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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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왕국 Lietuvos Karalystė Königreich Litauen |
|
국기 | |
지도 | |
1918년 2월 16일 ~ 1918년 11월 9일 | |
수도 | 빌뉴스 |
정치체제 | 군주제 |
언어 | 리투아니아어, 폴란드어, 벨라루스어 |
역사 |
• 건국: 1918년 2월 16일 • 멸망: 1918년 1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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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 독일 제국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세운 괴뢰국이다.2. 건국과 독립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제국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은 완충지대 역할을 할 국가들의 지정학적 전략을 구상했다.독일 제국은 빌뉴스 회의가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독일 제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는 것을 선언하기를 희망하면서 빌뉴스 회의의 조직을 허락했다. 그 후 1917년 9월, 리투아니아 의회는 독일 제국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독일 제국은 확고하고 영구적인 동맹"을 원한다는 선언을 요구했다. 이 선언은 1917년 12월 11일 리투아니아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독일 제국과의 동맹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전쟁 이전 모든 국가 관계의 종료"를 선언했다. 동년 3월 3일, 독일 제국과 러시아 SFSR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 3국이 독일 제국의 지역임을 선언하고 러시아 SFSR는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이후 3월 2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독일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으며, 평의회는 여전히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자문 위원회로 취급되었다.
3. 왕위 결정과 즉위
리투아니아의 왕위는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에게 처음 제안 되었다. 이 제안은 리투아니아와 독일 제국 사이에 연합을 만드는 시도였지만 좌절되었다. 그리고 다른 제안은 빌헬름의 막내 아들 요아힘 공의 즉위를 요구한 제안이었는데, 이미 왕가를 지배 중이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확장 계획은 작센의 베틴 가문과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과 같은 가톨릭 통치 가문들에 의해 반대되었다. 이후 베틴 가문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공을 책봉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위협은 5월 19일 관료들의 회의 이후 더욱 절실해졌는데, "단호하고 영구적인 동맹"을 규정하는 조약들이 거의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자치권을 넘겨주지 않았다.1918년 6월 4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비밀리에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고 동년 3월부터 논의되었던 빌헬름 폰 우라흐 공작을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빌헬름 공작은 스위스에서 리투아니아인들과 함께 일했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제안했다. 빌헬름 공작을 추대한 이유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할아버지의 결혼으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이 없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없었고, 폴란드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후보자로 보였다. 하지만 독일 제국군의 방해로 인해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빌헬름 공작을 만나기 위한 리투아니아 대표단의 방문은 7월 1일까지 연기되었다. 몇 일 뒤인 7월 11일, 리투아니아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왕정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8월 12일, 공의회는 빌헬름 공작을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 2세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