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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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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역사를 다루는 문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사 기록물이 길다. 역사적으로 제지기술이 발달한 중국과 전쟁 및 교류로 많이 엮이다 보니[1], 중국사의 시각에서 베트남이 관찰된 기록이 많기 때문. 또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비교하면 유교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어 오히려 동북아시아사에 가까울 정도. 실제로 문화ㆍ정치체계 등등 다방면에서 동남아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혼자서만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았는데,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인도, 힌두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큰데 비해 베트남은 유독 중국의 영향력이 커서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자/ 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국가이다.

또한 종교 역시 인도를 통해 들어온 이슬람교, 힌두교, 소승불교가 대세인 다른 나라들과 달리 혼자서 동북아시아처럼 대승불교 대세국가이고 거기다 유럽, 일본과 비슷하게 봉건제였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유교의 영향으로 동남아에서 가장 일찍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 전쟁사를 봐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중국 왕조와의 교류를 위해 큰 전쟁을 벌인 일이 거의 없는데 비해, 유독 베트남은 유교문화권이라 상업에 그다지 열정적인 바가 없어 주구장창 중국 왕조와 싸워 왔으며, 동남아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13세기 타이족의 대이주로 대륙부 평야지대의 동남아 각국의 역사가 바뀌는 와중에도 거대한 산맥의 지형적 이점에 힘입어 혼자서만 아무 타격없이 멀쩡했다. 그야말로 동남아에 박혀있는 동북아 국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2]

또 한편으로 베트남의 역사는 북으로는 중국과의 대립과 항쟁, 남으로는 하노이로 대표되는 북부의 베트남 민족과 중남부의 참파 민족 간의 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싸움은 베트남이 중국 치하 남월에서 벗어난 938년부터 참파가 멸망한 1832년까지 약 900년 간 지속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베트남 전쟁을 그 연장선상으로 보는 사람도 존재한다.

2. 고대

2.1. 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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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hoalu.it/hung_vuong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rld_500_BCE_showing_Van_Lang.png
반랑(Văn Lang, 文郞)의 영역 # * *[3][4]
염제 신농씨의 3세손인 제명이 아들 제의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5]으로 순행하여 오령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무선의 딸을 만나 데려왔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녹속이 태어났다. 제명은 녹속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녹속이 고사하자, 제의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북방[6]을 다스리게 했다. 한편 녹속을 경양왕에 봉하여 남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나라 이름을 적귀국이라 했다. 경양왕은 수부에 오갈 수 있었는데 동정군의 딸 용녀를 아내로 삼아 승람, 곧 낙룡군을 낳았다. 낙룡군은 부친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경과 인륜을 가르쳤다. 때때로 수부로 돌아갔지만 백성들이 도움을 청하면 와서 도와주었다.

-베트남 건국신화[7]-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신농의 후손 '녹속'이 세운 반랑국(Văn Lang, 文郎, 문랑)이다. 반랑은 베트남 북부 델타 지역과 현재의 광시좡족자치구 인근에 있었던 락비엣(Lạc Việt, 雒越, 낙월)이라는 민족이 세운 봉건적 공동체에 가까웠다. 초대 훙브엉[8]인 녹속(경양왕)이 기원전 2879년에 건국한 이래로 18명의 왕들이 26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국경일 중에 웅왕기일(음력 3월 10일)이 있는데, 초대 국왕인 녹속을 기리는 날로, 한국의 개천절과 성격이 유사하다. 실제로 동썬(Đông Sơn, 東山, 동산) 문화가 발견되면서 확실한 국가의 존재까지는 몰라도 독자적 문화권의 형성으로서는 반랑국이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있다.

동썬 문화는 멀리는 기원전 1,000년 전부터 기원후 100년경까지 홍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어진 문화로[9], 타인호아(Thanh Hóa, 淸化, 청화)성 동썬현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썬 문화는 베트남의 청동기 말기와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다.[10]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도 그리 많지 않고, 계보가 자세히 전해져 내려오지 않은 단군조선과 달리 반랑국은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는 많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지지만, 기록된 연도가 무려 15세기(1479년)에 출간된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인데가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도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고 각 왕들의 재위가 너무 길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랑국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한다.[11]

2.2. 어우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어우락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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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반랑 왕국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안즈엉브엉[12]이 기원전 258년 반랑을 멸망시키고 베트남 두 번째 왕조인 어우락(Âu Lạc, 甌駱, 구락)을 건국한다. 국호 '어우락'은 남하한 북쪽의 어우(Âu, 甌, 구)족과 남쪽의 토박이 락(Lac, 駱, 락)족을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

안즈엉브엉(An Dương Vương ,安陽王, 안양왕, 재위 BC 257~207)은 진시황에게 잘보이려고 장사 이옹중[13]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안즈엉브엉이 세운 어우락은 그의 대에 멸망하고야 만다. 당시 안즈엉브엉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이 인근 한족 군벌 조타의 아들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만 것. 딸은 조타의 아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어우락의 주력 무기인 쇠뇌를 부숴버리고야 만다. 조국을 배신한 딸은 격노한 왕에게 목이 잘렸지만, 이미 부숴진 쇠뇌는 어쩔 수 없었고 어우락은 조타에게 무너졌다.

중국사에 비유하자면 반랑은 중국의 하(夏)나라 정도고, 어우락은 상(商)나라와 비슷한 위치이다. 반랑의 경우 동썬 문화의 존재로 확실한 국가의 존재까지는 몰라도, 독자적 문화권의 형성까지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고, 어우락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꼬로아(Cổ Loa, 古螺, 고라) 성의 발굴로 좀 더 실체가 분명해졌다.

2.3. 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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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nyue.jpg
파일:Statue_of_Triệu_Vũ_Đế_(Emperor_Zhao_Tuo),_Nanyuewang_Miao_2015.11.12_09-10-58.jpg
남월 조타
조타 조나라 출신의 한족이었는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진나라의 장군이 되었다가 진시황 사후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기원전 207년 독립을 선포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게 바로 남월이다. 조타는 베트남 토착 왕조였던 어우락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이후 베트남 북부 일대를 평정하면서 스스로 칭제하고 베트남의 3번째 왕조로 등극한다.

최전성기에는 심지어 중국의 푸젠성, 광둥성은 물론 베트남 북부, 오령산맥 남부까지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심지어 홍콩 마카오도 이때는 남월의 영토였다.[14] 한문제 시기에는 한나라와 화친을 맺기도 했지만 한무제 때는 다시 한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며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그렇게 한나라와 대립하던 중간에 제4대 국왕 애왕 조흥[15]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16]와의 대립이 불거져서 남월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제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17]이 추대되며 남월이 혼란스러워지자, 이에 한나라는 노박덕을 사령관으로 삼아서 공격했고,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켰다.

남월이 멸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노이 등 베트남 북부의 귀족들은 저항없이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나라는 옛 남월 영토인 교주에 9개의 군을 설치하고 다스렸다. 이게 바로 1,000년에 달하는 중국의 베트남 통치의 시작이다. 이 시대 이후의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938년까지 1천년 넘게 중국의 통치를 받으니, 학계에서는 이 시대를 북속기라고 부른다.

3. 중국의 지배 (BC 111년 - 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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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한나라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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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0년교주지도.jpg
파일:쯩 자매(공치제).jpg
교주 쯩 자매의 반란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938년까지 무려 1,049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 본토에서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은 굳건했다. 중국은 한나라 - 위진남북조시대 - 수나라 - 당나라 순서대로 베트남을 연속적으로 다스렸다. 여러 모로 베트남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기도 한데, 북속기로 인해서 베트남이 한자문화권으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동남아시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권과 더 가까운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나라는 처음에는 변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베트남을 정복했지만, 나중에는 베트남의 경제적 가치를 알아보고 막대한 세금을 뜯어갔다. 베트남에서는 화북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남방의 물산들이 났으며 동남아시아,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젖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이 워낙에 머나먼 지역이라 중앙정부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았고, 결국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중국 통치는 탐관오리에 대한 반란과 그나마 괜찮은 관리들의 치세가 반복되면서 이어진다.

특히 40년에 일어나 3년 동안 지속된 쯩 자매의 반란이 유명하다. 당시 한나라 태수가 폭정을 펼치면서 언니 쭝짝의 남편을 죽여버리자, 격분한 쭝짝은 동생 쭝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피폐한 삶에 시달리던 베트남인들은 크게 호응했고 쯩 자매의 반란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세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심지어 광둥성까지도 쯩 자매의 반란군에 합류했을 정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한나라 조정은 명장 마원[18]을 파견했다. 쯩 자매는 극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19] 쯩 자매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그 유산은 끝까지 살아남아 베트남인들의 긍지로 남았다.

쯩 자매의 난으로 뜨거운 맛을 본 한나라 조정은 베트남 현지 귀족층들에게 중국 문화를 전파하는등 한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간접통치였던 것을 직접통치로 바꾸고 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37년에는 참족이 중국령 베트남 남부를 공격해 참파의 전신인 임읍을 세우기도 했다. 한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후한 말기에는 베트남 장악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나치게 중국에서 멀고 유배지로나 쓰이는 곳이었으니 자연스레 반독립 상태로 변한 것.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무려 5개나 되는 현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구도 10만에 달했다.

3.2. 위진남북조시대의 지배

3.2.1. 전 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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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구.jpg
파일:Map_of_Vạn_Xuân_Kingdom_during_Early_Lý_dynasty.png
조씨정 전 리 왕조
후한 말기의 삼국시대에 베트남은 손권이 세운 오나라의 소유가 됐다. 원래는 사섭이 한나라 조정한테 교주지사로 임명받아 베트남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210년 삼국시대가 벌어지자 가장 가까운 오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것. 그러나 227년 사섭이 죽자 오나라는 그 아들 사휘를 죽여버리고 베트남을 홀랑 먹어버렸다. 오나라의 통치는 가혹했다. 231년에 반란이 일어났지만 참혹하게 진압당했고, 248년에 임읍이 침략해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조씨정[20]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여러모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265년에는 위나라가 사마씨의 서진으로 대체됐고 서진은 280년 오나라마저도 멸망시키며 중국을 통일했다. 오나라의 통치에 불만이 많던 교주 지방은 이미 위나라 시절부터 구원을 타진하던 상황이었고 오나라가 망하자 옳다구나 서진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다만 이 시기 베트남을 전쟁터 삼아 서진과 오나라 간의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람에 베트남의 인구가 140년 64,700가구에서 25,600가구로 급감하기도 했다.

서진 조정은 베트남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곳을 통해 남쪽 푸난, 임읍과 교역을 계속했다. 서진이 망하고 들어선 남북조 시대에도 남조 국가들이 주로 베트남을 통치했다. 남북조 시대 자체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였던지라 그 아래 있던 베트남도 혼란을 면치 못했다. 임읍 등 남부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부유한 북부 베트남을 약탈했고, 중국의 반란군들이 베트남까지 쫒겨오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544년에는 중국인 출신의 리비가 남조의 양나라한테 반기를 들고 독립해 전 리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전 리 왕조는 얼마 못간 602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게 정복당하면서 몰락했다.

3.3. 수나라의 지배

500년대 말까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을 틈타서 전 리 왕조가 독자적으로 베트남 북부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되면서 베트남의 짧은 자치기도 끝나고야 만다. 당시 전 리 왕조의 황제는 리펏뜨였는데, 리펏뜨는 589년 수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나 602년 독립을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문제는 유방 장군과 27,000명의 대군을 보내 전 리 왕조를 침공했다.

결국 602년 전 리 왕조는 수나라에게 멸망당했고 리펏뜨는 유방의 권유를 받아 항복했지만 수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수나라 대군은 더 남하해 참족들의 나라 임읍까지도 공격해 정벌하고 3개의 현을 설치해 관리했다. 문제는 유방에게 베트남의 관할을 맡겼는데, 유방이 참족을 정벌하고 북쪽으로 돌아오다가 사망하자 구화가 유방 대신 베트남을 다스렸다.

618년 당고조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세우자, 구화는 처음에는 소헌이 세운 양나라 부흥운동에 가담했으나 대세가 기울자 622년 당나라에게 항복했다. 다만 모두가 순순히 당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인건 아니어서, 타인호아 일대는 양나라 부흥운동에 계속 가담해 3년 동안이나 당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625년에야 항복했다.

3.4. 당나라의 지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안남도호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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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ng dynasty.gif
파일:Mai_hắc_đế.png
당나라 마이 툭 로안[21]
수나라가 다스리던 베트남 북부는 622년부터 당나라의 관할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점은 627년부터 일어난 당 태종의 행정구역 개편. 교주에서 안남으로 국호가 바뀐 것도 이 시기다. 당나라 조정은 기존 베트남의 행정구역인 교주를 철폐하고 안남도호부를 새롭게 설치했다.

당이 한 무제 이래 800년 가까이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던 베트남에 새로운 정복지와 동일하게 도호 행정을 실시한 것은 이전부터 중국이 추구해 온 군현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는 중국의 태도가 미온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수백 년에 걸친 베트남인들의 계속적인 저항을 막을 수 없어 중국이 직접 지배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안남도호부는 다른 도호부들이 당의 의욕적인 진출에 의해 설치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22]

당나라의 베트남 지배는 이전 왕조들에 비해 훨씬 온건한 수준이었다. 물론 탄압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군현제를 포기하고 4년마다 베트남 현지 귀족들을 가려뽑아 5품 이상의 관직을 맡기고 실질적인 행정을 맡겼다. 조세도 당나라 본토보다 약했다. 베트남의 세율은 당나라 본토 세율의 절반 수준이었다. 당나라 본토에서 도교가 흥성한 것과 달리 베트남에서는 불교가 세를 불렸다. 다만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히 여전했다. 베트남인, 타이족 소녀들은 인신매매를 당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에 응시해 당나라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베트남인은 정말 극소수였다.

베트남인들은 당나라의 지배에도 끊임없이 저항을 벌였다. 687년 안남 도호가 세금을 2배로 올리자 격분한 베트남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안남 도호를 죽여버린 적도 있다. 가장 큰 반란은 722년 일어난 마이 툭 로안의 반란으로, 참파와 크메르인들까지 합세해 그 세가 40만에 달했다. 현종은 환관 양사욱을 지휘관으로 파견해 10만 대군으로 반란을 무참히 진압, 마이 툭 로안의 시체를 길거리에 전시하며 무력으로 봉기를 억눌렀다.

8세기 중엽부터 당나라의 세력이 기울었다.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나라가 서서히 쇠락해가던 것. 특히 선종 연간에 안남경락사로 파견된 이탁이란 탐관오리가 가혹하게 세금을 걷자 862년 베트남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베트남인들은 남조와 동맹을 맺고 교주성을 공격, 일시적으로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863년에 당나라 조정에서 명장 고병 휘하의 대군을 파견해 다시 교주성을 탈환하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또 다시 실패했다. 베트남인들과 남조는 꾸준하게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시도했지만 아직까지는 당나라의 세력이 굳건해서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당나라의 내부 혼란이 극심해져가던 880년에는 아예 안남도호부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절도사 증곤은 아예 성을 빠져나와 스스로 도망쳤고, 당나라 수비군 대다수는 스스로 귀환했다. 당나라는 당시 황소의 난으로 기나긴 내란에 빠져들고 있었기에 더이상 베트남에 간섭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당나라가 망해가며 중국의 베트남 통치는 명목상으로만 전락하고야 만다. 이후 쿡씨를 위시한 토착 세력이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을 통치하게 되면서 한나라 이래로 1,050년간 이어진 중국의 베트남 지배가 종식된다.

4. 베트남 왕조들

4.1. 안남 (安南) (938년 - 968년)

4.1.1. 응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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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 왕조 응오 왕조의 창업군주 응오꾸옌
기존 베트남을 다스리던 당나라 황소의 난이 터지며 맛이 가버렸고, 중국에서는 혼란기 오대십국시대가 열린다. 이 상황에서 베트남은 마침내 1000년만에 중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한다. 가장 먼저 베트남의 통제권을 장악한건 쿡씨 가문의 쿡트어주였다. 쿡씨 가문은 정해군 절도사로 임명받아 베트남을 실질적으로 다스렸지만, 930년 쿡트어주의 손자 쿡트어미가 베트남을 침공한 남한의 군주 유엄에게 생포당하면서 쿡씨 가문의 통치도 24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남한도 쿡트어미의 부하 즈엉딘응에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작 1년 밖에 안되어 다시 베트남에서 쫒겨났다. 그러나 즈엉딘응에도 그의 말단 부하였던 끼에우꽁띠엔에게 살해당하고야 만다. 그러자 즈엉딘응에의 사위였던 응오꾸옌이 그의 뒤를 이어 베트남을 장악했고, 끼에우꽁띠엔은 남한의 힘을 빌어 응오꾸옌을 치려 했지만 바익딩 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쫒겨났다. 이렇게 응오꾸옌은 유일무이한 베트남의 최고 권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베트남을 독립시킨 응오꾸옌은 응오 왕조를 세우고 수도를 옛 어우락 왕국의 도읍 꼬로아 성에 잡았다. 그러나 응오 왕조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응오꾸옌은 즉위하고 6년만에 사망하고 말았고, 태자의 외삼촌 즈엉빈브엉이 왕위를 찬탈하려 시도하는 등 난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4대 국왕 응오쓰엉반이 965년 암살당하자 전국에서 12명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십이 사군 시대를 열면서 응오 왕조도 30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4.1.2. 십이 사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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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 사군 시대의 세력도
보통 십이 사군 시대는 965년 응오 왕조의 4대 국왕 응오쓰엉반의 죽음 이후부터 968년 딘 왕조의 베트남 북부 통일까지 약 3년 간의 기간으로 보지만 사실 응오 왕조는 965년 이전 한참부터 많이 혼란스러운 나라였다.

당시 응오 왕조는 개국군주이자 민족영웅 응오꾸옌이 세운 나라로, 응오꾸옌이 살아있을 적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죽자 섭정직을 할 예정이었던 즈엉빈브엉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자 응오쓰엉응업을 뒤통수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단단히 꼬였다. 응오쓰엉응업은 즈엉빈브엉을 피해 시골로 달아났고 즈엉빈브엉은 태자의 동생 응오쓰엉반을 자기 양자로 삼았다. 당연히 전국에서 즈엉빈브엉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러자 즈엉빈브엉은 양자 응오쓰엉반에게 군대를 주어 이를 진압토록 시켰다. 하지만 응오쓰엉반은 역으로 즈엉빈브엉에게 칼을 돌려 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왕이 된 응오쓰엉반은 도망친 형 응오쓰엉응업을 찾아 데려와 951년 공동 왕으로 즉위한다. 다만 응오쓰엉응업은 돌아온지 5년 만인 954년 사망하며 공동 통치기간은 짧았다.

응오쓰엉응업 등 적법한 왕위 계승자들이 돌아왔음에도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응오쓰엉반이 965년 부하 랑시빈에게 살해당하면서 분열은 정점을 찍었다. 랑시빈이 왕도 꼬로아 성을 장악했고 응오 왕조는 완전히 몰락했다.[23] 베트남은 랑시빈을 중심으로 12개의 군벌들이 난립하는 역대급 분열기에 접어들었다.

이 혼란기는 딘보린의 등장으로 종식된다. 화려(華閭, 닌빈 성)에 기반을 둔 딘보린은 잠시 한 군벌 치하로 들어가 힘을 기르다가, 군벌이 죽자 그 세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968년에는 다른 11개의 모든 군벌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베트남을 통일한다. 같은 해에 딘보린은 딘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국호를 '안남'에서 '대구월'로 개칭한다.

4.2. 대구월 (大瞿越) (968년 - 1054년)

4.2.1. 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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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ina,_Vietnam,_Korea_and_Japan_in_1100_AD.svg.png
파일:1-hoalu.jpg
당시 동아시아의 판세 딘 왕조의 수도 호아 루
베트남의 역대급 혼란기였던 십이 사군 시대 딘보린이 베트남을 통일하고 딘 왕조를 세우면서 일단락된다. 중국에서 독립하여 처음 들어섰던 응오 왕조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일소하기도 전에 무너졌고 집권기간 내내 혼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일부 학계에서는 이 딘 왕조를 실질적인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로 꼽는 경우도 많다.

딘보린은 자신의 본거지인 호아 루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황제로 선포, 외왕내제를 시작했다. 내적으로는 칭제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북송에 사신을 보낼 때는 자세를 굽히고 들어갔다. 972년에는 코끼리 상아, 코뿔소 뿔, 천, 차 따위를 송나라에 바쳤고 송나라 황제는 그 보답으로 딘 왕조와 통교하고 교주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렇던 딘보린의 통치는 허망하게 끝나고야 만다. 979년 10월, 도틱이라는 환관이 야밤에 자고 있던 딘보린과 황태자를 기습해 죽여버린 것. 권력의 공백을 틈타 레호안 장군이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고, 5세의 딘또안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레호안이 스스로를 '부왕'(副王)이라 칭하며 베트남의 실권을 좌지우지하자 그의 횡포에 반발한 딘 왕조 충성파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베트남이 혼란스러워지자, 남만을 다시 복속시킬 기회만을 노리던 송나라는 딘 왕조를 구원하겠다는 빌미로 후인보를 앞세워 딘 왕조를 침략했다. 송나라가 쳐들어오자 레호안은 딘또안을 폐위시키고[24]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전 레 왕조를 개창한다.

4.2.2. 전 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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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호안 딘 왕조를 무너뜨리고 전 레 왕조를 개창했지만 여전히 송나라의 위협이 남아있었다. 송나라 대군이 백등강 유역에 이르러 베트남군에 맹공을 퍼부었지만, 레호안의 뛰어난 군사 지휘력과 기습공격에 당해 오히려 지휘관 후인보가 목숨을 잃는 등 진격로가 차단되고야 말았다. 게다가 북쪽에서 요나라의 침공 가능성이 대두되자 빠른 시일 내에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여긴 송나라는 군사를 물린다. 이어서 레호안은 송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동시에 북송에 정식 책봉을 요구했고, 송태종도 이 요구를 받아들여 993년 그를 교지군왕, 997년 승격하여 남평왕에 책봉했다.

레호안은 남쪽으로 정벌 전쟁을 펼치기도 했다. 982년부터 남하 정복전쟁을 벌여 참파를 공략했다. 참파의 왕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는 참수당했고 참파의 수도 인드라푸라마저도 함락해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을 정도. 레호안은 참파에게서 속국이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철군했다. 내적으로는 불교를 크게 장려했으며 운하를 개통하기도 했다. 레호안이 1005년 붕어하자 그 아들 레롱비엣이 즉위했지만 3일 만에 레롱딘에게 살해당해 제위를 찬탈당한다.

레롱딘은 즉위한 후 대중국 유화책을 펼쳐 송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했고[25] 중국에서 대장경을 받아오는 등 불교를 전폭적으로 장려했다. 그러나 레롱딘은 잔혹한 성품으로 민심을 잃었고,[26] 결국 1009년 레롱딘이 불과 2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리꽁우언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어 전 레 왕조가 무너지고 리 왕조가 들어선다.

4.3. 대월 (大越) (1054년 - 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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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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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왕조 태조 일주사[27]
태조가 세운 리 왕조베트남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다. 이전의 응오 왕조, 딘 왕조, 전 레 왕조 등등이 하나같이 몇십년도 못가서 무너진 것과 달리 리 왕조는 무려 9대 216년간 베트남을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하노이를 수도로 삼았으며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는 등 오랜 통치기를 바탕으로 베트남의 행정체계를 다진 왕조기도 하다.

리 왕조 시대는 베트남 역사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탕롱으로 천도해서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하노이를 수도로 삼았으며,[28] 거대한 황성을 지어 위엄을 과시했다. 넓은 하노이로 천도한 태조는 기존의 방어 중심 정책에서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하며 내치 안정에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도 관계를 개선함과 동시에 대리, 참파를 공격해 밖을 안정시켰고 국자감 설립, 과거제 실시, 불교 도교 장려, 행정조세체계 개편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여러 모로 베트남의 국력을 중국과 동남아의 여러 강국에 뒤처지지 않게 만든 명군이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 성종 역시 모두 기록에 남을만한 성군들이었다. 태종은 능숙한 군 통솔능력으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신속하게 제압했으며, 내치에도 신경을 기울여 형법 편찬, 군대 개혁, 도로 개통, 관료체계 조직 등을 추진했다. 민심을 중시했기에 기근이 들면 2~3년간 세를 감해줬고 송나라의 복식을 폐지하기도 했다. 성종 역시 베트남 역사에 손꼽히는 명군이었다. 역사, 문학, 음악, 미술 등에 두루 통달했고 성품이 자애로워 빈민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으며 유교를 취하여 문묘를 세우기도 했다. 무적으로도 문약하지 않아 영토를 노리는 참파, 북송과의 전쟁에서도 연일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잘나갔던 왕조라 중국의 천자(天子)에 맞서 스스로를 남제(南帝)라고 칭할 정도였다. 1076년 리트엉끼엣[29]이 북송을 선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때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키 위해 '남국산하'라는 시를 지어 군사들에게 부르도록 했다. 이 남국산하에 베트남의 황제를 북쪽 중국 대륙의 황제에 대등한 '남제'라고 자칭하는 표현이 있다. 두 진영 모두 국경에서만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승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리 왕조의 국력을 보여주는 일화들 중 하나다.

1100년대 후반 들어서는 리 왕조의 국력도 예전같지 못하게 시름시름거렸다. 1175년 즉위한 고종은 증세와 부역을 강요해 민심이 좋지 못했던 암군이었고, 전국에서 연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고종을 이은 혜종도 아버지와 똑같은 암군이었다. 외척 쩐투도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휘둘렀고 1224년에는 아예 혜종을 폐위시키고 그 딸을 황위에 올렸다. 그 후 쩐투도는 자신의 조카인 쩐까인을 황제와 결혼시키고, 1225년에는 쩐까인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리씨의 제위를 탈취했다. 이로써 리 왕조는 2세기 만에 멸망했고, 리씨 황족들은 새로 등장한 쩐 왕조에 의해 몰살되었다.

4.3.2. 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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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왕조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베트남의 2번째 장기 집권 왕조. 리 왕조를 뒤엎고 들어선 쩐 왕조는 13대 176년 동안 존속한 왕조로써, 건국 과정에서는 약간 흠결이 있을지 몰라도 리 왕조 말기에 빈번했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의 안정을 되찾은 한편 정치, 군사개혁을 단행하고 강화한 왕조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왕조이기도 하다. 베트남의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쩐흥다오가 활약한 시대가 바로 이 쩐 왕조 시기다.

쩐 왕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몽골 제국의 침략이다. 당시 쩐 왕조는 왕조교체기의 진통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내실을 다지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1257년 몽골이 송나라로 향하는 길을 내놓으라는 구실로 베트남에 전쟁을 선포한 것. 몽골은 이미 대리국과 쓰촨 일대를 정복한 상태라 바로 베트남으로 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이 1차 침입에서 원나라 군대는 수도 탕롱을 함락했지만 전염병으로 약화되어 쫒겨났다.

2차 침입은 1284년으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개시했다. 몽골군은 참파,[30] 운남, 광동 세 갈래로 나뉘어 쩐 왕조를 협공했다. 원나라 대군은 또다시 수도 탕롱을 함락시켰고, 쩐 왕조는 정말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1285년 4월 쩐낫두앗이 함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고, 특히 5월 10일 쯔엉즈엉 전투에서 쩐흥다오가 원나라 해군을 대파하면서 대세를 확실히 기울여버렸다. 10일 후에는 원나라 총사령관 소게투가 전사, 6월에 황제가 탕롱으로 돌아오면서 2차 침입 역시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집념많은 쿠빌라이는 1287년 3월에 또 3차 침입을 명령했다. 어찌나 여기에 많은 걸 쏟아부었던지 계획하던 일본 원정도 중단시켰을 정도. 이때 역시 이전 1차, 2차 원정처럼 수도를 점령하고 베트남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쩐흥다오가 1288년 백등강에서 원나라 해군을 격멸하면서 원나라의 꿈은 헛것으로 돌아갔고 베트남은 또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근성의 쿠빌라이는 4차 침입을 계획했지만 실현되기 전에 사망하면서 마침내 몽골 제국 VS 베트남 전쟁은 쩐 왕조의 승리로 결판난다. 전세계를 휩쓸고 다니던 몽골 제국을 3번이나 격퇴해내는 엄청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세계 최강 몽골 제국을 격퇴해낸 쩐 왕조였지만 내분에는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7대 황제 유종이 호화향략에 빠지면서 나라가 급격히 기울었고 연달아 폐급 암군들이 즉위하면서 외척들의 손에 나라가 휘둘렸다. 외적으로도 참파가 1371년부터 1390년까지 공격을 거듭해 수도 탕롱마저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러 경제가 파탄났다. 결국 호씨 가문 출신의 호꾸이리가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황룡포를 입고 다니는 등 사실상 황제 짓거리를 하고 다니다가, 1400년 소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해 호 왕조를 개창하며 쩐 왕조도 멸망한다.

여담으로 몽골의 침입 때문인지 동남아시아 국가 중 드물게 중장기병을 운용하기도 했다. #

4.3.3. 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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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왕조의 황성 남문 유적 호 왕조
호꾸이리가 세운 호 왕조는 고작 8년 밖에 못간 단기 왕조다. 호꾸이리는 2명의 황제를 갈아치우고 외손자 소제로부터 제위를 양위받아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쩐 왕조의 충성파들이 들고일어나 호꾸이리를 타도하려 시도했기 때문. 호꾸이리는 국호를 대월에서 '대우'로 바꾸고 기득권의 토지 및 노비 제한, 행정제도 개편, 쯔놈 도입, 타인호아 천도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며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심지어 환기용으로 1년만에 아들 호한트엉에게 양위하기까지 했으나 반발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쩐 왕조의 충성파들의 세력만으로는 호 왕조를 뒤집을 수 없었겠지만, 문제는 명나라였다. 쩐 황족 출신 쩐티엠빈이 중국으로 달려가 쩐 왕조를 무너뜨린 호 왕조를 비난하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 베트남에 영향력을 넓힐 기회만을 엿보던 명나라 입장에서는 간섭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영락제는 쩐티엠빈을 복위시킬 것을 요구하며 명나라 군대를 딸려보내 베트남으로 호송시켰다.

쩐티엠빈이 명나라 군대와 함께 베트남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호꾸이리는 즉시 공격해 쩐티엠빈과 명나라 병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격노한 영락제는 1406년 21만 5천 대군을 파병해 호 왕조를 공격했다. 호꾸이리는 끝까지 싸웠지만 명나라 대군을 이기기는 무리였고 1407년 아들 호한트엉과 함께 난징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했다. 호 왕조가 무너지면서 베트남은 잠시간 명나라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4.3.4. 명나라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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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ng_Domination_of_Vietnam.jpg
파일:800px-山文甲.jpg
교지 출정하는 명나라군
중국이 마지막으로 베트남을 지배했던 시대.

1407년 호꾸이리 호 왕조를 멸망시킨 영락제는 당연히 쩐 왕조에게 왕위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명나라 군대는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변했다.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 귀족 1100여명이 명나라에 동화시켜줄 것을 요청했다는 핑계로 송나라 때부터 사용하던 안남이라는 호칭을 다시 교지(交趾)로 돌리고 명나라의 일부로 통합하면서 철저한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이 1407년부터 1428년까지 약 20년간의 시대를 제4차 북속기라고 부른다.

명은 교지(베트남)에 본토와 같은 부, 주, 현 제도를 설치하는 한편, 과중한 조세를 거두고 모든 남자를 군역과 도로 공사, 광산 채굴, 염전, 진주조개 채취, 어로, 수렵 등의 부역에 동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통, 풍습을 금지하고 역사서 '대월사기'를 불태워버리는 등 민족말살정책에 앞장섰고,[31] 모든 행정구역에 문묘와 학교를 세워 사서오경, 성리학, 유학을 가르쳤으며 승려를 파견해 불교 도교를 전파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재산 축재에만 몰두하고 부정부패에 쩔어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인들이 격렬히 저항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지배는 1418년부터 1428년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일어난 레러이 람썬 봉기로 막을 내린다. 1418년 지방호족 출신 레러이가 왕을 자칭하고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처음에는 전면전으로 가다가 명의 군대에 참패했고, 이후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선회했다. 반군은 점차 고토를 수복해갔고 결정적으로 똣동-쭉동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기를 잡았다. 레러이는 멸망한 쩐 왕조의 후예 쩐까오를 황제로 내세워 명나라에 책봉을 요구했다. 결국 명나라는 1428년 교지를 포기하고 쩐까오를 안남국왕에 공식책봉함으로써 명나라의 지배기도 20년만에 막을 내린다.
4.3.4.1. 후 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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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쩐 왕조는 베트남을 지배한 왕조라기보다는 명나라의 지배 초기에 잠깐 들고일어났던 반란군, 부흥운동에 더 가깝다.

명나라는 처음에 호 왕조를 정복할때 쩐 왕조를 복귀시킨다는 명목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정작 베트남을 먹어치우자 쩐 왕조의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꿀꺽 먹어치웠는데, 나중에는 쩐 왕조의 후예가 등장해도 명나라에서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 등장한 사람이 쩐응오이다. 그는 스스로 쩐 왕조의 왕자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나라는 몽족 사기꾼으로 취급해 4만 대군으로 밀어버리려다가 실패했다. 그러자 영락제는 5만 대군을 다시 보내 1409년 9월 쩐응오이를 꺾어버리고 처형했다.

쩐응오이는 사형당했지만 그 조카 쩐꾸이코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연달아 베이징으로 사신을 보내 자신의 제위를 인정해달라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가 제위 대신 지방관 수준의 자치만을 허용해주자, 쩐꾸이코앙은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장수 장푸가 이끄는 2만 4천 대군이 동원됐고, 결국 1411년 2월 남딘 전투에서 4,500명이 죽고 2,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8월에는 명나라 해군이 300척에 달하는 베트남 해군을 몰살시키면서 더욱 쩐꾸이코앙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결국 1413년 말까지 후 쩐 왕조 병력의 70%가 날아갔고, 쩐꾸이코앙도 1414년 3월 붙잡혀 그해 8월 난징에서 처형당하면서 후 쩐 왕조는 완전히 사라졌다.

4.3.5. 후 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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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레 왕조 환검호 전설
베트남의 3번째 장기 집권 왕조. 무려 27대 358년 동안 존속했으며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왕조기도 하다.[32]

후 레 왕조는 베트남의 민족 영웅 레러이가 세웠다. 당시 베트남은 명나라 호 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시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이때 레러이가 람썬 봉기를 일으켜 명나라를 몰아내고 후 레 왕조를 개창한 것이다.[33] 레러이는 당나라의 대당률을 본떠 법전을 편찬했고 1429년에는 균전법과 토지 재분배라는 개혁을 펼쳤다. 레러이는 즉위한지 6년만인 1433년에 붕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종, 인종이 연달아 즉위했지만 모두 오래 못가 암살당하거나 사망했다. 특히 전폐제가 인종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면서 레 왕조의 혼란은 극에 이른다.

이런 레 왕조 초기의 혼란기는 성종이 등장하면서 종결된다. 전폐제를 쫒아내고 1460년 제위에 오른 성종은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군주였다. 그는 내치 안정을 위해 유교 개혁을 단행했다. 과거제를 실시했고 6부를 만들었으며 전국에 문묘를 다시 세웠다.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토지 개혁, 화폐 개혁을 실시해 행정의 효율을 크게 높였으며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숭상했다. 또한 레러이 시절 미비하게 끝난 법률 개혁을 재진행하고 실전된 대월사기전서를 재편찬했다.[34] 외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겨 10만 대군을 이끌어 참파를 사실상 멸망시키고 라오스 란쌍 왕국, 태국 란나 왕국을 공격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성종의 재위기는 후 레 왕조 최고의 전성기였고 명실상부 동남아 최강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렇게 찬란했던 후 레 왕조의 전성기는 성종이 1497년 사망하면서 끝나버리고야 만다. 연이어 황제들이 단명하며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제위 다툼이 극도로 심각해졌다. 가장 심할 때는 고작 20년 동안 3명의 황제들이 연달아 폐위되는 막장극이 일어났을 정도. 그나마 소종이 즉위해 허수아비 황제에서 벗어나 레 왕조를 다잡는가 싶었지만, 소종은 권신들을 견제하기에는 너무나도 능력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아 성격이 급했다. 결국 소종은 권신들 중 하나였던 막당중에게 사로잡혀 시해당했고, 막당중은 1527년 공제를 협박해 제위를 찬탈, 레 왕조를 멸망시키고 막 왕조를 개창한다.
4.3.5.1. 막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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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 막당중은 혼란스러운 후 레 왕조를 결딴내고 1527년 막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충(忠)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익숙해진 베트남 귀족들은 막 왕조를 찬탈자로 바라봤고 곳곳에서 엄청난 소요가 일어났다. 막당중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3년만에 아들 막등영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본인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막당중이 어떻게 애를 써도 들불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533년 막당중의 제위 찬탈에 반감을 품은 응우옌씨 가문의 응우옌낌과 그의 사위이자 찐씨 가문의 찐끼엠이 함께 후 레 왕조 복원을 기치에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응우옌낌은 총사령관에 올라 장종을 새 황제로 추대하고 남부에서부터 밀고 올라갔다. 곧 홍강 이남의 모든 영토가 후 레 왕조 부흥세력 아래에 들어갔고 막 왕조는 하노이와 베트남 북부 일대만으로 영토가 축소됐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막당중은 명나라에 완전히 기면서 중국의 지원을 갈구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밧줄로 묶어 항복의 자세를 취하고 조카 막문명(莫文明)과 신하 40여명을 거느린 채 왕문성에게 대월의 토지대장, 모든 장적 및 나라의 중요 문서와 고평(까오방) 일대, 자국의 특산물 그러니까 막대한 뇌물을 바쳤을 정도.[35] 명나라는 마지못해 베트남 북부는 막 왕조가, 남부는 레 왕조가 다스리는 중재안을 내놓았으나 레 왕조 부흥군이 당연히 이를 거절하면서 파탄났다.

1541년 막당중이 사망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점점 더 많은 영토들이 중흥에 성공한 후 레 왕조에게 털려나갔고, 1572년에는 수도 하노이마저도 함락당했다가 1년만에 겨우 되찾을 수 있었다. 1592년 찐씨 정권 찐똥이 치고올라와 수도 하노이를 함락하고 영조가 잡혀죽으며 막 왕조는 사실상 멸망했다. 막 왕조의 잔존 세력들은 까오방 지역으로 도망쳐 명나라, 뒤이어 청나라의 보호를 받는 조그마한 공국 수준으로 전락했다가 명종이 1677년 찐씨 정권에게 잡혀 살해당하면서 결국 완전히 몰락했다.[36]
4.3.5.2. 찐씨 정권 응우옌씨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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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응우옌씨 정권
후 레 왕조는 1527년 막당중이 제위를 찬탈하면서 멸망하는가 싶었지만, 찐씨 가문의 찐끼엠과 응우옌씨 가문의 응우옌낌의 주도로 부흥군이 일어나면서 목숨이 연장됐다. 부흥군은 빠르게 홍강 남부 일대를 모조리 장악했고 막 왕조는 북쪽으로 쫒겨났다. 부흥군의 총사령관은 응우옌낌이었다. 응우옌낌은 장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고 실권을 좌지우지했으나, 막 왕조의 첩자에게 암살당하고야 말았다. 응우옌낌이 죽자 그의 양자이자 사위였던 찐끼엠이 실권을 독차지했다. 그는 장종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1592년 막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 영조를 잡아죽이면서 후 레 왕조의 중흥을 선포했다.

그러나 부활한 후 레 왕조는 그냥 완벽한 허수아비였다. 레 황제들은 실권이 없었고 모든 권력은 공신가문인 찐씨와 응우옌씨 가문이 독차지한 상태였기 때문. 특히 막 왕조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찐끼엠은 응우옌씨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인 응우옌낌의 세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장인의 장남을 독살해버렸고, 차남 응우옌호앙은 남쪽으로 쫒아냈다. 응우옌호앙 역시 찐끼엠의 독주를 막기에는 힘이 부족했기에 순순히 남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베트남은 북쪽의 찐씨 정권, 남쪽의 응우옌씨 정권으로 양분된 베트남판 남북조 시대로 접어든다.

북쪽의 조정을 장악한 찐씨 정권은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다.[37] 서열상으로는 황제를 손아귀에 넣은 찐씨가 응우옌씨보다 약간 우위에 있었고 실제로 국력도 더 강했다. 찐씨 정권은 여러 차례 응우옌씨 정권에게 복종을 요구했지만 응우옌씨 정권이 이를 무시하자 1627년 찐씨 정권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나라 안에서 내전이 터진 적도 있다. 찐씨-응우옌씨 전쟁은 무려 45년간 지속됐다. 찐씨 정권은 7차례나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포르투갈 포병과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농성하는 응우옌씨 정권을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1672년 마지막 공세 이후로 두 정권이 휴전에 합의하며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베트남은 무려 260년 가까이 한 나라 아래 두 정권이 들어선 사실상의 분단 상태로 고착화됐다. 이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1771년 응우옌씨 정권의 폭정에 반발한 완악, 완여, 완혜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떠이선 왕조를 세우면서 종결된다.

4.3.6. 떠이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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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 왕조[38] 완악, 완여, 완혜 삼형제
베트남은 260년 동안 후 레 왕조 아래에서 북쪽 찐씨 정권, 남쪽 응우옌씨 정권으로 나뉘어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미묘한 세력균형은 1771년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르, 응우옌반후에[39] 3형제가 거병하면서 깨진다. 3형제는 응우옌씨 정권의 폭정에 반발해 농민들을 결집해 반란을 일으켰고, 노동자, 농민, 기독교도, 소수민족, 참족 등 모든 반대세력들을 끌어모으면서 세를 크게 늘렸다. 1774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수도 푸쑤언이 함락됐고 1777년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보루 자딘을 함락하며 응우옌씨 정권의 왕족들은 싸그리 도륙했다.

삼형제들 중 장남 응우옌반냑은 스스로 칭제하고 떠이선 왕조를 세웠다. 막내 응우옌반후에가 북쪽의 찐씨 정권마저도 공격했다. 기세가 한껏 오른 응우옌반후에는 2달만에 찐씨 정권의 수도 하노이를 정복하며 후 레 왕조마저도 끝장내버렸다. 후 레 왕조의 마지막 황제 민제 청나라로 도망쳐 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가 이에 응하여 10만 대군을 파병했지만 떠이선 왕조는 이마저도 격파해버렸다. 이렇게 떠이선 왕조는 일시적으로나마 전 베트남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떠이선 왕조는 베트남을 통일하는 듯 했지만 유일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응우옌씨 정권의 생존자 응우옌푹아인이었다. 떠이선 왕조의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응우옌푹아인은 무려 4차에 걸쳐서 베트남 탈환을 시도했다. 응우옌푹아인은 시암,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캄보디아 등 외세의 손을 빌려서라도 떠이선 왕조를 쫒아내려 들었다. 떠이선 왕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응우옌반후에가 죽자 아들 응우옌꽝또안이 제위를 물려받았는데,[40] 이 응우옌꽝또안이 응우옌반냑과 전쟁을 벌였던 것. 결국 응우옌푹아인은 이 틈을 타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왕조 응우옌 왕조를 건국했다.

4.4. 월남(越南) (1802년 - 1945년)

4.4.1. 응우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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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tnal/Hue_Vietnam_Citadel-of-Huế-01.jpg
파일:Maps_of_Vietnam_during_the_reign_of_Emperor_Minh_Mạng_(1820-1841).png
후에왕궁 응우옌 왕조
1802년 건국된 응우옌 왕조베트남 최후의 왕조이자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통일왕조다.

응우옌 왕조를 세운 응우옌푹아인은 연호를 가륭(Gia Long, 嘉隆)으로 선포하고 국호를 '대남'으로 바꾸었다. 특히 세워질 때부터 프랑스 등 서양의 후원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후에의 궁정에 서양인 300여명을 거주케 하는 등 나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을 유지하기도 했다. 또한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던 베트남을 통합하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였는데 운하와 도로를 만들어 교통을 원활히 만들었고 가륭률(嘉隆律)을 반포해 법률을 정비했다. 군사적으로도 태국과 손을 잡고 캄보디아를 갈라먹는 등 여러 모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응우옌푹아인이 죽자 1819년 민망 황제가 제위를 계승했다. 민망 황제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다. 또한 세금 감면, 군비 축소를 통해 재정 건전화에 온 힘을 쏟기도 했다. 외적으로는 대단히 강경한 정책을 펴나갔다. 캄보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대군을 보내 진압하고 아예 베트남에 편입시켜버렸으며, 태국, 라오스와도 전쟁을 벌이며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넓히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구에게도 강경하게 나가 극도의 쇄국 정책을 펴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고 선교사들을 몰아냈다.[41]

그러나 민망 황제가 1841년 사망하면서부터 응우옌 왕조는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걸었다. 티에우찌 황제, 뜨득 황제 등등 유약한 성정을 가진 황제들이 연달아 왕위에 오르며 나라는 갈수록 흔들렸다. 기아와 가뭄,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어났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양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문호 개방과 가톨릭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베트남 앞바다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파일:박닌전투.jpg
파일:300px-Signature_of_1883_Treaty_of_Hue.jpg
청불전쟁 제2차 후에 조약
베트남을 잡아먹은 것은 바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1861년에는 70척의 군함을 파견해 베트남 남부로 진군했고 베트남은 제1차 사이공 조약을 맺으며 항복했다. 프랑스는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다낭 등 3개 항구가 개항됐고 남부 6성이 사실상 프랑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프랑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72년 베트남의 기독교도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하노이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때 맺어진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응우옌 왕조는 남부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소유권을 인정했고 프랑스는 하노이, 후에 등에 영사관을 개설할 권리를 얻어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자 청나라가 개입해 프랑스를 쫒아내려 시도했지만, 청불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사실상 확실해졌다. 응우옌 왕조 조정 내부에서도 분란이 끊일 날이 없었고,[42] 1883년에는 제1차 후에 조약을 맺어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됐다. 결국 2년 후 1885년 제2차 후에 조약에서 응우옌 왕조의 외교권이 프랑스에게 넘어가고 보호국으로 전락하며 베트남은 완벽한 프랑스의 식민지로 추락했다. 그해 7월 보정대신들이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도망쳐 프랑스에 대항하는 '껀브엉 운동'을 벌였다. 프랑스는 무려 11년이 지나서야 겨우 껀브엉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4.5.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885년 -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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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 치하 하노이의 모습
1886년 통킹 전역[43]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며 베트남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베트남을 먹어치운 프랑스는 베트남을 크게 3개의 구역으로 나눴다.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지방을 프랑스령 통킹으로, 후에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지방을 프랑스령 안남,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남부의 코친차이나로 나눈 것이다. 이 중 프랑스는 남부의 코친차이나만을 직접 통치하였고, 프랑스령 통킹과 프랑스령 안남은 형식상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에게 맡기고 실질적,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87년에 안남과 통킹, 코친차이나 지방을 모두 묶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고, 응우옌 왕실은 허수아비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전혀 없는 괴뢰 정권 수준으로 격이 낮아졌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베트남을 경제적 착취를 위한 식민지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세율을 높이고 소금을 전매, 마약인 아편을 공공연히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44]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도 7만 명의 인력을 징집해 전선에 투입했고 엄청난 양의 물자와 군수품을 징탈해갔다. 프랑스의 억압적인 통치로 인해 베트남인 사이에선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만연했고 주이떤 황제는 궁에서 도망쳐 베트남 반군에 합류하려 시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45]

베트남인들은 껀브엉 운동 등을 통해서 프랑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1900년대 들어서 프랑스의 식민기 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성인이 되며 조금씩 독립운동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독립을 갈망했지만, 껀브엉 운동이 옛 봉건왕조 시대로 회귀를 주장했다면 이들은 근대화와 공화정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판보이쩌우가 등장해 동두 운동[46]과 두이탄 운동[47]을 벌였다. 이로 인해 쯔꾸옥응으가 널리 퍼져 문맹률이 빠르게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온건한 움직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이 운동마저도 억눌렀고, 이에 절망한 혁명가들은 인근 중국 러시아를 모방해 더 급진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의 투쟁으로 전환한다.

수많은 독립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판보이쩌우 광저우에서 베트남유신회를 창설했고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48]이 세워졌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공산당도 무려 3개나 창설됐다. 1930년 코민테른 호찌민을 홍콩으로 파견해 베트남 내에서 분열된 공산주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 베트남 공산당을 만들었고,[49] 나중에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싫어했던 스탈린 때문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호찌민은 프랑스, 소련 등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며 192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의 독립과 공산화에 애썼으나 30년대 들어서 프랑스의 무지막지한 탄압으로 공산당 조직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 수준으로 몰렸다.

4.6. 베트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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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_advance_to_Lang_Son194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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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으로 진격하는 일본군 퇴위하는 바오다이 황제
그렇게 60년간 베트남을 통치한 프랑스의 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1940년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면서 끝장난다.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한 상태라 일본이 동남아 식민지를 빼앗아가든말든 뭐라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은 중국을 압박한다는 핑계로 베트남을 무력점령하고 비시 프랑스를 협박해 베트남에 2만 5천명의 일본 주둔군을 두었다.

1941년에 나치 독일 독소전쟁을 개전하면서 일본 제국의 도움이 더 절실해지자, 히틀러는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사실상 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도록 냅뒀다. 사실상 이때의 베트남은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 주둔군 사이의 이중 권력 체제였고, 두 세력이 모두 베트남을 수탈하면서 베트남인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졌다. 이에 맞서 호찌민이 1941년 베트남독립동맹을 창설, 정당에 상관없이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을 대표하는 단체를 열었지만 실제로는 베트남 공산당 주도나 다름없었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제국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프랑스 총독부는 자유 프랑스 쪽에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대신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1945년 3월 베트남 제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든다. 그러나 상황은 날로 악화됐고, 1944년부터 2년간 200만 명에 달하는 베트남인들이 기근으로 굶어죽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핵 두방맞고 무조건 항복했다. 일본군이 철수하자 베트남 제국도 10일 뒤 붕괴했으며 143년에 걸친 응우옌 왕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권력의 공백을 틈타 호찌민과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했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본격적인 베트남 현대사의 포문을 열어젖혔다.

5. 현대 (1946년 - 현재)

5.1. 베트남 독립 전쟁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됐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한편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으며,[50]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며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 및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 1개 특구 양보, 인도네시아 주재 화교의 지위 회복 등을 전제로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맺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했다. 반면 남부 측은 영국군은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제 무기를 넘겨주고, 별다른 마찰없이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 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 나라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1946년 3월, 베트민과의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눈속임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51]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의 각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기타 요충지를 습격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1947년 2월에 중부의 다낭, 후에 지역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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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 자치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52]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 완문청)이 총리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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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 자동차 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53]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으로 ' 베트남국'[54]이 성립됐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 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55]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16도선[56]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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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quoc gia Viet Nam, 꾸옥 기아 비엣남) 국기이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비엣남 꽁호아) 국기

1948년 6월 2일부터 1975년 4월 30일 패망때까지 사용. 꺼방바속도(Cờ vàng ba sọc đỏ, 한역하면 주황삼선기朱黃三線旗) 노란색은 베트남과 베트남인, 빨간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상징하며, 민유 민치 민향民有 民治 民享(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삼민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뒤에 붙은 것으로 원래는 타인타이 황제(成泰帝/성태제)의 깃발 카이딘 황제(啓定帝)가 고친 1920년까지 썼다. 카이딘 황제의 기도 롱띤이라고 부른다. 바오다이 황제 때까지, 즉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했다. 사실상 1890년부터 1975년까지 85년을 이어진 국기인 셈이고, 지금도 남베트남계 혹은 베트남 공산정권 반대 세력에선 이 국기를 쓴다.

5.2. 베트남 전쟁

그러나 호찌민의 결의와는 달리 남베트남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1956년에 해야 할 남북통합 총선거도 없었다. 남베트남의 친미 정부는 베트민 지지자들에 대한 테러를 가했고, 결국 이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내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며 분쟁이 격화됐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 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이 이끄는 '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방해공작으로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 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1964년 8월 2일)이 중국 공산화와 연이은 한국 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 봐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돌입하지만( 베트남 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1973년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떠나야 했다. 자세한 것이나, 이 당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자세한 베트남 현대사는 베트남 전쟁 항목 참조.

1973년 1월 27일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미국이 발을 뺄 핑계거리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워터게이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사임으로 미국 정국이 혼란에 빠진것이 결정타였다. 1975년 3월 10일에 협정을 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 만인 3월 26일에 다낭 함락, 1달 20일 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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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 국기[57]

1975년, 북베트남은 기어이 남베트남을 드디어 멸망시켰고, 남베트남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다음 해의 총선거로 2,400만명의 북베트남과 2,000만 명의 남베트남이 합쳐져 4,400만 명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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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이로서 독립국 베트남은 통일을 완성했다. 물론 통일 이후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추방당하여 난민이 되거나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교육 등으로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두는 이야기지만 베트남 공산정권이 호치민 같은 미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고, 정치적 탄압이나 수용소 같은 것도 분명 존재했긴했다. 1950년대 중반에 토지개혁을 결정과정 같은 건 생략한 채 강제로 시행했다가 수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월남했고, 권력투쟁과정에서 트로츠키파를 숙청했던 게 그 예다. 단지 소련이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보다 막장성이 덜하다 보니 덜 알려졌을 뿐.

여기서 알아야할 사실은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베트남 또한 지엠 정부 하에서 수만 명이 죽고 또 수십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감금당했다. 즉 남베트남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친미 반공 독재국가였다. 자세한 것은 이 논문을 참고하라

5.3. 통일 이후의 베트남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충만해진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공산화, 지배하여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19세기에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과 함께 라오스 캄보디아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베트남은[58] 당시 막 공산화된 캄보디아 정권과 당초엔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고 있던 크메르 루주는 원래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로 성장했고, 그 보답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베트남을 돕고 있었지만, 1972년 미군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자, 크메르 루주는 곧바로 미래에 다가올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3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중공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과거 자신들의 고토를 내놓으라며 베트남과의 국경에서 국지전이 발생하기 시작했고,[59] 1976년부터는 캄보디아의 요청을 받은 중국이 직접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크메르 루주의 친 중공 정책으로의 선회와 남부지역 공격에 마침내, 1978년 12월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무력 침공했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했다.

그러자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2월 17일 ~ 1988년 1월)이 벌어졌다.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의 대분열을 상징하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명목상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결국 모두 지친 가운데,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물러났고, 역시 중국도 베트남에서 물러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 루주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당시에는 민주 캄푸치아)를 점령했는데 애초에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훨씬 안 좋았던 데다가[60] 크메르 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 전쟁에서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80년대 내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다.[61]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62] 그러나 1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쳐 1986년 말에 공산당은 6차 인민회의에서 도이머이 (Đổi mới; 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을 승인 후 실시했고, 1989년에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63]

도이모이 추진 후 1990년대 초반 들어 한국 등 주변국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한편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정식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적국이던 미국과도 관계 개선에 주력해 1995년 통상금지가 풀려 외교 관계가 재개됐고 이제는 한술 더떠서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면서 미군도 주둔하고 있고 합동군사훈련도 자주 여는 중이다.

6. 출처

7. 관련 문서


[1]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에서는 국가 민간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이 드물었던데다가 전통적으로 구하기는 쉽지만 보존성은 떨어지는 패엽에다가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 실제로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5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를 제외하면 비중이 대폭 줄었다. [3] 간혹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는 반랑(Văn Lang)의 영역이 과도하게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는 지도도 있는데, 월(越)이라 불린 민족이 거주했던 영역이란 영역은 죄다 포함시킨 지도이다. 사학자가 만든 지도로는 보이지 않고, 베트남 국수주의자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4] 대체로 월이라 통칭하긴 하지만 종족과 분포가 다양해 백월(百越)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만큼 각 종족들끼리 언어도 달랐다. [5] 베트남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중국을 북방, 자신을 남방으로 칭하여 자주의식을 드러냈다. [6] 중국 [7]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 창비, 2010, p76 [8] (Hùng Vương, 雄王, 웅왕) 문랑의 모든 군주들이 이 '훙브엉'이라고 불렸다.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파라오 샤한샤처럼 군주의 칭호였다. [9] 영문위키 설명에 따름 [10] 송정남, 2001년. [11] 단군조선의 경우 그래도 기원전 7세기 경부터는 중국 사서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국가는 몰라도 그러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까지는 교차검증이 되나, 반랑국은 그렇지 못하다. [12] 툭판(Thục Phán, 蜀泮, 촉반)이라고도 한다. [13] (완옹중이라고도 전해짐) # 이옹중 이야기 [14] 이당시 광둥성에는 한족이 거의 살지 않았고 베트남인들의 선조인 월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5] (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 [16] (呂嘉, Lã Gia, 라지아) [17] (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둑) [18] 삼국지에 등장하는 마초, 마등의 선조다. 사자성어 노익장의 유래일 정도로 유능한 장수였다. [19] 여담이지만 쯩 자매는 한나라 병사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서로 껴안고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고. [20] 베트남의 봉기 주도자. 여자의 몸으로서 오빠 조국달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봉기를 이끌었다. 허나 육윤의 전술에 말려 22살의 어린 나이에 자결한다. [21] 스스로 칭제하고 자신을 '흑제(黑帝)'라 부르며 722년 중국의 지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참파, 크메르족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세가 절정에 달할 때에는 하노이까지 점령했으나, 오래지 못해 당현종이 보낸 10만 대군에게 진압당했다. 베트남 역사 초기의 민족 영웅들 중 하나다. [22] 무엇보다 당시 베트남의 중남부에서 해남도 광저우로 빠지는 교역로가 개발되어 홍하 델타의 지리적인 장점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덩달아 베트남의 중요성도 떨어져버렸고 중국은 더 이상 베트남으로 큰 이득을 벌어들이지 못하자, 결국 중국은 베트남을 '만이'의 침략에 대비한 일종의 완충지대로 써먹었고 중국 지배기 동안 베트남에 부임한 중국 관리들은 이 지역의 행정보다 변경 방비에 더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됐다. [23] 엄밀히 말하면 바로 망한건 아니고, 왕태자 응오쓰엉씨가 즉위해 어떻게 수습하려 시도하긴 했는데 실패했고 968년에 완전히 망한다. [24] 딘또안은 1000년 경 배 안에서 살해당했다. [25] 레호안은 송나라에게서 남평왕에 책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송나라에 적대적이었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은 기본이요 군대를 보내 송나라를 노략질하는 일도 잦았다. 송 조정은 제발 노략질을 중지하라고 요구했지만 송나라가 북쪽의 요나라와 싸우느라 남쪽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던 레호안은 무시했다. [26] 심한 치질을 앓아 매일 누워있었던지라 '여와조'라고도 불린다. 개인적인 성품이 잔혹해 평가가 좋지 않다. 다만 일부 기록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네로 칼리굴라 수준의 폭군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27] 리 왕조 시대에 지어진 고찰. 기둥 하나 위에 전각이 올라앉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하노이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28] 당시 전 레 왕조의 수도 호아 루는 토착 귀족 세력들의 힘이 너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산과 물에 둘러싸인 좁디좁은 지형이었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고 경제, 상업적으로도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29] 한국에서는 쩐흥다오만큼 인지도가 있지는 않지만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장수다. 베트남의 국민영웅 쩐흥다오가 한국의 이순신 같은 느낌이라면 리트엉끼엣 을지문덕 정도로 칭송받는 명장이다. [30] 당시 참파는 베트남보다도 더 남쪽에 있었지만 이미 몽골군에 점령당해버린 상태였고 그나마 하리짓 왕자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던 시점이었다. [31] 다행히도 대월사기를 공부했던 학자들이 훗날 사기를 되살려 대월사기전서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32] 다만 가장 오래 유지됐을 뿐이지 황제가 실권을 잡았던 시절은 턱없이 짧은 100년 정도 밖에 안된다. 나머지 260년 동안은 이름만 걸어두고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응우옌씨 정권으로 나라가 양분되어 후 레 왕조의 황제는 꼭두각시인 상태로 살았다. [33] 원래는 명분을 얻기 위해 옛 쩐 왕조의 후예 쩐까오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명나라를 몰아내고 나자 쩐까오를 쫒아내고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올랐다. [34] 당률(唐律) 및 명률(明律)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홍덕형률》(洪德刑律)을 반포했다. 이 《홍덕형률》은 중국의 법률을 따왔으며 베트남의 독자적인 규정을 내포했다. 그리고 베트남 성문법인 《국조형률》에 민족 고유의 관습법을 반영시켰으며 사서 중심의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35] 베트남 사학계에서는 이 사건 때문에 막당중을 목숨걸고 자주성을 지켜온 베트남 역사에서 기록에 남을만큼 굴욕적인 사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36] 막 왕조의 후손들이 중국이 내려준 안남도통사 작위를 세습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덕종이 1683년 병사하면서 완전히 대가 끊어진다. [37] 사실 후 레 황제들도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다. 영종, 경종 등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찐씨 가문을 몰살하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음모가 드러나 오히려 시해당했다. [38] 청색은 광중제의 푸쑤언 조정, 노란색은 태덕제의 꾸이년 조정이며 초록색은 응우옌씨 정권의 마지막 생존자 응우옌푹아인의 영역이다. [39] 똑같은 응우옌이지만 그 응우옌씨 정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0] 원래는 응우옌반냑만이 유일한 떠이선 왕조의 황제였다. 하지만 응우옌반후에가 베트남 북부를 정벌하면서 세력이 그를 능가하게 커졌고, 결국 응우옌반후에 역시 독자적인 황제임을 선포했다. [41]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 먼 동방의 나라가 선교사들을 탄압한다고 해서 간섭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42] 1883년 뜨득 황제가 죽자 죽득 황제, 히엡호아 황제, 끼엔푹 황제 등이 계속 갈아치워졌고 보정대신들의 권력 다툼이 날로 심해졌다. [43] 1883년부터 1886년까지 프랑스군과 류융푸 흑기군, 청나라 군대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프랑스군은 이 전역에서 승리하며 베트남 북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베트남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44] 이것은 프랑스 본국이 의도치 않게 조장한 측면도 있는데 식민지에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아서 현지 총독부가 억지로 주민들을 쥐어짜야 운영비가 나왔기 때문이다. [45] 물론 실패했고 주이떤 황제는 인도양 레위니옹 섬에 유폐됐다. [46] 동쪽 여행이라는 뜻으로 앞서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 제국을 벤치마킹하고 배워 베트남의 근대화를 완성하자는 운동. [47] 대중 교육을 강조하고 국가를 현대화하여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관용과 협력을 중시하는 근대화 운동. [48] 중국국민당을 롤모델 삼아 만들어진 정당. 남베트남 멸망 후 캘리포니아로 당사를 이전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49] 특히 앞서 언급한 베트남 국민당이 극심한 탄압으로 반쯤 와해되면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완전히 공산주의 세력의 주도로 바뀐다. [50]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화민국군이 남부를 지배했다고 잘못 표기되었다. [51]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4공화국 시기 공산당은 정권에서 배제당하는 야당 신세였다. [52] 남기국(南圻國)이라고도 한다. [53] 바오다이는 공화국화 되면서 퇴위된 후 프랑스로 망명해 조용히 살다가 1997년에 파리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향년 84세) [54] 베트남준국가라고도 한다. [55] 1956년 7월에 남북총선거로 통일 베트남을 세우기로 했다. [56] 이 경계선대로라면 후에 다낭은 베트민이 가질 수 있다. [57] 베트콩(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남베트민)임시 기와 같다. 적성홍기(赤星紅旗)라고도 한다. [58] 그나마 태국 캄보디아와 유사한 종교와 문화로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동형화가 되었지만, 베트남은 종교( 대승불교)와 문화의 이질성이 더 크고, 19세기 초에는 아예 꼭두각시 국왕을 세워 완전히 동화시키려 했다. 이 결과로 캄보디아 내에서 강제동화정책에 반발해 1851년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59] 사실 현재 베트남 2대도시 호찌민도 본래 캄보디아의 영역이었다.(…) 16세기 이후 크메르 왕국의 끊임없는 쇠퇴와 베트남 리 왕조의 남진으로 동부지방을 잃고 해양 상업도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60] UN 통계 기준으로 1979년 베트남의 1인당 GDP는 134달러였지만, 캄보디아는 102달러였다. 둘 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4위/3위였다. 참고로 2위는 오가덴 전쟁을 겪은 소말리아(90달러), 1위는 라오스 내전을 겪은 라오스(83달러). [61] 단순히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있지만 상당수 보트피플은 공장이나 농장, 어선에서 일해도 봉급이 얼마 안나왔고 인플레이션 현상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의 가치는 더더욱 떨어지는 현상 때문에 돈을 거하게 벌려고 베트남을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의 보트피플은 대다수가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면, 1980년대의 보트피플들은 대다수가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탈북자들과 정확히 반대인 셈이다.(과거 탈북자들이 고난의 행군 같은 생계난 때문에 탈북했다면, 현재 탈북자들은 정치적 억압을 피해서 탈북한다.) [62] 현재도 두뇌 유출은 베트남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다. [63] 이웃 국가인 중국이 태자당을 비롯한 중앙당의 권력남용이나 부정부패 문제가 있다면 베트남은 반대로 지역당 간부들을 비롯한 지방 토호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국부인 호찌민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시키면서 중앙당과 중앙정부에 지역당과 지방 유력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해지는 바람에 각종 선거나 당 대회가 있을 때마다 지방 유지들 간에 기싸움이나 뇌믈 공세가 판을 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