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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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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000> 일제강점기의 시인
김소월
金素月 | Kim So-wol
파일:김소월.png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그의 손자 김영돈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초상화.
본명 김정식(金廷湜, Kim Jung-sik)[1]
출생 1902년 9월 7일[2]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량동
(現 평안북도 구성시 금산리[3])
사망 1934년 12월 24일 (향년 32세)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남시리[4]
(現 평양시 방현동[5])
원적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6]
본관 공주 김씨(公州 金氏)[7]
소월()
직업 시인
학력 남산보통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중퇴)[8]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상과대학 전문부 (중퇴)
부모 부친 - 김성도
모친 - 장경숙
부인 홍단실
자녀 슬하 4남 2녀

1. 개요2. 생애3. 기타4. 작품 목록5. 가족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진달래꽃》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냈다.

2. 생애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아버지 김성도(金性燾, 1863.5.13. ~ ?)와 어머니 인동 장씨 장경숙(張景淑, 1882.7.15. ~ ?)[9]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는데 김소월도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왔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10]
파일:attachment/71629_36820_2929.gif
오산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던 오산학교(五山學校)[11] 중학부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던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12]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13]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았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이후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했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14]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약 4개월간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머무는 동안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소설가 나도향[15]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하며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가 아편을 먹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가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3. 기타

4. 작품 목록

[ 진달래꽃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엄마야 누나야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19]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산유화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먼 후일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20]
[ 초혼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접동새 ]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21]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

[22]
[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 次岸曙先生 三水甲山韻 ]
삼수갑산(三水甲山)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寄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山疊疊)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드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23]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귀로 들었노라

만수산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 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내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5. 가족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실단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6.25 전쟁 도중 요절했으며, 3남 김정호는 조선인민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3년 후에 대한민국 국군에 자진하여 재입대하였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에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김소월의 시에 대한 지적재산권조차도 없으며 시인의 아들이라는 혜택도 전혀 못 받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24]의 병수발을 평생 들어줬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남한에 아버지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고 싶어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녀 김은숙과 손자 김영돈,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엠피그룹측에서 광고를 낼 때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준 돈 약간뿐이라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소월 문학관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2003년 소설가 겸 한의사로 유명한 (사)새한국문학회 경암 이철호 이사장이 김소월의 후손들로부터 2003년 김소월 문학기념사업의 모든 권한을 일임받아 2019년 사재 40억원을 들여 충북 증평군에 ‘소월·경암 문학관’을 개관했다. [25]

6.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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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ddd><colbgcolor=#87cefa,#010101><colcolor=#fff,#ddd> 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1910년대 상징주의 시 (김억) · 현대적 자유시 ( 주요한) 신소설 ( 이인직 · 이해조 · 최찬식)
1920년대
동인지 시대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시 ( 이상화) ·
김소월[1] · 한용운[2]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 김동인)
자연주의 · 사실주의 소설
( 염상섭 · 현진건)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 신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1930년대 시문학파[3] ( 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1940년대
~ 광복
청록파 · 저항시 ( 이육사 · 윤동주 · 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1960년대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참여문학 순수문학
1970년대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1980년대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1990년대
~ 현재
생태시 · 해체시 (도시시 · 일상시) · 메타시 · 디카시 일상 소설 · 다문화 문학 · 소수자 문학(퀴어, 페미니즘) 장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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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 [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 [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 [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 [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 태평천하, 염상섭 삼대가 있다. [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 [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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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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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1] 공주김씨곽산파세보 167쪽에는 金湜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음력 8월 6일. [3] 이북5도 행정구역으로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 [4] 출처. [5] 평안북도 한가운데에 있는 지역이 평양 소속이냐면 이곳에 북한의 전략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어 김정은이 주민들에게 특혜를 내려 준다는 의미에서 2018년 2월 10일에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구 구성군 방현면 하단동, 와룡동, 창동 일대)만 평양에 월경지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6] 공주 김씨 집성촌이다. [7] #. 곽산파(郭山派) 20세 정(珽) 항렬. [8] 백인제, 백석, 김홍일, 함석헌, 황순원,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다닌 학교다. 지금은 서울특별시에 있지만 당시에는 평안북도에 있었다. 김소월이 재적할 때 3.1 운동의 영향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배재고보로 편입 이적했다. [9] 구성군 서산면 왕량동 출신으로, 장재온(張載蘊)의 딸이다. [10] 그녀는 김소월보다 오래 살아서 훗날 김소월에 관한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11]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 [12]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김소월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물이다. 평소 김소월은 김억을 존경했으며 김소월의 유고 시인 < 삼수갑산>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시다. 다만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의혹이 있다. [13] 김소월의 시 중 <제이 엠 에스(JMS)>라는 시가 있는데 조만식의 이니셜을 따서 지은 것이다. [14] 김소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쿄 유학파였다. [15] < 벙어리 삼룡이>를 쓴 작가다. [16] 특히 소월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실질적인 가장의 의무를 하지 못한 것을 본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말년에 집안의 가장으로써 돈을 못 벌어 오는 자신의 모습에 굉장히 우울해했다고 한다. [17] 다만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짧은 활동 기간 및 생애로 인해 현실을 비판하는 성격의 시를 발표할 여건은 안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8] 다만 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라이벌격인 윤동주 서시 역시 매우 유명하다. [19] 발표 당시에는 이 부분이 '반짝는'이라고 되어 있었다. 글자수를 맞추려고 일부러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20] 김소월이 중학생 때 쓴 시다. [21] 접동새 전설을 모티브로 삼은 듯한 시로, 접동새 전설에서 접동새는 부모를 잃은 뒤 9명의 오빠와 같이 살던 어린 누이동생이 계모의 계속된 학대를 이기지 못하였는데 평소 남매를 시기해 오던 계모에 의해 장롱 속에 감금되어 불타 죽은 뒤 장롱 속에서 그 영혼이 새로 다시 태어난 접동새가 나왔다고 하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누이동생을 죽인 계모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는데, 여기서는 까마귀가 나왔고 까마귀가 되어서까지 접동새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독한 새로 나온다. 그래서 접동새는 까마귀가 된 계모가 무서워 죽어서까지도 낮에 맘 편히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밤에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한다. [22] 주로 민요적이고 여성적인 느낌의 시를 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성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시다. [23] 김소월이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다. [24] 1999년 별세. [25] 총 3층 규모로 1층 전시관에는 소월의 친필 작품집 300여권과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손편지, 가계도와 연보 등을 전시해 그의 생애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게끔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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