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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지명/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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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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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예주지도.png
1. 개요2. 여남군(汝南郡)
2.1. 양안도위부(陽安都尉部)2.2. 여음군(汝陰郡)
3. 익양군(弋陽郡)4. 영천군(潁川郡)
4.1. 양성군(襄城郡)
5. 양국(梁國)6. 진군(陳郡)7. 노국(魯國)8. 패국(沛國)9. 초군(譙郡)10. 안풍군(安豐郡)11. 같이보기

1. 개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하수(河水) 중류의 이남과 회수(淮水) 이북 사이의 중원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예주(豫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예주자사부가 되었다. 현재의 안후이성 허난성 일대에 해당한다.

군웅할거 시기 초기에는 원술이 예주 지방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었다.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로 내세우며 형주 남양군과 양주 구강군·여강군에 이르는 판도를 형성했지만, 이는 원술의 후장군이란 직책과 여남군 원씨 가문의 영향력에서 나오는 권위에 기댄 것으로, 진왕(陳王) 유총처럼 독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경우도 있고, 연주를 장악한 조조나 서주를 장악한 도겸이 예주의 일부를 점유한 것으로도 분석되는 등, 예주 지방의 공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하여 한나라 중앙 조정의 공권력을 장악하고 원술의 황제 참칭에 맞물려, 예주는 급속히 원술에게서 이탈하여 조조가 장악하게 된다.

도겸 유비를 예주자사로 멋대로 임명하여 소패(小沛)에 주둔시켰었다. 도겸의 영역이 서주에 한정되었다는 고정관념이 있고, 자사가 태수의 상관이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잘 이해되는 일이 아닌지, 각종 매체에서는 소패를 서주에 소속된 곳으로 보고 유비가 예주자사가 된 사실을 거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시에 자사는 태수의 상관이 아니었으며, 독자적으로 징병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나 감군(監軍) 직위를 겸해 독립적인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관직이었고, 이에 대형 군벌 중에는 측근이나 자신의 예하에 있던 군소 군벌을 자사로 임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공손도가 청주의 일부 현을 장악하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둔 것이 대표적인 예. 유비가 도겸에게 서주목 지위를 물려받은 뒤, 여포가 찾아왔을 때 마찬가지로 여포를 예주자사로 임명해 소패로 보냈었다. 여포에게 서주를 뺏긴 뒤에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하자, 조조는 유비를 정식으로 예주목으로 임명했으나, 예주의 태수들은 사실상 조조가 임명한 것이었기에, 유비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2. 여남군(汝南郡)

전한 때 팽월의 영역이었던 회양군(淮陽郡)을 분할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 때인 82년에 여남군의 8현을 분할해 서평국(西平國)을 설치했었으나, 88년에 서평왕이 전봉(轉封)되면서 환원되었다.
지명 [-196?]여남군→[72]여남국(汝南國)→[79]여남군→[270]여남국
소속 [한]예주자사부→[서진]예주
치소 [한]평예현→[삼국]신식현
양안도위: 낭릉현
여음군: 여음현
분합 [198]양안도위→[200]폐지: 낭릉현·양안현
[213?]익양군: 익양현·기사현
[222]여음군→[253]여남군에 합병→[266]여음국(汝陰國)→[277]여음군: 여음현·신양현(新陽縣)·여양현·동양현·신현·신채현·부파현·포신현·원록현·고시현·항현·송현
전입 [253]여음군 여양현, [서진]양국 남돈현 및 초군 송현→여음군
전출 [220?]산상현→패군, [238]여음군 송현→초군, [277]남돈현→양국, [서진]소릉현→영천군 및 여음군 항현→양국
폐지 [213]의록현, [삼국]세양현·사선국, [서진]은강현·서화현·정강현 및 여음군 신양현·부파현
출신 평예현: 허정· 허소 등 여남 허씨 일가
남돈현: 응창, 정병
세양현: 여범, 장제
여양현: 원소· 원술· 원유 등 원씨 가문
부파현: 여몽
고시현: 호종
현 미상: 진도
봉작 사마준: 여음왕(266~277)
사마모: 여음왕(277~286)
사마간: 여남왕(270~277)
사마량: 여남왕(277~)
손굉: 여남왕(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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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여남군(37현 461,587호 2,596,148구): 평예현, 양안현, 양성국, 은강현, 부파현, 여양현, 동양현, 오방현, 안성국, 남돈현, 낭릉현, 세양현, 의춘국, 여음현, 신채현, 신식현, 구양현, 기사현, 신양현(愼陽縣), 신현, 소릉현, 익양국, 서평현, 상채현, 침현, 서화현, 장평현, 의록현, 항현, 신처현, 귀덕국, 신양현(新陽縣), 안창국, 안양국, 박양국, 성양국, 정릉현
여남군여분군(汝汾郡·汝坟郡), 양성국→신안현(新安縣), 안성국→지성현(至成縣), 세양현→낙경현(樂慶縣), 의춘국→선잔현(宣孱縣), 여음현→여분현(汝墳縣), 신채현→신천현(新遷縣), 신식현→신덕현(新德縣), 구양현→화망현(華望縣), 신현→신치현(愼治縣), 서평현→신정현(新亭縣), 침현→윤치현(閏治縣), 장평현→장정현(長正縣), 의록현→상도정현(賞都亭縣), 신처현→신연현(新延縣), 귀덕국→귀혜현(歸惠縣), 신양현(新陽縣)→신명현(新明縣), 안창국→시성현(始成縣), 안양국→균하현(均夏縣), 박양국→낙가현(樂家縣), 성양국→신리현(新利縣)
후한 여남군(37성 404,448호 2,100,788구): 평예현, 신양국, 서평현, 상채현, 남돈현, 여음현, 여양현, 신식국, 북의춘현, 은강국, 구양현, 기사현, 양안현, 항현, 서화현, 세양현, 안성국, 오방현, 동양국, 신양현, 신현, 신채현, 안양국, 부파국, 의록현, 낭릉국, 익양국, 소릉현, 정강국, 사선국, 송국, 포신국, 원록국, 정영국, 고시국, 산상국, 성보현
서진 여남군(15현 21,500호): 신식현, 남안양현, 안성현, 신양현, 북의춘현, 낭릉현, 양안현, 상채현, 평예현, 정영현, 구양현, 남돈현, 여양현, 오방현, 서평현
여음군(8현 8,500호): 여음현, 신현, 원록현, 고시현, 동양현, 신채현, 송현, 포신현 }}}}}}}}}

2.1. 양안도위부(陽安都尉部)

『삼국지』 이통전에 "여남 2현을 나눠, 이통을 양안도위로 삼았다.'라는 부분이 있고, 조엄전에는 순욱이 보낸 편지에 '양안군(陽安郡)'이 언급되고 있다. 『위략』에는 이통이 양안태수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들에선 양안군이 등장하지 않고, 이통은 엄연히 양안도위로 임명되었다가 여남태수로 승진했음을 감안하면, '양안태수'로 기록한 것은 오전(誤傳)이라 판단된다. 원래 도위는 전한 때 군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직이었으나, 후한 때는 원칙적으로 군에는 도위를 두지 않고 태수가 해당 업무를 전담하게 했는데, 태수가 모든 영역의 치안을 감당하기 어려울 땐 별도로 도위를 두기도 했다. 도위는 원칙적으로 태수의 속관이기 때문에 엄연히 태수를 상관으로 두고 그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으나, 후한 때는 태수의 치민(治民) 권한까지 위임받는 도위도 생겼다.

이통은 낭릉현에서 거병한 반독립적인 군소 군벌이었는데, 198년에 여남의 2현을 나눠 이통을 양안도위로 삼은 것은 여남군에서 양안군을 새로 독립시킨 것이 아니라, 2현에 대한 이통의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하면서 원칙적으론 여남태수의 관할을 받게 하는 '도위부'를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엄전에서도 호구세[戶調] 부과를 결정하는 주체가 '태수'가 아닌 '도위' 이통으로 나온다. 앞의 기록은 당대 사람들도 도위 이통을 태수로 오인한 사례라 여겨지며, 특히 도위부가 설치된 지 불과 2년 뒤인 200년 무렵에 이통이 여남태수로 승진하였기에 이러한 오해가 더 깊어진 듯하다. 치민권을 갖는 도위부는 당대에도 군(郡)과 동격의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었고, 실제 군으로 통칭된 사례도 있는데, 순욱의 편지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이통이 여남태수가 된 시점에 다시 따로 양안도위를 임명해 보냈을리는 없으므로, 도위부 또한 이때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2. 여음군(汝陰郡)

222년에 여남군 여음현·신양현·여양현·동양현·신현·신채현·부파현·포신현·원록현·고시현·항현·송현을 분할해 설치되었으며, 238년에 송현이 초군으로 이속되었다. 253년에 폐지되어 여남군에 환원되었다가, 서진 때인 26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서진 때 부파현이 폐지되었고 항현이 양국으로 이속되었다.

3. 익양군(弋陽郡)

사서에는 위나라 때 설치된 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208년에 강하태수로 임명된 문빙의 임지가 맹현으로 국한되었던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전농관이 관할하고 있던 지역으로 보이며, 전예가 익양태수로 있다가 218년에 조창 무신저를 공격할 때 이에 종군하면서 세운 공으로 남양태수로 전임되었으므로, 213~218년 사이에 익양군으로 승격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 [213?]익양군→[222]익양국(弋陽國)→[222]익양군
소속 [213?]예주→[서진]예주
치소 익양현
분합 [280]양주 기춘군 합병: 기춘현·주현
전입 [213?]여남군 익양국·기사현 및 형주 강하군 서양현·대국, [280]형주 강하군 서릉현
봉작 조표: 익양왕(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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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익양군(7현 16,700호): 서양현, 대현, 기춘현, 주현, 서릉현, 기사현, 익양현 }}}}}}}}}

4. 영천군(潁川郡)

'穎川郡'으로 쓰기도 한다. 196년에 영천군 허현이 수도가 되어 허도(許都)로도 불리게 되었고, 이때 영천군의 치소 또한 이전한 것으로 보이나, 임시수도였기 때문인지 영천태수가 영천윤(潁川尹)으로 승격되지는 않았다. 조조가 기도위 시절 이 군에서 황건적을 토벌했고, 삼국시대에 영천군 출신의 재사들도 많았기에,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일이 많다.
소속 진(秦)→[전한]예주자사부→[9]보충신향→[23]예주자사부→[서진]예주
치소 양책현→[196?]허현
양성군: 양성현
분합 [삼국]양성전농중랑장부→[264]양성군: 양성현·겹현·곤양현·정릉현·무양현·보성현·번창현
전입 [277]진국 장평현, [서진]여남군 소릉현
설치 [220]번창현(영음현 분할)
전출 [삼국]양책현·양성현·윤지현→하남윤
폐지 [서진]영양현
출신 허현: 진군 등 진씨 일가
영음현: 순욱· 순유 등 순씨 일가
장사현: 종요· 종회 등 종씨 일가, 서서, 조지· 조거
정릉현: 두습 등 두씨 일가
양책현: 곽가· 곽혁 등 곽씨 일가[2], 신평· 신비· 신헌영· 신창 등 신씨 일가, 조엄
현 미상: 한복· 한융 등 한씨 일가, 순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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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양책현, 영양현, 양성현(襄城縣), 언릉현, 허현, 양성현(陽城縣), 장사현, 신보성현, 신정현, 위지현, 무양현, 겹현, 성안현, 언현, 영음현, 정릉현, 밀현, 원릉현, 곤양현, 신양성현(新襄城縣·연혁 미상), 대귀현(大騩縣·연혁 미상), 한양현(閑陽縣·연혁 미상), 응현(應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영천군(20현 432,491호 2,210,973구): 양책현[3], 곤양현, 영양현, 정릉현, 장사현, 신급현, 양성현, 언현, 겹현, 무양현, 영음현, 숭고현, 허현, 언릉현[4], 임영현, 보성현, 성안국, 주승휴국, 양성현, 윤지현
영천군→보충신향 좌수군(左隊郡), 양책현→영천현(潁川縣), 정릉현→정성현(定城縣), 언릉현→좌정현(左亭縣), 임영현→감영현(監潁縣), 주승휴국→가미현(嘉美縣), 양성현→상성현(相城縣)
후한 영천군(17성 263,440호 1,436,513구): 양책현, 겹현, 양성현, 곤양현, 정릉현, 무양읍, 언현, 임영현, 영양현, 영음현, 허현, 신급현, 언릉현, 장사현, 양성현, 보성현, 윤지현
서진 영천군(9현 28,300호): 허창현, 장사현, 영음현, 임영현, 언현, 소릉현, 언릉현, 신급현, 장평현
양성군(7현 18,000호): 양성현, 번창현, 겹현, 정릉현, 보성현, 곤양현, 무양현 }}}}}}}}}

4.1. 양성군(襄城郡)

둔전 시행 때 전농중랑장이 관할하던 지역으로 260년 시점에선 양성전농중랑장부(襄城典農中郞將部)가 정식 명칭이나, 당대에도 사실상 양성군으로 통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264년에 둔전제가 폐지되면서 정식으로 양성군으로 승격했다.

5. 양국(梁國)

과거 한나라의 제후왕 양왕의 봉지였다. 둔전이 시행된 시기에는 전농교위(典農校尉)가 임명되었다.
지명 [진]탕군(碭郡)→[-202]양국→[26]양군(梁郡)→[27]양국→[29]양군→[79]양국→[220]양군→[232]양국
소속 진(秦)→[한]예주자사부→[서진]예주
치소 탕현→[-202]수양현→[79]하읍현→[232]수양현
분합 [277]진국 합병: 진현·양가현·영평현·무평현
전입 [277]여남군 남돈현, [서진]여음군 항현 및 초국 고현
설치 [서진]곡숙현
전출 [서진]남돈현→여남군
폐지 [삼국]곡숙현·박현, [서진]탕산현·언현
출신 수양현: 교현· 교모 일족
영릉현: 왕수
봉작 유미(劉彌): 양왕(~220)
조제(曹悌): 양왕(232~265)
사마융: 양왕(265~)
유리: 양왕(221~230)
손망: 양왕(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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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군: 탕현, 망현, 하읍현, 초현, 계봉현, 진류현, 수양현, 어현, 옹구현, 외황현, 선보현, 제양현, 몽현, 우현, 양읍현, 곡현, 대량현, 차현, 원척현, 창읍현, 동민현, 율현, 기현(岐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양국(8현 38,709호 106,752구): 탕현, 치현, 저추현, 몽현, 이지현, 우현, 하읍현, 수양현
양국진정군(陳定郡), 탕현→절탕현(節碭縣), 치현→이선현(已善縣), 저추현→여추현(予秋縣), 몽현→몽은현(蒙思縣), 이지현→이선현(已善縣), 우현→진정정현(陳定亭縣), 하읍현→하흡현(下洽縣)
후한 양국(9성 83,300호 431,283구): 하읍현, 수양현, 우현, 탕산현, 몽현, 곡숙현, 언현, 영릉현, 박현
서진 양국(12현 13,000호): 수양현, 몽현, 우현, 하읍현, 영릉현, 곡숙현, 진현, 항현, 장평현영평현[5], 양가현, 무평현, 고현 }}}}}}}}}

6. 진군(陳郡)

원래 진(秦)나라의 회양군(淮陽郡)이었다. 277년에 진국이 폐지되어 양국에 합병되었다.
지명 [진]회양군(淮陽郡)→[전한]회양국(淮陽國)→[26]회양군→[39]회양국→[73]회양군→[79]회양국→[88]진국(陳國)→[197]진군→[223]진국→[224]진군→[232]진국→[232]진군→[266]진국
소속 진(秦)→[전한]연주자사부→[후한]예주자사부→[277]양국에 합병
치소 진현
폐지 [266?]신평현, [서진]자현·부락현
출신 자현: 양습
부락현: 원환
봉작 유총: 진왕(~197)
조옹(曹邕): 진왕(223~224)
조식: 진왕(232)
사마빈(司馬斌): 진왕(265~277)
손보: 진왕(264~?)
손건(孫虔): 회양왕(26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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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군: 진현, 양안현, 여양현, 남돈현, 여음현, 장평현, 신채현, 신현, 자현, 평예현, 양가현, 신처현, 신양현, 낭릉현, 고현, 서평현, 상채현, 성양현, 안양현, 소릉현, 고릉현, 침현, 항현, 영릉현, 세양현, 유현(楡縣·연혁 미상), 형산현(陘山縣·연혁 미상), 안릉현(安陵縣·연혁 미상) 이외 미상
전한 회양국(9현 135,544호 981,423구): 진현, 고현, 양가현, 영평현, 부구현, 고시현, 어현, 신평현, 자현
회양국신평군(新平郡), 진현→진릉현(陳陵縣), 고현→뇌릉현(賴陵縣), 어현→익세현(益歲縣)
후한 진국(9성 112,653호 1,547,572구): 진현, 양가현, 영평현, 고현, 자현, 신평현, 부락현, 무평현, 장평현 }}}}}}}}}

7. 노국(魯國)

원래 진나라가 설치한 설군(薛郡)이었으나, 전한 때 노왕(魯王)의 식읍이 되면서 개명되었다. 후한 때에는 광무제의 황태자였던 동해왕 유강이 죽은 뒤, 이를 계승한 동해왕들은 그 봉호(封號)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노군을 그 식읍으로 삼았다. 213년에 황자 유돈(劉敦)이 동해왕으로 책봉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기존의 동해왕을 계승한 유선(劉羨)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에 기재되지는 않았으나 봉호가 중복되는 제후는 존재할 수는 없는 만큼, 아마도 이때 유선은 그 봉토의 원래 이름에 따라 노왕으로 개봉(開封)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지명 [진]설군→[-182]노국→[-179]설군→[-154]노국→[10]노군(魯郡)→[25]노국→[52]노군→[58]노국→[220]노군→[232]노국→[265]노군→[275]노국
소속 진(秦)→[전한]예주자사부→[23?]서주자사부→[26?]예주자사부→[서진]예주
치소 노현
전입 [277]패국 공구현
출신 노현: 공융
추현: 당빈
봉작 유선(劉羨): 동해왕(~220)
조온(曹溫): 노왕(232~265)
가충: 노군공(265~)
유영: 노왕(221~230)
손패: 노왕(242~250)
손건(孫虔): 노왕(27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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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군: 노현, 무염현, 임성현, 설현, 번현, 방여현, 추현, 영양현, 문양현, 변현, 승현, 음평현, 건양현, 강현, 등현, 하구현, 항보현, 수창현, 시현, 평륙현(平陸縣·연혁 미상), 평양현(平陽縣·연혁 미상), 호릉현(胡陵縣·연혁 미상), 상비현(上邳縣·연혁 미상), 장현? 이외 미상
전한 노국(6현 118,045호 607,381구): 노현(52,000호), 변현, 문양현, 번현, 추현, 설현
문양현→문정현(汶亭縣), 추현→추정현(騶亭縣)
후한 노국(6성 78,447호 411,590구): 노현, 추현, 번현, 설현, 변현, 문양현
서진 노군(7현 3,500호): 노현, 문양현, 변현, 추현, 번현, 설현, 공구현 }}}}}}}}}

8. 패국(沛國)

진(秦)나라의 사천군이었는데, 역사 기록에서는 사수군(泗水郡)으로 잘못 기록되었다. 전한 때 한고제의 고향 이름을 따와 패군이 되었는데, 그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나라 때는 단순히 패(沛)라고 약칭하면 패군(상현)과 패현이 서로 구분되지 않았기에, 패현을 가리킬 때는 '소패(小沛)'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명 [진]사천군(四川郡)→[전한]패군(沛郡)→[37]패군→[44]패국→[220]패군→[232]패국
소속 진(秦)→[한]예주자사부→[서진]예주
치소 [진]패현→[전한]상현→[238]패현
분합 [삼국]초군도위?→[220]초군: 초현·차현·다현·건평현·임수현·태구현
전입 [220]여남군 산상현, [238]서주 팽성국 광척현, [서진]초국 상현·소현·효현·죽읍현·부리현·공현
전출 [238]상현·소현·효현·기현·질현·죽읍현·용항현·부리현·공현·산상현→초군, [277]공구현→노국 및 광척현→서주 팽성국
폐지 [삼국]곡양현·향현
출신 풍현: 장로 오두미도 교주들
초현: 조조 등 위나라 황실, 하후돈 등 하후씨 일족, 허저, 화타
상현: 유복, 유정 등 유씨 일족
기현: 누현
죽읍현: 무주· 무해 등 무씨 가문, 설종
봉작 유계(劉契): 패왕(~220)
조림: 패왕(232~265)
사마경(司馬景): 패왕(23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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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군: 패현, 상현, 부양현, 부리현, 하상현, 취려현, 구유현, 질현, 풍현, 공현, 평아현, 서현, 여현, 팽성현, 동현, 하채현, 산상현, 기현, 치구현, 오현, 성보현, 죽읍현, 소현, 유현, 척현 이외 미상
전한 패군(37현 409,079호 2,030,480구): 상현, 용항현, 죽현, 곡양현, 소현, 향현, 질현, 광척국, 하채현, 풍현, 다현, 초현, 기현, 공현, 첩여현, 산상현, 공구국, 부리현, 경구국, 하구현, 효국, 패현, 망현, 건성국, 성보현, 건평국, 차현, 율국, 부양국, 고국, 고시국, 표양현, 평아국, 동향현, 임도현, 의성현, 기향국
패군오부군(吾符郡), 상현→오부정현(吾符亭縣), 죽현→독정현(篤亭縣), 광척현→역취현(力聚縣), 풍현→오풍현(吾豐縣), 다현→단성현(單城縣), 초현→연성정현(延成亭縣), 기현→기성현(蘄城縣), 공현→공현(貢縣), 첩여현→화락현(華樂縣), 부리현→부합현(符合縣), 하구현→귀사현(歸思縣), 효국→육성현(育成縣), 망현→박치현(博治縣), 성보현→사선현(思善縣), 건평국→전평현(田平縣), 차현→찬치현(贊治縣), 율국→성부현(成富縣), 부양국→합치현(合治縣), 평아국→평녕현(平寧縣), 기향국→회곡현(會谷縣)
후한 패국(21성 200,495호 251,393구[6]): 상현, 소현, 패현, 풍현, 차현, 곡양현, 초현, 효현, 기현, 질현, 다현, 건평현, 임수현, 죽읍국, 공구현, 용항현, 향현, 부리현, 공현, 태구현, 저추현
서진 패국(9현 5,096호): 상현, 패현, 풍현, 죽읍현[7], 부리현, 저추현, 효현, 공현, 소현 }}}}}}}}}

9. 초군(譙郡)

초군이 신설된 해가 213년인지 220년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역사 기록상으로는 황초(黃初) 원년인 220년으로 기록되었거나 위나라에서 세운 것으로 나와 있으나, 217년에 죽은 왕찬의 시 중에 '초군'이 언급되기 때문에, 213년 조조 구주를 재편한 이후인 후한 말 때의 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충이 급군전농중랑장(汲郡典農中郞將)이 된 시점이 255년 관구검의 반란을 진압하기 이전에 해당되는데, 급군은 서진 때인 266년에야 군으로 독립한 사례가 있다. 이를 통해 본다면, 220년 초군이 정식으로 패군에서 분할되기 이전에 213년 이후 '도위부(都尉部)'가 형성되었거나 그 이전부터 '초군전농'이 임명되어 패국에서 사실상 분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면, 왕찬의 시에 '초군'이 등장하는 것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즉 초군이 패군에서 정식 분할된 것은 220년이 옳다고 판단된다.
지명 [220]초군→[222]초국(譙國)→[224]초군→[265]초국
소속 [220]예주→[서진]예주
치소 초현
전입 [220]패군 초현·차현·다현·건평현·임수현·태구현 및 여남군 성보현, [238]패국 상현·소현·효현·기현·질현·죽읍현·용항현·부리현·공현·산상현 및 여음군 송현 및 진군 고현
전출 [서진]상현·소현·효현·죽읍현·부리현·공현→패국 및 고현→양국 및 송현→여음군
폐지 [삼국]다현·건평현·임수현·태구현
출신 초현: 문흠· 문앙· 문호 부자
봉작 조림: 초왕(222~224)
사마손: 초왕(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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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초군(7현 1,000호): 초현, 성보현, 차현, 산상현, 용항현, 기현, 질현 }}}}}}}}}
238년에 패국에서 이속된 10현이 『삼국지』에서는 여음군으로 이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음군 송군을 초군으로 이속해 온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해석을 따른다.

10. 안풍군(安豐郡)

전한 때인 기원전 121년에 이 지역에 육안국(六安國)이 설치되었는데, 후한 때인 37년에 폐지되어 여강군에 합병되었다. 원래 양주자사부 지역이나 220년에 여강군 안풍현(安風縣)·우루현·요현·안풍현(安豐縣)을 분할해 안풍군을 설치하고 예주에 소속시켰다.
지명 [-121]육안국(六安國), [220]안풍군(安豐郡)
소속 [전한]양주자사부→[37]여강군에 합병, [220]예주→[서진]예주
치소 [전한]육현, [220]안풍현(安風縣)
전입 [220]양주 여강군 안풍현(安風縣)·우루현·요현·안풍현(安豐縣), [280]오 양주 여강군 송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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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육안국(5현 38,345호 178,616구): 육현, 요현, 안풍현(安豐縣), 안풍현(安風縣), 양천현
육안국안풍군(安風郡), 안풍현(安風縣)→안풍정현(安風亭縣), 안풍현(安豐縣)→미풍현(美豐縣)
서진 안풍군(5현 1,200호): 안풍현(安風縣), 우루현, 안풍현(安豐縣), 요현, 송자현 }}}}}}}}}

11. 같이보기

파일:실제 지도 후한 13주.png

[1] 『삼국지』 가규전에 조예가 즉위할 무렵에 예주의 치소는 항현으로 나온다. 243년에 당시 도독형·예제군사(都督荊豫諸軍事) 왕창은 형주의 치소를 완현에서 신야현으로 보다 전진 배치했는데, 이때 예주의 치소도 형주 전선과 가까운 안성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2] 곽도의 경우 같은 영천 곽씨인 것으로 보아 같은 현이 아닌가 싶지만 어느 현 출신이라고 나오지는 않았다. 곽원의 경우 영천군 출신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집안 배경으로 보아 영천군 출신으로 추측된다. [3] 41,650호 109,000구 [4] 49,101호 261,418구 [5] 『진서』 지리지에는 영천군 장평현을 양국 소속으로도 중복하여 표기했다. 연혁이 확인되지 않는 영평현으로 고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6] 인구(口)가 25만 명인데 세대(戶)가 20만일 리 없다. 1,251,393구의 오기라 판단된다. [7] 『진서』 지리지에는 축읍현(竺邑縣)으로 오기하였다. [8] 관영 근흡이 진하에서 항우를 격파한 뒤에, 관영은 유방에 합류하여 해하 전투에 참전해 항우를 최후까지 추격했고, 근흡은 그대로 남진하여 남군(南郡) 일대를 평정했다. [9] 공자가 상나라 왕실의 후예였기에, 실제로는 공자의 방계 후손이 책봉되었다. 공자의 직계 자손들은 전국시대부터 식읍을 수여받아 전한 때까지 군(君)으로 불리다가, 기원후 1년에 포성후(褒成侯)로 책봉되었는데, 후한 때에는 정후(亭侯)로 취급되었다. 위나라 때는 명호후의 일종인 종성후(宗聖侯)로 격이 낮아졌다가, 서진 때 다시 정후로 승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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