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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4:33:47

루이 1세 도를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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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오를레앙 2대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Louis Ier d'Orléans
파일:루이 1세 도를레앙.jpg
이름 루이 1세 도를레앙
(Louis Ier d'Orléans)
출생 1372년 3월 13일
프랑스 왕국 파리 호텔 생폴
사망 1407년 11월 23일 (35세)
프랑스 왕국 파리 마레 지구
배우자 발렌티나 비스콘티 (1392년 결혼)
자녀 샤를 1세, 필리프, 장, 마르그리트, 장 드 뒤누아( 사생아)
아버지 샤를 5세
어머니 잔 드 부르봉
형제 샤를 6세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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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왕족. 형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으면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와 대립한 끝에 암살당했다.

2. 생애

1372년 3월 13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 호텔 생폴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인 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374년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의 국왕 러요시 1세의 딸 커털린과 약혼했다. 당시 러요시 1세에게는 커털린 외에 두 딸 마리어, 야드비가만 있었기 때문에, 러요시 1세가 사망하면 장녀 커털린이 헝가리 또는 폴란드의 여왕이 되므로, 루이는 헝가리 여왕의 남편으로서 헝가리나 폴란드의 국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78년 커털린이 요절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84년,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딸이자 러요시 1세의 왕비였던 엘리자베타는 차녀이자 헝가리 여왕 마리어의 약혼자인 지기스문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프랑스 국왕의 차남인 루이와 마리어를 결혼시키는 문제를 놓고 샤를 5세와 협상했다. 당시 서방교회 대분열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헝가리 왕국은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고 프랑스 왕국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결혼이 성립되기 힘들었지만, 엘리자베타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헝가리 왕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클레멘스 7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기스문트와 마리어의 약혼을 무효로 처리하겠다고 선언했고, 루이와 마리어 사이의 대리 결혼이 1385년 4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이단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프랑스의 왕자를 자국 여왕과 결혼시키기를 원하지 않았고, 지기스문트 역시 반발했다. 이에 엘리자베타는 루이 왕자와 마리어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슈트반 미클로시를 반역자로 몰아붙이며 해임했으며, 주민들에게 결혼을 반대하는 인사 및 그들의 친척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러한 엘리자베타의 강압책에 반감을 품은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은 나폴리 국왕이자 나폴리 국왕이자 헝가리 왕위 요구자인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급히 지기스문트를 부더로 초청한 뒤 그해 10월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루이와 마리어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1389년, 루이는 밀라노 공국의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딸인 이자벨 드 발루아의 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훗날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공국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1392년 오를레앙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오를레앙에 가지 않고 파리에서 호화로운 호텔을 짓고 향락을 즐겼다. 특히 성욕이 강해 수많은 미녀를 궁정에 끌어들여 관계를 가졌다. 정적들은 그가 "거의 모든 아름다운 여성들을 졸졸 따라가며 종마처럼 울었다"라고 비방하기도 했다.

1392년에 형 샤를 6세가 정신 분열증에 시달리면서 통치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393년 1월, 왕의 측근들이 우울증에 걸린 왕을 위로하기 위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드는 여흥을 준비했다. 샤를 6세는 이에 동참하기로 하고, 다섯 명의 젊은 귀족과 함께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다. 무도회장은 어두컴컴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행되어 귀부인들을 공황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이때 루이가 이들을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들이댔고, 이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 네 명이 타 죽고 샤를 6세는 베리 공작부인 잔이 망토로 덮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일명 '발 데 아르당(Bal des Ardents)'이라 일컬어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루이가 샤를 6세를 암살하려고 일부러 횃불을 들이댔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 후 루이는 권세가 갈수록 강력해지는 부르고뉴 공국을 매우 경계했다. 1402년, 부르고뉴 공국이 부르고뉴 본토와 저지대 국가 내 자기네 영지로 삼은 플란데런 백국 및 아르투아 백국 사이의 영토를 연결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공국을 담보로 획득했다. 룩셈부르크 공국은 훗날 선량공 필리프 시기에 이르러서야 부르고뉴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 무관장 루이 드 상세르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 집행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사망한 후 용맹공 장 1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그는 장 1세가 아직 미숙한 나이인 점을 이용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을 프랑스 궁정에서 배제하려 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를 유혹하려 했고, 심지어 강간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 정적들의 비방일 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루이는 친 잉글랜드 파인 부르고뉴 공국을 견제하고 과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침공 위협을 과장하면서 프랑스 내의 반잉글랜드 정서를 부추겼으며, 가스코뉴를 향한 원정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5년 7월, 샤를 6세를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받았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전통적으로 왕세자에게 수여되는 지위였는데, 그가 이 직위를 받은 건 샤를 6세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루이는 어쩔 수 없이 노르망디 공작위를 포기했다.

1405년 8월 15일,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 데다 무익한 전쟁을 벌여 백성을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오를레앙 공작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루이는 이에 크게 놀라 도팽 루이 이자보 왕비를 데리고 파리에서 도피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은 8월 19일 쥐비시 인근에서 왕세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용맹공 장은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고등법원은 부르고뉴 공작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루이는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고, 장 1세 역시 이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베리 공작이며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고, 1405년 10월 16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공작이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했다.

1406년 5월,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선의 요충지인 브랑돔을 점령했고, 많은 요새가 잇따라 프랑스에 투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는 잉글랜드 세력을 프랑스 남서부에서 축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외면할 수 없다고 여기고, 9월 18일 1만 군대를 친히 이끌고 가스코뉴로 진격해 블레를 점령하고 부르를 포위했다. 그러나 부르 수비대와 시민들이 결사 항전하면서, 공성전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프랑스 재무부를 관장하고 있던 루이는 부르에서 고전하면서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칼레를 탈환하기 위해 모으고 있던 자금을 자기 쪽으로 빼돌렸다. 이로 인해 칼레 원정은 취소되었고, 장 1세는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406년 12월, 프랑스 함대가 생쥘리앵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참패하면서 부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에게 해상을 통해 보급할 길이 막혀 버렸다. 결국 프랑스군은 1407년 1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부르 원정이 실패하면서 위신이 떨어지자, 루이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경책을 내놓았다. 1407년 4월 28일, 그는 왕실 의회에 종사하던 부르고뉴 인사 26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축출했다. 이에 분노한 장 1세는 루이의 무능과 독단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일자, 이자보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루이와 장 1세에게 화해할 것을 거듭 호소했다.

파일:Assassinat_louis_orleans.jpg

1407년 11월 20일, 두 사람은 프랑스 궁정에서 엄숙한 화해 서약을 교환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 후인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은 막 출산한 이자보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던 중 마레 지구에서 부르고뉴 공작의 부하였던 라울레 당크통빌이 이끄는 복면을 쓴 암살자 15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하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