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게이블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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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62626><colcolor=#ffffff> Clark Gable 클라크 게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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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클라크 게이블 William Clark Gable |
출생 | 1901년 2월 1일 |
오하이오주 캐디스 | |
사망 | 1960년 11월 16일 (향년 59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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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배우 |
신체 | 185cm |
학력 | 에든버그 고등학교 중퇴 |
병역 | 미합중국 육군 소령 전역 ( 육군 항공대) |
가족 |
배우자 조서핀 딜런(1924 결혼, 1930 이혼, 1971 사망) 머리어 프랭클린 프렌티스 루커스 랭험(1931, 결혼 1939 이혼, 1966 사망) 캐롤 롬바드(1939 결혼, 1942 사별) 실비어 얘슐리(1949 결혼, 1952 이혼, 1977 사망) 케이 윌리엄스(1955 결혼, 1983 사망) 슬하 1남[1] 1녀[2] |
데뷔 | 1924년 'White Man' |
종교 | 가톨릭 ( 냉담자)[3][4]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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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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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m.
솔직히 그대, 내가 알 바 아니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떠나며 말한 마지막 대사.
미국의
배우.솔직히 그대, 내가 알 바 아니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떠나며 말한 마지막 대사.
무성영화 후반기인 1917년부터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들어서 엄청난 인기와 스타성,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며 '할리우드의 제왕(The King of Hollywoo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9년작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미국 남북전쟁기를 꿋꿋하게 버티는 강인한 사나이 역할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친구인 게리 쿠퍼와 같이 고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배우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미국 오하이오주의 캐디스에서 석유 시추 노동자와 광부, 일용직을 전전하던 윌리엄 헨리 "빌" 게이블[5]과 애덜라인 허셜먼 게이블[6]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개신교,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어머니는 게이블이 생후 6개월일 때 가톨릭식 세례를 해주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후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생후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지 1년 4개월 후에 옆 마을에서 온 제니 던랩[7]과 재혼했다. 친모가 사망한 이후 아버지는 게이블이 가톨릭식으로 교육받고 자라는 것을 거부하고, 게이블이 외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8] 새어머니는 게이블에게 자신감을 길러주었고 직접 피아노 연주 등을 가르쳐주었다.에든버그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 밴드부에 들어갔고, 거기서 나팔을 불었다. 그와 동시에 1917년 극장에서 우연히 관람한 한 편의 연극에 감동한 뒤 연극과 무성영화의 단역배우로 출연했다.
2.2. 청년기
192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가 친구와 둘이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 후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 일용직 막노동자, 은행의 계약직 사무원, 신문 보급소 사환, 전화 설치공, 석유 시추 노동자, 외무사원, 타이어 공장 노동자, 플라스틱 공장 노동자, 농장 점원, 목재 벌채 인부 일, 상점 점원, 식당과 레스토랑의 종업원 등을 전전했지만, 한 직업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그러던 중 1923년 12월 말부터 지방을 순회하는 작은 극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단역을 맡고 1924년에는 무성영화에서 단역을 맡으면서 영화에 단역배우와 엑스트라로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에드릴리 레퍼토리 극단에 배우 호출원으로 들어가 우연히 뮤직 홀에서 무대를 보게 되면서 배우가 될 것을 다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할리우드의 영화배우의 길에 한 발짝을 내딛는다.
2.3. 무명 배우 시절
극단에서 만난 배우 프랜스 도플러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게이블이 오랫동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실망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게이블은 여배우 겸 연출가 조서핀 딜런[9]에게 연기지도를 받다가 1924년 결혼한다. 그 후 1928년 브로드웨이 연극 머시널(Machinal)에 캐스팅되는 걸 시작으로 몇몇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치아 관리를 별로 하지 않던 그에게서는 갈수록 구취가 심해졌다. 딜런은 게이블을 영화배우로 만들기 위해 치과치료부터 받게 했지만 구취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2.4. 데뷔 초반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인 1930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그의 팬이었던 17세 연상의 부유한 사교계의 여왕인 리어 랭험[10]의 도움과 인맥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심지어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서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랭험이 인맥을 이용해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다. 게이블은 그런 랭험과 사랑에 빠져 딜런과 결혼한 지 6년만인 1930년에 이혼한다. 이 무렵 게이블은 벌어진 양쪽 윗 앞니를 교정, 의치로 이용했다. 그 후 1931년에 랭험과 재혼하였다. 1931년 <파이터 포인트(The Finger Points)>, 1931년 <야간근무 간호원"(Night Nurse)> 등에서 갱 역을 소화해냈는데 이때의 이미지가 인상깊게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자유의 혼>(1931)을 통해 조연급에서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1931년부터 1954년까지 MGM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점차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중년 남성 역을 주로 맡아 유명해졌다. 1930년대에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까지 호평을 얻었다. 1932년 여배우 진 할로우와 함께 출연한 < 붉은 먼지>의 흥행 이후 1934년 < 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셔츠 아래 언더셔츠를 입지 않은 게이블의 맨 가슴이 보이자 그해 언더셔츠 판매고가 절반으로 극감하며 이후 지속되어 최대 75퍼센트의 매출이 저하되면서 해당 산업을 파괴시켰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파자마를 유행시키고 당근을 먹는 모습에서 벅스버니 캐릭터가 착안되고, 도너츠 먹는 법을 여주인공에게 알려주면서 던킨(dunk in)이라고 한 것이 던킨도너츠의 유래가 되는 등 게이블은 이 영화에서 엄청난 스타 파워를 입증하며 할리우드의 제왕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이 영화는 최초의 스크루볼 코미디이자 최초로 오스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영화로도 유명한 데,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 여우 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촬영 직전까지 수많은 배우들에게 퇴짜를 맞았고, 소규모 영화사였던 콜롬비아는 MGM과 워너 브라더스 소속이였던 게이블과 클로뎃 콜베어를 빌려와서 간신히 영화를 끝냈다.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순식간에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음하였으니 고생 끝에 낙이 온 격.
1934년 <남자의 세계>, 1935년 < 바운티호의 반란>을 찍어 대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여성팬이 생겨났고, 게이블 주변에는 여성팬들이 몰려왔다. 또한 여러 여배우들도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치아를 교정한 후 말끔한 외모가 되었고, 185cm의 훤칠한 키와 친절함으로 인해. 여성팬은 물론이고 남성팬들에게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때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일부 여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되었다.
게이블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갈구해서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만 베풀어도 금방 마음을 주고 청혼을 했다고 한다. 조운 크로퍼드[11], 로레타 영 등이 새 연인들로 추정되었다. 일부 여배우들과는 실제로 연인관계였다.
2.5. 제2차 세계 대전
1937년에는 영화 <새러토가(Saratoga)>, 1938년 <테스트 파일럿> 등의 주연을 맡았다. 1937년 영화 <파넬>에서는 아일랜드인 정치가 역할을 맡았는데 크게 실패했다.그러다가 드디어 1939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역으로 캐스팅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중 치아 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비비언 리가 키스신을 찍다가 입냄새 때문에 안 찍겠다고 거부했고, 결국 찍기는 찍었는데 하마터면 입냄새 때문에 기절할 뻔했다는 비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으로 1935년에 < 바운티호의 반란>과 함께 두 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자에 올랐다. 젊어서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인데도 예전에 자기와 같은 신세였거나 동료였던 흑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배우로 성공해서도 그들을 잊지않고 반갑게 맞이했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같이 출연한 흑인배우들을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시사회에 못 나오게 하는 것에 반대했다. 만일 그들을 참석하지 못 하게 하면 자기도 시상식이고 뭐고 보이콧하겠다고 강력하게 따져서 흑인 배우들이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오게 했던 것도, 젊은 시절의 고생했던 경험과 흑인들과 거리낌없이 친하게 지낸 경험 때문이다.
한편 리아 랭험은 결혼 8년만인 1939년에 이혼한다. 촬영장에서 영화 파트너로 만나 많은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는데, 랭험은 곧 어린 남편 주위에 몰려드는 여성팬들과 여배우들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랭험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정을 지키려 애썼지만 인기 코메디 여배우 캐롤 롬바드와 불륜을 시작한 게이블은 랭험에게 이혼을 종용했고, 랭험은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평생에 걸친 그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를 찾아 방황하는 것이라는 동정어린 시선과 함께, 영화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여자들을 이용했다는 비판 어린 시선도 쏟아졌다. 1939년 3월 아내로부터 이혼을 받아내자마자 같은 달에 캐롤 롬바드와 재혼했다.
세번째 부인 롬바드에겐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다. 그리고 1940년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신흥도시(Boom Town)> 등은 흥행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3년만에 끝이난다. 게이블은 1942년 1월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둘만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멋진 저택에 손수 풍선을 불어 장식하고 그녀가 오면 놀라게 할 초 장식도 꾸며놓았다. 그러나 미리 켜놓은 양초가 타들어 가던 1월 16일 8시경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롬바드는 오지 않고 항공기 추락 소식을 접했다. 전쟁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롬바드가 그의 곁으로 오기 위해 탔던 비행기가 라스베이거스 교외의 야산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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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드가 죽은 뒤, 비탄에 잠겨 있던 게이블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미 육군 항공대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했다.
독일의 히틀러가 게이블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게이블의 참전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부상 없이 생포해오는 것에 상당한 상금을 내걸었으나 생포되는 일은 없었다. 최소 5번이상 공군 포격수로서 공습에 참여한 게이블은 독일군 공격을 받아 거의 피격될 뻔했으며 이 일을 알게된 MGM은 게이블을 미국으로 송환했다. 송환된 이후 계속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공대 생활 중 비행기를 몰던 게이블은 롬바드의 흔적을 찾으려고 사고가 일어난 라스베가스 산을 다년간 수색한 끝에 롬바드의 추락 현장에서 비행기 잔해들 중에 롬바드가 착용하던 스카프 조각을 찾아냈다. 이 스카프 조각을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 아끼며 죽을 때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부분은 2015년 7월 1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다뤄졌다.
2.6. 종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게이블은 브라운관과 브로드웨이에 출연한 뒤 다시 영화로 복귀, 1940년대 중반부터 할리우드로 돌아와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 <스피드 왕>에서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고, 1953년 종전의 < 붉은 먼지>를 개작한 < 모감보>, 1958년의 <런 사일런트 런 디프(Run Silent Run Deep)>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60년 <거친 말(馬)과 여자>의 주연을 맡은 뒤 몇편의 영화와 연극, 뮤지컬에 출연한 뒤 1960년 말 아서 밀러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에 캐스팅되었는데 여기서는 늙은 카우보이 역을 맡았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차를 타고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죽기 10일 전에 찍은 것이었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게이블의 유작이 되었다. 동시에 촬영 종료로부터 일 년 반 뒤에 사망한 먼로의 유작이기도 하다.1949년에 유명 배우였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비어 애슐리[12]와 네 번째 재혼을 했다. 애슐리는 사교성이 좋고 스포츠를 잘 했다. 게이블은 여성편력을 그만두고 가정에 정착하려 했지만, 전혀 가정적이지 않은 애슐리는 늘 일 아니면 집 바깥을 돌았다. 실망한 그는 성격차이로 1952년에 이혼하고 만다. 1955년 그는 세 번의 이혼 경험이 있던 39세의 케이 스프레클스 윌리엄스[13]와 재혼하였다.
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는 1960년 무렵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그 해의 선거는 우편으로 투표를 했다 한다. 병중이었던 그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선 늙어가는 현대의 카우보이역을 맡았지만, 여전히 밧줄을 던져 먼로를 사로잡을 만큼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0년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근경색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2.7. 사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소중히 간직했던 스카프 조각과 함께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포리스트 론 묘지에 있는 세 번째 아내 캐롤 롬바드의 묘 옆에 안치되었다.그가 1960년에 사망했던 병원에서 4개월 뒤 그의 유복자 외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날 때 마릴린 먼로가 직접 병원에 찾아와서 이를 지켜봤다고 한다.
1977년에 린 토너베니가 쓴 그의 일대기 "거장 만세"(Long Live the King)가 출판되었다.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케이 스프레클스 윌리엄스 역시 1983년에 사망하여 그의 옆에 안치되었다.
1999년에 AFI에서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 부문 7위로 선정했다.
3. 혼외자 '주디스 루이스'
평생 많은 염문을 뿌렸기 때문에 여러 사생아를 두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고, 실제로 게이블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도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영화 <황야의 부름(Call of the Wild)>에 출연하면서 엮인 로레타 영이 1935년에 낳은 주디스 루이스(Judith Lewis)가 드라마틱한 사연으로 가장 유명하다. 애칭인 '주디(Judy) 루이스'로 많이 알려져 있다.현대에도 불륜은 용서받을 게 못 되긴 하지만, 당시 미국은 특히나 지금과 비교 안 되게 보수적이어서 불륜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14] 게이블과 영 모두 경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은 비밀리에 출산한 후 태어난지 8주 된 주디스를 고아원에 보냈다가, 19개월이 지난 후에 입양하는 형식을 갖춰서 다시 데려와 키웠다. 주디스는 처음에 양어머니(?) 로레타 영의 성을 쓰다가, 몇 년 후 영이 탐 루이스라는 남자와 결혼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서 주디스 루이스가 되었다.[15]
주디스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친부인 게이블과 판에 박은 듯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게이블의 특징적인 큰 귀까지 닮아서, 영은 딸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주디스가 7살 때 귀 성형수술을 받게 했다.[16] 어린 주디스도 큰 귀 때문에 학교에서 ' 덤보'라는 별명으로 놀림 당하는 데에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군말없이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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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형수술까지 받았는데도 주디스 루이스는 자라면서 점점 더 게이블의 모습을 닮아갔다. 게다가 영과 게이블 사이에 염문이 돌던 시기와 주디스가 임신되었을 시기가 맞아떨어지기까지 하자, 할리우드에 주디스가 영의 양녀가 아니라 영과 게이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17] 정작 주디스는 그런 소문을 23살이 되어서야, 그것도 곧 결혼하기로 한 약혼자가 그 소문에 대해 말해주어서 알았다고 한다.[18] 주디스는 양모로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친모이며 게이블이 친부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함구하고 있다가, 게이블이 사망하고 몇 년이 지나 31살이 되었을 때에야 영에게 그 소문이 사실인지 물었다. 영은 경악하여 구토까지 한 후에 자신과 게이블이 친부모가 맞다고 시인했고,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주디스 루이스는 59세가 된 1994년에 자서전을 써서 자신이 영과 게이블의 친딸이라고 밝혔다. 이 일로 화가 난 영은 3년 동안 딸과 대화하지 않았고 사실 여부를 묻는 언론에도 침묵을 지키다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99년에야 자신과 게이블이 주디스의 친부모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에 대해 주디스는 "나는 이 책을 써야만 했다. 자기 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 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누구도 알지 못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여배우의 양녀로서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게 자랐지만, 가족 속에서 항상 외부인인 것처럼 외로움을 느꼈고 학교에서도 고아 출신이라고 놀림받았다고 토로했다. 또한 게이블이 레트 버틀러 역으로 출연한 영화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와 그의 딸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볼 때마다 울었다고 털어놓았다.[19]
주디스 루이스의 자서전에는 게이블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그녀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게이블이 찾아와서 로레타 영에게 400달러를 주면서 "아이에게 좋은 침대를 사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가 15세였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게이블이 있었다고 한다. 게이블은 주디스에게 학교 생활, 남자친구, 장래희망 등에 대해 물어본 뒤 떠나면서 그녀의 이마에 뽀뽀해 주었다. 그것이 주디스와 게이블 사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주디스는 게이블이 자기 친부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사춘기 소녀답게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에만 의미를 부여했다.[20]
아래 '기타' 항목에 나와있듯이 게이블의 아들(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이나 손자는 이런저런 일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주디스 루이스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으로 가서 브로드웨이 무대와 TV에서 배우, 프로듀서, 작가로 활동했다. 40대 중반에 연예계 활동을 그만두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후 심리상담사로 일하다가[21] 2011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주디스 루이스의 출생에 대해 다른 주장도 있다. 로레타 영과 주디스 루이스 모두 사망한 뒤인 2015년에 영의 며느리 즉, 주디스 루이스의 이부남동생의 아내는 게이블이 영을 강간하여 주디스 루이스가 태어났다고 밝혔다. 시어머니 영에게 직접 들은 말이라는데[22],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영이 생전에 딸에게 보였던 기묘한 태도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 설명이 된다. 보수적인 시대에 배우 생명이 끝장날 수 있는데도 사생아 딸을 포기하지 않고 키울 만큼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 했지만, 동시에 훗날 언론에 게이블과의 사이에서 주디스 루이스를 낳은 게 맞다고 인정하면서 딸의 존재를 '살아 움직이는 도덕적 죄악(a walking mortal sin)'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등, 딸에게 애증을 품은 것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강간으로 딸을 낳았다면 자기 친딸이지만 딸에 대한 감정이 복잡미묘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당사자인 영과 게이블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4. 여담
- 술과 담배를 굉장히 좋아했다. 담배는 20대 초반일 때부터 하루 세 갑 이상 피웠고, 술은 위스키와 와인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잦은 흡연으로 인하여 평생 치아와 잇몸이 좋지 않았고, 입냄새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비비언 리가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키스씬을 찍다가 혼절할 뻔했다고 한다.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대니얼이 당시 흑인이라고하여 시상식에 못 나오게 되자 강력하게 결사반대하며 만약 그녀가 나오지 못하면 나도 시상식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그녀가 무사히 시상식에 나오게 한 바 있다. 흑인이 좋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맥대니얼과 친구로 잘 알던 사이였기에 흑인이고 뭐고 연기잘하면 받는 건데 그걸 못 나오게 하다니 그런게 어디있냐며 인터뷰했다. 이래서 KKK단에게 협박편지를 받기도 했으나 무시했다. 당시는 KKK단이 여전히 현역 일선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라 KKK단의 흑인 린치가 수시로 있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깨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블은 맥대니얼이 1953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에도 참가하여 명복을 빌었다.
- 게이 또는 양성애자였다는 루머가 있다. 그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조지 큐코어 감독을 내쫓고 빅터 플레밍에게 연출을 맡긴 것도 큐코어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어서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그와 스캔들이 있었던 한 여배우는 "게이블은 의외로 그쪽이 허약했지만, '클라크 게이블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유감스럽게도 사후 호부견자와 호부견손을 동시에 겪고 있는 중이다. 명배우 아들과 손자의 흔한 품행 아들인 존 클라크 게이블(John Clark Gable)은 음주운전 밎 뺑소니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명성에 흠집날 짓만 하고 있고, 손자인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Clark James Gable)은 2011년 LA 경찰의 순찰헬기에 레이저 광선을 쏘는 장난을 치다 구류 10일 형을 받는등 할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제대로 했다. 더군다나 항공기나 비행기에 불법으로 강화된 레이저포인터를 들이대면 조종사가 실명할 수 있다.[23]
- 클라크 게이블 본인도 자동차 사고를 매우 많이 치긴 했다. 성격이 화끈하여 유명 배우가 되자 자동차도 여러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스피드를 즐겼다. 그 와중에 몇 번 사고도 냈는데 돈으로 무마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치어죽였는데 돈으로 무마했다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잡지 People에서 게이블 집안의 사건사고를 다루면서 "왜 지 애비의 나쁜것만 배워가지고는..."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 2019년 2월 22일, 손자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Clark James Gable)[24]이 30세의 나이로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다.
- 바티칸을 방문해서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한 적이 있는데, 문제는 이탈리아인 추기경인 안젤로 론칼리도 이때 교황을 알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 '여교황'이라고 불리며 바티칸의 실권자로 활동하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게이블의 알현을 핑계로 론칼리 추기경의 알현 일정을 취소하고 내쫓는 하극상을 벌였다! 때문에 론칼리 추기경은 추운 겨울날에 찬바람을 맞으면서 알현 허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때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되돌아가는 굴욕을 당한 론칼리 추기경이 이후 다음 교황이 되는 요한 23세다.
- 별명이 '할리우드의 제왕'이지만, 진보적인 할리우드와는 달리 공화당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흑인 동료 배우들에게 공정하게 대해준 일화에서 보듯 극우주의자는 아니었고[25], 자유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고. 사실 게이블 세대 배우만 하더라도 공화당 지지자가 많았기에 유별난 건 아니다. 할리우드가 민주당으로 기울어진 것은 매카시즘 이후로 이때 후폭풍이 너무 커서 공화당 지지자 세가 줄어버렸다.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게이블의 사후인 1960년대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 게리 쿠퍼가 동갑내기 클라크 게이블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이미지상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였는지 실제로 배역을 두고 경쟁도 많이 했다고.
4.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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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몬티 파이튼의 성배>의 카멜롯 기사들이 클라크 게이블 성대모사를 한다고 한다.
[1]
아들은 클라크 게이블이 사망하고 몇 개월 후에 태어나서 부자가 서로 본 적은 없는데, 아버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자세한 건 하단 여담 참조.
[2]
딸은 결혼생활 중 외도로 낳은
혼외자다. 자세한 건 아래 '혼외자' 항목 참조.
[3]
가톨릭 세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개신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어린 시절 개신교도로써 교육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성인이 된 이후 종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교황을 알현을 한 적도 있고 클라크 게이블이 죽고 나서 태어난 케이 윌리엄스 게이블 사이에의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은 가톨릭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도 존재하기는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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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례성사는 사망시까지 유효하다. 본인이
성당 안 나간다, 안 믿는다라고 말하고 다녔어도 공식적으로 교구에 서면 통보해서 교적이 삭제되지 않는 한 교회법으로는 신자가 맞다.
[5]
William Henry "Will" Gable, 1870~1948.
[6]
Adeline Gable,
née Hershelman, 1869~1901.
[7]
Jennie Dunlap, 1874~1924.
[8]
추후 외삼촌 가족과 만나는 것을 허락 받았다.
[9]
Josephine Dillon, 1884~1971.
[10]
Maria Franklin Prentiss Lucas "Ria" Langham
[11]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생활 중이었다.
[12]
Sylvia Ashley, 1904~1977
[13]
Kathleen "Kay" Spreckels Williams
[14]
이때 영은 이미 이혼한 뒤라 독신이었지만, 게이블은 두 번째 아내 리어 행엄과 결혼한 상태였다.
[15]
의붓아버지 탐 루이스는 자기 성을 주디스가 쓰게 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주디스를 정식으로 입양하거나 다정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디스는 두 남동생들은 탐 루이스와 영의 친자식이지만 자신은 데려다 키운 자식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자랐다. 훗날 언론에서는 탐 루이스가 주디스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어서 주디스에게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라 추측했다.
[16]
성형외과 의사는 주디스가 너무 어리다며 더 자란 후에 수술하자고 했지만, 영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17]
할리우드의 영화업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지역에 살던 주디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주디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들어서, 주디스의 친구들조차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주디스가 스스로 비밀을 공개하기 전까지, 약 60년 동안이나 이 비밀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18]
결혼을 앞두고 심란해진 주디스가 "당신과 결혼 못 하겠어.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고아 출신 양녀로 알고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과 정체성 혼란에 대해 말한 건데, 약혼자는 '출생이 불분명한 나 같은 사람이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걱정말아라. 당신이 로레타 영과 클라크 게이블의 친딸인 걸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19]
"나로서는 너무 슬펐다. (영화 속에서) 클라크 게이블은 딸에게 무척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딸인 척 상상하곤 했다."
[20]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클라크 게이블이 내 눈앞에서 나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짓자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의 키가 무척 커서 올려다봐야 했다. 그는 영화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잘 생긴 사람이었다."
[21]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 입양아 및 10대들의 결혼과 임신 상담을 전문으로 했다.
[22]
영이 85세 때 TV를 보다가
데이트 강간이란 말을 처음 듣고 그 뜻을 묻기에, 며느리가 설명해줬다고 한다. 영은 1913년에 태어난 사람이라 199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언론에 나오기 시작한 데이트 강간이란 말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영은 젊은 시절 자신이 성관계를 거부했음에도 게이블이 억지로 밀어붙여 임신하게 되었다면서, 그게 바로 데이트 강간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23]
실제로
호주에서는 이런 장난으로 인해 항공기 추락사고까지 났다.
위기탈출 넘버원 에서도 이 사례가 다뤄진적이 있다.
[24]
과거
Q채널등에서도 방영된 바 있던, 바람 난 배우자나 애인을 고발하는 <현장고발 치터스>의 진행자를 2013년부터 맡았었다
[25]
공화당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많아진건 1960년대 이후 이야기다. 애초에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에 강경하게 대응했던 정치세력은 공화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