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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8:27:30

원죄(기독교)

원죄론에서 넘어옴
1. 개요2. 성경적 근거3. 그리스도교 신학적인 배경4.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를 뭐라고 말하는가?
4.1. 초기 기독교4.2. 서방 기독교
4.2.1. 가톨릭교회4.2.2. 개신교
4.2.2.1. 루터 칼뱅의 견해4.2.2.2. 존 웨슬리의 견해4.2.2.3.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의 견해4.2.2.4. 고틀리프 자무엘 슈타인바르트의 견해4.2.2.5.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4.2.2.6. 알브레히트 리츨의 견해4.2.2.7. 칼 바르트의 견해4.2.2.8. 폴 틸리히의 견해4.2.2.9. 에밀 브루너의 견해
4.3. 정교회
5. 논란 및 비판6. 다른 종교들의 관점7. 관련 문서

1. 개요

기독교[1]의 교리로, 성경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금한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이다. 영어로는 Original sin(때때로 Sin이라고도 한다), 라틴어로는 peccatum originale이라고 한다. 정교회 쪽에서는 조상의 죄라는 비슷한 개념이 있다 (ancestral sin / προπατορικό αμάρτημα).

2. 성경적 근거

구약, 즉 기독교의 원형이 된 유대교 성경에서부터 언급된 개념이기에 교파를 불문하고 뱀의 유혹으로 인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섭취가 그 첫 번째 시발점이다. 모든 기독교가 유대교에 근간을 두므로 어떤 기독교 종파의 성직자나 신학자든 창세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기 3장 16-19절 공동번역

나아가 구약에서 비롯된 원죄가 신약성서에서도 계승되어 언급된다.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페소서 2장 1~3절 공동번역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 공동번역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6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루카의 복음서 4장 5-6절 개역개정

아무리 하느님이 전능하다고 해도 하느님은 결코 죄를 범할 수 없기에 하느님도 하느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하늘의 법은 무조건 지켜야 하고, 인간에게 죄가 있는 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권은 합법적으로 마귀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에게는 대대로 죄의 본능이 생겼고, 사람은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죄로 인해 대대로 지옥 갈 존재가 되었는데, 무죄한 예수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와 인류를 대신해 모든 죗값을 대속함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과, 그가 자기 죄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음을 믿는다면, 하느님에게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생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2]

3. 그리스도교 신학적인 배경

2세기경의 교부로 '일치의 학자'라 불린 이레네우스는 최초의 인류는 미숙했으며, 이러한 '악'은 요나가 고래의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듯이 일련의 성장 과정이며, 우리는 대대로 그 '결과/여파'에 시달릴지언정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5세기 무렵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해서는 '아담은 자발적으로 교만에 빠져서 그런 것이며, 아담과 마찬가지로 그 후손들도 글러먹었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리스어와는 달리 라틴어 'peccatum originale'는 두 단어 모두가 매우 중의적인 단어들인[3] 것도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문서에도 원죄 관련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니 병행해서 참조하면 좋다.[4]

이게 '원죄'란 말을 쓰기는 했는데,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지은 죄가 아니라 남은 죄이며 짊어진 죄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죄를 지을 때 온전하게 자기 판단만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내면적인 미망, 콤플렉스, 압박 등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이런저런 이유로 죄를 선택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간사한 동물이라 그러한 상태가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게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때문에 인간 본성이 타격을 받아 결함을 지니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의 인간관은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결함설이라고 이름 지을 만하다.[5] 이런 원죄로 말미암아 누구든 인간이라면 본성적으로 결함을 지니게 되어, 하느님과 멀어지고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띄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정의롭고 선한 인간은 없다. 누구든지 원죄로 인한 내면적인 한계, 결함을 안고 산다는 것이 원죄의 본 의미라고 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서는 원죄라는 말은 사실 죄를 지으려는 경향성[6]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7]

가톨릭교회나 가톨릭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신교나 모두 원죄를 인정하지만,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는 상이한 주장을 한다. 칼뱅 아르미니우스, 웨슬리는 각각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분적 타락을 주장했지만, 가톨릭 교회는 인간에게 원죄는 있지만 처음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관련돼서도 상이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루터 이신칭의는 인간은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인데 하느님의 은혜로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인 반면 가톨릭의 의화(義化, Justification) 교리는 인간은 하느님에 은총에 의해 진짜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칭의와 의화는 둘 다 영어로는 'justification'이라고 하지만 종파별로 가르치는 내용은 매우 다르다.[8] 물론 가톨릭교회도 원죄에 따른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들고 나온 개념이 인간의 타락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악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루터와 칼뱅이 그것을 더 심화해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악에 물들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인간관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내재적인 의로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에 완전히 위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상반되는 개념이 본죄, 다른 명칭으로는 자범죄가 있다. 아담과 하와로 인해 생긴 '상태 이상'이 원죄라면 자유의지로 지은 죄가 본죄이다. 으로 비유하자면 원죄는 '조상이 낸 빚을 물려받아 내가 채무자가 된 것'이라면 본죄(자범죄)는 '내가 직접 대출받아 생긴 빚'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의미를 더 확장해서 어떤 인물, 조직 등이 과거에 도저히 씻기 힘든 죄를 저질러서 매우 오랫동안 속죄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 원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경우, 서방 교회와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 중 하나로 원죄에 대한 해석을 꼽을 정도로 관점이 매우 다르다.

4.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를 뭐라고 말하는가?

4.1. 초기 기독교

4.1.1. 이레네우스의 견해

최초의 인류는 미숙했으며, 이러한 '악'은 요나가 고래의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듯이 일련의 성장 과정이며, 우리는 대대로 그 '결과/여파'에 시달릴지언정 아담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4.1.2.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원죄의 유전설의 개념을 체계화시켰다. 아담은 스스로의 교만에 눈이 멀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며,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인류의 본성에 결함이 생긴 결과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글러먹었다. 인류를 아담 안에서 유기적 통일체로 보고 죄의 전가를 말한다. 그는 단순히 아담이 단 한 번의 범죄로 죄스러운 자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4.2. 서방 기독교

4.2.1. 가톨릭교회

How did the sin of Adam become the sin of all his descendants? The whole human race is in Adam "as one body of one man".[9] By this "unity of the human race" all men are implicated in Adam's sin, as all are implicated in Christ's justice. Still, the transmission of original sin is a mystery that we cannot fully understand. But we do know by Revelation that Adam had received original holiness and justice not for himself alone, but for all human nature. By yielding to the tempter, Adam and Eve committed a personal sin, but this sin affected the human nature that they would then transmit in a fallen state.[10] It is a sin which will be transmitted by propagation to all mankind, that is, by the transmission of a human nature deprived of original holiness and justice. And that is why original sin is called "sin" only in an analogical sense: it is a sin "contracted" and not "committed" - a state and not an act.
어떻게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의 죄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인류는 “마치 한 사람의 한 몸과 같이”[11] 아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으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연관되듯이 아담의 죄와 연관된다. 그러나 원죄의 전달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아담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알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12]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04

가톨릭교회의 경우 원죄는 유비적(類比的, analogous) 의미에서의 죄이지 일의적(一義的, univocal)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다. 물론 다의적(多義的, equivocal) 의미에서의 죄도 아니다.[13] 원죄가 유비적 의미에서 죄라고 불리기에, 본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원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죄와 원죄를 일의적으로 파악하는 것 역시도 신학적으로 오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가톨릭의 경우) 그리스도교가 주장한 적도 없는 것을 신자가 방어하고, 주장한 적도 없는 것을 비신자가 공격하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려면, 우선 신자 스스로가 원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죄와 본죄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확하게 공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원죄 교리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엔 죄(선악)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죄라는 것은 죄의 개념에 속하고, 죄의 개념이 없으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도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니 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과 충돌되니 모순 아닌가"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므로 그분 안에 존재할 때 선이 되고 그분을 떠나 존재할 때 악이 된다. 또한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서는 죄와 악에 대해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 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가 들어왔다'는 표현은, 이전에는 죄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는데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죄라는 관념은 있었으나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게 '기독교적인 죄와 선악의 개념'이라서 문제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 개념을 강하게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죄의 본성에 대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한몫을 하고 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신학적 문제점을 들어 거기에 반대했다. [14]

4.2.2. 개신교

4.2.2.1. 루터 칼뱅의 견해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가져와서 '자유의지'의 비중을 훨씬 더 낮췄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성보다는 신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볼 수 있다.
4.2.2.2. 존 웨슬리의 견해
웨슬리는 원죄에서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강조한다. 아담이 자유의지로 불순종하여 죄인이 되었다고 보며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이 수반된다. 대표성을 띠고 죄인이 된 아담과 그 이후로 죄인된 인간의 죄의 속성 때문에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 말해서 육적인 유전이 아닌 영적 유전의 관계로서 원죄를 얘기했다. 이 개념은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연대성으로 이해 할수 있다.
4.2.2.3. 요한 아우구스투스 에버하르트의 견해
에버하르트는 최초로 역사비평적으로 원죄 교리를 거부한 신학자다. 에버하르트는 성경 연구를 통해 원죄론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로마 5:12의 라틴어 번역본 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 외의 구절들은 전부 원죄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를 실증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버하르트의 결론은 계몽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2.2.4. 고틀리프 자무엘 슈타인바르트의 견해
슈타인바르트는 신학적으로 원죄 교리가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에버하르트를 계승했다. 슈타인바르트에 따르면 원죄론은 성서학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원죄론은 인간이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본성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원죄론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이 어차피 악하다는 이유로 선을 추구하지 않게 만들 위험이 있다. 원죄론은 정자가 난자에 수정되기 전의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고, 죄는 영혼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 난자에서 기다린다.
4.2.2.5.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
칸트는 원죄론의 영향을 받아 근본악 개념을 제시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선의 소질과 악의 성향(허약성, 불순성, 사악성)을 본성적으로 갖고있다. 이러한 근본악은 선의 소질에서 자율적 이성과 양심으로부터 근본악을 극복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 극복은 도덕적 근거와의 협력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희망해야 한다.
4.2.2.6. 알브레히트 리츨의 견해
리츨은 계몽주의의 원죄 비판을 받아들여 원죄 대신 보편적 죄 개념을 제안했다. 인간의 본성은 행복이지만, 양심과 이성에서 벗어난 행복은 이기심의 죄를 만들어낸다. 이기심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차원으로 당도했을 때, 사회적 구조에 의해 죄가 반복되게 하는 죄의 왕국이 세워진다. 리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교회가 궁극적으로 죄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하느님의 왕국을 완전히 실현시키리라 보았다.
4.2.2.7. 칼 바르트의 견해
바르트는 원죄설을 전적으로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 후세 인간의 죄가 된다고 보는 어떤 관념과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 하고자 했다.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를 총체적 관계에서 이야기 하므로 아담은 한 인간이라기보다 전 인류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아담을 세계 속의 대표적인 위법자로 명하고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지 않아 이 최초의 인간이 인간 본질의 최초의 죄인이라고 여긴다. 위법자 인간 아담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때는 예수를 깨달을 때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원죄의 개념을 유전적인 측면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의 '실존'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돌이켜 볼 때 실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입장에서 아담은 인간 실존을 행사하지 않은 것 자체를 '죄' 로 본다.
4.2.2.8. 폴 틸리히의 견해
틸리히는 죄를 인간이 그의 창조주인 신으로부터 떠나있는 상태 즉, '소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본질에서 실존의 떨어짐의 보편적인 상황을 타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법이나 명령 자체의 불순종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소외라고 할 수 있다.
4.2.2.9. 에밀 브루너의 견해
브루너의 죄의 유전에 대한 개념은 죄의 보편성에서 기인한다. 그는 죄의 보편성과 연대성을 유전성보다 더욱 강조한다.즉 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행위'이고,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숙명인 '영속적 혁명'이다. 그러므로 유전적이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죄의 개념보다는 죄를 하나의 전적 행위로 보며 연대성의 개념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죄 된 상태를 유전적으로 보지 않고 보편성과 연대성의 입장에서 본다.

즉, 현대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담이 지은 죄는 모든 인간들의 본래적 일치성의 표현으로서의 '아담'에게 있는 것이지, 역사상의, 혹은 선사 시대의 첫 인간으로서의 아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원죄란 신과 단절된 인간의 연대적인 책임이며 개개인의 육체적 유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원죄란 신과 인간의 단절 상태를 의미한다.

4.3. 정교회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에제키엘 18장 20절 공동번역[15]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경우, 서방 교회와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 중 하나로 원죄에 대한 해석을 꼽을 정도로 관점이 매우 다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로는 원죄에 대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서방 교회와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다양한 해석 중 하나 정도로 받아들여졌으며 큰 신학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깊게 말하면, 당시 혼란에 빠져 있던 서로마 제국에선 "네가 겪는 고통은 전부 조상의 죄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기독교를 믿어라!"는 방식이 통했으나, 한창 체제가 잘 닦이고 그리스도교도 잘 나갔던 동로마 제국에선[16]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선교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단어를 살펴보자면 라틴어 peccatum originale 에서 orignale는 근원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고, 최초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는데, 서방 교회에서는 이를 근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 표현이 한국어로 번역될 때도 이런 서방 교회 전통에 따라서 근원적인 죄라는 의미에 충실한 원죄(原罪)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으며, 최초라는 의미는 상실되었다. 반면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최초로 지은 죄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 사실 애초에 그리스어로는 원죄보다는 조상의 죄(ancestral sin / προπατορικό αμάρτημα)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로 인해서 인간 본성에 결함이 생기고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나타났고, 그 후손인 인류가 최초의 죄에서 발생한 이러한 '결과'를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견해가 일치한다. 하지만 서방 교회에서 인류 전체가 원죄의 '결과'뿐 아니라 '원죄' 그 자체도 물려받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동방 교회에서는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로 지은 개인적인 죄이며 인류는 그 죄를 물려받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의 상황을 매우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가 온전한 성인으로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악의적으로 죄를 선택했다고 이해했다. 반면 리옹의 성 이레네우스는 아담과 하와가 온전한 성인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점차 완성을 향해 자라나갈 아이와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미숙함 또는 취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보았다. 이렇듯 판이한 두 관점은 최초의 죄가 가지는 죄질, 그리고 인류의 본질과 현 상태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역할, 구원의 의미, 은총의 의미 등 다른 신학적 영역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서는 삶의 고통은 아담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레네우스적 관점에서는 하느님이 본래 의도했던 대로 인류가 자신의 완성된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17]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보자.

5. 논란 및 비판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란에도 원죄 이야기가 있으니 같이 참고하면 좋다.

원죄가 가지는 성격에 대해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두 사람 때문에,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자연히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부분에서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내가 얼굴은커녕 한 번 이름도 제대로 들어 본 적 없고 실존했는지도 알 수 없는 조상(이라 카더라 하는 양반)의 죄로 덩달아 죄인으로 몰려야 되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것.

대한민국은 전반적으로 가톨릭 개신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영향력,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peccatum originale'가 가지는 중의성을 어떻게든 해명한 가톨릭의 경우에도 중간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기 십상인데, 장로회는 그 시조인 장 칼뱅[18]부터가 저걸 꽤 극단적으로 가져간 편인 데다가, 심지어 한국의 근본주의 종파들은 원죄를 가지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무슨 형이상학적 십볼렛으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사리사욕을 위해 그 의미를 아주 교묘하게 비트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당장 그러한 왜곡 운운하기 전에, 비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이 원죄야말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교리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것은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 "아...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그런가 보네요"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라느니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은 보편적인 도덕 원리이니 큰 거부감이 없지만, 갑자기 듣도보도 못한 사람 둘이 몇천 년 전에(실제로 있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일 하나 먹은 걸 가지고 "당신도 이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지옥행이에요. 근데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들 '뭔 헛소리야?'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따라서 원죄에 대한 개념에 더하여 선악과 에덴의 뱀의 이야기를 더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이 경우에도 보통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조상의 별 시덥잖은 죄를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게 무슨 헛소리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에덴의 뱀에게 속아 넘어간 것도 선악과 따먹고 죄 지은 것도 전부 하와와 아담인데, 왜 그 후손(?)인 나까지 그 죄를 연대 책임으로 짊어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은 위와 같이 원죄 교리를 비틀어서 전달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전도하면서 원죄 개념을 빼놓고 말하기도 한다. 다만 이럴 경우 나중에 그 신도가 다른 종교 서적에서 이를 찾고 자신을 전교한 전도사나 자신이 다니는 교구 혹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반문을 표하는 경우엔...

전도하는 쪽에선 어떻게든 원죄 개념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억지를 쓰고, 피전도자 쪽에선 짓지도 않은 죄 가지고 지옥까지 끌고 간다는 원죄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두 집단의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 넌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었으니 지옥에 간다. 지옥은 참 살기 힘든 곳이라더라. 너 혹시 이런 지옥엘 가고 싶니?" 또는 " 내가 너 이런 지옥에 안 떨어지게 하려고 이렇게 전도하는 건데 말 좀 들어라.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니?" 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연좌제 주장은 피전도자 측의 인내심을 상실케 하는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19]

그도 그럴 게 고대부터 전근대까지는 연좌제가 당연하게 행해졌고 현대에도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남아있거나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국가도 존재한다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좌제는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줄어드는 형국인 데다가 그 고대에서조차 반역죄가 아닌 이상 연좌제 한다고 무슨 까마득히 먼 조상까지 파헤치는 짓은 안 했다. 왕가 같다면야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전 국가적으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 인류적으로 기독교가 일어났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수천 년 전 조상의 일로 현대까지 벌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그것도 고대 기준이고 지금은 까마득한 조상은커녕 내 부모, 형제,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처벌을 받아도 연좌제 하냐며 게거품 물 시대에 그런 얘기를 한다면 어이없어할 일이다.

6. 다른 종교들의 관점

원죄 삼위일체는 같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 이슬람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만이 가지는 특징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원죄를 부정한다. 신은 매우 자비롭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먹은 잘못' 정도는 용서했다는 게 이슬람교의 설명.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인류가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죄를 저지른 것은 같지만, 그게 '원죄'로 이어진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교에서는 자비로운 신이 이미 인류의 죄를 용서한 지 오래라는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원죄 같은 것 없이 깨끗하게 태어나며, 죄가 있고 없고는 그 사람의 선행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한 이슬람 학자는 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신의 무한한 자비를 부정하는 것',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라고 평할 정도. 단 이슬람도 기독교와 공통적으로 죄를 짓고 거기에 대한 일말의 뉘우침도 없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전제는 같다.

유대교의 경우에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죄 자체는 인정하지만 정교회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기에[20], 그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 사상은 없다. 아담과 하와는 각자 노동과 출산으로서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죗값을 갚기도 했지만, 사람이 홀로 살아가지 않고 많은 자식과 함께 이 땅에 널리 퍼진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해서 그게 원죄급으로 깊은 낙인이 찍힌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불순종의 죄들 가운데 하나와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며, 따라서 노동·해산의 고통이나 죽음과 같은 실낙원의 저주스런 결과들은 남아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만[21] 그 이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선악과를 먹기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22]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인간이 아담의 원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23]

7. 관련 문서


[1] 특히 장로회에서 이것을 매우 교조적으로 다루며, 북유럽 국교회, 성공회나 거기에 영향을 받은 감리회 등에서는 현장의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태도와는 별개로 역사적 문헌들을 보면 그 흔적이 일단 존재하기는 한다.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이사야 59:2) [3] 'peccatum': 죄, 흠, 결함. 'originale': 조상의, 태초의, 원초적인. [4] 당연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창한 개념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아니고 시대가 지나며 교정되고 다듬어져 온 것이다. [5] 원죄론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선천적인 약점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의지로 죄를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원죄를 지닌 상태의 인간 후손이 범하는 죄와 질적으로 다르다. 커버해 줄 구석이 없다는 것. [6]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죄 그 자체가 경향성은 아니다. 경향성은 원죄로 인해 유발된 인간의 '결함'이다. [7]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사과나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람은 '죄'를 안 지을 수 없으며, 설령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하여도 죄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8] 그래서 로마서의 '의'와 관련된 부분에서 천주교 성경과 개역개정판 성경의 번역 역시 서로 다르다. [9] (교리서 내 주석)St. Thomas Aquinas, De Malo 4,1. [10] (교리서 내 주석)Cf. Council of Trent: DS 1511-1512 [11] (교리서 내 주석)성 토마스 데 아퀴노, 「악에 관한 논제」, 4, 1, c: Ed. Leon. 23, 105. [12] (교리서 내 주석) 트리엔트 공의회, 제5회기, 원죄에 대한 교령, 제1-2조: DS 1511-1512 참조. [13] 유비(類比)란, 일의(一義)도 다의(多義)도 아닌 개념으로, 가령 "A는 얼굴이 예쁘다"와 "A는 마음씨가 예쁘다"에서 두 문장의 '예쁘다'라는 말은 일의적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의적인 것도 아니며, 서로 다르면서도 어떤 같은 근거 때문에 같은 표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때 '유비'가 성립한다. 또다른 예시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有(라틴어: ens, 영어: being)를 일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有와 인간의 有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범신론이 성립한다. 반대로 有를 다의적으로 파악한다면, 하느님의 有와 인간의 有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감각적·물질적 인식에서 초감각적·비물질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므로, 불가지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 학파 학자들은 有의 일의성과 다의성을 거부하고 有의 유비성을 인정한다.(참고: 정의채, 《형이상학》 4판 171-177쪽) [14] 이 주제에 대한 펠라기우스 본인의 저작은 전해지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On Nature and Grace 에 비판적으로 실려있다. [15] 정교회가 원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가장 큰 근거이다. [16] 당장 로마 제국의 주요 대주교회 다섯 곳 가운데 네 곳이 동로마에 쏠려 있었으니 말 다 했다. [17] 특이하게도 유대교 탈무드에도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다. [18] 녹스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칼뱅이 나온다. [19] 여러 죄 중 원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죄를 저질렀으니 지옥에 간다'에 납득하지 못하여 마찰을 빚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당장 마크 트웨인의 <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봐도 미처 열 페이지 넘기기 전에 과부댁이 품행이 착한 어린이처럼 바르지 않는 주인공 핀을 보고 그러다간 지옥에 간다고 하자 '지옥도 한 번쯤 가보고 싶네. 거기엔 독실한 기독교인 과부댁이 없을 테니까.'라고 받아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20] 엄밀히 말하자면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유대교의 해석이 나름 초대 기독교까지 이어진 후 철학적으로 더 심오하게(?) 체계화되기 이전에 동서 분열이 일어나는 바람에 보다 초기에 가까운 해석을 정교회가 잇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1] 같은 예로 바벨탑을 쌓은 세대가 죄를 지어 언어가 갈라진 불편이 바벨탑과는 상관없는 후대까지 대대손손 이어지는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22] 이렇듯 원죄도 인정하지 않고 구세주의 대속 또한 어떠한 형태로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유대교의 내세관에는 지옥이 아예 없었다. 다만 종말 이후 선민들이 부활한다는, 이른바 천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현대에 남은 교파는 본래 부활을 믿었던 종파이며 여기서 부활은 원죄와 상관없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선민과의 계약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로마 제국에 의한 국가 멸망 후 오랜 시간 선민 공동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이러한 교리들은 유지되지 못해 현재 유대교에서 내세관은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23] 신앙개조 1:2 우리는 사람이 아담의 범법으로 인하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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