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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08:15:58

주연(삼국지)

의 군권 1인자
주유 →  노숙 →  여몽 →  육손 →  주연 →  제갈각 →  손준 →  손침 →  주적 →  정봉 →  육항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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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然
주연
파일:54fbb2fb43166d228f5450834e2309f79052d282.jpg
최종직위 <colbgcolor=#FFFFFF,#191919>도독(都督) 겸 대사마(左大司馬)겸 우군사(右軍師)
성씨 (施) → 주(朱)
(然)
의봉(義封)
생몰기간 182년 ~ 249년
고향 양주(揚州) 단양군(丹揚君) 고장현(故鄣縣)[1]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2.3. 번성 공방전2.4. 이릉대전2.5. 강릉 전투2.6. 손권 휘하2.7. 4차 합비 공방전2.8. 1차 조중 정벌2.9. 손권 휘하2.10. 작피의 역2.11. 이궁지쟁2.12. 2차 조중 정벌2.13. 죽음
3. 삼국지연의4. 평가5. 주연의 무덤 발굴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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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이며 는 의봉(義封)으로 본명은 시연(施然). 주치 양자, 주적의 아버지로 양주 단양군 고장현 사람.

연의만 알던 사람이 정사를 보면서 5번 놀라는데, 연의에서는 유비군에 털려서 금방 전사하는 단역인 주연이 개인 열전이 있어서 1번째로 놀라고, 실제로는 조운에게 죽지 않고 이후로 27년을 더 산다는 것에서 2번째로 놀라며, 그냥 장군도 아니고 주유 육손처럼 대도독이라는 것에 3번째로 놀라고, 강릉에서의 대활약에 4번째로 놀라며, 존재도 몰랐던 아들 주적 또한 아버지에 이은 대도독이였다는 것에 5번째로 놀란다.

연의에서는 27년이나 먼저 죽여버린 데다가 주연의 활약상이 죄다 잘려나가는 바람에 인지도는 떨어지나, 실제 정사에서의 행적을 보면 주유 - 노숙 - 여몽 - 육손으로 이어지는 오나라의 최상급 대도독 라인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인물이었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주치의 누나의 아들로서 주연의 본래의 성은 시씨다. 처음 주치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연의 나이가 13세가 되었을 때, 손책에게 주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손책은 단양군에 명하여 양고기와 술을 마련하고 주연을 불렀다. 주연이 오군에 도착한 후, 손책은 융성한 예의로써 축하하였다.[2]

주연은 일찍이 손권과 함께 공부하면서 은애의 정을 맺었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하게 되자, 주연을 여요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주연은 19세였다. 이후에 그는 산음현의 령으로 승진했고, 절충교위의 관직을 더했으며, 다섯 현을 감독했다. 손권은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단양군을 분할해 임천군을 만들고, 주연을 그 곳의 태수로 임명해 병사 2천 명을 주었다.

그 때 마침 산적들이 분분히 일어났다. 주연은 출병하여 그들을 토벌하러 갔는데, 1개월 쯤 지나서 평정했다.

2.2.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조조가 유수로 침범해 왔을 때, 주연은 대오와 삼관둔을 방비하고 있었고, 편장군으로 임명됐다.

주태전에 따르면 조조가 유수로 출전하자, 주태가 다시 달려가 공격하니, 조조는 퇴각하였고, 거기에 머물러 남아 유수를 감독하니, 평로장군에 배수되었다. 이때 주연과 서성 등이 모두 자기의 부(部)에 있으면서 아울러 복종하지 않으니, 손권이 특별히 감찰하러 나와 유수의 성채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큰 연회를 베풀었다. 손권이 직접 술을 따르다 주태 앞에 이르러는 주태에게 옷을 벗도록 명하고, 손권이 손으로 상처의 흔적을 직접 가리키며 그 상처가 생겼던 곳에 대해서 물었다. 주태는 번번이 옛 전투의 여러 장소를 기억하여 대답하였고, 그것이 끝나자, 다시 옷을 입도록 하고, 밤늦도록 연회에서 즐거워 하였다. 그 다음날 사자를 보내 어개(御蓋)를 주게 하였다. 이에 서성 등이 곧 복종하였다.

2.3. 번성 공방전

주연은 219년에는 관우 토벌에 참가하여 별도로 반장과 같이 임저까지 가서 관우를 사로잡았다. 이 때문에 소무장군으로 승진하고 서안향후로 봉해졌다.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대답했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여몽이 죽자, 손권은 주연에게 부절을 주고 강릉을 지키게했다.

2.4. 이릉대전

222년, 유비가 병사를 들어 의도를 공격해왔다. 주연은 5천 명의 병사를 감독하여 육손과 협력해 유비에게 대항했다. 주연은 별도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시켰다. 유비는 그래서 패하여 달아났다. 손권은 주연에게 정북장군을 제수하고 영안후로 봉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또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러 있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각각 다투어 표를 올려서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며 다시 공격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에 대해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주연과 낙통과 의견을 같이하며, 조비가 대군을 집결하여 겉으로는 우리 나라를 도와 유비를 토벌하려 하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이 있으므로 결정이 되면 즉시 군대를 돌릴 것이라고 보았다. 오래지 않아, 위나라 군대는 과연 출동했고, 오나라는 삼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2.5. 강릉 전투

조비의 1차 남정 때 위나라가 조진, 하후상, 장합 등을 파견하여 강릉을 공격했고, 조비는 직접 완성에 머물면서 그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위나라 군대는 서로 이어져 주둔하여 강릉성을 포위했다.

문빙전에 따르면 하후상과 더불어 강릉을 포위하였던 때에 문빙은 별도로 면구에 주둔케 하였다.

손권은 장군 손성을 파견하여 1만 명의 병사를 인솔해 강릉 밖에서 방비하며, 강릉을 둘러 보루를 쌓아 주연의 외부 구원병이 되도록 했다. 장합이 병사를 이동시켜 손성을 공격하자 손성은 대항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퇴각하였다. 장합은 강릉을 에워싸고 지키던 보루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주연은 안팎의 구원이 끊어지게 되었다. 손권이 반장과 양찬 등을 보내 포위를 풀도록 했지만, 적군의 포위망은 풀리지 않았다.

반장전에 따르면 위의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의 3만명을 나눠 부교를 만들어 백리주(百里洲)를 건너오자, 제갈근과 양찬이 아울러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갔으나,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건너오면서 끊이지 않았다.

제갈근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조진과 하후상 등이 강릉에서 주연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그 당시 주연의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 종창을 앓고 있었고, 참고 싸울 만한 자는 겨우 5천 명이었다. 조진 등이 흙산을 오르고, 땅굴을 파고, 성벽 가까이에 누대를 세우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으므로 장사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그러나 주연은 침착하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적군의 약점을 찾아 진영 두 곳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강릉이 포위되어 한 달이 지났으나 손권(주연)이 1천 몇 백 명을 가지고 동쪽 문을 지키니 그들의 땅이 붕괴하거나 흩어지는 바가 없었다.

오주전에 따르면 223년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 중앙의 사주를 점거했다.

위나라는 주연을 포위해 공격한지 총 6개월이 되었지만 물러가지 않았다. 강릉현의 령 요태가 병사들을 인솔하여 성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밖의 병사는 많고 성 안에는 사람이 적으며 식량이 바닥나려고하는 것을 보고 적과 내통하여 그들을 위해 안에서 호응하기로 음모했다. 그 음모가 시행되려고 할 때, 일이 발각되었다. 주연은 요태를 죽음으로 다스렸다. 하후상 등은 승리할 수 없게 되자, 곧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였다. 이로부터 주연의 명성은 적국에까지 떨쳤으며, 당양후로 바뀌어 봉해졌다.

반장전에 따르면 반장이 말했다.
위의 세력이 비로써 성한데다, 강물 또한 얕으니, 더불어 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통솔하던 자들을 거느리고, 위의 진영 상류 50리 쪽에 도착하여, 갈대 수백만 묶음을 베어 이를 묶어 큰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따라 오며 불을 질러 적의 부교를 불태우고 부수고자 하였다. 뗏목을 만드는 일이 끝나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 막 내려가려 할 때, 하후상이 바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반장은 아래로 내려가 육구를 수비했다.

제갈근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동소전에 따르면 조비가 완성에 행차하였을 때, 정남대장군 하후상 등이 강릉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함락할 수 없었다. 그 당시 강물은 얕고 좁았는데, 하후상은 배를 이용하여 보병과 기병을 강 속의 삼각주에 들여보내 주둔시키려 하였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게 하고자 했다. 논의하는 자들 대부분이 이렇게 하면 성은 반드시 공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소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군대가 삼각주에 주둔하는 것은 주위가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고, 부교로써 건너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한 길로 가려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것입니다. 게다가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불어나면, 어떤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조비는 동소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즉시 하후상 등에게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 급히 빠져 나오게 했다. 때마침 적병들은 두 갈래로 앞으로 전진해 오는데, 관병(官兵)이 길 하나로부터 퇴각하여 나오는 것은 한꺼번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군 석건(石建)과 고천(高遷)만이 가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군대가 빠져 나온 지 열흘이 되었는데,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조비가 말했다.
그대가 이 일을 논하였는데, 어찌 그다지도 옳은가! 설령 장량 진평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더라도 어찌 다시 더 할 수 있으리오.

2.6. 손권 휘하

처음에 주연은 주치의 상을 마쳤을 때, 본래의 성을 회복하기를 원했지만 손권이 허락하지 않았다.

보즐전에 따르면 보즐은 당시 형주 경내에서 임무를 맡고 있던 제갈근, 육손, 주연, 정보, 반준, 배현. 하후승, 위정, 이숙, 주조, 석간 11명을 나열하고 그들의 행장을 분석했으며, 상소를 올린 기회에 손등에게 권면하여 말했다.

문빙전에 따르면 손권은 군세 오만을 이끌고 스스로 석양에서 문빙을 포위, 그 기세가 격렬하였는데, 문빙은 굳게 지켜 동요치 않았으므로 손권은 20여일 지나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문빙이 이를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227년, 손권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양을 공격했다. 군사를 돌릴 때에는 반장이 적군의 추격을 차단하는 일을 맡았다. 밤에 행군하는 사이에 혼란이 발생했고, 적군이 반장을 추격했다. 반장은 추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주연이 즉시 돌아와 주둔하면서 적군에게 대항하여 앞에 있는 배로 하여금 아주 먼 곳까지 가도록 하고, 자신은 천천히 뒤에 출발했다.

229년, 주연은 거기장군 우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연주목을 겸임했다. 오래지 않아 연주가 촉나라에 있게 되었으므로 주연이 맡았던 주목의 직책은 없어졌다.

2.7. 4차 합비 공방전

234년, 손권은 촉나라와 기일을 약속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손권 자신은 신성으로 향했고, 주연과 전종은 각기 부월을 받아 좌우독으로 임명됐다. 마침 관리와 병사들이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위진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또 사곡으로 출격해오자, 정남장군이 표를 올려 말했다.
주연 등의 군대는 이미 형성을 지났습니다.

위진은 말했다.
주연은 오나라의 용맹한 장수이므로 반드시 손권을 따라 싸울 것입니다. 세력을 보여 정남장군을 공격하는 것 뿐입니다.
손권이 과연 주연을 불러 거소로 들어가 진군하여 합비를 공격했다. 조예는 직접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려 하였으나 위진이 말했다.
손권은 겉으로는 제갈량에 호응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관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합비성은 견고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정벌하여 육군의 비용을 줄일 필요가 없습니다.

조예가 심양으로 왔을 때, 손권은 이미 물러났다.

2.8. 1차 조중 정벌

주연전에는 1차 조중 정벌이 242년으로 나와있으나 손성은 여러 상황을 보면 진수가 오나라의 가화 6년을 적오 5년으로 착각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중(租中)이 정확하게 어느땅인지 본전에는 나와있지 않은데 배송지 주를 인용하면...
양양기(襄陽記)에 이르길 '조중(租中)'은 상황현(上黃縣) 경계 안에 있으며, 양양(讓陽)으로부터 150리 거리에 있다.(중략)토지는 평탄하였고 뽕나무와 마가 생장하고, 수전(水田)과 육전(陸田)이 양질이었으며, 면수 남쪽의 비옥한 토지였으므로 '조중(租中)'이라고 칭한 것이다.

한 마디로 양양에서 150리 남쪽에 있는 상황현 경계 안 지역이라는 뜻이다. 양양 자체가 면수 남쪽에 있는 도시라 설명 자체로만 보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하다.

237년, 주연은 조중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 장수 포충 호질은 각자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대항했는데, 포충은 요충지를 차단시켜 주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고, 호질은 포충을 위해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주연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먼저 사방에서 나와 공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러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연은 수하의 현재 있는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역습했다. 포충은 싸움이 불리하게 되었고, 호질 등도 모두 물러났다.

명제기에 따르면 237년 가을 7월 2일, 손권은 대장 주연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2.9. 손권 휘하

오주전에 따르면 당초, 손권은 교사 여일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원례가 돌아오자, 손권은 또 조서를 내려 제갈근, 보즐, 주연, 여대 등을 질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전부 말하고 직접적으로 간언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완하는 것은 나 역시 희망한다.

주유전에 따르면 239년, 제갈근, 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유의 아들 주윤은 죄를 지어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주유는 과거 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윤은 병으로 죽었다.

2.10. 작피의 역

오주전에 따르면 오나라 적오 4년(241년)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를 무너뜨리고 안성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을 공격했다. 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5월,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주이전에 따르면 241년, 주이는 주연을 수행하여 위나라 번성을 공격하러 갔을 때, 번성의 외부 포위벽을 무찌를 계획을 건의했다.

제왕기 주석 간보진기에 따르면 오나라 장군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의 5만 병력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하고, 번성이 애워싸여 급박해졌다. 이에 사마의는 이렇게 청했다.
조중의 백성 10만이 강의 남쪽에 떨어져 갈팡질팡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으며 번성은 공격을 당하여 수개월 동안 포위가 풀리지 않으니 긴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이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적들은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는데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의 아래에서 (기세가) 꺾였으니 스스로 파멸당할 형국에 있으므로 응당 좋은 계책으로 방어해야한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하길
병법에 이르길 장군이 유능한데 수비하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속박하는 것이요 장군이 무능한데 맡기는 것은 군대를 복멸시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경이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직의 커다란 걱정입니다.

선제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약탈하자 사마의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제왕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의 장군 주연 등이 양양군 번성현을 포위하자, 태부 사마의가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호질전에 따르면 오나라 대장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자 호질은 경무장한 군대를 인솔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므로 가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호질이 말했다.
번성은 지세가 낮고 병력도 적으므로 마땅히 군대를 진격시켜 그 외곽에서 구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마침내 병마를 추슬러서 포위된 번성에 다다르자 성안이 곧 안정되었다.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41년, 오나라 장수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 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간보진기에 따르면 6월에 제군을 통솔하여 남정하였고 거가(車駕:황제)가 진양성의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사마의는 남방이 무덥고 습하므로 응당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경기병을 시켜 도발하였으나 주연이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제군로 하여금 휴식하고 목욕하도록 명령 내리고는 정예를 고르고 선봉에 설 병사들을 모아 호령을 펼치고는 반드시 공략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 등이 이를 듣고는 마침내 밤중에 도망갔다. 추격하여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러 크게 살육하고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선제기에 따르면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사마의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선박, 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라는데, 간보진기와 선제기를 빼고 정작 다른 사서들에선 그냥 주연이 한 달동안 포위하다가 사마의가 오자 퇴각, 혹은 달아났다고만 나오고 자치통감에서는 6월, 태부 사마의의 군대가 번성을 구하러 왔고 오나라 군대가 이를 듣고 밤중에 몰래 도주했는데 삼주구까지 추격해 많이 노획하고 돌아왔다(六月,太傅懿督諸軍救樊;吳軍聞之,夜遁。追至三州口,大獲而還)로 적었을 뿐이다.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적은 이유는 고증을 위해 참고로 한 여러 자료들, 특히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 위나라와 오나라간의 특별한 혈전을 통한 대파, 참수 같은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 여름 5월 오(吳)의 장군(將) 주연(朱然) 등이 양양군(襄陽) 번성현(樊城縣)을 포위하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6월 29일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 위서 삼소제기 제왕부분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5월,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 오서 오주전

어디에서도 간보진기, 선제기 같은 수많은 살육, 만여급 참수 같은 여파에 대한 얘기는 없이 그냥 서로 군대를 물려서 돌아왔을뿐이다. 오나라측은 피해부분을 이미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같이 기록했는데도 이 부분에서 인명이 상하는 대패를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위략에서 간보진기, 선제기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한 정황 자체는 있으므로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했고 삼주구까지 추격해 오나라가 버린 많은 물자를 취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또 간보진기와 선제기는 양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사실상 내용이 같은 기록인데 선제기는 간보의 진기에서 그냥 '많이 죽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부분을 확정적으로 '만여 명을 참획하고 군수물자에, 선박까지 획득했다'고 내용을 부풀렸다. 사실 본전을 살펴도 간보의 진기에서 많은 이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얻었다는 기록 자체가 의문스러운 기록인데, 한술 더 떠서 선제기처럼 주연의 군세가 5만인데 만여 급 참획에 선박, 군수물자까지 빼았겼다면 매우 엄청난 피해이다. 그러나 당연히 삼국지 위서, 오서엔 이런 기록이 없고 위략에서조차 주연이 도망갔으면 갔지 이런식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쓰진 않았으며 자치통감도 만여급 참획은 빼버렸다. 이는 진서 선제기가 얼마나 기존 기록을 과장하고 왜곡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오주전 주석 한진춘추에는 손권이 형주를 얻어놓고 계속 이 부분 지역 공격에 대해서 냉담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은 손권 문서에도 어느정도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사실 이걸보면 이 시기 손권이 천하통일에 관심이 정말 있었는지 의문스러운데 다음은 해당 기록이다.
영릉태수(零陵太守) 은례(殷禮; 은찰(殷札)이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이 손권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이 조씨(曹氏)를 버려서 상주(喪誅)하는 일이 여러 차례 보이고, 호랑이가 싸우는 때에 어린아이가 일을 맡았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인솔하시어 혼란스러운 나라를 빼앗고 망하는 나라에 모욕을 주고 의당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땅을 싹 쓸어서 강건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동원하여 강한 사람들은 창을 잡게 하고 약한 사람들은 운반하는 일을 하게 하십시오.

서쪽 익주(益州)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농우(隴右)에 진을 치게 하고, 제갈근(諸葛瑾)과 주연(朱然)에게 많은 무리를 주어서 곧바로 양양(襄陽)을 겨냥하게 하시며 육손(陸遜)과 주환(朱桓)은 별도로 수춘(壽春)을 정벌하게 하시고 대가(大駕)는 회수의 북쪽으로 들어가서 청주(青州)와 서주(徐州)를 거쳐 가도록 하십시오. 양양과 수춘이 포위되어 곤궁하게 되고 장안 이서가 촉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게 되면 허창과 낙양의 군사가 반드시 동서 양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니 이때 아군이 기각지세(琦角之勢)를 만들어 병진하면 중원의 백성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입니다.

장수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면 혹 편하고 마땅한 일을 잃게 되고, 한 부대가 실패하면 세 부대의 군사들의 마음이 떠날 것입니다. 바로 마땅히 그 때 아군이 말마지거(抹馬肢車 : 배불리 먹은 말과 충분히 장비를 갖춘 전차)로 성읍을 휩쓸면서 이긴 기세를 타고서 북쪽으로 쫓아내어 화하(華夏)를 평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모든 군사와 많은 무리를 동원하지 아니하고 전처럼 가볍게 움직이면 크게 쓰이기에는 부족하고 쉽게 누차에 걸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니, 백성은 피곤하게 되고 위신은 소멸되며, 기회는 가버리고 힘은 다 빠질 것이니 군사를 내보내는 계책이 아닙니다."

손권이 이를 채용할 수 없었다.

이는 30여년전 제갈량이 처음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오나라식으로 변용한 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인데, 이 시기의 손권은 이미 촉한과의 공동북벌 등 대대적인 외정이나 위나라 공격에 회의감을 느낀것으로 보인다. 작피의 역에서 손권은 무기력하게 보일 정도로 쉽게 군세를 후퇴시켜버리는데 섬뜩하게도 이 다음해부터 이궁지쟁이 시작된다.

2.11. 이궁지쟁

이궁지쟁에서 주연의 아들 주적(시적)이 손화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당시 주연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주전에 따르면 244년,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 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촉나라는 결국 스스로 도모하는 바가 없었는데, 과연 손권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3]

2.12. 2차 조중 정벌

오주전에 따르면 245년 가을 7월, 장군 마무 등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이보다 앞서 귀의한 마무가 간사한 마음을 품었다가 발각되어 주살당했는데 손권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주연은 조중으로 출발하려고 하면서 상소를 올려 말했다.
마무는 소인입니다. 그가 감히 은혜와 양육을 저버렸습니다. 신은 오늘 천자의 권위를 받들어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앞서 한 말을 기억하셨다가 신의 이후 행동의 결과를 꾸짖으십시오.

손권은 이 당시 주연의 상소를 공개하지 않았다.

246년, 주연은 재차 조중으로 출정하였다. 위나라 장수 이흥 등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주연의 퇴로를 끊었다. 주연은 밤에 출격하여 이홍 등을 반격했다. 주연의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246년 봄 2월, 거기장군 주연이 위나라의 조중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주연이 승리를 알려오자 신하들은 천자에게 경하했다. 손권은 곧 주연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주연의 상소를 꺼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이전에 일찍이 표를 올렸었는데, 나는 그의 말대로 실현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소. 오늘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으니, 그는 일을 관찰하는 데 밝다고 할 수 있소.

그는 사자를 파견하여 주연을 좌대사마 우군사로 임명했다.

제왕기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이 해에 오나라 장수 주연이 조중에 들어와 수 천명을 참하고 노획하므로 조중의 백성과 관리들 만 여가가 면수를 건넜다.

사마의가 조상에게 말하길 "만약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반드시 다시 도적들을 불러올 것이니 응당 당분간 머무르도록 해야 하오."

조상이 말하길 "지금 면수의 남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면수의 북쪽에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사마의가 말하길 "그렇지 않소. 무릇 사물은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한 것이고 위태로운 곳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서 이르길 : 성패는 형(形)에 있고 안위는 세(勢)에 있으니 형세는 무리를 이끄는 요체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소. 만약 적 2만명이 면수를 끊고 3만명이 면수 이남의 군대와 대치하며 만명이 육로로 조중을 습격한다면 그대께서는 장차 어찌 구하려고 하시오?"

하였으나 조상은 듣지 않고 끝내 (면수 이북으로 간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주연이 이후에 습격하여 격파하였다.[4]

2.13. 죽음

주연의 신장은 7척도 못되었지만,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태도가 분명했으며, 생활에서는 수양을 하여 청결했으며,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군대의 기계(器械)에만 실시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질박하게 했다. 그는 하루종일 국가의 대사를 걱정했고, 언제나 전쟁터에 있었다. 그가 긴급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도 대담하고 안정되었던 점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는 부분이다. 비록 세상에 일이 없을지라도 그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태고(太鼓)를 울리면, 그의 진영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행장을 꾸려 대오에 섰다. 주연은 이 방법으로 적군을 놀려 그들이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모르게 했기 때문에 출전할 때마다 공로를 세웠다.

제갈근의 아들 제갈융과 보즐의 아들 보협은 비록 각기 부친의 직무를 계승했지만, 손권은 특별히 주연으로 하여금 군사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고 대독(大督)으로 삼았다. 육손 또한 죽게 되자, 공신이나 명장들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자는 주연 뿐이었으므로 그와 견줄 만큼 융성한 대우를 받는 자는 없었다.

주연은 2년 간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이후로 점점 악화됐다. 손권은 낮에는 그 때문에 먹는 것이 줄었고, 밤에는 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정의 사자와 의약, 음식물을 그에게 보내면서 길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게 했다. 주연은 매번 사자를 보내 질병 상태를 보고했고, 손권은 그 사자를 불러 만나서 직접 질문을 했다. 사자가 궁궐로 들어오면 술과 음식을 내렸고, 궁궐을 나가면 삼베와 비단을 보냈다. 창업 공신으로 질병이 있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 있어서 가장 무거웠던 것이 여몽과 능통이라면, 그 다음은 주연이었다.

오주전에 따르면 248년 봄 정월, 주연이 강릉에 성벽을 쌓았다. 병상에 있으면서도 직무는 수행했다.

주연은 향년 68세, 2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그를 위해 매우 슬퍼했다. 아들 주적이 뒤를 이었다.

3. 삼국지연의

손권이 군주가 되었을 때에 부하가 된 무장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언급된다. 딱히 손권이랑 동문이었다든가 아니면 친분이 있다든가 하는 언급은 안 나온다.

관우를 잡을 때의 활약은 77회에서 정사와 비슷하게 나와서 반장과 공적을 세운다.

이릉대전에서는 손환과 함께 영격의 임무를 맡아 수군을 이끌고 수로를 지켰다. 그러나 손환이 육지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수상에 못박히고 말았고 원군을 요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육손이 유비를 패주시키자 제장과 함께 유비군을 추격했는데 다른 모든 장수들이 촉군을 상대로 전공을 올릴 때, 84회에서 혼자 유비의 원군으로 온 조운한테 죽는다. 그러니까 정사에서는 249년에 죽는 사람인데 222년에 죽여버렸다. 심지어 정사에선 조운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또한 연의에서는 주연을 이미 죽였기 때문에 강릉 전투를 넘어가기 위해 주환 조인의 전투에 초점을 돌리고 제갈근 여범이 싸운 일만 기록하고, 강릉 쪽에 간 병력은 없는 것으로 했다.

그것도 보통 장군이면 모를까 한 나라의 대도독을 죽여서 그 뒤에 오나라의 묘사는 엄청 축소되었다. 그의 활동이 오나라의 큰 움직임을 모두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222년부터 249년까지 주연이 한 행동은 전부 말소되어 오나라의 분량은 그 뒤로 엄청난 양이 짤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 제갈량 강유가 북벌할 동안 오나라는 뭐했나염? 합비만 공격하고 다른데는 아예 공격도 안 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이 나오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렇듯 실제 역사상 손권 집권 후반기 오나라의 군권 1인자로서 맹활약했던 주연을 연의에서는 단역으로 전락시키고 죽였는데, 아마도 그가 관우를 사로잡아 죽이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중국 민간에서 신으로까지 떠받들여지는 그 관우를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은 연의에서 떡너프를 당하는데, 비슷한 예로 관우 귀신이 씌여 주군인 손권을 능욕하고 일곱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죽은 여몽, 관우 귀신에 놀라 혼비백산하다 관흥에게 죽은 반장이 있다.

4. 평가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하나로, 실제로는 도독 라인의 대표격 인물인 주유, 노숙, 여몽, 육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오나라 대표 명장 중 하나다. 도대체 나관중이 무슨 생각으로 이 정도 거물을 지나가는 잡장1로 묘사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주연을 후임으로 추천한 여몽의 식견은 과연 맞아 떨어져 주연의 일생동안 강릉은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았다. 강하를 지킨 문빙과 함께 최고의 철벽 수문장 중 1명이다. 후에 아들 주적도 강릉성을 방위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사에서 주연은 맡은 지위나 공적이나 모두 명장으로 보기 손색이 없다. 또한 본인이 군권의 1인자를 맡은 경험도 있으니 충분히 대단한 인물이다. 거기에다가 그의 묘는 삼국시대 당대의 역사 유물로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현대 고고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5. 주연의 무덤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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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묘

1984년, 중국 안후이성 마안산시에서 주연의 묘가 발굴되었다. 이미 도굴당한 상황이지만 140점의 자료가 남아있는 벽돌 묘지가 발굴돼서 삼국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여러가지 제공하게 되었다. 주연의 묘에서 나온 유물들은 지극히 드문 삼국시대의 회화, 조형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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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란문화공원의 주연의 동상

1986년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주위가 정비되고 주연로, 주연가족묘박물관, 주연문화공원이 생기는 등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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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명함

그의 무덤에서 나온 명함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명함이고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나무 물품들 또한 가장 오래된 칠된 목공예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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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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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초상화

손권이 술자리를 여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무덤에서 발굴된 회화 중에서 황제나 황후 등을 묘사하는 그림이 있는데 단순한 이미지일 수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주연 생전의 황제는 손권 뿐이었으므로 이것은 손권을 묘사한 당대의 그림일 가능성도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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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의 칠기

검소했다는 그의 평가를 볼 때 그의 무덤에 들어있는 칠기 등의 고가의 물품은 손권이 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승상을 묘사한 칠기도 나타나서 이것이 육손을 묘사한 그림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의 묘가 저 물건너 백제의 첫 도읍인 풍납토성의 건축연대에 대한 논란에도 기여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전문도기 중 가장 빠른 연대의 것이 바로 주연의 묘에서 나온 것이라 풍납토성의 건축연대는 주연이 살아있을 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힘들다는 것. 거기다가 이 곳에서는 주연과 그 부인의 묘가 같은 곳에 있는 것, 아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진묘수의 여부 등이 무령왕릉과 비슷해서 자주 비교되곤 한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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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장성 후저우시 [2] 주연은 주치의 양자가 되어 성이 주씨로 바뀌는데 이후 주치는 아들 주재, 주기, 주위, 주만세 등 아들을 줄줄이 얻는다. [3] 이 때는 한참 이궁지쟁이 진행되던 때인데도 손권은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 이궁지쟁이 손권의 의도적인 숙청이라고 주장하는 쪽의 근거이기도 하다. [4] 진서 선제기는 여기서 또 조상이 격파당해서 희생된자가 만여명을 헤아렸다고 언급하는데 당연히 정사 삼국지와는 전혀 검증이 안된다. 오주전에서는 천여명을 참획했다고 나올 뿐이고 한진춘추에서도 단순히 격파했다고 보고 있다, 재차 습격했을 땐 주연이 직접 참획했다기보단 그냥 그곳에 있던 인구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오나라엔 별로 획도 안 돼서 전공으로 쓰기가 모호했다거나 선제기가 조상을 깎아 내리기 위해 과장한 서술로 보인다. [5] 척 봐도 꽤나 화려한데 손권이 검소했다지만 술자리만큼은 정말 화려하게 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