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진무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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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3월 8일 인조에 의해 책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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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조선 평안도병마절도사 증 영의정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 충장공(忠壯公) 남이흥 南以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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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6년 8월 31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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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27년 3월 8일 (향년 51세) |
평안도
안주군 안주성 (現 평안남도 안주시 문덕군 청남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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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 1길 73-48 |
봉호 | 의춘군(宜春君) →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1] |
시호 | 충장(忠壯) |
본관 | 의령 남씨[2] |
자 | 사호(士豪) |
호 | 성은(城隱) |
최종 관등 |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3] |
공훈 | 갈성분위출기효력 진무공신 1등(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 一等, 1624) |
학력 | 무과 알성시 병과 급제 ( 선조 35년) |
경력 |
황해도 장연현감(長淵縣監) 평안도 의주판관(義州判官) 평안도 용천군수(龍川郡守) 포도청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 兼 晉州牧使) 삼도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三道副元帥 兼 平安道 兵馬節度使) |
부모 |
부친 - 의천부원군 남유(宜川府院郡 南瑜, 1552 ~ 1598) 모친 - 전주 류씨 형조판서 류훈(柳壎)의 딸 |
부인 |
정실 -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 정씨 측실 - 연안 김씨 |
자녀 |
장남 - 남두극(南斗極) 차남 -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남두병(南斗柄) 3남 - 남두기(南斗機) 4남 - 남두추(南斗樞) 5남 - 남두표(南斗杓) 외손자 - 형조판서 훈련·어영대장 류혁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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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광해군~ 인조대의 무신.5대조는 좌의정 남지의 차남이자 내섬시 부정(종3품)을 지낸 남칭(南偁), 고조할아버지는 삭녕군수를 지낸 남변(南忭), 큰증조할아버지는 병조참판(종2품)을 지낸 남세웅(南世雄), 넷째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낸 남세준(南世準),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남세건(南世健)이다.
큰할아버지는 예조참판(종2품) 남응운(南應雲), 할아버지는 공조참의(정3품) 남응룡(南應龍)이며 아버지 남유(南瑜)는 전라도 나주목사[4]로 재직하던중 이순신과 함께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남유(南瑜)의 전처는 좌의정 정탁의 장녀이고, 후처 전주 류씨는 형조판서 류훈(柳塤)의 딸인데 아들 남이흥은 전주류씨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남이흥은 인조 때 정충신,
영의정 남곤과는 10촌 관계이다.
2. 생애
남재의 8대손으로 어린시절 기골이 장대하고 대장부의 기질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아버지인 나주 목사 남유는 이순신 막하에서 종군하다가 노량 해전때 전사했다. 이후 글공부를 포기하고 승마와 활쏘기에 열중했다.1602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시작으로 여러 지방의 직책을 역임하며 민심의 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1617년(광해 9)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 재직 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진주 촉석루와 의병 집합소였던 의곡사를 중건하였다. 구성 부사 재임 시에는 백성들이 남이흥의 덕을 기려 송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탄핵을 받았으나[6] 장만의 변호로 관직을 유지했고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도원수 장만의 휘하 중군으로 정충신과 함께 반란을 평정했다. 황주 전투부터 관군을 이끌어이괄의 부하 유순무(柳舜懋)ㆍ이신(李愼)ㆍ이윤서(李胤緖)를 회유해 많은 반군을 귀순하게 했다. 서울 근교의 작전 회의에서 장만은 도성을 포위하여 이괄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뒤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무악재에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자는 정충신의 주장에 동조해 무악재 전투에서 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7][8]
이 공로로 연안 부사가 되고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에 봉해졌다. 이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영변 부사를 역임했다. 이괄의 난이후 무너진 군사력을 회복하기위해 훈련할 것을 정충신과 함께 제안했으나 난 이후 무신에 대한 천대가 더 심해졌고 이에 따른 감시와 사찰을 받고 훈련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었다.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막았다. 후금의 주력 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포함한 3.000여명을 독려해 용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이틀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은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책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하며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적들과 함께 자폭했다. 남이흥 외에도 안주 목사 김준[9] 등 여러 장수들도 전사하거나 자폭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후금의 대장 아이신기오로 아민은 "조선은 '충의'의 나라다."라며 감탄했으며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조선과 우호국이었던 명은 남이흥의 이름을 써 놓고 백성들에게 남이흥의 애국 충절을 본받으라며 황제궁 앞에서 수개월간 특전을 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인조는 남이흥을 국장으로 장례하도록 하고 시신을 충남 당진시쪽으로 이장했다. 장례 시 곤룡포를 관 위에 덮어 주라며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남이흥의 관을 덮었던 인조의 곤룡포는 충장사 경내 모충관에 보관되어 있다.
3. 여담
이괄, 정충신과는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였다.칼부림에서도 등장하며 정충신과 함께 장만을 보좌하며 이괄의 난 토벌에서 활약한다. 정충신 못지 않게 냉정침착한 장수로 묘사된다. 계원대장으로 쭉 정충신의 옆을 보좌했으며 마지막 일전에서 돌풍으로 인한 혼란과 한명련의 부상을 이용해 "한명련이 죽었고 이괄이 패배했다." 라고 외쳐 반군의 사기를 꺾고 패퇴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는
정묘호란에도 등장한다. 후금군이 전령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려 하자 사신이 다가오기도 전에 화살을 쏘아 쫓아내며, 안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몇 차례 물러나게 하긴 했지만, 결국 성이 함락되자 관아 내부에서
"우리가 살면 후손들이 죽고, 우리가 죽으면 그래도 후손들은 살아가겠지."
라는 유언을 남기고 화약을 폭파시켜 자결한다.
[1]
사후 추봉(追封).
[2]
충경공파(忠景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
[3]
생전에 영의정이었던 적은 없고 사후 1627년(인조 5) 왕명으로 추증된 것이다.
[4]
나주목사는 평안감사, 과천현감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지방관직으로 꼽혔다.
[5]
취소선을 그은 이유는
이괄의 난을 참조
[6]
능력을 인정받아 중용되어 광해군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
[7]
한성부 침입해 언덕 점령 계책을 정충신이 제의했고 시야가 좁아진 야밤에 반란군 방향의 바람으로
고춧가루를 뿌려
눈을 못 뜨게 주변 상황 판단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
한명련은 죽고
이괄은 도망쳤다.'고 소리치며
거짓 정보를 흘리는 남이흥의 대응에 반란군은 혼란 속에 탈주하며 와해 시켰다.
[8]
정충신은
전략과 안목이 뛰어나며 남이흥은 기개와
전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9]
김준의 어머니와 부인 자식 모두 후금의 손에 순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