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부터 1976년까지 베트남 북부에 존재하던 국가에 대한 내용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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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베트남 제3공화국| 베트남 제3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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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동맹회 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越南獨立同盟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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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일 | 1941년 5월 19일 | |
해산일 | 1951년 3월 | |
창설자 |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호찌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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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지역 |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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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세력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945)[A] [[대만| ]][[틀:국기| ]][[틀:국기| ]] 중화민국 국민정부 (1945)[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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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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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민(Việt Minh)은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 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의 약자다. 한국 한자음으는 월맹(越盟)이며, Việt Minh의 실제 발음은 비엣민에 가까워( 외래어 표기법으로도 이렇게 쓴다) 비엣민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베트민의 초기 목표는 프랑스 식민제국과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었다.
훗날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혹은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베트콩은 월맹의 일부 인원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조직이다.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시작할 무렵에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일부 베트민 조직원 등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만든 새로운 조직이 베트콩인 것.
2. 역사
2.1. 식민지와 독립 그리고 다시 식민지
비시 프랑스 치하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1940년에 일본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다. 일제는 인도차이나를 노리고 있었지만, 같은 추축국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를 대놓고 공격하기는 힘들었기 때문.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통치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비시 프랑스의 영토이며 관료들도 그대로 프랑스의 관료들이 남았다. 프랑스 치하에서 신음하던 베트남인들은 처음에 동양인인 일본이 백인들의 지배를 끝내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점차 이들이 피부색만 다른 압제자임을 깨닫게 된다.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에서 민족주의자로 수배당해 세계를 떠돌던 호치민은,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교육받고 베트남에서 몰래 돌아와 1941년 베트민 조직을 결성한다. 베트민은 베트남 해방군을 육성하였다. 중국공산당에게 원조를 받게 위해 1942년 호치민은 중국에 잠입하였다가 반공주의 정당이자 당시 집권당인 중국국민당에게 발각되어 1년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이 국민당과 함께 공동으로 일본에 저항하기로 하자 풀어주었다. 베트민의 지휘관인 보응우옌잡과 베트남 해방군은 1944년 12월부터 일제 등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쳤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과 싸우고 있었기에 베트민을 지원하기로 했고, OSS가 호치민과 접촉하여 베트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자격으로 참전하였다. 호치민은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종전 직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치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 OSS로 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응우옌잡의 지휘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1945년 3월, 일본은 본색을 드러내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의 괴뢰국가인 베트남 제국을 세운다. 이 때문에 프랑스 총독부는 해체되고 프랑스 관료들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일제의 쌀 수탈로 인해 많은 베트남인들이 굶어죽었고, 베트민은 일제의 쌀 창고를 습격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의 일을 하여 민심을 얻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패망하고 중국국민당의 중화민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러 베트남 북부에 들어왔고, 16일에 베트민은 전국인민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 호치민은 베트민의 깃발(그림)과 국가가 채택되었으며 식민 지배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국적인 봉기를 주장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8월 18일까지 하노이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한다. 1945년 9월 2일, 베트민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세간의 이미지와 다르게, 미국은 식민지 정책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만약 미국이 프랑스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방향을 지지할 경우 프랑스는 소련 측에 설 것이라 협박하여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대한 원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원하는 베트남인들은 프랑스를 지원하는 미국을 보면서 미국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2차대전 동안 OSS와 협력관계였던 호치민[3]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 미국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관계를 바로 끊어버렸다. 당시 호치민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계속 백악관에 편지를 전달했으나, 모두 묵살당했다.
2.2.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분단
1946년부터 프랑스군과 베트민 사이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다. 베트민의 정치가이자 지휘관이었던 보응우옌잡은 베트민 병력 10,000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베트민은 어디까지나 급조된 민병대 수준의 조직이었고, 프랑스 군의 화력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4] 베트민은 유격전을 벌여 한밤중에 프랑스군을 기습하거나 철도를 폭파하는 식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1946년 하노이와 하이퐁에서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려난 베트민군은 정글로 도주했고, 1949년까지는 유격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섰다.전쟁 기간 동안 베트남 지역에서의 상황은 프랑스군이 유리했으나, 주변국들의 상황은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은 베트민에게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소련 역시 베트민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베트민의 화력은 나날이 늘어났고,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바주카포, 박격포, 무반동총으로[5]중무장한 진짜 군대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49년말-1950년초에는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의 국경초소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야전에서 프랑스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베트민군은 1950년-51년을 거치며 야전에서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치렀고, 프랑스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귀중한 승리를 가져오며 라오스와의 국경지대, 중국과의 접경지대의 대다수를 장악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중국 공산당이 육성한 베트민 정규사단들은 3개 보병연대 체제에 1개 포병대대가 배속되는 3각 편제로 창설됐다. 4개 보병대대로 구성된 각 보병연대는 연대마다 4문의 75mm 포와 4문의 120mm 박격포를 연대 지원화력으로 갖추고 있었다. 사단 편제 창설 초기엔 12,000명이 넘었으나 전쟁 중반 이후부터는 1만명 선으로 정착되게 된다. 정원이 800명인 베트민 보병대대는 20정의 기관총,8문의 82mm 박격포,3문의 75mm 무반동총을 보유했다. 대대의 일반 보병들은 바주카와 개인화기로 무장했다. 1951년 말 기준 베트민이 보유한 정규 보병사단의 숫자는 6개를 넘겼다. 같은 시기 독립연대 전력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략 15개 선이었다. 베트민의 105mm 야포를 위시한 중야포와 중박격포,37mm 대공포와 대공기관총들은 별도의 편제인 제351포병사단이 관리했다.[6]
한편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드라트르 장군이 1950년말부터 건설한 요새인 드라트르 라인이 세워지고, 프랑스군이 재정비후 참호에 틀어박혀 화력으로 베트민군의 돌격을 분쇄하는 ‘고슴도치 전술’이 채택되자 베트민군도 고전하기 시작했다. 1951년에는 하노이와 하이퐁 함락을 노리고 3-4개 사단이 공격해오다가 홍강삼작주 일대에서 참호를 파고 버틴 1개 사단 규모의 프랑스군에게 작살나고, 1952년초까지의 공방전에서 베트민군은 역으로 자신들의 점령지가 공격받기 시작하는등, 프랑스군은 잠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드라트르 장군의 사망 이후 전황은 프랑스군에게 불리해져 갔다.
베트민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직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며 죽였고, 이는 친 프랑스 계열 베트남인에게 대한 습격과 함께 공산주의자가 아닌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프랑스는 베트민군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고 있었지만, 인명피해가 누적되고, 미국의 지원마저 줄어들자 점점 전쟁의 값을
견디지 못하고 피로가 누적되었다. 베트민은 프랑스 군보다 더 피해가 컸지만, 이들에게 조국의 독립은 포기할 수 없는 것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베트남은 조국이 아니었다. 보병과 포병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베트민 군대가 1953년 말이 되면 공산권의 원조로 600대 이상의 트럭을 확보하는 등 차량화까지 시도하게 된 것도 이 때다.[7]
이런 상황속에서 1953년, 파리는 1955-56년안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철수하고자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해에 일어난 나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인 화력 압도, 고지대 점령을 하고 참호를 파 베트민군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박살내는 ‘고슴도치 전술’을 대규모로 실행하는 ‘카스토르 작전’이 시행된다.
베트민의 주력부대를 묶어놓고, 보급로를 차단하며 화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찾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의 국경지대에 있어 보급로를 차단하고 베트민군 주력을 섬멸할 수 있는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 분지에 요새를 건설한다.
디엔비엔푸에는 포장도로가 한 개밖에 없었고, 고지대를
장악하면 베트민군의 보급로는 차단될 수 있었다.
아직 프랑스군은 전면전에 자신이 있었고, 베트민의 병력을 끌여들여 화력으로 섬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보응우옌잡은 프랑스 군이 제 목을 조른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베트민은 여성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력[8]과 장비를 동원하여 프랑스 요새를 둘러싼 산지 위에 화포를 올려놓고 매복해 있었다. 하지만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에게 기만 작전을 펼치기 위해 1954년초까지 프랑스군에게 간헐적인 포격외에는 공격을 안하고 숨어있었다.
베트민은 5개 사단 규모인 5만명으로 프랑스군 정예 병력 14,000명을 포위했지만 프랑스군은 공중 정찰까지 감행했음에도 베트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개시된 베트민군의 공세로 1954년 3월부터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은 프랑스군의 고지대 진지를 점령하고 산 위에서 포격하기 시작했다. 3월 중순에 비행장을 파괴당한 프랑스군은 공중에서 투하하는 보급과 공수부대
증원을 받으며 5월 7일까지 버텼지만 결국 막대한 피해[9]를 입고 베트민에게 항복한다.
사실 베트민의 피해는 프랑스군의 배에[10]이르렀고,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했다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의 지원 없이 베트민 단독으로 남쪽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낼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중국은 6.25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라 더 이상 베트남 쪽에서 전쟁을 지원하기는 싫었고, 소련 역시 거리가 먼 나라였고 적극적으로 베트민을 도와줄 경우 서방, 특히 미국을 자극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주둔군의 최정예 병력인 외인부대원들, 식민지 공수부대등의 손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들의 손실은 곧 프랑스군 전투 병력의 대다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맺어진 제네바 조약을 통해, 북베트남은 베트민의 지배로 독립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되었고, 남베트남은 프랑스의 점령지로 남게 되었으며, 유엔을 통해 2-3년 후에 전 베트남의 통합 선거를 하기로 약속했다. 이대로 가면 호치민이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현상유지를 바랬던 미국의 개입으로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이 벌어진다.
2.3.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대립
미국은 마지못해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으로 이어진 흐름 등을 보며 ' 도미노 이론'을 우려했다. 남 베트남이 무너질 경우, 동남아 전체가 차례차례 공산화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국 유럽과 미국에까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봤다. 미국은 남베트남 군에게 장비를 원조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식민지로서의 베트남은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독립된 국가로써의 남베트남은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이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을 바라보고 있던 시각을 대표했다.남베트남은 미국과 프랑스, 남베트남 정부 3자의 이해관계가 얽혔다. 형식적으로는 친불정부 베트남국의 황제 바오다이가 수반으로 있었는데, 바오다이는 가족이 베트민에게 죽은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한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응오딘지엠을 안좋아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며 남베트남 군부 내의 친프랑스 인사들, 프랑스가 지원하는 정치깡패 등을 일소해버리며 정권을 장악하였고, 미국도 응오딘지엠을 지지했다. 결국 프랑스는 남베트남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미국과도 척지게 되자 남 베트남을 포기하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바오다이는 폐위되고, 1955년에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때 남베트남의 단독선거로 인해 유엔은 훗날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55년~59년 동안의 토벌이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쪽 베트민이라고 떳떳할 건 하나도 없어서, 응오딘지엠 정권 인사들을 상대로 투쟁하는 게 아니라, 정권과는 상관없는 각 시골 유지들, 즉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호치민이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자극하길 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애초에 이런 미치광이 테러범들을 지원하는 것 자체도 남베트남에 대한 명백한 도발행위였기에, 호치민이 과연 미국을 자극할 의도가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실, 남쪽 베트민의 테러는 호치민과 공산당이 그들을 지원하고 지령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과격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여하튼 59년부터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이 남베트남을 무력 통일할 것을 결의하고 남쪽 베트민을 지원함에 따라 베트민은 더더욱 잔혹해져서 아이들까지 의도적으로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날뛰기 시작했고,[11] 이듬해는 급기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공식 결성되면서 남쪽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더더욱 그 기세를 더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서 베트민과 미국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노력, 미국이 남 베트남을 수호하려는 노력은 충돌하면서 미국이 직접 남베트남에 파병하게 되고, 결국 베트남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A]
일본 제국이 잠시 베트남을 점령했을 때 일본 견제 차원으로 베트민을 지원했었다.
[A]
[3]
심지어 호치민은 죽을 병에 걸렸다가 OSS가 긴급공수해준 약으로 살아난 적도 있다.
[4]
1946년 11월 프랑스군의 함포사격에서 시작된 하이퐁 전투에서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렸었다.
[5]
이때 노획한 국민당군의 무기가 베트민군에게 넘어갔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한 화력도
미국제 곡사포였다.
[6]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1946-1954 참조
[7]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참조
[8]
민간인과 민병대 25만명, 야전 병력 5만명
[9]
전사자만 2,000명이 넘고 포로가 11,000여명이었다.
[10]
전투 병력의 절반이 사상당했다. 25,000-26,000명 정도.
[11]
https://play.google.com/store/books/details?id=AmfDvrjX4EgC&rdid=book-AmfDvrjX4EgC&rdot=1
https://gall.dcinside.com/m/war/1310756
https://gall.dcinside.com/m/war/131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