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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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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최초의 자동차 : 20세기 이전3. 20세기의 발전사
3.1. 20세기 초반3.2. 1920년대3.3. 1930년대3.4. 1940년대3.5. 1950년대3.6. 1960년대3.7. 1970년대3.8. 1980년대3.9. 1990년대
4. 21세기의 발전사
4.1. 2000년대4.2. 2010년대4.3. 2020년대4.4. 미래의 자동차

1. 개요

자동차의 역사를 설명한 문서이다.

2. 최초의 자동차 : 20세기 이전

파일:퀴뇨 자동차.jpg
1769년 프랑스의 니콜라 퀴뇨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 파르디에 아 바푀르
파일:Patent Motorwagen.webp
카를 벤츠가 1885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삼륜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
퀴뇨의 삼륜 증기차 복원품 주행 영상
벤츠 삼륜차 주행 영상
자동차의 시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스케치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1769년 프랑스의 공병장교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군용 목적(포차 견인용)으로 발명한 증기 자동차를 자동차의 시초로 꼽는다. 복원물.[1] 이후 1885년 벤츠의 창업자인 카를 벤츠가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발명하여 이듬해에 특허를 받았다.[2] 그 자동차가 바로 위 영상의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으로 2019년 벤츠의 CF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진품의 경우 지금은 전 세계에 단 두 대만이 남아있으나,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용인 삼성화재모빌리티뮤지엄에서 레플리카를 볼 수 있다. 벤츠가 한·독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2014년 4월 기증하였다. 그란 투리스모 4에도 등장한다.

이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최초로 장거리 운행을 한 자동차이기도 하다. 카를 벤츠의 아내인 베르타 벤츠(Bertha Benz)는 1885년 8월 5일 자녀들과 함께 이 자동차를 타고 만하임(Mannheim)에서 포츠하임(Pforzheim)까지 약 105km를 운행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주유소가 없어서 베르타는 중간에 비즐로흐(Wiesloch)의 한 약국에서 연료를 구입했는데, 이 약국은 세계 최초의 주유소가 되었다. 또한 엔진 노즐이 막히면 머리핀으로 뚫고, 전선이 늘어지면 자신의 가터로 묶어서 고정시켰다. 이 운행은 이후 자동차 개발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뒤이어 고틀리프 다임러 빌헬름 마이바흐가 가솔린 사륜차를 만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아르망 푀조 역시 자동차를 만들었으며, 미국은 조금 늦게 듀리에 형제가 듀리에 모터 왜건을 개발하며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의 첫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1889년에 최초의 자동차 제작 회사인 파나르 르바소가 설립되었다. 이 파나르 르바소는 슬리브 판을 최초로 도입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이때의 자동차들은 마차 자전거에 엔진이 달린 수준으로 그저 괴짜들의 관심사였다.

3. 20세기의 발전사

3.1. 20세기 초반

자동차의 역사는 기술의 발전 양상에 따라 브래스기(1900-1918), 빈티지기(1919-1929), 전쟁 이전기(1930-1946), 전쟁 이후기(1946-1974), 현대기(1975-현재)로 나뉜다.
파일:1910_Rolls-Royce_Silver_Ghost_Tourer_(1419230816).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08_Ford_Model_S_Runabout.jpg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포드 모델 T
브래스기( Brass Era)는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로, 이때부터 많은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자동차는 프랑스의 시스템 파나르(Systeme Panhard)라는 구조를 따랐는데, 시스템 파나르는 파나르 르바소가 고안한 것으로, 내연기관 앞부분에 엔진 탑재, 후륜구동 방식이 특징이다. 피나르 르바소가 모든 회사에 상표권을 준 덕분에 이 구조는 빠르게 표준화될 수 있었다. 1910년에는 캐딜락이 창문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일체형 자동차를 선보였다. 브레스기의 대표적인 자동차로는 포드에서 1908년에 만든 포드 모델 T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동차는 급격하게 고성능화 되었지만 워낙 비싼 가격 때문에 보급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레저 스포츠 용도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자가용 교통수단으로서 포드 모델 T는 저렴한 가격에 보급되기 시작되었는데, 1920년대 포드 모델 T 한 대의 가격은 약 300달러로 당시 노동자의 두 달 치 봉급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지금에 비해 오히려 싼 가격[3]이었기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3.2. 1920년대

파일:1927_Austin_Seven_Top_Hat_Saloon.jpg 파일:ford_model_a.jpg
오스틴 세븐 포드 모델 A
빈티지(Vintage Era) 포드 자동차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미국의 포드 자동차가 가격은 비싸지만 높은 성능으로 인기가 높아 1925년에는 무려 200만 대가량이 생산되었다. 포드 자동차의 성공은 유럽의 자동차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1920년대에 하버트 오스틴에 의해 오스틴 세븐(Austin Seven)이 만들어져 영국에서 포드 자동차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으며, 영국의 자동차 대중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외에도 프랑스에서는 시트로엥이 유럽 최초로 대량생산방식을 자동차에 도입했으며, 독일에서는 오펠이 자국 최초로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을 활용한 대중차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파일:rolls _royce_phantom_1.jpg 파일:duesenberg_model_j.jpg
롤스로이스 팬텀 I 듀센버그 모델 J
반대로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던 귀족들과 부유한 자본가들에 의한 고급차 수요도 많아 고급차 시장 역시 매우 활발했는데, 유럽에서는 이스파노-수이자, 란치아, 이소타 프라스키니, 호르히, 메르세데스-벤츠, 마이바흐, 벤틀리, 들라이예 등의 메이커가, 미국에서는 캐딜락, 링컨 모터 컴퍼니, 코드, 어번, 듀센버그, 스터츠, 피어스-애로우 등이 이러한 고급차를 생산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롤스로이스, 부가티, 탈보-라고, 듀센버그는 그 정점에 있었다.

3.3. 1930년대

1930년대, 영국 모리스 모터스 사의 자동차 제작 공정을 보여주는 홍보용 다큐멘터리, 《선물(The Gift)》.
딸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고 뿌듯해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생산 과정을 설명해주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파일:external/i.wheelsage.org/autowp.ru_citroen_traction_avant_23.jpg 파일:Jzq21JL.jpg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 폭스바겐 비틀
1930년대~40년대 초에는 차체의 유선화가 이루어져 차체의 높이가 낮아지고 길이가 길어졌다. 또한 프랑스의 시트로엥 사에서 만든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Citroën Traction Avant)으로 전륜구동 + 유니바디(모노코크) 조합이 도입되었고, 가로배치 전륜구동 조합의 양산차도 독일의 데카베가 시판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대공황의 여파로 자동차 회사의들의 도산과 인수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자동차의 대중화가 한 발 늦은 유럽에서도 대중들도 탈 수 있는 자동차들이 본격 양산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자동차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생산될 예정이었던 폭스바겐 비틀과 전쟁으로 인해 군용차로 변경된 비틀인 폭스바겐 퀴벨바겐이 있다.[4]
파일:IMG_2714.jpg 파일:IMG_2713.jpg
탈보-라고 T150C SS 알파 로메오 8C 2900B
디자인 측면에서는 1920년대와 그 이전부터 연구가 이루어진 유선형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양산차에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1920년대에 비해 곡선과 곡면의 활용이 절정에 달한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이 널리 퍼졌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대공황의 여파가 사그라들자, 유럽의 전통적인 고급차 브랜드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아르 데코 양식을 최대한으로 발전시켜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강력한 엔진과 예술품에 가까운 코치 빌드 차체를 탑재한 초호화 그랜드 투어러가 유행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3.4. 1940년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ord_GPW_%281942%29_owned_by_Ian_Spicer.jpg 파일:GMC_CCKW_2_1/2-ton_Truck.jpg
포드 GPW GMC CCKW
제2차 세계 대전은 세계 각국의 군대가 기계화, 차량화에 박차를 가했던 전쟁이라 자동차 디자인은 정체되었지만, 기술이 활발히 발전했다. 상술한 퀴벨바겐은 물론 독일의 오펠과 호르히, 소련의 GAZ, 영국의 험버, 일본의 쿠로가네, 결정적으로 미국의 CCKW 윌리스 MB 등 군용 트럭과 고기동 차량에 사용된 기술들은 전후 각국의 자동차 기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파일:tucker_48.jpg 파일:1949_buick_roadmaster.jpg
터커 48 뷰익 로드마스터
1940년대 초반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민수용 차량의 생산이 완전 중단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0년대 중후반부터 한동안 위축되었던 자동차 산업이 다시 활성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전쟁 동안 본토가 습격받는 일 없이 자국 내 인프라가 보전된 미국에서는 제너럴 모터스가 올즈모빌 88 등 고압축 V8 엔진을 장착한 모델들을 발표했으며, 영국에서는 포드 콘술, 모리스 마이너, 로버 P4 등을 발표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전쟁으로 인해 인프라가 파괴되고 소비자층의 구매력도 급감하여 모리스 마이너, 르노 4CV, 폭스바겐 비틀, 시트로엥 2CV 같은 대중차들이 인기를 모았으며 메서슈미트 사브 등 항공기 제조사들도 군수품 사업을 대신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디자인은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의 유선형 디자인 테마에서 조금씩 진화가 이루어지다가 돌출된 펜더를 없앤 매끈한 측면부의 폰툰(Pontoon) 디자인이 도입되었다. 미국에서는 1946년형 카이저 프레이저 크로슬리가 폰툰 디자인을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메이저 제조사 중에서는 포드가 1949년형 신차 라인업에 도입했다. 1920~1930년대에 연구가 이루어져 물방울 모양에서 꼬리를 제거한 공기역학적인 디자인 양식인 캄백(Kammback)도 1940년대 말부터 양산차에 도입되었다.

1949년에는 자동차 시상의 최초격 및 가장 유명한 부류라 할 수 있는 모터트렌드 올해의 차가 생겨났다.

3.5. 1950년대

파일:메르세데스-벤츠 300SL.jpg 파일:1959 Cadillac Eldorado Convertible.jpg
메르세데스-벤츠 300SL 캐딜락 엘도라도
1950년대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물자를 개발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동차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300마력을 달성한 자동차도 양산되기 시작했다. 전후 훼손되었던 경제의 회복 덕에 고성능 차량들과 부를 과시할 수 있는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럭셔리 카들, 그리고 복잡하고 반짝거리는 크롬 장식들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유럽에서는 페라리를 주축으로 한 고성능 그랜드 투어러가, 미국에서는 굉장히 거대한 차체에 크롬으로 장식한 자동차들이 인기를 끌었고, 이 과정에서 유명한 테일 핀 스타일이 등장하였다.
파일:BMW_Isetta.jpg 파일:Morris_Mini_Minor.jpg
이소/BMW 이세타 클래식 미니
그리고 전쟁 이후 피폐해진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 유럽에서는 이 시기부터 오토바이를 대신하는 경자동차가 유행하여 피아트 500, 폭스바겐 비틀 등의 RR 구동방식의 경~소형차들은 물론 BMW 이세타 등의 마이크로카가 큰 인기를 끌었고, 4기통 이상 엔진 기반의 가로배치 전륜구동 방식을 도입하여 혁신을 이끈 미니가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 라인업이 세그먼트별로 세분화되기 시작하는 경향도 보이기 시작하는데,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의 소형차 및 중형차 라인업에 대응하는 컴팩트카 라인업을 1950년대 후반부터 구축, 전통적으로 한 브랜드가 곧 한 차종이었고 모델명이 곧 트림별 라인업이었던 전통적인 라인업 구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통상적인 소형차보다 작은 마이크로카 시장이 성장하자 피아트,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 피아트 600과 500, 미니 등의 경~소형차로 반격하며 자사 라인업을 다각화시켰다.

반대로 미국에서 시작된 브랜드 계열화가 내부경쟁으로 이어지거나 고객조사의 실패로 인해 에드셀, 드 소토과 같이 실패한 브랜드 포지셔닝의 사례가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미군의 장비나 드럼통을 뜯어서 만든 최초의 독자 모델인 국제차량제작 시발이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3.6. 1960년대

파일:external/i1.wp.com/jaguar-e-type-01.jpg 파일:페라리 250 GTO 옆모습.jpg
재규어 E-타입 페라리 250 GTO
1950년대에 크게 유행한 고급 차량들의 매력과 만듦새가 굉장한 발전을 거듭하여, 1950년대에 이어 1960년대는 스포츠카, 특히 그랜드 투어러의 황금기로 손꼽힌다. 안전과 연비 때문에 출력이 줄고 구조가 복잡해진 이후 시대에 반해 차량을 더 가볍고 강하게 만들 수 있었고, 아름다운 유선형 디자인이 주류이던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에 수많은 명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메이커들간의 성능 경쟁이 본격적으로 점화되어 유럽에서는 페라리 재규어 등의 전통 강호들이 역대 최고로 손꼽히고 현재 역대 최고 낙찰가를 경신하는 걸작들을 내놓는 와중에 람보르기니 등의 신예 메이커들이 혜성처럼 등장하는 등 스포츠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으며, 미국에서도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자손들이 막 첫 차를 구매할 나이가 되면서 젊은 감각의 스포츠카들이 유행하였고, 이에 발맞추어 포드는 1964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포드 머스탱을 공개했으며 포드 GT40로 유럽의 스포츠카들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쉐보레는 포드 머스탱에 대항하여 쉐보레 카마로를 내놓는 등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독특한 자동차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고 정착하게 되었다.

대중차 부문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져 1959년에 등장한 미니의 노하우에 기초하는 가로배치 전륜구동 레이아웃이 피아트를 통해 완성되었고 르노도 전륜구동 구동계, 유니바디(모노코크) 플랫폼, 해치백 레이아웃을 결합한 르노 4 르노 16같은 신차들을 조금씩 출시했다. 심카도 르노 4와 16 사이에 들어가는 체급의 전륜구동 해치백으로 심카 1100을 출시, 1970년대부터 본격 유행하는 준중형급 해치백 세그먼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파일:Toyota_2000GT.jpg 파일:Nissan_Skyline_2000GTR.jpg
토요타 2000GT 닛산 스카이라인 GT-R
또한 1960년대에는 일본차가 품질과 가성비를 무기로 전 세계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토요타 코롤라는 높은 수준의 품질과 가성비, 닛산 블루버드 페어레이디 Z는 품질 및 가성비에 동력성능까지 더하며 인기를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으며, 토요타 2000GT, 마쓰다 코스모, 닛산 스카이라인 GT-R 등의 일본산 고성능 스포츠카가 시장에 등장했다.

유럽 시장에서 1964년부터 매년 가장 우수한 차 1대를 선정하는 유럽 올해의 차가 시작되었다.

소비자 권익운동과 안전규제가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도 1960년대로, 북미에서는 변호사 출신의 랄프 네이더가 쉐보레 콜베어에서 안전을 경시하고 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의 원가절감을 추진한 GM을 고발, 대대적으로 비판하며 화두가 되었다.

3.7. 1970년대

파일:몬테카를로3-1.jpg 파일:external/only-carz.com/triumph-dolomite-01.jpg
'78 쉐보레 몬테 카를로 트라이엄프 돌로마이트
1970년대는 자동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자동차로서의 덕목이 얼마나 빨리 가는가에서 얼마나 멀리 가는가로 옮겨가면서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포드 모델 T로부터 시작된 실용품으로서의 전환을 완전히 끝마친 시기[5]이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가 자동차 시장을 휩쓸고 경제불황기가 198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져 크고 사치스러웠던 미국의 대형 차량들은 자취를 감췄고 머슬카들도 조촐한 차체와 엔진을 장착하며 몰락하다 머스탱을 제외하고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으며[6], 1960년대 후반부터 예고된 안전규제 강화로 인해 위축된 컨버터블을 포함한 스포츠카 시장 또한 불황을 맞이해 1960년대에 스포츠카를 생산했던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대중차에 주력하는 것으로 선회하여 일부의 제조사만 스포츠카 메이커로서 살아남게 되면서 쇠락한다.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20052318_10.jpg 파일:코롤라3-1.jpg
포드 핀토 토요타 코롤라
한편 작고 효율적인 차량들을 진작부터 만들고 있던 유럽의 기업들의 지분이 세계적으로 커졌으며, 여기에 내구성까지 갖추고 후발주자로서 서방 시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일본산 자동차들이 우수한 연비와 내구성[7]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본 차들이 자동차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반면 급하게 소형 차량들을 생산하면서 부각된 각종 품질 문제와 포드 핀토 결함 사태 등으로 미국의 제조사들은 하락세를 자초했다. 이러한 일들을 거치며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악명 높은 배출가스 저감 조치인 머스키법이 발표되며 환경 문제에 대한 이슈도 등장하였다.

세그먼트 상으로도 변화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태동기에 있었던 해치백 패스트백이 공간효율성과 실용성을 무기로 주류 디자인 트렌드로 부상했다. 심카 1100 Ti, 르노 5 알핀, 폭스바겐 골프 GTI같은 핫해치가 부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지프 왜고니어/ 체로키로 대표되는 SUV 세그먼트도 1970년대 내내 살아남았고, 비슷하게 실용성을 무기로 하는 미국의 풀 사이즈 밴이나 유럽의 LAV도 1970년대에 레저용 차량으로 인기를 서서히 모으며 MPV 세그먼트의 밑거름이 되었다. 미국 내수에서는 머슬카보다 상대적으로 성능의 중요성이 덜한 퍼스널 럭셔리 카가 유행하며 일반 승용차에도 퍼스널 럭셔리 카의 디자인 큐가 대대적으로 적용되어 1980년대까지 일본, 유럽의 소형차 라인업과 시장에 공존했다.

이렇게 전세계가 힘든 와중에도 기술적 발전은 지속됐는데, 가격과 실용성이 주류가 되면서 기업들이 낮은 가격에 우수한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여 산업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또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의 기업 모두가 전세계를 무대로 격돌하는 한편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TV 광고를 비롯한 마케팅에도 열을 올려 상업적으로도 대단히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드 모델 T, 폭스바겐 비틀, 피아트 124와 128처럼 모든 국가에 통용될 수 있는 한 차종을 뜻하는 월드카가 업계에서 화두로 떠오르며 글로벌 단위로 자원을 공용화한 GM의 T 플랫폼, J 플랫폼, 포드 에스코트 3세대같은 결과물들을 낳았다.
파일:1920px-Lotus_79_at_Barber_01.jpg 파일:LaudaNiki19760731Ferrari312T2.jpg
로터스 타입 79 페라리 312 T2
한편 모터스포츠에서도 포뮬러 1을 중심으로 자동차계의 패러다임을 영원히 바꿀 대단한 발전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다운포스가 발굴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F1 차량에 날개가 달리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공기역학 디자인에 있어서 단순히 절대적인 공기의 저항값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어디로 어떻게 흘려 보내서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까지 고려하기 시작하게 되어 현대식 공력 설계의 스타트를 끊었다. 휠 및 타이어에 대한 이해도와 기술도 크게 발전하여 종전까지 많이 보였던 와이어를 엮은 스포크 휠이 현대적인 디자인의 바퀴들로 대체되었으며, 타이어가 더 두꺼워졌고 트레드가 없는 슬릭 타이어가 최초로 등장하기도 했다.

1974년에 전 세계 자동차가 3억 대를 돌파하면서 자동차의 역사는 그 이후인 1975년부터 현대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대기가 시작되며 기술의 중요성이 실소비층에게 와닿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강조되면서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비전을 내 보이는 것이 중요해져 첨단 기술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여, 현대기 자동차의 가장 큰 특징은 사륜구동과 연료 분사 방식의 표준화, 컴퓨터 지원 설계( CAD)와 같은 한층 더 고차원적인 기술들이라 할 수 있다.
파일:guseovhslwjdcmraus.jpg 파일:attachment/대우 로얄/autowp_ru_daewoo_royale_salon_1.jpg
현대 포니 오펠 레코드/ 대우 로얄
1975년 현대기의 시작과 함께 대한민국은 최초의 고유 모델인 현대 포니로 글로벌 시장에 데뷔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미 초점이 경제적인 차로 옮겨갔던 세계 시장과는 달리 뒤늦게 경제 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자동차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았고 동네 자랑거리이기도 했으며 일반인들이 자동차를 구입하기란 꿈만 같았다.

3.8. 1980년대

파일:폴로2-1.jpg 파일:H1118-L334252283_original.jpg
폭스바겐 폴로 페라리 테스타로사
1980년대는 이전부터 이어져 온 여러 특징들이 무르익어 절정을 맞이한 시기인데,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이탈디자인 주지아로, 그루포 베르토네 등 이탈리아의 카로체리아들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결실을 맺어 낸 직선과 평면 위주의 디자인이 돋보였다. 이런 각진 디자인은 슈퍼카에서 시작해 일상적인 해치백 같은 자동차에까지 스며들었으며, 이러한 직선형 디자인을 극단적으로 이용한 람보르기니 쿤타치 페라리 테스타로사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드림카이자 아이콘이 되었다.
파일:LanciaRally037.jpg 파일:hi-res-8d13e8962db4d3e581ce8e3f8088e6b9_crop_exact.jpg
란치아 037 랠리 맥라렌 MP4/4
연비와 안전 문제도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개선되어 나갔고, 197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한 터보 엔진이 대중화에 성공하며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터보 엔진의 등장과 고점을 찍은 경제력으로 특히 모터스포츠 또한 절정기를 맞았는데, 포뮬러 1 르망 24시의 대표적인 전성기로 꼽히며, 모터스포츠가 양산차에 직접적으로 끼친 영향이 가장 큰 시대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이러한 모터스포츠 기술들을 양산차 개발에 적용하거나, 아니면 아예 모터스포츠 출전을 위해 양산차를 제작하는 등[8] 비범한 도전들을 많이 시도하였다. 사륜구동의 탄생도 빼먹을 수 없는데, 후륜구동이 주류였던 WRC에서 아우디 스포트 콰트로를 필두로 한 사륜구동 차량들이 등장하였고 여기에서 숙성된 기술들이 승용차들에도 적용되고 진화하여 현대식 사륜구동 방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플랫폼 공용화도 다차원적으로 변화하여 포드 폭스 플랫폼, 크라이슬러 K 플랫폼처럼 세그먼트,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제조사 단위의 공용 플랫폼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플랫폼 공용화는 이미 포드 모델 T와 그 가지치기 신차들, 1920년대의 GM B 플랫폼으로 대표되는 제너럴 모터스의 플랫폼 공용화 정책으로 시작되어 동일 세그먼트 내에서 조금씩 이루어졌으나 점차적으로 다른 세그먼트, 다른 장르의 신차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가령 1960년대에는 포드 머스탱이 같은 체급의 승용차 팰컨, 팰컨의 쿠페 유틸리티 버전인 란체로와 플랫폼을 공유했다면 1980년대에는 머스탱이 고급차 링컨 컨티넨탈, 퍼스널 럭셔리 카 머큐리 쿠거, 승용차 포드 페어몬트와 플랫폼을 공용하는 식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파일:external/www.banpei.net/perfect-toyota-sprinter-trueno-ae86_akashi-bridge.jpg 파일:external/img03.deviantart.net/my_1982_dodge_challenger_by_syc1959-d7ai1iq.jpg
토요타 AE86 '82 닷지 챌린저
21세기에 통용되는 핵심 기술들이 실권을 잡은 시대이자,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술과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자동차가 가장 인기있던 시대이기에 자동차의 최전성기로 부르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1980년대이다. 흔히 알려진 자동차 애호 문화도 이 시기에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드리프트로 대표되는 일본식 자동차 문화도 이 시기에 완전히 정립되기 시작해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전성기를 개막했으며 국내에서도 기아 프라이드 등의 경제적인 차량들이 힘을 얻기 시작해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디자인과 기술의 모든 면에서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며 어두운 시기를 지속했는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의 기업들이나 람보르기니, 로터스 같은 유럽의 스포츠카 제조사들에게 힘을 빌리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1970년대 초부터 미쓰비시 자동차를 통해 소형차급 라인업을 충당했으며, 같은 시기에 아시아-태평양 시장 진출 파트너로서 마쓰다와 손을 잡은 포드 모터 컴퍼니는 마쓰다의 기술력을 북미시장용 신차에도 응용하기 시작했고 제너럴 모터스는 이스즈로 시작한 기술 제휴를 스즈키, 토요타 등으로까지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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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에어리즈 차량의 구조도 1세대 포드 토러스

미국의 일반 승용차 시장의 경우 크라이슬러 K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승용차 및 미니밴들이 경제성과 신뢰성을 무기로 많은 판매량과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반면 크라이슬러가 크라이슬러 K 플랫폼에 의존하며 싸구려 이미지를 정립하는 비판이 있었던 가운데 이들은 1985년 말에 출시된 포드 토러스/ 머큐리 세이블의 성공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 둘은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9]가 몰락에서 간신히 돌아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편, 제네럴 모터스를 비롯한 자동차 기업들은 다운사이징 배지 엔지니어링을 통해 문제를 타개하고자 했으나, 캐딜락 시마론과 같은 실패작을 양산하기도 했다. AMC의 경우에는 르노와 손을 잡았지만, 르노 회장의 암살 사건이 터진 후 크라이슬러 산하로 인수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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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에스파스 토요타 랜드 크루저
크라이슬러의 미니밴 라인업인 닷지 캐러밴 플리머스 보이저, 르노 에스파스처럼 미니밴/MPV가 시장에 진출하며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포드에서는 에어로스타, 제너럴 모터스에서는 흔히 '더스트버스터즈'라 불리던 유선형 디자인의 폰티악 트랜스 스포트, 쉐보레 루미나 APV, 올즈모빌 실루엣과 같은 차량을 개발하였으며 높은 실용성과 가성비를 내세워 큰 인기를 끌던 일본 브랜드들도 닛산 프레어리, 미쓰비시 샤리오 등 중~소형 MPV를 연달아 출시하며 틈새시장에 뛰어들었다.

SUV 세그먼트도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이스즈 빅혼, 미쓰비시 파제로, 토요타 랜드 크루저 프라도, 지프 체로키/ 왜고니어 XJ형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같은 실용적인 사이즈의 SUV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의 스테이션 왜건들을 점점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1980년대 중순부터 경제가 회복되자 고급차 시장이 다시 발달하면서 미국에서는 수입차와 코치빌더의 개조 옵션으로만 연명하던 컨버터블 시장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좋게 말하면 가성비 좋은 차들을 만드는 회사, 나쁘게 말하면 싼마이 회사라는 이미지가 있던 일본의 제조사가 내수 시장에서 다진 기술력을 바탕으로 럭셔리 카 시장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다. 고급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벗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별도의 브랜드로 런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큐라 렉서스이다. 이전에도 럭셔리 전용 디비전은 미국 등지에서 존재해 왔으나 렉서스는 유별난 성공을 거뒀고, 대중차 회사의 럭셔리 브랜드로서 큰 귀감이 되어 이는 인피니티, 제네시스 등의 탄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일본의 토요타 생산방식과 같은 부분이 미국에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NUMMI CAMI 등을 통해 미국 기업들이 일본 차량 기업과의 합자를 통해 그들의 방식을 배우려는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차의 첨병을 방어하기 위해 새턴, 이글과 같은 기업들이 '수입차 대항마' 역할로 포지셔닝하기 시작했으며 올즈모빌과 같은 경우는 마케팅 실수로 인해 나락의 길을 걷을 걷게 되었다. 국산차의 경우는 현대 프레스토 포니엑셀을 선두로 1986년부터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한 해 최고로 많이 판매된 수입차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자동차 산업을 정부의 주도로 규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호주에서는 자동차 산업의 합리화를 위해 버튼 플랜을 수립 및 실행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및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와 같은 정책들이 시행되기도 했고, 1987년이 되어서야 수입차 시장이 서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3.9.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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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티뷰론 마쓰다 미아타
1990년대에는 경제 호황이 절정에 달했으며, 선진국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자동차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더 발전된 안전 규정은 자동차 회사들을 큰 고민에 빠지게 했지만, 더 안전하고 편안한 자동차들을 출시하면서 자연스럽게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옛 창립자들의 은퇴나 죽음과 함께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을 유작들이 출시되었다. 일본에서는 발달된 내수 자동차 문화와 버블 경제의 시너지로 경차 규격의 스포츠카인 헤이세이ABC나 슈퍼카의 패러다임을 바꾼 1세대 NSX, 미드십 MPV인 토요타 프레비아 같은 독특한 자동차들이 다수 출시되었고, 흔히 JDM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스포츠카들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 역시 완전하진 않지만 기아 세피아 현대 엑센트와 같은 독자적인 디자인의 차량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현대 알파 엔진과 같이 독자적인 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침체되었던 미국 자동차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1990년대가 개막하며 본격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터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어 크게 성장한 반면,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가 외국계 기업에 넘어가면서 현재는 그 존재가 희석되는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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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포드 머스탱 포르쉐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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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 비전 차량의 구조도

한편 공기역학적인 설계가 다시금 각광을 받으면서 크라이슬러 LH 플랫폼과 같은 '미래적인 차량'의 이미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옮겨가 직선이 주류였던 기존의 디자인 풍조에서 곡선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새천년이 임박하자 곡선과 원을 이용한 유선형 디자인이 완전한 주류가 되었다. 또 옛적의 디자인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의 복고 디자인이 폭스바겐의 뉴 비틀과 993/996형 포르쉐 911을 필두로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파일:맥라렌 F1 xp5 프로토타입.jpg 파일:F1GTR 06R섀시 전면.jpg
맥라렌 F1 로드카 맥라렌 F1 GTR

20세기 최후의 시대인 만큼 기술 수준 또한 20세기 중에서 가장 발전되었던 시기인데, 지금까지도 자연흡기 최속의 슈퍼카로 인정받는 맥라렌 F1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터보차저와 변속기의 효율이 상승하면서 연비와 환경의 부문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편 본격적으로 친환경차들이 빛을 보게 된 시기이기도 한데 토요타 프리우스, GM EV1, 혼다 인사이트 등의 선진적인 공력 기술 또는 석유 이외의 연료를 이용한 파워트레인 기술을 적용한 차량들이 등장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G7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러한 차량들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까지 남아 있던 많은 요소들이 21세기가 개막하며 사라져 버려 20세기의 유산으로 남게 된 한편, 정교한 설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신식 자동차들의 명맥이 대거 시작되었기도 하다. 1980년대를 거치며 한창 무르익었던 20세기 특유의 감성적인 풍조를 마감하는 황혼기이자 새로운 시대인 21세기를 준비하며 초석을 닦아 놓은 시대.

1994년부터 미국 캐나다 시장에서 가장 좋은 차량, SUV, 트럭을 선정하는 북미 올해의 차 시상이 시작되었다.

장르 면에서는 1980년대부터 인기를 얻은 MPV와 SUV가 성장세를 이어 갔으며, "퓨전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업계에서 시도하기 시작했다. 도심형의 4륜구동 소형 승용차를 추구한 기아 스포티지 토요타 RAV4, 스테이션 왜건에서 4륜구동을 더해 전고를 높이고 루프랙과 범퍼 가드를 추가한 볼보 V70 크로스 컨트리와 스바루 아웃백이 대표적인 사례로 1990년대 말부터는 중대형 SUV 장르에서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기 시닥했다.

4. 21세기의 발전사

4.1.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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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 존다 미니 클럽맨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자동차 기술은 디지털을 업고 발전을 거듭했다. 자동차에 탑재되는 전자 장비는 그 수와 종류가 굉장히 다양해졌으며, 운전 자체도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한편 많은 자동차 회사들은 본격적으로 과거의 유산을 오마주한 브랜드나 디자인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마이바흐, 데 토마조, 부가티 등의 브랜드가 되살아났고 SLS AMG 알핀 A110, 미니 클럽맨, 현대 아이오닉 5처럼 과거의 차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차량들도 대거 출시되었다. 한편 하이퍼카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고, 파가니 존다의 영향을 받아 소규모 독립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부가티 베이론 16.4는 양산차 최초로 400km/h를 돌파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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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저소득자들을 타깃으로 한 경차, 타타 나노 다이아몬드 코팅 도료를 칠한 하이퍼카, 코닉세그 트레비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역시 자동차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부각되기 시작한 건 이때로, 일본의 박스형 경차들로 대표되는 가성비가 아주 좋은 차량들과 큰 부자들도 쉽사리 노릴 수 없는 매우 호화스럽고 비싼 자동차들이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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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MI에서 생산한 마지막 GM 차량인 폰티악 바이브 (2009년 8월 17일) 마지막으로 생산된 머큐리 그랜드 마퀴스 (2011년 1월 4일)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로 많은 미국의 쇠퇴한 자동차 브랜드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시기이기도 하다. 2004년 올즈모빌이 먼저 사라졌으며, GM의 2009년 파산 속 회복하는 과정에서 새턴, 허머, 폰티악, 사브 토요타와 합자 생산하던 NUMMI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에 포드 모터 컴퍼니 산하의 머큐리도 2011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볼보 영국의 일부 자동차 제조사들은 중국 기업에 인수되기도 했다.

4.2. 2010년대

2010년대가 되자 현대자동차그룹은 N이나 제네시스로 전에 진출해 본 적 없던 시장으로의 길을 개척해 세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폭스바겐의 디젤게이트는 디젤 엔진의 전반적인 쇠락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한편 이 시기에는 SUV가 엄청나게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비포장도로용 차에서 출발한 SUV는 도심형이나 고급, 고성능 등 여러 분야로 가지치기를 해 나갔으며 BMW X6 장르 파괴[12]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몇몇 브랜드는 수익성을 이유로 세단을 단종시키고 SUV를 생산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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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페형 SUV 장르를 알린 BMW X6 국산차 디자인의 혁신을 가져왔던 'YF 쏘나타'

또한 '쏘나타 쇼크'라 불리는 국산차의 디자인이 일취월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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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 폭스바겐 ID.4
점점 부각되는 지구 온난화는 친환경 자동차 열풍에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프리우스, 인사이트 등 일본 차들이 친환경 자동차 생산을 주도했지만 쉐보레 볼트, BMW i3, 폭스바겐 XL1, 기아 포르테 하이브리드 등의 여러 가지 하이브리드 자동차들과 전기 자동차들이 출시되었으며 918 P1, 라페라리로 대표되는 하이브리드 하이퍼카들[13]까지 나오면서 친환경차 시장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여기에 BYD로 대표되는 중국 회사들과 LG 등 대한민국의 배터리 기술, 결정적으로 테슬라의 등장으로 2020년대가 되자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는 전기 자동차를 라인업에 하나 이상씩 추가하기 시작했고, 전기 자동차는 차세대 유망 산업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심지어는 중국에서 많은 수의 전기차 기업들이 난립하게 되며, 출혈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이들 중 샤오펑, 립모터, 상하이자동차, 창안자동차같은 중국 메이저 기업들의 전기차들은 2020년대로 거쳐가며 현대자동차그룹의 전용전기차만큼은 아니지만 유럽, 일본의 전기차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운전질감이 떨어지는 대신 주행보조기능을 비롯한 소프트웨어, 사용자 경험 디자인, 가성비 면에서는 앞선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일본이나 유럽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CATL이나 BYD의 배터리 팩을 채택하거나 아예 전용전기차 기술을 이전받아 신차를 개발하는 등, 중국 제조사들과의 협업이 밀접해졌다.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들에서도 자동차 시장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튀르키예처럼 국가의 지원을 받고 토그 (TOGG)가 만들어지거나 베트남의 민간 기업 중 최대 규모인 빈그룹이 자동차 시장에 진출한 빈패스트 등이 대표적이다.

4.3.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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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EV6 GT 현대 투싼
현 시점에서, 자동차 시장은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시장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세단 수요의 감소가 이어져 해당되는 차종들이 대부분 단종되어가고 있다. 반면 아직 수요가 남아있는 중국, 중동 및 남미, 동남아시아 시장 중심으로는 존재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장르의 장점들[14]을 두루 갖추고 있는 CUV와, 공간 활용성과 승차감을 모두 잡은 유니 바디 SUV가 중심이 되고 있다. 반대로 쿠페 컨버터블 등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데, 이런 차들은 장단점이 확실하여 호불호가 갈리고, 부유층의 꾸준한 수요가 있는 슈퍼카 이상의 고성능 차량들과 달리 수요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계기로 러시아 시장에서는 기존 철수한 서방 기업들의 차량을 배지 엔지니어링하거나 중국산 차량을 파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모스크비치 볼가 등이 부활하기도 했고, 쏠라리스처럼 기존 철수한 기업의 라인업을 바꿔 판매하고 있다.

중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전기자동차를 통한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다양한 메이커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으나 메이커들이 난립하며 중국 내수가 레드오션으로 변했고 리판, 중타이, 제일자동차처럼 경영난에 처한 메이커들이 엔지니어링 전문회사나 부품제조업 등으로 업종전환하고 완성차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도산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메이저 기업 내에서도 지리자동차는 자체적으로 출범시키거나 인수한 브랜드가 많아 개발연구소를 통합하는 등의 교통정리를 시작하는가하면 사후관리 문제가 발생하고, BYD는 중국 내수에서 인산철배터리를 적용한 퍼포먼스 사양들의 배터리팩 열화나 방청불량같은 품질문제가 떠오르며 성장통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메이저 자동차 회사들의 비약적인 질적, 양적 성장과 함께 이들이 기존의 남미, 중동, 동남아시아 시장 외에도 유럽, 일본, 한국 등의 선진국으로 해외시장을 확장하기 시작해 미국, 유럽에서 이들의 진출을 경계하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유럽연합이 자국 자동차산업을 지키고자 중국산 전기자동차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 무역장벽을 설치하며 무역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4.4. 미래의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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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F250 테스트 뮬 제네시스 X 컨버터블
미래에 자동차가 나아가야 할 길은 자율주행, 완전 전동화, 높은 수익성[15], 효율적인 에너지 소비[16], 가벼운 고용량 배터리,[17] 후드 에어백 등 보행자 안전 장치, 운전자 페달 오인 방지 장치, 차대 공용화[18], 자동차 플랫폼의 개념 변화,[19] 비행 차량, 친환경 소재 차체, 수소와 전기 충전소 인프라 확장 등이 거론된다. 그리고 이제는 점차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많은 차들이 설계되고 있다.


[1] 그러나 브레이크가 갖춰지지 않아 가속은 됐지만 그후론 멈출수가 없어 벽에 충돌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사람들이 괴물이라고 생각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2] 다만 비슷한 시기에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고틀리프 다임러와 지그프리트 마르쿠스가 있어 최초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있다. [3] 현재 생산직 두 달 치 월급으로 비유해 보면 쉽게 비유가 될 것이다. [4] 민수용 비틀은 전후에 생산되기 시작해서 2003년까지 생산되었다. [5] 자동차의 초기 역사에서는 '부와 사치의 상징'인 고급 자동차의 비중이 컸으며 (포드 모델 T로부터 시작된) '실용품으로써의 자동차'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의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비주류였던 자동차의 실용적인 측면이 점점 중요해지다가 결국에 자동차 시장, 즉 자동차라는 분야의 주류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전환 과정'이 완성된 시점이 바로 1970년대라는 의미이다. [6] 엄밀히 말하면 카마로와 파이어버드 등이 남아 있긴 했으나 머슬카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고, 머스탱 역시 4세대에서 유선형으로 변했다가 2005년에 와서야 다시 직선형 디자인으로 돌아왔다. [7] 일본의 자동차가 유럽과 북미로 수출되기 전까지 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툭하면 고장이 나지만 어쩔 수 없지'였다. 수천 개의 부품이 정밀하게 짜맞춰져 있는 기계덩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만큼 고장이 잦아도 관대하게(?) 넘어가거나 그때그때 고쳤던 것이다. 하지만 협력업체들까지 " 품질을 유지하는 비용절감"을 관습으로 달고 다닌 결과로 고장이 잘 나지 않는 일본 차의 등장으로 이런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8] 양산차 기반의 모터스포츠의 경우 출전하려면 당연하게도 레이스 사양의 자동차를 일정 대수 이상 생산된 차량을 기반으로 개조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불문율과도 같은 규정이 있는데, 돈이 있는 기업들은 이를 역이용해서 레이스 사양으로 개조할 것을 의식한 차량들을 그만큼 생산해 버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양산 규정 인증용 차량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차량들을 보통 호몰로게이션 차량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팬들에게서도 인기를 얻자 주최자들 또한 이런 기조에 편승해 버려서 생산해야 하는 차량의 대수를 줄여 주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럼에도 양산 규정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양산차와 접점이 없는 레이스카들은 프로토타입이라고 따로 부르기 때문이다. [9] 물론 리 아이아코카 회장이 직접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이미지 개선에 많은 노력을 가한 바 있었다. [10] 이 때 지프가 편입되었고, 기존 르노 라인업은 이글 브랜드로 변경되었다. [11] 공인 기록은 아니지만 후속 모델인 부가티 시론 슈퍼 스포트 300+는 300mph(482.8km/h)를 넘어선 490.48km/h를 기록하여 500km/h에 근접했다. [12] 원조는 폰티악 아즈텍이고 실제로 아즈텍은 상당히 좋은 차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엄청난 혹평을 부른 디자인으로 더 유명하다. [13] 이쪽은 배기가스 절감이 아닌 모터를 이용한 빠른 탈출가속이 목적이다. [14] 세단의 승차감, 해치백의 편의성, SUV의 공간 활용성 및 왜건의 확장성, 때로는 스포츠 쿠페의 고성능 등. 파노라믹 선루프 옵션을 통한 컨버터블의 개방감 등 [15] 소형 해치백이나 세단의 경우 생산 대비 이익 등의 수익성이 SUV와 대비해서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많은 브랜드들이 단종시키고 SUV 계열 차종으로 바꿔가고 있다. [16] 전기 자동차 뿐만 아니라 내연기관 분야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연비가 좋은 엔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17] 2010년대에 주류가 된 삼원계배터리는 니켈의 함량을 높여가며 효율성을 높이고 있으며, 효율성이 떨어지고 날씨에 예민하며 고성능, 고용량, 고전압 파워트레인으로는 부적합하나 가성비가 강점인 인산철배터리가 보급형 전기 자가용의 배터리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인산철배터리의 보급형 포지셔닝을 추구하는 나트륨배터리, 제조공법이 복잡하고 단가가 비싸나 안정적이면서 성능과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항상된 전고체배터리, 그리고 리튬황배터리 등을 연구하고 있다. [18] 이쪽의 경우 호불호가 갈린다. 과거 현대 제네시스 쿠페의 경우 준대형 세단인 현대 제네시스의 섀시를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둔한 움직임과 넓은 선회반경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겼다. [19] 인공지능을 통해 자동차가 사용자에 맞춰 기능이나 세팅 등이 변화하는 SDV(Software Defined Vehicles)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자동차 플랫폼의 정의도 하체 등의 하드웨어 그 자체를 통한 정의에서 벗어나려는 행보가 포착되었다. # 기아 EV3의 E-GMP 플랫폼 논란도 이러한 전환과정의 과도기에서 발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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