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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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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웅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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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야구의 역사와 전설들
핸드프린팅 등록 선수

on 2018. 3. 17. 대구 시민 야구장 재개장 기념 설문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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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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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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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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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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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강민호
박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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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
정진호
(1983~1986)
강기웅
(1989~1996)
김태균
(1997~2002. 4. 2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7번
이경록
(2011)
강기웅
(2012~2018)
김용달
(20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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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tf.co.kr/201569411432386467.jpg
강기웅
姜起雄 | Kang Ki Woong
출생 1964년 2월 25일 ([age(1964-02-25)]세)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수창초 - 경상중 - 대구고 - 영남대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7년 1차 지명 ( 삼성)[1]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87~1988)
삼성 라이온즈 (1989~1996)
현대 유니콘스 (1997)[2]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11~2012)[3]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타격코치 (2013~2016)
경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9~2020)
삼성 라이온즈 BBArk 지도위원 (2014~2016)
삼성 라이온즈 BBArk 타격코치 (2017~2018)
병역 예술체육요원[4]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2루수, 등번호는 6번이었다. 오른손 장효조, 천재라고 불리던 선수였다.

선수를 띄워주기 위해 천재라 불린 게 아니라, 정말로 야구 센스가 뛰어났다. 삼성 팬들은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이 있다면, 삼성에는 강기웅이 있었다는 말을 할 정도다. 최고의 컨택 능력과 빠른 뱃 스피드가 결합되어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장타력을 갖췄고, 빠른 빨과 뛰어난 수비를 갖춘 2루수로 사랑받았다. 다만 천부적인 컨택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타격 경향 때문이었는지 볼넷 수는 적었고, 타율에 비해서 출루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즉, 말하자면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 물론 이런 선수들이 다 그렇듯이 삼진도 볼넷 못지않게 적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대구수창초, 경상중, 대구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 선동렬, 김건우[5], 조계현 등과 함께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영남대를 졸업한 후 1987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3순위 지명을 받지만,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 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6] 삼성에 입단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실업 야구에서 활약하는 동안 홈런, 타점, 도루 세 타이틀은 모두 강기웅의 차지였다. 파워 히터가 아님에도 1988년 봄에는 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전무후무한 5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7] 또한 1988년 10월 25일 제일은행과의 경기 때에는 안타, 2루타, 홈런을 기록한 상황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 위해 홈런을 치고도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고 들어온 적이 있다. 누의 공과로 3루타로 인정받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그러나 상대 팀에서 이를 눈치채고 고의로 누의 공과를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필 플레이에서 어필을 하지 않으면 아웃되지 않는 규정에 의해 결국 홈런으로 기록되었다(…).[8] 기록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이라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하여간 강기웅은 실업 무대에서도 그만큼 독보적인 선수였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2루수 부문 수상자 (1989, 1990, 1993)
파일:external/photo.jtbc.joins.com/20120209104200420.jpg

프로 입단 첫해인 1989년에는 19승을 기록한 태평양 투수 박정현에게 밀려 신인왕은 놓쳤으나,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이 해에 타율에서 5리 차이로 밀려 타격왕을 놓쳤지만, 어쨌든 타선에서 장효조의 빈 자리를 메우는 데 성공했다.

데뷔년도인 1989년부터 1993년까지의 5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매해 wRC+ 110 이상을 찍어 주며 1989년, 1990년, 1993년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최전성기인 1993년에는 타율 0.325에 16홈런 20도루에 모든 타격 부문에서 10위 안에 들어가면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쳤고, sWAR 5.26, wRC+ 158.3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 후보에도 올랐다.

프로에 와서 타격 못지 않게 돋보였던 점은 몸을 사리지 않으며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수비로, 유격수 류중일과 키스톤 콤비는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손꼽힌다.[9]

다만 체력이 약한 게 큰 단점으로 지적되었으며, 약한 체력 탓에 훈련량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비운의 천재'라는 별명이 잇따랐다. 또한 1990년 LG, 1993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1995년 5월 13일 한화와 경기에서 수비를 하던 중 이승엽과 부딪혀 발목 부상을 당하며 하락세가 시작되었고, 그 여파인지 동계 훈련을 하지 못하며 몸을 만들지 못해 이듬해인 1996년에는 겨우 11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한다.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뒤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백인천 감독에 의해 외야수 이희성, 투수 최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강기웅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된 직후 돌연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현대 구단이 그의 마음을 돌리려 어르고 달래 봤으나 포기하고 결국 1997년 시즌 시작 직전 임의탈퇴 공시, 결국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는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강기웅이 이적을 거부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현대 유니콘스는 결국 선수 2명을 삼성 라이온즈에 거저 준 셈이 됐다. 하지만 이희성도 삼성에서 1군 13경기에만 출장했고, 최광훈은 아예 1군에 오르지 못해 이 트레이드는 양 구단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어쩌면 선수 두 명을 정리해서 재정 부담이 조금이라도 줄은 현대가 굳이 따지자면 승자일지도.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한때 야구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장인 소유의 병원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2007년에 병원이 부도나며 그마저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2010년 1월 인터뷰를 통해 간만에 근황을 드러냈다. 1996년 당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한 것에 대해서는,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10]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며 당시 현역 은퇴 결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동시에 아직까지는 지도자로 프로야구계에 복귀할 생각이 없으며, 청과 유통 사업을 하면서 영남대와 경북고에서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다고 근황을 알렸다.

강기웅과 황금의 키스톤 콤비였던 류중일 작전코치가 2011년부터 삼성의 감독에 선임되었는데, 당시 삼성 팬들의 여론이 예전 황금 콤비였던 강기웅을 코치로 선임하라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인터뷰를 보면 강기웅 본인은 현장을 너무 오래 떠난 탓도 있고, 아직 복귀 의사가 없다고 얘기했는데...

결국 2011년 8월 10일,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로 영입되며 15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현역 시절 강기웅과 환상의 키스톤 콤비였던 류중일 감독의 끊임없는 구애가 결국은 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 어찌됐던 여러 사정으로 야구계에서 선을 긋고 있던 강기웅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야구센스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타고난 센스와 두뇌를 가진 강기웅이니 만큼 코치로써 좋은 역할을 해줄것이란 기대가 많다.

한편 강기웅을 코치로 영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삼성 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어졌는데, 첫째는 우선 팀 레전드 출신이자 안타깝게 은퇴한 강기웅이 다시 코치로 복귀한다는 건에 대해 환영한다는 의견, 나머지 의견은 아무리 팀 레전드라도 야구계를 떠난 지 15년이 넘었는데 과연 프로 팀 지도자로써 실적을 쌓을 수 있을지, 거기에 막상 지도자로 영입해 놨는데 실패할 경우 프랜차이즈로서의 명성에 빛이 바랠지에 대한 우려 반이었다. 물론 2009년 말부터 강릉영동대를 시작으로 영남대와 경북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약했지만, 강기웅 본인이 야구계를 떠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적응 기간이 상당히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본인의 의지에 따라 그런 공백 따위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채태인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2군에서 다독여 주고 타격 폼도 교정시켜 주는 등, 채태인의 부활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결국 2013년에 이승엽의 삽질을 덮어준 맹활약으로 그를 욕하던 수많은 팬들이 대거 회개의 길로 돌아섰고, 2015년 들어서도 여전히 반성 중이다.

2014년 시즌부터는 카도쿠라 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인 BB 아크의 육성 위원으로 활동한다. 2017년 4월 1군 성적 부진으로 코칭스태프가 교체되면서 기존에는 BB 아크와 3군 타격코치를 겸임하다가 BB 아크와 2군 타격코치를 겸임했다. 2016년 삼성 2군이 팀 역사상 최악의 승률을 기록한 것과 달리 2017년에는 예년 수준으로 회복했는데, 특히 타격 지표가 전반적으로 상향됐다. 그리고 2017년 시즌에 1할 타율도 안 되던 다린 러프를 2군에서 손을 보았는데, 그렇게 복귀한 러프는 어느새 3할 타율을 넘었고 타점 1위까지 해냈다!

2018년 상무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던 이영수를 2군 타격코치로 영입하면서 다시 BB아크 코치에만 전념하게 됐다.

2018 시즌 이후 삼성과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났다. 항간에서는 과거 키스톤을 구성했었던 류중일이 감독으로 있는 LG 트윈스의 코치로 간다는 썰이 돌기도 했으나 아니었다.

2018년 12월 24일 경주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떴다. 삼성 시절 선배였던 김용국이 경주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부름을 받은 듯.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삼성 95 351 .322
(2위)
113
(5위)
12 4 1 33 48 26
(4위)
20 .387 .351
1990 108 391 .271 106 16 3 15
(5위)
58 59 24
(3위)
36 .442 .329
1991 68 228 .303 69 14 3 6 26 30 10 23 .469 .365
1992 126 405 .304 123 19 3 16 56 68 13 36 .484 .353
1993 102 379 .325
(2위)
123 15 2 16
(4위)
75
(3위)
60 20 28 .501
(4위)
.366
1994 107 332 .244 81 12 3 4 36 35 12 41 .334 .324
1995 55 177 .271 48 4 0 3 19 25 6 16 .345 .327
1996 11 24 .167 4 3 0 0 1 3 0 0 .292 .167
KBO 통산
(8시즌)
672 2287 .292 667 95 18 61 304 328 111 200 .429 .344

5. 여담

파일:강기웅발차기.jpg

KBO 사상 최악의 벤치클리어링으로 남아 있는 삼성과 OB 벤치클리어링의 주역이었다. 때는 1990년 6월 5일로, 잠실구장에서 더블헤더 1차전 7회초에 9:4의 스코어로 삼성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운드에 있던 투수는 OB의 김진규 투수였고, 타석에는 강기웅이 들어와있었는데, 초구부터 대놓고 머리쪽으로, 게다가 당일 3타수 무안타였기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그리고 김진규가 던진 2구에 옆구리를 그대로 강타하자, 강기웅은 배트를 든 상태 그대로 마운드로 달려나가 김진규를 상대로 발길질을 했고, 곧바로 삼성과 OB의 선수들도 우르르 쏟아져 나오면서 벤치클리어링이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뛰쳐나온 동료들은 싸움을 말리는 대신, 오히려 주먹과 발길질을 보태면서 진짜 패싸움으로 변해버렸는데, 사실 이는 일찍이 예고된 벤치클리어링이나 다름없었다. 원년부터 챔피언 자리를 놓고 다툰 라이벌이었으며, OB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영덕, 김성근의 결별, OB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막기 위해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일부러 지는 등, 악연이 해결되기는 커녕 원한만 더 쌓여가고 있었기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날의 벤치클리어링은 무려 22분이나 지속되었으며, 싸움을 말리던 주심 김동앙은 누군가에게 발길질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 후, 벤치클리어링의 주역인 강기웅과 김진규, 삼성의 김종갑, 박정환, OB의 조범현, 김태형 이렇게 여섯 선수가 퇴장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으며, 강기웅과 OB의 이복근은 경찰서에 형사입건되어 조사까지 받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최악의 벤치클리어링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관한 자세한 내막이 실려있으니 좀 더 알고 싶으면 들어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 그해 5월 19일 LG와 더블헤더에서 무려 9안타를 치면서 더블헤더 최다안타 기록도 가지고 있다.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카드를 출시할 때 강기웅 레전드 카드 역시 출시된다고 발표하자 통산 600안타가 어떻게 레전드냐며 수많은 유저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결국 출시가 취소된 일이 있었다. 엘리트 카드 추가될 때나 잠재력 시스템이 추가될 때엔 삼성에 이미 김성래가 있다는 이유로 엘리트 카드도 하이점프캐치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구마구 내에서는 이래저래 불운한 편. 거기에 더해 마구마구2014에서 강기웅 선수의 가명은 인도형이다(…). 이후 2024년 4월 30일 업데이트로 93년 시즌의 엘리트카드가 추가되면서 약 13년만에 삼성덱 유저들이 강기웅을 쓸 수 있게되었다.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유저들의 큰 반발없이[11] 삼성의 2루 레전드 카드로 출시되었으나.. 레기웅에게 붙은 별명은 다름아닌 레동찬(…). 프야매에서 모든 카드를 통틀어 히든이 안 좋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조동찬 만큼이나 스탯값을 못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으로, 상위 리그에서는 1할 후반~2할 초반에 간신히 20-20을 넘기는 성적을 찍다보니 2루수가 구멍인 삼덱들만[12] 억지로 쓰는 카드가 되었었다. 하지만 재평가 이후로는 레전드에서도 2할 중후반~3할에 30-20이상을 하는 등 삼성 레전드 타자 중 최고의 진리카드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자세한건 항목참고

2013년 넥센과 두산의 준플레이오프에 전력분석팀으로 갔다. 3차전 '장기영의 총검술'로 회자되는 번트 실패 삼진 상황 당시 1B 2S 되고 나서 장기영이 3루 코치 최만호와 이야기하고 타석에 들어오고 나서 자세 잡고 흙 고르고 있을 때 '저 놈 저거 분명 번트댄다'고 예언했다. 다른 전력분석관들이 2스트 상황에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는데 장기영 번트 아웃. 주위에 앉은 전력분석관들이 다 쳐다봤다고. 2013년 10월 15일에 방송된 사사구 92회에 나온 내용[13]이다. 그때 일화를 보면 강기웅은 코치진 대숙청 때도 살아남은 이유가 있는 거다.

2015년 8월 18일 강기웅이 구자욱을 칭찬하는 기사가 나왔다. 참고로 구자욱도 대구고 출신이라 강기웅에게는 고교 후배다.

양준혁과는 같은 영남대 출신 선후배 관계인데, 양준혁이 삼성에 갓 입단했던 신인 시절 때 같은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본인이 후배였던 양준혁을 각별하게 챙겨주면서 그의 성장에도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2016년 3월 19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삼성 OB 레전드와 연예인 야구단과의 개장 기념 경기 중 비공식이지만 최초로 라팍에서 홈런을 쏜 주인공이 되었다. 좌익수 쪽 펜스를 살짝 넘기는 홈런.

6. 관련 문서


[1] 지명 후 실업 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 2년 후인 삼성 입단은 1989년. [2] 1997 시즌 시작 전 임의탈퇴. 본인이 흑역사로 치부하는 부문이다. "내 몸에 파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찌 다른 팀엘 갈수 있겠냐"고 울분을 토했고 1994년 정동진 당시 태평양 감독이 강기웅에게 트레이드로 영입하겠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 정동진 감독님. 저 트레이드되면 야구 안 합니다."라고 못박았을 정도. 강기웅 본인은 삼성에서 뛰고 삼성에서 은퇴한 원 클럽 플레이어로 자부하는 상황이었다. [3] 8월 10일~ [4]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5]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 제한에 걸렸기 때문. [6] 당시만 해도 프로 선수는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송진우도 같은 케이스. 영남대 시절에는 훗날 같은 팀에서 키스톤으로 뛰게 되는 류중일과 함께 당시 야구가 시범종목이었던 LA 올림픽에 참가한 적도 있다. [7] 2경기에 3연타석-2연타석을 친 것으로, 한 경기는 아니다. [8] 홈런으로 인정받자, 강기웅의 소속 팀인 한국화장품 감독이 사이클링 히트로 만들어 주기 위해, 홈 플레이트를 밟지 않았으니 아웃이 아니냐고 오히려 항의했다고 한다(…). [9] 이 둘뿐만 아니라 2루수에서 1루수로 전향한 김성래, 3루수 김용국까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내야진이었다. 그러나 은퇴할 때까지 삼성에서 선수로 몸담은 류중일을 제외하곤 모두 삼성과 갈등을 빚거나 하며 안 좋게 팀을 떠났다. 그리고 2011년 8월 10일 부로 모두 다시 삼성 라이온즈에 모였다. [10] 축구선수 조원희도 현역 은퇴를 선언했을 때 비슷한 말을 했다. [11] 심재학이 두산 레전드로 책정된다거나, 다니엘 리오스가 두산 뿐만 아니라 기아 레전드로도 나오는 등 워낙 프야매의 레전드 책정 기준이 희한해서 유저들이 강기웅 정도면 당연히 레전드 출시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었다. [12] 거기에 하필 당시 삼성의 2루수 클카는 모두 쓰레기였다(…). 김동재는 기본 수비등급이 너무 낮게 책정돼서 교타 110과 수비S를 양립시키는건 스타작이 없던 당시 상황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클래식 강기웅은 히든도 문제지만 기본 스탯도 낮고 선호타선이 하필 밸런스니 쓰일리가... 물론 이 역시도 과거형 이야기로 이후의 클래식 카드 대량 업데이트를 통해 추가된 정경배 박종호가 진리카드가 되면서 삼성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13] 12분 40초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