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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평가/자질/타인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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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3. 다른 정치가들 및 역대 대통령 후보들4. 정당 관계자 및 관료5. 외국 정상들6. 그렇다면 박근혜는?

1. 개요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직후의 인수위 시절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였다. 게다가 박근혜를 뒤에서 조종하며 호가호위하던 최순실이 탄로나면서, 박근혜의 부실한 자질은 봇물처럼 튀어나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지만, 적어도 박근혜만큼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은 없다.

비록 박정희가 악랄한 독재자이지만, 그의 리더십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애초에 20년 이상 장교로 복무하면서 조직을 지휘했던 관록 덕분이었다. 게다가 모든 대통령은 저마다 역경을 이기고 권좌를 차지했다. 지도자의 자격을 본인 스스로 입증했다는 소리다.

2.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2.1. 이승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 나름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담이지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본인을 지도한 사람이 우드로 윌슨이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는 시민을 속이고 도망쳤지만, 사고만 치고 다닌 국방장관 신성모 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도저히 쉴드칠 수 없는 병크를 저지르자 바로 내쫓았다. 어떻게든 전쟁 지도자로서 최소한 밥값을 하려고 뛰어다녔다는 소리다. 또한 미국을 압박하려고, 반공포로 석방같은 도박도 감수했다. 이미 외교정치적 술수는 검증된 셈이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미국을 포섭하려고 정읍발언을 꺼냈고, 미국에 국군 작전권을 일임하여 남북한 문제를 미국의 문제로도 키웠다. 그것 때문에 대한민국과 미국이 어떻게든 서로를 돕도록 했다. 여기서 비롯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제대로 지킨다. 참고로 저 조약은 그때 미국이 엄청 싫어했다. 단지 전쟁이 난다는 것만으로 미국 국회의 의사에 상관없이 미군을 투입하고, 핵우산까지 해줄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독도 동해의 배타적 경계수역에 대한 집착도 엄청나서, 독도 근처로 조업하러 오던 일본 어선들을 발견하는 대로 모조리 나포했었다. 게다가 4.19 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야를 선언하자 중간에 잠깐 사퇴를 거부하긴 했지만 자신이 하야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하야할 정도로 주위 사람의 말은 들을 능력은 있었다.

2.2. 윤보선, 장면

윤보선 영국 유학을 다녀와 독립운동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대운동에 투신했다. 대통령의 업적은 전무해도, 박근혜보다는 유능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이던 제2공화국에서는 장면 내각에게 실권이 몰렸기 때문에, 본인은 거의 아무것도 못했다. 5.16이 터졌을 때, 윤보선은 본인에게 권력이 올 줄 알고, 박정희를 지지했다. 물론 이 사람도 끝내 권좌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장면도 자기 나름대로 유능한 존재다. 박사 학위를 받고, 종교지도자, 외교관, 교육자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주미대사에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니, 능력은 이미 검증된 셈이다.

2.3. 박정희

박근혜의 친아버지인 박정희는 비록 5.16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독재를 휘둘렀으나, 경제 발전, 새마을 운동 등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등 명암이 뚜렷한 인물이다. 박정희가 류태영 박사에게 지시한 새마을 운동은 아웃풋이 꽤 쏠쏠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뽑혔다. 그리고 성공적인 경제 개발 계획 실현,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등 경제 개발에 확실히 기여한 공이 있다. 또 산림 녹화사업도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성공 사례다. 녹화사업의 일부인 그린벨트는, 당시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에서 난개발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 덕분에 북한처럼 숲이 벌거숭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도 국가 경제력이 충분하고 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기 때문에 그린벨트에 대한 논란이 다소 생겼지만, 이 당시에 그린벨트라도 시행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뒤늦게 큰 돈을 들여 막대한 나무심기 사업을 해야됐거나 아예 지금의 북한처럼 키 큰 나무가 없는 민둥산 천지에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한라산이나 지리산, 북한산, 도봉산, 무등산등을 못 봤을지도 모른다.

2.4. 최규하

최규하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외무부장관을 거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임기가 너무 짧고 거의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기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긴 하지만, 적어도 그 전후로의 업적은 있다.

2.5. 전두환, 노태우

전두환, 노태우는 철권통치와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지만, 실책만큼이나 내세울 공적도 있다. 무엇보다도 불법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고 장군 진급까지 해냈고 자기들보다 계급도 높은 선배를 제치기 위해서[1] 목숨을 걸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위험한 작업의 리더를 도맡았을 정도면, 비록 나쁜 방향이긴 했지만 리더십과 배짱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최소한 자신이 직접 리더로서 권좌에 앉을 사람이라, 박근혜처럼 찌질하게 남한테 조종당할 리가 만무하다.

전두환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직접 도맡지 않고 전문가들을 모아서 전적으로 일임했을 정도로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은 있는 편이었으며[2],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경제성장을 했다는 업적을 그나마 내세운다.[3]

노태우도 다른 것은 몰라도 임기 중에 소련, 동유럽, 중국, 베트남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 관계 수립이나 남북 고위급 회담 및 남북 기본합의서 타결을 성사시킨 업적이라도 있다.

2.6. 김영삼, 김대중

김영삼 김대중은 목숨을 걸고 군사 독재정권의 폭거와 탄압에 대항했다.

김영삼은 만 25세에 국회의원이 된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과, 최다선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 있다. 여기서 최연소 기록은 20대 총선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 당시의 김영삼 비록 대통령으로서 평가는 좋지 않지만[4] 적어도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본인이 직접 앞장서서 정면 돌파를 감행했고, 재임 중 대형 참사가 잇달아 터져나왔을 때 본인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민심 수습에 나서는 등 무슨 일이 터지면 참모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서 이미지 관리에만 매달리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차명계좌 등을 완전히 막진 못해 약간 아쉽다는 평은 있긴 해도 대체로 잘 실행된 금융실명제, 김영삼이 아니었으면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하나회 척결 등 긍정적인 업적은 확실하다. 그리고,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제명 파동, 각목 사건, 질산 테러를 비롯한 온갖 탄압을 이겼다. 또한 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이재오, 손학규, 정의화, 안희정을 비롯한 여러 인재를 발굴했는데, 이들은 현재 친노계, 친이계의 및 기타 정치계의 수장 및 중진 역할으로 분류될 정도로 김영삼의 인재 발굴이 이후 정치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김대중은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20대 시절에 이미 향토 기업 대표로 움직였고[5], 40대 후반에 제7대 대통령 후보로 뽑혀서 박정희와 격돌했다. 나중에 유신과 신군부를 물리치고[6],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리고 김대중이 당했던 고난과 역경은 참으로 끔찍했다. 박정희는 해외에서 김대중을 죽이려 들었다.[7] 또한 대통령으로서도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햇볕정책도 평이 갈리지만 남북관계 개선의 시도를 해봤다는 점은 사실이다. 지지율 역시 박근혜와는 천지차이로,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도 20% 밑으로 떨어진 적도 없었다. 퇴임할 당시에는 3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퇴임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이다![8]

2.7.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노무현은 가난한 고졸인데도, 고학으로 어려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부림사건부터 인권 변호사로 움직였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속적으로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이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참으로 파란만장했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온갖 정치적인 역경과 고난을 겪었다. 또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적어도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9] 실제로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노무현을 인성이나 인격이 나쁘다면서 까는 사람은 보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노무현 정신[10]을 이어가는 친노 친문의 정치세력은 오늘날의 민주당계 정당에서 핵심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친노의 정신을 계승한 후계자로 문재인이 19대 대선에서 41.1%의 지지율로 압승을 하고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이뤄내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친노와 친문 세력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그의 정치적 후계자 집단과 전국정당화를 목표로 하는 정치 세력 및 그의 동맹 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의견도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11] 서거 이후 현재까지도 그의 정치적인 사상은 더불어민주당의 구심점이자 핵심목표가 되었다는 것과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신의 계승이라는 강령을 두고 있으며, 친문계의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해찬, 안희정 등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노 직계이며, 정의당 유시민, 천호선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여계로 친노 직계 출신이다. 거기에다가 정세균, 박원순[12] 등도 친노 방계(범 친노계)로 분류되는 등, 현재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대부로서 크게 작용한다.

이명박은 궁핍한 환경에서, 자기 공부만으로[13]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한일수교 반대의 일환인 6.3 항쟁의 주역[14]이었으며, 대기업 새내기 직원에서 출발해서 계열사 대표 자리까지 차지했다. 퇴사한 뒤부터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장까지 거쳤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비록 최근 들어 이명박 본인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및 친 기업적 성향을 비롯한 각종 실책들과 현재 노무현의 긍정적인 평가가 점차 늘어나는 와중에 과거 재임 중 노무현 표적수사 논란 및 노무현의 자살로 인한 서거가 재조명되면서, 친노계 및 진보 계층들이 현재까지도 대부분 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대통령인지라 부정적 평가도 상당하다. 그러나 진보 지지층에서 이명박근혜로 싸잡기는 해도 박근혜와 달리 '무능'한 인물은 절대 아니며, 재임 중 이명박 대통령이 남긴 공적[15] 또한 상당히 많다. 비판하는 측에서도 '유능하지만 부패한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뭔가를 열성적으로 하다가 도중에 문제점이 생겨 그르친 것은 반대로 표현하자면 최소한 계속 발전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도 가난한 극빈층 가정에서 태어나 궁핍한 환경에서 고학을 통해 경희대학교 법률학과에 들어갔으며[16], 유신반대 시위 등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군대 특전사 강제 징집을 겪은 뒤 제대 후 사법시험에 붙는다.[17] 사법연수원 제12기를 차석으로 졸업했으나[18], 시위 전력이 문제가 되어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때에는 그나마 순탄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는데, 격무에 시달리다가 임플란트를 박았다. 실제로 어느 정도 쉬다가, 민정수석비서관을 다시 맡았고, 마침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이후 정당인,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에 안철수와의 갈등으로 인해 국민의당으로 갈라져서 집단으로 탈당을 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사회의 각계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하는 인품과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20대 총선에 출마시켜서 많은 인재들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을 정도로 당 내의 리더십을 크게 인정받았다.[19] 비록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에게 패배했지만[20][21], 대선 패배 이후 4년간 권토중래를 하면서 다시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고,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리하면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 세 사람은 출신 성분이 당시 기준으로도 하류층이었으며, 하류층에서 대통령까지 올라간,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의 대표격이 될 만한 인물이다. 공과에 대한 평이 엇갈릴지언정 지도자의 자질 면에서는 박근혜와 비교 불가.

3. 다른 정치가들 및 역대 대통령 후보들

그리고 대통령뿐만 아니라 현재/과거의 대통령 유력 후보 및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박근혜와 각을 세웠던 타 인물들을 보면, 전부 학업이나 정치적인 업적이 대단하다. 경선에서 낙선한 사람까지 보더라도 박근혜는 이들의 역량에도 한참 못 미친다. 역대 최저 득표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던 전관조차도 오랜 군 생활 끝에 장군[22]까지 올라간 사람이며, 심지어 노동자 출신 후보들도 고학력자는 아니고 고소득 직업자도 아닐지언정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리더십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일반인에 가까움에도 대통령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역대 대선의 유력한 후보들이었던 김종필(13대), 정주영[29], 이종찬, 박찬종[30](이상 14대), 이회창(15, 16대)[31], 권영길(15, 16, 17대), 이인제(15, 17대), 정동영(17대) 등도 마찬가지이며, 이정희(18대)[32]조차도 내세울 커리어가 있고 자기 손으로 책도 쓴다. 재야 운동가 출신인 백기완(13, 14대)도 오랫동안 서슬퍼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온 만큼 민주투사로 인정받았다.

군소 후보들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이다.

4. 정당 관계자 및 관료

더 처참하게도 본인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서청원, 이정현이나 김진태, 최경환, 조원진도 박근혜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 서청원은 한 때 상도동계의 일원으로 김영삼과 동고동락을 했던 인물이고 박근혜보다 훨씬 전에 한나라당 대표직을 수행했었다.
* 이정현은 당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면서도 순수 본인이 발로 뛰고 노력해서 호남에서 두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이것을 발판으로 한때 당 대표를 역임한것만큼은 사실이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최초의 당직자 출신 정당 대표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 김진태도 공안검사일지언정 검사 출신으로 부장검사와 지검장까지 지낸 고위 법조인 출신이다.
* 최경환도 경제를 말아먹어서 그렇지 미국에서 경제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고 각종 요직에서 근무한 경험있는 인물이다.
* 심지어 골수 진박(골박:이 사람은 첫 국회의원 시기부터 친박연대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다.)으로 분류되고, 19대 대선 군소후보로 나온 조원진조차 그가 몸담아온 정치계활동이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도 대우그룹에서도 일을 했다. 무능하고 일을 못했다면 이런 곳에서조차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적으로 해당 인물들이 긍정적 평가를 받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그리고 청와대 최측근인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안종범 김종보다도 무능력하다.

또한 그녀에게 직언하거나 소신 있게 충언한 관료, 쫓겨난 정치인들도 능력이 좋다. 박근혜와는 격이 다르다.

5. 외국 정상들

그 밖에 박근혜 집권 시기에 한반도 주변 4대 강국들을 이끌었던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아베 신조도 욕먹을 점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박근혜만큼 무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만의 총통인 마잉주 차이잉원도 경력과 행정능력이 검증되었고 대만의 외교력와 국방력도 박근혜와 대한민국보다 불리한 핸디캡을 지녔는데도 박근혜처럼 무능하지는 않았다. 둘 다 엘리트에다 법학박사학위를 갗춘 인물들이다. 동시기의 여성 정상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및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지경이며, 그 대선에서 힐러리에게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비록 자신의 회사를 4번이나 파산시키긴 했지만 뛰어난 쇼맨쉽으로 천재적인 방송 진행능력을 보여준 바가 있고, 일이 꼬이기 전까지는 사업감각도 뛰어났다. 하다못해 박근혜에 앞서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도 룰라 정부에서 장관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바 있다.[33] 그렇다면 세습 독재자들과 박근혜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무능할까?

6. 그렇다면 박근혜는?

박근혜는 대단한 부모의 후광을 활용한 선거의 여왕 이미지 이외에는 아무런 능력을 보여준 바가 없다. 그나마도 영남대학교 이사장, 정수장학회 재단 이사장 등의 커리어가 있긴 하지만, 모두 '박정희의 장녀' 라는 지위를 이용해 얻은 자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마저도 실질적인 운영을 최태민이 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이로 인해 자기가 세운 재단에서 쫓겨나는 웃지 못할 일을 겪었다. 다른 대통령들은 그 이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위에 열거된 인물 중에서도 안철수, 유승민, 남경필, 이회창 등은 나름대로 금수저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박근혜와 달리 부모의 후광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 나간 반면에, 박근혜는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명문인 서강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냐 하는 반론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박근혜는 "독재자 부부의 큰딸 박근혜" 로서 서강대학교에 들어갔다. 박근령, 박지만도 사정은 비슷하다. 실제로 박근혜는 서류상의 이력서만 서강대학교일 뿐 실질적인 지적 수준은 중졸 이하이다. 정유라도 2010년대에 온갖 개수작질을 부려서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박근혜 삼남매에게는 이것보다 더한 특혜가 나온 셈이다. 게다가 서강대는 그때 새로 생긴 곳이라서, 지금보다 위상이 한참 낮았다.

설상가상으로 박근혜는 인격마저 매우 불량하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박근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면 된다. 적어도 노무현처럼 눈물을 흘려가며 진심으로[34] 사안의 대처방안을 강구하는 스타일은 아닐지언정, 이명박처럼 차분하게 문제를 풀려고 어느 정도 노력이라도 했다면 이 문제로 욕을 듣지도 않았다. 하다 못해 김영삼처럼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제스처라도 취했다면 국민들도 그 무능을 비판할망정 적어도 인간성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35] 세월호 사고에 대한 박근혜의 대응은 그야말로 직무유기 그 자체였다. 과거 탄핵 당시 실실 비웃었던, 하늘에서 보고 계실 그 분께서 호통 치실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실제로 옆에서 모셔 보니) 대통령이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외부의 조력이 없이는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일부의 주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시크릿 가든 각 회차별 줄거리 공부를 많이 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더라. 하지만, 정홍원 전 총리는 그냥 한때 모셨던 박근혜를 위해 실드를 쳐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근혜와 참모 및 장관들 사이에서는 독대가 거의 없었다고 하며,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던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마저도 독대한 바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제대로 박근혜와 대면했을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36] 따라서, 위와 같은 '실드' 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은 박근혜의 맹목적인 지지자들 중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인 자질이라면, 자신이 가진 배경과 이미지나 후광을 이용하는 능력,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권력 획득 능력 정도다. 정말 박근혜가 정치가로서 자질이 전혀 없었다면, 국회의원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사실상 무패행진을 한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미지 정치라는 비판도 있지만, 국정 능력과는 별개로 이미지 정치 또한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맞긴 하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근데 그것도 그네를 허수아비로 세운 최측근들이 다 해줬겠지. 하지만, 박근혜의 경우는 그 외의 부분에서 죄다 무능한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 정쟁에서 판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능력도 추가될 수 있겠다. 즉, 자신이 위기에 몰리면 똘마니들을 동원한 어거지나 낚시를 통해 다른 정쟁을 야기, "수렁"을 만들어 정치권 전체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몰아가고, 자신은 절제된 언행(사실은 부족한 언변)으로 참모들 뒤에 숨어 "우아한 이미지" 를 유지하면서 위기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데 매우 능하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 시절의 보안법 파동, 사학법 파동, 집권 후에는 NLL 파동, 국정화 교과서 파동,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이정현의 단식, (개헌 낚시를 던져 비박계를 분열시킨) 3차 대국민담화(2016년 11월 29일) 등등이 있다.

또한, 각종 의혹이 터졌을 때 본질을 흐리는 것에도 도가 텄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때는 문건 유출로 초점을 돌려서 여론을 교란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망자를 냈다. 물론 박근혜는 그 틈에 얼른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는 최순실 태블릿 PC의 입수 경위를 문제삼아 증거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해당 PC의 증거 능력을 부인한다. 사실 이는 김기춘의 작품일 가능성이 큰데,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 2017년 1월 14일자 방송을 참고.

이 자질들은 선거에서 이기는 데는 유용했지만, 불행히도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운영하는 데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거기에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판을 유리하게 이끈다거나, 위기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세력들을 수렁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아남는 그야말로 일반인으로서 생각하기에 매우 비도덕적인 방법이며, 무엇보다도 사실상 국정과 관련된 자질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무능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는 것에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영원한 비극이 시작되었다.

채널A 외부자들에서는 박근혜의 정치적인 평가를 하면서 '동물적인 정치적 승부사 기질이 있다.' '선거유세지역 선정이 뛰어났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 최순실, 정윤회가 결정에 관여했을 가능성 커' '참으로 냉혹한 사람' 등 '선거의 여왕' 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했으나 인간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철저하게 자기 혼자밖에 모르고 남의 의견을 듣기를 매우 꺼려하는 성격이다. 물론 반만 맞은 얘기다. 최서원(구 최순실)이 하는 얘기를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다. 외부자들에서 진중권 교수가 했던 표현을 빌리면 이렇다. ("박근혜에게 최순실은 행동의 기준") 실제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사람들의 사유를 살펴보면 가관이다. 문재인, 박원순을 지지했다고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사람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근혜는 많은 사람에게, '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많은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되레 " 내가 블랙리스트가 되는 훈장도 못 달아 자괴감이 느껴진다!" 는 의견까지 피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역사상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암암리에 사실이었으나, 이는 분단국가인 한국의 특성상 종북주의자나 주사파를 걸러내기 위한 반체제 인사 명단일 뿐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닌 타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에 기록하는 것은 헌정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1] 사실 황영시와 유학성 등 전두환의 선배들은 전두환이 하자고 하는대로 군말없이 다 들어준 수준일 정도(...) [2] 이 일화의 당사자인 김재익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경제학 인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웅산 묘소 테러로 인해 사망하자 '아까운 국가 인재를 잃어버렸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3] 물론 전두환 개인만의 업적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이미 박정희가 산업화 시대를 열었고, 많은 변수 덕분에 3저호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4] 김영삼은 박근혜 이전까지만 해도 역대 최악의 대통령 1, 2위를 다툴 정도로 평가가 낮았으나, 박근혜정부 이후로는 김영삼의 비판자들조차 박근혜보다 차라리 김영삼이 훨씬 더 나았다는 데 100% 동의했을 정도로 재평가되었다. 원래 김영삼은 공적을 많이 세웠는데, IMF 하나 때문에 평가가 확 떨어졌을 뿐이다. 후문에서 보다시피 김영삼이 발굴한 인재들이 향후 정계를 휘어잡았다. [5]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이지만 김대중은 정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기업을 경영했다. [6] 가택 연금, 투옥 수준이 아니었다. 납치, 내란음모 조작 사건까지 겪은 사람이다. 특히 신군부가 사형을 선고했을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서독 대통령을 비롯한 정상급 인사가 앞장선 덕분에, 김대중은 겨우 살았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사람들이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을 정도로 이미 거물이 되어있었다는 것. [7] 결과적으로 김대중이 생존했기 때문에 납치사건이 되었다. 시신을 없애려고 바다에서 김대중을 죽이려 들었는데, 미국 정부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계획을 바꾸고 결국 도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 자택 앞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 노벨평화상이라며 폄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받은 사람이 김대중 하나뿐이다. 거기다 노벨평화상이 비록 노벨상 중에서는 가장 논란이 많은 상이긴 하지만, 노벨상 자체의 권위는 이미 하늘을 찌른다. [9]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탈권위주의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과 솔직하고 겸손했던 그의 개인적인 인격만큼은 인정한다. [10] 지역주의를 깨면서 민주당계 정당을 전국정당화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노력이다. [11] 당장 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친노세력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대통령 팬클럽인 만큼 그 지지는 견고하다. [12] 박원순은 문재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로 실제로도 매우 친한 사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변호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시절에 직접 변호인을 맡아서 도와줬던 인연도 있었다. # 또한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 당시, 박원순은 봉하마을로 찾아가서 노무현을 조문하기도 했다. [13] 이명박이 쓴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를 보면, 아침부터 밤까지 장사하다가 늦은 밤에 참고서들을 놓고 공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4] 지식이 본인의 전재산이던 대학생이 절대권력자 박정희에게 항거했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공주처럼 자란 박근혜와 궤를 달리 한다. [15] 대중교통 환승, 청계천, G20 정상회의 개최, 평창올림픽 유치 등. [16] 이마저도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떨어지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경희대학교에 들어갔다. [17] 그때의 사법시험은 뽑는 인원이 적어서 지금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려웠다. [18] 원래는 수석 졸업인데, 시위 전력 때문에 차석으로 강등되었다. [19] 이 때문에 심상정, 유승민 장관설 등 초대 내각과 관련하여 온갖 루머가 난무하였다. 그런데 루머에서 오르내리는 사람은 하나같이 적어도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 개표 조작 의혹이 있다. [21] 국정원이 선거개입한것이 유죄 선고받았고 국정원장이 사과를 했다. 이 사건으로 선거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22] 최종계급 소장 [23] 다만 이건 관련 업계 내에서의 일이지, 일반인 기준으로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의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는 알아도, 박원순이란 이름을 들어봤을 리가... [24]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제5공화국의 귀공자들을 거침없이 수사하고, 법정으로 넘겼다. 슬롯머신 사건에서 노태우 정권의 귀공자 박철언을 구속한 것이 압권이다. 실제로 검사 홍준표는 전설로 남은 존재다. [25] 그러나 능력과 인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특히 19대 대선 출마 시 보궐선거를 막기 위한 꼼수 사퇴 건이 유명하다. 능력과 인품을 갖춘 도지사라면 자신이 근무하던 지역을 위해서 절대 취하지 않을 스탠스이기 때문. 게다가 유세 현장에서 보여준 막말들과, 친박과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이다가 지지율을 위해서 친박마저도 안고 가는 이중적인 행보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듣고 있다. [26] 이 영향인지, 이명박은 노회찬, 심상정과도 인맥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27] 애당초 남경필이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회창의 공천과 연관이 있다. 그럼에도 각을 세웠던 것. [28] 제주도 최초 [29] 1992년에 대선에 나간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 이병철과 함께 당시 한국 재벌의 양대산맥이었으며, 그의 5남도 대권주자로 계속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30] 독불장군적인 행보로 비판을 받지만, 본인은 사법, 행정, 공인회계사 시험을 모두 패스한 먼치킨이다.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31] 만 46세로 최연소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는 전례가 없는 기록을 세웠고, 소신 있는 판결로 신망을 얻었으며, 그 후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로서의 경력도 어마어마하다. [32] 서울대학교 법학과, 사법연수원 제29기를 나온 변호사 출신이다. 비록 통합진보당 관계자였지만 그의 행보로 인해 이석기와는 달리 종북 논란에서 제법 자유로웠다. [33] 브라질은 룰라가 취임하기 전 정치인들, 특히 보수 세력이 상당히 부패해 있었으며, 룰라가 취임한 후 브라질을 남미 강국으로 끌어올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을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4] 태안 기름 유출사고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면 된다. [35] 김영삼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기로 유명했으며 심지어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에 대해서도 "노태우 당신! 그러지 마!" 등 원색적인 표현을 쓸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런 인물조차도 국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때는 숙일 줄 알았다. [36] 박근혜를 수행했던 미용사의 말에 따르면, 해외 순방을 가서도 거의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불 끄는 것 잊지 마세요.' '이제 좀 쉬셔도 됩니다.' 를 제외하고는 아예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수행원들을 부를 때조차 벨을 눌러서 불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