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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6B62><colcolor=#fff> 자코모 카사노바 Giacomo Casano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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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 |
출생 | 1725년 4월 2일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 |
사망 | 1798년 6월 4일 (향년 73세) |
합스부르크 제국 보헤미아 왕국 두호초프 | |
신장 | 187cm |
자칭 직업 | 성직자, 군인, 모험가, 도박사, 시인, 소설가, 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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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서문
자코모 카사노바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성직자, 모험가, 시인, 소설가를 자칭한 인물이다.
프랑스어식
이름인 자크 카자노바 드 생갈(Jacques Casanova de Seingalt)로도 알려져 있다.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서문
일반적으로 잘난 바람둥이의 대표격이자 난봉꾼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인물. 어린 여자를 학대하였던 것이 분명한 것도 있고, 어린 소녀와 성관계를 갖거나 그 나체를 보는 걸 즐긴 것도 있다.
2. 생애
2.1. 초기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희극 배우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와 성악가 자네타 사이에서 6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의 면면을 보면 꽤 괜찮은 집안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자네타는 유럽에서 꽤나 이름 있는 성악가였고,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로 성공하게 된다. 위의 초상화는 그 동생이 그린 것이다.아버지 주세페 카사노바는 6남매를 남기고 36살의 나이로 요절해 할머니 손에 키워지다가 할머니도 세상을 뜨면서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에게 맡겨졌다. 15세에 성직자 알비세 말리피에로[1]의 도움으로 1740년 2월 성직에 입문,[2] 베네치아의 대 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동시에 파도바 대학에 다니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스페인어, 영어를 배우고 고전 문학,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춤, 펜싱, 승마 등 교양과 카드 게임 등의 사교술을 익혔는데, 이때 배운 것들은 훗날 소위 ' 엘리트들'과의 교류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1742년, 17세의 나이로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성직자 신분에도 여성 신자들을 꼬시는 등 일탈 행위를 일삼았고[3] 그를 둘러싼 구설수들이 나오자 교회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리고 바람둥이 행각이 시작되었다.
2.2. 떠돌이 인생
성직자로 살 수 없게 된 카사노바는 20세에 군대에 입대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갔다가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왔다.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22세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4]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가문빨 및 돈빨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27세에서 29세까지는 파리에 거주했으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을 안았다고 한다.그는 나이 30세에 베네치아에서 난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수녀까지 끌여들였다가 카사노바를 탐탁지 않게 여긴 귀족층에서 그를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체포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두칼레 궁전에 있는 피옴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일을 회고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옴비 감옥에 갇힌 그는 탈옥을 결심, 탈출구를 만들어 1756년 수감 1년 5개월 만에 탈옥에 성공했다. 탈옥한 그는 175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며 루이 15세에게 복권 사업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1758년부터 복권 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여들였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또다시 여자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실크 프린팅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과의 관계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를 갚지 못할 상황이 닥쳐 또다시 도망가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그는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썼다.[5]
1763년 영국을 방문한 그는 프랑스에서와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한 매춘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털이가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기도 했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에 머물면서도 여자들을 건드리다 뿔난 러시아 남자들이 "러시아에선 남자가 카사노바를 죽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여 카사노바는 폴란드와 스페인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그가 스페인에서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베네치아의 고위 인사들의 눈에 들면서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49세부터 나폴리에서 도박사로 일하면서 베네치아의 밀정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가 점점 많아지자 도박사와 밀정을 그만두었다.
50대가 되어 출판업으로 먹고 살던 그는 1783년에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미켈레 그리마니이며 그리마니의 아들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카를로 그리마니는 분노했고 베네치아의 여론이 악화되자 카사노바는 또다시 줄행랑을 치기에 이른다.
2.3. 노년
이렇게 도망친 카사노바는 59세 때부터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의 발트슈테이나 백작[6] 소유의 둑스 성[7]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남은 생애를 마무리한다.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에 매독에 걸렸다가 이런저런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호전되었지만, 40대 중반에 성기능 장애가 와서 더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1798년 6월 4일 전립선 질환으로 인해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8] 마지막 유언은
자코모 카사노바의 여성 편력을 보면 젊었을 때 엄청 행복하게 살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편력과 빚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들락거리거나 추방을 당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결국 나이 들어서는 병으로 인해 남자 구실을 못해서 바람둥이 행각도 하지 못했다.
3. 평가
1960년대 이후로 재평가가 시도되었고, 한국에서도 2001년 동아일보에서 <카사노바 다시보기>란 제목으로 카사노바 재평가론을 소개한 바가 있다.그러나 단순한 난봉꾼, 파락호의 수준을 넘어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될 짓만 골라 했던 악인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3.1. 바람둥이 행각
일반적으로 희대의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래서인지 문란한 난봉꾼, 말썽꾼들에게는 카사노바라는 별명이 붙곤 한다.하지만 카사노바가 그 무수한 여자들을 오직 자신의 매력과 화술로 유혹했다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면 그의 여성 편력 중에는 금전이 얽힌 경우가 많았다. 당장 자서전에서도 "여자와 관계를 가진 후 금화를 선물로 주었다"는 서술이 수도 없이 나온다. 값나가는 물건도 아닌 현찰을 준 것을 보통 '연인에게 준 선물'로 해석하지는 않으므로 명백히 매춘으로 볼 여지가 크다. 특히 돈을 선물로 주었다는 묘사는 주로 낮은 신분의 여자, 그 중에서도 배우나 가수처럼 당대 사회에서는 문란한 여자로 받아들여지던 일에 종사하던 여자나 가난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던 여자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나온다.
그래서 결국 자코모 카사노바는 귀족 여자와는 사기성 연애 내지는 강간을 했고, 낮은 신분의 여자들과는 매춘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서전에는 돈으로 여자를 산 게 아니라 연인으로서 돈을 선물했다고 주장하며 매춘행위와 범죄를 정당화했을 뿐이다.
3.2. 다재박덕
15세에 수도원장, 16세에 법학박사, 그리고 의학, 화학, 수학에 박식했고 특히 18세기 사람으론 드물게 통계학에 능통해 프랑스 국영 복권의 조직을 위탁받기도 했다. 그 이후 시인, 비단 제조 공장 운영, 염색 공장 운영, 바이올리니스트, 격투가, 역사학자, 마술사, 엔지니어 등으로 활동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분수를 가동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오만 가지 부문에 대한 저서도 무척 많이 남겨서 후대에 그의 서적을 연구하는 '카사노바 연구회'까지 만들어졌다.이 때문에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바람둥이나 문란한 난봉꾼, 심하면 변강쇠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카사노바가 뛰어난 지성인이자 교양인이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인물의 행적이나 업적을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희대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젊어서는 성직에 뜻을 두었다가, 군인의 길을 걸으려고도 했고, 모험가로 평생을 보내며 예술가, 작가, 공학자, 사업가, 연금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이지만 그 대부분의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의 씨앗을 엿볼 수 있었을 뿐,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떤 한 분야에 평생에 걸쳐 매진했다면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길 만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성실성이 없었기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인물이다.
일단 그나마 카사노바의 이름이 남은 분야가 작가로서의 카사노바인데, 카사노바가 평생에 걸쳐 남긴 상당히 많은 작품 중에서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은 딱 하나, 분량은 방대하고 진위는 의심스러운 《자서전》뿐이다. 이게 농담이 아닌데 그 자서전이란 결국 평생 여자들이랑 놀아난 이야기 모음집이다. 다른 작품들은 어지간한 카사노바 연구자들도 재미도 교훈도 없다고 깐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탈리아 문학사 연구자들은, 카사노바의 자서전이 가진 높은 문학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것을 카사노바의 문학적 성취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카사노바는 작품 같은 인생을 산 인물이지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자기 인생을 그대로 기록한 자서전은 읽기에도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는, 당대의 기록으로서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로서 직접 만들어낸 작품의 수준은 그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창작력은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인데, 이래서야 작가로서 높은 평가를 주기는 힘들다.
그 자서전의 내용도 엄밀히 말하면 과장이나 각색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허풍으로 글 전체의 수준을 떨어트릴 정도는 아니고 있을 법한 수준에서 이야기를 재미 있게 만들기 위한 적절한 윤색 정도라서, 이걸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가 외의 다른 영역에서의 활동은 더 초라하다. 저서는 많지만 독창적이거나 획기적인 발상은 없다.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한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지만 독립적인 업적이라 불릴 만한 성취를 이룬 분야는 없는 전형적인 딜레탕트였던 셈. 유럽의 왕이나 왕족, 교황, 추기경, 볼테르 등의 명사들과도 교류한 교양인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명사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일이었고 적당한 사람의 소개를 받아 손님으로 찾아가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었다.[9] 카사노바는 저런 명사들과의 대화를 영광으로 여겨 꼼꼼히 자서전에 기록했지만 카사노바와 교류한 명사들은 카사노바를 자신들의 살롱에 머무르는 교양인들 중 하나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딱히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당시 유럽이 살롱을 중심으로 하는 교양인들간의 교류 문화가 절정에 달한 시대였음을 생각하면 카사노바는 그저 살롱의 수많은 흔한 교양인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사노바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담을 보더라도 생각보다 내용이 별로 없다. 상수시 궁전의 정원에서 산책 중이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카사노바가 만났다. 카사노바가 인사를 꾸벅 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인사를 받고 말을 걸어주면서 대화가 시작된다.[10]
프리드리히 대왕: 이
궁전 멋지지 않소?[11]
베르사유 궁전에 비교해도 안 밀릴 거요.[12]
카사노바: 멋진 궁전이군요. 근데 분수가 없어서 완성됐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아, 나도 분수는 짓고 싶었는데 물 끌어들이기가 어렵더군. 베르사유에는 분수가 많소?
카사노바: 분수가 많아서 멋지죠. 폐하도 베르사유를 이기고 싶으면 분수를 멋있는 걸로 지어야 합니다. 음악에 맞춰서 춤추는 거 같은 걸로.
프리드리히 대왕: 오 자네 수력학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구려?
카사노바: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카사노바가 기록하지 않은 잡담)
카사노바: 그런데 프로이센에서도 복권 사업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돈 모으는 데 좋습니다.[13]
프리드리히 대왕: 그거 하다가 내가 손해 보면 어떡하려고?
카사노바: 계산만 잘 하시면 괜찮습니다. 100번에 한 번쯤 밑질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99번 본 이익으로 충분히 메꾸면 밑전이 남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왕이 나서서 사기 치는 거 같아서 하고 싶지 않구려.
(또 잠시 후)
프리드리히 대왕: 근데 가만 보니까 자네 꽤 잘생겼구려? 특히 코가 꽤 멋진데.
카사노바: 감사합니다.
카사노바: 멋진 궁전이군요. 근데 분수가 없어서 완성됐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아, 나도 분수는 짓고 싶었는데 물 끌어들이기가 어렵더군. 베르사유에는 분수가 많소?
카사노바: 분수가 많아서 멋지죠. 폐하도 베르사유를 이기고 싶으면 분수를 멋있는 걸로 지어야 합니다. 음악에 맞춰서 춤추는 거 같은 걸로.
프리드리히 대왕: 오 자네 수력학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구려?
카사노바: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카사노바가 기록하지 않은 잡담)
카사노바: 그런데 프로이센에서도 복권 사업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돈 모으는 데 좋습니다.[13]
프리드리히 대왕: 그거 하다가 내가 손해 보면 어떡하려고?
카사노바: 계산만 잘 하시면 괜찮습니다. 100번에 한 번쯤 밑질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99번 본 이익으로 충분히 메꾸면 밑전이 남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왕이 나서서 사기 치는 거 같아서 하고 싶지 않구려.
(또 잠시 후)
프리드리히 대왕: 근데 가만 보니까 자네 꽤 잘생겼구려? 특히 코가 꽤 멋진데.
카사노바: 감사합니다.
카사노바가 자서전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대충 이 정도인데, 이 대담에서 그의 한계를 볼 수 있다.
물을 끌어들이지 못해 분수를 못 지었다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이야기[14]에 카사노바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분수 같은 꽤 기발한 아이디어[15]를 내며 '제대로 했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아는 척을 했고, 이를 들은 프리드리히가 구미가 당겼는지 '수력학에 조예가 있느냐'고 흥미로워했다. 여기서 만약 카사노바가 화려한 언변만큼 실력이 있었거나 확실한 전문적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이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기량 또는 인맥을 피력해 왕에게 환심을 사며 인정받아 적당한 관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근세 유럽의 절대왕정기에, 지식인들이 이런 식으로 기회를 얻어 출세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하지만 카사노바에게는 아이디어를 내고 왕의 구미를 당길 정도의 말빨은 있지만 그걸 실행할 능력이나 인적 네트워크가 없다보니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포기하고 어물어물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상대방이 솔깃하게 할 만한 말빨은 가진 사람이었지만 행동력은 아니올시다라는, 한마디로 '허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카사노바에게 관직을 주었다. 다만 역시 대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인 만큼 사람 보는 눈이 있었는지 사관학교 교관이라는 미관말직만 주었다. 카사노바는 어쨌건 이것저것 아는 건 많은 사람이었으니 생도들의 교양강사로서는 나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보수가 짜고 대우가 나쁘다는 이유로 카사노바가 잠시 일하다가 때려치고 나가버렸다는 데 있다.[16]
이 외에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와의 대담도 자서전에 기록했지만 이건 더 짧다. 카사노바가 왜 러시아는 더 과학적인 그레고리력을 쓰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쓰냐고 묻자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정교 신도들에게 자기 생일의 성인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므로 만약 그레고리력을 도입한다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하면서 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단했던 점은, 어지간한 사람은 평생 한 번 만나기도 힘들고, 만나도 제대로 말 한 마디 나누기도 힘든 왕과의 대담 기회를 두 번이나 가졌던 것이다. 처음에 카사노바에게서 "왜 러시아는 그레고리력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예카테리나 2세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 하고 궁정학자의 자문을 받아 며칠 후 다시 카사노바를 접견해 대답을 해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왕이 흥미 있어할 만한 화제를 정확히 고른 카사노바의 말솜씨는 분명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왕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할 만한 실력은 없었으니 기회를 아무리 많이 가져도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카사노바는 각국의 왕이나 최고의 명사들 앞에 나서도 당당하게 대화할 수 있는 당대의 국제적 교양인 중 하나였지만 그런 교양인들 사이에서 특별히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했던 것 역시 학문의 분야가 세분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그가 가진 매력은 확실히 있었고, 그 매력을 기회로 바꿀만한 말빨 또한 확실히 비범했다. 하지만 딱 그것 뿐이었고 저런 매력과 말빨로 만들어낸 기회를 살릴 만한 실질적 기술이나 정상적 인맥은 하나도 없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좋은 머리를 갖고 태어나 실력이나 인간관계, 신용을 가꿀 여건과 기본 소양도 충분하였으나 평생 쾌락과 겉멋만 추구하느라 가능성에 멈추고 말았다.[17]
3.3. 베네치아 탈옥건에 관해
' 탄식의 다리' 부분에도 나와 있지만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의 감옥에서 탈옥한 적이 있다. 문제는 알고 보면 그냥 평범한 탈옥에 불과한 이 탈옥 이야기가 자꾸 극적으로 변모한다는 것. 보통 "탄식의 다리를 건너 감옥에 갇힌 사람 중 유일하게 탈옥에 성공한 사람이 카사노바이며,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할 수 있었고, 탈옥에 성공한 카사노바는 '나는 여자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자유를 더 사랑했다.'라는 말을 남겼다"라는 식의 낭만적인 이야기로 알려졌는데, 위 일화는 거의 사실이 아니다.일단 탈옥에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카사노바가 유일하다는 것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당장 카사노바 자서전만 봐도, 카사노바와 탈옥 동기인 가톨릭 수사(修士)가 한 명 있고, 카사노바의 탈옥 당시 함께 탈옥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무서워 동참하지 못했던 늙은 귀족이 카사노바의 성공에 자극받아 수년 후 몇 명의 동료와 함께 탈옥을 시도해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즉, 수년 사이에 탈옥에 성공한 사람이 적어도 대여섯 명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카사노바의 이미지 때문인지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탈옥했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지만 이 부분 역시 확실히 사실과 다르다. 카사노바가 아예 자서전에 자신의 탈옥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놓았는데, 일단 간수를 매수해 감시를 허술하게 만든 틈에 감방에서 빠져나와 간수들이 순찰하는 구역의 사각을 노리고 지붕과 성벽 위를 걸어서[18] 탈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탈옥이 왜 이렇게 쉬웠느냐는 것이 문제인데, 현재 카사노바의 재판기록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없고 자서전에도 탈옥에 대한 설명이 상세한 것과는 달리 재판과 투옥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호한 부분이 많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카사노바가 갇혀있던 감옥이 두칼레 궁전 옆의 그 감옥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일단 당시 두칼레 궁전에서 10인 위원회 재판을 거쳐 탄식의 다리를 건너 투옥되는 것은 주로 국사범이나 정치범들이 밟던 수순인데, 단순 형사범으로 처벌받은 카사노바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카사노바가 상세히 기록한 탈옥 과정을 보더라도,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 한가운데의 감옥 지붕 위를 걸어서 탈출한다"는 방법은 남의 눈에 띄기 쉬우니 성공 가능성이 몹시 낮다. 탈옥 직후 멀리 탈출하기 위해 역참에서 마차를 탔다는 설명을 보더라도 석호지대 내에 있는 두칼레 궁 옆 감옥이 아니라 내륙지대에 있는 교외의 감옥에서 탈옥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크다. 결국 '탄식의 다리를 건너는 카사노바'라는 극적 이미지와 실제 상황은 달랐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당시 카사노바가 투옥된 죄목 자체가 풍기문란죄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입장에서도 철저히 감시해야 하는 국사범이나 흉악범과는 달리 감옥에 갇혀 있든 해외로 도주하든 국내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 역시 가능하다.[19]
탈옥하면서 카사노바가 남겼다는 편지의 내용 역시 위 내용과는 다르다. 간단히 요약하면 간수에게 죄수를 감시할 의무가 있다면 죄수에게는 자유를 갈망할 권리가 있다. 이 탈옥으로 자신이 도덕과 법, 국가에 대한 신의와 충성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수 없기에 탈옥을 결행하겠다. 물론 이러다 잡히면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되어 자비를 구걸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정도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카사노바다운 편지고 "나는 여자들을 사랑했지만 자유를 더 사랑했다"가 좀 생뚱맞으면서 허세 쩌는 데 비해 자조와 풍자가 담겨있으면서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카사노비스트들에게서 가장 카사노바다운 편지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20]
3.4. 사기 행각
카사노바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다른 중요한 점은 도덕적 결함이다.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다. 카사노바가 평생에 걸쳐 전 유럽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도덕성 문제였다. 오늘날에는 카사노바가 바람둥이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덕에 카사노바의 도덕적 문제라고 하면 여자 관련 문제를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에는 여자 문제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고[21] 오히려 부정직성과 신용에 관련된 문제, 특히 사기치다 걸린 것이 카사노바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었다.예를 들어 위에 소개된 카사노바의 행적에 '연금술사'가 있는데, 그는 연금술의 비법을 알고 있다고 사기를 쳐서 돈을 매우 자주 우려냈다. 자서전에 당당히 '연금술 비법 같은 거 몰라! 돈 필요해서 사기쳤졍ㅋ'라고 정직하게 밝힌 것은 아주 재미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서 공작 부인을 남자로 환생시켜주겠다고 뻥을 쳐서 그 남자 아기로 다시 태어난 공작 부인의 보호자가 되어주겠다는 핑계로 전재산을 우려내려 했던 사건은 좀 지나쳤던 듯… 자신의 애인을 임신시킨 뒤 애인이 낳을 아이가 남자아이이고 그 아이에게 공작 부인의 영혼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여 (어차피 오늘내일 하는 공작부인이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죽으면) 그 아이를 공작 부인이 가진 모든 재산의 상속자로 인정하게 해서 재산을 꿀꺽한다는 무지막지한 계획이었다. 결국 공작 부인이 죽은 후 그를 때려죽이려 드는 친척들을 피해 프랑스에서 도망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연금술 사기로 돈을 번 일이 또 있다. 연금술에 푹 빠져있던 한 신사에게 수은의 양을 늘려주는 비법을 팔아먹었다고 하는데, 그 비법이란 바로 수은에 안티모니를 용해시키는 것. 수은에 안티모니를 녹이면 당연히 수은의 질량과 부피는 녹아든 안티모니의 양만큼 늘어난다. 카사노바는 이 비법을 신사에게 넘겨주고 비법을 파는 대가로 고액의 어음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날 신사는 자신이 사기당했음을 깨닫고 화가 나서 카사노바에게 쳐들어왔다. 카사노바는 신사에게 이 방법으로 양을 불린 수은이 원래의 수은과 질적으로 똑같은 것임을 보증했는데 신사가 안티모니가 용해된 수은에 안티모니를 더 용해시켜 다시 양을 불리려 했지만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수은에는 안티모니가 더 이상 녹지 않았던 것이다. 본래의 수은에는 안티모니가 녹았는데 양을 불린 수은에는 안티모니가 더 이상 녹지 않으니 그 둘은 질적으로 똑같은 수은이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카사노바가 사기를 친 것이라는 게 신사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카사노바의 대답은 정말 뻔뻔했다. 어제 처음 실험해 보여줬을 때는 당신도 같은 수은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느냐, 어제 눈치 못 채고 계약했으니 땡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억울하면 소송하라'고 배짱을 튕기는데 말로야 소송하면 내 비법도 탄로나겠지만 나는 상관없다 운운을 하는데, 사실 이 따위 수법이 비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소송하면 너도 사기당했다는 게 탄로나 망신당하겠지? 그리고 네가 이단적인 연금술에 심취해 있다는 것도 소문나겠지?'하고 협박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를 두고 한참이나 입씨름을 벌였고, 결국 카사노바가 어음을 돌려주는 대신 신사는 사례비조로 어음 액면가의 일부만큼 금화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22]
카사노바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야 했던 것은 여자 문제 때문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돈을 얄팍하게 뜯으려는 3류 사기꾼적 태도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입이 괜찮은 성직자 자리를 여자 문제로 잃은 후 계속 도박이나 떳떳하지 못한 일로 돈을 벌려 했고, 그러다 보니 정직한 자리에서 일하기는 더욱 어렵게 된 것에 가깝지만, 어쨌든 카사노바의 행적 자체는 전형적인 파락호의 행적에 가깝다.
카사노바의 업적 중 그나마 실질적인 검증이 가능한 것은 '프랑스 복권의 창시자 중 하나'라는 것이지만, 이 역시 당시 복권 사업이 썩 떳떳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23] 가능했던 것이며, 카사노바가 여러 나라에서의 투옥되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부정직성과 부도덕성 그리고 사행성 때문이었다.
카사노바 자신이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평생을 감각적 쾌락을 위해 살았을 뿐이다. 물론 만년에 불행했던 카사노바가 자신이 장래에 잊힐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카사노바의 삶은 역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이러한 점에서 카사노바의 일생 전체를 부정하거나 폄훼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카사노바 개인의 삶이 뭔가 바람직하다거나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 관점으로 다채롭고 특별한 삶을 산 지능적 인간이 말년에 정신차려 방대하고 세밀한 기록을 남겼고, 거기서 당대의 사회상과 성문화 같은 치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다보니, 그 '자서전'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뿐이다.
3.5. 희대의 강간마
어울린 여자들의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그녀들을 똑같이 대했다는 말도 있지만, 카사노바의 여성편력을 평등주의의 실천이라고 보는 것도 우습다. 상술했듯 사실상 매춘을 한 거나 다름 없는데, 그저 연애보다 매춘이 더 쉽고 높은 신분의 여자가 매춘을 할 리 없으니 신분 낮은 여자들과 많이 어울린 것뿐이다. 단지 전문적인 매음굴에 찾아가기보다는 변형된 매춘으로 현대까지 남아있는 계약연애를 더 선호했고, 이를 진짜 연애라고 포장한 것뿐. 자신이 남긴 기록을 봐도 친구네 집에서 식사를 하다 도움을 청하러 온 가난한 모녀를 눈여겨 봐뒀다 접근해 돈을 주고 딸과 관계를 가졌다거나, 가난한 가정교사에게 시세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방을 빌려주고 그 대신 관계를 가지는 등, 금전으로 여자를 유인한 사례가 자신의 매력과 화술로 상대를 유혹한 사례보다 훨씬 많다. 매력과 화술은 전업 창녀는 아니지만 계약연애 형태의 매춘을 할 생각은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 정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위에 나온 베네치아에서의 투옥은 그 혐의가 '명문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방탕한 놀이에 끌어들여 도덕적으로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일단 카사노바가 명문가의 젊은이들과 함께 놀면서 소위 '방탕한 놀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정작 카사노바와 함께 논 그 젊은이들은 가문의 후광 덕에 별다른 처벌이나 제재를 받지 않았고 카사노바만 시범 케이스로 5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처넣어졌으니 억울하다면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방탕한 놀이'의 내용을 알고 보면 이게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게 막 나간 것이라, 공범들은 안 잡혀가고 혼자만 잡혀간게 억울하다고 하면 모를까, 잡혀 들어간것 자체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절대 억울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히 매춘부들과 어울린 정도가 아니라 양가집 처녀와 유부녀까지 건드렸으니 당시의 도덕관념으로도 엄청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재주껏 유혹해 이런 관계를 가진 거라면 나름대로 변명이 가능했겠지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해 저지른 범죄도 많았으니 더욱 심각한 일이었다. 카사노바 자신이 당시 자주 사용했던 수법이라고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렇다.
1) 교회 같은 곳에서 젊고 매력적인 유부녀를 찾는다. 보복하려 들면 곤란하므로 많은 경우 힘 있는 집안이 아닌 기술자나 직공의 부인이 주요 먹잇감이었다고 한다. 2) 목표로 삼은 부인의 집을 확인해두고 한밤중에 10인 위원회 직속의 치안요원(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으로 변장해 그 집에 쳐들어간다. 3) 10인 위원회의 이름으로 체포를 선언, 당연히 반항하지 못 하는 (희생양인) 부인과 그 남편을 둘 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려 서로 다른 곤돌라에 태워 나간다. 4) 남편을 으슥한 곳에 내려주고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발설하면 체포해서 투옥하거나 처형하겠다고 협박한다. 남편은 겁에 질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집에 와도 부인은 없다. 5) 다른 일당들은 그 사이 부인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끌고 가서 윤간한다. 6) 그렇게 며칠간 욕정을 채운 뒤 질리면 다시 부인의 눈을 가리고 집 근처에 데려다 준다. 물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발설하면 다시 체포해 투옥하거나 처형하겠다는 협박은 빼놓지 않는다. 7) 피해자 부부는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갔다 돌아왔으니 범인들의 은신처가 어딘지 찾을 수도 없고, 혹시 상대가 진짜 10인 위원회 직속요원이거나 그들과 줄이 닿은 권력자일지도 모르니 피해 사실을 알리기도 무서워 말을 할 수가 없다. |
이런 짓을 하고 다녔으니 베네치아 정부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어 카사노바를 체포한 것인데 정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5년형도 너무 적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말년의 카사노바는 대체로 자신의 행적에 대해 정직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평가받는 인물이지만 이런 짓을 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서전에 기록을 남긴 걸 보면 정직한 게 아니라 뻔뻔하다 싶을 정도다. 심지어 저런 식으로 납치한 부인들 중 돌려보내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안 나온다. 자신이 저지른 납치극은 가벼운 놀이나 일탈처럼 묘사하고 그 후 '그녀가 자신들을 사랑해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멀쩡한 양갓집 유부녀를 기만과 협박으로 납치해서 강간하는 게 가벼운 일탈이나 놀이일 수는 없고, 납치강간 피해자가 납치강간범을 사랑해서 함께 살자고 했다는 건 그냥 야설적 망상일 뿐이다. 아니면 부녀자가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이 남자에게 정착하는 걸로 일을 수습하면 먼 훗날 돌이켜볼 때 해프닝 정도로 취급할 수 있다는 따위의 현실도피를 시작하는, 약한 정신병의 징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카사노바가 수많은 여자와 놀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피임을 철저히 해서 여자를 임신시킨 적 없다는 설 역시 거짓이다. 카사노바와의 관계로 임신하고 그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여자가 최소한 한 명은 있다. 성직자의 길을 걷던 젊은 시절, 카사노바를 높게 평가한 (그가 부임한 교구의) 지방 유지가 그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했고, 성실한 성직자 청년이라 믿었기에 17살짜리 딸이 카사노바와 이야기하거나 가까이 지내는 것도 만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유지의 딸을 임신시키고 튀었고, 그로 인해 양갓집 규수였던 이 아가씨는 집에서 버림받아 창녀로 전락했다. 카사노바는 약 20년쯤 뒤 우연히 이 여성과 재회하게 되었는데, 질병과 빈곤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좀 찔렸는지 약간의 돈을 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의 자서전에 무슨 아름다운 사랑과 그 슬픈 결말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론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젊은 시절의 또다른 이야기로, 이탈리아 중부를 여행하던 카사노바가 단장 역할을 하던 어머니와 큰오빠, 두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가족 유랑 예술단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받기로 했던 공연비를 못받아 다른 도시로 갈 경비가 없어 크게 곤란한 상황이었고 카사노바는 자신이 빌린 마차에 이들을 태워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이 '큰딸이 자신과 함께 하룻밤을 보낼 것'이었다. 결국 큰딸이 카사노바와 하룻밤 같이 자고 카사노바에게 선물로 돈을 받아 다음 도시로 출발했다. 그런데 언니가 가진 금화가 부러웠던 작은딸이 자기한테도 금화를 달라고 졸랐고, 물론 카사노바는 작은딸과도 하룻밤을 보내고 돈을 선물했다.[24] 참고로 두 딸의 나이는 12살과 11살이었다.
이걸로 안 끝난다. 이번 이야기는 꽤나 황당하면서도 웃기다. 프랑스를 여행하던 카사노바가 친구의 애인 집을 방문했다.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친구와 친구의 애인은 함께 방에 들어가 밤새 놀고 카사노바는 소파에서라도 자기로 했는데 친구 애인의 여동생이 소파에서 자기 불편하면 자기 침대를 양보해줄 테니 3프랑만 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여자아이의 침대를 빌리면 그 여자아이와 함께 잘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카사노바는 기꺼이 3프랑을 지불했지만, 여자아이는 자기는 옷을 벗고 자는 게 습관이라 다락방에 가서 자겠다고 한다. 그때 이 소녀가 꾀죄죄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몸은 아름다울 것을 직감한 카사노바는 자기 앞에서 옷을 벗고 알몸을 보여주면 3프랑을 더 주겠다고 제안하고, 보기만 하고 다른 짓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 성립. 카사노바의 직감답게 소녀의 몸은 아름다웠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카사노바는 친구의 애인인 소녀의 언니와 협상한 끝에 소녀를 자신의 애인으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매달 120프랑을 주기로 한다.
그 뒤 이 자매와 카사노바 사이에 실로 코믹한 능구렁이 배틀이 벌어진다. 자매는 여동생의 나체를 보여주고 화가를 불러 누드화를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매달 120프랑을 받았고 자신들이 카사노바를 훌륭하게 등쳐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그 그림을 들고 부유한 귀족을 찾아가 소녀를 소개해주고 소개비를 받아먹었다. 카사노바는 소개비를 벌고, 자매는 카사노바뿐 아니라 부유한 귀족에게도 돈을 받았고, 귀족은 돈을 쓰긴 했지만 어리고 예쁜 애인을 만들었다는 결말. 참고로 소녀의 나이는 13세였다.
마지막으로 카사노바의 여자 문제에서 최대의 도덕적 결함으로 평가받는 사건이 있다. 러시아 여행 중 17살짜리 소녀를 노예로 부린 것이다. 소녀를 하녀로 데려가는 대가로 100루블을 가족에게[27] 주고 그 대신 먹이고 입히고 매주 1회씩 목욕탕과 교회에 보내주기만 하면 더 이상의 돈은 한 푼도 줄 필요가 없고 죽이지만 않으면 어떻게 다뤄도 상관 없다는 계약이었는데 이런 걸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할까. 당대 러시아 문학을 몇 개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당시 러시아 농노와 빈민들에게 100루블은 엄청 큰 돈이었다. 거기다 예카테리나 2세 치하 러시아는 하급계층에 대한 억압이 팽배한 시대였다. 여러 모로 씁쓸한 대목이었다.
카사노바는 자신이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면서도 종종 호되게 때려 다스렸기에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네 어쩌네 하는데 이것도 사실 야설적 망상이지 않은가. 그리고 카사노바의 친구로 이 노예 구입을 알선한 스테판 지노비예프의 서신에 따르면 카사노바가 '자이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 소녀를 대하는 태도는 꽤 잔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를 맞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앉거나 걸어다니기 힘들어 했다거나 등과 엉덩이가 아파 아무 것도 걸치지 못 하고 엎드려 있었다는,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카사노바의 요구에 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8].
이쯤 되면 이게 팩트인지 괴악한 소재를 가지고 쓴 야설인지 구분이 안 된다 싶겠지만, 진위 여부는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국내에 번역된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한길사의 《카사노바, 나의 편력》(전 3권)과 휴먼앤북스의 《불멸의 유혹》(단권) 두 종류인데 해당 책들을 읽어본 결과 소개된 에피소드의 대부분이 사실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부 확인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애초에 《카사노바 자서전》 자체가 완역이 안 되어 3권짜리 한길사판조차 전체 내용의 1/4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한다.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러시아에서 17세의 소녀 노예를 사서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 확인. 그리고 종종 호되게 두들겨팬 것[29]도 사실 확인. 다만 두들겨패서 눕지도 못 하는 상태에서 관계를 가졌다는 이야기만 확인이 안 된다.
- 유랑 음악가 가족을 만나서 마차에 태워주는 조건으로 두 딸과 성적 관계를 가지고 다음 날 여관 시트 값 물어준 건은 사실 확인. 그것도 모자라 15세 오빠에게까지 집적거려 또 성적 관계를 가진 것도 확인. 카사노바는 오빠가 카스트라토 소년이 아니라 남장한 소녀였으며 협박이 아니라 애정의 보답을 받아 관계를 가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이 카스트라토가 사실은 남장여자였다는 부분에서 서술이 대놓고 거짓말 티가 줄줄 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카사노바의 자서전을 보면 '아! 이 부분은 거짓말이다'라는 티가 딱 나는 부분이 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다른 부분들에 비해 거짓말하는 부분에서는 뭔가 리얼리티도 없고 작위적인 훈계조의 교훈이 줄줄 이어진다. 이 카스트라토 시비 역시 딱 보면 '이 자식 또 구라친다'는 감이 온다. 그 앞까지 여자는 무대에 설 수 없다는 법규 이야기를 하면서 확인하게 해달라, 신고하겠다 운운하는 부분은 리얼한데 잠시 후 카스트라토 소년이 갑자기 자기한테 지저분하게 질질 달라붙는, 성인 남자에게 반했다는 부분은 '바람직한 기독교인 소녀의 애정'에 대한 훈시 비슷하게 전개된다.
카사노바는 매력적인 바람둥이가 아니라 돈 몇 푼 벌어 여자 관련된 일에 쑤셔넣는 일이 잦은 호색한에 불과했다. 사실 역사상 진짜 개인의 매력이 개쩔었던 바람둥이들과 비교하면 카사노바는 언급하는게 실례일 정도였다.
- 예를 들어 조지 고든 바이런 같은 경우는 잘생긴 외모, 탁월한 말솜씨와 모험가 기질, 거기에 자식에게 대물림까지 했던 지성까지 더해진 경우로 오히려 이쪽이 전통적인 허구적 카사노바의 이미지에 훨씬 더 잘 맞는다. 당장 그에게 홀린 여자들도 몇푼 돈으로 꼬시는 건 어림도 없고, 집안이면 집안, 외모면 외모해서 뒤떨어지는 부분이 없고, 당연하지만 자존심마저 하늘을 찌르는 귀족 여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아무리 잘난 남자라지만 도저히 여자에게 정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바이런의 뒤꽁무늬를 졸졸 따라다녀서 문제가 됐을 정도다. 문학적 성취도 탁월해서 대표적인 영국 낭만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 정도. 거기에 개인의 인성 문제와는 별개로 상원의원 자리를 물려받을 정도로 혈통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핍박받는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며 그들의 대우를 개선하기를 보수적인 영국 의회에서 주장하는 등 폭풍간지스러운 모습도 있었다. 심지어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도 아니었던지라,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본인의 신념과 모험가 기질을 발휘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얼굴도 잘생겨서 문학적 명성이 높아지며 유럽의 셀럽이 되자, 그가 방문한 곳에서 바이런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망원경을 대여(!) 하는 일까지 있었고, 그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왜 당대 여인들이 바이런, 바이런 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 카이사르 또한 대표적인 바람둥이었다. 이쪽은 남성에게 치명적인 탈모 증상으로 너프까지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친절한 태도와 탁월한 지성과 언변, 때때로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통찰력을 개인사에까지 반영한 케이스. 로마 상류층 사회에서 불륜이 빈번했음에도 이와 모순적으로 가정적이고, 책임감있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줬던 게 당대 로마의 분위기였는데, 그럼에도 카이사르에게는 이래저래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당장 카이사르의 여인하면 떠오르는 세르빌리아와 클레오파트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후원자 관계였던 크라수스의 아내와도 바람을 피웠으며, 그 외에는 그가 나눴던 편지를 아우구스투스가 태워버리면서 기록되지 않은 여인들도 수두룩했다. 온갖 문제거리를 끌고다니며 정치적 모험을 일삼았던 양반이라 정적이 수두룩했음에도, 로마 귀족들이 입는 토가를 세련되게 입고, 탈모를 가리기 위해 월계관을 활용하는 등, 패션 센스도 뛰어났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미워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인간관계도 잘 풀어나갔다. 당연하지만 정치적/군사적 재능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 후대의 역사에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될 정도로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 자코모 푸치니는 당대 기준으로 셀럽 중의 셀럽 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지금도 꾸준히 공연되는 훌륭한 오페라들을 남겼으며, 당대에도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대중예술가로서의 성공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중후하면서도 멋진 외모, 낭만적이면서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세련된 패션감각과 취향까지 두루 갖췄다. 본인도 여자들을 좋아했지만 당장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자들도 푸치니를 가만 내버려두질 않아서 염문이 끊이질 않았던 케이스였다.
3.6. 정치적 수구성과 모순
카사노바가 당대의 '자유인'이었다는 평가를 의심할 만한 근거로 카사노바가 보여준 극단적 수구성이 있다. 위에 소개된 러시아에서의 노예 소유 문제를 보더라도 카사노바는 당시의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강압과 폭력을 정확히 읽어내고, 이런 폭력적 분위기 속에서 하인과 주인, 부하와 상관의 상하관계에서 윗사람이 폭력을 써서 다스리지 않으면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경멸당하고 폭력을 쓰면 두려움 섞인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해 자신도 그것을 이용해 저항할 수 없는 나이 어린 소녀를 돈으로 사서 폭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카사노바는 사회의 부조리나 불평등에 저항한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한 인물이었다.이뿐 아니라 말년의 카사노바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남긴 평가 역시 충격적이다. 물론 당대의 기준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참혹한 대소동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에 대한 비판 정도는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혁명에 대한 카사노바의 분개는 '천한 것과 추한 것들이 주인이 되고, 그 때문에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카사노바는 절대로 평등주의자가 아니었다. 카사노바에게 있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을 지배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사노바 자신도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는 편력 과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귀족으로 사칭했다. 카사노바는 귀족들의 특권과 오만에 반대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도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던 인물일 뿐이었다[30].
카사노바의 이런 수구적 성향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해군의 주축인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있었다. 한 부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자유인 노꾼이었고 다른 부류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처벌로 일정 기간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역에 처해진 죄수들이었다. 당대의 베네치아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인 노꾼들은 당연히 나름대로의 사회적 존중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죄수 노꾼들은 명예를 잃은 사람들로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카사노바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인데, 그 이유인즉 죄수들은 국가의 강압에 자유를 잃은 사람들이지만 월급을 받는 자유인 노꾼들은 '돈에 자신의 자유를 팔아넘긴 천박한 인간'들이니 강제로 자유를 빼앗긴 인간들보다 더욱 경멸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카사노바에게 있어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것은 경멸받아 마땅한 천박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본인도 그 원칙에 따라 평생 동안 사기로 울궈낸 돈으로 먹고 살지언정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정당하게 노동하는 일은 없었다. 이는 시대를 앞서간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흔해빠진 귀족 출신 파락호의 사고방식일 뿐이다. 물론 당시 유럽 귀족들이 이와 같은 '노동에 대한 경멸' 정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조차 사회를 부양하고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범죄자보다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들을 더 명예롭게 대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이와 같은 상식조차 무시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사노바의 다른 문제점으로 뻔뻔하고 노골적인 이중잣대도 들 수 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시기, 오페라 극장을 방문한 카사노바는 10대 초반의 어린 발레리나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발레리나 중 하나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약으로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다고 한다.[31] 그 뒤 기절했다 깨어난 발레리나가 다른 친구들에게 '임신한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32] 10대 초반의 소녀가 임신했다는 것에 깜짝 놀란 카사노바는 소녀에게 '결혼한 부인이신 줄은 몰랐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소녀는 친구들과 함께 깔깔 웃어댔다. 소녀는 연인과 혼전관계로 임신한 미혼이었고, 깔깔댄 것은 카사노바를 꽉 막힌 꼰대 취급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카사노바는 자서전에서 "발레리나들이 문란하다"고 투덜거리며 "앞으로 다시는 발레리나들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릴 했다면야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카사노바이지 않은가. 당장 카사노바가 건드린 처녀가 몇인데. 애초에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리나들을 집적거린 것 자체가 꼬시려는 목적에서였던 인간이 자기가 꼬시려던 소녀들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 걸 알자 문란하다고 까대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카사노바의 이중잣대를 보여주는 사례는 이것뿐이 아니다. 영국 방문 당시 사교계의 모임에 참석한 카사노바는 그 모임에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당한 인물의 가족들이 함께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명예를 잃은 죄인의 가족이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느냐"고 분개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다른 영국인들의 대답은 "저 사람들은 죄를 지은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일 뿐이고, 무엇보다도 그 죄를 저지른 본인 역시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처벌(사형)을 받아 죗값을 치렀으니 명예를 잃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에 카사노바는 "영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상하다" 고 조롱하는 글을 자신의 자서전에 남겼다. 즉, 카사노바는 남의 죄에 대해서는 일단 죄를 저지르면 설령 죄값을 치른다 해도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족들에게도 책임이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아주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던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범죄에 대한 카사노바의 태도는 위에서 구구절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죄값을 치르기 싫어 탈옥을 포함해 평생 온 유럽을 도망다닌 것이 카사노바였다. 자신의 도덕적 과오에 대한 관점과 타인에 대한 관점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33]
또한 법과 윤리에 대한 카사노바의 이중적인 잣대를 보여주는 또또 하나의 사례로 금육일 사건이 있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중이던 카사노바는 금육일에 머무르던 여관에서 고기 요리를 주문했지만, 여관 주인에게 "오늘이 금육일인 거 모르냐" 면서 거절당한 바 있다. 이 거절에 카사노바는 "나는 교황 성하께 직접 금육을 면제하는 관면장을 받았으므로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 고 받아치지만, 카사노바의 기대만큼 어리숙하지 않던 여관 주인은 "그러면 관면장을 보여달라"고 응수한다. 물론 관면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거짓이었고, 당연히 카사노바에게는 보여줄 관면장이 없었다. 그리고 이 일로 한참 실갱이를 벌이는 카사노바와 여관 주인을 보고 여관의 다른 투숙객이 "설령 당신이 정말 관면을 받았다 해도 관면장을 갖고있지 않으니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 않으냐? 관면장을 지참하지 않은 것은 당신 책임이다" 라고 상황을 정리한다.
그런데 카사노바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거짓말쟁이로 취급한, 꽉 막힌 여관 주인과 손님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즉 카사노바 자신은 자기 이익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로 타인을 속이려 하는 인물이면서도, 상대가 그 거짓말에 속어넘어가지 않고 카사노바의 거짓말을 지적하면 마치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했을 때처럼 "왜 내 말을 믿지 않느냐"고 분노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거의 유아적이라고까지 해야 할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편향성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카사노바에 우호적인 재평가론의 상당부분은 이런 일화들을 두고 <당시 사회의 부당한 억압(교회법 등)을 재치와 꾀로 뛰어넘단 당대의 자유인이자 모험가> 로써 카사노바를 재평가하자는 것인데, 상기된 카스트라토 소년과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카사노바는 그 부당한 억압이 자신에게 가해질때(금요일에 먹고싶은 고기요리를 못 먹을 때)는 분노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카스트라토 소년을 위력으로 간음하고 싶을 때)는 이런 부당한 억압을 적극적으로 악용하는 인물이었다. 즉 카사노바의 관점은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는 것이었고, 사회의 법과 규범이란 자기는 안 지켜도 되지만 남은 지켜야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정리하면 그는 이념이나 사상 자체에 딱히 깊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본인의 쾌락 충족에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3.7. 총평
진지한 카사노비스트는 카사노바를 결코 도덕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보기 드물게 화려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서 그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할 뿐이다. 이를 넘어 카사노바의 도덕적 측면을 들여다본다면 남는 것은 그저 사기꾼과 성범죄자의 모습일 뿐이다.카사노바에 대한 재평가 시도도 '전근대의 윤리관에 따라 타락한 난봉꾼이라는 이미지에 갇혀있던 카사노바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사실 현대의 기준으로 재해석하면 오히려 평가가 뚝뚝 떨어지는 인간이다. 노동을 경멸하는 귀족주의자였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그리 나쁘지 않게 받아들여진 면모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백수 주제에 직장인을 우습게 보는' 행태가 될 것이고, 곳곳에서 쳐댄 사기도 그때에야 어느 정도 모험담 비슷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요즘 기준으로는 그저 범죄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지른 납치, 강간, 성매매 및 성매매 알선, 미성년자와의 성행위는 현대 기준으로 종신형감이고 국가에 따라서는 사형감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인간이 살던 시대에는 성적 자기 결정권은 명문화 되지 않았고, 여성, 미성년자에 대한 법도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시대였는데 근세의 엄숙한 종교적인 질서가 지배한 16-17세기와 사회적 신분을 안 가리고 국민 국가라는 걸 만들기 위해 공교육을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 가치관을 주입한 19세기 사이에 딱 알맞게 떨어진, 이전 시대의 종교적 엄숙주의에 대한 문화적 반발이 존재하는데 이를 하층민에게까지도 하나의 성적 가치관을 주입하지는 않았던 18세기 중후반[34]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당대에는 사기꾼이라 욕해도 성적 방종은 법적으로는 덜 문제시된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형을 살다나오기도 했고, 여러 국가에서 계속 쫓겨나거나 러시아나 영국에선 완전히 박대 당하긴 했다. 딱 100년만 더 일찍, 혹은 늦게 태어났으면 종교재판소의 잿더미로 산화하거나 사회 불안 요소라고 낙인 찍힌 채 정신병원을 가장한 감옥에서 평생 썩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쁜 의미에서 당시의 시대와 잘 맞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나마 주 활동 무대이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는 외국인이라서 처벌을 피해갔지 같은 시대에 비슷한 사상을 갖고 행동한 사드 후작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처벌을 받았다.
카사노바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체코 등등 온 유럽을 떠돌아다닌 이유가 이것이다. 한 나라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쳐서 맞아죽거나 감옥에 갈 지경이 되면 다른 나라로 튀어버린 것. 그러니 한번 갔던 나라는 다시 못 돌아가고 그러다보니 온 유럽을 떠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신분제 사회에서 지식인 계층 출신이긴 하지만 신사나 귀족 계층이라고 보기는 조금 모자란, 일종의 하층 시민계급 출신이었던 카사노바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다른 나라로 가야 귀족이나 신사계급을 사칭하기 편했던 것도 있다. 애초에 카사노바의 유일한 투옥 경험이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것 자체가 카사노바의 고향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던 탓에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키고도 선뜻 얼른 도망가겠다는 결정을 하지 못했고, 주변과 인간관계마저도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탈옥하여 국외로 탈출한 뒤에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물론 카사노바가 탁월한 재능을 갖춘 영리한 인물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자신의 재능을 좋은 쪽으로는 하나도 쓰지 않고 강간, 사기, 노예 매매 등 범죄 행위에 악용했다. 실제로 어지간한 사람이 카사노바처럼 살면 굶어죽는다. 카사노바의 자서전이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한 바람둥이 제비족의 엽색 행각을 넘어 저자의 통찰력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4. 여담
- 버버리로 유명한 체크 무늬 패턴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옷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시대를 선도한 패셔니스타이기도 했다.
- 일설에는 자신의 친딸과 관계를 맺고 아들인 동시에 손자를 낳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친딸의 어머니와 몇 년 전에 관계를 해서 낳은 아이로, 친딸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 어머니가 귀띔해줘서 관계만은 막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90년대 후반에 발간된 책 속의 책에서는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사귀던 여자와 자신 사이의 딸이라 포기하고 다시 그 어머니와 교제하게 되었다가 후일 딸내미가 결혼 후 사위가 불임이라 자식이 없어 자식 만드는 걸 '직접' 도와주었다는 식으로 소개되어있다.
- 임신시키지 않았다는 속설 덕에 카사노바식 피임법에 대해서도 알려졌다. 일단 콘돔을 사용하되 그 당시의 콘돔은 완벽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개발한 특별한 비법을 함께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 비법이란 주네브의 금 세공사에게 큰 돈을 주고 특별제작한 지름 18mm 무게 60g의 금구슬을 여자의 몸에 삽입해 정액을 몸 안에 들여보내지 않고 밀어내는, 지금으로 치면 자궁 내 장치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었다고. 또 레몬을 반으로 갈라 과즙을 짜낸 뒤 반구형의 껍질을 질 안에 넣음으로서 정자를 죽이게 했다고. 일종의 살정제의 역할을 도모했던 셈이다.
- 여자들과 놀러 가기 전에는 스태미너식인 굴을 한 접시 가득 까먹고 갔다고 한다.
- 동시대 음악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페라 < 돈 조반니>를 작곡하고 있었을 때 60대 중반의 노년 카사노바가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카사노바는 그에게 자신의 혁혁한 여성편력사를 자랑하며 돈 조반니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는데 안 그래도 부도덕하고 문란한 주인공을 묘사하는 게 영 난감했던 모차르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돈 조반니가 훨씬 낫겠다며 원래 이야기 그대로 진행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차르트도 한때 스카톨로지 성향이 있다거나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35], 그런 뜬소문들과는 별개로 낭비벽이 심하고 놀기 좋아하여 허랑방탕한 한량 기질이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강간 같은 막장 짓거리를 벌인 범죄자는 아니었으니 카사노바와 비교되는 모욕을 당할 이유는 없다.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 1976년 개봉한 영화 <카사노바>에서는 배우 도널드 서덜랜드가 연기했다.
- 1993년 개봉한 영화 <카사노바>에서는 배우 알랭 들롱이 연기했다.
- 2006년 개봉한 영화 <카사노바>에서는 배우 히스 레저가 연기했다. 카사노바는 여자에게 대학 공부 같은 건 허락되지 않던 시대에 남자 필명으로 저서를 낼 만큼 똑똑하고 진보적인 여자 주인공과 진정한 사랑에 빠져 바람기를 고쳤지만 그 전의 엽색 행각으로 재판받아 사형에 처해질 위기[36]에서 벗어나 여자 주인공과 도피해 사랑을 이루고 여자 주인공의 남동생이 매형의 이름을 빌려 바람둥이의 악명을 이어간다는 줄거리.
5.2. 드라마
- 2005년 영국에서도 미니시리즈로 카사노바를 다루었다. 젊은 카사노바는 10대 닥터 역으로 국내 인지도가 높아진 데이비드 테넌트, 노년의 카사노바 역에는 배우 피터 오툴[37]이 연기했다. 같은 인물인데 테넌트는 눈이 갈색, 오툴은 푸른색이라서 맞추기 위해 테넌트가 푸른 렌즈를 써야 했다. 제대로 고증을 한 클래식한 시대극이 아니라 색감, 의상, 헤어 등이 현대적이고 B급 느낌이 나면서도 영상미가 빼어나며 코믹적인 요소를 함께 버무려 카사노바를 재해석했다는데 좋은 평을 얻었으며 시청률 또한 매우 좋았다. 역시나 카사노바는 온갖 여자들과 놀아나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 하는 남자다. 카사노바의 이미지가 필터링을 거쳐 매력적인 바람둥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순정을 갖춘 로맨틱한 남자로 그려지는게 눈에 띄는데 진짜 카사노바를 제대로 다루자면 아무래도 철면피한 범죄자를 그린 피카레스크 장르가 되어버릴 테니 능란한 유혹자 정도로만 알고 있는 대다수의 관객 및 시청자에게 어필이 힘들어서 그런 듯하다.
5.3. 기타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 슈트 MK-18의 이름도 카사노바다.
6. 어록
그들이 나를 감옥에 가둘 때 나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 감옥을 떠나노라.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으므로 늘 사랑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1]
훗날 70살 먹은 성직자인 말리피에로가 17살의 어린
가수를 희롱하는 걸 지켜보면서 카사노바가 혼란을 겪었다는 말도 있다.
[2]
이때 몽 레알
백작부인의 관리인
딸인 루시아를
사랑했지만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욕정을 절제하고 그녀를 떠나보냈는데, 이후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범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카사노바는 성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도 있는 규범을 지켜야 하는 성직자는 자유분방한 그와 맞지 않는 옷이었고,
설교가 있는 날에도
술에 취해 단상에 올라 비틀거리는 등 일탈을 저질렀다.
[4]
1747년
4월 어느 귀족의
결혼식에 가던 중, 함께
곤돌라를 탄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이 갑자기 쓰러지자
응급처치로 살려냈다. 이 답례로
주치의로 일하게 되었다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카사노바가 자신은 점을 쳐서
미래를 볼 수 있으며 이런 날이 올 것도 미리 알았다고 주장하자 이를 믿고 양자로 입적,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아들로서
하인과 곤돌라, 매달 10제키니의
용돈을 받게 되었다
[5]
문서 첫머리에 소개된 이름 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가 바로 이 가명을 포함한 이름이다. '생갈의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Seingalt가 생갈로 읽히는 이유는 이 당시
유럽의 교양인들 사이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던 프랑스어로 읽었기 때문. 그런데 de Seingalt는 귀족의
성이고, 생갈에 영지를 가진 혹은 그러한
선조가 있는 귀족이 아닌 그냥 베네치아
시민 계급 출신이던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기 이름에 멋대로 귀족의 성을 붙인 것은 단순한 가명이라기보다는 신분
사칭에 가깝다.
[6]
이름에서 알 수 있듯,
30년 전쟁 당시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가문이다.
[7]
체코어로 두흐초프
[8]
다만 이 시대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9]
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암살 이전만 하더라도 딱히
미국 대통령을 유별나게 대중과 차단시키면서까지
경호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희박했고, 이로 인해
19세기
미국사에는 현대적 기준에선 '조금 연줄 있는 수준의
일반인'들이 백악관을 막 들락날락했던 경우가 많다.
[10]
당시 유럽 예법상 신분이 더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결례였다.
[11]
상수시 궁전은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이
설계에 개입해 짓게 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자기 자랑이었다.
[12]
참고로 수능 시리즈에 나오기도 하는 상수시 궁전은 지극히 객관적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검소한 궁전이다.
로코코 풍으로 산뜻하게 채색한 게 예쁘긴 한데 단층건물에 큼직한
계단도 없고 종탑 같은 것도 없다. 지나친 화려함보다 검소함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상수시 궁전을 더 높게 평가할 수도 있으나 단순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13]
카사노바는 프랑스 국영 복권 사업에 참여해서 돈을 좀 만진 적이 있다. 프로이센에서도 한 밑천 잡아보고 싶었던 걸로 추정이 된다.
[14]
사실 이 대화에서 등장한
베르사유 궁전도 원래 물이 없는 곳에 지어서 수자원 사용이 골치였다.
프랑스인들은 이 문제를 센 강에 14개의 거대 수차를 설치→강가의 600m 정도 떨어진 언덕 위로 퍼올린 후→베르사유까지 8km 거리를
수도교를 통해 흘려보내는 식으로 해결했다. 즉 베르사유의 분수대는 당시로서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어마어마한 기술력+재력 자랑이었던 것이다.
[15]
엄밀히 말하면 '그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이런 형태의 분수가 오래전부터 유럽 왕궁들에 있었기 때문.
[16]
하지만 이는 큰 실수였는데 이 당시 프로이센은
병영국가에 가까웠고 카사노바가 가르칠
학생들 역시 국내 유수의 귀족 자제들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때 카사노바가
교관 일을 성실하게 하기만 했으면 이를 기반으로 출세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며 특히 성실하게
선생 노릇을 해서
제자들의
존경만 받을 수 있었다면 학부모들의 존경도 함께 얻을 수 있었을 테고, 유수의 귀족인 학부모들과 고급 장교로 출세할 제자들의 지지는 카사노바의 출세에 크나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카사노바의 재능이라면 재능인 풍부한 교양 및
임기응변과 더불어 수학과
통계에 대한 재능을 이용한다면 비록 실제 기술은 없어도 천천히 관록을 붙여나가서 꽤 괜찮은 관리직이나 행정직을 맡기에는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사노바에게는 당장의 불편함을 꾹 참고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이 될 만한 성실성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복을 걷어차고 말았다.
[17]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대화를 보면
프랑스 문화 애호가로도 유명했던 프리드리히가 당대 유럽에서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호화로운 궁전의 대명사였던
베르사유 궁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외지에서 온(프랑스에도 다녀온) 카사노바에게 "내가 짓게 한 이
상수시 궁전이 어떠냐? 이정도면 베르사유에도 밀리지 않을걸!" 이라고 자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자랑을 들은 카사노바는 일단 "정말 멋진 궁전입니다" 라고 한번 추켜세워준 뒤 "하지만 분수가 없는 것이 옥의 티군요! 아쉽습니다" 라고 왕이 아쉬워할만한 부분을 찔러들어갔고, 프리드리히는 이 미끼를 제대로 물고 "나도 분수는 꼭 짓고 싶었는데! 하지만 물을 끌어들이기 힘들어서 포기했지" 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살짝 거만하게 "그건 일을 제대로 못해서 실패한 거죠. 제대로만 했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라고 자신을 과시함으로써 프리드리히에게 "자네 수력학을 잘 아는 모양이군?" 이라는 말까지 들었으면, 사실상 공략 성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러저러해서 요래조래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라고 적절히 설명을 하거나 확실한 전문가를 소개시켜 주기만 하면 관직과 업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갖추어졌지만, 정작 그 문제의 '수력학'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연결해줄 사람도 없으니 프리드리히를 다 함락시켜 놓고도
깃발을 꽂지 못하고 어물어물 말을 돌려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매력과 언변은 대왕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그 프리드리히마저도 자기 페이스에 끌어들여 요리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실력이나 제대로 된 인맥이 없으니 아무리 상대를 녹여놔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프리드리히에게 얻은 호감을 이용하여 자신이 잘 아는 일(복권이나 도박과 같은 사행산업)을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작 그에게 필요한 일은 못해준다면서 그 대신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일을 해 보자고 홍보하는 이런
사기꾼 같은 자의 설득에 넘어갈 리는 없었다.
[18]
당연히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떨어져 죽거나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19]
유럽에서도 국사범이나 흉악범이 아닌 잡법들의 탈옥은 은근히 냅두는 분위기였다. 베네치아 입장에서도 카사노바가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국민이라서
출소 후에도 베네치아에 계속 거주하면서 노동력과 세금을 제공하며 인구를 늘려줄 것도 아닌데 집에 넣어서 밥 먹여주는 것은 손해인 것이다.
[20]
카사노바에게 도덕이란 철저하게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즉 나쁜 짓은 옳지 못하니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걸리면 벌을 받으니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들켜서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감옥 간수의 의무와 탈옥의 권리를 같은 선상에 두고 "네가 네 일 하듯이 나는 내 일 하는 것 뿐이다" 라고 뻔뻔하게 비교하는 이 편지가 그런 카사노바의
윤리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21]
이는 카사노바가 관계한 여자들이 주로 낮은 신분의 여자들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22]
사실 이것으로 카사노바의 사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카사노바가 원한 것은 뒤탈날 가능성이 높은 어음이나 조잡한 수법으로 상대를 완전히 속이는 것을 원한 게 아니라 그냥 이런 식으로 뜯어낼 얼마간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이 건 말고도 여러 번 이러한 조잡한 사기술을 정말 잘 써먹었다. 여행하다 돈이 떨어지면 약재상에서 수은을 좀 사다가 안티모니를 녹여서 양을 불려 되팔아 돈을 버는 식이었다.
[23]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대담에서 볼 수 있듯 당시 복권 사업은 일종의 사기라고 받아들여졌다.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도 싫어하는 카톨릭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사회에서 복권 같은 사행성 넘치는 사업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리가 없다.
[24]
다음 날 여관 시트 값을 물어줬다(...)는 내용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 할 수 있다.
[25]
차라리 여느 사람이 해당 도시의 관청이나 교회에 고발했다면 "멀쩡히 무대에 잘 오르고 있던 사람이 가짜 카스트라토라니 그게 무슨 황당한 헛소리냐" 라고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높던 시대였다. 하지만 교회법 전문가에 교회 내에도 인맥이 있는 카사노바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발이라도 손쉽게 진짜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것. 게다가 법 절차에 능숙한 카사노바라면 재판 진행에 개입하여 지연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지연전술은 진실을 가리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카사노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카스트라토 소년을 멕이는 것이었으니 재판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수록 카사노바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판이 끝나고 피해자측이 자신들을 무고한 카사노바를 역고소하려 해도 상대가 법 전문가(현대로 치면 거의 변호사급)이면 이는 더욱 힘들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소년의 가족들이 굶어죽기 충분할 만큼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불평등한 시대에 지식 권력을 가진 자가 그것을 얼마나 잔인하게 악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
[26]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유랑
카스트라토들이 성별 검사를 얼마나 굴욕적이고 괴롭게 여겼는지를 현대인들에게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바로 카사노바의 자서전이다. 카사노바에게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할 수 밖에 없던 카스트라토 소년이 가장 절실하게 애원하는 내용은 '가족들이 먹고 살 길이 없다' 보다도 '성별 검사를 받는 것은 너무 수치스럽고 괴롭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사노바는 이 애원을 들어주기는 커녕 "어차피 성별 검사는 전에도 받았으니 또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 고 이죽거릴 뿐이고, 이에 소년은 "의례적인 성별 검사에서는 검사관이 나이 지긋한 노(老)사제 한 사람뿐이고, 그나마도 예의를 지켜 흘깃 보고 확인할 뿐이다" 라고 계속 애원한다. 즉, 의례적인 성별 검사는 한 사람이 간단히 확인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수치스러움이 덜하지만(사실 여자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검사일 뿐이므로 꼼꼼히 확인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식 재판에서 검사를 받게 되면 재판관과 증인 등 여러 명이 보는 앞에서 검사를 받아야 하기에 더욱 굴욕적으로 여겨졌다는 것. 카사노바가 가학성 성도착증이 의심될 정도로 자신에게 협박당하는 피해자의 반응을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해둔 덕분에 현대인들이 디테일한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27]
팔려간 당사자는 그 돈을 한 번 만져보기만 했을 뿐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일단 돈을 명목상 소녀 본인에게 주긴 하지만, 팔려가는 당사자인 소녀는 그 돈을 딱 한번 만져보기만 하고 받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몽땅 어머니에게 넘겨줬는데 그 뒤로 소녀가 목돈을 만져보는 일은 결코 없다.
[28]
그리고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카사노바는 러시아에서 떠나면서도 이 소녀 노예를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법에서 농노는 영주와 짜르의 소유이므로 해외로 데려가려면 짜르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귀찮았는지 그냥 버리고 가버렸다. 버리고 간 것도 무책임한 일이지만 정말 데려갔다고 치더라도 툭하면 제 한몸도 간수하기 힘든 도망자의 처지가 되는 나그네 주제에 러시아말밖에는 할 줄 모르는 소녀를 외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었는지 한도 끝도 없는 무책임함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29]
18-19세기의
러시아는 꽤나 폭력이 성행하는 사회였기에 호되게 때렸다는 걸 현대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시대에는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가격해 피를 흘리며 쓰러지게 하는 정도가 '그냥' 때린 거고, 말채찍이나 울퉁불퉁한 나뭇가지를 때리는 사람이 지칠 때까지 휘둘러 울지도 못 하고 숨넘어가도록 만드는 정도가 '호되게' 때리는 거다.
[30]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폴란드 출신 명문귀족 청년과 어쩌다 결투를 하게 된 후, (결투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계급끼리 하는거니까) 이를 이용하여 자신 역시 귀족이라고 행세하고 돌아다녔다.
[31]
20세기 이전의 여성 복식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심하게 조여서 건강에 아주 안 좋았고, 그래서 조금만 무리하거나 힘들면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smelling salts라 불리는 (방향소금 등으로 번역) 암모니아 결정처럼 냄새가 강한 약을 상비하고 있다가 기절하면 그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리는 데 쓰곤 했다. 카사노바 역시 이런 걸 갖고 있다 써먹은 것이다.
[32]
임신 상태에서 허리를 꽉 졸라매기까지 했으니 기절할 만하다.
[33]
굳이 카사노바의 도덕적 관점에서 일종의 일관성을 찾아보자면, 카사노바에게 있어서 도덕이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처벌을 피하는지에 대한 기술적 문제였을 가능성은 있다. 즉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되니까 안 하는게 아니라 처벌이 무서워서 안 하는 것이고, 처벌을 피해 도망칠 자신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을 수는 있다는 것. 말하자면 자기는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녔어도 잡혀서 처벌은 안 받았고 주변 사람들도 자신이 과거에 한 나쁜짓을 모르니 자기는 명예로운 사람이고, 걸려서 처벌을 받으면 그때는 죄인이 된다는 관점으로 도덕 문제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34]
물론 카사노바가 한창 살던 시기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같은 여러 독일계 나라들에서 의무교육이 정착된 상태였지만, 초등교육 위주였고, 중등교육까지 의무화되지는 않았다.
[35]
그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똥이나 오줌을 비롯한 외설적인 이야기가 가득해서 한때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였거나
성도착자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모차르트 시대에는 이런 식의 애정표현이 유행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현재는 이런 주장들이 쏙 들어간 상황이다.
[36]
제레미 아이언스가 카사노바를 못 잡아먹어 안달난 종교재판관으로 분해 위엄을 차리려 해도 끝내 망가지고 만다.
[37]
<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스승인 레지널드 존스턴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배우다.
[38]
일설에는 카사노바가 남자와도 같이 잤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성관계 자체를 즐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참으로 알맞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