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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20:43:20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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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曹魏 촉한 蜀漢 손오 孫吳
초대 초대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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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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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역대 위왕
조조 조비 조위 건국
<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조위 초대 황제
조비 | 曹丕
파일:Cao_Pi_Tang.jpg
출생 187년 겨울
후한 예주 패국 초현
(現 안후이성 보저우시)
즉위 220년 11월 25일
후한 예주 영천군 허창
(現 허난성 쉬창시)
사망 226년 6월 29일 (향년 39세)
조위 사례 하남윤 낙양 황궁 가복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수양릉(首陽陵)
재임기간 후한의 승상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재위기간 후한의 위왕세자
217년 ~ 220년 3월 15일
후한의 위왕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조위 초대 황제
220년 11월 25일 ~ 226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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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비(丕)
부모 부황 태조 무황제
모후 무선황후
형제자매 25남 6녀 중 3남
배우자 문소황후, 문덕황후
자녀 10남 1녀
자환(子桓)[1]
작호 위왕세자(魏王世子)
→ 위왕(魏王) → 황제(皇帝)
묘호 고조(高祖)[2], 세조(世祖)[3]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황초(黃初, 220년 ~ 226년)
}}}}}}}}} ||
1. 개요2. 가족 관계3. 생애4. 평가
4.1. 인간성4.2. 외정4.3. 내정4.4. 환관과 외척의 배척
5. 삼국지연의6. 기타7. 미디어 믹스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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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두 번째 위왕(魏王)이자,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자는 자환(子桓), 시호는 문제(文帝), 묘호는 고조 혹은 세조.

무왕의 사실상 장남으로서[4] 선대에 마련된 강대한 세력을 물려받고 선양을 통해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천하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국내 정치를 개선하고 남방 원정을 수행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2. 가족 관계

조조의 3남이자 무선황후 변씨의 소생.[5] 본디 위로 조앙(曹昻)과 조삭이란 이복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젊은 때 죽은 이후 조비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흔히 조비가 장남이나 차남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문서에서 그를 삼남이라고 하는 이유는 조앙, 조삭과 조비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조앙은 이미 197년에 조조를 따라 종군할 정도로 장성한 상태였고 조비는 187년 생이니 조비가 둘째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가 다소 크다. 더군다나 조앙과 조삭은 유부인의 소생인데 생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조조의 정실인 정부인에게 입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조비가 차남이고 조삭이 187년 이후 출생이라고 하면 조앙과 조삭의 나이 차가 크게 되어 유부인이 조삭을 낳은 후 요절했다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된다. 유부인이 일찍 죽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보아 조앙이 장남, 조삭이 차남, 조비가 삼남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6]

아내로는 문소황후 견씨 문덕황후 곽씨가 있다. 그리고 습유기와 고금주에는 조비의 첩으로 설영운, 막경수, 단교소(段巧笑), 진상의(陳尙衣)가 기록되어있다. 재미있게도 문소황후는 조비보다 5살, 곽여왕은 3살 연상인데 아내들이 모두 연상인 걸 보면 조비의 취향이 연상이거나 우연의 일치로 둘 다 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조비는 헌제의 장녀와 차녀를 귀인으로 삼았다. 그 두 딸의 모친이 조조의 딸들이자 자신의 여동생들[7]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비의 몰년을 감안하면,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딸들이 조씨 자매들 중 누군가의 소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조가 헌제에게 세 딸[8]을 바친 것은 213년이고, 셋 다 나이가 어려 위국에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다가 214년에 귀인으로 승격되었다. 만일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입궁하자마자 회임해서 딸을 낳았다고 가정해도, 조비가 사망하는 226년에도 그 아이의 나이는 불과 12~13세. 따라서,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딸들은 조조의 딸들이 입궁하기 이전에 태어난, 다른 여성의 소생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9]

조비의 자녀로는 견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예 동향공주, 구소의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림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조졸하였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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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부친인 무제는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적어도 후한 말의 난세에 정국을 수습한 능력만큼은 인정받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부친의 기반을 물려받은 조비는 능력은 있었으나 뛰어난 명장인 부친보다는 군사적 능력이 떨어졌다거나 도량이 작아 성격이 나빴다는 결함이 결점으로 지목된다. 또한 역성혁명으로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로서는 너무나도 일찍 요절했다는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쉬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비는 무난하게 위나라를 다스렸고, 후한을 망하게 했던 황실의 사치[10]나 환관이나 종친[11], 외척 정치를 차단하고, 조조시대로부터 내려오던 여러 무거운 세금이나 요역을 감면해주고 형벌을 완화하여 나라의 내실을 기했다. 비록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지 6년만에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그의 치세 시절엔 조위의 국가 시스템은 아주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팬덤이 제기하듯이 조비를 나라를 망친 암군이나 폭군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이러한 분류는 조비보다는 아들 조예에 훨씬 더 잘 어울리며, 조비가 좀 더 오래살아 창업군주이자 초대 황제로써 원래 역사에서 보여준 본인 치세기간 동안의 무난한 통치를 오래 지속했다면 조위의 수명이 좀 더 늘어났을 가능성도 배제가 어렵다.

아버지를 본받아서 문재도 뛰어났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글은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동복 동생인 조식과 함께 뛰어난 문인의 글로 칭송받았으며 이후 시대에도 여러가지로 높이 평가받았다.

4.1.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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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외정

대외 정책에서도 결정적인 삽질을 저질렀는데, 이릉대전을 앞두고 촉과 오가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삼국 정립 이래 통일에는 다시 없을 최고의 호재를 맞았음에도 그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이미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처럼 행세하며 위신 세우기에만 급급했다는 비판이 있다.

손권이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며 칭신 의사를 밝히자 '대범하게' 개입을 포기한 것이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이릉대전이 끝나고 손권이 더 이상 조비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자 분노해 원정에 나섰으나, 손권이 반성하겠다며 밀당을 걸어오자 정작 원정에 나선 것을 대신들 탓으로 돌리며 손권을 달래는 등 시간만 잔뜩 허비하고말아 손권에게 농락당했고, 조비가 추진한 연이은 남정이 모조리 실패해 천하 통일의 기회는 상실되었으며, 국력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편향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실상, 조비는 이릉대전 당시의 정세를 외교적으로 접근했지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야 손권이 조비를 통수치고 스스로 오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 손권은 조조 시절에도 싸웠다가 숙이며 칭신했다가를 반복하며 상당히 기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비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고, 아예 황제 조비에게 투항해 신하가 되겠다는 손권의 제안이 조비 입장에서는 나름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면 조조 시절에는 손권이 칭신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한나라 천자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지 조조의 신하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비 입장에선 손권을 진짜 신하로 삼아 제어할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판단이 틀렸다는 이유로 그 판단 자체를 어리석고 멍청한 판단이라고 조롱하는 것은 지나치게 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조비의 남정에 대해서는 유난히 더 악평을 듣지만, 실상 사서를 통해 남정 과정을 잘 살펴보면 이 전쟁은 매우 전형적인 위의 동오 침공, 나아가 이후 중국에서 북조가 남조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루트를 충실히 따른 전쟁 중 하나였다. 당시 대오전선 방면을 담당하던 조인, 조휴를 필두로 장료, 장패 등 위나라 주요 장수들이 참전해 전형적인 침공 루트로 진격했다가 전형적인 이유로 패배하고 전형적으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려 퇴각하길 반복한 전쟁이었으며, 이 조비의 남정을 통해 위나라가 엄청난 피해를 봤다거나 피폐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남정으로 위가 피폐해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증거를 제출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야 하는데, 역으로 피폐해졌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람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적반하장을 부리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4.3. 내정

찬반이 엇갈린다.

조비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조비가 정치, 인사, 행정 제도의 확립과 민심 안정에 힘을 기울여 성과도 보였다고 평가한다. 조비는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 한나라의 법을 참고해 위의 법을 만들되 육형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을 거부하거나 한나라의 법 중 지나치게 가혹한 법은 철폐하라고 명하는 등, 위의 법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엄격했다는 통념과 달리 나름 정도를 조절하고자 했다.[12] 또 아버지 대에부터 이어받은 유능한 관료들을 등용해 종요-화흠-왕랑으로 이어지는, 조예 초까지 지속되는 유능한 삼공라인을 구축해 내정을 안정시켰으며, 진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구품중정제를 실행해 한나라식 천거 방식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직속 관청으로서 환관이 독점하며 지나치게 막강한 권한을 누렸던 상서성을 아버지 조조의 노선을 계승해[13] 중서성을 쪼개 권력분할을 시도하는 한편 일반 사인들에게도 개방하여 환관, 외척정치 등 한나라의 고질병이었던 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고, 이들(환관, 외척)의 정치 참여를 아예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이 원칙은 위가 망할 때까지 잘 작동한 편이었다. 조비가 시행한 중서성 분할은 후대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당 시대에 문하성이 신설되고 휘하 6부 관청이 정비되면서 3성 6부제로 완성된다. 또 군사적으로는 조조가 하후돈을 남방26주제군사로 임명한 걸 계승해 아예 도독제를 시행, 정비하였다. 이 도독제는 촉과 오에서도 비슷하게 시행되었는데, 도독직을 비워두기도 했던 촉과 오와는 달리 위나라는 전선이 위치한 각 주별로 도독을 상시 배치했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비판하는 쪽에선 남방 원정의 실패나 구품중정제의 도입으로 인한 폐단 등 대내외적으로 여러 삽질을 했지만, 조조가 유산으로 남긴 권력 기반과 재정 흑자가 워낙 건실했던 데다 이릉대전이라는 뜻하지 않은 호재까지 누렸기 때문에 이런 삽질들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뿐이며 조위 말기의 폐단들은 조비가 방향성 측면에서 포석을 단단히 잘못 깔아뒀던 원인이 크다는 것. 조비 사후 수십 년 뒤 벌어지는 고평릉 사변도 따지고본다면 조비가 구품관인법 등으로 도화선을 마련해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일은 고평릉 사변은 아들 조예의 실책도 크지만 조예기 말년 급격하게 정신줄을 놓는 모습을 보이며 요절하게 된 건 조비에게도 원인이 있어서 조비에게 좀 더 비중이 큰 쌍방책임이라고 볼 여지가 존재한다.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조비가 종친을 배제해 멸망의 단초를 깔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사서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이다. 조식과 같이 자기 형제 등 직계 종친을 배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진, 조휴, 하후상, 하후무, 하후패 등 2세대 인사들의 주요 커리어는 모두 조비 대에 시작했다. 조비는 즉위 직후 도독제를 시행하며 조인을 하후돈의 뒤를 이어 26주제군사로 임명한 뒤 형주와 양주에 각각 조휴와 하후상을 배치했으며, 후방인 청주와 서주엔 장패를 도독으로 임명해 대오전선을 구축했다. 한편 대촉전선에는 조진을 옹양주도독으로, 하후무를 관중도독으로 배치했으며 북쪽에는 자기 측근인 오질을 도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하후돈이나 조인 등 군 원로에게는 군 고위직을 수여하는 등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조비는 종친과 측근을 주요 군부직에 배치하면서도 한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위에서도 보듯 한 전선이라고 2명씩 나눠서 배치하였다.

4.4. 환관과 외척의 배척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시랑(侍郞)을 각각 네 명씩 두고, 환관 중에서 벼슬을 하는 자는 각 부서의 령(令) 이상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런 명령을 황금으로 된 간책에 기록하게 하여 돌로 된 방에 보존케 하였다
정사 삼국지 문제기

조비는 한나라가 외척, 환관의 발흥으로 멸망한 것을 반면교사로 외척과 환관을 억눌렀다. 이는 제도상으로 후한의 폐단을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게 지나친 나머지 자기 동생을 포함해 정권을 지켜줘야 할 혈족 및 종친들까지도 중앙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한편 제후왕으로 임명해 지방으로 보내버린 뒤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고 집중적으로 견제하는 거의 편집증적인 종친 견제를 했고, 결국 문벌귀족 사마씨가 정권을 잡아 조위의 명을 단축하게 되는 원인이 되지만 말이다. 더불어 사마씨가 조씨에게 황위를 찬탈하려 할 때 조비의 법령을 무시하고 유교의 '효'를 앞세워 조위의 '태후'에게 명령을 내리게 해 황제들을 폐위시킨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조상만해도 환관과 결탁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아예 효과를 보았다고 보기 힘들다는 말은 좀 지나치기는 하다. 최소한 전대의 후한이나 촉처럼 환관이 정면에 나서서 전횡을 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외척 배척과 혈족 배척은 조금 다른 케이스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외척 배척의 경우 조조도 했던 것이고 심지어 헌제의 외척을 상대로도 행하였지만 조조는 혈족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고 오히려 중용하여 자기 기반의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조비의 외척 배척 또한 조위의 이러한 흐름하에서 이루어진 건 마찬가지이겠지만, 혈족 배척의 경우 조조와 반대인데, 이는 조비의 정통성이 취약한 편이라 조씨 세력의 지도자를 넘볼 수 있는 자들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조씨 종친은 몰라도 친동생들인 조창이나 조식에 대한 견제까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둘 다 조비 즉위시점까지 강력한 자기 세력을 가지고 후계구도를 위협하고 있던 종친이어서 심지어 나중에 조비가 권좌에 오른 후에까지 조비 본인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창은 아버지 조조가 죽은 후 군권을 가지고 수도로 들어와 조식과 연합을 시도하면서 이미 조조 생전에 정해진 후계구도를 위협하기 위해 옥새를 요구하는 등 대놓고 조비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도전장을 내민적이 있었기에 조비가 조창에게 쪼잔하다는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역으로 조창이 조비에게 엄청난 위협이었으며, 조식만 해도 조비 사후 아들 조예가 황위를 계승한 뒤 장안으로 행차했을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조예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무선황후를 내세워서 조식을 옹립하려는 시도까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역으로 말하면 조비 생전에도 조창이나 조식을 황제로 지지하는 세력이 암중모색하면서 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조비가 도저히 이들에게 세력을 주고 중하게 쓸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창이 조비에게 죽었다는 뒷소문이나 야사 같은 것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조창이 역으로 부친이 정해준 후계구도를 거역하고 형에게 선빵을 치려다가 실패했으며, 그 때문에 조창을 죽일만한 실제 동기가 조비에게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생들이 대놓고 그에게 도전하거나 위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비가 나중에 조식과 화해하기까지 하거나[14] 조식이 조비의 아들 조예 시절까지 황실의 종친으로써 대우받은 점, 전세계 역사상 여러 군주들이 친혈육들을 단호하게 숙청한 사례들만 봐도 조비는 되려 친동생들에게는 관대한 편에 속한다.

5. 삼국지연의

오로 침공이 실패한 데다 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남방 정벌을 감행한다. 촉을 먼저 치자는 중신들의 의견마저 무시하고 그럼 배라도 더 만들자는 사마의의 말에 조선 시설을 풀가동하여 배를 늘리고 바로 삼로로 밀고 내려갔으나 결과는 위에 적힌 대로 와장창.

삼국지연의》는 조비의 찌질함과 원정 실패를 극대화시키는 등 조비를 까는 데 집중한 편이다. 아무래도 조비가 직접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에 등극한 것과 여러 군주로서의 실책들까지 겸해 디스한 모양이다. 가장 대규모였던 조비의 첫 원정은 육손 어복포에서 호되게 당한 뒤 미리 위의 침공을 경계해 바로 물리쳤으며,[15] 2, 3차 원정은 용주를 끌고 장료를 대동하였으나 서성의 가짜 군세에 속아 크게 깨지고 서황의 분투로 도망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료마저 정봉의 활에 맞아 후유증으로 죽어버린 것으로 묘사된다.

6. 기타

의서 외대비요에 조비의 어의가 조비의 탈모가 심해져 치료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대비요에는 그가 처방받은 탈모약의 재료와 정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있다.[16]

문재가 뛰어나 아버지인 조조, 아우인 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라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 운문으론 연가행(燕歌行)을 포함한 가 40수. 건안칠자 등도 조비가 선정한 것이다. 문학을 애호하여 저술을 의무로 삼았으며 그 자신이 저술하여 지은 작품이 100여 편에 달했다고 한다. 진수도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다고 평가했으니 대단한 문장가였다.

저서로 열이전(列異傳) 3권과 문집 23권도 있었다 한다. 그 중 전론(典論)은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論文)이라고 평해지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가 된 책으로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논문 1편만이 전한다.

검명(劍銘)에 따르면 영보(靈寶), 함장(含章), 소질(素質)의 세 명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논(論)을 읊었고, 자라서는 오경(五經), 사부(四部)를 모두 겪었으며, 《 사기》, 《 한서》,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아니 본 것이 없었다.
삼국지 위지 문제기 평왈 배송지주 #

보기처럼 자아도취가 매우 심했다. 조비는 나름대로 공들 들인 글이라고 자신이 쓴 전론을 시와 함께 손권에게 전하고 또 편지 한통을 장소에게 썼다. 근데 이 기록은 위서 문제기 기록인데, 문제는 보낸 기록은 있는데 받은 기록은 오나라 기록에 없다. 그외 손권에게 코끼리나 보물 등을 받기도 했고, '향부자'라는 약재를 손권에게 불로 장수하라고 보낸 적이 있는데 위나라 사신이 약재 이름을 까먹어서 향기가 나고 참새머리를 닮았다고 임기응변으로 작두향이라고 소개했고 향부자의 다른 이름이 작두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씨 집안의 문학인 기질이 조롱받는 이야기가 꽤 많이 들리고 특히 자뻑이 넘쳐나는 조비가 많이 놀림감이 되지만, 그 중에서도 조비는 나름대로 진정으로 문(文) 그 자체를 사랑한 문학 성애자로서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공융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어쨌든 조조의 정적이고, 조조를 조롱하기 위해서라지만 결국 자기도 싸잡아 조롱한 바 있는 인물인데 뒷끝 쩌는 조조 시절 금기어였던 그 이름을 당당히 건안칠자의 첫머리로 세우고 산산히 흩어진 그의 글을 포상금까지 내걸며 모으려 한 것은 참으로 미담이다.

여기서 그 공융에 대한 평가가 재밌는데 일단 문체는 기품있고 현묘한 것이 옛 위대한 문인들인 반고/ 양웅에 비견할 만 하다고 추켜세우면서도 '그러나 논리 전개는 썩 좋지 못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지나치다'라고 지적하고 넘어간다. 공융이란 사람을 전반적으로 조명했을 때 평가 자체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바로 그의 조롱 대상이 되었던 인물로서 혹시 뭔가 꿍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까고 그 뒷끝을 감당할 일 없었던 귀공자 조비로서는, 힘 없는 자의 무기로서의 조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이런 조비의 성격에 대해선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한편으로는 조롱이 지나치다라고 까긴 했으나 냉소적인 태도의 공융을 좋아했던 것도 그렇고 후한의 모두까기 인형이었던 왕충의 논형을 좋아했던 것도 그렇고, 심지어 엄숙하게 선양을 받는 자리에서 "옛날 삼황오제 선양이라는 것도 실은 지금(찬탈)과 같았겠구나!"라고 뇌까리거나 자기의 분묘를 정하는 칙령에 적힌 "이 세상에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고 도굴되지 않은 분묘라는 것도 없었는데 후하게 부장품을 묻는 장례는 대체 왜 치루는거냐? 나한테는 그러지 마라" 같은식의 건국군주 답지 않은 언행이나 글들을 보면 어지간히도 시니컬한 면모가 많았던 군주이기도 하다. 이런 면모들이나 각종 일화들을 보면 묘하게 현대인 감성처럼 느껴질만한 성향도 꽤나 있었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글 좋아하는 문성애자, 문제(文帝) 조비이지만 정작 제일 꺼렸던 동생 조식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글쟁이로 남았다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사실 전론을 비롯해 그의 문장은 아버지와 동생에 가려져서 그렇지 삼조의 일원인 만큼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남북조시대 유협이 쓴 문학비평서 문심조룡에서 조비와 조식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존의 설명들이 조비는 폄하하고 조식은 치켜 세운다며 조비의 경우 지위의 존귀함 때문에 그 재능을 깎아내리고 조식의 경우 그가 처한 곤궁한 입장 때문에 명성이 올랐다고 평했다.

기록에 의하면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인 탄기(彈碁)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탄기는 위대 궐내에서 화장품 상자를 사용한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문제(조비)는 특별히 이 놀이를 잘 했는데 수건 모서리로 바둑알을 튕기면 맞추지 못하는 게 없었다. (후략)

태평어람에 기록된 조비의 조서를 보면 조비는 포도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조비는 포도를 찬양하면서 달콤하고 말랑거리고 상큼하며 맛은 최고에 즙이 많으며 걱정을 없애고 지루함을 풀어 주며 술로 빚으면 취하기도 좋고 깨기도 쉽다고 길게 늘어놓았다. 전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했던듯 한데 예문유취와 태평어람에 그런 조비의 어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기록을 보면 쓸데없을 정도로 음식 시식평에 열을 올렸는데 신하들에게 조(詔)하기도 했다.
오왕이 위 문제에게 귤을 바치니, 문제는 신하들에게 조(詔) 하기를
남방에 귤이라는 과일이 있으나, 이가 갈라질 만큼 시고 단 것은 아주 가끔씩 밖에 없다.
위 문제 왈:
남쪽 나라의 용안, 여지(리치)가 어찌 서쪽 나라의 포도, 석청에 비하겠느냐? 시기만 할 뿐 중국(중원)의 대추만도 못하니, 안읍(대추 명산지)의 대추에는 비할 바도 아니다.
위 문제 왈:
진정군(眞定郡)의 배는 주먹 같이 크고 꿀과 같이 달콤하며 눈과 같이 아삭하니, 근심을 잊게 하고 갈증을 없애 준다.
위 문제가 신하들에게 조하기를
신성 태수 맹달이 말하기를 촉의 가축은 맛이 진하지 않아 촉 사람들은 요리에 엿/꿀 등을 더해 맛을 낸다고 한다.

맹달 건도 생각해 보면 황당한 게 어쨌든 적국에서 전향해 온 사람이니 온갖 유용한 정보가 많을 터인데, 정작 황제인 조비의 관심을 사로잡은 건 요리 얘기. 건조하게 써놓고 있지만 결국 '뭣? 촉 땅에선 무려 고기 요리도 단맛을 낸다고? 야 이거 완전 대박 아니냐? 우리도 한번 그렇게 해먹어 볼까?'하고 신하들한테 떠벌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덕분에 그저 매운 요리라는 인상만 뚜렷한 사천 요리[17]인데, '마'를 담당하는 화자오는 원산지가 다름 아닌 촉 지방이니 이 시대에도 향신료로 요긴하게 썼겠지만 '라' 부분을 맡는 고추는 미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이라, 이때는 우리가 아는 사천 요리식 매운맛을 낼 수 없었다.]가, 1800년전 촉에서는 요리에 주로 달콤한 재료를 쓴다는 사실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사실 꿀이나 엿으로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은 서민들이 얻기 쉬운 감미료라 그렇다 쳐도 은 많은 곡물을 사용하여 엿기름을 고아 만드는 것[18]이기에 그만큼 시간과 품삯도 많이 들고 옛날엔 고급 식재료였다. 그런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저 시대의 촉이 부유하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아버지 때부터 활동했던 원로 중신 종요와의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70대를 넘긴 종요가 정실 손씨를 내치고 48살이나 어린 첩 장창포를 새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무선황후가 조비에게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권유해 조비도 종요에게 손씨와 다시 재결합하고 명을 내리나 종요가 자살시도를 하면서까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고금주에 따르면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위에 올랐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위나라 문제 때의 궁인들 중에서 매우 총애받은 자들로, 막경수, 설야래, 전상의(田尚衣), 단교소(段巧笑) 네 명이 있는데, 밤낮으로 문제의 곁에 있었다. 막경수는 선빈(蟬鬢)을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면 매미(날개)와 같았기에 선빈(蟬鬢)이라 하였다. 단교소는 처음으로 비단을 명주 신발에 입히고 자줏빛 분을 만들어 얼굴에 발랐으며, 전상의는 춤과 노래에 능했고, 설야래는 의상을 만드는 걸 잘했으니, 일세의 으뜸(冠絕)이었다.
고금주 『잡주』
위나라 문제는 궁인들로 하여금 백화계(百花髻)와 부용귀운계(芙蓉歸雲髻)를 하게 했다.[19]
중화고금주
(대모자大帽子는) 본래 초야의 늙은이들이 쓰던 것이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입동에 귀천에 따지지 않고 통용해서 쓰게하니, 이것을 온모(溫帽)라 하였다.
중화고금주
잠방이(군褌)는 삼대(三代)에는 서술된 바가 보이지 않는다. 주나라 문왕이 만든 잠방이는 길이가 무릎까지였는데, 이를 폐의(弊衣)라고 했도 미천한 사람은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양의(良衣)라고도 했으며 대개는 양인(良人)의 옷이었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궁인들에게 비교당(緋交襠)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잠방이다.
중화고금주

훗날 위나라의 실권을 찬탈하고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보다도 8살 이상 적다. 사마의가 오랫동안 산 편이긴 하지만[20] 죽은 나이로 따져도 조비의 사망 당시 나이는 사마의 사망 당시 나이의 절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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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

[1] 조비 외에도 조창, 조식 및 조비의 사촌들 대부분도 자는 '자'자 돌림으로 쓴다. [2] 정사 삼국지 [3] 자치통감 [4] 실제로는 3남이었으나 형들이 일찍 죽음에 따라 사실상 조조의 장남이었다. [5]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이 모두 변씨 소생이다. [6] 신삼국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이런 정설을 무시하고 조비를 '이공자'라고 칭한다. 즉, 조비를 차남으로 본 것이다. [7] 조절, 조헌, 조화 [8] 장녀 조헌, 차녀 조절, 삼녀 조화 [9]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이 설을 따라 조비가 헌제의 딸들을 보고 "내 누이가 산양공의 부인이니 이 아이들은 내게는 조카가 아닌가?"라며 마뜩찮아 하자 조진이 "어차피 공주의 소생도 아니잖습니까?"라고 대답한다. [10] 예를 들어 한나라 시대 유행했던 주검에 입히는 옥의는 조비가 공식적으로 금지령을 내려서 이후 사라졌다. [11] 이후 황실을 위협하는 종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조홍이나 조식에 대한 탄압도 이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2] 사실, 한나라의 법도 법가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만만치 않게 엄격했다. 근데 이걸 무시하고 위나라의 법이 엄격해 백성들이 힘들었다고 하는 건 체리피킹이다. [13] 조조는 순욱이 사망한 직후 비서령이라는 관직을 신설해 상서령의 권한을 쪼갰고, 조비는 비서령도 두개로 쪼개 중서성을 독립 관청으로 신설했다. [14] 조식의 문집 조자건집에 나오는 내용으로 조비가 죽기 몇개월전에 조비가 조식이 있던 곳으로 행차해서 그를 만나 형제의 정을 나누고 화해했다고 조식이 기록했다. [15] 육손은 조비의 간사함은 조조 못지 않다고 촉군 추격을 포기하고 위에 대비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16] 40살에 죽은 이유가 이 합성 화학 약품의 독성 때문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17] 사천 요리 매운맛의 양대 축이 [[마라#s-5]|마와 라] [18] 조청 1kg을 얻으려면 쌀 2kg에 엿기름 500g을 때려부어 6시간 동안 삭히고, 그걸 또 한나절 꼬박 졸여야한다. 보다시피 쌀과 장작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에 수수조청 2kg 정도이면 가격이 10만 원은 가볍게 넘어간다. 고대에는 꿀이 오히려 흔했던 건 자연환경이 지금보다 오염이 덜해서 그만큼 벌들의 서식지도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19] 선빈이니, 백화계니 하는건 머리 모양이다. [20] 오래 산 편이긴 하지만 90대 중반에 사망한 동생 사마부같은 사람도 있고 위나라 중신중에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활약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특출나게 오래 산 케이스는 아니다. 하지만 서기 2~3세기 무렵에 70대까지 살았으면 굉장히 오래 산 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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