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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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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1958년 10월 | |
법인 분리일 | 2002년 4월 1일[1] | |
업종 | 통신 및 방송 장비 제조업 | |
대표자 | 조주완 | |
임원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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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 ''' 조주완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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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 ''' 류재철 (H&A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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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 ''' 박형세 (HE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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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장 ''' 은석현 (VS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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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장 ''' 장익환 (BS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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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장 ''' 김영락 (한국영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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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사장 ''' 김원범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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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규모 | 대기업 | |
상장 유무 | 상장기업 | |
상장 시장 | 유가증권시장 ( 2002년 ~ ) | |
편입 지수 |
코스피 지수 KRX100 KOSPI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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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코드 |
KS: 066570 (
보통주) KS: 066575 ( 우선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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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총액 | 18조 1,485억 원[2] | |
자본금 | 9,042억 원(2023년 기준) | |
매출액 |
연결: 84조 2,278억 원(2023년 기준) 별도: 28조 8,682억 원(2023년 기준) |
|
영업이익 |
연결: 3조 5,491억 원(2023년 기준) 별도: 5,767억 원(2023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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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익 |
연결: 1조 1,506억 원(2023년 기준) 별도: 1조 40억 원(2023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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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총액 |
연결: 60조 2,000억 원(2023년 기준) 별도: 31조 7,475억 원(2023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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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총액 |
연결: 36조 7,000억 원(2023년 기준) 별도: 21조 2,320억 원(2023년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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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수 | 35,111명(2024년 기준) | |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128 ( 여의도동) |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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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G그룹 계열 종합 전자제품 제조 기업. 가전, 그중에서도 백색가전으로 유명하며 전세계 가전업체 중 2022년 기준 매출 세계 1위 기업이다. # 생활가전 분야에서 외국에선 월풀 코퍼레이션, 한국에선 삼성전자와 라이벌 관계에 있다.[3]2. 역사
2.1. 역대 로고
1950년대 ~ 1960년대 | 1970년대 ~ 1982년 | 1983년 ~ 1995년[4] | 1995년 ~ 2015년 | 2015년 ~ 현재 |
2.2. 금성사 (1958년 ~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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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금성사 부산 연지동 공장 전경[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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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금성사 부산 온천동 공장 전경[6] |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금성사 시절 캐치프레이즈[7]
금성사 시절 캐치프레이즈[7]
1958년 10월, 락희화학 사장 연암 구인회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금성사라는 이름으로 전자 회사를 세우고 초대 사장을 겸했다. 당시 락희화학이 가지고 있던 플라스틱 가공 경험과 금형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1959년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을 만들었다. #1 #2[8][9] A는 교류(AC), 5는 진공관 갯수, 1은 첫번째 모델임을 뜻한다. 부품 국산화율도 60% 이상이었다.[10] 이 모델은 2013년에 국가등록문화재로도 등록되었다. # 그리고 1960년에 최초의 국산 트랜지스터 라디오 'TP-601'을 개발했다. 같은해에 선풍기도 생산했다. 뒤이어 1961년에 최초로 국산 자동전화기를 생산했다. # 처음에는 라디오가 회사의 애물단지였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빈곤층들의 소득 수준이 라디오를 사서 청취료를 낼 만큼 풍족하지도 않았고, 부유층을 노리기에는 금성라디오의 품질이 미국산 라디오는 물론이고 일본산 라디오만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성 재고로 남았는데, 1961년부터 박정희 정부가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하면서 라디오가 일반 대중들에도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고 광고도 되면서 금성사는 기사회생했다.
1962년 동생 구정회가 사장직에 취임한 후 그 해 라디오를 처음으로 미국 아이젠버그 사에 수출했고, 1963년 최초로 국산 적산전력량계도 개발했다. # 1964년부터는 동남아와 남미에도 라디오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1964년 부산 온천동에 종합전기기기공장을 개설해[11] 연지동 시대를 마감했다. 1965년 4월 최초로 국산 냉장고를 만들고 실업기술원양성소를 세운 뒤, 1966년 8월 최초의 국산 19인치 흑백 텔레비전 VD-191을 생산하여 일약 한국 우량 전자회사로 입지를 굳혀 이후 대한전선, 삼성전자 등 후발 업체들의 진출에 영향을 주었다. 구인회가 1962년에 서독에서 통신용 전선제조기 도입을 위한 차관을 들여와 설립했던 한국케이블공업을 1964년 9월에 합병하고, 1967년에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한 후 가전-통신-전선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68년에는 금성판매(주)를 설립했으며 이후 최초로 국산 룸에어컨을 개발했고, 같은 해에 히타치와 제휴해 국산 엘리베이터도 제작했다.[12][13] 1969년에 최초로 국산 펌프와 세탁기를 생산한 후 10월부터 통신기기 부문을 금성통신(주)으로, 전선 부문을 금성전선(주)으로 각각 분리시켰고, 1970년에 알프스전기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주)를 설립하였다.
창립 20주년(1978년) 기념 광고 |
금성 샛별 텔레비전 (1978년) 광고 |
1971년에 락희화학에서 옮긴 4대 사장 박승찬(1926~1979)은 '금성 약진 3개년 계획'을 내세워 기업 발전과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1973년 기업공개 단행 후 1975년에 경북 구미공장, 1976년에 경남 창원공장을 각각 세웠고, 1977년 2월에 사업부제 및 본부장제로 개편 후 8월에 자사 첫 컬러TV 'CT-808'을 개발해냈다. 다른 한편으로 1974년부터 '전국 정밀도 경진대회'에서 3연패, 1977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 2연패 달성에 기여해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하게끔 했다. 1978년 8월에는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12월에 매출 1천억 원 및 수출 1천억 불을 달성하였다.
1979년 6월 6일에 박승찬이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허신구가 사장직을 이어받아 그해 8월에 금성통신, 금성전기 등과 합작해 대한전선으로부터 대한반도체(주) 지분 49%를 인수했다.
1981년 금성사 기업광고 |
1980년대부터 해외 진출에 적극 나섰다. 1980년 서독에 첫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1982년, 한국 최초 VCR 및 컬러 비디오 카메라를 개발하고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에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현지 공장을 개설하였다. 1983년에는 디자인 종합연구소 및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했고, 1984년에 한국 최초로 음성다중 TV를 개발한 후 평택공장과 김해공장[14]을 개설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1985년에는 '테크노피아' 슬로건을 쓰고 1987년부터 부문별 대표이사제를 도입했다.
금성 전천후 냉장고 광고 |
금성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노사분규가 격렬해져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1987년과 1989년에 터진 파업으로 매출 손실 6,000억원, 근로손실일수 50여 일로 창사 이래 최대의 경영 위기를 맞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9년부터 이헌조가 가전부문 사장직에 취임하여 노사관계 대신 '노경관계'를 강조한 신경영 및 '종합생산성관리(TPC) 운동' 등을 전개해 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 '사업문화단위(CU)'제 실시로 금성통신, 금성알프스전자, 금성포스타 등 자회사들과 '가전정보통신CU'를 구축하며 고객감동 서비스와 해외 시장 진출에 주력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현지 법인 및 공장을 잇따라 세웠고, 1992년에 금성부품, 1995년에 금성통신을 각각 합병하였다. 그 외에 1980년 초반에 닌텐도와 계약해 게임 & 워치를 현지 생산하고 1994년에는 게임기 ' 3DO 얼라이브'를 내놓아 게임 사업에 손을 댔다. #
창립 25주년(1983년) 기념 광고 |
1987년에 금성마그네테크를 합병한 후 '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로 비디오테이프 사업을 시작해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비디오로 발매했으나 1990년대 초에 관련 사업을 미디아트로 넘겼다.
카세트 테이프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 중소기업 OEM이었고, 2000년대 초중반에는 중국 OEM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사업을 철수했다.[15][16] 이 시기에 뻐꾸기시계를 비롯한 여러 벽시계도 만들었다.
1995년 금성 멜로디 뻐꾸기시계 |
1989년에는 전자오르간도 생산했다. 2가지 모델이 있는데, 하나는 카시오, 삼익악기 등의 버전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형 모델이라 해서 국악 악기 음색을 적용한 것이 있었다.
1992년 금성사 전자오르간(키보드) GEK-S600 |
1990년대엔 음원 모듈도 내놨는데, GSD10101이라고, ASSA신바람7000에 사용됐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노래 반주기도 생산 했다.
1996년 금성사 비디오 노래반주기 GKV-808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의 전광판 스폰서로, 1994년 10월에는 유엔 50주년 공식 후원사로도 각각 선정되어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이 항목은 공식 명칭인 금성사 외에 금성전자로도 접속할 수 있는데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금성전자라고 칭한 적이 없다. 아마 전자제품 회사 중 유일하게 사[17]만 붙은 것이 금성전자라고 오인하게 되는 원인인 듯. 영문 명칭도 마찬가지여서 Goldstar co., ltd라고 했으며 어디에도 electronIc 같은 단어는 없다.
1992년 폴란드 방영 광고 |
2.3. LG전자 (1995년 ~ 현재)
금성사는 럭키그룹과 함께 럭키금성그룹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설립자가 같은 인물이기에 가능했다.[18]럭키그룹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면, 럭키그룹은 1947년 구인회가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한 기업으로, 럭키크림과 한국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으로 유명하다.[19] 락희화학공업사는 1974년에 주식회사 럭키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이후 금성사가 커지면서 1983년 럭키금성그룹으로 그룹명을 바꾸었다.
1995년 1월, 럭키금성그룹은 럭키(Lucky)의 L과 금성(Goldstar)의 G를 딴 LG그룹으로 이름을 변경한다.[20] 그리고 같은 해 3월 1일, 새로 바뀐 그룹명에 맞추어 금성사도 사명을 지금의 LG전자로 바꾼다.
다만 이런 변경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으니,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제작한 후 수출하는 단계를 벗어나 해외에 법인을 세우고 현지 생산, 현지 판매 체제를 세우려고 하니 이미 GoldStar의 상표가 유명해져 세계 각국(특히 인건비가 싼 개발도상국)의 잔머리 돌아가는 놈들이 각자 자국에 GoldStar 혹은 비슷한 이름으로 유령회사를 등록시켜 상표권의 사용 대가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다.[21] 그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다 아예 회사 이름을 새로 만들고 그걸 전세계에 등록하는 방법으로 진드기들을 퇴치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골드스타’가 해외의 전장에 나간 전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Lucky Gold Star는 전사자에게 ‘잘 죽었다’는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
'GoldStar' 브랜드의 경우 해외 수출용 한정으로 2000년까지 사용했다. 2000년 5월 경 LG전자가 북미 지역 브랜드를 LG 브랜드로 바꾸는 행사를 펼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
1995년 사명 변경 후 금성통신을 합병하는 한편, 유아용 CD-I 플레이어 '멀티스쿨', 일체형 멀티미디어 PC '심포니 홈'을 각각 만들고 미국 가전업체 제니스를 인수하였다.
1996년에 카오스 세탁기의 후속으로 '통돌이'를 출시[23]하였으며, 같은 해 IBM과 전략적 기술제휴를 맺어 LG-IBM PC(주)를 설립했다.
1998년에 완전평면 TV '플라톤'을 출시했다.
1999년에 필립스와 합작해 훗날 LG 디스플레이가 되는 LG-Philips LCD를 설립하는 등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자 이듬해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재벌들의 과잉 중복 투자와 소모성 경쟁이 경제 위기를 불어왔다면서 각 분야 별로 그룹 간 빅딜을 제안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 대상으로 떠오르자 LG그룹은 정부와 전경련의 압박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LG반도체[24]를 빅딜에 적극적인 현대그룹에 넘겨야 했다. 이 회사는 ' 현대반도체'로 사명을 바꾸고 1999년 현대전자에 합병됐다. 근데 현대그룹은 LG반도체를 가져가놓고 경영 악화로 2년 만에 몰락했고, 이후 2012년 SK가 인수해서 SK하이닉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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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000년 휘센 에어컨을 출시해 세계시장 1위를 석권했고, 10월에 LG정보통신을 합병시켰다.
2002년 4월 1일부터 기존 법인을 지주회사 'LGEI'로 개편하면서 물적분할했으며, 11월에는 세계 최초의 홈네트워크 시스템 'LG홈넷'을 출범시켰다.
2005년에 LG그룹은 계열분리로 GS그룹, LS그룹이 분리되었는데, 전자 쪽은 LG그룹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25]
2005년에는 싸이언 초콜릿폰을 출시하여 1,000만 대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백색가전과 피처폰 그리고 디스플레이 시장을 중심으로 상당한 실적을 기록했다.
2005년 1월에는 통신장비 부문을 분할하여 캐나다 통신장비업체 노텔과 합작해 LG노텔(주)이라는 합작사를 설립했다. 이후 2010년에 노텔이 파산함에 따라 에릭슨이 노텔의 지분을 인수해 LG에릭슨이 되었다.
2007년 LG텔레콤 사장 출신 남용[26]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글로벌 회사로 도약한답시고 부사장급 임원들을 전부 외국인으로 바꾼다든가, 20년 이상 근무한 내부 직원보다 외국인 직원의 의견을 더 듣는다든가, 업무 비용을 줄인답시고 5분 단위의 업무 계획 장표를 지시한다든가, 기술 개발 비용을 줄이고 마케팅 비용을 늘리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 때문에 외국인 임원과 한국 직원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신기술 개발 속도가 느려졌으며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남용은 ‘마케팅 주도 회사’를 주창해, 글로벌 기업과 맥킨지&컴퍼니 출신 인사들을 임원으로 영입했다.
2007년 LG전자는 맥킨지에 스마트폰 사업 관련으로 컨설팅 의뢰를 했다. 당시 해당 프로젝트에 관여한 전직 LG전자 고위 관계자는 “맥킨지가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2008년 가을은 이미 스마트폰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글로벌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라며 “맥킨지 컨설팅 내용은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다는 전제 아래 ‘어떤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는 6개 이상의 OS가 난립할 때였는데, LG전자 개발 인력은 이들 선택지를 모두 검토하였다. 맥킨지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며, MS 윈도 모바일과 구글 안드로이드에 집중하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적 부진이 계속 되자 남용은 2010년 스마트폰 사업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며 물러났다. 그리고 2010년대 LG그룹과 맥킨지의 ‘불화설’이 불거졌다. 맥킨지가 LG전자에 “스마트폰은 ‘찻잔 속의 태풍’이며, 피처폰에 집중해야 한다”는 컨설팅을 했다는‘소문도 나돌았다. 이 과정에서 맥킨지는 LG그룹 내에서 ‘공공의 적’이 됐는데, 이는 스마트폰 사업을 책임지던 LG전자 임원들이 맥킨지 탓으로 돌리며 정치질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양사 간 관계는 약 10년간 단절됐다 2020년에서야 다시 회복됐다. LG전자-맥킨지 컨설팅 관련 기사 참고 LG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실패한 이유는 UX가 부실한 탓.
2010년대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음에도 기존 피처폰의 마케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쭉 나아간 결과 헬지로 불리며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LG전자에서는 이때를 흑역사로 여기는 듯.[27]
결국 구본무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남용 및 그가 영입한 C 레벨 이하 모든 외국인 임직원들이 퇴출당했고, 구본무의 둘째 동생 구본준이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2010년 10월 구본준이 취임한 이후 사내 구호는 1등 합시다였다. 2023년 현재에도 일부 팀은 아침 회의 후 1등합시다 구호 외치고 업무를 시작할 정도로 깊게 뿌리박힌 구호다.
2011년 11월, 약 1조 원 가량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28]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자회사 주식 최소 30% 이상을 보유해야 하는데, 보유 지분율이 30%대 초반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시총의 10%에 육박하는 유상증자라는 초강수를 둔 것. 이후 스마트폰 시장 등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헬지 시절을 떨쳐내는 듯했다.
2012년에 에릭슨이 LG 측 지분 25%를 더 인수하여 합작사 사명은 에릭슨-LG로 변경됐다. 현재 LG의 가정용 유무선 전화기는 에릭슨-LG를 통해 나온다.
2014년 2월 무디스는 모바일 부문의 경쟁 심화, 전 분야의 평균판매단가(ASP) 압박, 시장점유율 유지를 위해 늘어나는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하면 영업이익률이 3~4% 수준을 밑돌 것이라며 LG전자의 신용등급을 Lower Medium Grade(낮은 중간 등급)에서 최하위인 Baa3로 하향 조정하였다. 이는 Non-Investment Grade Speculative(투자 부적격) 등급인 소니와 불과 한등급 차이다. 무디스 사는 또한 LG전자가 가격 압박과 모바일 관련 높은 수준의 마케팅 비용 등으로 수익성이 수년 동안 둔화될 것이며 중국 제조업체가 성장하면 향후 경쟁자로 등장하여 LG전자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LG전자의 다른 사업은 비교적 양호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신용등급 하락은 스마트폰의 실패가 주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들어 LG전자의 주가가 신저가를 기록하면서 암울한 전망이 드리웠다. 2015년 2분기 스마트폰 관련 영업이익이 겨우 2억원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 그나마의 이익도 블루투스 헤드셋이 80억 원 매출을 달성하는 대기업답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그렇지, LG 스마트폰은 다단계 영업까지 했는데도 78억 적자를 기록한 셈.
2015년 8월 21일, 주가가 39,800원으로 떨어졌다. 리즈 시절이던 158,000원에 비하면 30% 수준도 못 되는 수치.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는 한편, 김대중 정부 때 LG반도체를 강제 매각 당한 LG는 캐시카우 기업이 부족해 만년 콩라인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6년 1월 언론에 보도된 것에 따르면 2015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출 200조 6,500억원, 영업이익 26조 4,100억원인데 반해, LG전자는 매출액은 56조 5,090억원 영업이익은 1조 1,923억원에 불과하다.
MC사업본부의 적자는 정말로 심각한데 적자가 5분기간 연속 되면서 누적 적자가 무려 1조원에 가까워 졌고, 2016년 3분기에만 자그마치 4,3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였다.[29] 2017년 4분기에는 누적 적자액이 2조 1,5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LG전자의 여러 문제점은 MC사업본부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위의 남용의 전횡에 대한 반론도 있다.
2017년에는 전년 대비 주가가 2배 가량 올랐다. 저점 대비로는 2.5배 이상. 연간 영업이익이 2조 5,000억원에 육박하여 작년 대비 2배 가량 낸 성과에 의한 것. MC사업본부가 손해만 안 냈어도 영업이익이 3조원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2018년 4월에는 LG그룹 역사상 역대 최고 인수합병 금액인 1조4440억원에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조명 제조사 ZKW를 인수했다. 이로써 LG전자는 자동차 관련 '전장사업' 역량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LG전자, ZKW 인수... 전장사업 강화 이로써 자율주행 연구로 돈을 왕창 까먹는 VS본부의 자금줄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황.
2021년 4월 5일 23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한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했다. # 결국 스마트폰 사업은 회생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적자 사업을 떨쳐내 향후엔 자금이 쌓일 것으로 추측된다.
2021년 하반기 LX세미콘에서 LG전자의 SIC센터 인력과 자산을 이관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거절했다. SIC센터는 LG전자에 있는 유일한 반도체 관련 개발조직이다. LX그룹은 스마트폰 사업을 접은 LG전자로부터 SIC센터를 양도 받아 모바일 AP와 전력 반도체 분야 설계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LG전자는 향후 메타버스 및 자율주행 등 미래 사업 준비를 위해 SIC센터 양도를 거부했는데 이는 LG그룹 고위 경영진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
2023년 5월 컨슈머 리포트가 조사한 종합가전 브랜드 소비자 신뢰도에서 LG전자는 2위를 기록했고, 삼성전자는 20위를 기록했다. #
2023년 5월 31일, 전설적인 CPU 아키텍터 짐 켈러가 이끄는 tenstorrent와 협력을 발표했다. LG전자는 tenstorrent로부터 차량용과 프리미엄 TV에 쓰이는 AI 및 RISC-V CPU 기술을 받고, tenstorrent는 LG전자로부터 데이터센터용 제품에 대한 비디오 코덱 기술을 받는다. # tenstorrent 공식
3. 역대 슬로건
금성표는 기술을 상징한다 (1963~1964)
조국 근대화와 번영의 상징 (1969~1972)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1980~1987)
우리의 기술로, 세계에 올림픽을 금성 (1987~1988)
최첨단 기술의 상징 (1988~1989)
테크노피아를 향한 최첨단 기술 (1988)
신뢰의 상표 금성 (1989~1993)
최고를 선택할 권리 고객에게 있습니다[32] (1994)
멀티미디어 - LG전자가 하이미디어로 앞서갑니다[33] (1994~1995)
다음 세대를 위한 멀티미디어 기술 - 하이미디어 (1995~1996)
감동의 시작 (1995~1996)
Champion 정신 (1997~1998)
세상을 바꾸는 힘 - 디지털 LG (1999~2003)
DIGITAL ez LG (1999~2002)
기술이 깊을수록 사랑입니다 (2006)
고객과 함께하는 미래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전 (2019~)
가전은 역시 LG (2019~)
4. 지배구조
<rowcolor=#fff> 주주명 | 지분율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LG |
33.67%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국민연금공단 |
8.47%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자사주 |
0.47% |
5. 역대 임원
5.1. 구(舊) LG전자
- 부회장
- 노용악[34] (2001~2002)
- 대표이사 부회장
- 구자학 (1987~1989)
- 구본무 (1989~1995)
- 이헌조 (1993~1994)
- 구자홍 (1998~2002)
- 대표이사 사장
- 구인회 (1959~1962)
- 구정회 (1962~1970)
- 허준구 (1970~1971)
- 박승찬 (1971~1979)
- 허신구 (1979~1986)
- 구자학 (1986~1987)
- 구자두 (1987~1988)
- 이재연, 최근선 (1987~1989)
- 박상호 (1987)
- 김지주 (1988~1989)
- 이헌조 (1989~1993)
- 한태희 (1989~1991)
- 구자홍 (1994~1998)
- 정병철 (1998~2002)
- 대표이사 부사장
- 구자홍 (1993~1994)
- 정병철 (1996~1998)
5.2. 신(新) LG전자
- 대표이사 회장
- 구자홍 (2003)
- 부회장
- 노용악 (2002~2003)
- 대표이사 사장
- 정병철 (2002~2003)
- 정도현 (2014~2019)
- 조준호 (2016)
- 권봉석 (2020~2021)
- 조주완 (2022~)
- 대표이사 부사장
- 배두용 (2020~2023)
6. 사업장 / 사옥 / 매장
- LG전자 공식 사이트의 매장 위치 링크 참고 #
- LG전자 공식 사이트의 본사 및 국내 사업장 위치 링크 참고 #
- 본사 (LG트윈타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128
- 한국영업본부 (LG서울역빌딩): 서울특별시 중구 후암로 98 LG서울역빌딩
- 융복합 R&D 단지 (LG사이언스파크)[35]: 서울특별시 강서구 마곡중앙10로
- 서울 서울대학교 연구소: 연구공원 쪽 942동에 있다. DTV(디지털티비)연구소라고도 한다.
- 서울 가산 R&D캠퍼스
- 서울 강남 R&D캠퍼스: 양재역에 있다.
- 서울 양재 R&D캠퍼스: 우면동에 있다. 전자기술원이라고도 한다. 기초소재를 연구한다.
- 서울 서초 R&D캠퍼스: 양재IC에 있다. 디자인센터가 함께 있다.
- 경기 평택 LG디지털파크
- 경북 구미 LG퓨처파크
- 경남 창원 LG스마트파크: H&A본부 제품 상당 부분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 인천 캠퍼스
- 그 외 해외 각 지역 사업장들이 있다.
7. 제품 / 사업 (사업본부)
자세한 내용은 LG전자/제품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LG전자/사업 문서 참고하십시오.
8. 마케팅 / SNS
자세한 내용은 LG전자/마케팅 문서 참고하십시오.- 1980년대 중반, TV나 VCR 등에 HI-FI Stereo 시대가 막을 열리면서 이에 관련된 제품들을 출시했는데, 당시 광고 모델로 조용필을 내세웠다. 그 시절에도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과 마케팅 혈전을 벌였다.
- 금성사 시절 지면광고, AS안내서비스, 간단한 제품안내 스티커, 매뉴얼 등에 김도원의 삽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관련 그림, 관련 영상
- 2009년 3월 10일 'THE Blog'를 개설했다. 해당 페이지(삭제됨), 관련 뉴스 이름은 네티즌 공모로 지어졌다고 한다. 다른 기업 블로그와는 다르게 비회원도 댓글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다. 기업 내, 외부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포스팅하고, 또 피드백을 받는 등 기업 블로그 중에서는 성공 사례로 자리잡는 듯 했으나, 2010년 5월 옵티머스 Q의 '프로요의 난'으로 대혼란을 겪은 뒤 새로이 개편하게 된다.
- 2010년 11월,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 #
- 2012년 3월, 'Social LG전자'를 개설했다. 해당 홈페이지(삭제됨), 뉴스 THE Blog 때와는 달리 Social LG전자에 로그인 하거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야만 댓글을 쓸 수 있다.
- 2017년 9월, 인스타 페이지를 개설했다. #
- 2018년 5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
- 2016년 2월, 'LG 베스트샵' 네이버 블로그를 개설했다. #
- 2018년 1월, 'Live LG: LG전자 뉴스룸'으로 블로그 기능을 대신한다. 댓글 기능은 없다. #
9. 노동조합
- LG전자 노동조합: 한국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소속. 금성사노동조합 발간 노동운동 30년사
- LG전자 사람중심사무직노동조합: 미가맹(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10. 논란 및 사건 사고
10.1. 퇴사자가 CEO에게 남긴 글 파문
삼성이 어떻게 한다더라 하면 이 역시 비판적인 토론 없이 의사 결정이 많이 나버립니다.
2011년 8월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LG전자를 떠나며 CEO에게 남긴 글이 몇달 동안 인터넷을 강타하였고, 주요 언론의 기사로 올라왔다. 글이 파문을 일으킨 뒤 수많은 전현직 LG 직원들의 유사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상명하달식의 군대식 조직 문화와 지나친 짠돌이 경영 그리고 무조건적인 삼성 따라하기. 특히 LG를 가리켜 어느 순간 2등도 썩 나쁘지 않구나라고 만족하는 2등주의 기업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저 글을 쓴 사람은 CEO 구본준의 답장을 받지 못했고, 역시나 LG전자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몇몇 LG인들은 회사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느니, 당신같이 발목잡는 사람이 없는 게 오히려 회사가 잘 된다느니, 회사 욕하고 나가는 인성으로 재취업이 되는가 보자며 비아냥거렸으나, 해당 개발자는 카카오에 이른 시기에 들어간 결과 대박을 쳤고 2019년 즈음에는 스타트업 CTO로 이직할 때마다 신문 나올 정도의 벤처기업계 거물이 되었다.
10.2. 연구원 미국 도주 사건
2019년 1월 29일, 한 연구원이 중고나라에서 수억 원 대의 사기를 친 후 미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 해당 연구원은 중고나라에서 직원가로 제품을 대신 사주겠다고 글을 올려 피해자들을 끌어들였고 사원증 등을 보내 연구원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정작 돈을 받고는 아무것도 안했으며 출고가 늦어진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안심시켰다. 여기서 피해자 중 일부에게 제품을 보내줬는데 알고보니 직영 대리점에 전화해 먼저 제품을 보내주면 대금을 주겠다고 속였다고 한다. 당연히 대금을 받지 못한 대리점주들은 대신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피해를 입었다,결국 피해자들은 해당 연구원을 경찰에 신고했고 LG전자 측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어서야 이를 인지하고 징계위원회를 열어 해고 처분을 내렸다. 연구원은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다 해고된 직후 해외로 도피하여 여권이 무효화 되었으며 인터폴에 수배되었다. 피해자들은 직원 관리의 허술함을 이유로 LG전자에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LG전자 측은 개인의 일탈 행위로 인한 것으로 이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밝혔다.
해당 연구원은 LG전자 근무 당시 막대한 도박빚을 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증거로 도박 사이트에 1억원 넘게 송금한 내역이 존재한다. 즉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이런 사기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
10.3. LG 건조기 콘덴서 자동세척 거짓·과장광고
LG 건조기 논란 2년, '자동세척' 거짓광고 판명
11. 기타
- IMF시절 반도체 산업( 하이닉스)을 뺏기다 시피 내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2008~2010년 사이의 하이닉스 인수전에 LG전자가 가장 적극적이길 기대한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당시 LG전자 수장이 LG전자 역사상 최악의 빌런으로 평가받는 남용이었고 "우리는 그동안 반도체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는 희대의 망언를 남기며 인수전에 뛰어들지 않았다.[36] 그리고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SK하이닉스의 2017년 예상 영업이익이 LG전자의 시총[37]과 비교될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 2011년 2월 4일 소니의 PS3, 브라비아 TV가 LG전자의 특허를 침해하고 블루레이 관련 기술을 무단 사용했다고 소송을 청구했다. 2010년 12월 소니 에릭슨에게 소송당한 것에 대한 맞소송이라고 한다. 이 소송으로 소니의 PS3 수십만대가 유럽 세관에서 압류당했다. # 결국 공방 끝에 LG전자와 소니는 상호간의 특허침해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했다. #
- Linux가 설치된 PC에서 FLATRON 모니터를 연결하면 LG Electronics가 아닌 Goldstar Company Ltd.로 인식한다.[38] Windows에서도 레지스트리 편집기를 열어 듀얼 모니터 설정 등을 찾아가보면 LG 모니터는 GSM으로 시작하는 모델 번호로 뜬다. 2022년 LG 울트라기어 모니터도 그렇다.
- 2015년 7월 6일 주가가 신저가를 기록했다. 그리스 경제위기를 감안하더라도 2달 동안 줄창 내려가기만 하는 주가에 일각에서는 팬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해야다. 현재 시총은 7조 5,360억원. 스마트폰 사업의 침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가는 2010년에 기록한 160,000원(유상증자 반영 시 12만 5천 원) 대비 1/4 수준인 40,000원 근방까지 떨어졌고 업황과 실적은 급격히 악화했다. 강세라는 백색가전마저 중국 하이얼 등에 시장을 잠식당했다.
- 2015년 3월에 에리크 쉬데르주가 LG전자에서 십 년 동안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 서적 < 한국인은 미쳤다!>를 출판했다.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임원이 된 인물이 쓴 책이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극도의 효율성과 치밀한 전략 속에 명확한 목표설정, 세분화된 업무 배분을 추구한 덕에 LG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단언하면서도 기업 내에 만연한 위계질서에 대한 경외로 인해 일어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했다.
- LG전자에서 일했던 개발자에 따르면, LG 스마트폰의 평이 좋지 않은 것은 경영진들의 문제라고 한다.
11.1. 제품의 내구성
금성사 시절부터 LG 제품은 국민 생활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기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전자제품 시장은 금성사가 거의 다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금성제와 LG 가전제품은 보통 오래 간다. 내구성이 꽤 있는 편이라 10년째 쓴다는 사연 정도는 그냥 기본이고, 1988 서울 올림픽 때 산 선풍기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케이스도 있으며, 심하면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TV, 세탁기가 20년을 넘어간다는 말도 있다. 성인 자녀가 있는 집에 자녀보다 더 나이 많은 제품이 있는 경우도 꽤 있다. 특히 금성 선풍기는 정말 좀비 그 자체인데, 1976년에 출시해 1980년대 초반에 단종된 히트상품 청풍, 역풍, 설풍 선풍기는 현재도 중고거래가 이뤄질 정도. 심지어 웬만한 중소기업 선풍기들보다 바람도 쌩쌩하고 가장 많이 고장나는 타이머도 대부분 멀쩡하다.이제 골동품 수준이라 드물지만 냉장고나 선풍기 등은 45년 이상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다 2017년 기준 결혼 15년째 맞은 부부가 혼수로 구매한 LG 냉장고가 쌩쌩히 돌아가며 에어컨도 자주 썼는데 9년째 쌩쌩하다는 경우도 있다. 35년 된 금성 에어컨, LG전자로 돌아온 사연[40] 25년 된 '금성사' 세탁기, "여전히 쌩쌩!" 또 23년된 의류 건조기가 여전히 잘 작동하는 사례도 발견되었다. "또 LG…" 23년 된 건조기 아직도 '쌩쌩' 43년된 에어컨도 있다. 이런 제품들은 LG전자 측에서 기부를 받아 신형 제품으로 무료 교환해주기도 한다. LG전자 입장에서도 그만큼 좋은 홍보 효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의 제품보다 더 비싸도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복잡하고 고장이 날 구석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냥 무식하게 튼튼하게 만들다 이제는 더 작은 크기에 고밀도화된 칩셋, 기판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내구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세탁기, 냉장고 등 온갖 전자제품에 Wi-Fi를 때려넣는다. IoT 기능도 없는데 Windows 10을 때려박은 냉장고도 CES에 출품한 전적이 있다.
남아공에 토네이도가 몰아쳐 LG 냉장고가 내동댕이 쳐졌는데 외관이 훼손된 것 외에는 작동에 문제가 없어 내구성이 탱크임을 입증했다. LG전자의 가전 제품은 예전 금성사 시절 때보다는 아니지만 여전히 내구성은 괜찮은 듯 하다. 관련 기사
12. 관련 문헌
13. 관련 문서
[1]
현 법인 설립 기준. 1958년에 세워진 구 법인은 'LGEI'로 변경했다가 2003년 LGCI에 합쳐져 (주)LG가 됐다.
[2]
2024년 7월 18일
[3]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서로간 소송전도 이미 여러차례 언론에 보도된 바 있을 정도로 꽤나 관계가 험악한 편이다. 총 매출이나 시가총액 등 기업의 체급상으로는 삼성전자가 LG전자보다 몇 배 이상 앞서서 차이가 좀 나는 2위이긴 하지만, LG가 하지 않는
반도체 사업과 현재는 철수한
스마트폰 사업을 제외한 사업에서는 규모가 비슷한 편이다. 또한 LG전자가 많은 지분을 보유한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의 광학솔루션 사업에서도 경쟁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LG전자나 삼성전자나 각 그룹 계열사 중 가장 큰 회사라는 것은 같다.
[4]
이 형태는
1983년 말부터
1994년까지 썼으며,
1995년 LG로 바뀐 후에도
1996년
7월 31일까지 약 1년간 혼용하였다. (즉, TV의 경우 겉은 금성이라고 쓰여 있지만 뒤에 연식 표찰은 LG로 표기. 세탁기, 탁상용 카세트, 에어컨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LG전자로 바뀐 이후의 금성사 혼용 표기는
1996년 8월에 사라졌다. 초기 홈페이지 도메인도
www.goldstar.co.kr이었다.
[5]
현 연암기념관 및 LG사이언스홀 부지.
[6]
현
동래 럭키아파트 부지.
[7]
회사 표어 같이 꾸준하게 밀던 문구였다. 광고부터 제품까지 금성사 관련된 것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 냉장고, 텔레비전 같은 전자제품들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고가를 형성하였다. 그런 만큼 돈을 모아 큰맘 먹고 사야했고 한번 사면 쉽게 못 바꿨다. 그래서 애먼 덜 떨어지는 제품 사서 10년 동안 고생하지 말고 우수한 품질의 금성사 제품을 선택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것이 금성사 제품은 내구성이 우수해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돌아가는 물건이 있다.
[8]
개발자는 1958년 공채 수석으로 입사한 엔지니어
김해수(1923~2005). 그는 라디오 수리상 출신으로 1967년 금성사에서 기획부장까지 올랐으며, 1969년 삼화콘덴서 전무로 옮겨 5년을 지냈고, 1974년부터 일부 재일교포 사업가들과 한국트랜스 등 8개 기업을 세우고 1980년 삼신정기공업사(마그마)를 세워 3년 간 운영했다. 1987년에는 전자부품 무역업체 '신기상역'을 세웠다. 그의 개발 비화는 딸 김진주(
박노해 시인의 아내)가 엮은 <아버지의 라디오(2007)>와
KBS의
KBS스페셜 - 빅 아이디어 (4부) 아버지의 라디오 편(2016)에 나온다.
[9]
사실
삼양사에서 그보다 2년 앞선 1957년 진짜 최초의 국산 라디오 S5-A1을 만들었으나,
일본
산요에서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수준이라 인지도는 낮다. 더구나 삼양사는 60년대 후반 라디오 생산을 멈췄다.
#
[10]
다만 진공관과 스피커 같은 핵심 부품은 외국 부품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11]
현재의
동래 럭키아파트 자리이다.
[12]
영진전기도 미쓰비시와 제휴해 이때쯤에 엘리베이터를 제작했다. 금성사가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1987년 금성산전,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변경한 뒤, 1999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합병되었고, 영진전기는 1971년에 유니버스, 1976년에 서통전기, 1979년 신영전기, 1987년에
금성기전,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변경한 뒤, 1999년에 LG가 엘리베이터 사업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매각하자, 2001년에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를 설립해 이쪽으로 이어진다고 봐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LG산전엘리베이터 참고.
[13]
실제로 금성사에서 생산했던 가전제품 상자 디자인도 히타치와 비슷한 양식을 사용했다.
[14]
LG전자 김해공장은 2006년 9월부로 씨앤엠이라는 모터 전문 제조업체로 독립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구.김해공장의 기존 설비 일부는 창원공장으로 옮겼다.
[15]
벤허는 1980년대에 무비크로스 비디오에서 처음 냈고 1990년대에
대우전자에서 재출시,
스타워즈: 보이지 않는 위험도 같은 회사에서 출시,
록키 3는
SKC에서 출시, 톰과 제리는
서진통상에서 출시했다.
[16]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 발매작 중에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영화라면
마지막 황제,
최가박당 시리즈나 프랑스 영화
라붐 정도. 그리고
뱀파이어 헌터 D(1985년)를 무삭제 성인 등급으로 외계인 벰파이어라는 제목으로 출시했다. 또한
지아이 유격대와
닌자 거북이시리즈도 유명하다.
[17]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린다면 유일하진 않다. 1980~90년대 Eroica 브랜드로 유명했던 태광그룹 계열사 태광산업의 전자사업부가 천일사였다. 천일사 시절에는 별표전축이라는 브랜드를 썼으나 모 전자회사가 연상되는 이름이라 Eroica 브랜드로 교체했고 이 무렵 사명도 태광전자로 바꿨다.
[18]
지금도 중국어로는 락희금성이다.(물론 부르는 명칭은 LG가 압도적이지만...)
[19]
구인회는 1931년부터 차례대로 '구인회상점', '주식회사 구인상회', '조선흥업사'를 세웠지만 이들 회사는 LG그룹과는 관계가 없다. 럭키크림을 판매하고자 설립한 락희화학공업사가 LG그룹의 직접적인 모태다. 여담으로 럭키가 락희(樂喜)가 된 데에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외세를 배척한다며 기업 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기업 명칭으로는 당시 외래어가 익숙하지 않고 한자에 친숙한 시절이라 럭키에 최대한 가까운 한자이면서 좋은 뜻을 내포한 락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락희'를 일본어로 읽으면 럭키가 되긴 한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락희를 사명으로 쓰자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라고 한다.
[20]
이를 보여주듯 LG그룹의 본사 LG 트윈타워의 엘리베이터 문에는 럭키그룹과 금성사의 마크가 같이 새겨져 있고, 개별 계열사 중에는 1984년 LG애드, 1988년
LG카드, 1990년
LG 트윈스처럼 그룹명 변경 이전부터 LG라는 사명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21]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金星 대신 GoldStar와 비슷한 발음이 나는 高士達(가오스다)을 상표로 등록했다.
# 1982년부터 상하이텔레비전공장의 금성표(金星牌, 진싱파이) 컬러TV가 판매되고 있었던 점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한중수교 시점 이전이었기 때문에 우연히 겹쳤을 가능성이 높다.
# 공교롭게도 이 회사 또한 히타치로부터 컬러TV 생산라인을 도입했다.
#
[22]
비슷한 예로
기아자동차도 미국에서
KIA가 전사자를 뜻하다 보니 KIA 대신 소문자로 Kia라고 쓴다.
예시
[23]
전 CEO 조성진이 개발하였다.
[24]
투자한 자금, 인력, 시간 면에서 그룹 차원의 애착이 크고 깊었던 기업이다.
[25]
단, LG전자의 자회사로 민수용 전자부품 및 레이더, 미사일 등 정밀군수물품 등을 생산하던
LG이노텍은 민수용 전자부품 생산업체인 LG이노텍과 군수물품 생산업체인 넥스원퓨처로 분리되었다. 이후 넥스원퓨처는 다시 LIG그룹에 편입되어 현재는
LIG넥스원이 되었다.
[26]
동기식 IMT2000 사업 포기 때문에 당시
LG텔레콤 사장에서 퇴직. 이후 회전문 인사로 LG전자로 이동했다. 남용이 구본무의 아버지 구자경의 오른팔격 인물이라 구본무가 함부로 내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27]
SK텔레시스도
이 짓을
했다 말아먹은 전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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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LG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들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용 시절에는 기회가 있었으나, 남용이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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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C는 help this company 드립이 나오는 등 최악의 위기 상황이던 2015년 말의 적자는 3,000억원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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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에서 저 문구를 단 얼마 뒤 삼성전자에서는 '첨단기술의 상징'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그러자 금성에서는 한술 더 떠 밑에 나오는 '최첨단기술의 상징'으로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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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파동을 겪은 시대이고 애당초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한국이기에 정부가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여 1970년대~1981년까진 전자제품 광고 뒤에는 '절전하세요' 같은 에너지 절약 권고 문구를 삽입해야 했다. 1992~1993년에도 '에너지 절약 더 밝은 사회'라는 로고가 전자제품 광고마다 새겨졌으며 1999년부터 에너지관리공단에 의해 소문자 'e'와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에너지 절약 로고가 가전제품마다 삽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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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슬로건. 이를 끝으로 1년 뒤 LG전자로 사명을 변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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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변경 전까진 '금성이 하이미디어로 앞서갑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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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노주현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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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도시개발사업의 주요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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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당시 LG그룹 자체가 하이닉스를 인수하기에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긴 했다. 현실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LG그룹의 현금 유동성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다. 하지만, 오너 일가가 하이닉스 인수에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LG 지주회사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걸 감수하더라도 유상증자나 차입을 통해서라도 나섰다면 충분히 인수할 수 있었다. 지주회사 LG는 대한민국의 모든 순수 지주회사 중에서 부채비율이 50%에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재무 건전성이 가장 우수한 데다 구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도 45 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오너 지배력도 강력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성 구씨 문중 일족들의 끈끈한 결속력과 그들이 거머쥔 천문학적인 부의 규모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더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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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0일 기준 약 14조 2,000여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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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Fredora의 경우 D-SUB가 아닌 DVI/HDMI로 연결해도 Goldstar FATRON(모델명)으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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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수출판은 LG-G360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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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생산품. 가동해 보니 아직 냉방력도 여전했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증자가 사용한 35년간 한 번도 고장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