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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
<colbgcolor=#004c97><colcolor=#fff> 6.29 선언 六二九 宣言 | June 29 Declar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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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선언을 발표하는 모습 | |
일시 | 1987년 6월 29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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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29일 집권당 민주정의당의 대표였던 노태우가 전격 발표한 선언. 이 선언 이후 그해 말 개헌을 통해 한국 대통령 제도는 오늘날의 직선제, 5년 단임으로 정착되었다.2. 상세
원문 기사4.13 호헌조치가 참아 왔던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일어난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노태우 후보는 6월 29일 시국 수습을 위해 이 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가 한국 땅에 정착되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부터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1] 즉, 한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제도적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에게 건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뺀 시국사범의 대거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당초 노태우는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공식 사과도 넣으려고 하였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빠졌다.[2]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 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선언 다음 날 특별담화에서 6.29 선언 수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훗날 관련자들의 주장 등으로 드러난 바에 의하면 노태우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이 직선제를 결심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이를 건의해 노태우가 수용하고 발표하게 하였다고 한다. 즉, 노태우의 직선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메이킹을 한 것.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두환 본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실은 2주일 전에 노 대표와 저녁을 함께 할 때 내가 직선제를 검토해 보라고 했더니 노 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했어.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 김성익 저. 조선일보사. 1992. p441, 2차 출처: 중앙일보 1993년 2월 19일자 <청와대 비서실> 내용 중에서.
-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 김성익 저. 조선일보사. 1992. p441, 2차 출처: 중앙일보 1993년 2월 19일자 <청와대 비서실> 내용 중에서.
물론 노태우가 실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보안사의 참모들 역시 정세 분석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직선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보안사 참모들의 의견을 전두환에게 진언했고 대통령은 보안사의 의견을 비중 있게 경청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명승 본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그해(1987년) 4월 중순 보안사의 장성 참모 등 핵심부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직선제를 택해야 하며, 당선된 1년 후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한다면 굳이 특정인들을 제외시킬 필요가 없다는 참모들의 판단이었습니다.
- 원 출처: <군부와 권력> -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김재홍 글)'. 나남. 1992. p181
- 원 출처: <군부와 권력> -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김재홍 글)'. 나남. 1992. p181
또 김성익이 쓴 책에 의하면 1986년 당시 한 언론인이 작고 전에 전두환을 만날 적에 간선제가 직선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으며 전두환이 이에 동조했다는 주장도 있었다.[3] 물론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고수하면서 6월 항쟁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면 다 부질없는 소리긴 하지만.
어쨌든 6.29 선언으로 인해 몇 달 후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져 94.5%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고 21세기에도 한국은 소위 87년 체제라 일컬어지는 제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3. 전문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6.29의 진실 | 전문을 낭독하는 영상 |
5공 시절 내각제 헌법초안 작성 참여자였던 한승조 고려대 교수가 <WORLD & I> 1992년 12월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선언문 초안 작성은 박철언이, 완성 단계에선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 등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4]
동지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여진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 또한 학계, 언론계, 경제계, 종교계, 근로자, 청년, 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또 국민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의 구상을 주저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은 대통령 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고 당원 동지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본인의 결심입니다. 첫째.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각료의 대다수가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으로 구성이 되어 자율과 개방을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 속에 민주책임정치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제도라는 저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다수 국민이 당장 원하지 않는다면 필경 그 제도는 국민과 유리되고 이에 따라서 탄생되는 정부는 국민과 꿈과 아픔도 함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새로운 법에 따라서 선거운동 투, 개표과정 등에서 최대한의 공명정대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직선제라 하더라도 근거 없는 인신공격과 대중선동으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고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 결국 국가안정을 해치고 진정한 민주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정책대결로 선의의 대결을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던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 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들 자손의 존립기반인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부인한 반국가사범이나 살상, 방화, 파괴 등으로 국기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분수령인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크게 웃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기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이고 새로 출현하는 정부는 튼튼한 국민적 기반 위에 위대한 나라 건설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개헌에는 민정당이 주장한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 강화 조항이 모두 포함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정부는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 등 인권단체와의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 효과 거양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언론인 대부분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언론기본법은 시급히 대폭 개정되거나 폐지되어 다른 법률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 취재기자를 부활시키고 프레스카드 제도를 폐지하며 지면의 증면 등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허여서도 아니됩니다. 국가 안녕보장을 저해하지 않는 한 언론은 제약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각 부문별로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개헌 절차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구성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하고 시도단위 지방의회 구성도 곧이어 구체적으로 검토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학의 인사, 예산, 행정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입시, 졸업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수한 많은 학생들이 학비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제도를 보완하고 예산에 반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당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민주적 조직체여야 합니다. 정당이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건전한 활동을 하는 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당 역시 국법 질서를 준수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의 갈등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끌고 국론을 통일해 나아가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폭력을 써서라도 일방적인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야당이 있는 한 여당 역시 항상 양보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폭력배를 소탕하고 강도, 절도사범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서민생활 침해사범을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추방되고 지역감정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단어들이 영원히 사라져 서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 안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 발전을 바라는 여러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 저는 이 시간을 감히 갖는 바입니다. 저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이 구상이 대통령 각하와 민정당 전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성원으로 뽑힐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이 기본 구상이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앞으로는 이에 따른 세부 추가사항들이 추진될 것입니다. 만에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 단임제의 실천으로 이 나라 헌정사에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물가 안정과 국제경쟁력 강화로 흑자경제를 이룩하여 국가 안보역량을 대폭 강화하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우리 제5공화국 정부의 빛나는 업적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평화적 정부이양의 화합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눈앞의 크나큰 과제입니다. 또한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아니한 현 시점에서 국론이 분열되어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당하는 국가적 수치를 방지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간직한 채, 청년은 이상을 향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근로자 농민은 안심하고 일하며, 기업가는 창의적 노력을 더하고, 정치인은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를 이룩해 나갑시다. 법과 질서가 준수되면서 생동하고 발전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하여 저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조상과 선열의 뜨거운 피로 세워지고 다져진 이 나라를 땀과 지혜로 훌륭히 가꾸어 우리 후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적인 책무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주어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국민적 슬기를 한데 모아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 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3.1.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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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고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이렇게 발표된 6.29 선언으로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쾌거를 이룬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되면서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4. 평가
4.1. 긍정론
명목상으로만 민주주의였을 뿐, 장기간 군사독재 국가였던 한국은 이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민주주의 지수, 세계의 자유 자료 등을 보면 한일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비슷한 민주화 과정을 거친 대만이나 몽골 인민 공화국 체제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몽골 정도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5]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으로 국민들이 희생을 치르면서 일궈낸 민주주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강한 압력 하에 국가 차원에서 하향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일본과도 차이가 있다.[6] 세계적으로도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희생을 치러서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7] 오히려 민주화 운동이 미완성으로 끝나 버리거나 반대로 다른 독재 체제의 연장선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구권에서도 한국은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 전환의 한 예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4.2. 부정론
임영태가 쓴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의 평가에 의하면 6.29 선언은 신군부의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지만 실상은 신군부가 군 투입과 양보 사이에서 노태우가 주도적으로 실시한 것처럼 만든 위장 전략이자 강자의 아량이 아닌 궁지에 몰린 약자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주장하였다.[8]노동자 출신 재야역사가 이성광은 <민중의 역사> 하권에서 6.29 선언을 미국의 '목표물 갈아치기'의 변종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국민들의 분노가 '간선제 대통령 선출'이란 비민주적 제도에 집중되어 그 제도만 갈아치워 국민들의 분노를 호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개입설은 주장만 있지 근거가 없다는 것에 유의하자.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는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서로 단독으로 출마하자 표가 나누어져 결국 13대 대통령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도 여론의 압박이라는 것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는 5공 청산에 동조했으나 노태우 자체가 태생부터 전두환과 한 뿌리였기 때문에 한계도 명확했고 핵심적인 처벌과 비리 청산은 차기 정권으로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되었는데 극본 전두환, 주연 노태우라는 표현을 통해 짜고 치는 듯한 모습이 나왔다. 이들은 직선제를 선언한 후 삼김 씨를 다 풀어주면 서로 분열돼서 노태우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맞는 판단이 되었다. 노태우는 득표율 36.64%였음에도 분열된 나머지 후보들이 득표율을 서로 애매하게 먹어 버린 덕에[9]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이 되었다.
5. 미국 개입설
박세길은 저서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권에서 6.29 선언은 미국의 개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에도 동아일보 1987년 7월 2일 기사와 중앙일보 1987년 6월 30일 기사 같은 곳에서 그런 추측들이 나왔다.실제로 미국의 일부 인사들은 6.29 선언 주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공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는데 스티브 솔라즈는 게스틴 시거를 '노벨평화상 감'이라고 발언하였다.[10] 그리고 시거는 "1987년에 대선이 있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선언 다음 날 한국을 떠났다. 물론 이때는 대선 일정은커녕 개헌조차 착수하지 못한 시점이었다.[11]
다만 과거 군사독재를 용인해 줘[12] 오히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국쯤으로 인식되던 미국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대한민국의 반미주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걸 생각해 보면[13]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이전에도
이승만,
박정희는 직선제로 대통령이 된 적이 있긴 했다. 허나 알다시피 이승만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씁쓸한 모습을 남기면서 국민들에게 쫓겨났고 박정희는 합법적 민간정부였던
장면 내각을
5.16 군사정변으로 무너뜨린 후(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다.) 여러 공을 세우긴 했으나 관권선거란 이점 속에서도 직선제 대통령은 점점 힘들다는 감이 오자 종국엔
간선제로 국민의 주권을 뺏어 버렸다. (전두환 역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역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2]
사실
노태우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입장은 묘했는데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는
3당 합당을 위해서인지 5.18 조사에 대한 전권도 약속하면서 간이라도 내 줄 듯 김대중을 회유했으나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5.18을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 군부가 무조건 잘못한 것도 아니라는(유언비어가 진범, 5.17은 치안 유지 차원이라고 믿고 있다, (1995년 구속 직전) 문화대혁명처럼 더 많은 피를 흘린 사건조차 처벌된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식의 양비론을 펼쳤다. 그런데 몸져앓아 누운 후엔 전두환과 차별화하고 싶었는지 진짜 생각이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2019년부터 장남
노재헌을 통해 사과 의사를 표명했다.
# 물론 비판 측에선 아들이 대신 온 거지 본인이 직접 사죄 표명을 한 건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만 노재헌의 말에 의하면 2010년대 몸져누운 후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라(광주에 참배하러 가지 말까요라는 말엔 미동도 않다가 참배하러 갈까요라는 말에 눈을 연신 껌뻑였다고 한다) 육성으로 전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했고 어쨌든 그러다가 결국 2021년 '
과오들에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전두환과 달리 추징금도 완납했기 때문인지
문재인 정부는 국가장을 허가해 줬다.
#
[3]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p447~448. 이 책에서 언급된 언론인은 그 당시에 사망한
선우휘로 보인다.
[4]
때문인지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은 노태우 정권에서 중용되었다.
[5]
중국이나
북한은 일당 혹은 일인독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좀 더 넓게 잡아 유라시아권인
러시아를 포함해도 비슷하다. 이들 국가는 민주주의 지수/세계의 자유 조사에서 모두 권위주의 체제/부자유로 분류되었다.
[6]
사족으로
일본 제국 시절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 중간쯤에 놓인) 외견적 입헌군주제 체제가 들어서긴 했으나 이것조차도 엘리트들이 위에서 주도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덴노의 권한 대비 행정부의 위엄이 떨어져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종국엔
군국주의라는 괴물로 치닫고 말았다.
[7]
사실 20세기까지만 해도 아시아 국가들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에 대한 서구권의 시선은 꽤나 싸늘했다. 1951년 영국의
더 타임즈지에는 "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글을 실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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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군부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들을 무조건 약자 취급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민주화 시위로 수도 서울을 포함한 전국이 들끓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평가는 분명 적절한 면이 있다. '어찌됐건 총을 쥔 것은 신군부' 라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 총을 쏠 경우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학살을 전국 단위로 일으켜야 할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 가능성도 상당했으며, 이 경우 그로 인한 정치외교적 부담 및 후폭풍 역시 신군부 정권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없었던 것. 이런 점을 종합하면 '마지막 저항'이라는 표현은 당시 궁지에 몰린 신군부가 던진 '승부수'의 특정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라고 봄이 적절할 듯 하다.
[9]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합산 득표율이 무려 55.07%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표가 돼 버리고 말았다.
[10]
원 출처: <통일교실> - 민성일 저. 돌베개. 1991.
[11]
원 출처: <한미관계의 재인식(2권)> - '한국 정치변혁기의 미국의 역할(김홍석 글)'. 두리. 1991. p26.
[12]
사실 한국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고 대만이나 인도네시아, 칠레, 니카라과, 온두라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집트, 파라과이, 과테말라, 우루과이, 태국, 이란 등 많은 국가들의 독재정을 지원했고 특히
더러운 전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남미에선 용인 정도가 아니라 직접 개입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덕분에 이들 나라 상당수가 고생해 가면서 민주화를 이룩한 후에 와서 보면
냉전 시절 자유세계를 대변한다던 당시 미국이
도미노 이론에 매몰되어서
제1세계 민주주의엔 눈을 감는 흑역사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권마다 성향의 차이는 좀 있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후반에
민주당 출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거론하면서 한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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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굳이 말하자면 당시 미국도 냉전 구도 속에서 국제 정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우방 국가 벌집 건드리지 말자는 안이한 시각도 있었으나 그런 미국조차 한국의 독재자들이
저지른
짓에는 경악하면서 당시 야권인사였던
김대중을 구출하는 데 나름 신경을 썼고 해당 항목에서도 말하는 미국 개입설의 근거가 되는
6월 항쟁 당시 신군부의 무력진압 계획을 저지하는 등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노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