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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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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9월 3일 | ||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피엘라베시[1] | |||
사망 | 1986년 8월 31일 (향년 85세) | ||
핀란드 우시마 헬싱키 | |||
재임기간 | 제21대 총리(1기) | ||
1950년 3월 17일 ~ 1953년 11월 17일 | |||
제21대 총리(2기) | |||
1954년 10월 20일 ~ 1956년 3월 3일 | |||
제8대 대통령 | |||
1956년 3월 1일 ~ 1982년 1월 27일(25년 333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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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배우자 | 실비 케코넨 ( 사망)[2] | |
자녀 | 2명 | ||
학력 | 헬싱키 대학교 ( 법학 / 박사) | ||
종교 | 개신교 ( 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 | ||
신체 | 181cm |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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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제8대 대통령.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
핀란드 중남부 사보 지방에 위치한 피엘라베시(Pielavesi)라는 두메산골[3]에서 벌목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코넨은 헬싱키 대학교에서 1928년 민법학학사학위, 1936년에 민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2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농민들의 이익향상 운동에 관여하였고, 1927~32년 농무부 소속 직원이 되었다. 1927년 실비 케코넨(Sylvi Kekkonen, 1900~1974)[4]와 결혼해 1929년 쌍둥이 아들 마티[5]와 타넬리[6]을 낳았다.그는 1936~56년 농민당[7]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원래 그는 소련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케코넨은 핀란드가 겨울전쟁에서 패배한 1940년 의회에서 핀란드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소련에 양보함을 반대했는데, 당시 핀란드 의회에서 영토할양에 반대한 사람은 그를 포함하여 2명뿐이었다. 그러나 1943년에 이르자 나치 독일이 패전하리라 내다보고 그는 핀란드가 독립을 유지하려면 소련을 상대로 우호적인 중립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여러 장관직과 입법부의 직책들을 섭렵하면서 케코넨은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대통령으로 있던 1950년 수상으로 선출된 뒤 1953년까지 재임하다가 1954년 다시 수상이 되었다.
2.2. 대통령 당선 후
1956년 파시키비가 물러나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파시키비의 외교정책을 계승하여 적절한 중립정책으로 동쪽의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공산화의 위협을 막아내었다. 이러한 핀란드의 외교정책은 파시키비-케코넨 독트린이라 불렸다. 이와 동시에 스칸디나비아 국가 및 서방국가들과 유대관계도 강화하였다.[8]KGB와 소련의 지지로 핀란드 국내에서 강한 권력을 유지하면서 의회 간선제로 실시되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1961년 의회 해산을 단행하고, 총선을 실시함으로써 야권을 약화시켜 1962년 재선에 성공했고, 1968년에도 간선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그렇게 케코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단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국가의 국가원수로는 극히 드물게 26년간이나 집권하면서 국민의 두터운 지지를 획득하였다.[9]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는 정부에 의해 소련과 관련한 부분에서 언론 검열이 자주 일어났고 대통령이 내각 구성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등의 중대한 위헌적 월권을 저질렀으며, 소련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자비도보 각서(Zavidovo Memorandum)를 이용해 의회를 겁박하고 비상권한을 연장시키는 독재를 자행했다.
결국 케코넨의 협박에 굴복한 의회는 1973년에 아예 헌법을 개정하여 선거 없이 케코넨을 재선시켰고, 1978년 또다시 요식행위와도 같은 간선 끝에 케코넨은 다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때 케코넨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고, 케코넨이 국민연합당과 농업동맹의 지지를 받고 있고, 사민당이 후보를 선출하지 않았음에도 독자 출마한 기민당 후보인 라이노 베스테르홀름(Raino Westerholm)에게 선거인단이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핀란드의 사회상에 대해서는 핀란드화 문서에서 볼 수 있는데, 과장 살짝 보태면 소련이 싫어할 만한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그렇게 케코넨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1981년 4월, 수상이었던 사민당의 마우노 코이비스토는 여론을 등에 업고 케코넨의 사임 압력을 거부하고 노조와 의회 내 원내 정당들을 규합하여 케코넨의 권한을 무력화시켰다. 결국 케코넨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1년 10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10] 사직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1982년에 수리되었다. 그리고 케코넨의 후임자는 그의 오래된 정적인 마우노 코이비스토였다. 이후 1986년, 86번째 생일을 3일 앞두고 사망했다.
다만 케코넨 시기 핀란드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독재국가라고 하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집권할 동안 국민 탄압은 타 독재국가들과 비교하면 전무한 수준이었으며[11], 이런 만큼 세계의 자유 지수 집계가 시작된 1973년부터 케코넨이 사망한 1986년까지 핀란드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정치적 권리(PR) 2등급, 시민 자유(PR) 2등급을 기록해 '자유'로 분류되었다. 이는 독재자 여부에 논란이 있는 편인 오르반 빅토르의 헝가리[12]와 민주화 초창기인 노태우 시기 대한민국[13]보다 높다.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도 리덩후이 말기 대만[14], 김영삼 이후 대한민국[15]과 도널드 트럼프 이후 미국, 법과 정의[16]가 집권했던 폴란드도 케코넨 시기 핀란드와 지수가 같다. 아마 당대에도 타 북유럽 국가들이 PR 1등급, CL 1등급을 꾸준히 기록할 정도인 최상위권 민주주의 국가였기에 케코넨의 권위주의적 정치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을 터이다.[17][18] 점수로만 따지면 명백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통치 체제 내지 행보는 비민주적이라는 면에서 후대의 법과 정의 시기 폴란드와도 일맥상통한다.[19]
의외로 집권 내내 여소야대 상태였다. 임기 동안 여당이었던 핀란드 농업동맹의 의석이 과반을 차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의석의 과반은 핀란드 인민민주연맹과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들이 차지했다. 최대 의석을 차지했던 것도 1962년 총선 한 번밖에 없고, 그것도 200석 중 53석에 그쳤으며, 임기 후반에는 40석을 차지한 적조차 없었다.[20] 이를 보고 "여소야대 독재자가 말이 되냐" 하며 케코넨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옹호하는 어이없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케코넨이 소련을 끌어들인 자비도보 각서로 정당들을 협박하여 사민당과 인민민주연맹의 입각을 틀어막는 등 각종 위헌적 월권을 벌였고, 그로써 자신의 독재적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억지이다. 대의제 하에서는 아무리 야당의 의석이 많더라도 내각에 입각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당대는 물론이고[21][22] 현대 핀란드에서는 케코넨을 독재자로 보는 시각이 주류인데, 이는 핀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 편찬된 인명사전의 서술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핀란드 인명사전[23] 네이버 블로그 글 핀란드 레딧에서의 반응
2.2.1. 케코넨 퇴임 이후 핀란드 정치의 변화
케코넨 시기까지 핀란드의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의 권한이 더 강한 형태였으며 선거도 간선제였다. 후임인 마우노 코이비스토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자 총리의 권한을 케코넨 시기보다 대폭 강화하고 선거제도도 1994년에 직선제로 바꾸었다. 물론 대통령 임기도 2연임으로 제한한 후 대통령은 총리의 동의 없이는 의회를 해산할 수 없게 되었다.3. 여담
특유의 대머리가 인상적이다. 실제로도 핀란드에서는 케코넨 전 대통령의 외모가 밈처럼 자주 쓰이곤 한다. 어찌보면 전대갈, 문어라고 놀림받던 대한민국의 전두환과 유사한 셈이다. 1970년대는 핀란드도 다른 서양 국가들처럼 남성들 사이에서 히피식 장발이 꽤 유행했던 시기였는데, 정작 대통령은 완전 대머리였으니 국민들이 안 보이는 데서 몰래 킥킥댔던 건 당연지사였다. 핀란드어판 언사이클로피디아인 'Hikipedia'에서는 아예 케코넨의 머리를 위키백과 퍼즐처럼 합성한 로고를 쓰고 있으며,( #) 저 대머리가 '독재자 케코넨'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는 평도 있다. 참고로 중학생 때까지는 머리가 풍성했으나 그 뒤로 점차 빠져 이참에 머리카락 빠질 거 싹 다 밀어버리자며 그대로 밀어버렸다고 한다.(...)높이뛰기를 잘했는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적도 있으며, 1924년 국내 대회에선 우승까지 했다고 한다. 또 스키도 잘 탔다고 하는데, 케코넨은 이를 자신을 찬양하는 프로파간다에 이용했다. #[24]
사생활이 좋지는 않았는지 대통령 취임 전에도 그가 술과 여자에 미쳐 산다는 주장이 핀란드 타블로이드지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가 친구들과의 저녁 파티에서 자주 만취했다는 것과 오랫동안 2명의 내연녀를 두고 살면서 불륜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긴 했다.
케코넨의 장남인 타넬리 케코넨은 외교관으로 봉직했는데, 핀란드의 수상으로 재임했던 정치가인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문제는 이 파게르홀름 수상은 사민당 소속인데다가 소련과 야합한 케코넨의 독재행각 때문에 반강제로 정계에서 쫓겨난 케코넨의 정적 중 하나였다는 것이었다. 케코넨의 정적이자 앙숙이 곧 사돈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3.1. 민주주의의 자기 방어(Demokratian itsepuolustus)
1934년 케코넨이 쓴 팜플렛 '민주주의의 자기 방어'에서 케코넨의 정치관이 잘 드러나 있다.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방어적 민주주의+ 비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졌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케코넨은 " 민주주의는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기존 국가질서를 전복하려는 활동이 있을 경우 강압적 수단을 동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강압적 조치는 양날의 검이므로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가 폭정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는데, 억압적 조치를 취하기 전에 극단주의 운동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한 불만 사항을 개선하고 시정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참고로 해당 팜플렛에서 케코넨은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민주적 자유에 의지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결함을 가져오는 요인인 데다가 '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에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여 민주주의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봤고, 강한 국가를 주창하며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이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케코넨의 생각은 1931~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을 방문하며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목격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출처(핀란드어 위키피디아)
[1]
現
핀란드
북사보 피엘라베시.
[2]
혼전성은 우이노(Uino).
[3]
지금도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4]
후에 문학가로 활동했다.
[5]
Matti Kaleva Kekkonen, 1928~2013. 1958~1970년까지 국회의원이었고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농림부에서 일했다.
[6]
Taneli Kaleva Kekkonen, 1928~1985. 1952년부터 외무부에서 일하고 1975년부터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 몰타, 폴란드, 이스라엘에서 주재 대사로 일했으나 말년에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텔아비브 주재 대사직에서 해임된 후 우울증에 시달려오다 1985년 7월 11일 자살했다.
[7]
후에
중앙당으로 개칭.
[8]
이때 소련은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핀란드 사회민주당보다는 중도우파에서 우파를 오가는 농민당의 케코넨하고만의 협상을 선호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소련은
카를 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수상의 사민당 우위 연립내각에 입각한 장관 중 하나의 아버지가
라푸아 운동의 중진이었단 이유로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다. 이때 케코넨은 소련의 권력자인
흐루쇼프와의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며 비밀리에 독대했고, 이후 소련이 케코넨을 지지하자, 그는 수십년 간 원내 1당이었던 사민당을 각종 방법으로 억압하며 입각조차 시키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을 넘어서는 중대한 헌법 위반이었다.
[9]
다만
통일주체국민회의식 간선이었기에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10]
사실 케코넨은 70년대부터 기억상실, 시력 악화, 균형감각 쇠퇴, 전립선 비대증, 심한 두통, 당뇨병 등 온갖 질병을 달고 살았고, 퇴임 무렵부터
죽상경화증으로 생긴 혈관성 치매를 앓았다는 의혹이 있다. 이쯤이면 계속 권력을 놓지 않은 게 더 신기한 수준이었던 셈.
[11]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사찰은 존재했다. 다만 냉전 시기는 무려
스웨덴(!!!)까지 민간인 사찰을 하던 시절이었기에 저걸 가지고 케코넨을 반민주적이라 하기는 힘들다.
[12]
PR 3등급, CL 3등급으로 '부분 자유' 수준이다. 2020년
수권법이나 다름없는 법을 일시적으로 시행했다가 국제적 비난에 철회한 이후로는 진짜 독재자로 보는 여론이 많아졌다.
[13]
PR 2등급, CL 3등급.
[14]
정확히는 첫 직선제 총통 당선 이후인 1997년부터 2000년. 덤으로 1990~96년까지 1994년(PR 4등급, CL 4등급)을 제외하면 PR 3등급, CL 3등급을 기록했다.
[15]
PR 1등급, CL 2등급을 기록했던
노무현,
이명박 시기는 제외
[16]
이쪽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 중에서는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정당으로 평가받는다.
[17]
일례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는 어엿한 중진국인
멕시코가 바로 위에
미국이 붙어 있어서 대중적으로 후진국 이미지가 강한 것과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18]
하지만
세계의 자유 지수는 민주주의의 형식적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실질적인 권위주의적, 비민주적 통치에 면죄부를 부여한다는 지적이 수없이 많이 나오는 통계라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점수로만 따지면 최상위권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의 정치는 선진국 중에서는 후진적이라는 비판이 많고, 선술한 헝가리 역시 세계의 자유 수치로만 보면
인도랑 동급이고 독재국가라는 인식이 없는 타 국가들에 비해 높은 편이다.
[19]
하지만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은 엄연히 원내 1당으로서 합법적으로 내각을 꾸린 것이라, 아예 원내 1당인 사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위헌적 월권과 협박으로 틀어막은 케코넨과 법과 정의당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수에 가깝다.
[20]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농업동맹은 고의적으로 사민당을 배제하기 위해 국민연합당과 기민당과 대연정을 펼쳐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케코넨의 독재행각이 아니었다면 원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연정조차 꾸리지 못했으리란 사실이 웃프지만.
[21]
당장 케코넨이 속한 농업동맹 당에서도 비교적 소수파이지만 케코넨의 정치적 독재와 독선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연거푸 나오는 실정이었다. 물론 케코넨은 그런 반대자들을 가만 두지 않았고, 당내 파트너였던 야티 카랼라이넨(Ahti Karjalainen) 전 수상을 비롯한 여러 농업동맹 인사들이 내각에서 쫓겨나는 등 보복을 당했다. (이러한 정황은 Veikko Vennamo, "As a Prisoner of the Kekkonen Dictatorship" / Kekkos-diktatuurin vankina(published in Finland in 1989)와 그 외의 논문들을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22]
그리고 저 글을 기고한 베이코 벤나모는 재무장관을 수차례 역임한 농업동맹의 거물 정치인으로 케코넨과 대립하다
핀인당의 전신인 중도우익-우익 정당인 핀란드 농촌당을 만들어 케코넨과 끝까지 대립하였다.
[23]
소제목에서 케코넨을 'autocrat'이라고 명기했다.
[24]
핀란드어 기사에서도 대놓고
개인숭배라고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