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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9:03:27

김정묵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구미시 CI.svg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활동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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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fff> 성명 운동계열 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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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만주방면 독립장
권쾌복 학생운동 독립장
장진홍 의열투쟁 독립장
김정묵 임시정부 애국장
송병우 의병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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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길 국내항일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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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 의병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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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성 국내항일 애국장
권오환 3.1 운동 애족장
김영득 국내항일 애족장
김종철 광복군 애족장
남상순 국내항일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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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성 3.1. 운동 대통령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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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김정묵.jpg
이명 김국빈(金國賓), 김해산(金海山), 김규환(金奎煥)
출생 1888년 12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원평동
(現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사망 1944년 4월 19일 (향년 57세)
베이징
본관 선산 김씨
부모 부친 - 김수동(金洙東)
모친 - 조남운(趙南運)
형제자매 3형제 중 장남
배우자 이우숙(李愚淑)
학력 북경법정전문학교 (법률과 졸업)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독립운동
3. 대중매체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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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2.1. 독립운동

유교적 영향권이 큰 고장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부터 나라가 외세(外勢)에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막지 못하면 마침내 나라도 없어질 것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그대로 따랐다. 유림(儒林)들로부터 받은 그의 국가관은 바로 유교적 정치이념 그대로였기 때문에 여느 유림들이 주창하는 왜양일체(倭洋一體)를 함께 부르짖었다.

1910년 합방으로 인하여 주권이 완전히 상실 당하자 실력으로서 독립을 되찾는 항일 운동을 전개해야겠다고 느낀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한 국내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음을 느끼고 1918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장진홍(張鎭弘)·이국필(李國弼) 등과 함께 향후의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 동북군벌(東北軍閥)인 장작림(張作霖) 정부의 군법처장(軍法處長)직을 맡았으나, 이때 장작림군대는 일제의 괴뢰로서 재만한인(在滿韓人)을 탄압키 위해 일본과 야합하려 하기 때문에 그는 곽송(郭松)과 함께 요동군(遼東軍)을 조직하고 장작림과 교전하였다고 한다. 여건상 불리한 위치에 놓인 요동군은 장작림군의 우세한 전투력을 능가치 못하고 패배하자 그는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해와 북경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중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키 위한 방법이 모색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그는 곧 상해로 거처를 옮긴 후 즉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상해와 노령(露領), 한성(漢城)의 셋으로 나누어져 있던 임시정부는 통합하여 하나로 된 단일정부 아래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각 지방의 대표자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한 방편으로 1919년 4월 30일부터 제4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임시의정원법에 의한 제1차 회의로서 임시의정원법 제1장 2조에 의한 각 도별 지역별로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선산 출신의 그는 산청의 유경환(柳璟煥)·대구의 백남규(白南圭)·성주의 김창숙(金昌淑)·상주의 김동형(金東瀅)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어 참석하였다.

각 지역구 출신 의원들은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개시하여 의장 부의장의 선출 및 임시정부 장정(章程)의 의결, 재원방침(財源方針)에 대한 의결 등 중요안건을 의결하였으며, 국무총리의 선거 법무총장의 보선(補選) 시정방침연설의 청취 등 의정기관으로서 본 궤도에 오르도록 하였다.

동년 7월 7일부터 19일까지 상해 장안리 거류민단사무소에서 열린 5차의 정원회의에서도 그는 백남규·김창숙·유경환·김갑(甲)·윤현진(尹顯振)과 함께 경상도 대표의원으로 참석하였다. 계속해서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 독립운동에 앞장서던 그는 1921년 5월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김창숙(金昌淑)·박순병(朴純秉)·신채호(申采浩) 등과 한문으로 된 월간지 천고(天鼓)를 발행하여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민족정신을 알리고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4년 2월에는 다시 만주에서 독립신문사 길림(吉林) 지국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26년에는 하얼빈에서 의열단(義烈團)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일제 요인 암살과 일제 기관의 폭파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강부약(姜扶弱)·김광선(金廣善)·신익희(申翼熙)·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여 독립당촉성보(獨立黨促成報)를 발행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박멸과 독립운동자의 단결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후에도 북경과 만주, 상해 등지를 오가며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에는 홍구공원에서 장쾌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의사가 거사 당일 그의 집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북경시의 명예비서 등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하며,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영면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대중매체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