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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7:41

전경무

파일:전경무.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0년 10월 18일
황해도 곡산군
사망 1947년 5월 29일
일본 후지산 부근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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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전경무는 1900년 10월 18일 황해도 곡산군에서 아버지 전낙준(田洛俊)과 어머니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곧 평안북도 정주군 아이포면으로 이주하여 이 곳에 본적을 두었다. # 그는 1906년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하와이로 이주했고, 이후 미국 본토로 건너와 미국인에게 입양되어 정식 교육을 받고 고학으로 미시간 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전미 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자동차 도장업을 시작하여 상당한 수익을 얻는 등 한국인 사이에 장래있는 청년으로 촉망받았다.

그 후 1931년 4월 하와이 가와이섬에서 현순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을 목적으로 단합회(團合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자,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었다. 이때 전경무는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1942년 5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전체위원회를 열고 임시정부의 동의를 얻어 원동(遠東) 지역과 미주간의 장래 민족운동 정책에 관한 협정을 위해 중국 중경(重慶)으로 특파원 파견을 결정했다. 이에 전경무는 김호와 함께 충칭 특파원으로 선출되어 임무 수행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계열이 이에 반발하여 1943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또한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워싱턴에 개설하고 그를 외교원으로 선임하여 외교사무를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외교부가 2개나 생겨버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그해 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참석하여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새로 조직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외교위원장 비서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정한경, 유일한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또한 그해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평화를 준비하기 위해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가 개최될 것을 안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파견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전경무는 1946년 1월 조국이 재건후원을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의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40여년 만에 조국에 돌아왔다. 이후 그는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한국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1947년 6월, 그는 여운형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IOC 가입 정당성을 설득했다.

미국 정부는 이에 협조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전경무는 1947년 5월 29일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미 군용기를 타고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이원순이 그를 대신하여 IOC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이 런던 올림픽에 참석하는 데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전경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