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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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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金日成綜合大學
Kim Il Su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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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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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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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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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분류 종합대학
개교 1946년 10월 1일
설립자 김일성
총장 김승찬
당위원회 책임비서 김정민
주소 평양시 대성구역 룡남동
재학생 약 12,000명[A]
교직원 약 6,000명[A]

1. 개요2. 상세3. 역사4. 입학 과정5. 학과
5.1. 사회과학부(4년제 과정)5.2. 자연과학부5.3. 재교육학부5.4. 기타 학과5.5. 기타
6. 학사 운영
6.1. 논문6.2. 졸업장
7. 캠퍼스8. 역대 총장9. 통일 후 전망10. 출신 인물11. 사건·사고12. 여담13. 참고 자료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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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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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전경 및 정문
북한의 4년제 종합대학. 약칭은 김대(金大). 북한의 100여 개 대학과 500여 개 전문대학 및 고등전문학교 중에서 자타공인 가장 뛰어난 고등교육기관이다. 김책공업종합대학, 리과대학과 함께 '북한 3대 명문대학'으로 이름이 높다.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평양종합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6년 10월 1일 개교 당시에는 평양 시내에 있었지만[4] 이후 평양시 대성구역 룡남동( 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일원) 룡남산으로 옮겨갔다.

2. 상세

본관 건물에는 총장실, 당 기관, 청년동맹 기관이 입주해 있고, 학생들은 1965년부터 2017년까지 완공된 각종 교사 건물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김정일이 자신이 다녔던 본관을 완전히 허물고 그 자리에 옛 본관과 똑같은 모양의 전자도서관을 짓게 했다고 한다. 그 외에는 북한 대학 중에서 최고의 장서 능력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다.

교수 2,300여 명과 주간학생 12,000명, 야간 및 통신강좌 학생 5,000명이 있다. 여기에는 연구원(석사과정), 박사원(박사과정) 학생도 포함된다.[5] 유학생들도 꽤 있는데, 국적은 주로 중국, 베트남, 러시아 등 과거 제2세계 에 소속한 우호국들이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냉전 시대 때 제3세계에 소속했던 출신들이다. 의외로 한국어(조선어)를 여기서 어학연수해서 배우는 학생들도 꽤 있는 모양이다.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백두혈통 일가 대부분이 김일성대를 나왔으며[6] 전통적으로 출세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의 동기생이 많았다. 조선로동당, 각종 정치 기관 간부의 70% 이상을 배출하여 북한의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선후배 간의 규율이 엄격하여 밀어주고 끌어주는 강력한 인맥이 형성되며 이는 사회가 군대, 전제정에 결합된 북한 특유의 전체주의 체제를 통해 더 강해진다.

입학 사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고려다. 출신성분(토대), 충성심 및 사로청, 학교, 군대활동, 성적이 고려 사항이며 출신성분과 정치조직생활 점수가 합격자 평가 기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혈통과 당성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김일성대 졸업생 주성하기자는 "김대는 북한에서 가장 돈 많은 집안 자식과 가장 가난한 집안 자식이 같이 다닌다. 아무리 멍청해도 돈만 많으면 갈 수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시험만 잘 보면 갈 수 있다." 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신분만 보고 입학시키는 것은 아니며, 의외로 특권층이 아닌 일반 북한주민이나[7] 심지어 재일교포도 입학이 가능하다.[8] 이는 정치적 고려로 출신성분이나 계층마다 쿼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 간부 요직으로 등용되는 정치경제학부, 법학부, 어문학부 등은 특권층 비율이 압도적이고, 성적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출세와 거리가 먼 이공계에 쏠려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북한도 체제 유지를 위한 인재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북한 사회가 막장이고 뇌물이 판친다고는 하나 최고 학부를 단순히 뇌물이나 출신 성분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북한도 대학입시는 엄청나게 치열하며, 출신성분에서 결격사유가 없다면 명문대 졸업장은 북한에서도 곧 출세를 보장하기 때문에 비밀 과외까지 존재할 정도로 엄청나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 북한에서도 명문대 진학을 위한 사교육 시장이 형성돼 있으며 일타강사로 유명세를 떨치는 사람도 있다.

시장을 경험한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과 같은 명문대에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탈북 동아일보 기자 주성하도 출신성분은 좋지 않았으나 성적만으로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외국의 대학교는 목적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외국의 대학교들이 '글로벌 인재 양성'이 목표인 반면 김일성종합대학은 '민족 간부 양성'이 목표라고 하며, 이런 간부 양성 목적으로 북한의 최고 인재는 전체 학생의 2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평양의 권력층 자녀들과 핵심 기관 종사자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인재 양성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권력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학생들에 대한 통제도 매우 강하다. 북한 사회 전체에서는 김일성대 출신들은 북한 최고의 엘리트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대 출신이 죄를 지을 경우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의식해 공개처형 하지 않고 비밀리에 처형한다. 김일성대 출신들은 "넌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말만 꺼내더라도 "최고 정치 교육을 받고 있는 놈이 우리 정치 제도에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숙청될 수 있다. 이는 김일성대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전체가 다 마찬가지로 상호 감시와 밀고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한다.

3. 역사

의외로 설립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북한은 처음에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비록 소련을 등에 업고 들어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국내파·친소련파·친중국파 등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지지가 아주 확고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초창기의 김일성은 최유력자일 뿐이였지 절대권력자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서는 종합대학을 설립할 예산을 돌려 경제 건설을 하자는 주장이 우세했고, 경제 건설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 기존의 전문학교들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으며, 그 동안의 대학 교육 수요는 소련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자 중 한명에 불과했던 김일성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대가 개교하면서 자극을 받은 김일성이 종합대학 설립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김일성은 종합대학 설립에 의욕적이어서 군사 예산까지 전용해서 종합대학 설립에 보탤 정도였다. 그리고는 청원 형식을 빌려 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개교를 강행했다. 하지만 급하게 설립하다 보니 설립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교사를 갖추지 못하고 평양에 산재한 여러 근대적 건물에서[9]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평양에 있던 두 구제전문학교인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舊대동공업전문학교)였다. 두 전문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고 평양 도심에 있었기 때문이다.[10] 일제강점기 평양의 구제전문학교였던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11]를 각각 의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삼아 종합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학생과 교원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에는 제대로 된 학위를 갖고 대학 수업을 할 정도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학 교육 자체를 이수할 수 있을 정도의 중등교육을 받은 학생도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북한 지역에 대한 차별이 내려온 것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공계 분야의 조선인 박사 자체가 12명에 불과했으며, 공업은 북한 지역이 오히려 남한 지역보다 발달하여 그렇게 못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 차별은 경제, 문화 분야에는 없고 정치적으로 비명문가라면 지역에 무관하게 누구나 당하던 것이, 외침과 늦은 영토 편입으로 명문가가 적은 북쪽이 심한 경향이 있던 것이었다. 구한말 정도 되면 더 변방인 함경도 출신 이용익도 조정의 총애를 받아 제도적으로 이미 지방 출신은 배제하던 명문가 위주의 출세 경향이 잦아드는 추세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정치적 배제가 결과적으로 정치 대신 교육 기관을 차리게 하여 교육 여건을 좋게 만들었으며, 일제강점기 무렵에도 평안남도 지역은 초등교육 이수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으며, 경성제국대학, 전문대학에 서북출신이나 평안도 출신의 비중이 많았다는 연구마저 존재한다. # 애초에 그 차별이라는 것도 전통적 명문가가 적어 승진이 어려운 것이었지, 과거 합격 자체는 많이 하는 등 교육열은 나쁘지 않았다. 이광수, 백석, 석주명 같이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어 인구 자체가 남한보다 희소하고 이념적 요소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해 인재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광복당시를 기준으로 북한 지역 전체를 통틀어 대학 및 관공립 전문학교 졸업자는 30~40명에 불과했고, 이학(자연과학) 계통 조선인 교수는 평양공업전문학교에 단 3명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한다. 상기한 임시위원회가 소련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 것도 당장 국내에서는 쓸 인원이 없었던 문제 때문이었는데 그걸 간과하고 급하게 개교부터 하니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교원뿐 아니라 학생의 수와 질까지도 열악한 상황에서 결국 북한에선 당시 혼란에 빠져 있던 남한의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을 포섭하거나 납치했고, 한국 전쟁 와중에는 별도 편성부대에 특명을 내려 학자들을 추적 납치해갔다고 한다. 이렇게 끌어모은 교원들이 초기 김일성종합대학 설립과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설립 작업의 초창기 직후부터 소련의 방침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직원들은 예외없이 러시아어 학습부터 시작해서 강도높은 소련식 재교육을 받고 핵심 교원들은 길든 짧든 현지 유학을 다녀와야 했다. 북한 정권은 교수진 확충과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개교 직후인 9월 18일 1차로 299명의 학생을 선발해 소련 모스크바종합대학, 레닌그라드종합대학, 우랄종합공과대학 등에 유학생으로 파견했고, 1년 뒤인 1947년 8월 24일 2차로 105명의 대학생과 15명의 연구생(대학교수, 중등교원, 고급기술자) 역시 소련에 파견했다. 소련에 유학을 다녀온 인적 자원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의 근간을 구성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일성종합대학의 편제는 당시 모스크바 대학교를 본 따 소련식 학제로 철저하게 개편되었다.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해서 서울대학교를 개교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의 ' 국대안'에 반발한 학자와 학생 일부가 월북해서 김일성대 설립에 참여했다. 그 결과 초창기 김일성대는 월북 인사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월북 인사들의 규모나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과거의 자료들은 월북 인사들의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나, 2020년대 들어선 그러한 경향성이 자료의 완결성이나 낮은 접근 용이성 때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해방 직후의 '경성대학', '서울대학'의 공식적인 교직원 및 재학생 명부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당시 재직, 재학했던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자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차검증 등 타당성을 갖춘 자료가 완성된 것은 2010년대 후반이다. 이러한 자료에 따르면, 학부마다 10~45%에 이르는 교직원이 자신 월북이나 납북 등으로 북한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12]된다. 결과적으로, 월북 인사들의 비율이 과반은 아니지만, 초기 북한의 고등교육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미군정기 서울대가 행정적으로 미국식 학제로 개편된 것은 맞지만 경성제대-경성대학으로 이어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인문대, 사회대, 자연대)과 의과대학은 실질적으로는 경성제국대학 도쿄제대, 교토제대 제국대학 출신 교수들이 대다수였고, 나머지 교수들도 미국 유학파는 없다시피하고 대부분 일본 대학[13]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본식 교육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대한(對韓) 원조의 일환으로 미네소타 대학교과 계약을 맺고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의학 공학 농학 행정학 등의 학문분야에서 서울대학교의 교수 및 조교들을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시켜 미국식 학문을 이식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실시했을 정도이다. 교육학술 내용이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변화되는 것은 1960년대 이후 미국 유학파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히려 소련공산당의 영도하에 중앙집권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한국 전쟁 기간에도 지속된 김일성종합대학의 소련화'가 훨씬 빠르고 철저했다.

6.25 전쟁당시 태극기가 게양된 적이 있다.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평양 전투에서 북진한 대한민국 육군 소속 제7보병사단 8연대 9중대가 평양에 진입한 후 태극기를 게양한 곳이 바로 이곳 김일성대학이다. 유엔군의 북진을 피해 평안북도로 피신했던 김일성종합대학은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한 이후에도 유엔군의 공습으로 인해 평양으로 복귀하지는 못 한 태 순천시 자모산 인근에 임시 캠퍼스를 차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가 1955년에 현 위치로 이동했다.

6.25 전쟁 이후 대학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고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자, 설립을 반대했던 이들은 친소련 대국주의자나 친미 끄나풀로 몰려 숙청을 당했다. 또한, 남한에서 월북한 지식인들의 상당수도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사상 검증을 받거나 숙청당했다[14].

4. 입학 과정

직통생은 고급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에 해당)[15]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온 학생들을 말한다. 남한식으로 말하면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말한다. 한국에서 현역 서울대 의대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북한에서도 웬만한 수재가 아니라면 상상도 못한다. 시험에 떨어지면 군대에 입대되거나 직장에 배치된다.[16] 출신 성분과 성적 모두 우수한 금수저에 사기캐인 직통생은 전체 입학생중에서 60~7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군인 출신에게 30~40% 할당되며 과거 30%대에서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즉 남자로만 치면 반이상이 제대군인이다. 여자의 군복무 기간은 남자보다 짧기 때문에 군 추천을 거의 못 받는다고 보면된다. 더군다나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특정연도에는 직통생을 안뽑는 학번도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1학년도에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교한채 나머지 재학생도 평양의 아파트 공사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2012학년도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직통생을 모집했다.

제대 군인은 군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사람들이며 상당수는 김씨부자와 가까운 호위사령부 출신이다. 이들은 원하는 과에 자동입학하고 사고만 안치면 성적과 관계없이 졸업하며 간부로 등용된다. 나머지 경우 군제대생은 로동당 입당이 군생활을 최소 8년이상 해야 하기 때문에 출신 집안이 좋다기보다는 군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추천된 인원이다. 북한군은 원칙적으로 모두 하전사로 입대하고 4~5년차에 군관 후보생을 선발하여 군관학교로 보내고, 군관학교 졸업 후 임관하는데[* 토대는 좋으나 빽이 없는 경우 군관으로 잘 선발되는데 정작 있는집 자식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집안의 토대가 좋더라도 초중고등학교시기 조직생활평정서 평점이 낮으면 절대로 입학 할 수 없다. 학급 활동 뿐만 아니라 소년단과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사로청)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김일성대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6촌 이내는 모두 성분이 좋아야만 한다.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가(당성을 고려한 출신 성분)와 얼마나 김씨 일가에 충성심을 바쳐야 하는가(정치조직생활의 평점)가 당락을 좌우한다. 입학 정원은 정치적인 할당제로 운용되어, 제대군인 몫 할당제가 약 3~40%정도 차지하고 재일교포와 지방에서도 선발되기 때문에 모든 입학자가 당간부나 군관 자식들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 대학을 나온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제일 부잣집 자식은 김대에 다니고, 북한에서 제일 가난한 학생도 김대에 다닌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돈만 많으면 아무리 멍청해도 갈 수 있고 반대로 아무리 가난한 서민집 자식이라도 성적만 좋으면 갈 수 있다고 한다.[17] 모든 것이 썩은 북한이지만 교육만은 덜 썩었다고. 그래서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기회인 자식 교육에 목숨 거는 부모들이 많아서 고등중학교 교사들이 뇌물 수익이 쏠쏠한 반면, 대학에서는 직업 배치나 성적에 교수가 관여할 수가 없어서 대학교수들은 김대 교수라도 중산층 수준도 못산다고 한다. 졸업할 때 대학 교원으로 배치되면 다들 한숨을 쉰다고 한다.

매년 2월에 본고사 시험을 치르고 4월에 신학기를 시작한다. 입학 시험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 등 사상과목과 역사·지리·영어·수학·물리·화학까지 총 7과목이다. 본래는 국어가 있었지만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국어를 빼고 역사와 지리를 넣었다고 한다. 의외로 제일 어려워하는 게 역사 과목이라는데, 북한에서는 봉건사회의 역사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근현대사 이전을 사실상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18] 대부분의 북한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성계 말고는 아는 왕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반대로 혁명역사 과목은 가장 수업시간이 긴 데 비해서 배점은 다른 과목과 같기 때문에 사실상 변별력이 없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본고사에는 수험생들을 대학 체육관에 모아놓고 교수들이 직접 시험감독을 담당한다. 시험이 끝난 이후에는 모아둔 시험지들을 다른 대학으로 옮긴 후 엄격한 감시 하에서 채점한다.

2014년부터 한국 운전면허시험처럼 컴퓨터로 객관식 시험을 보고 바로 점수가 뜨는 방식이 도입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채점에 대한 부정 청탁이 너무 많아서이다. 한 해는 교내 보위부원 전체가 부정 청탁을 승낙한 죄로 끌려간 적도 있다고 한다. 시험 답안지를 학교간에 미공개 셔플해서 채점하는 방식도 도입해 봤지만 큰 효과가 없어서 결국 주관식 시험 제도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수험생들이 전부 평양까지 갈 필요 없이 각 지역에 있는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면 된다고 한다.

편입학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북한 대학 자체가 성적뿐만 아니라 당성도 보기 때문에 어디든 편입이 불가능하다.

5. 학과

2019년 10월에 학부제로 개편되었다. 사회과학 부문은 4.5년제, 대다수의 자연과학 부문은 5년제, 정보과학부의 경우 4.5년제인데, 이 중 프로그람학과의 경우 2년제라고 한다. 각 학부들에는 6.5년제의 본과-박사원련속반도 있다고 한다.

5.1. 사회과학부(4년제 과정)

5.2. 자연과학부

5년제 과정이다. 김대 사회과학부를 졸업하면 당 간부 루트를 밟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힘 있는 사람들의 자식이 많은데 비해서, 자연과학부에는 반대로 머리만 좋은 애들이 많다고 한다.

5.3. 재교육학부

2000년 이후에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부는 본과를 졸업한 후 3~5년간 일하다가 자기의 연구 성과를 점검하거나 새로운 발전 내용을 다시 학습하기 위해 대학에 나와 일정 시간을 공부한다. 이 학부의 학제 기간은 대체로 두 달간이다. 즉, 해마다 두 번씩 한 번에 두 달씩 공부하는데 철학, 력사, 경제, 외국어, 수학, 물리학과 등을 두고 있다.

5.4. 기타 학과

5.5. 기타

위는 정규 과정에 해당하고, 김여정 물리학과에 6개월짜리 속성 코스를 특별히 만들어서 재학했다.

학과별 영향력으로 건물층이 다르다고 한다. 중퇴생 김금혁에 따르면 문과 학과는 22층 짜리 한 건물[28]에서 수업하는데 1~3층은 공동 공간으로 4층부터 22층까지 전력난으로 엘리베이터를 쓸수 없기에 지상에서 가까울 수록 선호한다고 한다. 어문학과는 4~5층, 정치경제학과는 6~7층, 최상층인 22층에는 종교학과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2010년에 별개의 대학이었던 평양의학대학평양농업대학, 계응상농업대학이 김일성종합대학의 부속대학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에 이들 대학이 다시 독립했다. 전공에 따라서 야간반/ 통신반도 있다. 공과대학에 해당하는 학과는 일부밖에 없다. 이쪽은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쪽은 적대계층만 아니라면 출신 성분 필요없이 성적 위주로 선발한다. 인문사회계열에 비해서는 정치색이 옅은 곳이기 때문이다.

6. 학사 운영

흔히 생각하는 대학교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운영된다. 북한은 대학 안에 학부로 구성돼 있는데, 전시체계로 운영하다보니 한개 학부가 연대로 편성돼 있다. 학과 대대, 학년 중대, 학급 소대로 불리며 각 편제마다 연대장, 대대장 등 학생 책임자가 있다. 이렇게 학급 단위로 운영되어 김일성종합대학 콤퓨터과학대학 4중대 1소대 식, 정경 1소대 김정일 같은 식으로 불린다.[29] 지정좌석제를 모든 수업에서 시행해 태만한 학생을 쉽게 잡아낸다고 한다.

규찰대(한국의 선도부)를 운영해서 학교 주위를 순찰하며 교칙 위반을 잡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서 캠퍼스 내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을 마시면 바로 퇴학이다. 통제가 어느 정도나면 조선인민군에 복무하는 기간이 기숙사에 있는 것보다 기강이 약하고 편하다고 한다. 물론 조선인민군은 성추행, 성폭행, 구타 및 가혹행위, 뇌물 수수,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지옥 그 자체인 군대고, 부대 배치에 따라 분위기 역시 다르다. 수도 평양 한복판에서 감시의 눈빛이 여기저기 있으니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등교할 때 마다 무조건 김일성 동상 앞에 가서 인사를 해야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 대학 조교에 해당하는 청년동맹 비서들이 확인한다.

이렇게 대학생 신분임에도 군대보다 강한 군기를 잡는 이유는, 제대 후 입학한 예비역들은 물론이고 직통생도 2학년 때 6개월간 군사교육을 수료하면 예비역 군관 자격증이 나오기 때문이다. 졸업생 주성하 기자도 자신의 고사포중대 중대장 자격증을 인증 한적이 있으며, 전시에는 후방 고사포중대가 아니라 전연군단 사단의 정치장교로 파견된다고 한다.

유학생들의 경우 생각보다 여러 나라에서 유학을 많이 가는데 주로 중국이긴 하지만 서방이나 동남아 등에서도 유학을 온다. 알렉 시글리의 말에 따르면 어떤 동남아 학생들은 '코리아' 정부에서 장학금 준다는 말에 덮어놓고 왔다가 도착하고 나서야 자기들이 '노스코리아'에 온 사실을 깨닫고는 좌절해서 시체처럼 기숙사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중국 학생들은 집에 돈은 많은데 차마 중국 대학에 갈 성적이 안되고 그렇다고 한국, 일본, 미국, 서유럽으로 유학을 가기에는 너무 머리가 나쁜 애들이 돈을 처발라서 입학하는 경우와 정말 한국 유학은 가고 싶은데 돈이 안 돼서 오는 성실한 명문대 교환학생으로 나뉜다고 한다. 명문대생들은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북한 교수들과도 친해지지만 돈 발라서 온 애들은 김대에 에어컨 기증하는 식으로 시험이고 뭐고 프리패스라서 4년 내내 있으면서 북한말로 간단한 인사도 못하는 인간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베트남인 유학생 부 비엣 느아는 "수업이 끝나면 인민대학습당[30]에 가서 공부를 해요. 김일성대 학생들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요. 북한 최고 수재들만 모였어요."라고 말했다. 중국인 유학생 왕틴찬은 "김일성대학 학생들은 모두 공부벌레다. 캠퍼스는 다람쥐와 꿩이 수시로 나타날 만큼 아름답지만 학생들의 관심은 오로지 공부다. 놀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험이 너무 많아 공부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년 유학비는 기숙사비와 학비를 포함해서 7,300달러(약 805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평점은 5, 4, 3, 2, 1점 (A~F)이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에서 쓰던 채점법이 그대로 넘어온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학교에서의 수강 신청과는 달리 수강 신청의 개념이 없고 학교에서 정해 준 대로 수업을 들으며 한 학기당 4~5개 과목 정도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탈북기자 주성하는 대학 전체 공통과목 17개(김일성주의노작, 김일성주의기본, 혁명역사, 주체철학, 제2외국어, 조국통일 및 남조선문제, 미일제국주의 조선침략사, 환경보호 등이 있으며), 전공 13개 과목으로 30개 과목을 배우고 졸업했다. 이 중 6개는 P/F이고 24개는 점수가 나오는 과목이다. 수강 신청에는 자율권이 없고 대학 본부에서 결정한다.

수업당 시간은 45분이고 주당 50시간 정도 진행된다. 학기는 2학기로 상반 학기와 하반 학기로 구분된다.[31] 북한은 1996년부터 새 학기를 4월에 시작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8시 30분에 시작하고 겨울철에는 아침 9시에 시작한다.

졸업시험은 김일성주의노작, 외국어, 전공과목, 졸업논문이라는 4개 과목에 한해 치른다.

오전에 90분 수업을 3개 들으면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는 자습시간과 당 및 사회단체의 활동 시간이다. 그런데 김일성대에서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보다 북한에서 헌법을 능가하는 규범인 "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 문답식 경연이 더욱 중요하다고 한다. 작은 책 한 권 내용을 완전히 외워 암송하는 방식으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사상 투쟁 무대에 올라 비판의 대상이 되며, 한 단락을 빼먹거나 몇 단어를 틀리다간 퇴학당할 수도 있어 끝내고 나면 눈물까지 흘린다고 한다.

거기에 주체사상·조선로동당투쟁사·마르크스-레닌주의철학·혁명전통 등의 정치 과목이 전체 교과 과정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필수교양인데다가, 매년 250시간 가량의 군사학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특히 2002년부터는 주체사상 수업이 대폭 확대되어 쓸데없는 학습 부담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김일성동지 혁명력사" 필수과목을 담당한 여교원이 7.4 남북공동성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수령님의 회담 전략 이후락을 쩔쩔 매게 했습니다. 회담 때문에 온 이후락을 우선 극도로 피곤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소에서 잠자리에 들자마자 곧바로 깨웠습니다. 그때가 새벽 1시였습니다. 새벽 1시에 차에 태워 싣고 가니 이후락은 혹시 총살하는 줄 알고 겁에 질려 쩔쩔 맸습니다. 도착한 곳에서 이후락은 열려진 문 사이로 '어서오라. 이후락'[32] 하는 우렁우렁한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예상도 못하고 수령님을 만나게 된 이후락은 이후 '예, 예' 하면서 홀린 듯이 우리 제안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이후락이 갈 때 수령님이 성천 담배 2박스를 선물로 주었습니다.[33] 이후락은 이 담배 때문에 실각됐다고 합니다. 담배 맛에 홀린 이후락이 박정희에게 이 담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몰래 피웠다고 합니다. 원래 이후락은 박정희의 심복이었으나 북에서 받아온 담배를 몰래 피운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이때부터 이후락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구실을 붙여 잘라 버렸으니 결국 이후락은 성천 담배 때문에 실각된 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일성의 회담 전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후락은 김일성과 만날 시간을 지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방북 첫날 긴장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으며, 잠이 들락말락하던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갑자기 북한 당국자들이 깨워서 차에 태워 갔다고 한다. 이때 이후락은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대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김일성. 하필 이때 이후락이 가지고 있던 약이 녹아버려서 바로 악수할 때 손을 내밀지 못해서, 김일성이 순간 멈칫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락이 김일성에 꼼짝 못 했다거나, 담배 때문에 실각했다는 건 북한의 허위주장[34]이지만 이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돈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 및 1986년 월간조선 이후락 인터뷰 참조.[35]

다만, 김정은 정권 들어서 실용주의적 기풍이 확산되며 위와 같이 사상을 강조하는 학풍은 크게 완화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선집을 외우는 것에 대한 평가가 폐지되었고,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암기 경연대회를 여는 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김정은이 직접 학술 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해서 정치 과목 비율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관측된다. 사실, 상술된 충공깽스러운 에피소드들은 김정일 정권 초반기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사회 기반이 흔들리자 내부 기강을 잡기 위한 강박적인 압박의 차원이 컸다. 이 때도 모든 사람이 선집을 외웠다기 보단 선집을 잘 외우는 사람들을 내세우거나 신입생들의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보여주기식 정치 선전의 색이 짙었다.

굉장히 똑똑한 학생은 조기졸업이 가능하며 박사학위도 굉장히 빨리 받는다. 예로 2010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육과학연구쎈터 소장을 맡고 있는 리관호를 들 수 있다. 리관호는 평양제1고등중학교[36]를 나와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진학했는데, 남들이 5년(자연과학부 학사과정은 보통 5년) 배울 수학과 물리학을 2년 만에 이수해서 '고체의 열력학적상태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3학년(21세) 때 학사 학위를 얻었다. 26세 때 생체물리학 분야에서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자체 조직화 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28세 때 부교수가 되었다. 31세 현재 (2002년) 물리학부 생체물리학 부문 강좌장을 맡았다. 당시 영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나 31세까지 결혼을 하지 못해서 어머니가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자연계열 박사학위 취득에는 평균 63개월 (5년 3개월)이 소요되고 석사학위 취득에는 2년이 걸린다. 상당히 빠른 과정을 밟더라도 만 29세는 되어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해외 논문이 차단되어 연구 수준이 낮고, 교육 과정의 약 40%가 김씨 부자 찬양이나 군사학에 낭비되고 있다. 실습도 엉망인데, 30년 전에 쓰이던 도구와 중국제 싸구려 약품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문학, 이공계 쪽 이론 교육에 사용되는 학부 교재는 거의 최신이다. 러시아, 미국 원서를 보기 때문이다. 영문학과 출신 김금혁 씨도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재들로 수업을 했으며, 교실 내 TV를 통해 BBC 뉴스를 시청했다고 증언했다.

사상과 관계된 내용은 최신이든 고전이든 모두 금지이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90년대에는 학부생들에게는 완전히 금지였다. 금서를 밤에 몰래 필사해서 돌려보는 비밀 독서회 같은 식으로 공부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것도 다 금서이다. 90년대에 돌아다니던 책 중에는 '미국 개관' (500여쪽)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철저한 정보통제를 받고 있던 학부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식량 생산이 한 해 6억t, 농부는 전체 인구의 2.5%, 농업 비중은 GDP의 4% 정도였다고 쓰여 있었는데 이는 북한 대학생들에게는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2010년 데일리NK 보도에 따르면 위키백과 200여 쪽 인쇄본으로 돌아다니면서 비슷한 충격을 주고 있다.
파일:정치경제학_기말시험.jpg
여담으로 한 때 인터넷상에 김일성종합대학 정경대학 기말고사 시험 문제가 떠돌아다닌 적이 있다. 저 수식은 실제 있는 수식이다. 스탈린주의 문서의 잉여가치 문단 참조.

단 조작된 이미지라는 설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북한 문화어에서 '동지'는 앞말과 붙여 쓴다. '동지'뿐 아니라 '장군' 등의 직함 역시 앞말과 붙여 쓰게 되어 있다. 즉 "위대한 김일성 동지" 운운한 대목은 "위대한 김일성동지"가 되어야 맞는다. 특히 북한 인쇄물에서 김일성과 관련된 문구에는 절대로 오자가 있을 수 없다. 북한 관련 문서에서 유용한 진위 판별법. '있다' 등의 보조 용언도 문화어 표기에서는 모두 앞의 본용언과 붙여 쓰게 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는 띄어져 있다. 아울러 의존명사도 붙여쓰는 것이 문화어의 정서법인데 그렇지 않다. 게다가 벡터는 문화어에서 '벡토르'라고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고, 같은 이유에서 '열벡터(列vector)'역시 '렬벡토르'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작의 여지가 있다. 어떤 경제학과 학생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지어낸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6.1. 논문

고등학생 수준의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순위만 보면 북한은 4~6위 정도로 굉장히 높은 순위에 있다.[37] 하지만 세계 연구와 비교해 수준은 처참하게 뒤떨어진다. 왜냐하면 북한이 폐쇄적인 국가라서 국제 학술지의 논문을 거의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해외 논문을 거의 읽지 못하고, 연구의 논문의 인용 관계 대부분은 거의 99%가 북한 내부의 논문끼리 인용한 것이다.[38] 천재급 실력과 당성 모두를 인정받아서 해외 학회를 참석해서 구글 검색을 하든지, 중국 학자와 공동연구를 통해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써내는 식이다. 대한수학회 회장에 따르면, "가끔 해외 학회에서 북한 수학자들을 만나면 논문 한 편이라도 더 보려고 시간을 쪼개서 북한에서는 금지된 구글 검색을 하더라"고 말했다. 거의 모든 연구논문의 머리말에는 반드시 김일성 혹은 김정일 혁명력사에서 한 구절을 따와서 "수령님/장군님이 이렇게 교시하였으므로 이렇게 연구하였다"라는 구절이 붙어있다. 해당 연구가 북한 체제에 반하는 성격이 아니며, 따라서 연구해도 괜찮다는 근거가 있음을 김씨 일가의 어록을 통해 증명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썼다는 김일성종합대학의 논문이 있는데, 교양 보고서만도 못한 불쏘시개다. 내용 또한 막장인데, 소위 학술적 글쓰기라고 할 만한 객관성과 이성적 태도를 전혀 갖추지 못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북한 자체가 수령의 교시로 움직이는 막장 집단이라 학문의 객관성과 엄밀성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그런 국가에서 백두혈통이 쓴 논문을 제대로 심사할 리가 없다. 극히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북한에서 발간되는 논문과 학술서적, 통계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지면, 김정일은 대기업이나 군산복합체와 같은 대독점체[39]가 해외침략이나 신식민주의정책[40] 등을 통해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현대 제국주의의 특징이라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평화조약이나 후진국에 대한 원조와 같은 현대수정주의자(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이기 때문에 김정일은 이들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유럽, 미국, 중남미, 일본 등 전 세계의 급진좌파 계열에서 오랫동안 논의되던 이야기로 새롭지도 않고 독창적인 해석도 전혀 없다. 엄격하게 본다면 사회과학 논문이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짜집기한 대중선동연설에 가깝다.

과거에 국제 연구를 거의 하지 못했던 데 비해, 요즘은 그나마 조금씩 하고 있다. 북한의 SCI급 연구는 2005년에서 2015년까지 260편이다.[41] 그 중 32편은 다른 나라 학자와 공동연구하지 않고 북한 안에서만 연구해서 실은 것이다.

200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한송철 교수가 최초로 한국 수학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42]

2010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의 김남철, 고명철, 임송진 및 Qu-Quan Wang (중국 우한대학 물리학과)에서 ' Switching of a single propagating plasmon by two quantum dots system'라는 논문을 Applied Physics Letter에 실었다.[43]

2016년 말 북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과학자는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강좌장인 강진우 박사(37)로 총 8편의 SCI급 논문을 발표했다. 입자물리학을 전공했으며 북한 최초로 국제이론물리센터의 회원이 됐다.[44] 논문 보기. 독일에 유학하여 러시아 출신의 우주론 학자인 무카노프 박사 밑에서 수학했다.
물리학부 교원 강진우 동무는 암흑에네르기에 대한 새로운 량자마당론을 비롯하여 현대소립자 우주론에서 난문제의 하나로 나서고 있는 우주의 시원과 진화에 대한 소립자리론모형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세계물리학계의 일류학자들과 어깨를 당당히 겨루고있다.

2018년 9월 4일 김일성대 리일남 교수 등이 국내 IT 학회에 논문을 게재해서 화제가 되었다.

6.2. 졸업장

파일:external/blog.donga.com/20090211015848.gif
주성하 기자가 공개한 본인의 졸업장 사진으로, 신변과 관련된 정보들은 가린 상태이다.

파일:김일성종합대학 졸업증.jpg
21세기 이후에는 양식이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7. 캠퍼스

건물 사진 보러가기

8. 역대 총장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에는 역대 총장 목록도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숙청당하거나 탈북한 인물들은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때문에 중간중간 비어 있는 인물들이 있다.

참고로 김정일 시대 말기인 2010년에 교육성이 교육위원회로 승격되면서 산하에 보통교육성과 고등교육성을 설치, 김일성종합대학총장이 고등교육상을 겸하게 했으나 2023년에 교육위원회가 교육성으로 환원되면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름 재직기간 비고
김두봉 1946 ~ 1948 숙청으로 목록에서 제명됨
명예직 총장[45]
허헌 1948 ~ 1951
유성훈 1952 ~ 1959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 목록에서 제명됨
하앙천 1960 ~ 1965 1965년 숙청, 목록에서 제명됨
황장엽 1965 ~ 1979 1997년 탈북하여 목록에서 제명됨
지창익 1979 ~ 1986
박관오 1986 ~ 2004
성자립 2004 ~ 2013
태형철 2013 ~ 2019
최상건 2019 ~ 2020 2021년 숙청, 목록에서 제명되었다가 2022년 재등재[46]
리국철 2021 [47]
김승찬 2021 ~ 현직

9. 통일 후 전망

일단 지역거점국립대학교 체계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으며 인근 단과 대학인 김책공과대학, 평양외국어대학, 평양의학대학,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무용종합대학, 이과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 김형직사범대학 등과 통합할 가능성이 높다. 대학의 수가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많고, 이북 지역 역시 출생율이 높지 않다보니 대학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북대학교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 대구의학전문학교를 합병해서 구성된 것, 서울대학교 경성제국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48], 경성고등공과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을 합쳐서 구성된 것과 같이 평양에 있는 국립대학들도 하나로 합칠 가능성이 높다.

당장 교육대학 지역거점국립대학교과 통합하고 있고, 일부 대학 외에는 국립대학마저 폐교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사립대학에 대한 지원금을 서서히 줄이고 그 자원으로 지역거점국립대학교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잡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종합대학도 평양대학교로 개편할 가능성이 높다. 그 대신 캠퍼스가 낙후되었기 때문에 이전하고 새로운 장비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

교수들도 북한계 교수는 대거 해임될 확률이 높은데, 주체사상 교육 교수나 정치외교학과, 경제학과 교수들은 해고될 것이 확정적이고 인문학, 사회과학 부분의 교수들도 역량부족이나 사상문제로 해임될 확률이 높다. 이공계와 자연계 교수들 중에서만 북한출신 교수로써 살아남을 확률이 있다. 그리고 미국인, 영국인 등 외국인 교수가 영어영문학과, 영어교육과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높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서구권 언어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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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출신 인물

11. 사건·사고

12. 여담

1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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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북한에서 '마크'라고 부른다. 현판, 마크, 교가, 교기, 모표, 휘장, 졸업증, 졸업생휘장이 대학 공식 상징이다. [A]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 기준이며 정확한 수치는 미상 [A] [4] 이 위치는 일제강점기 평양의학전문학교가 있던 곳이다. [5] 서울대학교의 경우는 교수 1,895명에 학부생 16,712명과 대학원생 11,299명으로 학생은 약 28,000명 정도다. [6] 김일성의 자녀들 중 김정일, 김평일, 김경희는 경제학부를, 김영일은 물리학부를 나왔다. 그러나 김정일의 자녀들은 김여정(물리학부)을 제외하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는지 확실하지 않다. [7] 적대계층은 일반대학 진학도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일명 149호라고 부르는 반동집안은 해안과 국경에서 수십킬로 이격된 내륙에만 거주해야 한다. [8] 다만 이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출세는 불가능해서 이곳 진학을 포기하고 다른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간부인사는 절대적으로 토대 성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9] 서울대학교도 개교 직후부터 대학로 시절까지는 각 단과대학들의 전신 학교들이 있던 곳에서 나누어 수업을 했다. [10] 일례로 평양공업전문학교는 보통문 인근에 있었다. [11] 사족으로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당은 본래 평양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자진폐교했다. 이 부지에 대동공업전문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가 관립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되고 광복 이후 김일성대 공대로 편입, 단과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졸지에 평양 숭실대 자리에 김일성대가 들어선 꼴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때문에 숭실대 커뮤니티에선 가끔 통일되면 평양에 공대캠퍼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12] 특히, 이러한 인사 중엔 법문학부의 백남운, 박극채, 손진태(납북), 의학부의 이정복(납북), 최응석, 최희영, 이공학부의 도상록, 전평수, 여경구, 이승기 등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급 학자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3] 히토쓰바시대학 등 관공립대학 및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주오대학, 호세이대학, 메이지대학 등 사립대학 [14] 이 때 북한정권이 활용한 사상 검증 방법이 판문점 등 휴전선 인근으로 이들을 데려와 대한민국 지역을 보여주며 심경을 묻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파주가 고향인 한 학자가 대답을 머뭇거리며 저쪽이 우리 고향집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정기 인사 때 공장 노동자로 보내졌다고 한다. [15] 북한은 2004년 대대적인 학제 개편으로 9월 학기제를 4월 학기제로 고쳤으며,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각각 소학교와 중학교로 개칭했다. 2012년 학제 개편으로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로 나뉘었다. [16] 도마다 하나씩 있는 1중 출신들은 김대 탈락시 다른 일반대학교 재시험 기회가 있다. [17] 주성하의 증언에 따르면 가난하지만 성적이나 생활에 문제가 없는 김대생 및 명문대생에게 생활비를 후원해주는 대신 졸업 후에 자기 딸과 결혼시키는 부자들도 꽤 있다고 한다. 이런 후원자를 잡으면 생활비뿐 아니라 졸업 때 예비사위의 직업 배치를 위해 힘을 써주거나, 심지어 딸밖에 없으면 데릴사위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생 역전을 하게 된다고 한다. 대신 만약 배신하거나 바람 피우면 피의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18] 초등학교 때 2년 동안 주1회 수업으로 한반도의 전근대사와 세계사를 다 배운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런 것도 있다고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다. 근현대사는 김일성 혁명역사 위주다. [19] '통제'라고 하니까 쓸데없어보이지만 사회주의 경제학의 큰 축 중 하나인 계획경제 이론을 가르치는 나름 중추 학과이다. [20] 이 학과도 간판만 보면 놀랍지만 실상은 그리 희한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조종은 제어(control), 조종학은 제어공학을 말한다. 조종학은 최적화의 일종으로 기계공학, 전자공학, 경제학 등에 쓰인다. 북한에서 '경제조종학'이라 말하는 것은 최적제어론같이 동태적 최적화를 수리경제학에 응용하는 것을 말한다. [21] 통합경영정보체계 프로그람( ERP) 같은 것을 만드는 곳이다. 우리가 말하는 정보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22] 학생들이 교수들보다 더 힘이 세다고 한다. 다른 학과 선배라도 경제학부 후배한테 먼저 인사를 할 정도라고 한다. 한 예로 축제 때 보위부에서 강제로 천막 등을 걷자 경제학부 학생이 나 누구 아들인데 밥만 먹고 치우겠다 라고 하자 보위부가 그냥 갔다는 일화도 있다. [23] 과거에는 아예 대놓고 김일성동지혁명력사학과, 김정일동지혁명력사학과가 있었으나, 김정은 시기에 이 둘이 통폐합되고 학과 명칭도 혁명력사학과로 변경되었다. 교과 과정도 우상화 색이 빠지고 북한의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개편은 김정은 자체가 외국 유학 경험도 있고, 김일성대학은 북한 내의 외국에서 유학한 학자들이 모여 있는 대학이다보니 조금이나마 국제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24] 김일성종합대학의 종교학과는 본래 북한 내 관제 개신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기관의 종사원을 양성하는 기능을 맡았으나, 2000년을 전후로 양성기능은 각 관제 종교 기관으로 이양하였다. 양성 기능 시기엔 매년 20-30명 정도를 선발해 관제 종교 기관의 직원이나 해당 기관에서 근무할 종교인을 양성했었다. 이때 양성된 종사원들은 명목상으로만 종교인이고, 실상은 지하 종교 조직원 색출, 대외 공작원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국제 사회에선 이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했다. 현재는 학문으로서의 종교학 과정으로 개편되어 매년 5명 내외의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참고로 전 세계에서 특정 인물을 연구하는 학과는 김일성대학의 저 두 학과와 우루과이에 있는 몬테비데오 국립대학의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학과밖에 없다. 영남대학교에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이 있으나, 박정희 개인이 아닌 새마을 운동을 연구하는 대학원이다. 다만 단순히 인물명으로 따진다면 배재대학교의 단과대학명이 인물 이름이다. 이외에 리버풀호프 대학에 비틀즈 대학원이 있으며, 교양과목으로 범위를 넓히면 마돈나 등이 있다. 그 외에도 J. R. R. 톨킨 작품과 김용무협 소설 등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 작가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지 작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아니기에 좀 애매한 경우다. [25] 대남 공작 기관, 우당 (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 국립 종교단체 (불교도연맹, 그리스도교연맹, 카톨릭교협회)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두 평양에 있다. [26] 이전에는 북한 내 법학 고등교육기관이 김일성종합대학에 유일하게 있다는 기술이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방에 단과법률(학)대학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 대학을 졸업해도 사법분야로 직장 배치를 받을 수 있다. [27] 각 시·도에 한 개교씩 설치되어 있다 [28] 맨 위 왼쪽 사진에도 있는 2호교사를 말한다. [29] 남한에도 주로 이과대와 공대에서 전공을 확정하기 전에 임시로 반(班)을 편성하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 이렇게 편성하면 과가 갈라져도 은근히 내부 결속이 남아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 이외에도 "분반" 개념으로 나누는 학과들도 있다. [30] 국립중앙도서관과 유사한 장소 [31] 5~1점 성적 표기, 미리 정해진 수업 시간표는 공산권 국가들의 대학교육 방식이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의 대학들에서도 볼 수 있다. [32] 실제 김일성은 이후락에게 '이 부장 선생', 이후락은 김일성에게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선생' 칭호는 북한 체제 밖에 있는 외부 인사를 적당히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다.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을 쓰려고 방북했을 당시 사람들이 다들 본인을 '교수 선생'이라고들 불렀다고 회고했다. [33] 성천은 조선 후기부터 담배의 특산지였으며, 성천 담배는 성천초(成川草)로 불렸다. 성천뿐만 아니라 평안도 일대가 담배 재배에 알맞아서 평안도 담배는 서초(西草)로 불렸다고. [34] 이후락이 중정부장에서 쫓겨난 진짜 계기는 충성 경쟁을 하려다 독단으로 일으킨 김대중 납치 사건 때문이었다. [35] 2009년 이후락 사망 이후 월간조선에 한 번 더 실렸다. [36] 각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을 제1중학교에 모으고, 그 중 가장 뛰어난 학생을 평양제1중학교에 모아서 공부시킨다. 국제 과학 올림피아드 대비도 평양제1중학교에서 한다. [37] 그러나, 북한은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유일하게, 또 두 번씩(1991, 2010)이나 반칙을 저질렀다. [38] 물론 이공계열 학생들은 미국이나 러시아 원서로 공부하고 있다. [39] 독점자본 [40] 위성국가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 [41] 이 수치는 매년 20여 편에 해당한다. 참고로 서울대학교는 SCI급 논문을 매년 4,000여 편, 지역 국립대인 공주대학교는 매년 400여 편, 지역 사립대인 영남대학교도 매년 200여 편 이상 SCI급 논문을 내놓고 있다. 매년 300편 이상 SCI급 논문을 발표하는 국내 대학은 30개 교 이상이다. 즉 수치상으로 보자면 북한의 최고대학들의 연구성과가 한국 최고 대학은커녕 지역 대학보다 한참 떨어지는 것이다. 북한 사회의 폐쇄성과 여러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최고의 인재가 모여있는 종합대학에서 SCI급 논문을 매년 20여 편 이하 내놓는 연구성과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연구의 환경이 열악하다고 볼 수 있다. [42] Wei Yao (화베이과학대학), 한송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On ideals, filters and congruences in inclines", 대한수학회보 (2009) [43] 인서울 중위권 대학교의 고체-응집물리 박사과정에서는 APL급 2편 이상이 졸업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44] 이 센터는 개발도상국의 물리와 수학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탈리아 정부가 1964년 세운 이론물리 및 수학 연구소다. [45] 실질적으로는 부총장이었던 한빈이 총장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46] 숙청 후에 재등재되었기 때문에 사형당했거나 정치범수용소로 간 것은 아니고, 혁명화 재교육 혹은 한직으로 쫓겨나는 등의 가벼운 조치로 보인다. [47] 해임당했지만 숙청은 아니고 평교수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48]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49]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면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은 수용소에 가게 되더라도 혁명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나중에 복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