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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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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銓
1758년( 영조 34년) 3월 1일 ~ 1816년( 순조 16년) 6월 6일

1. 개요2. 생애3. 교우 관계4. 주요 저서5. 매체6.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시대 영조, 정조, 순조 때 살았던 성리학자, 실학자로 수산학자, 해양학자, 생물학자이다. 정약용 복자 정약종[1]의 형으로 본관은 나주(羅州)[2],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이다. 종교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

2. 생애

1758년(영조 34) 3월 1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3]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 6. 10 ~ 1792. 4. 9)과 어머니 윤소온 (尹小溫 1728 ~ 1770. 11. 9)[4] 사이의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자이자 실학자인 이익의 학설을 배웠으며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암브로시오)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83년(정조 7) 식년 생원시에 2등 1위로 입격하고 1790년(정조 14) 증광 문과에 응시해 병과 27위로 급제했다. 이후 전적, 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798년 정조의 명령을 받아 영남인물고를 편찬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친척인 천주교도 이벽(세례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등과 교류했으나 이후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를 멀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지도에 유배를 갔다 우이도를 거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파일:흑산도 복성재 사촌서당.jpg
흑산도에 있는 정약전의 사촌서당. 현판은 동생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하여 복원한 것이다.[5] 손암은 마을 가장 꼭대기의 춥고 그늘진 서당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유배지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다가 유배 생활 16년만인 1816년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묘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성지에 있다.

아들로는 외아들 정학초(丁學樵, 1791. 2. 10 ~ 1807. 7. 19)가 있었는데 혼인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자식도 없이 병으로 요절했다. 정약전은 물론이고 평소 조카 정학초의 재능을 높이 사서 자신의 학문적인 후계로 삼고자 했던 정약용도 크게 슬퍼하였다. 정학초의 죽음으로 인해 후사 문제를 두고 정약용과 정약전이 편지로 토론한 적이 있다. 며느리가 자식도 없이 청상 과부로 사는 모습을 가엾게 여긴 정약전과 정약전의 아내는 정약전 형제의 외가 친척인 정학기의 아들을 정학초의 양자로 삼아서 후사를 잇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정약전이 유배지인 흑산도의 호장[6] 딸 박씨에게서 얻은 서자인 정학소(1805. 9. 14 ~ ?)[7][8]에게 대를 잇게 하라고 주장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점 적서 차별이 심해졌지만, 적자가 없고 서자가 있으면 양자를 들이는 것보다는 서자가 대를 잇는 것이 예법에 맞는 방법이었고 정약전도 정학소를 차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자식도 없이 힘들게 사는 모습[9] 때문에 정약용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자 정약용은 한발 물러나서 정학소가 이후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정학초의 양자로 들어가서 대를 잇게 하라고 주장했고 정약전은 이를 따랐다.[10]

3. 교우 관계

3.1. 정약용

정약전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4살 아래 동생인 정약용과 우애가 깊었다. 정약용도 둘째 형인 정약전을 어린 시절부터 잘 따랐고, 유배 생활 중에도 그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글에서도 정약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두 형제는 젊은 시절 함께 동림사, 봉은사에서 수학하며 학문의 즐거움과 형제들간의 우애를 논하기도 했으며 정약전이 본래 벼슬길인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정약용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정조 역시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며 총애하였다.

두 형제들에게 정조 시기는 참으로 영광의 시기였으며 인생에서 보람찬 순간들로 가득차 있었고 형제간의 우의는 더욱 깊어졌다. 이때의 일화 가운데 정약용이 좌부승지로 있을때 고향이 그리워 중앙 벼슬아치가 허락없이 도성을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는 법을 슬쩍 어기곤 고향에 잠시 돌아가 형인 정약전과 강에서 고기를 잡고 산나물도 뜯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는 등 평안한 여가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일화를 일생에서 즐거웠던 순간들 중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율정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유배시절 때도 두 형제는 서로 편지를 보내면서 형제간의 애틋한 정을 표현하였다. 정약용 본인은 '나는 강진 땅에서 그나마 편안하게[11] 살고 있지만 형님은 그 험한 섬 생활을 어떻게 하실까'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약용은 편지로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정약전은 바다에서 생활하는 와중에 정약용에게 조석이 발생하는 까닭은 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는데,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그 외에도 정약용이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박제가에게 전해 들었던 개고기 조리법 편지[12]와 재료인 들깨를 보내기도 하는 등 그 우애가 같이 있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두 형제는 단순히 형제지간을 넘어 학문적, 정치적 지기나 다름없었는데 이는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전을 떠나보낸 뒤 애통해하며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3]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3.2. 문순득

홍어 상인으로 유구( 오키나와)와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간신히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를 처음 글로 쓴 인물이 정약전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은 흑산도에 들렀다가 정약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그의 이야기를 날짜별로 정리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14],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형 정약전이 사망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러준 것에 대해 감사의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고 한국에서도 2005년 완역본이 발간되었다.

문순득이 살았던 집이 현재도 우이도에 남아있으며, 문순득의 후손이 정약전 선생이 살던 유배지 집터 자리를 구입하여 담을 치고 돌보고 계시다고 한다.

3.3. 장창대

대둔도 출신의 어부. 자산어보에는 덕순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문순득이 표해시말을 만든 동반자라면, 장창대는 자산어보를 만든 동반자였다. 비록 현실을 중요시하던 실학자였던 정약전이었고, 물고기에 대해서 알고자 해부까지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지만 물고기의 생태에 대해서 알기에는 양반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이때에 도움이 되던 사람이 바로 장창대였다. 정약전은 수많은 어부 중에 책을 읽기를 좋아하며[15] 관찰력이 좋은 장창대의 도움으로 물고기의 생태지식을 배우게 된다.

자산어보에서 장창대의 조언이 많이 실려 있으며, 이 수준은 상어의 교미와 부화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나올 정도이다. 그리고 현대 생태학에서 관찰한 상어의 번식과 정확하게 일치할 정도로 장창대의 도움은 자산어보를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 나중에는 정약전이 장창대를 위해서 시를 지어줬을 정도.

창대의 무덤이 대둔도에 남아 있다.

4. 주요 저서

대표적인 책으로는 흑산도로 유배갔을 때 집필했던 자산어보가 있으며, 그 외에도 자산역간, 논어난, 동역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다.

자산어보는 아예 머리말에 "자산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도)에 유배를 와 있어서 흑산이라는 말이 어둡고 무섭다"라고 적어놓았다. 다만 이 책 이름을 자산어보로 읽어야 할 것인지 현산어보로 읽어야 할 것인지는 논쟁이 있다. 해당 문서 참조.

5. 매체

2000년 KBS2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에선 배우 김규철이 정약전을 연기했다.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자산어보가 개봉하였다. 배역은 설경구가 맡았다. 흑산도 유배 시절 창대( 변요한 분)를 제자로 맞이하여 같이 자산어보를 만들어 간다는 이야기. 자산어보 서문에 기술된 창대의 이야기 몇줄을 가지고 작가의 상상을 더해서 만든 스토리이다.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에서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나 사실 그속은 뼛속까지 현실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윤승운 화백의 만화 < 맹꽁이 서당>에서는 8권에 등장한다. 동생인 정약용 못지않게 총명한 학자이자 관리였으나 그와 똑같이 순조 1년 신유사옥으로 흑산도로 유배당한다. 그럼에도 섬의 젊은이들을 공부시키는 등 학업을 멈추지 않았고, 그 유명한 자산어보 등을 저술했지만, 결국 유배 16년만에 섬에서 별세하며 동생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6. 여담

파일:정약전길 도로명판.jpg
흑산도에는 정약전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있다. 손암이 12년 간 유배 생활을 했던 모래미 마을의 안길 이름이 "정약전길"이다.

이 길을 따라 마을 맨 꼭대기로 가면 1958년 지어진 천주교 사리공소 건물, 그리고 정약전의 집인 사촌서당이 나온다. 사리의 천주교 공소는 철골 없이 시멘트에 짱돌을 박아 넣어 만든 건물이어서 특이한 외양을 자랑하기 때문에, 사촌서당에 방문하면서 함께 둘러볼 만하다.


[1]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장남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시복됨( 한국 124위 순교복자).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2]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동원공계(東園公系) 23세 약(若)○ 항렬. [3] 현재 이곳에는 마재성지성당이 있다. [4]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 [5] 정약용은 사촌서당 오픈에 즈음하여 형 정약전의 부탁을 받아 〈사촌서당기(沙村書堂記)〉라는 글을 지은 적이 있다. (마을 촌)의 옛 글자인 邨을 써서 현판을 복원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것이 사촌서당기에 기록된 바와 다르니 沙村書堂(사촌서당) 또는 沙村書室(사촌서실)로 현판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간간이 나온다. [6] 향리의 우두머리. 요즘으로 치면 이장. [7] 나주정씨족보 권8 66쪽에는 정학무(丁學武)로 등재되어 있다. [8] 정약전에게는 정학승(丁學乘)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다. 정학무의 동생이며, 동복동생인지 이복동생인지는 알 수 없다. 정학승은 정약전의 막내동생인 정약횡(丁若鐄)의 양자가 되었다. [9] 토론이 이어질 당시 정약전의 아내가 정약용에게 편지를 써서 '도련님 나 좀 살려주시오. 청상과부인 며느리에게는 아들도 없는데 예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며 양자를 들이게 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10] 실제로 정학소는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정대빈(丁大彬, 1836 ~ 1859) 등 1남 2녀를 두었다. 정대빈은 아들을 보지 못했고, 정약용의 증손자인 정윤섭(丁允燮)이 정대빈의 양자가 되었다. 현재 정약전의 후손들은 모두 정윤섭의 계보에서 이어진다. [11] 사실 정약용의 유배 생활도 결코 편안하진 않았으므로 이는 정약용의 형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 위해 표현한 것이 맞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도 정약용의 유배 생활이 정약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쨋든 정약용이 있던 강진은 육지라서 정약전이 있던 흑산도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도 넉넉한 곳이었고, 정약용 형제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이 강진과 가까워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2] 정약용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 편지는 정약전에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수준으로 비현실적이었다. 당시 정약전의 섬 생활은 개를 보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3]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을 총애했던 정조대왕과 형 정약전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초당 바로 옆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며 슬픔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4] 정약전이 19살 연상으로, 거의 아버지뻘이었다. [15] 다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책이 많지는 않았다고 정약전은 전한다. 그래서 지식적 시야가 넓지는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