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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13:14

김대중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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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납치 과정3. 후폭풍4. 박정희의 지시였는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어: 金大中事件(きんだいちゅうじけん / キム・デジュンじけん)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71024231128.930.0.jpg
납치에서 풀려난 후 언론과 인터뷰하는 김대중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듬해인 1973년 8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에게 저지른 납치 살인미수 사건.

대담하게도 일본에 있었던 김대중을 백주에 납치하고 태평양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지만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배의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계획 실행을 포기하고 결국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났다.

2. 납치 과정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의 암살 시도로 여겨지는 교통사고[1]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로 건너가 체류하던 중 같은 달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대로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10월 유신의 내용과 배경을 보면 알겠지만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의 예상 외의 선전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꿈꾼 것도 있었고 헌법 개정에 워낙 초법적인 내용들이 많았던 터라 대한민국에 남았다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서 미국과 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을 대상으로 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개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김대중을 최대 정적이자 위험요소로 여기던 박정희 정권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음은 당연지사였다. 중앙정보부는 당초엔 부인 이희호 여사를 통해 김대중의 국내 정치 활동을 보장할 테니 귀국하라며 설득했지만 "내 손발을 묶어버릴 뻔한 거짓말" 이라며 당연히 거절했고, 결국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을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2] 객실 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인 먼 친척이자 국회의원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기무라 도시오(木村俊夫)[3] #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김대중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4]에 의하여 납치당했다. 괴한들은 마취제를 묻힌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코와 입을 막아 기절시키려고 했지만 마취제의 양이 적었는지 김대중은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고 몽롱한 상태로 어느 정도 의식을 유지한 채 끌려갔다.[5]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 있었다.[6]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일본인 남녀에게 김대중은 일본어로 "助けて(다스케테, 도와주시오)!" 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야쿠자의 싸움인 줄 알고 엮이기 싫다는 생각으로 외면해 버리면서 김대중은 그대로 차량에 태워져 실려갔다.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 소재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536톤 용량의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했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으며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의 바위를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 몸과 함께 묶었다.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훗날 김대중 본인이 여러 차례 기독교 행사에서 간증하기를 배 위에 묶여있던 중 예수가 그의 곁에 나타나는 체험을 했으며, 공포에 질린 김대중은 예수의 소매를 붙잡고 "저는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며 애원했다고 한다. #[7]

당시 CIA는 김대중의 납치 소식을 즉시 파악하고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고자 별도의 액션을 취했다. 이때 주한 미국 대사였던 필립 C. 하비브는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8]에게 "박정희는 김대중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니 그 안에 찾아내도록 하라"며 조언했고 서울에 있었던 그레그 본인도 CIA의 감청 요원으로부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직접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9]

결국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다. 도널드 그레그는 훗날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가 청와대에 직접 찾아갔으며, 박정희에게 "김대중을 죽이면 한미 관계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자 박정희로부터 "(김대중은)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참조[10]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으며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나갔고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 계속하였다. 훗날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비행기가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는 자기가 동북아 과장 시절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을 못 봤다고 일본의 인터뷰에서 증언하였다. 도널드 그레그는 이 비행기에 대해 "미국에서 띄운 걸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증언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용금호를 추격한 항공기가 일본 소속인지 미국 소속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 소속인지는 아직도 불명이다. 일본이 아니라는 주장, 일본 소속이 맞지만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소속의 항공기라서 현재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추측 등 여러 가설이 난무한다.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변하였다. 용금호로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갑자기 김대중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준 뒤 갈증을 호소하는 김대중에게 을 주었다. 김대중을 배에 태운 지 53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때 어떤 젊은 선원이 김대중에게 "당신은 왜 해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이오?"라고 물었고 김대중이 "나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것이지 국가를 반대한 적이 없소."라고 답하자 그 선원이 "정부는 국가나 마찬가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11]

상황을 정리하자면 납치 사건이 터지자마자 CIA 한국 지부에서 즉시 김대중의 위치를 찾아냈고, 이 정보를 입수한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에게 직접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미국 CIA 측에서 연락을 받은 일본 측 항공기로 보이는 무엇이 김대중이 납치되어 있던 선박에 접근하여 경고 비행을 했고, 때마침 한국 측에서 해당 선박으로 연락을 취하게 되어 김대중이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 끝에 김대중을 더 이상 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김대중은 8월 11일 새벽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어느 2층 건물에 있었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15분경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정이나 남산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그들의 소행임을 알아듣게끔 진술했다.[12] 당시 기자회견의 사진과 영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영상을 보면 손발이 묶인 자국과 입술이 터진 자국 등이 선명하게 나온다. 결국 이후락을 위시한 중정은 김대중의 입을 막기 위해 수사를 이유로 김대중의 사저에 기자 및 외부인 접촉을 차단했고 일본에도 수사를 이유로 보낼 수 없다는 방침을 외무차관 윤석헌을 통해 보냈다. 이 조처는 두 달도 넘게 10월 26일까지 지속됐다.

이때 중정의 한 고위 간부가 골머리를 앓던 이후락에게 넌지시 "무슨 일을 그리 서툴게 해서 일을 시끄럽게 키웁니까? 그냥 바다에 확 던져버렸으면 될 것을..."이라고 하자 이후락은 "야! 사람이 사람 잡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라며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이 사건은 중정의 소행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13]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14]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되면서 한일 정기 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 교섭이 취소[15]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16] 방일 등의 합의를 거쳐 사건 발생 86일 만에 종결되었다.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 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고 사과하고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보고 없이 독단적으로 초대형 사고를 쳐놓은 이후락은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거요", "(김종필이 사건 경위에 대해 묻자)난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괜히 덤터기만 쓰고 일본에 싹싹 빌러 가는 신세가 된 김종필은 분통을 터뜨리며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줄담배만 뻑뻑 피우며 타는 속을 달래야 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절충'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다나카 일본 총리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가 1977년 한국 정부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통해 다나카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처음 제기했고 오마이뉴스가 익명의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 인터뷰를 인용해 김대중 사건 직후 조중훈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통령에게 불려간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냈다. 2001년에는 다나카의 측근이라는 기무라 히로야스 전 니가타현 의원이 자신이 박정희의 밀사 이병희 당시 무임소장관과 그가 가져온 4억 엔을 다나카에게 연결해 줬다고 주장하는 글을 일본 잡지 분게이슌슈에 게재했다. 신동아 2001년 2월호의 번역본

3. 후폭풍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은 표면상 '의문의 세력에게 납치당한 자국 국민 김대중'을 위해 수사를 하는 척 하긴 했으나 사실상 수사 은폐로 가닥을 잡고 진행했다. 애초에 경찰이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게 세상 사람들 전부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납치 사건임을 아는 상황이었다. 서슬퍼런 유신 체제에서 대통령 측근을 일개 경찰들이 조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건 발생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긴 했으나 말 그대로 표면적 조치에 불과했다. 수사본부는 아무런 성과 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에 내사 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에 내사 종결하면서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전무했다.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형식상의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사건이 김대중 측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신민당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가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발뺌하긴 했으나 온 국민은 누가 사건의 주동세력인지를 뻔히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유신정권은 욕을 잔뜩 먹었고 결국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73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동맹휴학을 하고 유신반대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유신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시위 주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것으로 맞섰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유신반대운동은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지방까지 번졌고 12월이 되자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함석헌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듬해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령했다. 그리고 그 해 광복절 영부인 육영수가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추가로 북한도 이 사건을 계기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국제적으론 대한민국은 정권안보를 위해서 타국의 주권을 멋대로 침해하는 무자비한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특히 주권을 침해당한 일본의 격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한참 진행 중이던 해양 영유권 협상( 제7광구)에서 일본쪽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결국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 위신에 큰 손상을 가했고 내부에서는 야당과 재야인사, 운동권들을 위시한 민중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면서 유신 정권의 당위성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 김영삼은 그 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며 강력히 규탄했고, 당시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한 문재인도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반대 운동에 투신했다.

4. 박정희의 지시였는가?

이 사건이 '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벌어진 일임은 자명하지만 최종 결정권자가 박정희 본인이었는지는 의혹이 남는다. 이후락이 개입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것이 이후락의 단독 행동이었는지, 최종 결정까지 마친 사안인데 일이 실패하자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박정희 본인은 1974년 12월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 때 자신은 이 사건을 계획하지 않았으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고 그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중정부장직에서 해임했다. 김종필은 1980년 3월 12일 아사히 신문 논설주간에게 이후락이 납치 계획을 세우고 미국 CIA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1980년에 전 국회의원이자 고향 친구인 최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 후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해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현재는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이 전부 고인이라 납치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낼 길은 없다. 그나마 김종필이 직접 인터뷰를 했다. JP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했다고 한다. 결국 JP는 일본까지 직접 가서 사과하게 되었고, 일본행 비행기에서 타는 속을 달래려 재떨이를 4번이나 비울 정도로 담배만 태웠다고 한다.[17] 내용을 보면 이후락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윤필용 사건 때문에 박정희한테 엄청나게 갈굼을 당하자 박정희에게 잘 보여서 만회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박근혜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자기 아버지가 직접 지시한 일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납치사건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는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등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18]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불리던 김영삼은 실질적으로 이 일을 박정희가 저지른 일로 여기고 계속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당장 김영삼 본인도 불과 4년 전에 중정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는 김대중과 갈라서고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에도 이 사건만큼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노린 테러였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서강대학교의 손호철 교수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도 조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중정 측에서 애초에 김대중 의원을 죽이려는 계획도 논의했지만 최종 단계에서는 납치만 하는 것으로 결정났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1] 김대중은 8대 총선 바로 전날인 1971년 5월 24일 신민당의 서울 유세를 지원하고자 전라남도 무안군 국도에서 승용차로 이동하던 중 맞은 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오는 14톤 트럭을 피하려다 언덕 아래로 차량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김대중의 차를 뒤따라오던 택시는 트럭을 피하지 못하고 충돌하여 세 사람이 즉사했고 김대중의 비서들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때 김대중은 무릎을 심하게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사고를 낸 트럭은 바로 뺑소니를 치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사고는 바로 그 해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95만표 차이로 석패하며 박정희를 위협한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중앙정보부의 사실상 첫 번째 암살 시도로 여겨지고 있다. [2] 도쿄도 치요다구 이다바시에 있던 고급호텔로 1972년에 개장했다. 즉, 사건은 개장 1년 6개월 만에 벌어진 셈이다. 여담이지만 이 호텔은 2021년 6월 30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직격탄을 맞아 문을 닫았다. [3] 문세광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일본 외무상이었다. [4] 이 사실 자체가 당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보여주는 요소다. 인종적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작전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당시 경제적 격차가 지금과 비교할 바가 아니고 문화교류도 극히 적었다지만 일본이면 오히려 북한보다 신분을 숨기기 훨씬 쉬운 나라다. 당시 일본에는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김대중의 납치를 저지하려는 양일동과 김경인에게 괴한 중 한 명이 또렷한 한국어로 "시끄럽게 굴면 국제 망신이니 조금만 참고 조용히 있으라. 우린 서울에서 왔다."며 위협한 것이다. 그야말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빼도박도 못할 확인사살 증거다. 거기다 저항하는 김대중에게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죽인다"며 위협하자 김대중은 속으로 분명 재일 한국인의 말투는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한술 더 떠 일당들은 호텔 주차비도 안내고 부랴부랴 튀어 버리는 바람에 주차장 직원이 차 번호를 메모하면서 또 단서를 남기고 말았다. [5] 이것조차도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모습이다. [6]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일부러 북한제 백두산담배를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7] 평소 가톨릭 신자이던 김대중은 납치에서 풀려나 목숨을 건진 것을 계기로 더욱 믿음이 깊어지면서 개신교 신자인 아내 이희호 여사와 함께 종파는 다를지언정 평생 크리스천으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8]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전문가. 40년이 넘는 CIA 요원 생활 대부분을 베트남, 대한민국, 일본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조지 H. W. 부시의 외교 고문을 거쳐서 1989년 주한 미 대사로 부임했다.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을 모아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립해서 활동 중이며 현재도 한미관계, 북핵 등 한반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한미 양국의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천안함 피격 사건이 북한의 어뢰가 아니라 유실 기뢰에 의한 우연한 사고라고 주장하여 음모론자들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9] 그래서 김대중은 1989년 그레그가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될 무렵 "1973년과 1980년에 나를 두 번이나 살려준 점을 깊이 감사한다"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낸 바 있다. [10] 당시 CIA가 따로 움직여서 찾아낸 정보가 김대중은 묶여 있는 채로 대한해협 한복판에 있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였다고 한다. 그 천하의 CIA가 직접 이런 정확한 정보를 들고 체크메이트 외치듯이 터뜨려 버렸으니 당시의 박정희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11] 정부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이 전형적인 독재의 사고방식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선 국가가 존속하는 한 정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12] "매우 훈련이 잘 된 조직", "다음 행동을 알아볼 수 없게 하는 조직" 등등 [13] 지문을 남긴 것 자체도 어리석었지만 더 병맛스러운 건 이 자들이 호텔 주차료도 지불하지 않고 냅다 튀는 바람에 호텔 직원이 그 차량번호를 적어 두었고 추적 결과 요코하마 주재 한국 영사관 소속 차량이었다. 그 차량의 주인이던 주 요코하마 한국 총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은 사건의 주범인 이후락의 조카사위였다. 이후 외교적 비화를 일으킨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 쌍방의 밀사들은 이 일을 은어로 ' 오카네 300엔'이라고 돌려 말했다. 1973년 도쿄에서 장갑 한 켤레 값이 300엔이었는데 현장에서 장갑이라도 끼고 지문을 남기지 않았으면 요원들의 처리가 훨씬 쉬웠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이었다. [14] 자국에 망명 중이던 외국인 인사를 외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멋대로 납치하고 일본 치안당국의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발뺌했으니 일본 입장에선 정당한 국가 주권을 침해당한 게 맞다. [15] 바로 지금까지도 문제로 남아있는 제7광구 시추 건이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국력의 격차 때문에 불리하다고 평가되던 영유권 협상에서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으로 자폭하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동의 없이는 탐사조차 할 수 없다는 독소조항이 포함된 협정이 체결되게 된다. [16] 陳謝, 사태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면서 사과한다는 뜻으로 주로 일본에서 쓰는 말이다. [17] 당시엔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 [18] "김대중 납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 아버지께서는 화난 목소리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아주 못마땅해 하시던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때 아버지는 '북한이 한국 정부를 궁지에 몰려고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19] 안타깝게도 이만섭의 예상과 달리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이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10.26 사건으로 끝났고, 그마저도 웬 빡빡이가 권력을 잡으면서 더욱 길어졌다. [20] 창랑호 납북 사건 이후 김재권으로 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21] 다나카는 금권주의적 정치가였으므로 이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한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22] 한편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북한이 WHO 단독 가입을 위한 대프랑스 외교전의 일환으로 프랑스에서 2억 달러치 건설 장비를 구매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필 국무총리가 에어버스기를 구매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대함 미사일 도입 시도가 대북 견제 필요성과 맞물려 엑조세 및 에어버스기 구입이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 [23] KGB에 포섭된 프락치라는 얘기도 있다. [24] 김대중이 아니라 납치 사건의 주모자 김차운(실존인물인 김동운 1등 서기관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영화 줄거리 소갯글) 역할을 맡았다. 김대중 역할은 최일화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