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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3:29:47

3대혁명소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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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결성과 활동3. 몰락과 이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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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정일의 주도로 북한에서 1973년 2월 시작된 정치 운동이다.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이라고도 부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3대혁명전시관이 건립되었다.

"3대 혁명"이란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의미한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 수~수십 명의 대학생과 간부 등으로 이루어진 '소조'를 공장이나 기업소 등의 현장에 파견하여 현장의 간부·기술자와 노동자·농민을 지도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 결성과 활동

3대혁명소조운동은 1960년대 갑산파의 숙청과 더불어 그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면적으로는 김정일이 당과 국가에 대하여 당중앙 령도체계 확립을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점차 정체의 징후를 보이던 북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목적으로 추진하였다. 실질적으로는 북한 전역에 김정일 자신의 명령체계를 세움으로써 직접적인 감시와 통제를 한결 용이하게 하려 한 것이 목적이다.

1973년 2월 공식적으로 발기된 3대혁명소조들은 본격적으로 북한 각지의 기업소·공장·농장에 투입되어 사상적·기술적 지도를 진행했다. 이 3대혁명소조운동은 중앙당에서 파견된 대규모의 인원이 장기간 머무르며 지도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부정기적, 일시적으로 진행되었던 지도운동과 차이점이 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노동당은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젊고 충성심이 강한 엘리트들을 뽑아 소조원으로 육성하였고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소조운동을 독려하면서 한편으로 당의 정책에 위반되는 사항을 낱낱이 찾아내 보고했다. 당시 김정일은 소조원에 대해 “당에서 파견한 특사이자 암행어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소조운동이 나름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1974년 2월 3대혁명소조를 당중앙위원회가 통일적. 직접적으로 지도한다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운영되던 3대혁명소조 종합실을 당중앙위원회의 산하 기구인 3대혁명소조 지휘부로 개편하는 등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소조원의 역할은 명목상으로는 3대 혁명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도록 지도와 감독을 맡는 것이었으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부 단위의 비리와 불온한 활동을 캐내서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일종의 사상검증과 첩보활동이었다. 즉, 김정일 앞에 모든 기관과 조직이 무조건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현장에서는 혁명소조들원들이 보신주의와 낡은 사상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적극적으로 현장에 간섭하면서 일을 담당하던 기존의 실무자나 간부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는데, 중앙당의 막강한 위세를 등에 업고 있던 소조원들은 자신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은 중앙당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실무자들의 반발을 억눌렀다.

덕분에 이 시기에 혁명정신이 부족하다거나 당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상당한 숙청이 벌어졌다. 이전에 북한에서 벌어진 숙청이 거의 모두 정치인들끼리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면 이 소조운동으로 인한 숙청은 정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탈북자 중 북한의 전 외교관 고영환의 발언에 따르면 대학교에서 교무과를 통해 학생을 숙청했는데 한 반당 학생 숙청 비율만 해도 무려 30%였다고 한다. 대학교만 해도 이런 수준이니 다른 곳에서도 숙청이 어떤 수준으로 전개됐을 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숙청을 당한 인물은 벌금을 물거나 보직해임을 당했으며 사안이 중대한 경우에는 교화소로 끌려갔다.

이 3대혁명소조운동은 주체사상 등과 더불어 김일성부자의 우상화와 1당독재체제를 일상의 영역까지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북한에서는 사적인 모임이나 개인간의 만남에서도 섣불리 김일성부자나 북한 노동당을 섣불리 비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불온한 발언이나 활동을 접하고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신고해서 김일성 부자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폐쇄사회가 이 때 도래하였다.

3. 몰락과 이후

김정일의 후광으로 1980년대까지 잘나가던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의 후계자구도 확립과 경제침체 등을 겪으며 쇠퇴하기 시작한다.

3대혁명소조운동의 가시적인 성과를 가장 직관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생산성 향상 즉 경제성장이었는데, 이 소조운동은 애초에 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북한의 경제체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생산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는 단순히 감시체계 강화나 선전활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문성이 부족하고 당에 대한 충성심만 강했던 소조원들이 최고존엄의 친위대 행세를 하면서 기존의 행정,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간부들을 위축시켰던 탓에 생산성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때문에 당에서 지시한 생산목표를 완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조원들은 실적을 부풀려서 보고하거나 뇌물을 주고 다른 곳에서 물건을 빼돌려 충당하는 등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중앙당에서 소조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권한이 강화되자 소조원들이 현장에서 기존의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월권행위를 저지르는 문제가 많이 발생했는데, 이는 당연히 현장 간부들과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과는 능률과 생산성의 악화로 돌아왔다. 한편으로 소조운동이 확대되면서 조직이 비대해졌고 이는 중앙당의 자금압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김일성의 후계자 구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 김정일은 정치적 이용가치가 떨어진 소조운동에 대한 지원을 점차 줄여나갔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경제가 완전히 파탄나면서 조직 자체가 사실상 와해된다.

조직은 사라졌지만 소조운동 자체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이후에도 북한에서는 종종 정치적인 이유로 3대혁명소조운동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2021년 김정은은 제5차 3대혁명 선구자대회에서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강화해야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