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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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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아 전투
루마니아어: Bătălia de la Baia
파일:바이아 전투.jpg
시기 1467년 12월 14일 ~ 12월 15일
장소 몰다비아 공국 바이아
원인 트란실바니아의 반란을 사주한 슈테판 3세를 응징하려는 마차시 1세의 원정.
교전국 파일:몰다비아 국기.svg 몰다비아 공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458-1490).svg.png 헝가리 왕국
지휘관 파일:몰다비아 국기.svg 슈테판 3세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458-1490).svg.png 마차시 1세
병력 12,000명 25,000명, 대포 500문
피해 미상 4,000 ~ 10,000명
결과 몰다비아 공국의 승리.
영향 몰다비아 공국의 독립 확보.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clearfix]

1. 개요

1467년 12월 14일 ~ 15일, 슈테판 3세가 이끄는 몰다비아 공국군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헝가리 왕국 보야르였던 드라고슈 몰다비아 공국을 건국한 이래, 몰다비아 공국은 헝가리 왕국의 봉신이었다. 제3대 보이보드 보그단 1세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공물을 끊었지만, 1370년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 폴란드 왕국의 국왕까지 겸하면서 동쪽과 북쪽 모두에서 몰다비아 공국을 압박하자, 당시 몰다비아 보이보드였던 라슈쿠가 헝가리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고 공물을 바쳤다.

1432년 1월 제10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1세가 사망한 이래, 몰다비아 공국은 그의 자식 및 손자들이 보이보드 직위를 놓고 오랫동안 내전을 벌이면서 혼란해졌다. 이때 그들은 이웃한 강대국인 헝가리 왕국 및 폴란드 왕국의 힘을 빌려 경쟁자를 제거해 보이보드 직위를 독차지하려 애썼고, 자연히 몰다비아에 대한 두 나라의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던 1457년, 슈테판 3세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블라드 3세의 지원을 받아 경쟁자 페트루 4세 아론을 축출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폴란드 왕국이 그를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몰다비아-폴란드 국경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그러다가 1459년 4월 4일 드니스테르 강에서 폴란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타타르에 맞서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슈테판 3세가 적과 맞서 싸울 때 돕겠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이 몰다비아로 돌아오는 걸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페트루 4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해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란트에 정착했다.

1461년, 슈테판 3세는 세케이란트를 여러 차례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그를 피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로 이동해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 슈테판 3세는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킬리야 시와 체타티아 알바 성이 있는 부자크 일대를 탈환하려 했다. 이 지역은 원래 왈라키아에 속했지만 14세기 후반에 몰다비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진 동안 왈라키아에 돌아갔고, 킬리야는 헝가리와 왈라키아가 공동 통치했다. 1462년 6월 말, 왈라키아 보이보드 블라드 3세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와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 슈테판 3세는 킬리야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는 오스만 분견대와 함께 요새를 8일간 포위했지만, 헝가리와 왈라키아 수비대 7,000명에게 격파되었다. 이때 그는 왼쪽 종아리 또는 왼쪽 발이 파편에 박히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평생 왼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1465년 1월 24일, 슈테판 3세는 다시 킬리야를 포위 공격해 이틀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1467년 8월 18일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이 세금 면제 특권을 회수한 마차시 1세의 결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지카, 슈테판 3세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세케이란트로 진군했다. 하지만 마차시 1세는 그해 9월 군대를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반란군을 복종시키고 주동자들을 처벌한 뒤, 슈테판 3세를 반란의 주동자로 낙인찍고 보복을 결정했다. 1467년 11월, 마차시 1세는 대군[1]을 일으켜 브라쇼브를 떠나 오이투즈 고개를 거쳐 몰다비아로 향했다. 이에 맞서는 슈테판 3세의 병력은 12,000명이었다.

11월 19일 트로투술을 공략하고 바카우 목조 요새를 정복하고 불사른 마차시 1세는 시레 계곡을 지나 수체아바로 진군헀다. 11월 29일부터 12월 7일 사이에 로만, 타르구 네암츠를 점령헀고,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후 3일간의 행군과 약탈 끝에 1467년 12월 14일 당시 색슨족과 헝가리인이 거주했던 도시이자 가톨릭 주교좌의 소재지였던 바이아를 점령했다. 마차시 1세는 원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데 만족하며, 바이아에서 푹 쉬었다. 그러던 중 시토투스라는 헝가리계 귀족이 찾아와서 몰다비아군이 몰도바 강과 쇼무즈 개울 사이의 숲속에 진을 치고 있으며, 내일 해가 질 무렵에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에 마차시 1세는 성벽, 도랑, 마차 고리로 마이아 시를 요새화하라고 명령했고, 경비병들을 요충지에 배치했다. 그러나 몰다비아군이 예상과는 달리 더 빨리 공격하면서, 바이아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1467년 12월 14일 밤,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세 군데에 작은 분견대를 보내 바이아 시 인근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에 헝가리군이 혼란에 빠지자, 슈테판 3세는 부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지시한 뒤 곧바로 공세를 개시했다. 몰다비아군은 나무 방어벽에 불을 지른 뒤 도시로 난입했고, 헝가리군은 이에 맞서 싸웠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불길이 워낙 거세서 밤이 낮과 마찬가지로 밝아졌다고 한다. 두 군대는 성문을 사이에 두고 격투를 벌이다가, 이내 거리로 이어졌다. 마차시 1세는 나름대로 방어 준비를 했지만, 방어벽이 미처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터라 금세 뚫리고 말았고, 침략자들을 격멸하려는 몰다비아군의 의지가 강건했기에, 헝가리군은 점점 밀려났다.

이윽고 바이아 시에 완전히 진입한 몰다비아군은 중무장한 기사 및 귀족 200명으로 구성된 왕실 경비대에 둘러싸인 마차시 1세를 향해 공세를 벌였다. 마차시 1세는 중상을 입었지만, 왕실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바이아 시를 빠져나갔다. 슈테판 3세는 마차시 1세가 도망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분견대를 보내 퇴로를 미리 차단했지만, 그 부대를 이끌던 어느 보야르가 마차시 1세를 놓아주는 바람에 놓쳤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슈테판 3세는 이에 격분해 그 보야르를 죽였다고 한다. 몰다비아-게르만 연대기에 따르면, 이사야(Isaia)라는 인물이 헝가리군의 퇴각로를 막았지만 기병 공격을 벌이지 않고 놓아줬다. 이에 슈테판 3세는 그와 다른 이들을 나중에 처형했다고 한다.

4. 결과

마차시 1세는 부더로 돌아온 뒤 전투 중에 탈취한 몰다비아 군기를 부더의 볼도가초니 교회에 걸며 자기가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며, 헝가리 시인 체즈미체이 야노시(Csezmiczei János, 1434 ~ 1472)는 몰다비아군이 이 전투에서 참패해 11,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4,000명이 퇴각 중에 쓰러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대의 대다수 연대기는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완패했다고 밝혔다. 최소 4,000 ~ 10,000명 가량의 헝가리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막대한 양의 텐트, 마차, 대포 500문, 그리고 군기를 뺴앗겼다. 슈테판 3세는 카지미에시 4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헝가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고 밝혔다.

1469년 발행된 왕실 헌장에서, 마차시 1세는 바이아 전투 때 자신을 지킨 '검은 용병대' 인사들에게 영지와 자금을 하사했다. 그 해 슈테판 3세가 파견한 필리프 팝(Filip Pop)의 몰다비아군이 세클러란트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을 체포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에도 양자간의 갈등은 이어졌지만,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슈테판 3세가 헝가리 왕국에게 우호적으로 나오고 마차시 1세도 이에 응하면서 호전되었다. 양국은 1473년 왈라키아에서 오스만 제국이 내세운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3세를 축출하고 바사라브 3세를 옹립하는 데 협력했으며, 1474년 말 슈테판 3세가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대군과 맞서 싸울 때 헝가리 왕실군 1,800명과 세클러 병사 5,000명이 가세했다. 1475년 7월 12일, 슈테판 3세는 마차시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마차시 1세는 그해 8월 15일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슈테판 3세를 전적으로 지원하겠으며, 그에게 키세우 성채와 발타 성채를 파난처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1] 당대 사료에는 40,000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25,000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