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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01

청산리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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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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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靑山里方法 / Chongsanri Method
국가는 군중로선을 구현하며 모든 사업에서 우가 아래를 도와주고 대중속에 들어가 문제해결의 방도를 찾으며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워 대중의 자각적열성을 불러일으키는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관철한다.
북한 헌법, 제13조

북한 김일성이 제시한 농업부문에서의 경제 관리 겸 대중 지도 방안. '청산리 정신(靑山里精神, Chongsanri Spirit)\'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 대안의 사업체계'[1]가 공업부문에서의 지침인 것과 비교된다고 할 수 있다.

2. 역사

"청산리 방법"이라는 이름은, 김일성이 1960년 2월경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의 협동농장에서 그곳 농민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지낸 뒤 교시하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1950년대 말) 북한은, 전후복구와 농업집단화를 마치고 천리마 운동을 한창 진행하던 상태였다.김일성은 북한 농업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때 내린 교시, 즉 청산리 방법의 핵심 내용은, 1) 위아래가 서로 도와줄 것, 2)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 3) 대민사업과 정치사업을 중시할 것, 4) 대중의 자발적인 열성과 창의성을 동원할 것 등이었다. 즉 거창하게 말하면 "당 소속 지도 일꾼이 현장에서 군중과 함께 고생해가며 일하면서 군중의 사상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창조적 지혜와 적극성을 발동시켜 당 정책 관철에 혁신을 일으키도록 한다", 풀어서 말하면 "조직의 관료제화를 경계하고, 인민들에게는 로동당이 공산주의 사상을 투철하게 주입시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놀랍게도 이 방법은 한 몇 년 간은 꽤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생산이라는 목표만 가지고 채찍질을 가한 게 아닌 당원-즉 사회 지도층-과 함께 일하며 사상 교육을 겸하며 받아가는 관료주의의 극복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창조성 유도라는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경제적으로 잘 발전되기 시작했고(!) 사회 도덕 규범도 잘 세워져 나름 괜찮은 나라가 되려고 했었다. 탈북자의 실제 증언에 의하면 한 마을 사람들끼리 문도 안 닫고 지냈다고. 그러나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 세대가 등장하고, 60년대 문화 중 일부가 낡은 사상으로 규정되는 등 물갈이가 다시 한번 진행되면서 정작 정치사업을 틀어쥔 당의 권위만 강해졌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고 말았다. 그래도 농촌 사람들의 도덕 규범 같은건 쭉 유지되었지만 고난의 행군으로 완전히 개박살이 나면서 지금 북한의 상황으로는 이때 농촌의 분위기나 도덕성으로 되돌려놓는것도 어려울 지경이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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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체적으로 공업부문을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대안의 사업체계’가 채택되었다. 1961년 12월에 김일성은 대안전기공장에 머물면서 공장 운영과 노동자들의 형편을 살핀 다음 ‘대안의 사업체계’를 제시하였다. 예전에는 지배인 한 명이 공장 운영 전체를 책임지는 지배인유일관리제로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당 위원회가 집단지도를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업을 당 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진행하고 정치사업을 앞세우며 위가 아래를 책임지고 도와주는 경제관리 체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