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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플랜

유럽 부흥 계획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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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플랜의 1번째 장 "Whatever the weather
We must move together!"

"어떠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는 함께 해야만 한다!"
[1][2]
1. 개요2. 특징3. 지원 금액4. 평가
4.1. 외교사/안보사적 평가4.2. 경제사적 평가
5.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 문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유럽 자유 국가들의 재건과 경제적 번영을 위해 미국이 계획한 재건과 원조 기획이다.

2. 특징

당대의 정식 명칭은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으로, 일반적으로 외교가에서나 학계에서나 마셜 플랜으로 불린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이 제창했기 때문에 마셜 플랜 또는 마셜 계획이라고도 불리며, 제2세계 공산권의 세력이 유럽에서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 이에 소련은 "아예 서유럽을 통째로 사지?"라는 식으로 반발했으나 거저 준다는데 막을 명분도 없고 별 수 없이 서유럽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발전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마셜 플랜은 1947년 6월에 있었던 유럽-미국 회의에서 처음 제안됐다. 이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소련과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권 위성국들도 미국으로부터 이 계획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때 미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들에게도 자유 국가들과 동일한 원조 계획을 제시하며 초청장을 보냈다. 미국 입장에서 독소전쟁을 자국의 영토에서 치렀고, 그로 인해 2,000만명 사상자를 입은 소련,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국토가 쑥대밭이 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 역시 지원을 받을 명분 자체는 충분했기 때문에 제안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브레튼 우즈 협정과 아바나 헌장, 그리고 GATT를 기반으로 하는 세계적 자유 경제 체제를 수용하여 국내 시장을 국제적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한 효과적인 원조 제공과 재건 작업을 위해 정치적 개혁 작업에 착수할 것과, 외부 국제기구의 지속적 감독을 받을 것, 그리고 타 참여국들과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미국은 이 원조 계획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과거 추축국인 국가들을 포함시켰으며, 여기에 미국과 영연방군 점령 하의 서부 독일 지역 또한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소련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싶었고, 장기적으로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장해 이들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일 의지가 있었으며, 또한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다.

미국은 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 가입한 유럽 국가들에게 유럽 부흥 계획에 따라 1947년 7월부터 4년(회계 연도 기준)간 총 133억 달러에 해당되는 경제적·기술적 지원을 해 주었다.[3][4] 2024년 현재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이 금액에는 미국이 제공한 산업 기술 지원의 가치가 빠져 있고 UN 등 국제기구들을 통해 제공된 원조도 빠져 있으며 민간 영역에서 미국 법인들과 개인들 그리고 단체들에 의해 이뤄진 유/무상 원조 제공과 투자 금액도 빠져 있으니 미국이 유럽의 자유 국가들을 살리기 위해 쏟아부은 자원은 마셜 플랜의 산정액조차도 초과하는 천문학적 금액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이런 미국의 천문학적인 지원을 받은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은 빠르게 재건되었고 심지어 세계대전 이전보다도 훨씬 더 부유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면서 이들 국가들의 대부분은 냉전 기간 동안 굳건하게 미국 편에 섰고 프랑스 같은 이단아들조차도 결국 미국 편에 남아 있게 되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명한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스웨덴 같은 국가들에게도 지원을 제공하여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로 남았으며 친미 성향의 중립국으로 미소관계를 미국에 좀 더 유리하게 중재했다. 또 독일과 이탈리아 등 과거의 추축국도 적절히 지원하여 두 번 다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처럼 다른 마음을 먹는 불상사가 없도록 만들었으며 이들도 강력한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즉, 21세기 패권국으로서의 미국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원조 계획이 끝난 후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과 북유럽의 산업은 크게 부흥했다. 유럽인들은 고속도로, 철도, 항만, 발전소, 공항, 전력망, 통신망과 같은 사회 인프라들을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기술 지원 아래에 재건했고 더 나아가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그 후 오일 쇼크 이전까지 20년 동안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은 유례 없는 성장과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계획을 입안한 마셜은 이에 따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또 마셜 플랜은 유럽 내 각국의 관세 거래 장벽을 철폐하고 경제 수준을 맞추기 위해 설치한 기구 등을 통해 오늘날 유럽연합으로 이어지는 유럽 공동체 창설의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본래 이것들은 미국의 경영 방식을 체계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소련은 마셜 플랜에 대항하기 위해 1947년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인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1949년 1월부터 이것이 실행되었으며 경제상호원조회의, 일명 코메콘이라고 불리는 경제 협력 기구를 설립했다. 상기 영상은 마셜 플랜을 비판하고 제2세계 국가들의 경제협력을 촉구하는 1961년 작 소련의 선전 애니메이션이다. 초반에 인도, 이집트, 헝가리, 폴란드, 멕시코, 아프리카, 중국의 동전들을 보여주고 주인공인 코펙[5]과 손을 잡는 모습을 통해 공산권의 경제협력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퇴폐적인 파티를 벌이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동전들을 보여주며 서구권을 비판하고 있다. 1분 30초대에서 프록 코트 실크햇을 쓴 동전은 파운드 스털링이며 그 뒤에 등장하여 나치식 행진을 보여주는 동전들은 서독 마르크다. 서독 마르크들이 합쳐져서 전차와 대포로 변하는 장면은 서구권 국가들이 마셜 플랜을 통해 서독을 재무장한 것을 비난하는 의도가 담겨있다.[6] 4분 15초에는 센트도 술 마시기 좋아하고 코카콜라를 언급하며 힘을 자랑하는 한량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영국 파운드화도 그를 챔피언이라고 소개하며 아부한다. 마지막에는 소련 각지에서 튀어나온 동전들이 모여 선박, 발전소, 아파트들로 변신하고 주인공도 우주선의 나사가 되어 우주선이 힘차게 날아오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7] 즉, 사회주의권 국가들에게 사회주의권의 연대로 더 밝은 미래가 있을 것임을 약속하고 선전하는 영상이다.

다만 소련의 자본과 기술 역량이 미국의 그것에 못 미쳤기 때문에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경제 규모 자체는 작지 않았으나 개인과 가구가 누리는 삶의 질은 미국과 일본, 영연방 선진국들, 서유럽과 북유럽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고[8][9] 이것이 훗날 사회주의권 각국 시민들 스스로에 의해 냉전이 끝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3. 지원 금액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shall_Plan.png

마셜 플랜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 적색 막대기는 지원 금액의 상대적 정도를 나타낸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아일랜드, 스웨덴, 포르투갈, 스위스도 포함되어 있으며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아일랜드 등은 중립국으로 미국과 직접적 동맹 관계에 있지 않았다.

4. 평가

4.1. 외교사/안보사적 평가

마셜 플랜은 지금도 미국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압도적 우위를 잡게 되는 냉전 초기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거론된다.

20세기 후반 등장한 수정주의 성향의 서방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마셜 플랜의 근본적 동기와 전체적 효율성에 대한 의구심이 거론되기도 했다. 마셜 플랜을 통한 이익들은 사실 시장이 경제 성장을 통해 안정될 수 있게 한 신 무간섭주의 정책에 의한 이익들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수정주의의 요지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 계획이 정작 미국에는 별 이익이 없고 타국에 미국 세금만 들이부은 정책이라며 외국의 추락한 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경제는 도외시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냉전기 전체를 놓고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분석으로, 전후 폐허가 된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 지역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막대한 외부 지원이 필요했고 미국은 이들이 이미 철의 장막에 포박된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권으로 넘어가는 걸 막고 서유럽에서 자유주의 체제를 지켜낼 필요가 있었다. 특히 냉전 시대 유럽은 미국과 소련 양축의 두 초강대국의 최우선 이권 지역이었고 유럽 국가들을 재건해 자유국가이자 미국과 동맹인 국가로 만들고 이들을 소련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하는 것은 미국의 외교와 안보 모두에 중요했다. 게다가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막대한 경제 부양 효과를 본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보면 유럽의 참화로 얻은 혜택을 유럽에게 돌려준 셈이다.

그렇게 마셜 플랜으로 인해 미국은 소련의 대서양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통해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냉전기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미소 간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1차 전선은 유럽이니 본토인 미국에 바로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방파제의 역할을 해주었다. 또 최전선에 배치된 그리스 터키를 미국의 우방국으로 만들었는데 그리스 내전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그리스와 보스포러스 해협 통행과 카르스 요구로 소련의 큰 압력을 받던 터키를 우방으로 만들며 소련의 지중해로의 영향력까지 완전히 차단했다. 더 나아가 터키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세 축을 형성해 중동세계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할 기반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이 두 국가는 여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산업 기반도 전무하다시피 하고 경제 효율성도 상당히 떨어져 지나치게 큰 돈이 소모돼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마셜 플랜으로 유럽을 야금야금 잡아먹으려던 소련의 계획이 확실히 저지되었다.

한편 마셜 플랜 원조를 받던 네덜란드는 이 원조액 중 일부를 미국의 허락 없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전쟁 비용으로 멋대로 사용하여 미국과 소련을 자극하였는데 결국 이것 때문에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독립을 시켜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미국이 네덜란드를 압박한 것은 베트남과 달리 인도네시아는 지리적 위치상 소련이 공산주의를 퍼뜨리는 것이 쉽지 않고, 독립 진영의 지도자였던 수카르노 역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탄압하면서까지 반공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1993년 소련의 해체를 전후해 구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각지의 기밀문서들이 기밀 해제되고 영어를 비롯한 자유진영 각국의 언어들로 번역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현대 사학계는 전통주의, 수정주의, 후기수정주의 모두 마셜 플랜을 냉전의 본격적 시작점으로 재평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 기밀문서들에서 1945~47년 시점에서 스탈린에게는 자유 진영과 대결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폐허가 된 유럽을 방치했었다면 자생적으로 사회주의가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었고 소련 공산당도 분명 이를 기대하긴 했으나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소련 지도부는 자국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중시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소극적 자생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을 제외한[12] 서유럽을 비롯한 타 지역으로의 확장에는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치레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2차 대전 종전 시점까지 획득한 소련의 유럽 내 세력권을 완충지로 만들기 위해 적화하는 데 가용 자원을 집중 투자하던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은 독소전쟁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서쪽 유럽 방향의 완충지가 부족해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 수도인 모스크바 인근 지역까지 밀리고 제2의 도시인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포위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련은 자국의 안전은 유럽 지역 러시아의 안전이라고 생각해 동남아시아, 중동, 라틴 아메리카 등의 지역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이 이들 지역들에 단순히 "사회주의 형제"로서의 관심과 지원 수준이 아닌 국익의 확보를 위한 이권 지역으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마셜 플랜 이후였다.[13] 자신들의 안보가 확보되고 미국에 대한 군사적/전략적 열세가 충분히 만회되기 전까지는(충분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산업생산 능력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세력권 바깥에서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충돌[14]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로 1947년 이전에는 그리스와 터키의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마셜 플랜 이전의 소련이 타 지역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 여기서 소련이 타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을 아예 무시하게 되면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자국의 인민들 사이에서도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신이 깎여나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자국의 자원을 소모한다는 것과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은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최고위층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적당히 체면치레 정도만 하고 미국의 심기는 거스르지 않는 지점을 찾기 위해 애를 쓴 기록들이나, 미국에 보낸 협조와 이해를 요청하는 외교적 요청을 담은 문서들 또한 남아 있다. 물론 일본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등 열강 제국의 해체에 뒤따른 세계 각지의 힘의 공백 상황에서는 이런 소련의 체면치레를 위한 요식적 지원 행위조차도 기존 서방 제국들 입장에서 위협 행위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동맹국인 미국 또한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이런 구상 자체는 "결국 고도로 발달된 세계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자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다 자멸할 것이고 이렇게 자본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은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사회주의의 환상에 기인한 점이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을 통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이런 믿음을 더욱 구체화했는데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결국 마지막 남은 두 자본주의 강대국인 대영제국-영연방과 미국이 자본주의 세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여 자멸할 것이고 소련은 이런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멸 전쟁을 틈 타 국력을 다지고 세력을 키워 점차 유럽에서의 힘의 공백을 파고들어 유럽 각국을 적화하고 궁극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양대 강국인 영연방과 미국의 파멸 이후 전쟁에 지친 노동자들을 계몽-규합하여 전세계 사회주의를 달성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애초에 유럽을 내버려둔다는 것이 순수한 자국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어차피 영국과 미국 둘 다 서로 싸우다 망할텐데, 우리는 굳이 여기서 힘 뺄 필요 없이 그때까지 힘을 쌓으며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소련의 기대와는 다르게 미국에 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닌 패권투쟁을 포기하고 미국에 최대한 협조하는 쪽으로 노선을 굳힌 이상[15] 결국 어떻게 됐든 간에 미국과 소련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세력권을 미국이 존중할 것(=미국이 위협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16]과 다르게 미국은 소련이 전쟁 이전의 영역을 벗어나 중부 유럽까지 점령한 것 그 자체를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였으며 상기한 소련의 체면치레성 지원들을 보며 소련이 기만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미국은 소련의 반발을 무릅쓰고 엘베 강과 독일-체코 국경, 그리고 아드리아 해 서쪽의 국가들을 자유 국가들로 확고히 다지기 위해 서유럽과 북유럽, 남유럽 각국에 마셜 플랜을 강행하였고 이는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을 야기했다. 즉, 전후 소련의 자국과 자국의 정책에 대한 판단과 미국의 소련과 소련의 정책에 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야기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불신이 마셜 플랜을 야기하여 냉전의 시작을 촉발한 것이다. 한편 이렇게 마셜 플랜을 기점으로 시작된 냉전에 소련이 정면으로 대응하고, 더 나아가 때 맞춰 1949년 성공한 소련의 핵개발의 흐름에 올라타 냉전이 더더욱 심화되고 복잡화된 것이 결국 소련 붕괴의 시작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든 결국 마셜 플랜이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승리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 자체는 분명한 셈이다.

4.2. 경제사적 평가

경제사적으로 마셜 플랜은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체제 건설의 주요한 키워드로 꼽히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유무역을 비롯한 세계적 자유경제 체제의 시작이 된 사건들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대전 이후 마셜 플랜으로 촉발된 유럽의 경제적 풍요는 세계 경제사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경제 체제 하에서 서유럽과 북유럽 거의 모든 국가의 경제력은 전체 경제력에서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것도 모자라 더욱더 규모가 커졌다. 1인당/가구당 경제력도 이런 전체 경제력의 막대한 증가에 힘입어 크게 늘어났으며, 민간 전분야에서의 기술발전과 사회적 복지 국가 모델의 정착, 그리고 정치적 투명성과 공정성을 지향하는 개혁들로 말미암아 이런 1인당/가구당 경제력의 막대한 증가가 일반 개인과 가정의 생활수준도 극적으로 개선하였다. 즉, 유럽에서 이전 시대 상류층 수준 혹은 그 이상의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중산층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두터운 경제적 계층을 형성하게 된 것이며, 저소득층과 빈민층에서의 생활수준 또한 크게 개선되었다. 즉, 이전 시대에는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경제적 풍요가 유럽에 찾아온 것이다.[17]

이것은 유럽, 더 나아가서는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 없는 현상이었는데 20세기 초반까지도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인식되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국가 일반 대중들의 삶조차도 그렇게 풍요롭지 못한 편이었고 중산층의 비중거 현대 선진국들의 그것에 훨씬 못 미쳤으며 그나마 있는 중산층의 생활 수준도 넉넉하지 못했다.[18][19] 즉, 불과 한 세대 전에는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일주일에 한 두 번 먹는 것조차 사치였던 유럽의 가정들이 이제는 교외에 있는 마당과 차고가 딸린 2층짜리 집들에 입주하여 라디오, 텔레비전, 선풍기, 진공청소기, 세탁기 등 삶을 뒤바꾸는 갖가지 혁신적인 가전제품들을 사들이고[20] 주방에는 냉장고를 들이고 이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 우유, 세계 각지에서 신선하게 운송된 과일과 채소들 그리고 갖가지 고기들을 신선하게 보관하여 매 끼니마다 챙겨먹고 자가용을 이용해 주말에 가족들과 쇼핑센터나 문화시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여름 휴가철에는 지중해로 바캉스를 떠나고 멀리 있는 친구들과도 집집마다 있는 전화기를 이용해 수다를 떨고 TV 홈쇼핑 상품을 주문하는 풍요로운 삶을 즐기게 된 것이다.

5.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 문제

사실 냉전이 끝난 지금 와서 보면 마셜 플랜은 당대 서유럽의 경제를 일으켜세워 공산권의 침입을 막고 냉전 승리를 가져다 준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거론되지만 비판 역시 없진 않다. 특히 유효한 비판은 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서부 태평양 지역에 대한 상대적 방치와 무관심에서 이뤄진다. 쉽게 말해 당대 미국이 유럽만큼 동아시아에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21]

그리고 미국이 이렇게 유럽에 정신이 팔려 국가의 자원을 사실상 총동원하는 사이 미국의 관심 밖에 있던 아시아에선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민당의 패배와 국부천대, 그리고 6.25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이 일어났다. 마셜 플랜은 당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는데 둘 다 유럽에 비해 아시아에는 확실히 무관심했다. 덕분에 마셜과 애치슨은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대륙이 공산화되는 것을 방치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미국의 보수파들에게 비판을 받았으며 여기에 더해 애치슨의 경우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여 김일성 마오쩌둥에게 헛바람을 넣어 6.25를 유발한 것으로 지금까지 일각에선 비판받고 있다.

미국의 상대적 무관심과 방조가 중국 사태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었고 중국의 사회주의화에서 시작된 아시아에서의 도미노는 결국 6.25 전쟁 진먼 포격전,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예상치 못한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이라는 성과를 거둔 이후 소련은 동아시아 지역에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김일성과 호치민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을 후원하여 한반도 전역[22]과 인도차이나 지역을 사회주의 세계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23]

즉, 미국이 마셜 플랜으로 소련을 자극하였으면서도 또다른 전장이 될 가능성이 큰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에 대해서는 비판자 입장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 곳곳에서의 충돌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2차대전 직후의 동아시아는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이 아니었고 중동처럼 석유같은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사실 현재 21세기에도 서유럽이나 동아시아보다 낙후된 동유럽이나 중남미 같은 곳은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같은 경우도 2022년에 러시아가 전면적으로 침공하기 전까지는 크게 지원을 받지 못했고 나토에도 가입하지 못했으며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는 버리고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하자는 주장까지도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서유럽이나 동아시아, 석유가 있는 중동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당시 미국은 국민당이 버티는 중국만 있으면 소련이 크게 위협을 줄 수 없다고 보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 국민당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릴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실제로 소련은 당시까지만 해도 모스크바가 위치한 서부 핵심 지역과 동유럽의 영향력 확대를 더 중시했지 소련 입장에서 보자면 낙후된 깡통 시골 도시뿐인 극동 소련 지역은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은 중국의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영향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서 이쪽에도 투자하려고 하고 있다.

사실 미국의 책임을 따지자면 마셜 플랜보다는 중일전쟁부터 이어진 극동에 무지한 미국의 대중국 외교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24] 게다가 아시아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후 한국, 일본, 대만에 충분한 지원을 해서 저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는 했다.

6. 관련 문서


[1] 핀란드의 국기가 빠져 있다. 핀란드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어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여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마셜 플랜에서 제외되었는데 그럼에도 미국의 물밑 원조로 겨울전쟁 등으로 인해 산정된 소련 측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5년에 걸쳐서 갚아냈다고 한다. 룩셈부르크 국기가 빠진 대신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의 국기가 서독 국기와 이탈리아 국기 사이에 들어가 있다. 스페인도 이 포스터에서 빠졌는데 이는 스페인이 1930년대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체제가 들어선 후 2차대전 당시 내부의 사정이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때문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나치와 동조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으며 전후에도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파시즘적인 행보를 보였기에 연합국들에게 철저한 외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마셜 플랜에서 제안도 받지 못하였다. 같은 독재 체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친연합국 행보를 보이고 영국에 아소르스 제도의 비행장들의 착륙 허가를 내줬기 때문에 마셜 플랜 원조를 받은 옆나라 포르투갈하고는 대비되는 부분. [2] 풍차 날개에 그려진 국기는 유니언잭( 영국)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각각 포르투갈, 노르웨이, 벨기에, 아이슬란드, 독일( 서독),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 이탈리아, 덴마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튀르키예, 그리스, 프랑스의 국기이고 풍차 꼬리에 그려진 빨간 줄무늬와 파란 바탕의 흰 별은 미국을 상징한다. 미국이 뒤에서 유럽 국가들을 밀어주는-마셜 플랜의 내용을 상징화하는 포스터다. 마셜 플랜 해당 국가 중 스위스는 국기 모양이 정사각형이라 가로세로 비율 문제로 위 포스터에서 빠진 듯 하다. [3] 이를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약 1,870억 달러(약 224조 4000억 원)에 해당되는데, 이는 2024년 IMF 통계 기준 GDP 순위 56위인 에티오피아의 전체 GDP(2051억 달러)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참고로 마셜 플랜에 든 금액은 당시 미국 GDP(약 2500억 달러)의 약 5.3%, 미국 예산(약 425억 달러)의 무려 31.2%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 [4] 덤으로 아폴로 계획에 든 돈은 당대 가치로 254억 달러(1973년 기준),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1,722억 달러다. [5] 코페이카에서 따 온 이름. [6] 정작 소련도 동독 국가인민군을 만들고, 정보조직에 전직 게슈타포 요원들을 꽂아넣는 것을 지원했다. [7] 참고로 왜 동전들이 튀어나오냐면 1961년 당시 소련에서 화폐개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즉 소련 정부의 화폐개혁에 적극 참여하라는 선전도 들어 있는 셈. [8] 냉전 후반기 때에는 상위권 신흥국으로 급성장한 대한민국에도 밀렸다. [9] 체코슬로바키아나 동독, 그리고 소련 대도시 지역의 삶의 질이 자유세계 선진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재평가 움직임도 있으나 이는 명목상 물질적 수준에서 비슷한 수준까지 갔다는 이야기지, 실질적 수준이나 질적 수준에서는 크게 뒤떨어졌다. [10] 원래 계획은 독일 전역을 포함했지만 소련 점유 지역에는 제공되지 않았다. [11] 이후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에 분리 합병됨. [12] 동아시아의 경우 미국의 요청으로 만주국과 북위 38도 이북의 한반도 지역에 진주한 후 적화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마셜 플랜 이전 시점인 1946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1947년 이전 소련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하기할 소련의 체면치레성 지원의 사례 중 하나로 파악되기도 한다. [13] 마셜 플랜 이전부터 어쨌든 "사회주의 형제"인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었고 38도선 이북 북한 지역에 대한 적화 작업도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다만 만주나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 투사는 미국의 한반도 진주 요청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확보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후 마셜 플랜에 대한 대응을 겸해 이전부터 지원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여 전 중국의 사회주의화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고무되어 북한의 김일성과 베트남의 호치민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6.25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자들이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아랍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지원도 마셜 플랜 이후 크게 확대됐다. [14] 소련은 독일에 의해 본토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큰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 제국에 의해 이뤄진 진주만을 비롯한 하와이 일부 지역에 대한 공격이나 제트 기류 풍선 폭탄 공격 정도를 제외하면 본토에 입은 피해가 사실상 없었고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진 국가였다. 때문에 전략적 열세를 직감한 소련이 미국에 유화적 태도로 나온 것이었다. [15] 애초에 1945년 이후의 영국이 미국과의 패권투쟁을 할 이유와 국력이 없었다. 영국의 국력은 이미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이자 빅토리아 여왕 치세 말기인 20세기 초부터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후발주자들에게 밀리기 시작한 데다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일에 의한 본토 공습으로 안 그래도 부족한 국력이 더 줄어버렸고, 결국 미국이 본격적으로 유럽의 전장에 개입한 1942년 말 이후에는 아예 서방권 1인자라는 위치조차 뺏기고 종전까지 미국 보조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무제한이나 다름없는 인력과 자원을 가진 서방 진영의 새로운 맹주국인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면 그 결말은 매우 뻔했다. 설렁 영연방에 소속된 모든 국가를 미국과의 패권경쟁에 끌여들여도 역부족이다. 이는 대부분의 영연방 국가들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지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정도를 빼면 상태가 개판인데다 그나마 잘 사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셋을 다 합쳐도 당시 기준으로 2천만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구 소국이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영연방 회원국이 많아봤자 제대로 된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더군다나 엄연히 단일 국가인 미국에 비해 다양한 국가의 느슨한 연합체인 영연방은 기본조건부터가 매우 불리하다. 거기에 영연방 소속 국가들이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회원국들이 미국과의 패권다툼에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으며, 오히려 미영 패권분쟁으로 인한 영국의 약화를 틈타 과거 영연방 지역들을 먹으려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영국은 막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영국 수뇌부는 여러 불리한 조건들을 감수하면서 미국과 대결하느니 차라리 밑에 들어가는 대신 자유 진영의 명실상부한 2인자 자리라도 지키는 것이 나았다. [16] 이것은 소련이 독일과 직접 수많은 인명을 투입해 싸운 것을 미국이 인정해줄 것이라는 생각과 어차피 미국이 이길 수 있을 상대적으로 약소한 소련에 미국이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안일한 발상이었다. 실제로도 소련이 미국보다 상대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위협을 더 크게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전후 국력 차이가 극심했고 소련의 관점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침공한 러시아 내전의 기억이 소련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마셜 플랜에 대한 대응이 과격해졌다. 소련 입장에서 자신들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반면 미국은 아일랜드 내전 스페인 내전, 그리고 뮌헨 협정의 교훈을 상기하면서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빈곤 속에 혼란에 빠지게 둬서는 안 되며 또 다른 독재 국가인 소련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즉, 미국과 소련의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17] 반면 대상국의 경제력을 착취하고 자국의 배만 채우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많은 비교가 된다. [18] 그 예로 1875년 독일에서도 부유한 편이었던 알자스-로렌 출생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조차도 어린 시절 빠듯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는 없는 개신교 목사 집안의 자제였음에도 일주일에 두 번 고기 수프를 먹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그렇게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이웃집 아이를 두들겨 팼을 때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고기 수프를 먹을 수 있다면 너만큼 힘이 셌을 거야!"라는 악다구니를 들을 정도였다. [19]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대왕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국민이 매주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20] 앞서 언급된 제품들 중 진공청소기 세탁기의 경우 여성 가사노동의 강도와 투입 시간을 크게 줄여 여성 인력의 사회적 활용을 더욱더 촉진해 경제적 부의 증대에 크게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21] 사실 이건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미소가 동아시아에 집중한건 70년대부터다. [22] 한반도의 경우 처음에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후원하는 것을 주저하였으나 김일성의 자신만만한 호언장담과 끈질긴 회유, 거기에 마오쩌둥의 설득과 권고까지 겹쳐 북한의 전쟁 준비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23] 궁극적으로는 일본 내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하여 일본까지 소련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다만 미국 입장에서 보면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의 최후 보루 쯤 되는 일본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행사 시도는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한국과 인도차이나의 적화 또한 실패하거나 크게 지연되었기 때문에 실제론 소련이 일본에까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24] 물론 위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중국 대륙의 합법 정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였으며 이 중화민국은 미국과 한 편이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중화민국이 내부 문제로 인해서 패배하고 국부천대로 타이완섬으로 옮기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길 줄은 국민당과 미국은 물론이고 적대 세력인 중국공산당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아시아 공산 세력의 확장은 동아시아에 관심을 덜 준 미국의 실책도 있지만 내부 부정부패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전쟁을 일으킨 중화민국의 잘못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