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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이집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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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집트 혁명.jpg

1. 개요2. 배경
2.1. 정치적 배경2.2. 경제적 배경2.3. 외부적 배경
3. 전개
3.1. 1월 25일 이전3.2. 1월 25일 화요일 - 분노의 날3.3. 1월 26일 수요일3.4. 1월 27일 목요일3.5. 1월 28일 금요일 - 격노의 날3.6. 1월 29일 토요일3.7. 1월 30일 일요일3.8. 1월 31일 월요일3.9. 2월 1일 화요일 - 백만의 행진3.10. 2월 2일 수요일3.11. 2월 3일 목요일3.12. 2월 4일 금요일 - 퇴진의 금요일3.13. 2월 5일 토요일3.14. 2월 6일 일요일3.15. 2월 7일 월요일3.16. 2월 8일 화요일 - 이집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날3.17. 2월 9일 수요일3.18. 2월 10일 목요일3.19. 2월 11일 금요일 - 작별의 금요일3.20. 무바라크 사임 이후
4. 주변국 반응5. 향후 전망
5.1. 국민민주당 계열의 정권 유지5.2. 군부의 정권 장악(현실화)5.3. 세속주의 야당으로의 정권 전면 교체5.4. 무슬림 형제단으로의 정권 교체5.5. 내전
6. 기타7. 관련 항목

파일:attachment/136276_600.jpg


2011년 유튜브에 업로드된 카이로의 시위 현장을 담은 RT의 동영상

1. 개요

2011년 1월 25일부터 시작해 2월 11일 대통령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낸 이집트발 민주화 시위.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일부로 이집트의 30년간 장기 집권 대통령인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며 벌어지는 반독재 대정부 유혈 투쟁이었다. 중동의 강국인 이집트의 변화는 중동의 변화를 의미하기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2월 16일 이집트 보건부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최소 365명이 사망했고 5,500여명이 부상당했다. 경찰 사망자 등은 미포함이다.

2. 배경

2.1. 정치적 배경

이집트 민주화 시위의 배경을 찾자면 공화국 성립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2년 7월 23일 反영·개혁 성향의 소장파 그룹인 군내 자장교단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친영 왕정을 폐지했다. 이들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집트 대통령으로 취임,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 및 토지 개혁, 對 이스라엘 강경책 등으로 이집트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군부는 이집트의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이집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1] 나세르 이래 이집트는 단 한 번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직 승계만이 있었다. 나세르 1956년 1958년, 1965년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출마해서 99.9%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정권을 유지하였고, 1970년 9월 28일에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죽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역시 1970년 10월 15일에 형식적인 직접 선거로 단독 출마하여 90%가 넘는 득표율로[2]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다시 1981년 10월 6일에 사다트 대통령이 군 퍼레이드 참관 중 이슬람 원리주의 장교들에게 암살[3]당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무바라크 역시 1981년 10월 13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후보로 98%가 넘는 득표로 당선되었고 1987년, 1993년, 1999년선거에서도 90%가 넘는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다가가 국내외의 압력으로 2005년 9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야 비민주적 대통령 선출 제도가 수정되었고 복수의 후보자가 나왔지만 선거 기관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언론이 무바라크의 손에 있었고 매표-복수 투표-야당 탄압 등이 이뤄졌다. 야당 후보는 선거가 끝난 후 문서 위조 혐의로 5년형에 처해졌다. 선거 결과는 88.6% vs 7.3%, 2.8%. 선거의 투표율은 오랜 선거 부정과 대안 부재로 인한 투표의 의욕 상실로 고작 22.9%. 이것도 찬반투표 시절엔 10%를 넘지 못했던 것에 비해 많이 향상된 것이다.

그렇게 호스니 무바라크는 2011년까지 쭈욱 대통령을 해먹고 있었다. 자그마치 30년째 절대적인 장기 집권 및 철권 통치를 계속하고 있던 것이다. 특히 1981년 사다트 암살 이후 급히 내려진 전국 단위의 비상계엄령을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유지되는 와중에 야당은 반정부시위를 하기만 하면 군경한테 얻어맞고 체포되었다. 시민사회 및 야당 세력에 대한 절대적 탄압이 계속 이루어졌다. 운도 좋아서 6번의 암살시도도 피했으며 2010년 초반의 담낭 수술에서도 끄떡없이 돌아와서 2011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때문에 세속주의 야당은 거의 제대로 성립조차 못하고 있었으며 가장 큰 야당 세력이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둔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슬림 형제단은 21세기 이후 몇 차례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호스니 무바라크와 여당인 국민민주당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정당 해산을 당했고 개별적으로 출마하려던 무슬림 형제단 출신들도 심한 탄압을 당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스니 무바라크는 아들 가말 무바라크를 국민민주당 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삼고 부자 승계의 작업까지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무바라크를 만난 클린턴이 지지율에 놀라면서 자신의 재선을 위해 무바라크의 선거 참모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자 무바라크는 흔쾌히 선거 참모들을 보냈고 선거 결과 미국인의 90%가 무바라크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2010년 11월 28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은 전체 518석의 의석 중 무려 420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한다. 나머지 야당들 중 최다 의석을 보유한 야당은 겨우 6석이며 정당 해산을 당해 개인 자격으로 출마한 무슬림 형제단은 88석이나 가지고 있던 의석 중 딱 1석을 건지는데 그쳤다.

2.2. 경제적 배경

독재라도 하면서 경제라도 살리지도 못했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통행료와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고대 이집트 유적의 관광 수익, 그리고 자원 수출[4]로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반면 그런 대다수 수익을 극소수가 다 가져가는 짓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최근 들어 다국적 기업의 투자로 공장이 일부 세워지고 있지만 그렇게 많은 규모는 아니며 당연히 혜택을 보는 사람도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5] 상류층은 대부분 교통·통신·전력 등의 핵심 산업을 장악[6]한 상태로 부를 장악하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매우 극심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국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의존해야 하거나 아니면 관광업에 뛰어들거나 노점이라도 하던지 하면서 살아가는 신세이다. 문제는 이때 이집트 인구는 약 8천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7]에 이은 2위고 중동권에서는 1위다.[8] 그리고 국토의 98%가 사막이라서 이 엄청난 인구를 부양할 농경지가 매우 부족하다.[9]

예전부터 비옥한 농경지로 유명한 나일강이 있고 이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 문명이 탄생했다지만 이젠 과거의 이야기다. 이집트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이고 농경은 모두 다 나일강 유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인구는 늘어나고 농경지는 그대로이니 부양이 가능할 리가.[10] 그래도 1960년대 아스완 하이 댐 등을 건설하며 농경지를 늘렸으나 오히려 나일강의 범람 후 농지가 비옥해지는 자연 사이클이 사라져 기존 농경지의 생산성조차도 하락했다. 이러니 식량을 자급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족한 식량은 국외에서 수입을 해야 한다. 그런데 2009년 이래 국제 곡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러시아 작황이 안 좋은 상황에서[11] 미국이 달러화를 시장에 마구 풀어 달러 가치가 폭락했고 곡물 상당수를[12] 수입에 의존하는 이집트에 큰 타격이 되었다. 특히 절대 다수인 서민층 및 빈곤층이 곡물 수입가 상승으로 인한 직격타를 그대로 얻어맞아야 했다.

2.3. 외부적 배경

2010년 12월 중순 튀니지에서 ' 모하메드 부아지지' 청년이 분신자살한 것을 계기로 튀니지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전 과정이 이집트인들에게도 페이스북 트위터, 알 자지라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되면서 시민들은 더더욱 자극받게 되었다.

3. 전개

2011년 1월 25일 드디어 폭발한 시위가 한동안 기세를 타고 승승장구하다가 2월 3일 친정부 시위대를 만나 당황해하다가 6일 들어 피로가 누적되고 동력이 소진, 이후 술레이만 부통령과 야권의 개헌 협의로 평화롭게 끝나는가 했더니 8일 와엘 그호님의 TV 인터뷰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다시 민심이 폭발했다. 이후로는 야권이 개헌 협상판을 깨버리고 정부 측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국제 사회도 서서히 민주화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일날 모두가 예상했던 사임은 커녕 뻗대기를 시전한 무바라크는 군부가 무력 진압을 거부하자 결국 이집트 현지 시간으로 11일 18시경에 부통령의 대독으로 사임을 발표하였다.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 정부 단계를 거치는 중.

시위의 전개 과정과 관련 영상을 알 자지라가 정리한 자료. 영어이며 1부인 'Egypt Burning' 은 1월 25일부터 31일까지를, 2부인 'Standoff on the Nile' 은 2월 1일부터 7일까지를 다루고 있다. 3부는 와엘 그호님으로 인한 시위의 재점화와 무바라크의 사임까지 이어진다.

알 자지라의 구분처럼 시위의 전개는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월 25일을 기점으로 2월 1일까지 시위의 규모가 점차 확장되던 1단계, 친정부 시위대가 등장하고 시위의 동력이 떨어졌던 2월 2일부터 7일까지의 2단계, 와엘 그호님의 등장으로 시위가 다시 거세지고 결국 무바라크의 사임으로 이어지는 2월 8일부터 11일까지의 3단계.

3.1. 1월 25일 이전

10년 6월 반부패 운동가였던 칼레드 사이드가 부패 경찰이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장면을 유튜브에 올렸다가 폭행으로 사망한 후 와엘 그호님은 '우리는 모두 칼레드 사이드' 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고 이는 곧 반정부 운동의 헤드쿼터가 되었다. 자연히 지속적으로 당시 정부에 대한 좋지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자 가능성을 확인하고 바로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1월 15일 타흐리르 광장에서의 시위를 촉구하는 메세지가 이 그룹의 사이트에 가장 먼저 올라왔고 SNS로 바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작이었다.

3.2. 1월 25일 화요일 - 분노의 날

1월 25일은 이집트의 국가 경찰의 날이었다. 그리고 이 날 이집트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분노의 날로 선포된 이 날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아스완, 이스말리야 등에서 거리로 시민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13]에는 약 2만에서 3만의 인파가 집결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도 약 2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시위대는 무바라크 퇴진, 최저임금 보장, 빈곤 해결과 부패 척결 등을 요구하며 가두행진에 나섰고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이를 저지하자 시위대는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 날 카이로에서 진압에 나서던 경찰 1명이 죽었고 수에즈에서는 시위대 2명이 죽었다. 밤이 저물자 시위대는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경찰들과 대치했다.

3.3. 1월 26일 수요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대되면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격화되었다. 특히 수에즈 운하에 면한 동부 수에즈에서는 시위대가 관공서와 경찰서 등 주요 공공기관 건물에 불을 질렀고 경찰은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수에즈에서 일시 철수해야 했다.

3.4. 1월 27일 목요일

이 날의 시위는 전반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이는 무슬림 형제단 및 기타 야권이 1월 28일 금요일에 총력전을 펼치기로 선언했기 때문이다.[14] 전반적으로 조용한 날이었지만 사망자는 8명으로 늘어났고 긴장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이 날 유럽에 머물러있던 前 IAEA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귀국의사를 밝히며 무바라크가 퇴진할 경우 대통령을 맡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15]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결국 그 날 저녁 귀국했다.

3.5. 1월 28일 금요일 - 격노의 날

12시, 이슬람의 주말 정오 기도를 위해 모스크를 찾았던 시민들이 모스크를 빠져나오며 일제히 시위대로 변하였다. 이 날 이집트 대부분의 도시는 도시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주요 대도시의 크고 작은 거리들은 시위대가 점거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 정부의 모든 공공 행정 기능도 마비되었으며 이 날을 기해 시위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이 날 경찰들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위는 그와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무부, 경찰서, 집권 국민민주당 당사, 심지어 대통령궁 앞으로 시위대가 몰려들었고 이들 시설을 지키기 위해 경찰이 실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이 날 하루 동안만 사망자가 최소 20명 넘게 발생했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진압 불가 상태에 빠지자 이집트 정부는 인터넷 휴대폰을 전면 차단하고 오후 6시부터 아침 7시까지 통행 금지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시위를 인터넷 차단으로 저지하기엔 늦은 상황이었으며 통행 금지령을 시행하기에는 이집트 공권력이 시위대의 분노 앞에 너무 미약했다. 결국 경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의 국민민주당 당사가 불타올랐다. 마침내 이집트 정부는 군의 투입을 시작했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대도시 및 시위가 특히 극렬한 도시에 군 부대가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날 무바라크 대통령이 국외 탈출했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미국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촉구한다는 원론적인 발표를 내놓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Unplug-mubarak.png

브라질의 풍자 만화가 카를로스 라투프의 풍자 만화. 무바라크가 이집트의 인터넷을 차단했지만 이집트가 무바라크의 플러그를 뽑으려 한다는 내용.

3.6. 1월 29일 토요일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민주화 시위 이래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그는 TV 연설을 통해 내각총사퇴와 새로운 내각 구성을 약속했으나 이 카드는 이미 튀니지에서 써먹었으나 장렬하게 실패한 카드. 사태는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경찰의 실탄 사용에 맞서 시위대도 자체적으로 보유한 총기 및 약탈한 총기 등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각 도시마다 치안 부재 상황에 빠지며 카이로의 국립 박물관이 약탈당하는 등의 불상사가 벌어지자 시위대는 자체적으로 자경단을 조직, 점거한 중요 시설 및 거리에서 순찰·경계 활동에 나섰다.

경찰 병력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집결되면서 지방은 시위대가 사실상 장악하기 시작했다. 시나이 등지에서 시위대에 붙잡힌 경찰들이 집단 린치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속출한 것이다.

한편 대도시로 진주하기 시작한 군대는 치안 회복 작업에 주력하고 시위 진압에는 나서지 않았다. 시민들 역시 군대를 환영했고 시위대의 자경단과 군대가 협조하여 공동으로 치안 유지에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집트를 여행경보단계 2단계(여행 자제)를 발동했다. 카이로 공항에는 탈출하려는 외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무바라크의 측근들로 알려진 이집트 재벌 일가들이 국외 탈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3.7. 1월 30일 일요일

호스니 무바라크가 새 부통령으로 오마르 술레이만[16]을 임명했으나 시위대는 정권의 전면 퇴진만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약발이 전혀 듣지 않았다.

29일 도시에 전개를 마친 군은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산 배치된 군이 시위대에 둘러싸였지만 군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이집트라 그런지 시위대도 군을 공격하지 않고 군인들과 악수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이 보였다.

이 날 호스니 무바라크가 카이로에서 피신해 홍해의 호텔로 떠났다는 매우 구체적이고 신빙성있는 보도가 나왔다. 해당 호텔에 갑자기 군 병력이 증강 배치되고 경계가 삼엄해졌다는 것. 다만 완전히 카이로를 떠난 것은 아니고 카이로와 해당 호텔을 왕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슬림 형제단과 세속주의 야권 세력 중 가장 큰 4.6 청년 운동은 본격적으로 임시 정부 형성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엘바라데이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는데 합의했다.

3.8. 1월 31일 월요일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처음으로 시위대에 합류하며 야권이 일치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몇 감옥에서 대규모 탈옥 사태가 일어났으나 전반적으로 치안은 크게 양호해졌다. 이는 시위대와 군부의 협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군은 시위대의 자체적 자경단 활동을 묵인하고 있으며 시위대는 약탈자를 잡아서 군에 넘겨주는 체제가 고착화되었다.

이 날 수에즈에서 총파업이 제의되었으며 야권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여 2월 1일을 기해 무바라크가 퇴진할 때까지 전국에서 전면 총파업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3.9. 2월 1일 화요일 - 백만의 행진

전국 단위의 전면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파업으로 수에즈 운하의 운영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면서 수에즈 운하 폐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국제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하며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정부는 신임 부통령 오마르 술레이만이 나서서 대통령 출마 자격 완화, 선거 제도 개편, 야당 탄압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과 물가 상승 억제 및 실업률 감소 등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으나 시위대는 요지부동이다.

이집트 정부는 100만인 대행진이 예고된 이 날 시위대의 상경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철도 운행을 전면 중단시켰다. 그러나 이미 카이로 광장에 운집한 시위대는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시위 이래 최대 규모이다. 야당 측은 이 날 카이로에서만 최대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이집트군은 시위대에 무력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은 이집트 야권 조직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한편 구글에서는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차단된 이집트를 위해 음성 회선으로 트위터에 투고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3.10. 2월 2일 수요일



'백만의 행진' 날. 타흐리르 광장에 시위대가 모여있다. 출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9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대통령 출마 자격 제한을 완화하는 등의 개헌을 보장했으나 즉각적인 하야 및 망명은 거부했다.

그러나 군대가 시위대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의사가 전달되었을 것이니 시위대는 그만 일상으로 복귀하라' 는 성명을 발표하여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야권은 2월 4일까지 시위를 계속할 계획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대 측에서 진압을 시도할 경우 무장한 시위대와의 유혈사태, 즉 내전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된다면 군대의 위신이 떨어지면서 나아가 이슬람 과격파들의 입지가 더 힘을 얻어질 전망.

시위가 확산된 이후 차단되었던 인터넷 서비스도 다시 일부 재개되었다.

현지 시각으로 이 날 낮부터 친무바라크 시위대가 낙타 등을 타고 反무바라크 시위대에 돌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날 낮 이후로 양측 시위대가 투석전을 하는 등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시작했다. 친무바라크 시위대는 경찰들이 이전에 사용하였던 작전이기도 한 차량으로 시위대에 돌격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국영방송의 앵커 1명이 이 날 왜곡 보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퇴했다. 국영방송은 한산한 다리 등을 비추면서 사태를 애써 축소해왔다. 이 공간을 메운 게 알 자지라.

외국인들이 위험한 카이로를 탈출해서 안전한 바그다드로 가는 미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3.11. 2월 3일 목요일

친정부 시위대와 반정부 시위대의 대결이 격화되어가고 있다. 친정부 시위대는 '30년도 기다렸는데 7개월을 못 기다리겠느냐' 며 시위 중단을 외치고 있다. 이들 친정부 시위대에 무바라크와 군부가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으며 장기화되는 시위에 지친 국민들을 시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동원된 것으로 추측된다. 친정부 시위대는 반정부 시위대에게 선제 공격[17]해 다시 사망자가 발생했다. 붙잡힌 친정부 시위대의 소지품에서 경찰 신분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친정부 시위대가 계속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오히려 국제 사회에서 이집트 정부는 더 큰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친정부 시위대가 외신들이 취재를 위해 다가오자 이들은 '외국인들은 꺼져' 를 외치면서 외신 기자들을 폭행하였다. CNN 등 유명 외신 기자들이 이미 두들겨 맞았으며 이들은 돌멩이를 던지거나 손에 든 물건으로 기자들을 구타했다. 적지않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뺏겼고 방송국에 돌아와서는 신나게 깠다. 심지어 어떤 친정부 시위 참가자들은 드라이버, 칼과 같은 흉기를 들고 위협을 가했다. 미국의 CNN 앤더슨 쿠퍼도 안면을 주먹으로 가격 당했다고 한다.

외신들은 친정부 시위대의 반정부 시위대 도발과 외신 기자 폭행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반정부 시위대들은 최소한 기자들에게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비교가 되어 더더욱 까였다. 이집트 정부가 사과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국, 유럽은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부통령 술레이만은 이전까지 계속 무시하거나 탄압했던 무슬림 형제단을 포함한 야권과 계속 대화를 시도중이며 엘버라데이는 차기 정권은 반미가 아니며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지킬 용의가 있다면서 서방 세계의 불안을 달래고 있다.

미국과 서방 세계는 무바라크 정권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으며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면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며 무시로 일관하고 끝까지 버티고 있다(만일 무바라크가 이렇게 끝까지 버팅기고 시위대 간의 파벌 싸움이 짙어질수록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3.12. 2월 4일 금요일 - 퇴진의 금요일

군대가 타흐리르 광장의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차적인 이유론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를 갈라놓기 위한 것.

타흐리르 광장은 빵 행상이 등장하고 이발소, 치료소, 취침 공간이 생기는 등 시위의 장기화로 인한 변화가 나타났다. 타흐리르 광장의 코너 모습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무바라크가 즉시 사임하고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주도하는 과도 정부로 권력을 이양하는 방안을 미국과 이집트 당국이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미 상원은 NYT가 보도한 미정부의 주장에서 좀 더 나아가서 정치 개혁의 구체적 조치나 극단적 이상주의자들에 대한 우려,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준수 등을 포함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하였다.

ABC와의 인터뷰에서 술레이만 부통령은 이집트군이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재확인했다. 여기에서 부통령은 무바라크는 공직을 맡는 것에 지쳤지만 자신이 사퇴할 경우의 혼란을 염려하여 지금 사퇴하지 않는다.

지난 분노의 날과 격노의 날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통령 궁 앞에서의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금요일에 계속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이슬람 신자로서 지켜야 할 꾸란에 규정되어있는 Jumu'ah(جمعة‎)라 하는 금요일 예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이슬람권에서는 직장을 쉬고 모스크에 예배를 보러 나오고 일종의 휴일이 된다. 그리고 이 예배가 끝난 후에 시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2월 3일 현재까지 최소 135명의 시위대, 12명의 경찰관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00명이 넘는다는 말도 있지만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정확한 숫자는 불명.

평화로운 모습을 가장해서 보여주던 이집트 국영방송이 타흐리르 광장의 반대 시위자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반대자와 인터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이집트의 기독교 신자들이 무슬림 시위자들을 위해 인간 방패가 되어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http://www.boingboing.net/2011/02/04/how-to-counteract-re.html

3.13. 2월 5일 토요일

군대의 분리 정책으로 반정부-친정부 시위대 간의 혼란상이 정리되자 카이로에서는 한 주만에 은행과 주유소가 문을 여는 등 어느정도 일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되고 있다.

무바라크가 권력을 승계할 것으로 예상했던 차남 가말을 비롯한 여당의 핵심 멤버들은 당을 사임했지만 무바라크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대통령 사임도 안하셨다. 군중도 마찬가지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버티고 있는데 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검거되었던 알 자지라 방송국의 기자들도 다시 풀려났다고 한다. 현재 알 자지라 기자들은 기자 면허 등이 전부 취소되었고 얼마 전에 이집트에 있는 사무실도 공격 받아서 카메라고 건물이고 초토화 된 상태인데도 열심히 찍고 있다.

지난주에 저격수의 총을 맞은 "알 아흐람" 신문의 사진기자 "아흐메드 모하메드 마흐모우드" 씨는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쪽으로 가던 가스 수송관이 폭발했는데 이스라엘 당국은 폭발이 테러리스트가 아닌 가스 누출이라고 하지만 두 나라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의문점이다.

3.14. 2월 6일 일요일

2월 6일 11시 6분 경에 이집트 사태와 관련해서 종합 뉴스가 올라왔다. 무슬림 형제단 등 이집트 야권이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을 만나서 30년간 이어진 긴급조치법을 폐지하고 헌법 개정, 시위자 석방,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9월 대선 불출마, 언론 탄압 중지, 선거 때까지 국가위원회 운영 등에 합의했다고 이집트 국영 TV가 보도했다.

이집트 정부는 이밖에 시위 참여자들을 강경 진압하지 않기로 했으며 인터넷과 텍스트메시지 전송 등을 허용하기로 했다. 또 정치범에 대한 이의 제기를 처리할 사무소를 개설하고 부정부패 척결 기관을 발족하기로 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협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왔으나 이날 국민들의 열망과 시위 희생자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이번 협상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 날 협상에는 야권 최대 조직인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시위 구심점으로 떠오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지지자, 경제계 인사 등이 참여했다.

한편 이 날 타흐리르 광장을 제외한 카이로 대부분 지역에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시민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은행들도 문을 연 가운데 시민들이 문 앞에 줄을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편 미국 대사관이 보유한 자동차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사망자가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해당 차량은 도난당한 것이라고 급히 해명했다.

여하튼 현재 상황으로는 이집트 사태도 이제 서서히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여기

3.15. 2월 7일 월요일

이집트 현지 분위기는 정치권에서는 점진적인 권력 이양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부통령 슐레이만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무바라크 일족과 자신은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발언권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일. 또한 엘버라데이는 협상 과정에서 점점 배제되어가기 시작해 내부 지지 세력이 없는 인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엘버라데이나 반정부 시위대는 정치권의 야합이라고 비난하면서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퇴진 없이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현지에서도 장기적인 시위로 지친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다가오는 선거로 정권 교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3.16. 2월 8일 화요일 - 이집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날

야권인 무슬림 형제단과의 협상으로 동력을 잃어가던 시위는 다시 급작스럽게 변화를 맞이하였다. 정부와 야권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개혁 조치들에 대해서도 미적지근한 움직임을 보이자 분노한 시위대가 즉각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다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페이스북에서의 반대 시위를 조직한 이유로 지난 27일 네 명의 괴한에 납치되었던 구글 중동-북아프리카 책임자 와엘 그호님(30)이 7일 국제 사회의 압박과 무바라크의 상황 무마용 유화책으로 풀려나면서 시위에는 다시 불이 붙었다.

풀려난 후 민영 방송인 DreamTV에 출연하여 그호님은 울먹이면서 "우리는 이집트를 사랑하고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다" 는 말을 하고 시위 중 희생된 젊은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울먹이다가 나가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이집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날" 로 명칭된 8일, 타흐리르 광장에는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운집하여 현재까지 최대의 인원이 모였다.



그호님의 존재는 시위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타흐리르에 나타난 그호님은 "나는 영웅이 아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영웅이다" 는 발언 등으로 야권에 실망한 시위대에게 새로운 구심점이 되는 듯 하다.

교수노조, 변호사 노조 등 세군데의 독립 노조가 시위에 참여하였다.

거기에 무슬림 형제단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는지 다시 무바라크 정권 인사들 전부가 정부 관직에서 퇴진을 요구했고 개혁 추진이 안되고 있다며 협상을 그만 둘 기세이고 슐레이만 부통령은 ' 순순히 시위를 그만 두면 쿠데타와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수에즈 운하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할 분위기였다.

한편 반정부 시위대가 KFC를 먹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18] 무바라크 측이 시위대의 와해를 노리고 고의적으로 유언비어를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한편 서방 언론에서는 무바라크가 독일로 떠났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병 치료나 요양 목적으로 무바라크가 종종 독일로 여행을 갔었다고 하는데 현 이집트 정국상 무바라크가 출국하면 십중팔구 망명이라 가능성이 낮다.

한편 이집트 경찰들의 가혹 행위와 시위대 공격 장면[19]이 유튜브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이집트 정부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분위기가 반전되자 다시 무바라크와 이집트 정부에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20]

무바라크의 견디기와 야권 분열로 마무리 되어가는 듯했던 이집트의 상황은 이로서 다시 반전되어 향후 전망을 어렵게 한다.

참고로 이번에 새로 임명된 장관들 중에 하나인 Gaber Asfour 문화부장관[21]이 건강상 문제로 10일 만에 사임했다고 로이터가 알렸다.

3.17. 2월 9일 수요일

시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일부의 시위대는 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의회 건물로 옮겨가기도 했다. 일부 노조들이 파업에 돌입하기도 하였으며 무슬림 형제단은 다시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시위가 다소 진정되면서 힘을 얻은 무바라크는 UAE 외무장관을 접견하는 등 정상 일정을 소화하면서 이어 1000여명의 정치사범을 석방하는 등 유화책을 펼쳤다. 술레이만 부통령은 시위대에 대한 강제 진압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3.18. 2월 10일 목요일

이집트 정부는 9일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역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군대를 동원한 강경 진압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집트 관영 통신 메나(MENA)에 따르면 아흐메드 아불 가이트 외무장관은 시위 강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과 관련, 아랍권 위성 채널 알-아라비야와 인터뷰에서 "혼란이 빚어진다면 군대가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개입할 것" 이라며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악화할 수 있다" 고 경고했다.

이는 오마르 술레이만 신임 부통령이 더 이상 시위를 용인할 수 없다면서 쿠데타 가능성까지 거론한지 하루만에 나온 발언이다.[22]

여기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은 정부가 약속 이행을 하고 있지 않다면서 협상 중단 선언. 정국은 다시 급격하고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슬림 형제단은 신정 국가를 세울 계획이 없다면서 이란 디스하는 한편 서방 세계에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유지할 것이며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위대의 새로운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그호님은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 며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담으로 구글은 정치적 거물로 급성장한 그호님의 존재가 부담스러운 눈치다.

또한 스위스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자산 조사에 착수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세계 곳곳에 분산돼 있는 무바라크 일가의 재산은 400억~700억 달러로 보인다고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이 신문은 최소 10년 정도 된 정보라고 밝힌 뒤 자산의 상당 부분이 스위스 UBS은행과 영국 로이드뱅킹 그룹의 뱅크오브스코틀랜드에 예치돼 있다고 전했다.

스위스 당국은 지난 1일 발효된 '부정자산반환법(일명 뒤발리에법)' 을 근거로 국가 원수를 비롯한 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스위스로 빼돌린 부정 자산을 최대 10년까지 동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해당 자금을 본국으로 송치하거나 공공 목적을 위해 직접 사용처를 결정할 수 있다.

여기

9일 총파업이 선언된 가운데 점차 총파업이 확산되고 있다. 11일 금요일에는 이슬람의 휴일과 맞물려서 다시금 대규모의 시위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

BBC의 보도에 따르면 집권 여당인 국민민주당(NDP)의 호삼 바드라위 사무총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 날 밤 대국민 연설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군과 집권당 간부의 말을 인용한 AP통신에 의하면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 할 것이라고. 여기에 하산 알 로웨니 군사령관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에게 "여러분이 원하는 것 모두가 실현될것" 이라 했다는 목격도 나오고 있다. 의회 청문회 출석 중인 CIA 국장도 사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에 동의하였다고.

군부 인사들이 무바라크를 만나 압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집트 국영 방송은 무바라크가 10일 저녁에 출연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한 무바라크는 "당장 안 물러난다. 9월 선거 이후 치안이 안정되면 계엄령도 해제한다" 라고 말해 사실상 하야할 뜻이 전혀 없음을 공언했다. 이 소식에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크게 반발하면서 즉각 하야를 촉구했다.

무바라크의 이런 결정은 자충수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친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군부의 압박에 하야를 동의해놓고 그걸 뒤집었다는 점에서 친위 세력마저 무바라크를 등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 게다가 외국의 개입이나 지시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 무바라크 하야를 압박하는 외국과도 척을 지고 있다. 확실한 건 무바라크가 사임을 거부하면서 시위자들과 타협할 수 있는 공간은 이제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쪽이 끝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3.19. 2월 11일 금요일 - 작별의 금요일

무바라크가 버티는 모습을 본 이집트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시위대의 규모는 계속 불어나고 있으며 이 날 대통령 궁 앞은 분노한 시위대가 장악하였다. 이들은 무바라크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 투자자들도 이집트 정권 교체가 지지부진해지자 실망해 이집트에서 빠져나가면서 경제 위기가 더 악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국민들의 의사를 따르고 개혁을 즉각 시행하고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권력 이양을 준비하라며 무바라크에게 압박을 주고 있다.

금요일은 꾸란에 규정되어있는 Jumu'ah(جمعة‎)라는 예배가 있는 날이다. 1월 28일, 2월 4일은 이날 모스크에 나온 예배자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자들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났었다. 게다가 무바라크가 배째라를 시전하였기에 시위의 동참 인원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동안 가만히 있던 군부가 성명을 발표했는데 '무바라크 대통령과 슐레이만 부통령을 지지한다' 는 선언이였다. 군부가 시위대의 뒤통수를 치고 권력을 잡으려는 듯. 한편 일반 군인들 중에 시위에 동참하는 군인들도 목격되어서 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무바라크는 현재 카이로를 떠나 휴양지로 가 있다고 한다. 퇴임을 거부하고 버티는 건 권력을 지키는 게 불가능해지자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시간을 벌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한국 시간으로 2월 12일 새벽 1시경, 슐레이만 부통령이 이집트 국영 방송에 출연하여 무바라크는 사임하고 군사평의회가 이집트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짧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무바라크가 결국 사임했다. 무바라크는 샴 엘 쉐이크라는 휴양지로 떠났다는 듯.

파일:아랍 이집트 시위.webp

이 담화를 본 시민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끌어안았다. 이집트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힘으로 독재자를 몰아낸 것이다. 수많은 병마와 암살 시도도 버텨낸 독재자를 국민의 힘으로 쫓아냈다는 점에서 이집트 국민들이 매우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이제 이집트는 불확실한 미래, 그러나 시민들이 원해서 나아간, 중동 지역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다. 아직 군부는 슐레이만 부통령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정권을 탈취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국도 4.19 이후 군부 독재를 경험한 적이 있던 만큼 추이는 계속 지켜봐야 한다.

3.20. 무바라크 사임 이후

몇 십 년간 억눌려왔던 이처럼 많은 요구사항을 어떻게 녹여내느냐가 향후 이집트의 과제이다.

내각과 부정 선거로 인해 친무바라크 인사가 90%를 점하는 국회는 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과도 정부는 군부 위원회와 헌법재판소장이 이끌게 된다고 한다.

타흐리르 광장을 시민들이 직접 청소를 하고 직접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이 참회 시위에 나서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시위대의 대부분은 돌아갔지만 군부의 민정이양까지 약속 이행을 지켜보겠다는 일부 시위대가 타흐리르 광장에 남아있기도 하다. 국영 TV, 친정부 언론인 알 아흐람, 관영 언론인 알 곰후리아 등의 매체들은 바로 다음 날부터 무바라크를 까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절대적으로 인기많은 프로축구 리그도 죄다 경기 취소되었다. 2월 21일에 벌어질 예정이던 경기까지도 이미 전면 취소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시위는 아직 여러 곳에서 소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먼저 경찰들은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임금 인상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다른 노조들도 임금 인상 요구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무바라크의 은닉 재산에 대한 조사도 본격화되고 있다. 20억 달러~700억 달러[23]라는 말도 있고 스위스는 무바라크의 재산을 동결하였고 영국과 EU는 자산 동결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임 전날 세계를 실망시켰던 무바라크의 사임 거부 담화에는 초안에는 사임 이야기가 있었으나 차남인 가말이 저지하여 빠졌고 장남과 차남이 이를 두고 싸웠다는 후세인 같은 이야기도 나오는 중. #

이집트 관영 언론들이나 외신들에 의하면 무바라크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한다. 시위가 일어나면서 노년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게 원인이다.

무바라크 사임 1주째인 2월 18일,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승리의 행진' 집회가 열렸다. 수십만의 시민들은 국기를 흔들면서 혁명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도중 사망한 365명의 넋을 위로했다. 군대의 민주화 프로세스에 대한 감시도 늦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고. 조금 떨어진 다른 광장에서는 만명 정도의 친 무바라크 지지자들이 모여서 집회를 따로 했다.

이집트군은 앞으로 개헌위원회를 통해 10일 내로 헌법안 확정, 2개월 내로 국민 투표에 붙이기로 했다.

이집트군은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이유로 페이스북 계정을 열었다.

21일, 이집트 검찰은 전 내무장관과 관광장관을 공금유용혐의로 기소하고 자산동결 조치를 취했다. 또한 무바라크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도록 관련국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야권에서는 구체제 인물이 여전히 내각에 있다면서 내각 해산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청년 운동가는 과도 정부 해산을 촉구하는 시위를 타흐리르 광장에서 가지기로 계획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선거 참여를 위해 자유정의당을 결성하기로 하였으며 그러나 대통령직이나 의회 다수당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영국의 캐머런 총리가 무바라크 축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하여 지지의사를 밝히고 민정이양을 은근히 압박하였다. 미국의 국무부 정무차관도 같은 날 이집트를 방문했다.

25일,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만명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집회를 열고 군부에 개혁 실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현재 내각에서 아흐메드 샤피크 총리, 아흐메드 아불 게이트 외무장관, 맘두흐 마리에 법무장관 등의 무바라크 정권 시절부터 있었던 장관들이 즉시 퇴진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금요일마다 대규모 집회를 열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26일에도 시위대 텐트로 가득찼다.

민정이양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가고 있어서 26일 최고권위의 법학자 타레크 엘 비시리 위원장이 이끄는 헌법 초안 작성 8인 위원회는 새로운 헌법 골자를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 자격을 국회에 1석이라도 갖고 있는 정당 혹은 국회의원 30명의 추천 혹은 시민 3만명의 추천으로 결정하여 대폭 완화했다. 계엄령 발령시 국회 동의를 얻어야 하며 6개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하였다. 위원장은 과도 헌법을 만들고 민주 정부와 야당이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4월 13일 무바라크와 아들들에게 구속 명령이 내려졌으며 18일에는 집권당이였던 국민민주당이 법원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무바라크는 현재 병을 앓고 있고 감옥에 가기 싫어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바라크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게 입증되면 십중팔구 교수형이 내려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민정이양 작업이 과연 알려진 대로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지 의혹이 일고 있다. 이미 지난 달에도 군부와 시위대 간 충돌로 40명이 사망했고 12월 17일에도 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정부군이 충돌해 최소 3명의 시위대원이 숨지고 220여 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관련기사

2013년 1월 18일에는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여성이 징역 15년, 그 자식들은 징역 5년을 선고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

4. 주변국 반응

4.1. 아랍 국가들

공통적으로 알라를 외치고 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이라고 해서 이집트와 경제 사정이 별로 다를 게 없기 때문. 실제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 도미노가 이집트를 거쳐 다른 나라로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심해지고 있다.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중동의 맹주 국가 중 하나였기에 튀니지와는 파급력이 전혀 다르다. 특히 매스미디어나 인터넷 부문에서는 이집트의 영향력이 아랍권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도 평소에는 빈곤층에 신경도 안 쓰던 아랍 국가들이 갑자기 세금 감면 혜택, 정부 지원금을 주는 복지 정책을 펼치며 시민들 눈치 살피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예멘, 요르단, 시리아[24], 바레인,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 리비아에서도 시위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 이란에서 1979년에 혁명이 일어나 뭔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아는 중동 국가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이란은 좀 애매모호한 입장인데 잘 하면 자기들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반미 국가 하나가 더 생겨날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로 이란도 대통령이 부정 선거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오히려 역으로 휩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집트는 수니파이니 같은 극단주의라도 시아파인 이란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을 노릇이다. 결국 2월 4일날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이집트와 튀니지에 이슬람 신정 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적국인 이스라엘과 싸워야 한다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 말을 듣고 신정 국가 같은 거 생각도 안 한다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란 내에서 이집트 지지 시위에 정부가 제동을 거는 모습을 보면 역시 이란 정부도 이집트의 혁명 열기가 자국 내로 넘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확실하다.

무바라크 사임 직후 카타르, 이란이 축전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무바라크가 밀려난 것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하마스도 새로 들어설 이집트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새로 들어설 이집트 정부가 가자 봉쇄를 풀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재스민 혁명을 일으켜 독재 정권 축출에 성공한 튀니지에서도 축하하는 집회가 열렸다. 참고 기사 재스민 혁명의 시발점이 된 분신 청년의 집이라고 한다.

4.2.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사상 초유의 국가적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제4차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 고원이라는 양면 전선을 유지하면서 전면적 패배 위기에 직면했다 간신히 살아난 이스라엘이 이후 선택한 노선이 바로 이집트와의 평화 노선이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를 맺고 군사력의 대부분을 시리아 방면에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진다면 신 정부가 기존 외교 정책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집권한다면 이스라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양면전쟁의 악몽에 다시 시달려야 한다.

그러나 대놓고 무바라크 정권을 지원하자니 오히려 반(反)이스라엘 감정이 심한 이집트인들에게 역효과 날까봐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서방 국가들에게 비밀리에 무바라크를 지원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무바라크의 입지가 불안해지자 우선 반이스라엘 감정을 조금 덜어보려는 건지 2월 10일 팔레스타인 쪽 헤브론에 세워진 불법 유태인 정착촌을 밤에 급습하여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유태인 극우들이 이를 갈고 있지만 이런 짓 해봐야 아랍에선 쇼를 한다 비웃을 뿐이다.

사실 헤브론 지역의 유태인들은 군대도 안 가는 유대교 광신도, 하레디들이라 이스라엘은 진작부터 이들을 밀어버리지 못해 안달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을 퇴거시키려고 출동한 병력을 막으려고 집을 요새화시키고 농성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 꽤 이전부터 행해져 오던 일이라 이스라엘 정부는 해도해도 안되니 반쯤 손을 놔버린 상태였고, 이스라엘군은 군대도 안 가는 주제에 도움도 안 되는 잉여 인간들[25]이라며 이들에게 이를 갈아온 지가 꽤 됐다.

결국 무바라크가 하야하면서 정치인들은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지난 30년 동안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미국에게 상당한 군사 장비를 들여왔다. 미국제 전차에서부터 장비들까지 무장해있으며 80년대에 리비아 수단 공화국, 차드와 영토 분쟁이나 과격파 토벌 같이 꾸준하게 전투를 치렀다. 게다가 이번에 중동 전쟁이 터질 경우에는 이집트 말고도 시리아나 여러 나라들의 경제적 지원 및 심지어 핵무기까지 파키스탄을 통하여 대응할 수도 있기에 예전처럼 핵 가지고 뭘 어찌하기도 어렵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수출하던 천연가스 송유관까지 일부 공격을 받아 폭발하면서 송유관 가스 공급도 중단되었고 야당인 알 가드의 아이만 누르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비난하고 있으며 최대 야당 무슬림 형제단이 하마스와 헤즈볼라와 친한 사이이다. 거기에 다른 친미 및 친이스라엘 적 태도를 보일 정당은 아예 없는 현실에 이스라엘의 한숨과 걱정은 쌓여만 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 예상대로 12월 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에 경악하고 있다.

4.3. 미국

아랍-이슬람 지역에서의 민중혁명 하면 미국으로선 뼈 아픈 기억이 있다. 바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친미 국가였던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전제왕정을 타도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가 되어 지금은 대표적인 악의 축 반미 국가로 재탄생했다.

이것은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갖고 있는 딜레마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전파자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정작 중동 지방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제왕정 및 독재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만약 이번 시위에서 미국이 현 무바라크 정권을 지지한다면 미국은 자신들이 국제 정치 외교 무대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도덕적 정당성마저 상실해버린다. 반면 시위대를 지지했다가는 다른 중동의 동맹국들로부터 불신을 얻게 됨과 동시에 새 이집트 정부가 미국에 우호적일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2011년 2월 2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이집트 국민들을 도울 용의가 있으며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여 이집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고 밝혔다. 아무래도 미국이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모양? 그것도 무바라크가 아닌 이집트 시위대를 지지하려는 의사를 들어냈지만 하지만 말로만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무바라크 정권에 군사 지원을 끊던가 하는 조치가 있어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무바라크 쪽에서 시위대에 쏜 총탄과 최루탄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댓글 참조

반론에선 무기는 다 나라가 파는 거냐고 하고 미국의 실제 태도를 의문시한 사람이 주사파라며 인신 공격을 하지만 정작 막대한 공식 군사지원비는 싹 까먹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대비되는 것 하나로 프랑스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집트 민주화 시위 발발 이후로 무기와 경찰 장비를 이집트에 파는 걸 중지했다고 밝혔다. #

여기

2011년 2월 5일 미국 대통령의 이집트 특사 프랭크 와이즈너는 "민주화 과정을 무바라크 대통령이 관리해야 한다. 바뀔 때까지 무바라크가 권좌에 있어야만 한다" 고 대놓고 밝혔다. 곧 미국 정부는 그건 와이즈너 생각일 뿐이라고 허겁지겁 진화에 나섰지만 미국의 속내를 더 의심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

미국이 노리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한국의 87년 6월 혁명이나 인도네시아 혁명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인 것 같다. 일단 독재는 종식되면서도 급격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안정적인 친미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는 것 말이다.

미국 언론들은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미국이 반정부 시위대에 힘을 실어줘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도록 더 강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무바라크 하야에 대해 환영을 하면서도 누가 정권을 잡을 것인지 주시하고 있는 듯.

여담으로 리언 피네타 CIA 국장이 하원에서 2월 10일 중대 발표가 하야 발표일 것이라고 보고했다가 무바라크가 '퇴진은 없다' 고 하는 바람에 돈만 먹는 무능한 집단이라며 까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11일에 무바라크는 결국 하야 발표를 한다.

무바라크 하야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다시 직접 연설을 통해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오로지 민주주의만을 원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들 앞에는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 고난들을 평화적으로, 민주적으로 헤쳐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사건은 인류의 자긍심(Dignity of the mankind)을 확인하는 사건이고 이집트인들은 우리에게 폭력이 아닌 비폭력과 도덕의 힘이 정의를 위해 역사의 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인간의 혼이 자연스럽게 요구하게 되는 자유에의 염원이 탈히르 광장에서 울려퍼졌고 전세계가 그것을 들었다" 고 발표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선거에서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이 총선 승리를 거두면 과연 미국은 긍정적일지 의문이 든다. 팔레스타인도 당당하게 선거로 하마스가 승리했음에도 인정하지 못하던 게 미국과 이스라엘 아니었던가. 결국 무슬림 형제단의 압승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관하고 있다. 군부의 부정 선거 논란으로 인한 시위대 충돌과 시위대 사살에도 묵묵부답이다.

4.4. 유럽 지역

4.4.1. 유럽 연합

북아프리카 지역은 예로부터 유럽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던 만큼 미국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지역에 걸린 유럽의 이권은 매우 많으며 미국의 정책도 사실 유럽의 중동-북아프리카 정책을 따른 점이 매우 많다.

이렇게 역사적인 측면 때문에 유럽은 이번 사태에서 미국보다도 개입할 명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지역의 유럽 이민도 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들이 본토의 정치적 변화에 영향을 받고 유럽에서 어떤 행동을 벌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프랑스 국영언론 프랑스 24를 보면 역시 무슬림 형제단이 정권을 잡을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드러난다. 2월 10일부터는 아에 무바라크 파 '시위자' 들의 의견을 전하기 시작했다. "무라바크는 우리 아버지"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언론들은 미국 언론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대를 약간 더 편들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보다는 북아프리카 이민자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인 듯.

무바라크 사임 직후 EU, 영국, 독일의 지도자들은 평화로운 정권 축출을 이룬 것에 대해 축하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보낸 메세지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준수하길 바라고 있다. 스위스는 바로 무바라크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동결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집트를 본받아 우리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몰아내자!!' 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4.4.2. 발칸반도

같은 이슬람 국가인 알바니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여전히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접국 세르비아는 비록 이슬람 국가는 아니더라도 EU 가입 실패 등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이번 사태가 자극이 되어 마찬가지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4.4.3. 러시아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독립국가연합에는 이슬람 독재 국가들이 많다. 이곳에도 혁명의 불길이 번진다면 러시아로써도 미국 못지않은 심각한 부담을 가지게 된다. 구소련 붕괴 후 허약화되고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조지아를 무력화하면서 여러 문제점을 다시 드러낸 러시아로서는 더 이상 혁명이 번지지 않기를 바랄 듯.

4.5. 아시아 국가들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막히게 되면 석유 의존도가 높은 한중일 삼국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26] 또한 아프리카 일대에 아시아 자본(정확히는 중국 자본이 더 엄청나다)이 들어오면서 반아시아 감정[27]도 커지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 혁명이 계속 확산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독립국가연합, 동남아 일부 국가에도 영향이 갈 수 있을지도.[28]

4.6. 아프리카

북아프리카 외에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혁명의 여파가 번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가봉으로 야당이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패배한 야당 후보가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 선언을 하였다. 알제리에선 이미 시위가 지속적으로 있는 상황이며 집회가 금지된 리비아에서 반대 시위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튀니지에 이은 이집트의 변화로 아랍-아프리카 지역의 본격적인 도미노 효과가 예상된다.

4.6.1. 소말리아

소말리아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치안 불안과 경제 안정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쪽은 정부다운 정부부터 세우는 게 큰 문제다.

5. 향후 전망

5.1. 국민민주당 계열의 정권 유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퇴진하지만 집권 국민민주당 정권은 존속한다는 시나리오이다. 무바라크가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모아 장렬히 희생하고 국민민주당은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직 군부에는 국민들로부터 호감을 받는 인물도 많으며 야당의 힘이 미약하니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 국민민주당 지도부 상당수가 현재 이러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호스니 무바라크에 대한 분노와 동일시되고 있는 현재 국민들이 과연 대통령 한 명 퇴진한다고 집권 여당을 용서할 것인가? 4.19 혁명 이후로도 자유당은 존속했으나 야당에 처참하게 참패했다. 국민민주당을 위협할 야당의 존재 여부가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결정지을 것이다.

사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 가말 무바라크를 통해 여당을 장악했고 자신의 국정 운영의 도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주요 지배 권력인 군부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카드로 써먹었으므로 무바라크가 하야하고 군부가 정권을 잡고 있는 현재 국민민주당에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4월 18일 국민민주당이 법원 명령으로 해산되면서 국민민주당 계열 정치인들이 정권을 유지할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다.

5.2. 군부의 정권 장악(현실화)

이집트 군부가 보인 정치적인 행위를 볼 때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 슐레이만 부통령을 지지하고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 군부가 무주공산이 된 정부를 장악해 군사 독재를 다시 할 가능성이 높았었다. 이건 역사적으로 전례가 많고 이집트 군부도 정치에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분명 시도는 일어날 것이 확실하다.

이집트 국민들과 정당들 입장으로서는 이런 이집트 군부의 정권 장악 시도를 막아낼 수 있을지가 혁명의 성과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였다. 호스니 무바라크가 실각하기는 했어도 이집트 군부 1952년 7월 23일에 발생한 구데타이후로 정치를 넘어서서 경제, 사회전반에 매우 강력한 권력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집트 군부의 재집권을 막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군부의 정권 장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권에 계속 일정 부분 간섭하는 에르도안집권 이전의 튀르키예, 또는 군부가 사실상 민간정권을 일정 부분 통제하는 파키스탄군처럼 정착되지 않을까하는 예상도 제시되고 있었다.

4.19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기존 정권 교체가 국민들이 직접 시위해서 얻은 결과이고 국민들도 군부의 직접적인 권력 장악에는 부정적이라서 때문에 군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려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개월 후 한다는 총선에서 온 힘을 다 쏟을 것이다.

결국 하원 선거에서 67%를 이슬람 강경 정당들이 차지하자 군부가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대놓고 막지 못하고 부정 선거 논란으로 막으려고 한 결과 민중들 반발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 형제단의 이슬람 극단 정책도 결국 민중들의 반발을 불러와 겨우 1년만인 2013년에 당시 이집트군의 총사령관이자 국방장관이었던 엘 시시의 군사혁명으로 강제퇴진 당하고 만다. 이집트 국민들은 차라리 세속주의만 추구한다면 군부라도 집권하기 원했던지라 국민들은 환영했다. [29]
이후 엘 시시 군부의 수장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2014년 3월 26일에 전역하여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고 요식행위에 가까운 직접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사실상 혁명이 끝난 뒤 2년만에 다시 군사정권이 돌아온 셈.

5.3. 세속주의 야당으로의 정권 전면 교체

미국과 서방 세계,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일 원하는 시나리오. 1987년 대한민국 6월 항쟁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럴 경우 중동의 정세에도 큰 변화가 없게 되며 이집트 내부적으로도 독재도 사라지고 이슬람 원리주의도 없이 정치적 개혁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지도자 및 야당의 부재가 매우 뼈아프다. 6월 항쟁 때는 십수년 간 단련된 운동권과 야당이 쟁쟁했지만 지금의 이집트에는 그런 것이 전무하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국제적으로는 인지도 높은 인물이나 국내 정치적 기반은 전무하다시피 하며 세속주의 야당들도 하도 탄압을 당해서 그 힘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5.4. 무슬림 형제단으로의 정권 교체

미국과 서방 세계, 이스라엘, 터키, 호주 그리고 한국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시나리오.

무슬림 형제단이 높은 지지를 얻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무슬림 형제단도 내부적으로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다. 즉 이란 이슬람 혁명 시즌 2.

이집트가 이란만큼 산유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대신 수에즈 운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국제 유가 및 해운업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유럽 쪽으로 향하는 유조선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비중 때문에 급격한 유가 상승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론 원리주의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현금인출기나 다름없는 수에즈 운하를 당장 폐쇄하진 않겠지만 수수료를 대폭 올린다거나 오일쇼크 때처럼 무기화를 한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집권하면 이집트의 對 이스라엘 정책이 강경일변도로 선회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즉 새로운 중동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아직은 극단주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이집트 시민들도 이슬람 극단적인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지 않다.

큰 갈등을 겪던 무슬림과 콥트신자[30]들임에도 시위에서는 콥트교도들이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지켜주고 있는 일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이 걱정하는 "극단주의" 란 종교 관용이나 여성의 권리 문제를 떠나 이스라엘, 유럽, 미국에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히므로 그런 일이 "극단주의" 성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증거로 보기도 힘들다. 하마스나 헤즈볼라는 심심하면 극단주의자라 불린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늘상 펼치는 식민정책을 "시오니즘 극단주의" 라고 하는 걸 언론에서 자주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결국 12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과 여기보다 더한 살리피스트(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알누르당이 선거에서 높은 지지율로 하원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 군부에서 우려를 표했으나 민중들은 군부가 이렇다고 쿠데타로 덮으면 2차 혁명으로 군부를 덮겠다고 이를 갈기에 군부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무슬림 형제단이 부정 선거로 군부가 막는다고 반발하고 있고 시위대를 사살하면서 다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2012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슬람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 분위기는 껄끄러울 듯. 하지만 무르시는 지나친 이슬람 극단정책만 고집하며 낙하산 인사 등용으로 무능한 이슬람 골통만 쓰다가 경제적으로 말아먹은 탓에 1년만에 민중들 반발로 강제퇴진당한다.

5.5. 내전

시위의 장기화와 무바라크의 고집으로 대두되고 있는 시나리오이자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현재로서도 이집트의 치안은 경찰 조직이 박살나면서 막장이기 때문에 안 좋은 상황인데 친정부 시위대가 반정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이들 친정부 시위대가 아예 무장 조직으로 변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또한 반정부 시위대가 이에 맞서 무장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이집트 군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 만한 유능한 인물이 없고 군부마저 분열한다면 정말 답이 없다.

또한 이렇게 내전으로 나라가 붕괴되면 차후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으며 테러리스트들에게 훌륭한 실전 연습장과 인적, 물적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공급처가 생기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또한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수에즈 운하는 사실상 사용이 어려워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폐쇄될 경우의 정치적/경제적 충격을 생각한다면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수에즈 운하 차지 전쟁을 시행하면 아프간 이라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고 과연 부패한 아프간군이 탈레반을 막을지도 의문이며 탈레반이 파키스탄까지 확장하면 [31] 이것이야말로 서방 미국이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이므로 시행 가능성은 낮다.

6. 기타

파일:이집트 아랍 시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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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항목


[1] 이러한 점은 미얀마 군부와 비슷한 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집트 군부 미얀마 군부와 달리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는 수준의 무능한 정치를 보여주지는 않고 종교적인 세속주의 강력하게 표방하여 힘으로만 민중들을 억압하는 미얀마 군부와 달리 국민들의 지지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2] 그래도 반대표가 10%에 육박하기는 했다. [3] 안와르 사다트는 대이스라엘 강경책을 포기하고 친미 및 이스라엘과의 평화로 정책노선을 변경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분노가 심했다. [4] 천연가스가 꽤 풍부하고 석유도 상당히 나온다. 다만 질이 좋지 않아서 정제된 석유를 역수입해야 한다. 이러니 제아무리 석유 수출해봤자 이득 될게 없다. [5] 왜냐면 이집트가 정치랑 치안이 불안해서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다보니 다국적 기업들 입장에선 공장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 게다가 부패한 행정으로 인해 뇌물 요구까지 극심하며 군대 소속인 국영기업들과 권력층 재벌 기업들의 견제까지 있어서 더욱 공장을 세우기가 싫을수밖에. [6] 이집트의 모든 교통 통신은 국영기업 혹은 권력층이 소유한 재벌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7]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인구 1억이 넘는다. [8] 협의적 정의의 중동권(이라크가 제외됨)에선 이란이 7500만 명, 터키가 7300만 명으로 이집트(8천만 명)와 함께 인구가 꽤 많은 편에 속하며 다른 국가들은 3천만 명을 넘는 곳이 없다. 중동에서 가장 넒은 국토를 가진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2700만 명 정도이다. [9] 물론 이것은 이집트만의 문제가 아닌 다른 중동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지만. [10] 고대 이집트 시절의 인구를 많이 잡아봐야 3~4백만(신왕조 기준) 안팎이었다. 물론 기원전 2천년 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400만이라는 인구를 유지했던 게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11]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러시아 곡물의 가격이 하락했기에 러시아 곡물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흉작으로 인해 곡물의 양이 감소하면서 공급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래서 감당이 안된 러시아는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12] 상당수를 넘어서 아예 대부분을 수입하는 형편이다. [13] 이후 시위대의 중심지이자 해방구로 작용하고 있다. [14]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15] 그러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의 정권 인수 가능성은 낮다. 서방은 그를 지지하고 있으나 정작 엘바라데이는 이집트 내부에 어떠한 정치적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16] 전 육군 중장 및 정보국장이며 이후 중동 중재 외교에서 활약했다. [17] 심지어 총까지 쐈다. [18] KFC는 미국 기업이고 이집트 일반 국민이 먹기에는 비싼 음식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다. [19] 이중에는 경찰의 차량이 시위자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돌진하는 장면도 있다. 모든 시위자가 차를 다 피하지는 못했다. [20] 아무래도 한국의 1960년 4.19 혁명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될 듯 하다. 당시 서울에는 시민들의 거센 시위가 잇따랐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면서 시위대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가 이승만 정부가 시위 해산을 위해 경찰과 정치 깡패들을 동원해 시민들을 구타했지만 오히려 이것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정부가 위기에 직면하자 급기야 미국에서는 이승만에게 압력을 넣어 물러나게 만들었다. 혹시 이집트에서도 경찰과 폭력단이 휘두른 폭력이 문제가 되어 이집트 시민들이 격노하여 무바라크 정권 자체를 끌어내리고 미국이 나중에 그것을 인정할 수도 있다. [21] 카이로 대학의 교수이기도 하다. [22] 참고로 부통령이 새로 임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그가 이집트 정보국(GID)의 국장이였는 데다가 국제 여론에게 비난 받고 있는 비밀 경찰도 그의 아래에 있다고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23] 대략 우리돈 78조원이다. 2011년 우리나라의 1년 예산이 약 309조원이었다. [24] 야당권의 시위 예정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뱌사르 알 아사드의 인기가 높은 편인 데다가 군대가 대통령을 뒷받침하고 있고 복잡한 종교 상황이 단합을 힘들게 하고 있다. 야당은 절멸한 상황. [25] 농담이 아니라 하레디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 특히나 이스라엘군은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돈만 받아먹고 군대도 안 오는 하레디들을 특히 싫어하는 편. [26] 단,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은 페르시아 만 지역의 석유를 주로 수입하는 편이며 이곳은 수에즈 운하와는 크게 상관없다. 대신 수에즈 운하가 막히면 유럽, 북미 지역의 석유 수급이 대단히 불안정해지고 이는 전체적인 유가 폭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27] 중국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다. 한국이나 일본이야 자본을 투자해도 노동력까지 자국민을 보내진 않으나 중국인들이 가서 노동력까지 차지하니 안 그래도 실업자가 남아도는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의 여론은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는 깊어져간다. 문제는 그들에겐 중국인과 한국인, 일본인 구별이 이뤄지지 않고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증오로 깊어져가는 점. [28] 우즈벡 같은 경우는 여전히 독재 정권이 들어서 있고 동남아 국가들은 원리주의 과격파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29] 다만 엘 시시가 집권하면 다시 군사정권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군사정권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싫다고 하는 국민들도 있었다. [30] 이집트의 기독교 종파 [31] 파키스탄은 핵 보유국이다. [32] "실제보다 상황을 부풀리고 거짓말을 하며 청년들을 자극하는 방송 채널이 있다." [33] sexual assault, 벌거벗겨져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34] 유럽계의 혈통이 반영되어 이스라엘인 중에는 흔히 생각하는 백인과 외모적으로 유사한 사람이 많기는 하다. 그렇게 따지면 터키나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이집트 아래동네인 수단에서는 19세기 마흐디 운동 당시 이집트의 튀르크 등 백인계 무슬림들과 서양 기독교도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불신자라며 쳐죽이는 등의 인종적 무지를 보이기도 했다. [35] 한국에서도 월드컵처럼 국가적으로 들뜬 시기에는 흥분한 군중이 여성을 에워싸고 성추행을 저지르는 병크가 종종 보도된 바 있다. 군중심리와 흥분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쉽다. [36] 위에 서술했듯이 성기를 삽입 당하는 강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발가벗겨졌으니(그것도 가해자 다수가 무슬림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성적으로 유린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37] https://youtu.be/bO12X1nhzz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