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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의 대통령 이전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다.2. 긍정적 평가
국회의원 재직 당시 한나라당, 새누리당 때 중요한 때마다 당에서 나선 이미지로 정치적 실체가 드러나기 이전까지는 지지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2.1. 광우병 사태 우려 발언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친이계와 친박계의 뿌리깊은 갈등이 숨어 있었으며 사실상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박근혜의 불쾌감을 드러낸 것 뿐이다.[1] 사실 국민의 우려가 걱정되었다면 사실상 이명박 정부 초기 야당의 수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박근혜가 협상 전에 진취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어야 했으나 광우병 협상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은 바로 국민이었다.[2] 당시 박근혜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했을 뿐이며, 시위대의 흐름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다.
2.2. 세종특별자치시 원안 고수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박근혜는 이에 반대하여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하였으며, 결국 이 연설 덕으로 세종시는 행정수도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이 때 박근혜가 행정수도를 옮기기 위한 이유로 국토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수도권 편중화가 심각한 지금의 한국의 실태로 봤을 때, 박근혜가 원안을 고수한 것은 조금이나마 수도권에 인구가 밀집한 현상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박근혜의 국회 활동은 18대 대선에서 충청권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데에 기여를 하였다.[3]
위의 우려 발언과는 다르게 박근혜의 국정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정활동 중 하나. 박근혜가 내세운 수도권 밀집 완화, 정책의 일관성 유지의 필요 등 당위성도 충분했으며, 박근혜가 본인의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저지를 했으며, 친박계와 친이계의 정치 다툼이라는 배경을 떠나서 반드시 했어야 했다는 점 때문에 높이 평가받을 사건이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묻혔다.
3. 부정적 평가
3.1. 의정 활동 부진
3.2. 최태민· 최순실 일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최순실과 비서실장이였던 정윤회, 최태민의 아내이자 최순실의 어머니인 임선이가 박근혜에게 관여 했었고 임선이는 1998년 재보궐, 15대 총선에서 불법 선거 자금를 제공했단 의혹도 있다.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선거의 여왕
박근혜는 98년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들어오고 난 후 본인이 출마한 선거에서는 거의 대부분 당선됐다. 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접전끝에 석패한 것이 유일한 패배였을 뿐이다. 그나마도 당내 경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선거 본선에서 진 적은 없다. 08년 친박계가 대규모로 낙천했을 때인 18대 총선에서도 본인은 당선됐다.당 지도부로서 선거를 이끌 때도 대부분 승리했다. 박근혜가 대구 달성군에만 출마를 했기 때문에 안방 챔피언이라는 평가 절하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 된 이유는 전국 선거에서의 승리이다. 당대표와 비대위로서 총 4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3번 승리를 거뒀으며, 나머지 1번의 패배도 좋지 않은 상황속에서 120석을 지켜내 선방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어서도 20대 총선 전까지는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도 승리를 했다.
17대 총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역풍으로 한나라당의 완패가 예측 됐던 17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대표로서 120석 이상을 얻어 예상 이상의 선방을 해냈다. 천막당사 등 절실한 한나라당의 모습을 어필한 것이 선방의 주요원인으로 분석된다.
2006년 지방선거: 이 선거 때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한나라당에서 개가 후보로 나와도 당선된다." 는 말이 유행햤을 정도였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완승이었다. 선거 운동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선거운동을 완수했다.
19대 총선: 한나라당이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하고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그 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쇄신 끝에 15년만에 당을 새누리당으로, 당색을 빨간색으로 바꾸게 되었다.[4] 말기 여당의 입장에서 비대위원장으로 MB정부의 심판론을 이겨내고 과반의석을 확보했다.[5]
18대 대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였으며,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1대1 맞대결 구도였다.[6] 당시 야당은 정권심판론을 내세웠고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 경제민주화'라는 보수진영에서는 쉽게 던질 수 없던 아젠다를 던지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과거 투표율 70%가 넘으면 진보진영의 후보가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당시 박근혜 후보는 75% 높은 투표율에도 당선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으나 박근혜 개인의 이름을 내건 친박연대와 ' 친박 무소속 연대'가 18대 총선에서 대선전하여 친박연대 14명, 무소속 연대 12~16명[7]이 당선 되었고 특히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득표율은 당시 제3당이었던 자유선진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냈다. 당시 박근혜의 이름값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박근혜 본인이 직접 이끌었던 선거는 모두 승리했다.
4.1.1. 안방 챔피언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설은 출마하는 선거마다 전부 당선되어서 이런 별명이 붙었으나, 박근혜는 5번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 앞의 4회를 오직 달성군 단 한 지역구에서만 출마했다. 그러니까 자기 안방에서만 출마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나마 나머지 한 번도 비례대표로 출마한 것이며 20번까지는 안정권이라는 집권여당에서 11번으로 출마해 당선된 것에 불과하다.다만 전술한 대로 부모의 후광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으로 볼 수 있다는 시선도 있으며 사실상 박근혜는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곁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며 정치 쪽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만큼, 애초에 다른 형제들과는 차별화될 정도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
다만,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을 상대로 박빙의 접전 끝에 당선되었다.
5. 관련 문서
[1]
당시 친박과 친이의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은, 경남 사천시 지역구에서는 친이계
이방호가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자 친박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몰표를 던져 결국 강기갑을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을 정도이다.
[2]
물론 광우병 파동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여론도 상당하다 보니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무리한 비판도 금물이다.
[3]
육영수 전 여사의 고향이 충청권인 것도 생각해볼 점이다.그리고 또한 자기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또한 백지계획이란 이름으로 지금 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바가 있었던 것 또한 생각할 점이다.
[4]
한나라당은 15년동안 썼던 당명으로 6공화국 이후 가장 오랜기간 쓰였다.
[5]
대통령 집권 4 5년차 때가 되면 집권 여당이 대부분 졌다.
[6]
양당 후보가 99.50% 득표율을 기록했다.
[7]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