각 지역에
중원의
한족이 유입되면서 인구 자연 증가율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인구 성장을 보이고 있다. 만약 이 일대
만주가 별개의
국가였다면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족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있는
티베트에서는
칭짱 철도 건설을 필두로 한
한족 유입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34]
그럼에도 장령부를 위시로 한 발해의 서남부 요동 방어선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후에
발해부흥운동의 거점으로 변모한다.
[35]
고구려때만 해도 중국계 국가는 물론, 북방유목 민족, 몽골계,
돌궐족,
부여,
동부여 등 게다가 남방쪽으로는 백제, 신라,
왜까지. 앞뒤로 적이 수두룩 하다.
[36]
괜히 고조선, 고려(요동정벌)가 여기부터 시작한게 아니다. 그리고 랴오닝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만주지역은 산지라 사람이 살기 어려워 빈땅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점령 자체는 쉽다.
[37]
그래서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세웠다.
[38]
유사 이래 중국의 인구는 전세계 상위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중국/인구를 참고하면 내내 20% 내외를 오갔다는 모양이다.
[39]
이 중
몽골족은 동아시아를 넘어 아예 구대륙 대부분을 정복했다(
몽골 제국).
[40]
4군 6진 개척 시절에는 서늘한 기후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인 감자가 없었다.
[41]
대표적인 예가 598년 영양왕이 수나라 요서의 군사 요충지였던 임유관을 공격한 사건이다.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던 이 공격에서 고구려는 임유관을 초토화시켰고 덕분에 수나라는 1차 출정을 임유관 후방에서 해야 했다.
[42]
실제로
조선
성종 때
혼춘 개척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이 이유 때문에 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43]
심지어
무신정권기인 13세기까지도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의
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았다.
[44]
삼국이 혈통적, 언어적으로 유사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뿌리가 같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를 보듯 혈통/언어적 근연성과 (물론 큰 연관은 있기는 하나) 민족적 통합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도
고국원왕과
개로왕의 죽음 등의 사건에서 보듯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던 시절이 훨씬 길었다.
[45]
사실 삼국통일 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시대에도
만주회복에 대한 내용이 꾸준히 나오는 것 자체가 '고구려가 삼국의 일부이다'라는 신라의 삼한일통이 잘 먹혀들어갔다는 것이다.
[46]
석유는 현대에는 1860년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19세기 후반까지 석탄의 대체자원으로 쓰이다가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석유 보일러 선박 개발에 성공하면서 단번에 근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자원으로 급부상하였다.
[47]
허나 이웃에
페니키아가 있어서 그런지 부유하진 못했던 듯하다. 당장에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 왕의 왕비는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의 공주였는데 시돈이 워낙 부유해서 아합 왕이 기죽이고 사는 신세였다. 정작 다스리는 땅은 시돈이 비빌 바가 못 될 정도로 넓고 아합 자신도 부침이 많은 북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왕이었는데도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