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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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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a-reconquista.jpg

1. 개요2. 배경: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3. 재정복
3.1. 발단3.2.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
3.2.1. 알 만수르의 반격
3.3. 타이파 분열기와 가톨릭 국가들의 성장
3.3.1. 톨레도 함락 ( 1085년)
3.4.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3.5. 십자군 열기와 가톨릭 국가들의 남진
3.5.1. 사라고사 함락3.5.2. 리스본 함락
3.6.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3.7. 가톨릭 국가들의 대공세3.8.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노력: 마린 왕조3.9. 공수의 역전: 세우타 함락 (1415년)3.10.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
3.10.1. 1492년 마무리: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
4. 결과5. 영향
5.1. 레콩키스타 이후의 가톨릭 국가 스페인5.2. 스페인 제국 정복과의 연관성5.3. 그럼에도 청산 불가능한 이슬람 문명의 영향5.4.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5.5. 인종적 교류
6. 기타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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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콩키스타의 1분 전개.
레콩키스타(Reconquista)[1]는 '재정복(reconquest)'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베리아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어로는 스페인어의 전동음 r이 구개수음이라 헤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한다.

학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레콩키스타의 전 과정을 단일 전쟁으로 본다면 역사에 기록된 전쟁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이 된다. 그 기간이 무려 781년에 달하기 때문이다. #

서고트 왕국 멸망 후 세워진 가톨릭 왕국들[2]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밀려서 이베리아반도 북쪽 작은 영토만 남기고 축소되었는데 이후 이슬람 세력의 전성기에도 근근히 버티다가 내전과 정권 싸움으로 약해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게 된다. 이러한 수백 년 동안의 과정을 총칭하는 단어다.

그래서 국토회복운동이라고도 한다. 711년에 시작하여 포르투갈에선 1249년 알가르브 함락, 스페인에선 1492년 나스르 왕조의 멸망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백년전쟁처럼 실제 그 기간 동안 큰 전투들 위주로 계속된 것은 아니다. 게릴라 형태의 소규모 전투들도 잔잔히 계속 이어졌으며 십자군 전쟁 시기와 맞물려 성전으로 취급되었다.

2. 배경: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

이베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서고트 왕국은 내분을 틈탄 무어인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다. 당시 서고트 왕국은 서고트 왕국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복잡한 정치 체계 때분에 내분이 잦았고 많은 외적과 싸우느라 힘이 소모된 상태였다. 게다가 내전으로 인해 무어의 편을 든 배신자 귀족들이 있었고, 기병이 너무 적었고, 해군이 전무해서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 과달레테 전투 이후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끝내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내몰릴 지경까지 간다.

무어의 본거지였던 북아프리카는 로마 이전 시절부터 이름 높은 말의 산지였다. 반면 이베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고원 지대라 기병을 키우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해군의 육성은 안정적으로 국경을 방어할 규모의 육군이 갖춰진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당시 여러 외적과의 전쟁과 내전으로 육군의 소모가 심했던 서고트는 해군까지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무어는 해군, 정확히는 해적이 강했는데 로마 제국 시절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베르베르인들과 아랍인들은 11세기 전까지는 관개 수로를 잘 사용하지 못해 농업 기반이 열악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가까이 있던 스페인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도 그 중 하나로, 이러한 해적 행위 자체가 이후 국가 기간 산업 중 하나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한편 이베리아 이슬람 제국이 점령한 이후 이 동남부 해안에 대한 해적질은 금지되는데 이는 동남부의 영주들인 아랍인들과 해적질을 하던 베르베르인들 간의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3. 재정복

3.1. 발단

파일:external/i62.tinypic.com/zn0d2c.jpg

722년 피레네 산맥 기슭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300명의 서고트 잔존 세력이 2,000명가량의 아랍 군대의 침공을 막아낸 코바동가 전투(Battle of Covadonga)의 승전으로[3] 서고트 왕국의 피난민들은 명맥을 존속할 수 있었고, 이후 이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살아남은 서고트족들이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하여 이베리아 북서부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4]의 규모나 군사적 위상은 이베리아를 장악하던 이슬람 왕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이슬람 왕국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는데, 첫째 이유는 카탈루냐 일대를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크 왕국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이슬람 왕국 내부에서의 분열, 특히 그리스도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이베리아를 점령한 이슬람 왕국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성당들을 파괴하거나 모스크로 바꾸어[5]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를 드리기 힘들게 했고, 개종했는데도 종교세를 내라고 하거나[6], 반발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공개처형 및 직위와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박해를 가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거들었다.[7]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고 813년의 코르도바 반란이나 912년의 팜필로나 반란 등의 크고 작은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를 통제당해 무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이슬람 왕조들은 쉬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들의 반란은 달랐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 계열 왕조였고,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들도 다들 아랍인들이었으나, 일부 호족이나 대부분의 군인들은 베르베르인이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인들을 야만인이라면서 극도로 무시했다. 베르베르인들은 아랍인들이 안전한 후방에서 성이나 지키는 동안 그리스도인들과의 최전선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보상은 아랍인들에 비해 적었으며[8], 심지어 종교세도 강요받아야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때 베르베르인들은 무슬림들이었다.

아랍인들의 이러한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들고 일어났으며 739년, '귀족 전쟁'이라 불리는 내분을 이베리아 반도 각지와 마그레브 지역에서 전개한다. ( 베르베르 대항거) 이러한 내전은 743년까지 이어졌고, 우미이야 왕조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아랍 군대들은 베르베르 반군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만 마그레브 지방은 위낙 넓은 데다가 베르베르의 홈그라운드니만큼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고 만다. 그 와중에, 스페인의 베르베르 귀족들이 귀족 전쟁에 참여하느라 군대를 움직인 틈을 타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토질이 척박하여 무어인들이 방치하던 텅 빈 갈리시아 지방을 접수한다. 이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귀순해오는 모사라베들을 갈리시아에 정착시켜 인구를 늘려나갔다.

3.2. 후우마이야 왕조와 전선의 교착

파일:PENINS~1.png
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파일:Map_Iberian_Peninsula_910-es_svg.png
910년의 이베리아 반도[9]

하지만 756년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알안달루스로 피난 온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인 아브드 알 라흐만이 혼란스러운 알안달루스를 안정화시키고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면서 한동안 가톨릭 세력의 남진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은 도루(Douro)[10] 강을 사이에 두고 수백년 간 대치하였고 10세기경부터 후우마이야 왕조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가톨릭 세력은 다시 남진을 시작하였으나 이때 후우마이야 왕조에 알 하지브 알 만수르라는 걸출한 재상이 등장하였다.

알만수르는 후우마이야 왕조 최후의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비틀거리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일시적이나마 다시 안정화시키고 레온과 나바라, 아라곤에 대한 여러 차례의 지하드를 개시하였다. 가톨릭 왕국들은 알만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8세기경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교도들에게 이베리아를 내어주는 상황의 데자뷰 같은 모습이었다.

3.2.1. 알 만수르의 반격

파일:Map_Iberian_Peninsula_1000-es_svg.png
★서기 1000년의 이베리아 반도

알 만수르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985년 바르셀로나를 불태우고, 988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을 불태웠다. 997년에는 이베리아 가톨릭의 최대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공격해 도시를 불태우고 유명한 대성당은 문과 종을 떼어내 코르도바의 모스크[11]를 장식하거나 녹여서 촛대로 만드는 등 가톨릭세력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었다.[12]

하지만 1002년 알만수르가 죽고 쇠락해가는 왕조를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후우마이야 왕조는 1031년 멸망하게 되고 이후 알안달루스는 타이파(طائفة)라는 소규모 왕국들로 분할되어 가톨릭 세력에 각개격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축출되는 1492년까지의 역사는 위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력한 이슬람 왕조가 나타나 가톨릭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지만, 얼마 안 가 붕괴된 후 타이파 시대가 시작된다. 그 후 가톨릭 세력은 타이파들을 각개격파하고 남하한다. 그리고 다시 이슬람 왕조가 역습을 했다.

3.3. 타이파 분열기와 가톨릭 국가들의 성장

파일:Map_Iberian_Peninsula_1030-es.svg.png
1030년의 이베리아 반도
파일:800px-Map_Iberian_Peninsula_1037-es_svg.png
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 카스티야 & 아라곤의 등장
파일:Europe-south-west-kingdoms.png

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하나의 도시와 그 주변 배후지를 기반으로 하는 작은 토후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런 토후국들을 타이파 국가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분파" 혹은 "파당"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상황은 고대 말 그리스의 폴리스들의 상황이나 근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의 상황과도 비슷했다. 각 타이파 국마다 지도자들의 배경도 달랐는데, 아랍계 베르베르계 외에도 슬라브계 맘루크 출신 타이파들도 많았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은 이런 무슬림 소국가들을 압도하면서 이른바 "보호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다. 북부의 가톨릭 국가들은 타이파 국가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일 때 가톨릭 왕국에서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금화를 조공받거나 혹은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금화를 받기 시작했다. 타이파 국가끼리 전쟁을 벌일 때는 한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 쪽 영토를 조금씩 점령하는 식으로 무슬림들이 장악하는 전체 영토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3.3.1. 톨레도 함락 ( 1085년)

톨레도 함락은 레콩키스타 가속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인 알폰소 6세에 의해 톨레도가 함락된 것은 1061년 코임브라 재정복이 포르투갈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된 것처럼[13] 스페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톨레도는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 고원 메세타의 최고 핵심 전략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카스티야에게 넘어간 건 가톨릭 세력의 진출에 분수령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또한 톨레도 함락과 함께 거의 같은 시기 십자군 전쟁이 선포 되면서 11세기는 레콩키스타라는 하나의 국가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분수령이 된 시대였다.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가톨릭 국가들의 연속체로서 '서고트 왕국 → 아스투리아스 왕국 →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이어지는 중부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조 국가로서 계승성을 표명한 사료는 9세기의 알베다 수도원 연대기(Crónica Albedense)밖에 없었고, 다른 사료들은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가톨릭의 이베리아 반도 '수복'이란 의식을 딱히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실제 정치판에서 이 시대는 바로 다름 아닌 엘 시드의 시대. 당장 권력과 이익만 맞아 떨어지면 반도 북부의 가톨릭 소국들과 분열해가는 알 안달루스의 타이파 세력들이 종교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쓰고 지극히 실리적인 현실정치(realpolitik)를 따르던 시대다.

그러나 톨레도가 함락되고 교황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사하는 건 레반트 성지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다툼에 종교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자 레콩키스타는 가톨릭 왕국들이 하나의 초월적, 역사적 사명이자 성전으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교황은 가톨릭 왕국들에게 레콩키스타가 곧 십자군 전쟁이므로 군인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톨레도 함락 이후 약 반 세기 뒤 쓰여진 알폰소 7세 시절 쓰여진 황제 알폰소 연대기(Chronica Adefonsi imperatoris)를 기점으로 이 이후 연대기와 사료들은 강렬한 종교적, 지정학적 성격을 띄게 되며 무엇보다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중심으로 국체의 기원을 아스투리아스를 넘어 서고트 왕국에서 찾으며 단순한 종교적,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한때 가톨릭 세계에 속했던 고토의 회복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흔히 불가분의 관계로 말하는 스페인 국가적 민족주의와 전투적 가톨릭 신앙의 일치화가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를 잡게 된 것이다.

3.4. 무라비트 왕조의 반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Almoravid-empire-en.svg.png

이베리아의 군소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의 맹공을 견디지 못했고 사라고사의 알 무타미드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는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유수프는 1086년 사그라자스 전투에서 가톨릭 군세를 격파하고 후계자가 죽는 바람에 한번 돌아갔지만 1090년에 돌아와 타이파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명목 하에 그들을 강제로 병합, 알 안달루스 전체를 다스리게 된다. 무라비트 왕조는 이후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엘 시드가 단독으로 점령했던 발렌시아도 1102년에 탈환하며 레온-카스티야 왕국을 밀어붙인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가까스로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우클레스 전투에서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잃는 바람에 딸 우라카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관이 이브레아(보르고냐)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140년대까지 무라비트 왕조와 가톨릭 국가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처음에는 1134년 파가 전투에서 무라비트 왕조가 승리하고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를 살해하는등 무라비트 왕조가 우세했지만 무와히드 왕조에 의해 무라비트 왕조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가톨릭 세력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3.5. 십자군 열기와 가톨릭 국가들의 남진

3.5.1. 사라고사 함락

파일:Taifa_de_Zaragoza_1080,svg.png
아라곤 왕국 우에스카(1096), 사라고사(1118), 토르토사(1148), 예이다(1149)를 차례로 점령했다.

파일:aragon flag.jpg
후우마이야 왕조가 파토난 1018년부터 1110년까지는 사라고사에 따로 타이파국이 세워져 번영을 누렸으나, 무라비트 왕조가 이 지역의 타이파를 무찌르고 정복하였고, 그 후 8년만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점령한 후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타이파의 궁전이었던 알하페리아(Aljaferia, 아랍어 발음으로는 알 자으파리아) 건물은 후에 아라곤 왕국의 왕궁으로 쓰여오다가 현재는 아라곤 주 의회의 건물로 쓰고 있다.

3.5.2. 리스본 함락

1108년 시구르 1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이 도시를 함락시켰으나 3년 만에 무라비트 왕조가 도시를 탈환하였다. 이후 1147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가 도시를 재정복하였다. 1147년 7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펼쳐진 공성전에는 포르투갈 병력 7,000명에 잉글랜드에서 온 십자군 6,000명에 독일에서 온 십자군 5,000명, 플랑드르에서 온 십자군 2,000명이 가담했다고 한다. 도시를 방어하던 바다호스 타이파국은 넉넉한 방어 병력(15,000명 정도로 추산)에도 불구하고 무라비트 왕조와 싸우는 와중에 십자군의 포위 공격까지 받자 버티지 못하고 도시를 내주고 말았다.

3.6. 무와히드 왕조의 반격

이번에는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킨 무와히드 왕조가 1149년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정복하고, 1172년 무슬림-스페인 영토의 레콩키스타로 빼앗긴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였다. 1195년 카스티야 왕국은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대패했고, 가톨릭 국가들의 세력은 크게 꺾였다. 하지만 무와히드 왕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가톨릭 국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로간의 반목을 잠재울 기회를 얻었다. 또한 무와히드 왕조는 반복되는 북아프리카에서의 반란과 가톨릭 국가들의 공격으로 계속해서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3.7. 가톨릭 국가들의 대공세

파일:alandaluz1160.jpg
1160년의 이베리아 반도.

3.7.1.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1212년)

파일:506-Castile_1210.png
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1211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알 나시르는 가톨릭 국가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역대 최대의 병력을 이끌고 알 안달루스에 출정하였다. 그러나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군은 숫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가톨릭군에게 대패했고, 이 결정적인 전투를 기점으로 무와히드 왕조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가톨릭 세력에게 넘어갔다. 그 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1236년 한 때 알 안달루스의 중심지였던 코르도바를 함락하고 12년 후 여세를 몰아 세비야까지 함락시켰다. 무와히드 왕조 붕괴 이후 다시 등장한 타이파들은 레콩키스타 세력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249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3세가 포르투갈의 마지막 이슬람 거점이던 파루를 함락시키면서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끝을 맺었고 나머지 타이파들 역시 1270년대까지 모두 멸망하여 카스티야나 아라곤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측출되지는 않았다. 1232년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카스티야 왕국에 예속되는 것을 조건으로 그라나다에 나스르 왕조를 창건했기 때문이다. 나스르 왕조는 이후 1492년까지 근근히 살아남아 알 안달루스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3.8.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노력: 마린 왕조

1264년 가톨릭 왕국 영토의 무슬림 신민 무데하르들과 나스르 왕조의 무슬림 및 마린 왕조의 군대가 일제히 들고 일어나 레콩키스타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마린 왕조 군대가 카스티야-레온 왕국 군대에게 격퇴당하면서 봉기는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코르도바와 세비야에 거주하던 무슬림 무데하르들은 대부분 추방되었고, 북부 그리스도인 이주민들이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1275년 마린 왕조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알헤시라스 지방을 나스르 왕조로부터 양도받은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 남부의 몇개의 도시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1340년 살라도 강에서 카스티야 왕국이 마린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3.9. 공수의 역전: 세우타 함락 (1415년)

1415년 마린 왕조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서 포르투갈 왕국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세우타를 점령하였다. 1418년 마린 왕조는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이것을 서구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3.10. 대항해시대와 그라나다의 연명

3.10.1. 1492년 마무리: 알함브라를 떠나는 무어인들

1469년에 아라곤 왕국의 왕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이 결혼하며 양국의 연합이 가시화 되었다. 그리고 1474년에 이사벨이 카스티야 왕이 되자 페르난도는 공동왕이 되었고 1479년,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하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이 탄생하였다. 교황은 그들에게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주며 그라나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482년, 그라나다 왕국( 나스르 왕조)의 술탄 핫산에게 페르난도 2세는 평화를 대가로 조공의 양을 늘리라 요구했다.

애초에 강경파에 속했던 핫산은 그에 불복하였고 조공 비용으로 무기를 제작했다. 이에 카스티야 군대가 그라나다 겨우 30여 km 떨어진 알하마를 공격했다. 그러자 그라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나 핫산이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인 보압딜이 무함마드 12세로 즉위했다. 한편, 핫산은 동생인 엘 사갈의 영지인 말라가로 피신했다. 이후 그라나다와 말라가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핫산은 가톨릭 군대와 연합해 보압딜을 패배시킨 후 복위하였다. 그라나다 내전을 틈타 카스티야 군대는 그라나다 왕국 깊숙히 진격했다. 1484년 6월에 알하마, 같은 해 9월에 세테닐이 함락되었다.[14] 동시에 페르난도 2세는 보압딜을 석방하며 그라나다 내전을 재차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1485년 5월, 그라나다 왕국의 서부 요충지인 론다가 함락되었고 이에 핫산은 재차 폐위되었다. 그리고 그의 복위를 도왔던 동생인 엘 사갈이 무함마드 13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 역시 1486년에 로하, 그리고 결정적으로 1487년 8월에 그의 세력 기반이던 말라가를 상실하자 폐위되었다. 따라서 그의 조카인 보압딜이 복위하였고 카스티야 군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489년에 바자[15]와 알메리아까지 함락되며 무함마드 12세의 영토는 그라나다 일대로 축소되었다. 무함마드 12세는 페르난도 2세에게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켰으나 돌아온 대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그라나다의 도움 요청은 모로코, 이집트 등지에 전해졌고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파병하진 않았다.[16]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1491년 4월에 그라나다 포위가 시작되었고 8달이 흘렀다. 그라나다의 식량이 떨어지자 무함마드 12세는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은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항복했으며, 11월 25일에 가톨릭 국왕들과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하였고 페르난도 2세는 무함마드 12세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1492년 1월 2일에 성문을 나와 선조들의 땅인 북아프리카로 향하니, 782년간 지속된 스페인에 대한 이슬람 지배의 종결이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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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어인들은 베르베르인에게 남쪽에서 털리고 북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털리는 양상의 반복 끝에 축출되고 말았는데, 무어인들은 가톨릭 왕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을 세운 베르베르인들에게 같은 이슬람 형제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오히려 베르베르인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알안달루스의 무어인에 비해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베르베르인들은 무어인들이 이룩한 문화재를 훼손하였으며, 무와히드 왕조가 가톨릭 왕국에게 참패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중단되었으나 레콩키스타를 저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인구에서도 여전히 가톨릭 왕국한테 열세였다. 결국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왕국들은 차례차례 가톨릭 왕국들에 정복당했고 1492년 1월 2일에 그라나다의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 1세(카스티야), 페르난도 5세(아라곤)에게 항복하여 나스르 왕조가 멸망하면서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었다. 위의 그림은 그라나다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하는 무함마드 12세와 그 휘하의 이슬람 교도들을 이사벨 1세 페르난도 5세가 불러세워서 함께 살아갈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다. 무함마드 12세는 이를 거부하고 아프리카로 물러났다.[17][18]

레콩키스타는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당시에는 십자군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며 교황도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국들은 동방으로 가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실제로 2차 십자군 지나가던 길에' 이슬람 세력의 거점이었던 리스본을 함락시키고 가기도 했다.

5. 영향

5.1. 레콩키스타 이후의 가톨릭 국가 스페인

한때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체가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스페인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개종했고, 레콩키스타 이후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더욱더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 국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지의 유대인이나 무어인을 철저하게 추방하려고 했다. 무어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를 부여받으며 무슬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무어인들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에는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0,000명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이 추방되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 소위 전문직에 종사하던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의 대량 추방으로 인해 스페인은 종교적 열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세울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경제와 사회 구조가 무너졌다. 당장 <알함브라 칙령> 이후에도 지역 농민 인구의 과반수 가까이가 개종한 무어인, 즉 모리스코였던 발렌시아 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노동 인구부터 급격히 감소했으며 이렇게 경제적 활동도 종교에 따라 분화되어 있었던 이베리아반도에서 전문직들이 다 추방당하자 스페인 고유의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졌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의 첨병에 나서 엄청난 양의 귀금속과 이에 맞추어 부상한 카스티야의 양모,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등 산업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유통하고 관리할 금융, 상업 계층의 부재로 인해 전부 제노바 공화국에 아웃소싱할 수 밖에 없었다. 당장 필요한 자금줄과 상업 행위에서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대신 제노바 상인들은 카스티야 내부 많은 지방의 조세권부터 시작해 왕실 소유였던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의 경제적 이권 등을 철저하게 챙기며 장기적으로는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점차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페인 제국은 그 이전 중세의 종교적 공존, 즉 콘비벤시아(Convivencia)를 박멸하면서 전성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 몰락의 장기적인 원인 중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의 상실에서 기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고찰 대상이다.

지금이야 그라나다 함락을 레콩키스타의 끝으로 인식하고는 있지만[19], 당시에는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로마의 영토였던 마우레타니아, 즉 모로코 + 북알제리 + 서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이 완료되지 않는 한 진정한 레콩키스타의 완료가 아니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왕과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스페인의 첫 번째 공주 이사벨[20]을 포르투갈 왕가의 계승자인 아폰수에게 시집보내 포르투갈 + 카스티야 + 아라곤의 모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진정한 스페인의 왕을 만들기로 합의했으며 실제로 둘은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졌지만 아폰수는 어처구니 없이 사망했고[21] 이사벨은 슬픔에 빠져 재혼을 거부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은 두 왕가는 알폰소의 동생[22] 마누엘과의 재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마누엘과 재혼한 이사벨마저 남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어 버렸다. 다행히도 아이는 살아남아 '미겔'[23]이라는 이름을 받고 진정한 스페인의 왕이자 평화를 가져올 자로써 추앙받아 평화왕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그라나다에서 어렸을 때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부부왕의 아들인 후안도 요절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 진정한 스페인이라는 원대한 꿈은 산산히 흩어지고 말았다.[24] 그리고 합스부르크 황실로 시집 간 부부왕의 둘째 딸 후아나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이어 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제나 튀니스 등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한편, 북아프리카의 몇몇 항구 도시들을 지배하에 두는 등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지만,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왕국을 함께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황가의 세력을 경계하여 계속해서 덤벼드는 바람에[25] 국력 대부분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쏟아부었고 영토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아무 소득 없이 스페인의 국력을 소진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1580년에 포르투갈 왕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아비스 왕가의 대가 끊기고[26] 마누엘 1세의 외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에 오르면서[27] 이베리아 반도의 재통합이 다시 한번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동군연합을 주도한 스페인 측의 학정이 이어지면서 결국 스페인의 지배에 질려버린 포르투갈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발발해 카타리나의 손자였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즉위하여 포르투갈에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베리아의 재통합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는 과거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진정한 통합[28]과 평화왕을 그리워하며 ( 지브롤터의 탈환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한 나라로 통일하지 않는 이상 레콩키스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1975년 스페인 왕정복고 당시 포르투갈 총리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스페인에서 있었다. 물론 이런 낭만주의적 역사관이 있고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자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실제 이베리아 반도의 현실적인 정치, 사회, 종교적 인식관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요즘 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합하고 다시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면 정신나간 또라이 + 미치광이 혹은 파시스트 제국주의자 취급받게 될 것이다. 큰 의미에서 과거사 인식이 그렇다는 거다.

5.2. 스페인 제국 정복과의 연관성

콩키스타도르와 레콩키스타는 그 어원을 봤을 때 실제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데 두 단어의 어원 자체는 스페인어로 '정복하다'를 뜻하는 conquistar(콩키스타르)에서 같이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레콩키스타가 끝나면서부터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콩키스타도르가 나타난 것도. 단적으로 레콩키스타 당시 그리스도교 국가들, 특히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수호 성인이자 주된 공경 대상이었던 붉은 칼십자가가 새겨진 백색 망토를 두르고 무어인을 짓밟는 기사로 표현된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형상, 즉 무어인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omoros)의 신앙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콩키스타도르들 사이에서 똑같은 기믹에 대상만 바뀐 인디오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indios)란 형상으로 공경받았다.

레콩키스타 종결 직후부터 열린 바닷길로 인해 스페인인들이 아시아 지역으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인 가톨릭을 아시아에도 전파하고자 시도했다. 훗날 카쿠레키리시탄이 되는 센고쿠 시대 일본 가톨릭의 시작, 그리고 명나라와 깊게 연관을 맺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레콩키스타의 여파는 동북아시아에도 상당히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선교사들은 전국시대 일본 다이묘들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이들을 지원하며 일본 또한 장기적으로 가톨릭화하려고 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명나라 조정과 조력하며 선교를 시도했다. 심지어 조선과도 일부 연관이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임진왜란마저도 조선, 나아가 중국을 가톨릭화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일본의 침략에 조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쟁을 지원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자 마지못해 협력하며 하다못해 따라가서 선교라도 하자는 상황에 가까웠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임진왜란의 무익함을 비판하는 편지와 기록들을 남겼고[29][30] 실제로 제국주의 시기 대부분의 선교가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세속 정부를 말릴 힘이 없으니 따라가서 선교라도 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31] 어찌됐든 당시 일본군의 주력을 구성하던 서부 일본 다이묘들 중 일부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선교사들은 그들을 지원하면서 조선에 따라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면서 스페인-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생각한 '극동의 콩키스타'는 실패로 끝났다. 일본에 대한 가톨릭화도 스페인인들과 가톨릭 다이묘들의 노예무역에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도 막부가 제동을 걸면서 중단되었다.

근대 들어 스페인 극우 일각에선 스페인 내전 당시 이를 또 빨갱이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rojos)로 기믹을 또 바꿔 푸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안 그래도 반프랑코 진영에서 열렬하게 띄운 가톨릭 스페인을 수호하겠다고 내전을 일으킨 자들이 바로 그 북아프리카 무어인 용병들을 끌고 와 스페인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선전 메세지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게 됐는데 저건 프랑코파 본인들이 생각해도 너무 오바다 싶었는지 조용히 묻혔다.

5.3. 그럼에도 청산 불가능한 이슬람 문명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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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를 두는 유대인 무슬림.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전쟁기에 이슬람권에서 유럽으로 전래된 놀이다.

파일:averroes-and-porphyry.jpg

서유럽인 제자를 가르치는 이븐 루시드.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세 초기의 선진 이슬람 문화를 공유하던 알 안달루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물론 더 나아가 당시의 서유럽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슬림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연구한 대학자 이븐 루시드의 문서를 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이븐 루시드가 재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고 또 반박하면서 중세 서양 철학을 다듬어 나갔으며 알 안달루스의 수학과 천문학, 연금술, 의학 등은 중세 초 많은 서유럽 지식인들이 공부했다. 레반트 헬레니즘 문명을 통해 이어진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학, 철학, 공학 등은 지정학적 입지와 이슬람이란 종교가 제공하는 넒고 다양한 문명, 사회간 문화적 일치감을 제공한 중세 이슬람 제국 쪽이 서로마 제국 멸망 전후로 혼란을 겪은 서유럽보다 상대적으로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물론 옛 근세 서구인들이 중세를 암흑시대로 폄훼하면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즉시 서유럽 전체가 미개의 상태로 빠져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그저 계몽주의시대에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근세/ 근대 학자들의 시각에 불과하며, 유럽에서도 로마 문명의 유산이 꽤 잘 계승되긴 했으나, 중세 초기에 잦은 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많이 유실되긴 했다. 그러나 절대로 미개의 상태로 빠져든것은 아니였으며, 이후 서유럽은 천천히 발전하며 로마 제국의 유산과 기독교문화, 게르만족의 문화와 그외 현지 민족들의 문화, 그리고 지역적/정치 및 사회적 특색이 혼합된, 로마 제국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들을 계속해서 꽃피워왔다.

아무튼, 아무리 철천지 원수의 것이라도 당장 배우면 이득이 되는 기술인데 800년 가까이 공존하면서 아예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쓰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서 최초로 도입한 곳이 바로 레콩키스타 당시의 이베리아 반도다. 물론 레콩키스타 이래 스페인에서 가톨릭 교조주의가 수백 년 동안 기승을 부리면서 아랍-이슬람 문화와 유대 문화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지만 당장 전통 민요, 춤, 음식, 농경, 미술 등 일상 사회 문화에 밀접하게 녹아든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전적으로 청산한다는 건 불가능했고 오히려 그 청산을 주도한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들도 이슬람 문명의 유산은 취사선택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장 가톨릭 교권 민족주의의 전성기였던 15~17세기, 가톨릭 공동왕-압스부르고 왕조 시절 지어진 왕실•대귀족의 궁전, 고위 성직자들의 주교궁들만 하더라도 어디 관광 책자에 명함 내밀 만한 명소면 빠짐없이 모스크에서 많이 보이는 기하학적 패턴인 아라베스크로 장식된 천장들이 빠짐없이 나온다. 유명한 플라멩코부터 카스티야, 아라곤 등 중부 고원 지방의 펄쩍 뛰면서 추는 전통 춤인 호따, 파에야 같은 유럽에서 흔치 않은 쌀 기반 요리까지 일상 민속 문화에도 아랍인들의 영향은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그나마 이슬람의 지배를 거의 받은 적이 없는 칸타브리아 산맥 이북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지방에서나 민속 문화가 별로 이슬람하곤 상관 없고 오히려 고대 켈트족의 영향력이 더 드러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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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최고 수석 주교좌 성당인 톨레도 대성당에 있는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 시절 지어진 성당회의실(chapterhouse).[32]

"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아랍-이슬람 문화 잔재에 대한 청산이 가속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스페인어에 남아 있는 아랍어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후우마이야 왕조 시절에는 모사라베(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 상당수가 아랍어를 일상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이런 그리스도인 중에는 라틴어를 몰라서 아랍어로 미사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 스페인어에 남은 아랍어의 깊은 영향력은 16세기 고전소설인 《 돈키호테》부터 돈키호테 산초 판사에게 "우리 말 중에서 alfombra(카펫), alcazar(왕궁), arroz(쌀), almohada(베개) 같이 al-로 시작하는 단어는 전부 아랍인들에게서 온 것이란다."라고 가르쳐 주는 대목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돈키호테》 자체도 세르반테스가 특유의 메타픽션 구조로 쓰면서 중간의 '번역자'로 설정한 캐릭터가 아랍인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일 만큼 당시 정치적으론 적대하는 관계였어도 문화적으로는 짙었던 이베리아 무슬림 문화의 영향도 깊게 다루고 있다.[33]

심지어 오늘날의 스페인(카스티야-안달루시아)인들조차도 alcalde(시장님)이 다스리는 도시에서 tarifa(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며 almacén(가게)에 가서 almuerzo(점심)로 먹을 arroz(쌀)을 사고 건물주에게 alquiler(월세)를 내며 alcancía(저금통)에 돈을 넣어두고 alarife(건축기사)가 almoneda(경매)에서 낙찰받아 지은 alfombra(양탄자)가 깔린 alcoba(침실)에서 algodón(솜)을 누벼넣은 almohada(베개)를 베고 잔다. 아랍어를 아무리 청산하려고 해도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쓰는 말들이기 때문에 청산할 수 없었으며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스페인어 문법사 ojalá[34]는 아예 원래 뜻 자체가 '알라이시여 제발!'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이슬람을 싫어하던 나라의 언어에 알라의 이름이 고스란히 들어간 문법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스페인에는 알 안달루스의 유명 이슬람 건축물의 건축 양식을 재해석한 알무데하르(Almudejar) 건축 양식이 있는데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사조 때부터 나머지 유럽과는 다른 스페인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을 때마다 정부 기관에서 기차역, 일반 상업 빌딩까지 채택한 양식이다. 현대에 와서도 프랑코 정권 시절 국가 주도 관광 사업 프로그램의 구호마냥 '스페인은 (나머지 유럽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마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네오무데하르 건축물을 들이민다. 다른 유럽인주로 프랑스인들이 '(유럽도 아닌) 아랍 종자' 운운하면 발끈하며 아랍인 살해자 형상의 성 야곱을 민족주의적 상징물로 숭상하면서도 반대로 문화적인 면에선 바로 '나머지 유럽과는 뭔가 다른 점'을 오히려 본인들이 적극 수용하고 내세우는 이중적이면서도 복잡미묘한 현대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자기 인식을 만든 것이 레콩키스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4. 종교적 공존과 충돌 사이

중세 초기 스페인은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한 국토 안에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문화(多文化) 사회였다. 그러나 각 문화 간 통합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코란》은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이 "성서의 민족들"(Peoples of the Book)이므로 관용을 베풀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관용은 제한된 것이었고 ㅡ 이슬람 지배하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교회를 지을 수 없었고, 교회의 종을 울릴 수도 없었으며, 공적인 종교 행렬을 거행할 수도 없었다 ㅡ 때로는 완전히 무시되기도 했다. 1066년 그라나다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져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1126년에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로코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알-안달루스의 아랍 문학작품에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중세 이슬람 스페인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관용적인 사회였다는 주장은 근대시대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기독교도 지배하의 무데하르나 유대인들의 처지도 그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효용성 때문에 마지못해 관용되었다. 즉 그들은 기독교도들에게 유용한 존재인 한에서 관용되었던 것이다. 세비야는 이 점에서 좋은 예를 제공한다. 1248년 페르난도 3세의 "인종 청소"는 세비야를 순수한 기독교도들의 도시로 만들려는 의도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수년 후에는 이교도들을 쫓아내고 기독교도 정주자로 그들을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 있는 전 시기를 통하여 지배 집단은, 그것이 이슬람 교도든 기독교도든 간에 지배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혹은 그렇게 비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종교적, 문화적 소수 집단은 거기에서 그들이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그동안 관용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배 집단의 확고한 통제에 예속되었다.
Raymond Carr 외[35] 지음. 김원중·황보영조 번역. 《스페인사》 (《Spain: A History》) 111-113쪽
기존 스페인의 카스티야 중심, 가톨릭 우월 교권 민족주의 (nacionalcatolicismo)가 20세기에 들어와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 지방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가톨릭 공동왕 이후 제국, 왕정 시대 내내 이슬람, 무어인과 관련된 모든건 나쁘고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경향도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48년에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가 《España en su historia》[36]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하고, 반면 서로 전쟁은 해도 그리스도권이나 이슬람권이나 자국 내 이교도 커뮤니티를 아예 없애려는 전반적인 시도는 없었던 레콩키스타 시절 중세를 세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빛나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한 황금기로 재조명하는 사관이 한동안 유행했다. 이는 마르틴 루터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열풍에 맞서 매우 강경해진 가톨릭 수호 -종교재판-이단심문을 특히 근세 스페인에서 주도하게 된 것에 대한 반동심리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이런 가톨릭 유일주의 근세 스페인을 부정하고, 중세적 종교적 관용과 다양성을 낭만적으로 보던 사관도 스페인 사학계가 근대성 논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사학적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에 와서는 많이 퇴색되었다. David Nirenberg 같은 중세 스페인 사회사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학자들의 현대적 공론은 집요하게 가톨릭 유일신앙을 추구한 근세에 비해선 확실히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가 종교적 다양성이 있었지만, 실리적 이유에서 공동체내 이교도의 존재를 '참고 견디는거지' 타자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존중에 기반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은 결코 아니었고, 레콩키스타 자체가 800년에 가까운 장기 과정이었던 만큼 타 종교에 대한 관용도도 시대에 따라 빡빡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는 케바케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출신 자체가 바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가문이었던 후우마이야 왕조의 경우, 이교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공존에 익숙했지만, 반대로 발원지가 원래부터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짙었던 시리아, 레반트 일대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던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 같은 베르베르계 국가들은 이념 자체가 종교적 원리주의, 순수주의를 구심점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적 개혁운동으로 시작했던만큼 불관용이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현대 이베리아 반도 중세 사학계에서는 보통 흑사병을 이후로 그 이전에는 심해졌다 느슨해졌다 반복하던 그리스도권의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이 전례없이 강해지며, 이런 기조가 후기 트라스타마라 왕조 르네상스 시절까지 유지되고, 나머지 유럽 가톨릭 세계도 종교재판의 설립, 알비 십자군 같은 그리스도교 내 이단 박멸 체계가 더 완성되면서 결국 1492년 <알함브라 칙령>과 비개종 이교도 전면 추방, 이후 종교재판소를 통한 개종자 박해와 무어인 추방으로 정점을 맺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근대 자유주의자가 자기 시대에 대한 불만을 엉뚱하게 중세에 투영하여 만든 '관용적인 중세 이슬람, 비관용적인 중세 가톨릭'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탈피하여, 스페인 민족주의도 아니고 가톨릭 근본주의도 아니며 순진한 무슬림 미화도 아닌 실증적인 설명을 내놓고 있다.

600년쯤 이어진 무슬림계 이베리아 국가들과 500년 넘게 이어진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을 비교하여 "누가누가 더 잘못했냐"를 따지는 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질문이다. 수백년 간 이어진 체제에서는 강경한 순간들을 양쪽 어디에서든 얼마든지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37] 각각의 정치적, 상황적 이해관계에서 관용과 불관용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더군다나 중세와 근대의 비교가 아닌 동시대 중세 스페인 안에서 가톨릭 지역과 무슬림 지역을 비교할 경우 이 점은 더 명백해진다. 동시대 중세 스페인에서 가톨릭 치하 무슬림과 이슬람 치하 그리스도인의 처지는 비슷했으며, 양쪽은 모두 '원칙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효용성 때문에'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또한 소위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은 알 안달루스라는 국명이 무색할 정도의 중세 이베리아 특유의 오랜 지방세력 간 군웅할거와 합종연횡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위정자에게 일관성 있는 종교 탄압을 할 능력이 부족했던 결과였을 뿐 결코 자비심이나 인권의식에서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5.5. 인종적 교류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치하 그리스도인 주민들은 모사라베라고 불렸다. 정복 과정에서 많은 아랍인, 베르베르 전사들이 정착했고 이후 아랍 무슬림 지주들이 자신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마름일 같은중간 관리를 맡길 목적으로 유대인들을 불러오면서 유대인이 대거 정착하여 세파르드 유대인 문화가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을 통해 적잖은 슬라브들이 후궁이나 환관[38], 노예병으로 유입되었다. 이들 슬라브인 노예병들은 후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자 군벌화되어 독자적인 타이파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독일저지대 국가에서도 기사들이 레콩키스타에 합류하기 위해 스페인에 들어왔다가 정착했는데 이들도 현대 스페인인의 조상의 한 갈래를 이룬다.

한 편 무라비트 왕조의 건국세력 람투나족들은 서아프리카 일대의 여타 베르베르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흑백혼혈 외양을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유럽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이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다르게 유달리 피부색이 짙게 보였을 수 밖에 없었다. 중세를 다룬 사극에서 흑인들을 무어인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상술한 이유 등으로 중세 영어에서 흑인을 Moor, Moors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39]
레콩키스타 시기 개종 여부에 따른 호칭
<colbgcolor=#ddd,#383b40> 기존 종교 이후 종교
가톨릭 이슬람
가톨릭 모사라베
Mozárabe

(개종 X)
물라디
Muladí

(가톨릭→이슬람 개종)
이슬람 모리스코
Moriscos

(이슬람→가톨릭 개종)
무데하르
Mudéjar

(개종 X)

가톨릭교 국가들의 반격으로 가톨릭 국가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은 무데하르라고 불렸다.

이슬람의 이베리아반도 정복 초기에는 많은 수의 모사라베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가 레콩키스타 이후 다시 많은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스페인의 인종 구성이 복잡해졌다.[40] 알 안달루스 시대에 혼혈인들을 부르던 다양한 어휘들은 대항해시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화한 후 백인, 아메리카 인디오, 흑인 사이의 다양한 혼혈들을 칭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흑백혼혈을 칭하던 말인 "물라토"는 아랍어로 아랍인과 혼혈인이라는 뜻의 무왈라드에서 유래했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을 의미하던 모리스코는 흑백 혼혈 중 백인에 가까운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한 편 브라질에서는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을 마멜루쿠라고 불렀다.

이슬람이나 그리스도인 모두 이교도와는 결혼할 수 없었지만 주류 종교로 개종[41]한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신분이 높은 무슬림 남성과 피정복민인 그리스도인 여성, 유대인 여성의 결혼은 쉬웠는데 이들의 자식은 무슬림으로 자라났다. 반대로 무슬림 여성과 피정복민 그리스도인/유대인 남성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받았다. 신분이 높은 무슬람 타이파들과 가톨릭 영주들끼리 정략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는 보통 남자의 종교를 따라서 여인들이 개종했다.[42] 관련 글

이러한 인종적 교류는 이후 중남미에서도 이어졌다, 19세기와 20세기에 많은 아랍인이 중남미 국가들로 이주해 왔는데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에서는 아랍인들을 남유럽인들과 비슷하다면서 백인으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현지 백인들과 통혼하면서 사회주류에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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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어는 영어처럼 /nk/ 발음이 /ŋk/로 변하므로 '레콘키스타'보다 '레콩키스타'가 원음에 더 가깝다. 국립국어원에서는 nq 조합도 /nk/라는 걸 잊었는지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누락시켜서 '레콘키스타'라고 표기하는 게 규범에 맞다고 했다가 2015년 재심의로 콩키스타도르와 함께 ㅇ 받침으로 표기를 변경했다. 관용 표시가 없는 걸 보아 앞으로도 이렇게 심의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립국어원은 외래어 표기법의 스페인어 표기법에 nq의 n도 받침 ㅇ으로 적는다는 비공개 추가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외래어 표기법/스페인어 문서 참고. [2] 균등 상속제로 인해 행여나 왕위가 합쳐져도 다시 분할되기 일쑤였다. [3] 넓은 의미에서의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레콩키스타의 시작년도라고 언급된 711년은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해이다. 718년경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 작업을 거의 끝마쳤다. [4] 이후 레온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며 분할 상속된 나라 중 하나가 카스티야로 발전하게 된다. 서고트의 멸망에서 배운 게 없는 건지, 초기 레콩키스타 국가들은 게르만의 분할 상속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스투리아스는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레온, 나바라, 카스티야 등으로 왕자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가 합쳐졌다가를 반복했다가 결국 카스티야로 수렴된다. [5] 이슬람 역사가들은 술탄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코르도바 대성당을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말이 구매지 이슬람에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반론도 있다. [6] 사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세를 피하려고 이슬람교로 개종했기 때문인데 1300년대엔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달했다. 1300년대에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90%에 달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300년대에는 스페인 지역 총 면적의 90%에 달하는 지역을 카탈루냐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이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도 전체 스페인지역 90%를 정복하는데 성공한 유일한 나라인 후우야미야 왕조가 있었지만 후우야미야 왕조는 지즈야만 잘 내고 권력에 순응만 하면 종교의 자유를 제한적이나마나 보장했으므로 국가 내 그리스도교 비율이 최소 30%는 존재했다. 그래서 이슬람 왕국의 지도자들로써는 중요한 수입원인 종교세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종교세 지즈야를 거두는 것은 스페인의 이슬람 왕조만 했던 일이 아니고 전 세계의 아주 많은 이슬람 왕조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다.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한테만이 아니라 후술하듯이 이슬람교 확장 초창기 때부터 개종했던 베르베르인들에게도 이런일들이 벌어졌다. [7] 물론 유대교도들이나 후술하듯이 종교세 문제 관련해서 이슬람교도들인 베르베르인들도 아랍인들에 반대하면 얄짤없었다. 그러나 베르베르인들은 워낙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유대교도들이나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서고트 왕국 항목 참고. [8] 아랍인 귀족들은 풍요로운 스페인 중남부의 영토를, 베르베르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습하고 험한데다가 그리스도교와의 최전선인 갈리시아 등의 북부 지방의 영토를 받았다. [9]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는 줄었지만 이슬람 전체의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 [10] '도루'는 포르투갈어로 스페인어로는 '두에로(Duero)'라고 한다. [11] 1236년 코르도바를 점령한 카스티야는 모스크를 허물지 않고 하기아 소피아마냥 성당으로 개조되는데 이 성당이 바로 오늘날 메스키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코르도바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카스티야는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모스크의 문과 종을 가져가 톨레도 대성당을 장식하였다. [12] 이 때 성당에 남아있던 성 야고보의 묘 및 기타 성유물들은 신자들의 신앙심을 잘 알고 있던 알만수르가 부하들에게 훼손하지 말도록 엄히 명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3] 물론 포르투갈이 레온-카스티야에서 분리된 것은 12세기 일이지만, 분리가 가능했던 것도 영토 기반이 있어서였다. [14] 그중 세테닐 공성전은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로 재현되었다. [15] 여기는 엘 사갈이 지켰다. 그는 1490년에 카스티야에 투항한다. [16] 이때 맘루크의 술탄은 카이트베이였는데 오스만과의 전쟁을 위해 아라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랬기에 그라나다의 구원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창 팽창중인 오스만에 집중하기도 바쁜 상황이었다. [17] 나중에 스페인 내 비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면 이게 옳은 결정이었다. 무함마드 12세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 페르난도 & 이사벨 부부와 조약을 맺어 그라나다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그라나다의 무슬림의 스페인 잔류 및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에게 마지막 보호막을 세워주고 떠났으나 몇 년 안 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약은 무효화되고 반란 진압 이후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은 전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18] 그나마 그라나다가 마지막 무어인 왕조였기에 멸망 후 잠시나마 대접을 받은 것이지, 그라나다 이전에 정복당한 무슬림들은 얄짤없이 강제 개종 아님 추방 작업을 거쳐야 했다. 당장 이사벨과 페르난도 또한 가톨릭 원리주의자로 레콩키스타 완료 직후 악명높은 종교재판을 처음 시작한 자들이었다. [19] < 성전의 이베리아> 3번 트랙 <침략하는 자, 당하는 자> 도입부에 레콩키스타 직전까지의 역사를 읊는데 그 마지막 문장이 그라나다 함락이다. [20] 어머니와 구분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의 이사벨이라고 부른다. '아스투리아스'는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스페인의 뿌리가 되는 최초의 왕국이었으며, 스페인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영지이자 작위명이다. 영국의 왕세자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웨일즈 공)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 [21] 산책하던 중에 말에서 넘어져 죽었다. [22] 정확히는 혈연으로 얽힌 지간은 아니다. 주앙 2세가 마누엘을 양자로 입적하고 왕위를 물려줬다. [23] 미겔 데 라 파스. '데 라 파스'(de la Paz)는 '평화의'라는 의미로 아래에서 나오는 대로 평화왕 미겔이라는 의미다. [24]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마누엘은 후에 아내를 또 맞는데 이 아내가 바로 이사벨의 동생인 마리아로서 이 마누엘(마누엘 1세)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중 하나가 포르투갈의 이자벨인데 이 사람이 카를 5세에게 시집가서 펠리페 2세를 낳는다. 즉 펠리페 2세는 마누엘 1세의 외손자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지만 당시 포르투갈의 왕가인 아비스 왕조가 마누엘 1세의 아들인 세바스티앙 1세를 끝으로 단절되어서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이베리아 연합이다. 다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와해된다. [25] 실제로 프랑스와 스페인은 1521년부터 1559년까지 다섯 번의 전쟁과 강화를 되풀이했는데, 이 다섯 번 모두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했다. [26] 1578년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모로코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세바스티앙의 종조부였던 엔히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사람은 본래 추기경의 신분이었는지라 결혼해 자식이 있을 리가 없었고 즉위했을 때 이미 노인이었기 때문에 즉위 2년 만에 승하했다. [27]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그 과정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는데 원래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한 사람은 펠리페 2세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있었고(펠리페 2세,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 크라투 수도원장 앙토니우, 3명 모두 마누엘 1세의 손자녀였다.) 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인물은 앙토니우였으나 펠리페 2세는 막강한 스페인의 국력을 이용해 포르투갈을 침공해 앙토니우를 쫓아내고 자신의 포르투갈 왕 즉위를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28] 펠리페 4세 올리바레스 백작 시도했던 바와 같이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부부왕에 의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경우처럼 동등한 위치에서의 통합. [29]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 -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30]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Alessandro Valignano가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서한 [31] 사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교회가 '원주민' 사제를 양성하는 것 부터가 침략자에게 역효과를 내는 행위였고, 실제로 (특히 파리외방전교회처럼 비교적 나중에 생겨난 선교 단체일수록) 대놓고 원주민 성직자 양성을 강조하여 제국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작정하고 식민지로 만들고 싶으면, 원주민 성직자 양성을 막아서 원주민 교회의 유럽 교회 종속을 유도하면 되는 일이다. [32] 천장 장식이 그냥 대놓고 모스크에서나 볼 법한 아라베스크 양식이다. [33] 실제로 세르반테스 본인도 레판토 해전 이후 알제리에서 포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아랍어를 배웠으며 캐릭터 이름도 "시데 아메테"는 아랍어로 Sayyid Hamid/Ahmed, 즉 '아흐메드 나리'의 스페인어식 호칭이고 성인 Benengeli는 아랍어로 ابن الأيل(Ibn al-ayyil), 즉 '사슴의 자손'이란 뜻인데 이것도 Cervantes란 이름 자체가 ciervo(사슴)와 철자가 비슷한 걸 이용해 작명한 패러디 이름이다. 즉 시데 아메테 베네헬리=세르반테스 본인이란 소리다. [34] '오할라'라고 읽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fU6z2Pogg [35] Raymond Carr, Sebastian Balfour, Roger Collins, A.T. Fear, Felipe Fernández-Armesto, Richard Fletcher, Richard Herr, Henry Kamen, Angus Mackay [36] 영어권에는 《The Structure of Spanish History》, 즉《스페인사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37] 예: 가톨릭 스페인의 1609년 무어인 추방, 1066년 이슬람 그라나다의 유대인 학살 [38] 다만 환관으로는 백인 노예보다 흑인 노예가 더 선호되었다고 한다. 가끔 실수로 거세가 제대로 되지 않은 환관이 바꿔치기해서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이럴 때 환관이 흑인이면 만약 환관과 후궁 사이에서 애가 나온다고 해도 바로 판별되기 때문이었다. [39] According to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the Moors, as early as the Middle Ages and as late as the 17th century, were “commonly supposed to be black or very swarthy, and hence the word is often used for Negro.” # [40] 다만 이슬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조상이 아랍계인 경우보다 스페인 현지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 [41] 대부분 남자의 종교를 따라간 여성들이 많았다. [42] 무슬림 남자 왕족과 개종한 여성 그리스도인 왕족들의 사례 말고도 그리스도인 남자 왕족과 개종한 여성 무슬람 왕족들의 사례도 있다.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에서 그리스도인 정복자들이 신분이 낮고 개종한 무슬림 여인들과 결혼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왕공 차원의 혼담은 리처드 1세 살라딘의 혼담이 깨진 것처럼 논의만 됐지 실제로 일어나진 않은 것을 볼 때 이베리아반도의 사례는 특이하다. [43] 상술했듯 진정한 레콩키스타의 완료를 이베리아의 완전한 통일과 옛 그리스도교 제국 로마의 영토인 마우레타니아, 즉 모로코 + 알제리 + 튀니지까지의 영토 수복으로 보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