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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2:00:27

조호르바루의 환희

파일:external/sportiva.shueisha.co.jp/jyoholbal.jpg



영상의 첫 부분을 자세히 보면, 대한민국이 도쿄 대첩에서 극적으로 일본에게 2-1로 역전승을 거두는 장면도 나온다.

ジョホールバルの歓喜

1. 개요2. 경기 전 상황3. 경기의 흐름4. 경기 이후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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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7년 11월 16일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개최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지역 플레이오프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을 연장 접전 대혈투 끝에 3-2 역전승으로 누르고 FIFA 월드컵 첫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경기이다.

이때 이후로 본선에 빠짐없이 진출한 사실을 생각하면 일본 축구사에서 그동안 막혀있던 혈을 이 경기를 계기로 뚫은 것이다. 일본은 1998년 프랑스 대회 첫 본선 진출 이후 2022년 카타르 대회까지 현재 7회 연속 본선 진출을 기록 중이다. 옆집인 한국의 10회 연속 진출(도합 11회 진출)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지만, 7회 연속도 충분히 우수한 성적이다. 특히 1998년 이후 한국과 일본 외에 아시아에서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팀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축구 약소국이었던 일본에 있어 기념비적인 성장이었다.[1]

2. 경기 전 상황

이 당시 일본은 J리그가 뿌리를 내리고 높은 인기와 더불어 새로운 스타 플레이어들을 많이 배출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루이 라모스, 하시라타니 테츠지[2] 모리야스 하지메[3] 등 도하의 비극 멤버들은 노장이 되거나 은퇴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마이애미의 기적을 만들었던 나카타 히데토시, 조 쇼지, 이토 테루요시, 마에조노 마사키요, 카와구치 요시카츠 등 유럽과 남미를 통해 체득한 선진 축구를 구사하는 젊은 선수들이 대표팀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 첫 번째 황금세대의 첫 번째 메이저 무대가 바로 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이었다. 일본의 첫 상대는 우즈베키스탄이었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진 첫 경기에서 일본은 돌아온 에이스 스트라이커 미우라 카즈요시의 4골 원맨쇼에 힘입어 우즈베키스탄을 6:3으로 완파하며 기분 좋게 첫 승리를 따냈다.

그 다음 UAE의 아부다비 원정에서는 경기를 몰아붙이고도 0:0으로 무승부를 거두며 1승 1무를 마크, 순조롭게 최종예선을 치르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바로 숙명의 라이벌 대한민국이었고 장소는 도쿄 국립경기장이었다. 이 경기는 또한 벨마레 소속으로 브라질 국적에서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로페스 와그너의 일본 대표 데뷔전이었다.

경기는 후반 초반 야마구치의 그림 같은 로빙 슛으로 앞서 나가다가 후반 38분과 41분 서정원, 이민성에게 연속골을 얻어맞고 역전패를 당했는데 이 경기가 그 유명한 도쿄 대첩이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가모 슈 감독의 일본은 급격하게 내리막길에 접어들며 프랑스를 향한 길이 가시밭길로 변했다.

연이어 이어지게 되는 중앙아시아 연속 원정. 일본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날아갔다[4]. 전반 22분 아키타의 그림 같은 헤딩으로 선제골을 뽑아낸 일본이었지만 후반 45분 추가 시간이 시작될 무렵 카자흐스탄의 즈바레프에게 동점골을 허용 1대1 무승부에 그쳤다. 당시 주장을 맡았던 이하라 마사미의 한 마디.

이하라의 말대로 1993년 도하의 비극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는데 상황 역시 똑같았다. 다만, 도하의 기적과는 달리 일본이 전반에 선제골을 넣은 후 경기 종료까지 끌고 갔다는 점만이 차이점이다.

결국 카자흐스탄전 직후 일본축구협회 회장 나가누마 켄은 가모 슈 감독의 전격적인 경질 발표와 함께 헤드코치를 맡던 오카다 타케시의 감독 선임을 발표했다.

오카다 감독의 데뷔 경기 상대는 바로 6:3으로 승리했던 우즈베키스탄이었다. 무대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아니나 다를까 일본은 전반 31분 칸바에프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이대로라면 패배가 확정적인 절체절명의 순간 로페스가 일을 냈다. 오카다 감독의 올 아웃 어택으로 최전방까지 나와있던 로페스는 아키타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 동점골을 뽑아내며 귀중한 승점 1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곧이어 한국이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5:1로 이기는 바람에 일본의 월드컵 자력 진출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2위 경쟁을 펼치던 UAE가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하던 카자흐스탄 원정에서 3:0으로 패하며 일본에 2위 자리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음 경기가 UAE기 때문에 그 경기를 잡으면 2위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UAE는 전승을 거두고 한국이 전패하면 승점이 동률이 되어 희박하게나마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골득실에서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에 확률이 거의 없었을 뿐이었다.

뒤로 이어지는 2위 라이벌 UAE와의 홈경기, 아부다비에서는 비겼기 때문에 홈에서는 이길 것이라 자신만만했던 일본, 전반 3분 만에 로페스가 2경기 연속골을 집어넣으며 현실로 만드는 듯 했지만 전반 26분 핫산의 헤딩슛을 가와구치 골키퍼가 판단미스를 하면서 실점, 동점골을 허용했고 더 이상의 추가 득점을 만들지 못하면서 1:1, 3경기 연속으로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게다가 승점 6점짜리 경기에서의 치명적인 무승부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6] 선수들은 팬들의 투척세례를 피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7] 그 메이와쿠의 일본이 난리났을 정도니 분위기는 딱 봐도 알 수 있을 정도[8]. 참고로 이 무승부로 인해 한국의 월드컵 직행이 확정되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대한민국전과 카자흐스탄전의 두 경기를 잡지 못한다면 일본에 있어서 월드컵은 계속 비원의 꿈으로 남는 상황이었다.

1997년 11월 1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절대로 져서는 안 될 일본과 일찌감치 본선행을 확정지어 여유로운 대한민국의 두 번째 한일전이 시작되었다. 지면 탈락이라는 절박감을 안고 경기에 임한 일본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었고, 전반 1분만에 소마의 크로스를 문전에 있던 나나미가 가볍게 차넣으며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뒤이어 전반 37분 장대일의 헛발질을 놓치지 않은 소마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문전으로 올라왔고 가운데에 있던 로페스가 다시 한 번 마무리, 3경기 연속골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일본의 2:0 승리를 완성했다.

바로 다음 날 UAE가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무재배를 하는 바람에 카자흐스탄전을 승리할 경우 2위를 확정했다. 그리고 11월 8일 도쿄국립경기장 도하의 비극을 떠올리게 했던 카자흐스탄을 맞은 일본은 돌아온 '곤' 나카야마 마사시를 필두로 초반부터 맹폭을 퍼부었다. 아키타와 나카타의 연속골로 2:0으로 앞서가던 전반 44분 나카야마는 대표 복귀골을 넣고 자신의 유니폼을 들어올리는데 그 안에는 미우라 카즈요시의 유니폼이 있었다.

당시 부상과 부진으로 아예 엔트리에서 제외된 미우라를 생각한 나카야마의 세레모니였다. 경기는 이하라와 타카기의 추가골까지 터진 일본이 5:1로 완승. 최종예선 후반부를 2무 2패로 거하게 말아먹은 UAE 덕분에 2위를 확정지었다. 최종예선 B조의 2위는 이란으로 결정되었다.[9]

이 경기에서 패배한 팀은 OFC 소속의 마크 비두카, 해리 키웰 등 훗날 프리미어 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게 되는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호주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를 예정이었다. 당시 이란은 알리 다에이를 필두로 A조 1위를 차지한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오히려 전력에서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는 팀이었기에 일본 입장에서는 꽤나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사실 일본 대표팀으로서도 상당한 압박을 받던 시기였다. 불과 4년 전의 악몽의 여운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예선전 경기 내용도 좋지 않아 내외로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팬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4년 전 눈앞에 뒀던 월드컵 본선 진출권이 그대로 한국으로 넘어가 버린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까닭에 이번만은 그런 비극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랐다. 때문에 동영상에서 나온 것과 같이 일부 과격팬들은 일본 국대의 졸전에는 감정적인 대응을 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10].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제발 이번에는 본선 진출 좀 해보자!" 라는 염원은 일본 축구팬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고[11] 그런 만큼 이 경기에 대한 기대는 대단했다.[12]

3. 경기의 흐름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 플레이오프
1997. 11. 16. (일) 22:00 (UTC+9)
라르킨 스타디움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주심: 파일:UEFA ESP.png 마누엘 디아스 베가
관중: 22,000명
파일:Japan JFA 1998v2.png
3 : 2
파일:이란 국기.svg
39' 나카야마 마사시
75' 조 쇼지
118' 오카노 마사유키 (골든골)
파일:득점 아이콘.svg 46' 호다다드 아지지
58' 알리 다에이

전반 39분에 나카타 히데토시의 스루패스를 받은 나카야마 마사시의 슈팅으로 선제득점에 성공하면서 1-0으로 일본이 리드하며 전반전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하라의 수비 실책을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은 이란은 메흐디 마다비키아의 슛이 가와구치 골키퍼를 맞고 나오자, 호다다드 아지지가 그대로 밀어넣어서 동점이 되었다.

일본이 허둥지둥대는 사이에 기세가 오른 이란은 역전골까지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번에도 마다비키아가 기점이었다. 후반 14분 마흐다비키아의 크로스를 받은 이란의 축구 영웅 알리 다에이는 타점 높은 헤딩으로 역전골을 만들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후반 18분에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미우라 카즈요시와 나카야마를 교체하고, 로페스 바그너 조 쇼지를 동시에 투입시킨 뒤 3백으로 전술을 변화시켰다. 후반 31분 나카타의 크로스를 조 쇼지가 헤딩골로 연결하면서 승부는 원점이 되었다. 공중돌기 세레모니를 하는 조 쇼지 뒤로 선수들이 뒤엉켰고[13], 오카다 감독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후로 양 팀의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후반전은 2:2 무승부로 종료. 이제 골든골이 적용되는 연장전에 들어갔다. 이 때 일본은 연장전 시작과 동시에 키타자와 츠요시를 빼고, 최종예선 출전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공격수 오카노 마사유키를 투입했다. 준족인 오카노를 통해 체력이 떨어진 이란 수비진의 뒷공간을 털어보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일본은 연장 전반 두 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오카노가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오카노의 두 번의 1대1 찬스는 한 번은 아베드자데 골키퍼의 정면에, 또 한 번은 베이라바니의 클리어에 걸리고 말았다.[14] 두 번째 찬스를 놓쳤을 때 오카다 감독은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안타까움을 나타냈고 연장 전반은 종료되었다.

연장 후반, 이번에는 체력 싸움에서 우위를 보인 이란이 밀어붙였다. 그리고 연장 후반 12분 이란이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다. 마다비키아의 얼리 크로스가 정확히 알리 다에이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가와구치 골키퍼는 판단 미스로 나와있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에이의 회심의 왼발 슈팅은 골문을 넘어가고 알리 다에이는 땅을 쳤다. 당시 후지 테레비의 캐스터는 "일본 전부가 크게 간담이 서늘! 하지만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다에이의 찬스는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분 후, 나카타가 미드필드부터 천천히 드리블로 올라가다 기습적인 왼발 슈팅을 날렸다. 이미 연장전에서 어깨부상을 당해 한 팔만 쓸 수 있었던 아베드자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았지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오카노가 바로 리바운드된 공을 차 골든골을 넣으며 일본은 이란에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로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4. 경기 이후

일본은 본선에 진출해서 비록 3연패를 했지만 아르헨티나, 자메이카,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1점차 선전을 했고,[15] 특히 자메이카를 상대로 일본 국대 역사상 첫 골을 넣었다.[16]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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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의 티라면 16, 24강 본선 대회 예선은 단 한 번도 뚫지 못한 것 정도. 1998년 월드컵 이후 24개국 체제가 32강 체제로 개편되고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이 점진적으로 늘어나면서 (1986년~1994년 2장, 1998년 3.5장, 2002년~2022년 4.5장) 월드컵 본선 진출의 난이도가 쉬워진 측면은 있다. 게다가 2026 FIFA 월드컵부터 48강 본선 체제로 개편되어 아시아에 8.33장을 배정하면서 더 수월해질 것이다. [2] 저 유명한 도하의 비극에서 경기 종료 후 울음을 터뜨렸던 일본 대표팀의 주장이자 5번 선수였다. [3] 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4] 이 당시 카자흐스탄 AFC 소속이었다. 현재는 UEFA로 이적. [5] 일본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있어서 도하의 비극은 엄청난 트라우마였다. 주장이었던 하시라타니 마저 동점골이 들어간 이후, 그라운드에 쓰러져 오열을 했을 정도. 마치 독일 카잔의 비극 이후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6] 경기가 종료된 후 귀가하는 주장 미우라 카즈요시를 향해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7] 위의 동영상에서도 나오지만 준 훌리건급 반응이었다. [8] 일본 축구의 비극을 목도한 이들에게 있어 또다시 본선진출 좌절이란 참사는 보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도하의 비극때와는 다르게 일본 축구 자체의 실력 역시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보던 때였으니.. [9] 이란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1위로 월드컵 직행이 확실시되었으나 카타르 원정에서 일격을 당해 사우디에 1위를 내주었다. [10] ‘일본제일!’이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있어서 열등감을 떨칠 수 없었던 수치가 바로 ‘월드컵 본선진출이 없는 나라’란 점이었다.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옆동네도 나가는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치욕 그 자체였다. 현재 중국이 월드컵 본선진출 이뤄보겠다고 온갖 별의 별 수단을 다 써왔음에도 2002 한일 월드컵을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월드컵 본선진출이 그야말로 화중지병급에 가깝고, 이때문에 중국 축구팬들은 “우리보다 작은 대한민국과 일본도 나가는 월드컵에 우리는 못나간다. 언제쯤 우린 나갈 수 있는거냐!?!?”라고 외쳐대는 형국이니. [11] 위의 동영상에서 나오다시피 한 여성 팬이 두 손 꼭 모아 간절히 기원했을 정도로 일본 축구팬들은 본선 진출에 목말라 했다. 그렇기에 오카노의 연장 결승골이 들어가는 장면을 시청했던 많은 팬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감격해 하거나 감정에 복받혀 오열했고 만세삼창까지 하는 등 각양각색의 반응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12] 어느 나라라도 마찬가지지만 월드컵 본선 진출의 의미는 무척이나 크고 특히 첫 출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전세계적인 대회, 그것도 인기 최고의 구기인 축구를 바탕으로 하는 범지구적 축제에 선택되어 출전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경사 중의 경사인 것이다. 당장 2018 러시아 대회에 첫 출전한 파나마는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국경일로 선포할 정도였다. 한국도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무려 32년만에 월드컵 복귀에 성공해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거의 전부가 아직 나가보지도 못해(인도네시아가 1938년 프랑스 대회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란 이름으로 출전했던것이 동남아시아 국가및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본선진출이었다.)꿈에서나 그려볼 무대를 처음으로 나간다는 그 희열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일본은 월드컵 단독 개최를 추진하다가, 월드컵 본선 진출도 못 한 나라가 돈으로 진출권 사려 한다며 비난받자 한일 공동개최로 물러선 아픔이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자존심 강한 중국도 2002 한일 월드컵 첫 진출 이후 현재까지 월드컵 본선에는 가보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13] 일본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일본 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기뻐하며 "조~쇼지!"를 외쳐댔다. [14] 위의 동영상에서도 나오지만 사실 이때는 오카노가 직접 슛으로 골을 넣는게 정석인 상황이었다. [15] 크로아티아가 8강에서 독일을 3:0으로 대파하며 올라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처녀출전국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16] 다만 자메이카는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현재까지 월드컵 출전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17] 홈에서 1:1, 원정에서 2:2로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진출했다. 호주는 2006년까지 OFC 소속이었다. [18] 참고로 뒤에서 1위는 공교롭게도 이란의 월드컵 첫 승 제물이 되어버린 미국이다. [19]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한국에서도 현지화되어서 방영되었는데, 도하의 기적과 관련된 내용은 당시 한국 실정에 맞게 2002 한일 월드컵과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었다. 한국에는 이 에피소드가 2004년에 방영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