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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2:20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설립자 및 총봉사자
O.F.M.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cus Assisiensis
파일:아시시의성프란치스코.jpg
기도하는 성 프란치스코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colbgcolor=#705033,#705033><colcolor=#dccdb6,#dccdb6> 본명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
(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출생 1181년
신성 로마 제국 스폴레토 공국 아시시
사망 1226년 10월 3일 (향년 44~45세)
교황령 움브리아 아시시
학력 산 조르조 성당[1] 교리 학교 ( 라틴어 / 졸업)
직업 성직자( 부제/ 수도자), 신학자, 시인, 작곡가
종교 가톨릭
소속 작은형제회
재임 기간 작은형제회 설립자 및 총봉사자
1210년~ 1226년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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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설립 초대
프란치스코 ( 1210년~ 1226년) 조반니 파렌티 ( 1227년~ 12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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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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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5033,#705033><colcolor=#dccdb6,#dccdb6> 성인명 가톨릭(한국): 프란치스코
성공회(한국): 프란시스
[언어별 명칭]
라틴어: 프란치스쿠스 아시시엔시스
(Franciscus Assisiensis)
영어: 프랜시스 오브 아시시
(Francis of Assisi)
프랑스어: 프랑수아 다시스
(François d'Assise)
이탈리아어: 프란체스코 다시시
(Francesco d'Assisi)
스페인어: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Francisco de Asís)
포르투갈어: 프란시스쿠 디 아시스
(Francisco de Assis)
독일어: 프란츠 폰 아시시
(Franz von Assisi)
네덜란드어: 프란시스쿠스 판 아시시
(Franciscus van Assisi)
그리스어: 프란기스코스 티스 아시지스
(Φραγκίσκος της Ασίζης)
폴란드어: 프란치셰크 즈 아시슈
(Franciszek z Asyżu)
에스페란토: 프란치스코 엘 아시조
(Francisko el Asizo)
러시아어: 프란치스크 아시스키
(Франци́ск Асси́зский)
루마니아어: 프란치스크 데 아시시
(Francisc de Assisi)
체코어: 프란티셰크 즈 아시시
(František z Assisi)
헝가리어: 아시시 페렌츠
(Assisi Ferenc)
튀르키예어: 아시실리 프란시스
(Assisili Fransis)
아랍어: 파란시스 알 아시지
(فرنسيس الأسيزي)
일본어: 앗시지노후란체스코
(アッシジのフランチェスコ)
중국어: 야시시더팡지거
(亚西西的方济各 / 亞西西的方濟各)
시성 1228년 7월 26일
교황령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주례
칭호 하느님 음유시인
상징물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 성흔, 십자고상, , 해골
축일 9월 17일[2]
10월 4일
수호 동물, 빈민, 상인, 생태학, 이탈리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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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생애
3.1. 유소년 시절3.2. 회심과 세속 단절 선언3.3. 작은형제회 설립3.4. 성 클라라 수도회와 3회 설립3.5. 순방 선교 활동3.6. 작은형제회 개편3.7. 말년과 죽음
4. 사후 공경 및 영향
4.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5. 대중 매체6. 어록7. 여담
7.1. 동물과의 교감7.2.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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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l trovatore di Dio
하느님의 음유시인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칭호
이탈리아 부제, 수도자, 신학자, 시인, 그리고 작곡가.

그는 생전에 뛰어난 지성과 빼어난 글솜씨를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라틴어 작문이 만연했던 당시에 이탈리아어 방언만의 언어적 아름다움을 살린 신비스럽고 미려한 글을 지은 최초의 이탈리아어권 시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그는 겸손한 성품과 포용력 있는 태도를 지닌 것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지내고 동물들을 소중히 대하는 소박하고 자연 친화적인 자세를 보여 주어 뭇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아울러 그는 작은형제회, 성 클라라 수도회, 프란치스칸 3회의 설립자이자 작은형제회의 실질적인 초대 수장[3]으로서 세속의 욕망을 등진 채 겸양의 마음으로 오로지 신앙과 봉사에 전념하는 청빈한 수도 정신을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그는 하느님 음유시인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기독교 내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그리고 일부 정교회 수도원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0월 4일이다.

2. 이름

이름의 유래는 고전 라틴어 프란키스쿠스(Franciscus, /franˈkis.kus/)로 자유로운 사람, 혹은 프랑크족 사람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프란치스코라는 명칭은 한국 천주교 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 표기에 따라 프란키스쿠스를 교회 라틴어식으로 발음한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franˈt͡ʃis.kus/)의 변형이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성인명 표기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에는 방지거[4], 혹은 프란치스꼬라고 주로 표기했다.[5]

대한성공회에서는 영국식 영어 발음을 바탕으로 표기한 프란시스(Francis, /ˈfɹɑːnsɪs/)로 일컫는다.

3. 생애

3.1. 유소년 시절

파일:Alfaro_y_Gámez_-_Nacimiento_de_San_Francisco.jpg
성 프란치스코의 탄생 (Nacimiento de San Francisco)
후안 데 알파로 이 하메스 作, 코르도바 미술관
프란치스코는 1181년경 스폴레토 공국 아시시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는 부유한 포목상이었고, 그의 어머니 피카 드 부를르몽(Pica de Bourlemont)은 프로방스 지방 출신의 귀족이었다. 그의 본명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 조반니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잠시 프랑스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어머니가 세례자 요한의 이름[6]으로 세례를 받게 해 지어진 것이다. 한편 아버지는 프랑스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곳에서의 좋은 기억을 기념하고자 자신의 아들을 프랑스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란체스코(Francesco)[7]라는 호칭으로 주로 불렀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프란치스코는 당시 전형적인 부잣집 자제의 면모를 드러냈다. 10대 때 그는 언제나 멋진 옷을 차려입었고, 익살스러운 말솜씨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으며, 자신과 같이 부유한 친구들과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향락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마냥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바쁜 아버지를 대신에 옷감을 팔고 있었던 그에게 적선을 부탁했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던 그는 자신의 지갑에 들어 있던 모든 돈을 그 거지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아버지는 그에게 불필요한 짓을 하지 말라고 꾸지람했고,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2. 회심과 세속 단절 선언

1202년경 프란치스코는 명예로운 군인을 꿈꾸며 아시시 지방의 세력과 페루자 지방의 세력 간에 벌어졌던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호기롭게 참전했으나, 머지않아 포로로 붙잡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그곳의 감옥에 갇혀 지내던 그는 갑작스레 열병을 앓게 되었고, 약 1년이 지난 1203년 아버지가 그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포로 신분에서 풀려나자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상에 누운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1205년 교황 측 군대를 원조하고자 브리엔 백작 고티에 3세(Gautier III)가 주도한 모병에 지원하기 위해 풀리아 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것이 훗날 그의 인생을 탈바꿈할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목적지로 가던 도중 또다시 열병에 시달린 프란치스코는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사람이 아닌 를 모시기 위해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에 그는 병으로 신체가 나약해져 발생한 환청이겠거니 하고 가벼이 치부했지만, 여정이 지속될수록 이상하게도 세속에 대한 흥미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 결국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아시시에 당도했을 때는 그는 이미 세속적 욕구를 완전히 잃어 향락을 추구하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신 여생을 온전히 신앙에만 헌신하면서 보내기로 다짐했다.
파일:Giotto_-_St_Francis_Praying_in_the_Church_of San_Damiano.png
산 다미아노에서의 기도 (Preghiera in San Damiano)
조토 디 본도네 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란치스코는 집을 나온 후 세속과의 연을 끊는 길을 걸었다. 평소 고향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아무도 없는 음침한 곳에서 홀로 묵상에 전념했고, 로마 순례를 떠났을 때에는 그곳의 성당 앞에서 거지들과 함께 구걸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특별한 체험을 겪기도 했다. 어느 날 아시시 외곽의 황량한 산 다미아노 수도원 내 성당에서 기도를 하던 그는 “프란치스코야, 무너져 가는 나의 교회를 고치거라(Francisce, vade, repara domum meam, quae, ut cernis, tota destruitur)”고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무너져 가는 수도원의 성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아버지의 가게에 있는 일부 옷감을 몰래 팔아 번 돈으로 해당 건물을 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의 주임사제가 부당하게 얻은 수익금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자, 프란치스코는 억지로라도 그에게 돈을 쥐어 주고서는 보수 공사를 간곡히 요청한 뒤 이내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흘러 그는 그 목소리가 산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기울어져 가는 가톨릭교회 자체를 되살리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파일:Ghirlandaio_-_Renunciation_of_Worldly_Goods.png
재물의 포기 (Rinuncia dei beni terreni)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作, 산타 트리니타 대성당의 사세티 경당
한편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수소문해서 찾기 시작했고, 프란치스코는 이를 모면하고자 산 다미아노 수도원 근처의 동굴에 은둔했다. 그러나 약 한 달이 지나자 배고픔과 피로감에 시달린 그는 밥이라도 구하고자 마지못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결국 아버지의 손아귀에 붙잡혀 집으로 끌려가게 된 그는 흠씬 두들겨 맞은 후 줄에 꽁꽁 묶인 채 자그마한 저장고에 갇혔다. 그렇게 그의 금욕적인 생활은 끝내 저지되는가 싶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겼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자리를 잠시 비운 틈에 그를 풀어 주었다. 기적적으로 해방된 그는 곧장 수도원으로 도망을 갔고, 이러한 사정을 접한 주임사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프란치스코의 상속권 박탈을 심사하는 재판을 의뢰해 고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의 고집은 완강했다. 법정에 나선 그는 당시 재판장이었던 아시시교구장 주교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진 뒤 이렇게 외쳤다: “지금까지 저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를 저의 아버지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절연을 모자라 세속적인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한편 그의 당찬 고백에 감탄을 한 주교는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망토를 알몸인 그에게 걸쳐 주었다.

이후 몇 달 동안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언덕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동냥질을 했고, 이따금씩 옆 마을의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윽고 그는 페루자 지방에 위치한 마을인 구비오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순례자의 옷과 약간의 생활비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산 다미아노 수도원의 성당을 수리해야겠다는 목표를 품고 있었던 그는 이내 아시시로 돌아가 공사에 쓰이는 돌을 구걸했고, 그렇게 얻은 원자재를 해당 장소로 짊어 옮기고는 직접 벽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약 2년 간 그는 지난날의 방탕한 삶을 회개한다는 심정으로 산 다미아노 성당을 포함한 마을 주변의 버려진 종교 시설들을 재건하는 데에 힘썼다. 그가 손보아 고친 건물들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산 피에트로 델라 스피나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라 안젤리 대성당의 포르치운콜라 경당[8]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데에도 주력했는데, 이들이 모여 사는 집단촌을 종종 방문해 환자 한 명 한 명 정성껏 간호했다.

3.3. 작은형제회 설립

1208년 2월 24일 아침, 프란치스코는 여느 때처럼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날 설교에는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부분[9]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도록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곧바로 청빈한 삶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거친 모직 튜닉을 입고 밧줄을 허리 부분에 두른 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여러 장소를 두루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에게 회개, 사랑, 그리고 평화의 전언을 전파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대해 대부분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감명을 받은 이들도 소수나마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지 않아 11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그는 이 소규모 공동체를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아시시 근교의 텅 빈 한센병 환자 집단촌에 옹기종기 모여 검소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때로는 움브리아 지방 전역을 전전하며 뭇사람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이듬해 1209년 프란치스코는 공동체 내 생활 양식에 대해 기초적인 규정이 있어야 함을 인지해 <원회칙(Regula primitiva)>이라는 짧고 단순한 규칙을 만들었다. 원회칙의 주요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파일:Spinello_Aretino_-_Saint_Francis_before_the_Pope.jpg
교황 앞의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회 규칙의 인준)
(San Francesco davanti al Papa (Conferma della regola francescana))
스피넬로 아레티노 作, 시카고 미술관
같은 해 프란치스코는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으로부터 작은 형제들을 정식 수도회로 인준을 받고자 동료들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그는 아시시의 주교 귀도(Guido d'Assisi)와 사비나 추기경 조반니 디 산 파올로(Giovanni di San Paolo)를 조우했으며, 이 둘에게 공동체가 로마로 향하는 배경을 찬찬히 설명했다. 교황의 최측근이었던 추기경은 그의 결의에 경탄해 인노첸시오 3세와의 알현을 주선했고, 결국 교황은 작은 형제들을 인가하리라 약속했다. 교황에게는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며칠 전 그는 꿈에서 어느 수도자가 무너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10]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잠에서 깬 그는 그것이 조만간 자신에게 기울어져 가는 가톨릭교회 자체를 일으켜 세울 귀인이 찾아오리라 예고하는 꿈임을 직감했다. 이로 인해 그가 프란치스코로부터 그의 공동체에 대한 인준을 요청했을 때 다른 고문들이 극히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11]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210년 4월 16일 작은 형제들은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는 이름하에 교황이 공인한 수도회로 발전했다. 새로이 탄생한 조직체는 포르치운콜라 경당을 본거지로 삼았고, 소속된 수도자들은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의 만장일치에 따라 총봉사자[12]로 선출되었으나, 정작 자신이 수장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아 오히려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후 그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3.4. 성 클라라 수도회와 3회 설립

파일:Antonio_Carnicero_-_Saint_Francis_Cutting_Clare_of_Assisi's_Hair.jpg
아시시의 클라라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성 프란치스코
(San Francisco cortándole el cabello a Clara de Asís)
안토니오 카르니세로 作, 프라도 미술관
작은형제회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프란치스코를 초청하고자 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211년 그가 아시시의 산 루피노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 클라라(Clara)[13]라는 17살의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시시 일대를 주름잡던 유력 귀족 파바로네 디 오프레두초 델리 시피(Favarone di Offreduccio degli Scifi)의 장녀였고, 18살이 되는 해에 부모님이 추천한 귀족 남자와 원치 않은 혼인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처럼 청빈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꾸준히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 그에게 종교적인 조언을 구했으며, 그녀의 열정을 대견하게 본 그는 언제나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212년 3월 28일 자신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클라라는 자신의 고모와 일부 시녀들을 대동하고 부모님 몰래 집을 뛰쳐나가 작은형제회의 거점인 포르치운콜라 경당에 당도했다. 프란치스코는 일행의 방문을 환영했으며, 수도자로 입회하고 싶다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작은형제회는 남자들만을 위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그는 신조와 체제가 동일한 여성 수도회를 창설하기로 결정했고, 그 이름을 가난한 자매회(Ordo Sororum Pauperum)로 지었다. 우선 그는 작은형제회의 입회 방식과 똑같이 세속과의 연을 단절한다는 의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으며,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수도복을 준 뒤 새로운 여성 공동체의 본거지를 마련할 때까지만큼은 잠시 근방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인 산탄젤로 디 판초 수녀원에서 머물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클라라의 부모님은 수소문 끝에 그곳으로 찾아갔다. 이들은 훗날 상속받을 막대한 부와 귀족 남자와의 혼인으로 얻을 수 있는 안정된 삶을 언급하며 자신의 딸을 수차례 회유해 보기도 하고 강압적으로 끌고 가 보려고도 했으나 끝내 그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녀의 완강한 모습에 감명을 받은 몇몇 여자들이 곧바로 그녀를 따르기로 했는데, 대표적으로 그녀의 3살 어린 여동생 아녜스(Agnes)[14]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딸을 따라 수녀의 길을 걸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예전에 자신이 산 다미아노 수도원 내 성당을 직접 보수하면서 같이 손을 본 자그마한 오두막을 가난한 자매회의 본거지로 정하고, 수녀들을 모두 수용하게끔 작은형제회의 수도자들과 함께 건물을 확장하고 있었다. 다만 공사는 급하게 진행되었는데,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잃은 아버지가 그의 일가 친척들을 동원해 이들을 되찾고자 수녀원에게까지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므로 그 전에 빨리 완공하고자 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윽고 확장이 마무리되자 클라라와 아녜스를 비롯한 가난한 자매회의 수녀들은 프란치스코와 작은형제회 수도자들의 도움으로 서둘러 본거지로 이사했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여성 공동체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가난한 자매회는 공동 설립자 클라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성 클라라 수도회(Ordo Sanctae Clarae)로 명칭을 바꾸었다.

프란치스코와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의 검소한 생활 방식과 봉사 정신을 실천하고 싶은 평신도들도 나란히 늘어났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성별에 따라 작은형제회, 혹은 가난한 자매회에 입회했지만, 이미 결혼을 했거나 마음대로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신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1209년 프란치스코는 회개의 형제자매회(Fratres et Sorores de Poenitentia)라는 이름의 3회[15]를 설립함으로써 이들이 작은형제회 및 가난한 자매회의 규범을 따르는 세속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해당 조직체는 1221년 당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음으로써 정식 공동체로 발전했다.

3.5. 순방 선교 활동

이탈리아 내에 공고히 기반을 다진 프란치스코는 활동 반경을 해외로 넓히기 시작했다. 1211년 스페인 로그로뇨 지방 근교에 위치한 마을 아곤시요에 메드라노(Medrano)라는 영주가 살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 아들은 의문의 병에 걸려 한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그동안 수많은 방법을 사용해 봤음에도 도무지 치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메드라노는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프란치스코는 곧장 아곤시요로 향했다. 그를 본 영주 일가는 간곡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그는 아픈 소년의 몸에 손을 가볍게 올려 병의 증세를 가라앉혔다. 가문의 후계자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는 광경을 목격한 메드라노와 그의 가족은 감사의 표시로 로그로뇨 지방 내 에브로강과 가까운 영지를 프란치스코에게 기증했다. 훗날 프란치스코는 그 장소에 스페인 첫 가난한 자매회 수녀원을 설립했다.

1212년 늦봄 프란치스코는 예루살렘에 발을 내딛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목적지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으나, 달마티아 지방의 해안을 지날 무렵 예기치 못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213년 5월 8일 그는 아레초 지방을 방문해 여느 때처럼 평신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던 카타니 백작 오를란도 디 키우시(Orlando di Chiusi)가 그의 강론에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에게 자신의 영지에 있는 라베르나산을 기증했다.
파일:Sassetta_-_Sansepolcro_St_Francis_before_the_Sultan.png
보르고 산 세폴크로 제단화 中 술탄 앞의 성 프란치스코
(San Francesco davanti al Sultano)
사세타 作, 영국 국립미술관
1219년 이집트에는 제5차 십자군 원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중심으로 집권 세력인 아이유브 왕조 십자군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수도자 동료 일루미나토 다 리에티(Illuminato da Rieti)와 함께 순교를 할 각오로 무슬림인 당시 술탄 알 카밀 가톨릭에 귀의하게 만듦으로써 전쟁을 종식하고자 했다. 같은 해 8월 29일 십자군의 돌격이 이루어졌고, 프란치스코와 일루미나토는 이에 편승해 적진으로 뛰어들다가 아이유브 왕조 군의 장병들에게 결국 붙잡혔다. 자신의 동료와 함께 알 카밀 앞으로 끌려간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당차게 밝혔으며, 본래 기독교인에게 관대했던 술탄은 그의 용기에 감탄해 수도자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창 설교하던 프란치스코는 알 카밀의 앞에 있는 거대한 모닥불 위를 건넌 후 자신의 몸에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음을 보여 주어 가톨릭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임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술탄은 정말로 그것이 실현된다면 이 사회에 큰 혼란을 줄까 염려스러워 강력히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의 열성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은 알 카밀은 그 대신 수도자 일행에게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예루살렘 일대를 방문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며칠 뒤 이들을 아크레에 소재한 십자군의 기지로 무사히 송환했다. 1220년 프란치스코와 일루미나토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3.6. 작은형제회 개편

파일:Luis_Berrueco_-_Saint_Francis_before_Pope_Honorius_III.jpg
교황 호노리오 3세 앞의 성 프란치스코
(San Francisco ante el Papa Honorio III)
루이스 베루에코 作, LACMA
1221년 작은형제회 독일, 스페인, 프랑스, 헝가리 등 다양한 지역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 활동 반경은 유럽을 넘어 모로코 튀니지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일대로 확장되었다. 그렇게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대형 수도회로서 종교적 영향력이 막강해졌지만, 타 수도회에 비해 급격히 성장한 탓에 내부적인 질서가 흔들리지 시작했다. 이에 잠시 타지에 있었던 프란치스코는 부랴부랴 아시시로 돌아와 공동체를 개편하는 작업을 착수했다. 설립 초창기부터 고수해 왔던 단순한 회칙 <원회칙>에 한계가 왔음을 파악한 그는 수도회에서 추구하는 청빈한 신앙 생활에 관해 조금 더 방대하면서도 세부적인 사항들을 명시한 <제1회칙(Regula prima)>을 완성했다. 그리고 관례에 따라 새로운 수도 규칙을 당시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 받아야 했으나, 우선 흐트러진 체계를 어느 정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그는 규칙 제정 및 발동을 강행했다. 그러나 다른 수도자들이 이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자 프란치스코는 2년 뒤 1223년 동료들과 주변 신학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제1회칙>보다 더욱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제2회칙(Regula secunda)>을 집필했고, 같은 해 11월 29일 교황에 의해 인준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1221년 프란치스코는 오래 전부터 동고동락한 자신의 동료 엘리아 다 코르토나(Elia da Cortona)를 자신의 보조자이자 작은형제회의 행정과 회계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1224년 8월 지난 3년 간의 대대적인 재조직 업무로 인해 심신이 지친 그는 소수의 수도자들을 이끌고 라베르나산으로 거처를 옮겨 조용한 수도 생활을 이어 나갔다.

3.7. 말년과 죽음

성흔을 받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stigmatización de San Francisco de Asís)
알론소 카노 作, 프라도 미술관
1224년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다가올 9월 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그리고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을 대비해 40일 전부터 단식 고행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13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여느 때처럼 기도를 하고 있던 그는 기묘한 체험을 겪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는 여섯 날개의 세라핌[16]이 나타나더니 그의 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입었던 오상을 그대로 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상처를 입은 그는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동료 수도자 레오(Leo)의 부축을 받은 채 거처로 돌아갔다. 이후 상처로 인한 끊임없는 출혈과 결막염으로 고통을 받던 그는 시에나, 코르토나, 노체라 등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아 봤지만 증세는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으며, 끝내 눈에 감각은 물론 시력까지 완전히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호전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결국 포르치운콜라 경당으로 돌아갔다. 그는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영적 지도를 하며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1226년 10월 3일 해 질 무렵, 죽음이 어느새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프란치스코는 수도자들에게 자신을 눕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뒤 그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편 142편[17][18]을 나직이 읊은 후 세상을 떠났다.

4. 사후 공경 및 영향

“하늘이 지상으로 보낸 새로운 인간.”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설교자.”

“백 년마다 한 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성 프란치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그분의 정신을 본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의미로는 보편적인 성인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통해 자신의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를 포함한 다른 시대,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에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셨다.”

“가난의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이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전례력 기준 기일인 10월 4일로 지정되었는데, 그가 10월 3일 저녁에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 교회 달력에서는 일몰이 지난 시간은 다음 날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19] 성공회 루터교회에서도 가톨릭과 동일한 축일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시신은 10월 4일 아침 아시시에 소재한 산 조르조 성당에 매장되었으나,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설립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아랍인들에게 약탈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로 철저히 비밀리에 안장되었고, 그렇게 묘지의 위치는 1818년 발견될 때까지 588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1회 작은형제회, 2회 성 클라라 수도회, 그리고 3회 회개의 형제자매회는 그의 사후 일련의 개혁을 통해 몇몇 분파로 나뉘어졌으나, 이들이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총합 약 65만 명의 사람들이 소속된 프란치스코회라는 거대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가톨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회로 자리 잡았으며,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세계 119개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2013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가난한 자를 잊지 않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기리고자 자신의 교황명을 그의 이름으로 택했다.

4.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5. 대중 매체

6. 어록

“평화와 선이 있기를.”[24]
“Pax et bonum.”
“해야 하는 일부터 하라. 그런 다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그러면 어느새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둠도 촛불 하나의 빛만큼은 끌 수가 없다.”
“햇빛 한 줄기만으로도 짙은 그림자를 몰아내기에 충분하다.”
“자비와 지혜가 머무르는 곳에는 두려움과 무지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육신에 이끌려 지혜롭고 신중해지면 안 된다. 오히려 단순하고 겸손하며 순수해야 한다.”
“입으로 평화를 선포하기 전에 먼저 그대의 마음을 평화로 가득 채우도록 하라.”

7. 여담

7.1. 동물과의 교감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동물을 인간처럼 존중을 받아야 하는 귀중한 생명체로 여겼는데, 이는 동물을 단순히 소유물 혹은 희생 제물, 즉 인간의 하급 존재로만 인식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는 동물도 인간과 동일한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소중히 대우받고, 종교적 진리를 얻을 자격이 있음을 피력했다. 이로 인해 그와 동물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그가 구비오의 식인 늑대를 달랜 일화와 들에게 설교한 일화가 유명하다.
파일:Sassetta_-_Sansepolcro_The_Wolf_of_Gubbio.png
보르고 산 세폴크로 제단화 中 구비오의 늑대
(Il lupo di Gubbio)
사세타 作, 영국 국립미술관
프란치스코가 페루자 지방에 위치한 마을인 구비오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였다.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흉포한 늑대가 종종 출몰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는데, 사태를 파악한 프란치스코는 이를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늑대를 언덕에서 발견했고, 마을 전체를 두려움에 빠뜨린 그 포식자에게 성호를 그은 뒤 손짓하며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늑대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얌전히 시내까지 내려왔으며, 이 광경에 놀란 주민들에게 그는 늑대가 배고픔에 시달린 탓에 이러한 짓을 저질렀으니 용서해 주기를 설득했다. 사정을 알게 된 주민들은 딱한 마음에 늑대에게 먹을 것을 꾸준히 주기 시작했고, 이후 아무도 잡아먹히는 일 없이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파일:Giotto_di_Bondone_-_Saint_Francis_of_Assisi_preaching_to_the_birds.png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中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다
(San Francesco predica agli uccelli)
조토 디 본도네 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아시시의 평원을 거닐던 중 무리를 지어 있는 새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러자 새들은 날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는 이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동시에 깃털과 날개, 그리고 맑고 드넓은 하늘을 준 창조주를 기꺼이 찬미하고 사랑하라고 권고했다. 그렇게 프란치스코가 설교하는 동안 새들은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는 등 기이한 몸짓으로 그를 응시했으며, 그가 말을 끝낸 후 성호를 그으면서 새들을 축복하자 비로소 사방으로 날아갔다.

7.2.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파일:아시시의장미.png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의 장미 정원
프란치스코는 평소 신앙심이 굳건하고 금욕적인 수도 생활에 투철한 인물이었으나, 이따금씩 성욕을 비롯한 강한 원초적인 욕구가 그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욕망이 가라앉을 때까지 맨몸으로 포르치운콜라 경당 밖에 나 있는 장미 가시덤불 위를 데굴데굴 굴러 스스로를 벌했다고 한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시시에 피는 장미에는 가시가 돋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까지도 포르치운콜라 경당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의 마당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피고 있다. 평범한 장미 씨앗으로 그 마당에 심으면 애초에 가시가 생겨나지 않는 장미가 자라며, 다른 곳에 자란 장미를 해당 장소로 옮겨 심으면 가시가 사라진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1] 현재 아시시에 소재해 있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의 전신. [2]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로 프란치스코회 내에서 기념한다. [3] 정작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수도회의 수장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아 기록상 초대 수장은 그의 뒤를 이은 조반니 파렌티(Giovanni Parenti)다. [4] 프란치스코의 음역인 방제각(方濟各)을 중국어식으로 발음한 팡지거(Fāngjìgè)의 변형. [5] 이로 인해 노년층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해당 이름들을 세례명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시인 정지용이 있다. [6] 조반니가 요한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이다. [7] 프란치스코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이다. [8] 작은 몫이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식 명칭. 라틴어 영어식 명칭인 ‘포르치운쿨라’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9]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0:3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10: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0: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10: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10: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0: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0] 교황 성좌가 있어 가톨릭교회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성당이다. [11] 고문들이 만류했던 이유는 작은 형제들이 표방하는 청빈한 신앙 생활 방식이 불안전하고 비실용적이어서 이들을 정식 수도회로 승격하면 교회의 명성에 흠이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12] 라틴어로는 Minister generalis. 프란치스코회 계열 수도회의 총책임자를 일컫는 직함이다. [13] 라틴어식 이름으로 본명은 클라라의 이탈리아어식 명칭인 키아라(Chiara)다. [14] 본명은 카테리나(Caterina)지만, 언니를 따라 수녀가 된 후 아녜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15] 라틴어로는 Tertius ordo. 세속에서 특정 수도회의 정신과 생활 방식을 따르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재속 단체를 일컫는다. [16] 보나벤투라가 집필한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Legenda maior)>에는 프란치스코가 마주한 세라핌의 모습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얼굴은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두 날개는 머리 위에, 다른 두 날개는 옆으로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는 몸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17] 현대 성경 기준.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에는 141편에 해당한다. [18] 142:2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 142:3 그분 앞에 내 근심을 쏟아붓고 내 곤경을 그분 앞에 알리네. 142:4 제 얼이 아뜩해질 때 당신께서는 저의 행로를 아십니다. 제가 다니느 길에 저들이 덫을 숨겨 놓았습니다. 142:5 오른쪽을 살피소서. 그리고 보소서.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도망갈 곳 더 이상 없는데 제 목숨 걱정해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142:6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142:7 제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저는 너무나 허약하게 되었습니다. 뒤쫓는 자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그들이 저보다 드셉니다. 142:8 제가 당신 이름을 찬송하도록 감옥에서 저를 빼내 주소서. 당신께서 제게 선을 베푸실 때 의인들이 저를 둘러싸리이다. [19]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프란치스코회 계열 수도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옮겨 갔음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전이예식(transitus)을 거행한다. [20] University of Saint Francis(USF) [21] University of St. Francis(USF) [22] Saint Francis University(SFU) [23] Saint Francis University(SFU) [24] 프란치스코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로 했던 인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