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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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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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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spar(AD. 400~AD. 471)

서기 5세기 동로마 제국 초기의 이민족 출신 권신.

로마식 이름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Flavius Ardabur Aspar)였으며, 동로마 제국의 군사령관(magister militum)이자 귀족이었다. 종족적으로는 이란계 유목민의 일파였던 알란족과 동 게르만계인 고트족 혼혈이었다고 하며, '아스파르'라는 이름은 알란어로 '말의 주인', 또는 '기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저 중에서도 알란쪽의 정체성이 좀 더 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

이 인물을 간단히 평가하자면, 동로마의 스틸리코, 또는 아이티우스라고 할 수 있다. 스틸리코처럼 비운의 충신[2] 이미지도 없고, 아이티우스처럼 화려한 결전을 벌인 기록도 없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그가 휘두른 권력의 크기나 집권 기간은, 10년 남짓 통치한 데 불과한 스틸리코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이어가야 했던 아이티우스 그 이상이었다. 거의 50년 가까이 그의 일족이 동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자기 부하 두 명을( 마르키아누스 레오 1세) 연이어 황제로 옹립했고, 결국 실패했지만 막판에는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니 실로 엄청난 권신이었다.

2. 생애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를 섬기던 알란족 군사령관 아르다부르의 아들로, 서기 424년에 부친과 함께 서로마 제국의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테오도시우스 왕조)와 그 모후인 갈라 플라키디아를 도와, 서로마 제국 제위를 참칭한 대립황제 요안네스를 공격하는 원정을 지휘했다.

이때 서로마 제국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아스파르는 이후에도 서로마 제국의 내정에 종종 간섭했는데, 특히 반달족 북아프리카를 공격하여 차지한 뒤에는 반달 왕 가이세리크와의 화평 교섭에 자신이 나서기도 했다. 군사와 외교 분야에서 실적을 착실히 쌓았던 듯, 434년 무렵에는 집정관을 지내기도 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에는 황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참고로 아스파르의 아버지인 아르다부르, 아들인 아르다부르와 파트리키우스까지 3대에 걸쳐 일가의 4명이 모두 집정관을 지내는 진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당시 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치부되던 아리우스파 신도라는 이유로 제약이 걸려 본인이 황제가 되지는 못했고, 대신 자신과 함께 활동했던 유력한 장군인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그때까지 유화책 일변도이던 대 훈족 정책을 바꿔서, 아틸라를 서로마 제국 방면으로 밀어내는 등, 상당히 적극적인 정책을 썼던 군인 황제였는데, 아스파르가 이에 차지한 역할도 적지 않았다. 물론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로 훈족이 타격을 받은 이후라서이기도 하지만.

457년에 마르키아누스가 붕어하자,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는 아스파르를 제위에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고 여기서 아들인 아르다부르를 세울 수도 있었다고 보이지만, 대신 그의 휘하 부대장들 중 한 명이었던 레오를 옹립하는 것으로 제위 계승 분쟁을 마무리지었다.[3] 원래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가 유력한 제위 계승자였지만, 안테미우스는 제위 계승에서 밀려 대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

이렇듯 아스파르는 황제들을 조종해가며 470년까지 권세를 누렸는데, 레오 1세는 자신의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470년 무렵에는 이사우리아 부족장 출신의 장군이자 레오 1세의 사위였던 제노와의 권력 분쟁에 휘말렸다. 이 무렵 아스파르는 그저 실세로 있겠다는 기존의 노선이 위협당하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제위를 손에 넣으려 했는지 아니면 나이가 이제 70으로 만년이라서 초조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또 다른 아들인 파트리키우스를 레오 1세의 작은 딸인 레온티아와 혼인토록 하고[4], 사위 자격으로 부제(副帝 ; caesar)로 세우게끔 압력을 넣었다.[5] 그런데 부제 자리를 따낸 것이 먼저고, 아직 약혼 상태일 뿐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6]

특이한 점은 아들들의 이름 중 아르다부르는 로마 제국 바깥의 이민족 티가 나는 이름인 반면, 파트리키우스는 완연한 로마식 이름이라는 점이다. 이후 471년에 일어난 궁정 음모로 인해 아스파르와 아르다부르 부자는 궁중에서 살해당했다. 그러나 아들 중 파트리키우스는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 반면 부상을 입었지만 회복해서 살아났다는 서로 상반된 기록이 있다.[7] 여하튼 살았다고 해도 부제가 박탈되었고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하니 정계에서 실각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8] 결국 제노가 사위 자격으로 레오 1세의 사후 그 제위를 이어받았다. 아스파르 일가의 몰락 이후 황녀 레온티아는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외손자이자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아들이었던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다.

끝은 영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50년 가까이 동로마 제국의 권신으로 군림했던 만큼 그 후에 남긴 영향도 적지 않다. 동고트 왕국을 세우게 되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그의 처조카에 해당되는 바, 동로마 궁정에서 성장했던 테오도리크는 아스파르의 제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의 권신으로,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 자리잡게 된 동고트 왕국의 독립 군주로 성장했다.

아스파르의 죽음으로 로마 본국인이 아닌 이민족이 로마군 군부를 좌지우지하는 행태는 일단 사라졌다.[9] 제노 황제 때 황제의 출신 종족으로서 실권을 쥐었던 이사우리아인도 있지만, 그들은 산악민족이라 제국 중앙에 통합이 덜 되었다고 해도[10] 어쨌든 로마라는 테두리 안에서 500년 이상[11] 부대꼈었기 때문에 ' 외국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3. 관련글


[1]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Aspar was born the son of the magister Ardaburius, and was of Alanic-Gothic descent.; [2] 탁고를 받았고, 테오도시우스 1세 양녀이지만 실제로는 조카딸이었던 세레나와 결혼했기에 ( 조카)사위로서 황실과 혈연도 있었으며, 지휘력도 대단했기에 얼마든지 호노리우스를 뒤집어 엎을 수 있었는데도, 호노리우스가 죽으라고 하니까 순순히 죽었다. [3] 영어 위키백과 Byzantine Senate 중 'In 457 they offered to enthrone the master of soldiers, the Alan Aspar, but the tribune and senator Leo I, who was Aspar's subordinate, became emperor instead.' 및 'Aspar, who in this occasion was probably offered the throne by the senate but refused, could have chosen his own son Ardabur, but instead selected an obscure tribune of one of his military units, Leo I.' [4] 큰 딸은 이미 466년에 제노와 결혼한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였다. [5]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In 470, in an episode of the struggle for power between Aspar and the Isaurian general Zeno, Aspar persuaded the emperor to appoint his second son, Patricius, as caesar and give him in marriage his daughter Leontia.' [6] 영어 위키백과 Leo I (emperor) 중, 'Leontia was first betrothed to Patricius, a son of Aspar, but their engagement was probably annulled when Aspar and another of his sons, Ardabur, were assassinated in 471.' [7]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It is possible that Patricius died on this occasion, although some sources report that he recovered from his wounds.' [8] 영어 위키백과 Leontia Porphyrogenita 중, 'In 471 Julius Patricius disappears from the chronicles' [9]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His death led to the ending of the Germanic domination of Eastern Roman policy.' [10] 'Two Romes' 401p, 'After 400, there were hardly any enclaves of ethnic separatism in the lands that would become Byzantium, and even those (e.g., the Isaurians) did not hold out for long. Certainly there were no ethnic “Greeks” left.' : '400년 이후 동로마 권역에서는 자기들끼리 특구를 이뤄서 살던 소수민족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이사우리아인 같은 종족들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종족적인 " 그리스인"들은 확실히 남아 있지 않았다.' [11] 브라티니아 백과사전 '이사우리아' 중 'Its inhabitants, a mountain people described by Greco-Roman authors as warlike and uncivilized, were conquered by the Roman general Publius Servilius Vatia “Isauricus” in a three-year campaign, 76–74 BC.'. 즉 기원전 70년대에 정복되었기 때문에 기원후 470년대 시점에서는 550년 정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