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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0:45:51

진성 이씨

조선 6대 국반
眞城 李氏 (眞寶 李氏)
진성 이씨 (진보 이씨)
관향 <colbgcolor=#fff,#222>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1]
시조 이석(李碩)
집성촌 경상북도 안동시· 의성군· 문경시· 예천군
인구 77,574명(2015년)
1. 개요2. 기원3. 상세4. 특징
4.1.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파4.2. 불천위 9위4.3. 약한 주손과 강한 지손
5. 분파6. 주요 세거지7. 항렬자8. 인물

1. 개요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구 경상북도 진보현)[2]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진보 이씨(眞寶 李氏)라고도 부른다. 경상북도 안동시 청송군 일대에 후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시대 진보현 아전(衙前) 이석(李碩)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계 이황 유교 국가의 도통(道通)을 잇는 대유(大儒)로서의 상징을 지닌 문묘에 국불천위(國不遷位)로 모셔지고, 왕통(王通)을 상징하는 종묘에 각 왕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정치가(내지 권세가)인 배향공신으로도 모셔짐으로써 그를 위시하여 나라를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시대 이 인신(人臣)으로서의 최고 영예를 안은 사람들을 배출한 국반 가문은 단 여섯 가문 뿐인데, 우리나라 성리학 중 가장 먼저 본격적인 저술을 남기고 주리론 및 영남학파 그리고 영남 남인의 선구자로 추앙된 회재 이언적 여강 이씨, 주기론 및 기호학파의 태두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 덕수 이씨, 노론의 연총으로서 '송자'로 칭송되던 우암 송시열의 은진 송씨,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 광산 김씨, 소론의 당수 격이었던 현석 박세채의 반남 박씨, 그리고 영남학파의 종장이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이황의 진성 이씨였던 것이다.

특히 이황 사후 안동시를 중심으로 그의 계승자들이 영남 학파와 남인의 상당수를 형성하였고, 갑술환국 이후에도 주로 이황의 후손들이 영남 남인 가문으로서는 드물게 당상관 이상의 고관직은 물론 문과-사마시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영남에서는 정치적-사회적(특히 혼인)-경제적-학문적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2. 기원

시조 이석(李碩)의 가계는 고려시대 진보현의 아전(衙前)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부(영찬), 조(송주)가 모두 호장(戶長)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대대로 진보고을의 호장직을 세습해온 토호(土豪)였음을 알 수 있다. 여말선초 신진사대부의 대다수가 바로 이 호장층에서 중앙관료로 성장한 가문들인데, 진성이씨도 호장가에서 발원하여 이석 대에 생원시에 합격해 처음으로 가문의 기틀을 닦았다.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 공민왕 시절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에 이르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59명 배출했고, 특히 7세손 이황 문묘 종묘에 동시에 배향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퇴계 이황 외에 흔히 이육사로 알려져 있는 민족시인 이원록(李源祿, 필명 이활)이 있다.

3. 상세

이석의 장남 이자수는 만년에 피폐해진 진보를 떠나 안동 주촌(周村)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안동시에서 그의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반면, 차남 이자방(李子芳)은 형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진보에 남았으며, 이자방의 후손들은 후평파로 갈라져서 그대로 진보에 터를 잡고 살게된다.[3] 이자수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운구(云具)는 공조참의를 지냈고, 차남 운후(云侯)는 군기시부정을 지냈다. 이운후의 외동아들 선산부사 이정(李禎)의 3남이 안동 온혜리에 정착한 진사(進士) 이계양(李繼陽)이고, 그의 장남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가 퇴계 이황(李滉)이다. 이후 영남지방 전체에서 세거하며 살았으며, 서인( 노론)정권에서도 꾸준히 과거에 급제하며 영남의 명문가로 남았다. 특히 이황이 사림(士林)의 종주로 추앙받기 시작한 이후,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영남에서 명문가로 인정받기 위해선 그의 적전제자(嫡傳弟子)이거나 학통을 계승한 사람, 또는 혼인으로 연결된 집안 등 직,간접적 연관이 있어야 가능할 정도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신분사회가 와해되어 과거의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현재도 안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중중 하나로 남아있다.[4]

그리고, 안동시가 전국에서 시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수백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것에도 진성 이씨가 기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에 있는 대부분의 문중들이 유독 독립 운동을 많이 해서 멸절하거나 가문 전체가 와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세가 약해진게 사실이었고, 그 중 진성 이씨는 몇 개의 문중 세파가 사라질 정도였다. 결국 진성 이씨 종가가 일제에 의해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독립 운동을 해서 일제 헌병이 불을 냈다고 한다.[5] 또 퇴계종택도 방화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29년에 13대 종손 이충호(李忠鎬)가 전국 유림의 도움을 받아 다시 지었다.

본관이 진보(眞寶) 또는 진성(眞城)으로 불리는데, '진성'이라는 호칭이 붙게 된 계기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6세손 우(堣)가 중종반정공신(中宗反正功臣)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군되면서 그의 부친인 5세손 계양(繼陽)이 진성군(眞城君)에 추봉되었는데 이 때부터 진성이씨로 불리어졌다는 게 유력하다.

4. 특징

4.1.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파

인원은 7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지파 수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어딘가로 이주했다 하면 새로운 파를 개창하곤 한 까닭에 족보상 파만 100여 파가 넘을 정도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불천위를 모시는 지파나 작은 지파들의 큰집 역할을 하는 OO종파라는 파명을 가진 지파들은 다른 지파에 비하면 높은 대접을 받는 편이다. 이 중에서도 흔히 3대종파와 5대종파를 합쳐 7개 종파는 문중에서도 큰집 대접을 받는다.[6] 3대종파는 집안의 큰줄기 가문들인 은풍종파(참의공계 대종가), 주촌종파(부정공계 대종가), 후평파(송안군 이자수의 동생 이자방의 후손)를 가리키는 것이며, 5대종파는 불천위가 있는 5종파 주촌종파, 온혜종파(퇴계의 조부 이계양의 직계후손), 송당종파(퇴계의 숙부 송재공 이우의 후손), 백당종파(퇴계의 넷째형 온계 이해의 후손), 상계종파(퇴계 이황의 후손)를 가리킨다.

4.2. 불천위 9위

  1. 4세 정(禎)
  2. 5세 계양(繼陽)-노송정(老松亭)
  3. 6세 우(堣)-송재(松齋)
  4. 7세 해(瀣)-온계(溫溪)
  5. 7세 황(滉)-퇴계(退溪)
  6. 9세 영도(詠道)-동암(東巖)
  7. 11세 명익(溟翼)-반초당(反招堂)
  8. 12세 동표(東標)-나은(懶隱)
  9. 17세 종수(宗洙)-후산(后山)

4.3. 약한 주손과 강한 지손

진성이씨는 유난히 주손이 약하고 지손이 강한편인데, 당장에 현재 진성이씨의 종가대우를 받고 있는 부정공계의 주촌종파만 해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차남의 후손들이며, 장남인 이운구의 참의공파계통들은 100여파에 달하는 진성이씨 세파 중에서 21파밖에 안되며, 특히 이중에서도 원 대종손이던 동막파의 경우 실전되어 의성 이씨로 400여년을 살아오다가 1976년 비석을 통해서 복관한 일까지 있었다. 또 앞에서 말했다시피 퇴계 이황의 가문은 집안 전체로 봤을 때 거의 막내집이지만, 조선 문묘에 배향되어 인정받은 선정파인, 사실상 진성이씨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지파인 관계로 영향력이 엄청나다. 이러한 힘약한 주손과 강한 지손들 간의 기싸움 때문에 집안에서 기싸움이 적지 않은 편이다. 특히 은풍파와 주촌파의 대종손 간의 갈등이라던가 주촌종파와 상계종파의 서열문제는 진성이씨 내부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부분.

사실 은풍파와 주촌파의 대종손 간의 갈등은 수십 년 수준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는 갈등이다. 애초에 운구·운후 형제 중 누가 형이며 누가 동생인가 부터도 이미 퇴계시절부터 논란이었으며[7], 이후 1645년 형제순서논란이 정리된 이후로도 이 두 종파의 갈등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운구·운후 형제 순서 논란이 정리된 사연도 기구한데, 전술했다시피 가첩에는 분명 운구가 먼저 기재되어있었긴 하나 당시에도 시조에 대한 제사는 주촌종파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운구·운후 형제 중 누가 형인가로 은풍종파와 주촌종파 간에 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원손(遠孫) 이시립이 모후의 장사를 지내기 위해 터를 찾던 와중에 시조 이석과 전후처의 3묘 그리고 운구의 3남 주부 이양호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이 과정에서 양호의 묘지석에 선대의 기록이 적혀있었다 시립은 묘지석을 숨기고 양호의 무덤을 파묘하고는 거기에 모친을 안장했다. 이후 본인도 모친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는데, 이후 관가에 이 사실이 고발되면서 시립의 양친과 시립의 묘는 파묘되었고, 운구·운후 형제의 순서논란이 종식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대종손갈등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도 시조의 제사는 주촌종파에서 지내고 있다.

이 갈등이 비교적 최근 크게 터진 사례가 진성 이씨 대동보 수단이었는데, 진성 이씨 내부에서는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임자보(1912년)가 만들어진지가 100년이 넘어 새로운 족보를 편찬했어야 했는데, 이를 위하여 2006년부터 새로운 대동보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들어갔었다. 그러나, 은풍파, 주촌파, 상계파의 갈등으로 대동보는 2008년에 수단을 마치고도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주촌종파 쪽에서 판을 깨버리며, 안동파 파보를 만들어버리고 사실상 끝나버렸다. 게다가 은풍·주촌파 간의 대종가 갈등은 동막파 복관까지 겹쳐서[8] 이제는 사실상 답이 없는 상황인지라 현재 상황에서 변화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진성 이씨 내부에서도 온혜파 및 그 지파의 인원이 상당한데, 대충 전체의 40%정도는 온혜파계열 그러니까 이계양의 후손이다. 그러다보니 외부인들 중에 진성이씨를 아는 사람들은 진성 이씨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퇴계 이황의 후손? 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고 물었을 때 퇴계는 작은 집이라면서 핏대를 올리고 반박하는 사람의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안동파(주촌파계열) 사람들이다. 장파의 경우 혈연이 너무 멀고, 후평파의 경우 작은집인 반면, 안동파의 경우 대종가라는 생각 때문에 작은집인 온혜파에게 은근히 인지도 밀리는 걸 싫어한다. 비단 주촌파뿐만 아니라 온혜파 내부에서도 상계파는 막내집안이기 때문에[9] 타 종파와의 갈등이 심하다. 거기다 상계종파는 상계종파대로 지파인 하계종파와의 갈등도 있다.

5. 분파

진성이씨는 기본적으로 아주 크게 참의공계,부정공계,후평파의 3대종파로 나뉘며 여기에서 5세조를 기준으로 6개의 종파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6개 종파에서 세파들이 다시 갈라진다. 단 1976년 복관한 동막파 때문에 지금은 5세조를 기준으로 7개 종파로 나뉜다. 흔히 파보를 수단할때는 이 7개 종파 기준으로 파보를 수단한다.

★표가 붙은 파들은 3대종파.
☆표가 붙은 파들은 5대종파.

성씨 종파와 퇴계 이황의 직계파, 퇴계 이황의 방계파 등 아주 정신이 없다

6. 주요 세거지

7. 항렬자

항렬자의 경우 대동항렬이 없이 대파별로 다른 항렬자를 쓰는데다가 항렬마다 통용자가 5~6개인지라 항렬자만으로는 상대가 진성 이씨인지는 알기가 힘든 편. 항렬자 자체는 오행상생법으로 지어지며 수목화토금으로 돌아가며 지어진다. 현재 진성이씨의 경우 대부분 20대~28대 사이인지라, 水가 들어간 경우 21대손 아니면 26대손, 木이 들어간 경우 22대손 아니면 27대손, 火가 들어간 경우 23대손 아니면 28대손, 土가 들어간 경우 24대손, 金이 들어간 경우 25대손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진성 이씨인 경우를 아는 경우 항렬자를 보면 어느 파인지를 알 수도 있는 편. 예를 들어 항렬자가 新-杰-容-冕-弼[12]-永이면 높은 확률로 주촌파 계열이고, 敎-植-昌-圭-錫이면 높은 확률로 온혜파 계열이다.

다만 이 항렬 때문에 오해할만할 상황이 가끔 생기는데, 안동파 24세손에 쓰이는 載나 온혜파 24세손에 쓰이는 在 때문에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인 경주 이씨 성주 이씨와 혼동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서로의 집성촌으로 이사 가거나 하면 오해받기 딱 좋은 편[13]. 물론 부모님 항렬이나, 자녀 항렬을 보면 구별이 가능하지만(진성 이씨라면 자녀가 弼, 元, 錫을 쓰고 경주 이씨라면 鎬, 鍵을 쓴다.) 본의 아니게 조상을 모른다고 욕먹는 경우도 있다.

8. 인물

무분별 · 부적절한 등재의 방지를 위하여 문서가 있는 인물만 이 목록에 기재한다.


[1] 정확히는 부군면 통폐합 이전의 구 경상북도 진보군 [2] 진보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청송군에 병합. [3] 이자수의 후손들은 조선조에 양반계층이었기때문에 사족계(士族系)라고 부르며, 이자방의 후손들은 선친의 향리(鄕吏)역할을 승계했기때문에 이족계(吏族系)로 부르며, 진보에 남았기에 진보파로도 부른다 [4] 안동시/문화 문중항목 참조 [5] 1895년 을미사변으로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 의병장이 퇴계의 중형 이해(李瀣)의 후손인 이인화(李仁和)였다. 이 종가의 건물은 2009년 복원되었다. [6] 부정공계의 대종가인 주촌종파가 3대종파와 5대종파에 모두 속하여 7개 종파이다. [7] 가첩에는 운구가 형으로 기재되어있었으나, 제사는 주촌종파가 지내고 있었기 때문. [8] 동막파가 지손이었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이 복관한 동막파가 은풍파보다도 큰집이다. 갑자기 다른 집안으로 살던 문중이 갑자기 제일 큰집으로 들어오니 은풍파 입장에서도 좋게 보일리가 없다. [9] 이계양의 종손인 온혜종파, 3남 이의의 후손인 대죽파, 4남 이해의 후손인 백당종파, 5남 이징의 후손인 옥천파등을 따져도 막내다. [10] 망천파에서는 이돈과 이회보 부자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이회보는 효종때 북벌에 참여하는 등 명성을 떨첬으나, 당시 남인일색이던 영남, 그것도 진성이씨 문중에서 독특하게 노론으로 분류되었으며,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에도 지지를 선언함으로서, 문중내에서도 갈등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 당시 노론인사들과의 친분관계가 작용한듯 하며 후손이 번창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된 것 같기도 하다.. [11] 망천종파와 교위공계 망천파를 제외하고 모두 항곡파로 부른다. [12] 통용자로 元이 있으며, 현재 주촌파 종손이자, 진성이씨의 대종손인 이세준씨(안동파 파보에는 世元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이 항렬에 속한다. [13] 안동파에서도 在-鎬의 항렬자는 쓰이지만, 이는 안동파 19세-20세에 사용되던 항렬자로 현재 생존해있는 항렬이 아니다. [14] 이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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