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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영국 조지 6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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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0> 이름 |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거리트 보우스라이언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
출생 | 1900년 8월 4일 |
영국 런던 | |
사망 | 2002년 3월 30일 (향년 101세) |
영국 버크셔 윈저 로열 로지 | |
장례식 | 2002년 4월 9일 |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신체 | 키 157cm |
배우자 | 조지 6세 (1923년 결혼 / 1952년 사망) |
자녀 | 엘리자베스 2세, 마거릿 |
아버지 | 제14대 스트래스모어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
어머니 |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 |
형제 | 바이올렛, 메리, 패트릭, 존, 알렉산더, 퍼거스, 로즈, 마이클, 데이비드 |
종교 | 성공회 |
서명 |
|
공식 초상화[2] |
[clearfix]
1. 개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 |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최후의 왕실 인물로 영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보여준, 폭격 속에서도 국왕인 남편과 함께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하며 강하게 독려한 모습으로 영국인의 귀감이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 였다. 딸들을 캐나다로 피신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왕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하지만 그녀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영국이 제국을 칭할 수 있게 한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후였던 점도 한몫을 거든 것으로 보인다.
역대 영국 왕족 중 2번째[3]로 장수한 인물이다.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기에 태어나서, 빅토리아 여왕의 6대손인 윌리엄 왕자까지 보고 사망했다. 연도상으로 따져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무려 3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2. 작위
<rowcolor=#000> 문장 | 모노그램 |
- 아너러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The Honourable Elizabeth Bowes-Lyon ( 1900년 8월 4일 ~ 1904년 2월 16일)
-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Lady Elizabeth Bowes-Lyon ( 1904년 2월 16일~ 1923년 4월 26일)
- 요크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York ( 1923년 4월 26일 ~ 1936년 12월 11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 엘리자베스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4]( 1952년 2월 6일 ~ 2002년 3월 30일)
일반적으로 이름보다는 퀸 마더(Queen Mother), 즉 왕대비로 잘 알려져 있다. 남편인 조지 6세의 서거 후 선왕의 왕비인 그녀에게 올려질 칭호는 Queen Dowager(왕대비, 미망인 왕비)였으나 본인은 이 칭호가 너무 격식에 얽매여 있다면서 보다 친숙한 명칭인 Queen Mother를 스스로 선택했다. 장녀이자 다음 왕인 엘리자베스와 이름이 같아서 그냥 '퀸 엘리자베스'라고 부르면 엄마인 엘리자베스인지 여왕인 엘리자베스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니 바꾼 것. 우리나라 식으로 번역하면 '여왕의 모후' 정도의 의미가 된다.[5] 다만 스스로 선택한 칭호였음에도 퀸 마더는 자신의 칭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진짜 Queen이 아닌 왕의 어머니라는 느낌이 강한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3. 생애
3.1.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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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그녀의 위로는 바이올렛, 메리, 패트릭, 존, 알렉산더, 퍼거스, 로즈, 마이클이란 형제들이, 밑으로는 데이비드라는 남동생이 1명 있었다. 이 중 바이올렛은 엘리자베스가 태어나기 7년 전 11살의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퍼거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사했다.
3.2. 결혼
성장한 엘리자베스는 1921년 조지 5세의 차남인 요크 공작 앨버트(훗날의 조지 6세)에게 첫 프로포즈를 받았다. 그런데 여느 왕자들의 청혼과는 달리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왕실의 일원이 되면 자유롭게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조지 6세가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도대체 어떤 처자이길래 버티[7]가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나'라며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관심을 보였고, 조지 5세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고[8] 그녀를 만난 메리 왕비는 "버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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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기념 사진[9] |
결혼식 후 부부는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군중들을 향해 발코니 키스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영국 왕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해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미들턴 등 주요 왕실 인물들의 로열 웨딩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되었다.
또 엘리자베스는 결혼식에서 입장하는 도중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한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며 무명용사의 묘에 부케를 올려놓았는데, 이후 로열웨딩이 있을 때마다 신부의 부케를 무명용사의 묘 위에 올려놓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사실 서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이라 하여 왕족은 같은 급의 통치 가문 출신과 결혼해야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본인 및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는 등의 불이익을 주는 전통이 있었다. 때문에 명문 세도가도 아닌 스코틀랜드의 평범한 백작가 출신[10]이었던 엘리자베스는 직계 왕족인 조지 6세와 결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원래 귀천상혼이 엄격하지 않았던데다, 조지 6세 역시 후계자가 아닌 차남이었어서 엘리자베스는 그와 결혼해 왕자비가 될 수 있었다.
당장 시어머니인 메리 왕비도 조지 3세의 증손녀[11]이긴 했으나 아버지가 왕족이 아니었다.[12] 때문에 메리 왕비는 결혼 전까지 애매한 위치에 속했는데,[13]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대모이자 시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주선으로 조지 5세와 결혼할 수 있었다.
3.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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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가족 사진[14] |
요크 공작과 두 딸을 데리고 화목하게 생활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국인의 호감을 샀으며, 여러 공식석상에 활발하게 드나들어 시민들이 '미소짓는 공작부인(Smiling Duchess)'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산업 현장을 시찰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남편 요크 공작이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인해 남편 앨버트 왕자가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엘리자베스 가족들의 단란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3.4. 왕비
3.4.1. 세 왕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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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시절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결혼 당시 파격적인 일이라고 평가받았던 요크 공작과 엘리자베스의 결혼과 비교하면 영국 국민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결혼할 당시 요크 공작은 왕세자가 아닌 일개 왕자(그것도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갖게 되면 왕위와는 완전히 멀어질)였으므로 배우자 선택에 대한 국민들의 기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또한 엘리자베스가 비록 타국의 통치 가문은 아니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의 혈통도 있는 레이디였으며 무엇보다 영국인이었기에[17] 국민들도 둘의 결혼 소식에 깜짝 놀라기는 했을지언정 받아들이고 축복해주었다.
반면 에드워드 8세는 현직 왕이므로 배우자인 왕비는 당연히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준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었다. 테크의 메리처럼 통치가문의 영애는 아닐지언정 왕실의 혈통을 타고난 영애를 기대했을 것이다. 헌데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 그것도 영국인이 경멸해 마지않던 미국인인 심프슨 부인[18]을 앉히겠다는 것에 국민들이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왕세자 시절부터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8세였으니 심프슨 부인이 여자친구 정도로 머물렀더라면 구설수에 오르내릴지언정, 적당히 눈감아 줬겠지만 그런 여자를 왕비로 앉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내각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이 "2번이나 이혼한 이혼녀랑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심프슨 부인과 연을 끊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최후통첩을 보냈고, 그러자 에드워드 8세는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다"며 왕위를 포기해버렸다.
요크 공작은 형의 왕위 포기 소식을 접한 날, 메리 왕대비에게 매달려 엉엉 울 정도로 즉위하기를 주저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이 소식에 놀랐으나, 남편 곁에서 '분명히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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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을 마친 후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
한편 영국의 왕비 자리를 목전까지 뒀던 심프슨 부인은 격렬한 반대로 인한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때문에, 엘리자베스에게 왕비 자리를 빼앗기자 이를 매우 분하게 여겨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8세는 양위 후에도 윈저 공작의 직함을 받으면서 '전하'라는 경칭을 받았지만, 그의 배우자인 심프슨 부인은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을 받지 못했다.[21] 이것도 엘리자베스가 심프슨 부인을 견제하며 극렬히 반대한 결과였다.[22] 이러한 두 사람의 감정 싸움은 남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어 엘리자베스는 심프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만 불렀고 심프슨 부인도 엘리자베스를 '쿠키(cookie)[23]'라고 불렀다.
둘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 엘리자베스는 미국인 평민 주제에 대영제국의 왕비 자리를 넘본 심프슨 부인을 싫어했고, 그 영향으로 이혼이라는 행위 자체와 이혼녀를 혐오하게 되었다. 훗날 자신의 차녀, 외손녀, 외손 자들이 지독한 가정 불화 끝에 이혼을 할 줄은 그녀도 몰랐겠지만.
3.4.2.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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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미국 순방 당시[24] |
이 때 런던이 집중 포화를 맞았고, 각료들은 왕실이 교외로 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와 조지 6세는 단호하게 거부, 버킹엄 궁전에 체재하는 목숨을 건 모범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겁을 먹기는 커녕 버킹엄 궁전의 담장이 독일군의 폭탄에 맞아 무너지자 "이제야 우리 국민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하는 등 강인한 저항의지를 보이며 영국인을 독려해 히틀러로 하여금 그녀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지 6세와 함께 공습으로 파괴된 런던 시내를 시찰하며 시민들을 위문해 정신적 지주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후 주변국의 동참을 촉구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해외를 국빈방문하는데 이때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캐나다[25]를 방문하기도 했다.
3.5. 왕대비
3.5.1. 퀸메이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7년 8월 14일부로 인도 제국이 해체됨에 따라 조지 6세는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이래로 영국 국왕이 겸임하던 인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녀 역시 인도 황후의 직함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영제국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쇠락하는 가운데 전후 재건 등 각종 현안들을 돌보느라 과로에 시달리고 심신이 쇠약해진 조지 6세는 국정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시가를 줄담배로 피웠는데 이로 인해 폐암에 걸려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다가 1952년 2월 6일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는 사랑타령 때문에 왕위를 동생에게 무작정 떠넘긴 시숙과 그 원인을 제공한 심프슨 부인을 더욱 더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에드워드 8세의 장례식 날 심프슨 부인이 슬퍼하는 것을 봤을 때는 남편이 막 죽었을 무렵의 자신을 떠올린 건지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엘리자베스는 왕대비가 되어 시어머니인 메리 대왕대비와 함께 왕실의 어른으로서 맏딸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는데 메리 대왕대비마저 1년 뒤인 1953년 3월 24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최고 어른으로 남아 왕실의 버팀목이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경칭은 'Her Majesty Queen Elizabeth The Queen Mother'인데, 딸이 국왕으로서의 존호를 미들네임인 알렉산드라와 메리가 아닌 엘리자베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대비의 경칭을 따라 'Queen Elizabeth'로 정하면 딸의 존호와 너무나 유사해져서 대중에게 혼동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초기 섭정으로 임명되어 국왕 업무를 대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엘리자베스 2세 부부가 해외 순방을 나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영연방 순회 방문 당시에는 무려 6개월 동안 순방이 계속되기도 했다. 당시 왕대비는 국왕 업무를 대행하는 것에 큰 흥미와 의욕을 느꼈으며, 남편의ㅡ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여러 공무 활동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영연방 순회 방문이 끝나고 엘리자베스 2세가 돌아온 후에도 미련이 남았는지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종종 나라 밖 소식이나 국정 현안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3.5.2. 이혼녀에 대한 반감
남편 사후 50년간 왕대비로 지내면서 왕실이 과거 대영제국 시절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엘리자베스는 그 일환으로 쳇바퀴 돌듯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복잡다단한 각종 의전과 의례, 엄격한 왕실 생활을 고령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997년에 손자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다음날 당시 왕실 휴양지에서 함께 머무르던 증손자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니 알리지 말고 그날 아침도 계획된 일정대로 진행할 것을 의전관에게 명령할 정도였다.[26]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이애나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으로부터 '너무나 냉정하다'고 비난받았다. 여기엔 평소에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다이애나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손윗동서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험악했던 관계[27]탓에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후의 다이애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다이애나를 이용한 가해자인 자기 손자를 책망하고 미워해야지 피해자인 다이애나에게 이런 짓을 하니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비판점이다.[28]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딸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왕족이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왕실을 향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필립 공과[29][30]찰스와 윌리엄, 해리 부자가 반발한데다[31] 토니 블레어 총리까지 여론을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자 엘리자베스 2세는 결정을 번복해 장례식에 참석함으로써 모후의 뜻을 어쩔 수 없이 거슬렀다. 이 당시의 상황은 영화 <더 퀸>에 잘 드러나 있다.[32]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대비는 이혼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매우 싫어했다.[33] 그래서 찰스 왕세자는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카밀라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정작 손자인 찰스 3세는 이혼 문제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34] 그러나 왕실의 최고 어른인 보우스라이언이 이혼녀를 워낙 싫어하던 탓에 찰스 3세는 왕대비의 살아생전 카밀라와의 결혼을 꿈도 꿀 수 없었다.[35] 이런 쪽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혼녀에 대한 지나친 반감으로 왕실 전체가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영국 국민들에게 또 다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위에 서술했듯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여왕을 설득했고, 여왕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결국 왕실 전체가 참석하기는 했다. 만약 왕실이 다이애나의 죽음에 무관심했다면 왕실이 폐지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3.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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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생일 기념 사진[36] |
고령에 건강이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왕실 공무를 수행했는데, 주변인들에게 "시간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내가 바로 시간의 지배자이다. 나는 백성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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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소식을 알리는 BBC 뉴스속보 |
관은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사흘간 안치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2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영국인의 애도 속에 장례예식은 4월 9일 국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해는 남편 조지 6세와 작은딸 마거릿이 잠든 윈저 성 내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그녀의 나이는 101세로 영국 왕실 역사상 최장수 기록이었으나, 2004년 10월 29일 여왕의 숙모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40]가 102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깨졌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큰딸인 엘리자베스 2세 역시 96세까지 장수하며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이자 가장 재위기간이 긴 군주가 되었다. 영국 왕실 관계자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가 2016년 90세가 됐을 당시에 왕대비가 90세를 맞이했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강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41]
4. 평가
시어머니 메리 왕비와 함께 영국 왕실의 버팀목이자 영국의 명군 조지 6세의 아내인 동시에 대영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대영제국의 마지막 황후였기 때문에 영국 뿐만 아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동양과 서양에 현존하는 왕비/황후들 중에 유일하게 100세 넘게 장수한 인물이다.조지 6세와 결혼하면서 요크 공작부인이 된 초기부터 공식석상에 자주 등장해 미소를 지어서, 사람들에게 미소짓는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영국 왕실의 입지를 단단히 세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 조지 6세와도 금슬이 좋아 슬하에 토끼같은 두 딸을 낳아 가정적으로 화목한 모습을 보여줬고, 왕실의 둘째며느리로서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서 시부모였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42]
상냥하고 명랑하지만 파이터 기질이 있는 강한 성격, 작은 고추가 맵다는 한국의 속담처럼 작은 체구[43]에서 나오는 깡, 강한 멘탈과 용감함과 열렬한 내조는 수많은 영국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실제로 앞서 서술되어있는 일화만 봐도 엘리자베스 왕비의 용감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왕비가 된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끝까지 버킹엄 궁전에 남아 국민들을 독려하며 왕비의 모범을 보여줬다. 또한 남편 조지 6세가 언어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조지 6세를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이끈 영국의 명군으로 만들었다며 킹 메이커로 불리기도 한다. 별명에 걸맞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엘리자베스 왕비의 트레이드 마크.[44]
남편 조지 6세 사후 장녀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 엘리자베스는 왕실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아줬으며, 시어머니 메리 대왕대비가 사망한 이후에 왕실의 큰 어른이 되어 각종 의전과 공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2002년도에 사망하고 나서 영국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영국을 위해서 시어머니 메리 왕비의 투철한 책임감과 엘리자베스 왕비의 용감한 태도는 오늘날 영국 왕실에 있게 하는 비결 중 하나라고 평가 받고 있다.
5. 가족관계
5.1. 자녀
|
1980년 딸들과 함께[45]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
1926년 4월 21일 | 2022년 9월 8일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슬하 3남 1녀[46] |
2녀 |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
1930년 8월 21일 | 2002년 2월 9일 |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슬하 1남 1녀 |
6. 여담
- 지출을 줄여 왔던 다른 왕족들과 다르게,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조지 6세가 남긴 재산을 사치와 도박으로 모두 탕진해 엘리자베스 2세가 생활비를 지급했는데, 왕대비와 마거릿 공주를 위해 매년 클래런스 하우스에 지급하는 생활비가 버킹엄 궁전 식구들이 쓰는 생활비와 맞먹었을 정도라고 한다.[49] 평소 나들이할 때마다 운전사, 하인 1명, 하녀 2명, 경호원 1명을 대동했으며, 왕실은행에서 400만 파운드를 초과 인출했을 정도로 씀씀이가 컸다. 여왕은 매년 200만 파운드를 지급했으며, 찰스 왕세자는 퀸 마더가 거느린 80여명의 식솔들의 임금을 위해 연간 8만 파운드를 지급했다고 한다.
- 런던 시내 리츠 칼튼 호텔에서 식사를 했고 음주가무도 꾸준히 즐긴 주당이었다. 왕대비궁 정원을 비롯해서 자택 곳곳에서 기상부터 아침 점심 저녁 및 식전 시간에 삼시세끼를 와인, 샴페인, 꼬냑 등을 골고루 섭취했다.[50]
- 그녀가 주최하는 오찬 및 만찬은 사치스러움으로 유명했으며, 피크닉을 갈 때는 하인들이 먼저 은식기와 도자기, 음식을 들고 앞섰다고 한다. 당시 왕대비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 역시 값비싼 보석과 귀금속을 몸에 치장하고 다녔다. 너무 사치스러웠던 나머지 당시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줄 알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클래런스 하우스는 모네 등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했으며 한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졌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포함해 많은 보석도 소장했다.
- 생전 외손자인 찰스 3세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찰스의 어린시절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해외 순방을 나가는 일이 많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엘리자베스의 아이들을 도맡아 양육했기 때문이었다. 또 어린시절 찰스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는데, 이러한 찰스의 재능을 알아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찰스가 예술활동과 정원 가꾸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현재도 찰스는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영향을 받아 그림 그리기와 정원 가꾸기가 취미이며, 특히 그림은 전시회까지 여러번 개최했을 정도로 실력이 좋다.
- 엘리자베스 2세와 마거릿 공주가 학교를 다니지 않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시어머니 메리 왕비는 공주들을 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제 자매들도 모두 가정 교사에게만 교육을 받았고, 우리 모두 아무 문제 없이 결혼했습니다"라고 반응하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나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계승자 신분이 되면서 헌법과 역사 등 통치에 필요한 학문을 추가적으로 교육 받았으나, 마거릿 공주는 일반적인 교양 수업 외에는 제대로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훗날 마거릿은 자신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어머니를 원망했으며, 엘리자베스 역시 이를 후회했다고 한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국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가 학식이 높은 정치인들을 제대로 상대하는 것이 어렵자, 어린시절 학교를 보내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7. 대중매체
- 조지 6세를 다룬 영화 킹스 스피치에선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엘리자베스 왕비 역할을 연기했다. 다만 실제 인물과 배우의 풍채 차이가 좀 크다는 의견이 있었다. 실제 엘리자베스 왕비는 전반적으로 살집이 있고 수더분한 인상에 가까운데, 헬레나 본햄 카터는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이기 때문이다.
- 딸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드라마인 더 크라운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자세한 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더 크라운) 참조. 시즌 1~2의 배우는 빅토리아 해밀턴, 시즌 3~4의 배우는 마리온 베일리다. 이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개그캐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북극(Arctic)과 남극(Antarctic)를 헷갈려 하는 모습. 하지만 조지 6세 사후 영국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엄격한 왕대비의 모습도 잘 묘사하며, 실제 역사처럼 월리스 심프슨을 비롯한 이혼녀에 대한 반감도 잘 드러난다.
이후 시즌 3에서 손자
찰스 왕세자가 평민
카밀라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자, 이를 막기 위해
루이 마운트배튼과 함께 카밀라를 그녀의 전애인인 앤드루 파커 보울스와 결혼시킨다. 시즌 4에서는 손자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가
찰스 왕세자의 불륜으로 고통받고 왕실에서 고립되어가는데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훗날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차가운 반응을 예상케 한다.
- 한국에서는 킹스 스피치 연극판에 연극배우 양서빈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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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재위 시기 |
왕비 시절 (
제2차 세계 대전) 왕대비 시절 |
||
가족 관계 | 배우자 조지 6세 · 장녀 엘리자베스 2세 · 차녀 마거릿 공주 | ||
대중매체 | 더 크라운 · 킹스 스피치( 킹스 스피치 연극판) | ||
기타 | 영국 · 윈저 왕조 · 대영제국 · RMS 퀸 엘리자베스 · 세 황제의 해 · 월리스 심프슨 · 킹 조지 6세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 |
[1]
아래의 사진에서 착용하고 있는
티아라는 영국의 여성 부호 마가렛 그레빌의 것으로, 그녀가 죽은 후 당시 왕비였던 퀸 마더에게 헌사한 것이다. 그레빌 여사가 이 티아라를 최초로 구매한 후 부쉐론 사에서 현재의 모습과 유사하게 재디자인했고, 퀸 마더가 한 번 더 보석 브랜드인
카르티에에게 재디자인을 의뢰해 현재에 이르렀다. 마가렛 그레빌은 영국 왕실과 교분이 깊은 인사로
에드워드 7세와 교제하던
앨리스 케펠에게 밀회 자리로 자신의 저택을 주선하고, 그 손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모친의 대모이기도 했다. 현재 이 티아라와 다수의 보석은 카밀라가 대외적으로 착용하고 있다.
[2]
1938년 즉위를 기념하여 제작된 초상화로, 1939년에 공개되었다. 남편
조지 6세의 초상화와 비교했을 때 좌우가 반전된 구도로 그려졌다.
#
[3]
1번째로 장수한 인물은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아랫동서인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다.
향년 102세.
[4]
본래 전통적으로 왕대비는 Her Majesty Queen Mary(메리 왕대비 폐하)와 같이 경칭 뒤에 이름만 붙이는 식으로 작위를 사용했으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같은 경우, 국왕인
딸이 엘리자베스를 호칭으로 선택함에 따라 구분을 위해 'The Queen Mother'라는 칭호를 추가해 사용했다.
[5]
그녀의 생전에는 국내 언론에서도 '왕대비'와 '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혼용해서 썼다.
[6]
이 당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출생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시 쓰여진 일기 같은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7]
조지 6세의 본명인 앨버트의 애칭.
[8]
민심을 읽었던 조지 5세는 스코틀랜드의 유서깊은 가문의 영애이자 자국민인 엘리자베스와 앨버트와의 혼인이 국민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또한 요크 공작 앨버트는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의 왕족과 결혼할 필요성이 적었던 면도 있었다.
[9]
왼쪽부터 아버지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어머니 세실리아 보우스라이언, 엘리자베스, 남편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 시어머니
메리 왕비, 시아버지
조지 5세
[10]
같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이 모두 동급인 것은 아니다. 가문의 역사, 왕실을 위해 봉사한 이력, 재산, 권력, 개인적 인연 등으로 많은 급이 갈린다.
[11]
어머니 케임브리지의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가 조지 3세의 친손녀로, ‘Princess/공주’ 작위와 ‘HRH/전하’ 경칭을 가진 고위왕족이였다.
[12]
메리 왕비의 할아버지인 알렉산더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일원이었지만, 메리 왕비의 할머니 클라우디아는 평범한 헝가리 백작가의 영애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취급되었으며(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계 국가들은
살리카법과 귀천상혼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사이에서 태어난
테크 공작 프란츠는 왕족이 아닌 귀족에 속하게 되었다. 이 테크 공작 프란츠가 메리 왕비의 아버지다.
[13]
어디까지나 장래
왕비 후보라는 기준에서였지, 일반인까지 갈 것 없고 며느리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비교하더라도 까마득히 높은 신분이다.
[14]
왼쪽부터 남편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 공녀, 엘리자베스, 차녀
요크의 마거릿 공녀
[15]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스스로 '릴리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6]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왕위에 물러나면서
조지 6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그의 승하 이후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엘리자베스 2세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17]
둘의 결혼식 당시는
1차 대전 종전 후 4년도 지나지 않았다.
[18]
심프슨 부인의 첫 번째 남편은
알코올중독자에 별거 생활이 잦았기 때문에 이혼한 것이지만, 2번째 남편은 딸까지 있는 유부남이 심프슨과 밀회를 벌이다가 결국 이혼한 뒤 결혼한 것이였다. 심프슨은 이렇게 사생활이 난잡한 걸로도 모자라서 2번째 결혼을 한 지 몇 년 만에, 에드워드 8세와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였다.
[19]
원래 이 날은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갑작스럽게 퇴위하면서
조지 6세 부부가 그대로 이어받아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20]
2023년 외손자
찰스 3세의
대관식 당시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이 왕관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와 관련한 논란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왕관 대신
메리 왕비의 왕관을 사용했다.
[21]
대신 그녀가 받은 경칭은 Her grace. 대략
저하 정도 되는 경칭.
[22]
한마디로 왕족이 아닌 일개 귀족으로만 인정해 주겠다는 것. 심프슨 부인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반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3]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통통한 데다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24]
엘리너 루스벨트,
조지 6세, 사라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5]
이때 엘리자베스 왕비의 방문을 기념해 만든 공원이 밴쿠버에 있는 퀸 엘리자베스 파크(Queen Elizabeth Park). 언덕 위에 올라가면 밴쿠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으로 유명하다.
[26]
다만
딸과
사위,
손자가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다.
[27]
실질적으로 그녀가 아주버니였던 에드워드 8세와 불륜을 저지른 까닭에 왕위가 남편이었던 조지 6세에게로 옮겨졌고 왕의 책무를 감당하지 못한 남편이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사망했으니 어떻게 보면 원흉이나 다름 없을 터였다.
[28]
이게 얼마나 내로남불이냐면 자신의 차녀
마거릿 공주와 손녀
앤 공주 역시 이혼녀다.
[29]
윌리엄과 해리가 장례식에 나가면 자신도 그 옆에서 걸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자들 편을 들어줬다. 그리고 약속대로 장례식 날 손자들과 나란히 관 옆을 지켰다. 여담으로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기 전 왕실 인사들 중 유일하게 다이애나의 아픔을 알아준 이가 필립 공이었다고 한다.
[30]
필립 공 역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결혼하기 전부터도 왕대비의 반대에 직면해 있었을 뿐 아니라 위의 누나들이 나치 당원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장모인 왕대비로 부터 독일 놈이란 욕까지 들어야 했을 정도로 평탄치 못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31]
자신들만이라도 참석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32]
만약 엘리자베스 2세가 모후의 뜻대로 왕실에 다이애나 장례식 불참 명령을 내렸다면, 왕실은 끝장이었다. 당시 영국에선 공화제 전환 지지율이 50%가 넘을 정도로 왕실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게다가 찰스 왕세자의 불륜에 힘들어하는 다이애나를 엘리자베스 2세가 방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과 영연방 왕국 국민들은 찰스 왕세자와 영국 왕실을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고 있었다.
[33]
더구나 카밀라는 남편을 두고 찰스랑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반감이 더더욱 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4]
찰스만 그런 게 아니다. 찰스의 아버지
필립 공도 1953년에 있었던 처제
마거릿 공주와 이혼남인 피터 타운젠드
영국 공군 대령의 결혼 문제가 터졌을 때,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했을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이혼 문제에 그다지 신경을 안 썼다. 찰스가 왕실 일가 중에서 개방적인 마인드를 지닌 게 아니라,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유독 이혼녀를 싫어했던 것 뿐이다.
[35]
영국 왕실은 서열관계가 피 말리도록 엄격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성격, 관례를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36]
왼쪽부터 장녀
엘리자베스 2세, 외증손자
웨일스의 윌리엄 공자, 엘리자베스, 외손자
웨일스 공 찰스
[37]
2002년
BBC가 조사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에서는 당시 현직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제치고 6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38]
매년
군기분열식이 진행되는 호스 가드 퍼레이드에서 기념 행진과 공연이 열렸으며, 왕대비가 입장할 때는
God Save the Queen과 대관식 찬가 'I Was Glad'가 연주되었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버킹엄 궁전 발코니 인사도 있었다. 국왕 배우자의 생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큰 규모였으며, 거의 주빌리 행사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39]
사망 며칠전에는 죽음을 직감한듯 지인들을 모두 불러모아 작별 인사를 하기도 했다.
[40]
조지 5세의 3남
헨리 왕자의 아내.
[41]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긴 격리 기간과 남편
필립 공의 사망을 겪으면서 몇년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2022년에는 코로나19까지 감염되면서 결국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사망했던 나이보다 이른 96세에 사망했다.
[42]
조지 5세의 며느리들 중 둘째 며느리였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제일 예쁨 받았다고 한다. 시어머니인 메리 왕비도 처녀 시절의 엘리자베스를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해서 조지 6세에게 어서 청혼하라고 할 정도였다고.
[43]
엘리자베스 왕비의 키는 157cm이다.
[44]
실제로 엘리자베스 왕비가 요크 공작부인, 왕비와 왕대비 시절 미소를 짓거나 웃으면서 찍힌 사진이 꽤 많다.
[45]
왼쪽부터
마거릿 공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엘리자베스 2세
[46]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47]
크리스티안 9세의 3남
발데마르 왕자의 친손자다.
오스카르 2세와
프레데리크 8세의 외증손자기도 하다.
[48]
앤 보우스라이언에게는 게오르그 왕자와의 결혼이 재혼. 원래대로라면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어 게오르그 왕자는 로젠보리 백작(근현대 덴마크에서 귀천상혼한 왕자에게 내리던 귀족 작위)이 되었어야 했으나, 결혼 당시 조지 6세가 프레데리크 9세에게 요청하여 왕자 칭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단, 두 사람 결혼에서 자녀는 없다.
[49]
앤드루 왕자가 태어나기 이전을 기준으로 잡아도 엘리자베스 2세 일가 4명이 사용하는 만큼의 생활비를 왕대비와
마거릿 공주 2명이 사용했다는 소리가 된다.
[50]
그러나 그녀도 공무를 수행하던 왕족인만큼 술 문제로 공무에 지장이 생긴 적은 없었던 것 같고, 오히려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데 큰 뒷소문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