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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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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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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바이킹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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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
2.1. 구스타브 1세 바사 시대
2.1.1. 즉위와 바사 왕조 창건2.1.2. 내정 정비
2.1.2.1. 스웨덴의 종교 개혁, 루터교 국교화2.1.2.2. 토지 개혁과 세습제의 확립2.1.2.3. 내부 반란 진압
2.1.3. 대외 정책
2.1.3.1. 덴마크 내전 개입2.1.3.2. 러시아와의 전쟁
2.2. 에리크 14세 시대
2.2.1. 즉위와 왕권 강화2.2.2.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과 에리크 14세의 폐위
2.3. 요한 3세 시대
2.3.1. 러시아와의 전쟁2.3.2. 종교문제와 후계자 문제
2.4. 칼 9세 시대
2.4.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과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2.4.1.1. 시기스문드와의 대립
2.4.1.1.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
2.4.1.2.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2.4.1.3. 리보니아 전쟁
2.4.2. 러시아 혼란 시대의 개입
2.4.2.1. 러시아 혼란 시대의 시작2.4.2.2.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
2.4.3.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 시작
2.5.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
2.5.1. 즉위 및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의 종식2.5.2. 군제 개혁과 러시아와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2.5.3. 30년 전쟁 참전과 갑작스런 전사
2.6.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
2.6.1. 30년 전쟁의 계승2.6.2. 덴마크와의 토르스텐손 전쟁 승리2.6.3. 30년 전쟁의 승리2.6.4. 크리스티나 여왕의 퇴위 선언과 망명 생활
2.7. 최전성기(上), 칼 10세
2.7.1. 초기 생애 및 즉위 과정2.7.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동맹2.7.3. 제2차 북방 전쟁
2.7.3.1. 제2차 북방 전쟁의 시작2.7.3.2. 대홍수
2.7.3.2.1. 우이시치에 전투의 승리와 대(大) 폴란드 점령2.7.3.2.2. 바르샤바 함락과 얀 2세 카지미에시의 실롱스크 망명2.7.3.2.3. 리투아니아의 항복2.7.3.2.4.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점령
2.7.3.3. 얀 2세 카지미에시의 재기
2.7.3.3.1. 야스나 구라 수도원 전투의 승리2.7.3.3.2. 티쇼프체 연맹 결성
2.7.3.4. 칼 10세 구스타브의 위기
2.7.3.4.1. 폴란드의 반격과 칼 10세 구스타브의 고립2.7.3.4.2. 칼 10세 구스타브의 포위망 돌파와 바르샤바 상실
2.7.3.5. 전쟁의 확대
2.7.3.5.1. 루스 차르국의 참전2.7.3.5.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본격적인 참전2.7.3.5.3. 라드노트 조약의 체결과 에르데이 공국의 참전2.7.3.5.4.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입과 에르데이 공국의 이탈
2.7.4. 덴마크-스웨덴 전쟁
2.7.4.1. 덴마크의 선전포고2.7.4.2. 스웨덴의 첫 번째 덴마크 공격
2.7.4.2.1. 스웨덴 군의 유틀란트 반도 장악2.7.4.2.2. 빙상도하와 로스킬레 조약 체결
2.7.4.3. 덴마크-스웨덴 전쟁의 재개와 네덜란드의 개입
2.7.4.3.1. 브란덴부르크의 배신과 덴마크-스웨덴 전쟁의 재개2.7.4.3.2. 네덜란드의 개입과 외레순 해전의 패배2.7.4.3.3. 코펜하겐 포위전 실패
2.7.5. 스웨덴의 위기와 제2차 북방전쟁의 종식
2.7.5.1. 스웨덴의 위기
2.7.5.1.1. 폴란드-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반(反) 스웨덴 동맹군의 공세2.7.5.1.2. 덴마크의 반격과 뉘보르 전투의 결정적 승리
2.7.5.2. 제2차 북방 전쟁의 종식
2.7.5.2.1. 칼 10세 구스타브의 갑작스런 사망과 강화 협상의 진행2.7.5.2.2. 올리바 조약의 체결2.7.5.2.3. 코펜하겐 조약과 카르디스 조약
2.8. 최전성기(下), 칼 11세
2.8.1. 즉위와 섭정 시대
2.8.1.1. 섭정단의 구성2.8.1.2. 브레멘 전쟁
2.8.2. 칼 11세의 친정
2.8.2.1.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2.8.2.2. 발트해 제해권 상실
2.8.2.2.1. 보른홀름 해전2.8.2.2.2. 욀란드 해전2.8.2.2.3. 노르웨이의 참전
2.8.2.3. 반격
2.8.2.3.1. 할름슈타드 전투2.8.2.3.2. 룬드 전투2.8.2.3.3. 란스크로나 전투
2.8.2.4. 지속되는 패배
2.8.2.4.1. 묀 해전2.8.2.4.2. 코이에 만 해전2.8.2.4.3. 보후슬렌 상실2.8.2.4.4. 우데발라 전투 패배2.8.2.4.5. 옘틀란드 일시 상실
2.8.2.5. 포메라이나 상실2.8.2.6. 전쟁의 종식
2.8.2.6.1. 생제르맹앙레 조약 및 퐁텐블로 조약의 체결2.8.2.6.2. 룬드 조약의 체결
2.8.3. 재건과 개혁 정책2.8.4. 급작스런 사망

1. 개요

스웨덴어 Vasaätten
폴란드어 Wazowie
리투아니아어 Vazos
영어 House of Vasa

1523년 ~ 1654년간 스웨덴 왕국, 1587년 ~ 1668년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다스린 왕가. 이 문서에서는 주로 스웨덴의 바사 왕조를 다루고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바사 왕조에 대해서는 한때 동군연합을 이루었던 지그문트 3세 바사 (시기스문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문서를 참고할 것.

2. 설명

2.1. 구스타브 1세 바사 시대

2.1.1. 즉위와 바사 왕조 창건

AD 1397년 덴마크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지배하는 형태로 형성된 3개국 연맹체인 칼마르 동맹은 120년간 존속되었지만 덴마크 지배에 대한 스웨덴의 항거가 계속되면서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독립전쟁을 주도했던 스웨덴 귀족 가문 출신의 구스타브 1세 바사가 AD 1523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면서 바사 왕조의 스웨덴 지배가 시작되었다. 덴마크에서도 같은 해 반란이 일어나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되고 대신에 그의 숙부인 프레데리크 1세가 즉위하면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프레데리크 1세와 반(反) 크리스티안 2세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지위가 안정될 수 있었지만 칼마르 동맹 기간 스웨덴의 섭정을 했던 스투레 가문에서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스웨덴 독립전쟁 중 많은 지원을 받는 대신에 특권을 인정해줘야 했던 북독일의 뤼베크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등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초기 왕권은 불안정했다.

2.1.2. 내정 정비

2.1.2.1. 스웨덴의 종교 개혁, 루터교 국교화
초기에 구스타브 1세 바사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로마 교황청과의 대립이었다. 본래 왕실 대법관이었던 웁살라 대주교 구스타브 트롤레가 그동안 덴마크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웁살라 대주교로 몬손 망누스를 임명하고자 했지만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었다. 또한 서로 다른 이유로 스웨덴의 4개의 주교직이 공석이 되었는데 구스타브 1세 바사가 후보자를 추천했지만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 중 단 1명만 승인하였다. 비록 로마교황청과의 대립은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바로 AD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문제삼으며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을 계기로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촉발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마르틴 루터의 제자인 울라우스 페트리의 루터교 포교를 지원하였다.

사실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종교 개혁은 단순한 종교만 문제 때문에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은 열악했지만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는 스웨덴 전체 토지 수입의 5분의 1을 가져가고 있었고 면세 특권까지 지니고 있었다. 또한 중세 시대의 주교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관료였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로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AD 1527년 베스테로스 의회에서 상공인, 농민, 일부 귀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주교에 대한 임명권과 교회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웨덴 독립전쟁을 주도하며 많은 신망을 쌓았던 로마카톨릭의 린셰핑 주교인 한스 브라스크도 망명을 떠나면서 더이상 스웨덴에 로마카톨릭의 유지를 주장할 만한 세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

AD 1531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울라우스 페트리의 동생인 라우렌티우스 페트리를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루터교회 웁살라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스웨덴은 완전히 로마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다만 이후에도 곧바로 스웨덴에 루터교가 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울라우스 페트리와 라우렌티우스 페트리 형제는 스톡홀름을 이외에 스웨덴 나머지 지역에도 루터교의 전파에 힘썼고 AD 1541년에는 성경을 스웨덴어로 번역한 이른바 '구스타브 바사의 성경(Gustav Vasas bibel)'을 출판하였다. 최종적으로 AD 1544년 루터교가 스웨덴의 국교로 선포되었고 AD 1554년 핀란드의 오보 주교인 마르틴 쉬테가 사망하자 미카엘 아그리콜라를 신임 오보 주교로 임명하여 핀란드의 종교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2.1.2.2. 토지 개혁과 세습제의 확립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종교 개혁과 함께 토지 개혁도 추진하였는데, 스투레 가문의 섭정 시절에 중심부를 직할 영지로 변경하고 매년 직접 세금을 징수하여 왕실 재정을 개선시켰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면서 왕실 영지를 더욱 확대시켰다. 스웨덴의 전 국토는 크게 조세 농경지, 왕실 영지, 사유지[1]의 셋으로 구분되었고 조세 농경지에는 직접 조세관을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치세 말기가 되면 스웨덴과 핀란드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모두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귀족 세력들을 힘으로 누르거나 몰수한 교회 재산을 분배해주는 조건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왕권을 강화되면서 스웨덴은 강력한 군주제 국가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세습제의 확립이었다. 본래 스웨덴의 왕위 계승방식은 공식적으로 선출제에 속했으나 구스타브 1세 바사는 AD 1544년 배스테로스 의회에서 각 신분 계급의 대표로부터 장차 왕위를 장자에게 세습하도록 하는 왕위계승법을 제출하였다. 이미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한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감히 맞설만한 귀족 세력이 없었고 나머지 신분 계급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왕위계승법이 무난하게 통과하였다. 그 덕분에 바사 왕가가 이제 합법적으로 스웨덴 왕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다.
2.1.2.3. 내부 반란 진압
구스타브 1세 바사가 펼친 왕권 강화와 종교 개혁 정책은 스웨덴의 곳곳에서 많은 반발을 샀다. 그러던 중 AD 1529년 4월 니달라에 파견된 조세관이 살해당하고 얼마 후에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 바사가 독일을 방문한 후 귀국하다가 스몰란드의 옌셰핑에서 억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예틀란드의 유력 귀족인 투레 옌손이 스카라 주교 망누스 하랄드손과 함께 농민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한때 베스테르예틀란드와 스몰란드를 장악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인접한 외스테르예틀란드가 반란에 동참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조세관 살해사건을 용서해주는 조건은 여동생 마르가레타가 석방되도록 만들었다. 이후 농민들이 반란을 용서받는 대가로 반란의 주모자인 투레 옌손과 망누스 하랄드손을 구스타브 1세 바사에게 넘기려 했기 때문에 둘이 덴마크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반란에 동참했던 귀족들 몇 명이 처형당하면서 반란이 종식되었다.

구스타브 1세 바사가 겪은 반란 중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스웨덴 독립전쟁 중 자신의 거병에 가장 먼저 동참했던 달라르나의 반란이었다. 달라르나 사람들은 막상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왕으로 즉위한 후 펼친 친(親) 덴마크 성향의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지나치고 그의 종교 개혁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재위 초기 10년 동안 3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AD 1532년 폐위된 채 재기를 노리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달라르나의 반란을 이용하여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까지 벌였지만 도중에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1세에게 붙잡혀 여생을 갇혀 지내게 된다.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AD 1533년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달라르나에서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구스타브 1세 바사에 대한 마지막 반란은 AD 1542년 스몰란드에서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중과세를 부과하고 종교 개혁을 추진하며 교회의 종과 물품을 압수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몰란드 농민들이 닐스 다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닐스 다케가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전제군주제와 종교 개혁을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제법 큰 세력이 되었다. 반란이 수개월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달라르마에 편지를 보내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반란군 토벌을 위한 군사 모집을 호소하였고 이 내용을 스웨덴 전역에 전파시켰다. 이것이 효과를 거두면서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독일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도 토벌군을 모집할 수 있었고 AD 1543년 봄 스몰란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 반란의 주동자인 닐스 다케를 처형하고 사지를 잘라 전국에 전시하도록 했다.

2.1.3. 대외 정책

2.1.3.1. 덴마크 내전 개입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 독립전쟁 당시 스톡홀름을 공격하기 위해서 해군이 필요해지자 북독일의 뤼베크와 협상을 벌여 한자동맹의 해군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상당한 특권을 허용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AD 1533년 덴마크에서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인 크리스티안 3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가 루터교 신자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세력이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요구하는 반란인 '백작 전쟁(Grevens Fejde)'이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이를 뤼베크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좋은 기회로 여기고 크리스티안 3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 단순히 뤼베크를 견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차 크리스티안 2세가 덴마크 왕위를 되찾은 이후 스웨덴 왕위까지 노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위함이기도 했다.

AD 1535년 스웨덴 해군이 릴라벨트 해전에서 한자 동맹의 해군을 격파했고 스웨덴 육군 스코네를 점령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요한 란차우를 중심으로 한 덴마크의 유틀란트 귀족들과 스웨덴의 지원을 바탕으로 유틀란트 반도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토페르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듬해인 AD 1536년 코펜하겐을 함락하고 덴마크 전역에서 왕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백작 전쟁에서 뤼베크가 패배하면서 그동안 뤼베크가 지니고 있었던 발트 해 무역에 관한 특권이 모두 취소되었고 그동안 스웨덴이 뤼베크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채무에 대한 변제 조건도 스웨덴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그리고 AD 1541년 브룀세브루 조약을 체결되면서 덴마크와 스웨덴이 동맹관계가 되었다.
2.1.3.2. 러시아와의 전쟁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또다른 대외 전쟁은 AD 1554년 러시아의 루스 차르국과 벌인 것이었다. 당시 루스 차르국은 AD 1547년 '뇌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반 4세 차르를 자처하며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는데 이반 4세는 차르인 자신과 국왕인 구스타브 1세 바사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외교적 긴장 상태에서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은 서로 간의 경계인 핀란드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었는데 AD 1555년 핀란드 주둔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스웨덴으로부터 증원받은 핀란드 주둔군이 오레셰크[2] 요새를 공격하였지만 러시아군이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며 버티자 보급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했다. 이듬해인 AD 1556년 루스 차르국이 반격에 나서서 비보리를 공격하는 척 했지만 전염병 때문에 철수했고 전황이 지지부진해지자 AD 1557년 노브고로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2. 에리크 14세 시대

2.2.1. 즉위와 왕권 강화

AD 1556년 구스타브 1세는 왕세자인 에리크 14세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영지 배분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차남 요한은 핀란드 공작으로, 3남 망누스는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으로, 막내 은 쇠데르만란드 공작으로 각각 임명되었지만 4남 칼과 5남인 스텐은 요절했기 때문에 영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장남인 에리크 14세만이 첫번째 왕비인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의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두번째 왕비인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차남인 요한이 둘째 왕비의 장남으로서 이복형인 에리크 14세와 자주 충돌했다. 이에 대한 근심 속에서 AD 1560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에리크 14세가 웁살라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고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초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배하면서 독립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왕권을 대행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에리크 14세가 AD 1561년 아르보가 법령을 통과시켜 이복 동생들의 독립적인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다. 또한 AD 1562년 오랫동안 자신에게 맞섰던 이복 동생인 핀란드 공작 요한이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누이인 카타지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AD 1563년 요한과 카타지나 부부를 감옥에 가둔 후 그의 영지인 핀란드를 몰수했다. 또한 에리크 14세는 스웨덴의 군사력 강화에 특히 힘을 써서 AD 1562년에는 귀족의 군사적 의무사항을 규정한 새 법률을 제정했고 해군도 육성하여 장차 스웨덴이 발트 해의 해상 강국이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2.2.2.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과 에리크 14세의 폐위

AD 1561년 리보니아 기사단령이었던 리보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복속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에 외젤-비크를 차지하고 있던 덴마크에서 리보니아 북부도 노리기 시작했으나 에리크 14세가 인접한 핀란드를 통해 먼저 병력을 투입하여 리보니아 북부를 차지한 후 ' 에스토니아 공국'으로 재편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가 AD 1563년 5월에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인 보른홀름 해전을 이유로 8월 13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해오면서 '북방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는 스웨덴이 유리하고 육지에서는 덴마크가 유리하게 흘러가며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에리크 14세는 즉위 초부터 정신적으로 불안했는데 점차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에리크 14세는 자신의 전제군주제와 덴마크 전쟁으로 때문에 내부 불만이 고조되자 반란이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급기야는 AD 1567년 스투레 가문의 스반테 스투레와 그의 아들인 닐스, 에리크를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스투레 가문은 칼마르 동맹 시절 섭정을 잇달아 배출한 만큼 스웨덴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했는데 실제로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에도 스투레 가문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리크 14세는 재판 도중에 정신 착란을 일으켜 그대로 처형해 버렸다. 비록 제정신이 돌아온 에리크 14세가 후회하며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지만 스웨덴 귀족들은 더이상 에리크 14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AD 1568년에도 에리크 14세의 기행은 계속되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출신의 카린 몬스도테르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에리크 14세가 명망있는 스투레 가문은 박해하고 미천한 신분의 왕비를 맞아들인 것에 대하여 혈통을 중시하는 스웨덴 귀족들은 분노했고 전년도에 석방되었던 에리크 14세의 동생인 요한이 다른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참했다. 결국 에리크 14세는 폐위된 채 요한이 스웨덴 왕 요한 3세로 즉위했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에리크 14세는 AD 1577년 사망하고 같은 해 에리크 14세의 후손들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박탈되었다.

2.3. 요한 3세 시대

2.3.1. 러시아와의 전쟁

비록 AD 1570년 요한 3세가 슈테틴 조약을 체결하면서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을 종식되었지만 같은 해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그문트 2세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제는 에스토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리보니아를 둘러싼 전쟁이 재개되었다. 더욱이 외젤-비크 주교가 되었던 덴마크의 망누스가 이반 4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리보니아 왕이 되면서 에스토니아가 협공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 전황은 스웨덴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렇지만 에스토니아의 중심도시인 레발(지금의 탈린)이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AD 1574년 총사령관을 폰투스 드 라 가르디로 교체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편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고 있었던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가 AD 1569년 7월 두 나라를 병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탄생했다. 그러나 AD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계승은 선출제로 변경됐고 AD 1576년 트란실바니아 공작 바토리 이슈트반이 새로운 군주로 " 스테판 바토리"라는 이름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테판 바토리는 AD 1579년부터 AD 1581년까지 리보니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전황이 역전되었고 그 틈을 타고 스웨덴도 나르바를 차지했다. 결국 AD 1582년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강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듬해 스웨덴도 러시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며 에스토니아와 나르바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대신에 스웨덴이 발트해 동부 연안을 장악한 채 러시아와 연결되는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게 된다.

2.3.2. 종교문제와 후계자 문제

요한 3세는 스스로가 유능한 신학자이기도 했는데 로마가톨릭과 루터교의 화해를 위해서 AD 1577년 예식서 '레드북(Rödboken)'을 직접 저술하여 로마카톨릭 예식을 일부 부활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많은 루터교 신자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요한 3세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그 중심에 섰다.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레드북을 거부하고 박해받는 루터교 신자들을 자신의 영지에 숨겨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AD 1592년 요한 3세의 임종을 맞이하면서 형제 간의 대결은 벌어지지 않았다.

요한 3세는 폴란드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한 후 얻은 아들인 시기스문드를 카타지나의 의견에 따라 로마가톨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기스문드가 모계 혈통으로 야기에우워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AD 1586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새로운 군주로 선출되어 지그문트 3세 바사로 즉위했다. 그리고 AD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었으나 그가 로마카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기스문드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 간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2.4. 칼 9세 시대

2.4.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과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2.4.1.1. 시기스문드와의 대립
AD 1592년 요한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시기스문드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가 로마가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스웨덴의 평의회가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스문드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AD 1593년 웁살라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루터교회가 스웨덴의 국교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스웨덴 안에서 다른 종교의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선언했다. 웁살라 종교회의의 결정이 국왕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시기스문드가 스웨덴에 체류하기 위해서는 로마카톨릭 의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시기스문드가 반발했고 국왕인 자신도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시기스문드는 폴란드 호위병으로 대동하고 스톡홀름에 도착한 후 몇 개의 교회에서 여전히 로마카톨릭식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AD 1594년 시기스문드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웁살라에 도착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계급 대표들의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웁살라 종교회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시기스문드를 압박하였다. 결국 시기스문드도 웁살라 종교 회의의 결정 사항을 수용해야 했지만 정작 대관식을 치르고 스톡홀름에 돌아오자 계속해서 로마카톨릭 예배를 하고 로마카톨릭 신자를 정부 요직에 배치했다.

시기스문드는 폴란드로 돌아가면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스웨덴 귀족들로 구성된 추밀원(Privy Council)과 함께 스웨덴을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인 권한을 명시하지 않은 채 오히려 각 지방에 자신의 직속 관리와 조세 징수관을 파견하는 방법으로 통치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통치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자신을 섭정 임명을 요구했지만 섭정의 권한에 대해서는 귀족들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5년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를 통해 섭정으로 임명받고 시기스문드의 부재시 국왕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쇠데르셰핑 신분제 의회 결정에 대하여 이번에도 시기스문드는 국왕인 자신의 승인없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불법으로 규정했다. 스웨덴 귀족들 역시 자신들은 국왕인 시기스문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했다며 협조를 거부했다. 이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신분제 의회의 결정사항이 더 우위에 있음을 내세워 귀족들의 반대를 억눌렀다. 또한 시기스문드로부터 임명받아 스웨덴 해군을 총괄하고 있던 핀란드-에스토니아의 클라우스 플레임이 복종을 거부하자 AD 1596년 핀란드의 외스테르보텐 농민들을 사주하여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비록 클라우스 플레임이 봉기를 진압하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제 스웨덴이 국왕인 시기스문드와 섭정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두 편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웨덴 귀족들이 시기스문드의 편에 섰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AD 1597년 재차 아드보가에서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여기에 단 1명의 스웨덴 귀족만이 참석했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분노하자 이에 겁을 먹은 수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폴란드로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고 클라우스 플레밍의 미망인인 에바 스텐보크가 차지한 오보까지 함락시키며 핀란드까지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2.4.1.1.1. 반(反) 시기스문드 전쟁
AD 1598년이 되자 시기스문드가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시기스문드는 독일과 헝가리에서 용병을 모으고 AD 1598년 2월 리보니아 출신의 위르겐 폰 파렌스바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스웨덴을 침공하고자 했으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수송선 확보에 애를 먹고 날씨까지 좋지 않아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 사이 시기스문드에게 호응하여 일어난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핀란드 반란군이 먼저 우플란드에 상륙했지만 우플란드 농민군에게 격퇴당했다. 그러나 AD 1598년 5월 폴란드 군이 아바스케르에 상륙하여 8월 칼마르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시기스문드가 예틀란드로 진격하자 예틀란드 귀족들과 장교들이 합류했고 우플란드 기병대도 도착했으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도 증원군이 도착했다.

시기스문드가 수도인 스톡홀름까지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하지만 폴란드 함대는 폭풍우를 만나는 불운을 겪으며 괴멸되고 말았다. 이제 시기스문드가 오히려 스웨덴 내에서 역으로 포위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린셰핑으로 이동해 시기스문드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기스문드와의 협상을 병행하여 진행했지만 오히려 AD 1598년 9월 8일 스테예보리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때 시기스문드를 지원하기 위해서 폴란드에게 증원군을 소집되고 있었기 때문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절망에 빠져 잠시 망명까지 고민했지만 측근들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전황이 여러모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불리했지만 아직까지 그에게는 해군이 건제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요아킴 셸이 이끄는 스웨덴 해군이 시기스문드에게 합류하려던 폴란드 증원군을 차단하고 오히려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 병력을 충원시켜 주는데 성공했다. 이제 위기의식을 느낀 시기스문드가 린셰핑으로 후퇴하자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이를 뒤쫓았고 AD 1598년 9월 25일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완전히 우위를 점하게 된 상태에서 린셰핑에서 시기스문드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2.4.1.2. 칼 9세의 스웨덴 왕 즉위
이후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시기스문드에게 폴란드 군을 돌려보내고 시기스문드만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스웨덴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그리고 비록 시기스문드는 여전히 스웨덴 국왕으로서의 대우는 받았지만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AD 1598년말 폴란드로 도망치듯이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스웨덴 왕위가 공석이 되었고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스웨덴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AD 1599년부터 칼이 반대파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하여 우선 린셰핑 조약이 체결될 때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야코브 네프가 달라르나에서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사생아인 칼 칼손 옐렌히엘름에게 토벌당했다. 또한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웁살라 대주교 아브라함 앙에르마누스를 투옥시켰고 여전히 시기스문드를 지지하던 칼마르를 공격했으며 수개월 간의 공선전 끝에 5월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스웨덴 의회가 시기스문드의 공식적인 폐위를 선언하고 그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스웨덴에서 루터교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조건으로만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와 별도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시기스문드의 편으로 남아있던 핀란드의 요새들을 공격하여 AD 1599년 8월 모두 제압했다. 그리고 11월 포로로 붙잡혔던 핀란드의 시기스문드 지지파를 모두 처형하는 '오보 대학살(Åbo Bloodbath)'을 일으켰다. 그리고 AD 1600년 2월 스웨덴 의회는 시기스문드에게 보냈던 최후통첩의 시한이 종료될 때까지 별다른 회신을 받지 못하자 그대로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새로운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인정했다. 이후 칼 9세는 3월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던 스웨덴 귀족 5명을 처형하는 '린셰핑 학살(Linköping Bloodbath)'을 다시한번 일으키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제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만이 유일하게 시기스문드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시기스문드와 다시 벌여야 했다.
2.4.1.3. 리보니아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의 탈환을 원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sejm; 의회)의 지원을 얻기 힘들자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지지하는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AD 1600년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가 파견하여 몇차례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재정 부족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에 스웨덴은 국지전의 연패에도 불구하고 징집제를 통해서 많은 군대를 단시간에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에스토니아를 넘어서 이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인 리보니아까지 넘볼 정도가 되었다.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도 병력 증원을 결정하였고 AD 1601년 오스만 제국 몰다비아 공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야전 헤트만인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리보니아에 도착하여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와 합류하였다. 비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3,000명에 불과했고 스웨덴 군은 5,000명에 그 중 기병만 4,000기에 달했지만 AD 1601년 6월 23일 코켄하우젠 전투에서 오히려 스웨덴군이 후사리아를 중심으로 한 1,000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코켄하우젠 전투 이후에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 얀 자모이스키까지 합류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에 스웨덴은 AD 1602년이 되면 그동안 점령했던 리보니아 영토를 대부분 내주며 레발, 페르나우, 하프살, 도르파트 정도만 겨우 유지할 뿐이었다. 비록 60세의 고령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폴란드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AD 1603년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스웨덴군을 격파하고 도르파트까지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칼 9세가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리가에 도착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다시한번 승리를 거두면서 스웨덴의 발트해 영토는 더욱 축소됐다.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이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거절했지만 스웨덴 의회는 AD 1605년 병력 증원을 결의했다.

이에 칼 9세가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AD 1605년 9월 키르홀름[3]에서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보유 병력이 3,600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윙드 훗사르에게 고전했던 경험 때문에 7~8열의 격자 진형을 편성하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작전을 펼쳤다. 그렇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4시간에 걸쳐 거짓 후퇴로 유인하자 신중했던 칼 9세도 추격을 시작했으나 정작 전투가 개시되자 불과 30분 만에 스웨덴 기병이 윙드 훗사르를 위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병대에게 괴멸당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 군은 8,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고 칼 9세도 겨우 목숨만 구한 채 정신없이 도망쳤을 정도로 일방적인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실의에 잠긴 칼 9세가 리가 탈환을 포기한 채 스웨덴으로 귀국했지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키르홀름 전투의 경의로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재정 부족 때문에 라트갈레(현 라트비아의 동쪽) 지역에서 방어적인 자세만 유지했다. 더구나 AD 1606년 폴란드에서 지그문트 3세의 지나친 왕권 강화에 대항하는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도 폴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AD 1608년 요하임 프레데리크 폰 만스펠드가 새로운 스웨덴 군을 이끌고 리보니아를 재침공했으나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되돌아오면서 10월 가우야 강 전투에서 다시한번 패배를 당했다. 이후에도 전쟁은 이어지지만 국지전에 불과했고 AD 1611년 칼 9세가 사망하면서 공식적인 휴전이 이루어진다.

2.4.2. 러시아 혼란 시대의 개입

2.4.2.1. 러시아 혼란 시대의 시작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AD 1584년 뇌제 이반 4세가 사망하고 AD 1598년 그의 아들인 표도르 1세마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표트르 1세의 처남이자 실권자였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즉위했으나 이반 4세의 요절한 막내 아들인 드미트리가 어딘 가에서 살아있다는 소문에 근거하여 AD 1601년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초기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했지만 AD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사망하자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던 러시아 귀족들이 가짜 드미트리 반란군과 합세하여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인 표도르 2세를 살해하고 가짜 드미트리를 차르로 옹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짜 드미트리까지 살해하고 유력 귀족인 바실리 슈이스키가 새로운 차르가 되었다.
2.4.2.2.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
바실리 4세 슈이스키가 이제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AD 1607년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두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였으나 츠시노에서 자신만의 정부를 구성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정부의 힘이 약화되자 러시아 북부도 바실리 4세 슈이스키의 통치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에 궁지에 몰린 바실리 4세 슈이스키가 스웨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칼 9세도 자신의 아들인 구스타브 아돌프나 칼 필리프를 러시아 차르로 즉위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군사 지원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지그문트 3세를 자극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본격적인 군사 개입을 초래하여 스몰렌스크가 포위되었고 AD 1610년 6월 클루쉬노 전투에서 러시아-스웨덴 동맹군이 패배하였다.

이제 바실리 4세 슈이스키는 더욱 궁지에 몰렸고 급기야는 러시아 귀족 의회인 두마(Duma)가 바실리 4세 슈이스키를 결정하고 지그문트 3세의 맏아들인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즉위시키겠다고 결정하였다. 다만 지그문트 3세가 두마에서 요구한 브와디스와프의 러시아 정교회 개종과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 보장, 점령 지역 반환 요구를 거절했고 모스크바에 입성한 후 러시아 귀족들에게 브와디스와프는 물론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지그문트 3세는 모스크바에 소수의 군대만 남긴 채 브와디스와프를 데리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다만 AD 1611년 6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이 20개월 간이나 버티던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사이 칼 9세도 지그문트 3세가 모스크바를 장악한 것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파견했던 야코브 드 라 가르디에게 러시아 북서부의 대도시인 노브고로드를 점령하도록 했다. 그리고 노브고로드에서 러시아의 보야르(boyar; 대귀족)와 성직자, 상인과 도시의 자유민이 모두 참여하는 신분제 회의인 젬스키 소보르(zemskii sobor; 전국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혹은 칼 필리프 중 한 명을 러시아 차르로 선출시키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AD 1611년 4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국경 지역의 칼마르를 공격해 왔기 때문에 더이상 러시아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스몰렌스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점령된 데 이어서 노브고로드까지 스웨덴에게 함락당하자 큰 위기 의식을 느끼고 '국민군'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AD 1610년의 제1차 국민군은 실패했지만 제2차 국민군은 AD 1612년 9월 폴란드 군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AD 1613년 2월 젬스키 소보르를 개최하여 이반 4세의 첫번째 왕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의 친정이자 러시아의 명문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인 미하일 1세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AD 1598년부터 15년간 이뤄진 ' 혼란 시대'의 혼란이 비로소 종식되고 새로운 로마노프 왕조의 지배를 받는 러시아 제이 등장하게 되었다.

2.4.3.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 시작

한편 스웨덴이 발트 해에서 북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덴마크의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덴마크에게 많은 통행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이에 칼 9세는 사람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부인 라플란드를 통하는 북해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고 AD 1607년에는 스스로를 "노르드란드의 라프족의 왕"이라고 선언까지 하였다. 그러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로서는 스웨덴의 대체 항로 개쳑을 좌시하기 힘들었고 더욱이 이를 자신이 왕위를 겸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영토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더욱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웨덴의 칼 9세가 계속해서 자신의 항의를 무시하자 AD 1611년 4월 선전포고를 하고 '칼마르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크리스티안 4세 직접 6,000명의 덴마크 군을 이끌고 5월 26일 전쟁의 이름이 유래한 칼마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칼 9세도 반격을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기병대를 이끌고 크리스티아노펠 전투에서 덴마크 기병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칼마르 탈환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AD 1611년 여름 발트자르 백의 스웨덴 군이 노르웨이의 옘틀란드와 헤리에달렌로 향하여 무혈입성하는 데 성공했으나 노르웨이군의 반격을 받으면서 AD 1612년 가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AD 1611년 겨울이 다가오자 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는데 AD 1611년 10월 20일 칼 9세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17세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면서 칼마르 전쟁을 함께 이어받게 되었다.

2.5.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

2.5.1. 즉위 및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의 종식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즉위 이후 강화 제의를 했으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로부터 거절당했다. 오히려 크리스티안 4세가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역에 군대를 더욱 증강시켰기 때문에 대하여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국경 지역을 습격했지만 AD 1612년 2월 11일 빗셰 전투에서 덴마크 군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덴마크 군이 스웨덴 공격을 재개하여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함락시키고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으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초토화 작전와 보급선을 교란하는 유격전을 통해 덴마크군을 괴롭히면서 수도 스톡홀름을 지켜냈다.

결국 AD 1613년 1월 20일 칼마르 전쟁의 여파로 발트 해 무역에 곤란을 겪던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중재를 통해서 크네레드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칼마르 전쟁이 종식되었다. 스웨덴은 점령했던 노르웨이 영토를 모두 되돌려주고 엘브스보리와 굴베르그를 돌려받는 대신에 많은 보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외레순 해협에 대한 자유무역 권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되었다.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을 마무리하자 본격적으로 국내 내정과 군사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2.5.2. 군제 개혁과 러시아와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제 개혁도 추진하며 우선 전술단위 규모를 줄여 여러 개의 중대로 구성된 대대와 이 대대가 모인 여단을 기본대형으로 편성하여 전술적 유연성을 키웠다. 그리고 조작이 쉽고 가벼운 대포를 제작하여 전쟁에 동원하면서 화력을 강화하였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 군을 지휘하던 마우리츠 반 나사우가 처음으로 선보인 선형진을 개량하여 보병과 기병, 포병의 3병력의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하도록 부대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다시 리보니아를 두고 러시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시작했다.

먼저 러시아에 대해서는 AD 1613년 미하일 1세 로마노프에 의해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자 차르 지위는 포기한 채 공세를 펼쳐 카리알라 서부와 잉그리아를 차지하고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만 차단하였다. 이어서 발트해 동부 연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 AD 1617년 6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공격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18년 9월 2년간의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AD 1621년 8월 공격을 재개하여 1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리보니아의 주도인 리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잠시 간의 휴전 끝에 AD 1625년 휴전 기한이 종료되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리보니아에 대한 대공세를 재개하여 AD 1626년 1월 17일 발호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리하여 리보니아를 장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제 전장을 확대하여 AD 1626년 6월 프로이센 공국에 상륙하였다. 그의 의도는 리가에 이어 그단스크(단치히)까지 점령하여 발트 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보병, 기병, 포병의 새로운 3병 합동전술을 앞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자랑하는 후사리아를 상대로 그니에프 전투와 챠르네 전투, 디르샤우 전투 등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프로이센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지원하고 나서면서 AD 1629년 6월의 트슈치아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결국 AD 1629년 10월 6년 기한의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2.5.3. 30년 전쟁 참전과 갑작스런 전사

AD 1618년 보헤미아 왕국에서 극단적인 로마가톨릭 성향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보헤미아인들이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AD 1619년 11월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했으나 AD 1620년 11월 빌라호라 전투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의 가톨릭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에 이어 AD 1623년에는 본래 영지인 팔츠 선제후국까지 상실한 채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을 겸하고 있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30년 전쟁에 개입했지만 AD 1626년 8월 루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고용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대패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AD 1627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유틀란트 반도까지 점령당했고 AD 1628년 볼가스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도 전쟁 지속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AD 1629년 5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하고 모든 실지를 돌려받았지만 더이상 30년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앙금을 가지게 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군제 개혁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보병, 기병, 포병의 3병 협동 전술을 앞세워 AD 1631년 9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대승을 거뒀고 AD 1632년 4월 라인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전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AD 1632년 5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과 벌인 뤼첸 전투에서는 전투 자체는 승리를 거뒀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는 아들은 없었고 6살의 어린 딸인 크리스티나만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은 큰 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2.6.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

2.6.1. 30년 전쟁의 계승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갑작스럽게 전사하자 스웨덴의 외무상(스웨덴어 Rikskansler)인 악셀 옥센셰르나는 구스타브 2세의 어린 외동딸인 크리스티나를 서둘러 여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악셀 옥센셰르나를 비롯한 5명의 섭정단이 대리 통치를 맡았고 AD 1633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하일브론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 측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했고 스페인이 새롭게 군사 지원을 왔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대신에 스웨덴 군의 지휘를 맡은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구스타브 호른은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인 헝가리-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동생인 추기경 왕자 페르난도가 연합한 스페인-황제군과 싸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세력이 약화되자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하일브론 동맹을 파기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프라하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웨덴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악셀 옥센셰르나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동안 로마카톨릭 국가이면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지원하던 프랑스를 설득하여 30년 전쟁에 직접 참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AD 1637년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면서 페르디난트 3세가 새 황제로 선출되었고 그동안 분전을 거듭하던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와 요한 바네르가 AD 1639년과 AD 1640년 차례로 사망했으나 새롭게 등용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일전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빛나는 승리를 거뒀던 브라이텐펠트에서 AD 1642년 10월 두번째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한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2.6.2. 덴마크와의 토르스텐손 전쟁 승리

이제 30년 전쟁의 전황이 다시 유리해지자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AD 1643년 12월 오랜 앙숙인 덴마크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총사령관인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이름을 딴 '토르스텐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육지에서는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이 AD 1644년 2월 유틀란트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바다에서도 AD 1644년 7월 콜베르거하이데 해전에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한 쪽 눈을 멀게 만드는 부상을 입힌 데 이어서 10월 13일 페마른 해전에서도 칼 구스타브 브랑겔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고 발트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크리스티안 4세가 왕위를 겸하고 있던 노르웨이에서는 크리스티안 4세의 사위인 한니발 세헤스테드가 분전했으나 덴마크의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지 못한 크리스티안 4세가 강화 협상을 제안하자 유리한 조건으로 AD 1645년 8월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서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의 옘틀란드, 헤리예달렌, 이드레, 세르나와 고틀란드, 외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 이행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할란드도 30년간 조차받기로 했다. 또한 스웨덴은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를 완전히 면제받았고 크리스티안 4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3세가 관리자로 임명받았던 브레멘 대주교령과 페르덴 주교령의 영유권까지 넘겨받아 속령인 브레멘-페르덴 공작령으로 재편했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은 북독일 지역에 영토를 확장하고 덴마크로부터 발트해의 제해권을 빼앗으며 발트해를 내해로 둔 강대국이 되었다.

2.6.3. 30년 전쟁의 승리

스웨덴이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덴마크에게 승리를 거두는 사이에 30년 전쟁도 프랑스군의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의 활약으로 전황이 유리해졌다. 프랑스군은 AD 1643년 5월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서 AD 1644년 8월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던 바이에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덴마크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렌나르트 토르스텐손도 AD 1645년 3월 얀카우 전투에서 황제군을 괴멸시켰고 같은 해 8월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도 제2차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바이에른군을 또다시 격파하였다. 그러나 렌나르트 토르스텐손과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모두 신병 상의 이유로 야전 지휘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3세가 기적적으로 병력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했으나 AD 1648년 5월 추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스웨덴의 칼 구스타브 브랑겔과 프랑스의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협공에 다시한번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페르디난트 3세의 근거지인 보헤미아의 프라하에 대한 포위전이 시작되었고 칼 구스타브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나중에 칼 10세 구스타브)이 새로운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를 지휘했다. 칼 구스타브는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인 요한 카지미르와 칼 9세의 딸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크리스티나 여왕에게는 고종 사촌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휴전 협상은 계속되었고 3개월 간의 포위전이 이어지며 프라하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AD 1648년 10월 종전에 합의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서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 국가들은 독자적인 주권과 외교권을 갖게 되었고 루터교회는 물론 칼뱅교회도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신성 로마 제국은 외형만 유지되었을 뿐 사실상 붕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스웨덴도 포어포메른 지역과 비스마르 항구를 영유하고 덴마크로부터 넘겨받은 브레멘-페르덴 공작령에 대한 소유권도 공인받았다. 그 밖에 또 다른 승전국인 프랑스도 영토적인 이득을 얻었고 전쟁의 도화선이 된 팔츠 선제후국은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 반환되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였으나 사실상 독립해 있었던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위스 연방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2.6.4. 크리스티나 여왕의 퇴위 선언과 망명 생활

이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돌연한 전사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의 승전국 지위를 얻으며 발트 해를 내해로 둔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 사이 크리스티나 여왕도 AD 1644년 성년의 나이에 도달했기 때문에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를 행하였다. 다만 그동안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악셀 옥센셰르나와는 여러 가지로 마찰을 빚었는데 30년 전쟁 말기에 고종사촌인 칼 구스타브를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AD 1648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 것도 악셀 옥센셰르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리스티나 여왕이 강행한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어려서부터 르네 데카르트를 가정교사로 두면서 학식과 교양 수준이 높았고 외국의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가졌으며 특히 연극과 발레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스웨덴의 군주 지위는 부담스러워 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했는데 사실 칼 구스타브를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도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스웨덴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세우기를 원해서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수많은 유럽 왕가와 스웨덴 귀족들로부터 결혼 구애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고 독신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1649년 원로원과 악셀 옥센셰르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루터교회의 나라인 스웨덴에게 이례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심취한 상태였다. 이에 크리스티나 여왕은 이미 로마 가톨릭의 본고장이자 문화와 예술의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AD 1654년 6월 6일 돌연 퇴위를 선언하고 웁살라 성에서 스스로 왕관을 벗으며 칼 구스타브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에 따라 칼 구스타브가 새로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칼 10세 구스타브로 명명되고 바사 왕조에 이은 새로운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AD 1654년 여름 스웨덴을 떠났고 AD 1654년 8월 28일 악셀 옥센셰르나마저 사망하면서 스웨덴은 칼 10세 구스타브에 의한 새 시대를 맞이했다.

한편 퇴위한 크리스티나는 AD 1654년 12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융숭한 환영을 받은 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스웨덴의 재정 지원 덕분에 남은 여생을 풍족하게 지내며 유럽 사교계에서 여왕 대접을 받으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또한 로마 교황 및 여러 추기경들과 친분을 맺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때 나폴리 왕위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위를 노리기도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AD 1689년에 사망하여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7. 최전성기(上), 칼 10세

2.7.1. 초기 생애 및 즉위 과정

스웨덴은 AD 1654년 6월 크리스티나 여왕이 갑작스럽게 퇴위하면서 '바사 왕조'가 단절되고 그녀의 고종 사촌인 칼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아 칼 10세 구스타브로 즉위하면서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요한 카지미르와 스웨덴 왕 칼 9세의 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칼 10세 구스타브는 미혼이었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자식이 없는 경우를 대비하여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로 부상했기 때문에 스웨덴 왕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성년이 된 칼 10세 구스타브는 '30년 전쟁'에 참전해 렌나르트 토르스텐손의 휘하에서 1642년 '제2차 브라이텐벨트 전투', 1645년 '얀카우 전투'에 참여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내심 독신주의를 고수하며 퇴위를 생각했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AD 1648년 독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미처 전공을 세우기 전에 '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다만 칼 10세 구스타브는 이후 전권대사로 임명받으면서 외교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후계자로 선포되었고 5년 뒤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 AD 1654년 10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인 프리드리히 3세의 딸 헤트비히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는데, 이는 오랜 적대국인 덴마크와 장래에 전쟁을 벌일 것을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5년 3월 스톡홀름에서 ' 스웨덴 의회(스웨덴어 Riksdag)'를 개최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여 전쟁이 필연적이고 스웨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스웨덴 의회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2.7.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의 동맹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며 먼저 명목상 폴란드 왕국의 종주권 아래에 놓인 프로이센 공작을 겸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동맹을 추진하였다. 본래 프로이센 공국은 ' 독일 기사단국'이었지만 AD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에 의해 동서분할되어 폴란드가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으로 서프로이센을 차지했고 튜튼 기사단 소유 영토는 나머지 동프로이센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AD 1525년 마지막 튜튼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루터교로 개종하고 튜튼 기사단을 해체하면서 튜튼 기사단령은 ' 프로이센 공국'으로 재편되어 폴란드 왕국의 종주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AD 1618년 아들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 간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는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시절에도 이어지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이지만 프로이센 공작으로서는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에 칼 10세 구스타브의 동맹 제의는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로부터 독립시켜 장차 자신의 두 영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로이센 공국의 항구들만 제공하는 조건으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만 하였다.

2.7.3. 제2차 북방 전쟁

2.7.3.1. 제2차 북방 전쟁의 시작
스웨덴 의회의 승인에 이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묵인까지 얻은 칼 10세 구스타브가 AD 1655년 7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위해서 출병하면서 5년 간 이어질 '제2차 북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즉위한 이후 루테니아(Ruthenia)의 자포로쟈 코사크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지도 아래 AD 1648년부터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AD 1653년 10월에는 자포로쟈 코사크들과 동맹을 맺은 루스 차르국까지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공해 오면서 동쪽 영토의 상당수를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에 스웨덴도 이미 AD 1655년 7월 1일 망누스 드 라 가르디의 스웨덴군 7,200명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인 리보니아의 뒤나부르그(지금의 다우가프필스)를 공격하고 7월 12일 함락에 성공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시작한 상태였다.
2.7.3.2. 대홍수
2.7.3.2.1. 우이시치에 전투의 승리와 대(大) 폴란드 점령
제2차 북방 전쟁은 북독일 내 스웨덴의 영토인 스웨덴령 포메른의 아르비드 비텐베르그가 AD 1655년 7월 2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르비드 비텐베르그의 스웨덴 군은 병력 13,650명과 대포 72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도 대(大) 폴란드(폴란드어 Wielkopolska) 지방의 징집병(pospolite ruszenie) 13,000명과 상비군 보병 1,400명이 나섰다. 다만 폴란드군의 지휘를 맡아야 하는 보구스와프 레시친스키는 병에 걸려 브레슬라우로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포즈난 총독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와 칼리시 총독 안제이 카롤 그루진스키가 폴란드군을 지휘하였다.

폴란드군은 노테치 강에서 스웨덴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 당시 스웨덴 육군은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당대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AD 1655년 7월 24일 벌어진 '우이시치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히려 폴란드군을 포위해 버렸다.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자신들의 군주를 슐라흐타(Szlachta)라고 불리는 귀족들의 자유 선거로 선출하기 때문에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에 대한 충성도가 약했고 심지어 '황금의 자유'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자신들의 특권만 보장된다면 누가 군주가 되든 상관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우이시치에 전투에서 스웨덴군의 우수성을 통감한 포즈난 총독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와 칼리시 총독 안제이 카롤 그루진스키를 비롯한 다수의 대(大) 폴란드의 폴란드 귀족들은 항복하여 칼 10세 구스타브의 봉신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2.7.3.2.2. 바르샤바 함락과 얀 2세 카지미에시의 실롱스크 망명
비록 아르비드 비텐베르크가 단 한번의 전투로 대(大) 폴란드 지방을 손쉽게 점령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수도인 바르샤바로 향하는 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포즈난과 칼리시 등 대(大) 폴란드 지방의 주요 도시만 점령한 뒤 수비 태세만 굳히며 칼 10세 구스타브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AD 1655년 8월 20일 칼 10세 구스타브가 도착한 후에야 함께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스웨덴군의 진격은 파죽지세로 이어져 9월 2일 '소보타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9월 4일 워비치를 점령했으며 9월 8일 바르샤바를 함락시켰다.

이후 칼 10세 구스타브는 바르샤바를 버리고 도망친 얀 2세 카지미에시를 뒤쫓아 남진했고 AD 1655년 9월 16일 '자르노프 전투'에서 또 다시 승리했다. 이에 놀란 얀 2세 카지미에시는 아예 폴란드 국경을 떠나 슐레지엔으로 도망쳤으나 10월 13일에는 소(小) 폴란드(폴란드어 Małopolska) 지방에 위치한 폴란드 왕국의 옛 수도인 크라쿠프마저 함락되었다. 이제 폴란드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10월 26일 크라쿠프 근처에서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가 항복했고 10월 28일 폴란드군을 이끄는 두 명의 최고 사령관인 폴란드의 야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란츠코론스키와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4]가 항복했다. 그리고 10월 31일 마조프셰(폴란드어 Mazowsze) 지방의 프워츠크 총독인 얀 카지미에츠 크라신스키가 패배하면서 이제 폴란드의 주요 지역인 대(大) 폴란드, 소(小) 폴란드, 마조프셰 지방이 모두 스웨덴의 차지가 되었다.
2.7.3.2.3. 리투아니아의 항복
그 사이 AD 1569년 루블린 조약 이래로 폴란드와 연합 상태에 있던 리투아니아에서는 이미 러시아의 침공으로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슐레지엔으로 몽진하자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가 공세를 이어가자 리투아니아의 대귀족이자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인 야누슈 라지비우가 자신의 조카인 보구스와프 라지비우와 함께 칼 10세 구스타브와 협상을 추진하여 AD 1655년 10월 20일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대표하여 '케다이네이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의 연합을 해체하고 스웨덴과 동군연합을 이루는 대신에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향유하던 기존 특권과 자유를 계속해서 보장받고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도 스웨덴의 보호를 받기로 합의했다.
2.7.3.2.4.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점령
한편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의 국경 바깥으로 도망친 얀 2세 카지미에시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북부의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으로 진군로를 옮겼다. 이에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스웨덴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AD 1655년 11월 2일 프로이센 공작 겸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린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자신들에 대한 방어를 위임하였다. 단 여기에서 단치히, 엘빙[5], 토른은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의 스웨덴군이 AD 1655년 11월과 12월에 그단스크, 푸치히[6], 마리엔부르크를 제외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전역을 점령해 버렸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의 스웨덴군이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뒤쫓아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추격해 왔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칼 10세 구스타브와 서둘러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56년 1월 17일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칼 10세 구스타브의 종주권까지 인정했다. 또한 AD 1656년 3월 말보르크마저 항복하면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 중 스웨덴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은 그단스크가 유일하게 되었다.
2.7.3.3. 얀 2세 카지미에시의 재기
2.7.3.3.1. 야스나 구라 수도원 전투의 승리
한편 칼 10세 구스타브는 얀 2세 카지미에시가 폴란드로 돌아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슐레지엔 국경선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AD 1655년 11월 18일 스웨덴군이 소(小) 폴란드 지방의 '야스나 구라(Jasna Góra)' 수도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프로테스탄트인 루터교회의 나라이고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의 나라였기 때문에 스웨덴의 폴란드 점령은 종교적 자유를 상실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실제로 스웨덴군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다녔기 때문에 많은 폴란드인의 공분을 샀다.

이 때문에 많은 폴란드인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의용군들을 결성하고 야스나 구라 수도원에 대한 구원에 나섰다. AD 1655년 12월 7일 가브리엘 보이니우워비츠가 크로스노에서 스웨덴군과 배신자 폴란드인 부대를 격파하였고 이어서 노비 삭츠, 비아와, 두클라, 비에츠, 비엘리츠카, 오시비엥침을 차례로 탈환해 내었다. 그리고 야스나 구라 수도원도 수도원장인 아우구스틴 코르데츠키의 지휘 아래 스웨덴군의 맹공을 끝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하였다.
2.7.3.3.2. 티쇼프체 연맹 결성
야스나 구라 수도원 전투의 승리 소식에 희망을 되찾은 얀 2세 카지미에시가 AD 1655년 12월 27일 폴란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뒤 스웨덴에 항복했던 폴란드의 대(大)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와 폴란드의 야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란츠코론스키가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Konfederacja tyszowiecka)'을 결성했다. 그러자 스웨덴에게 항복했던 많은 폴란드 군이 티쇼프체 연맹으로 속속 복귀하였고 12월 31일 크로즈노에서 얀 2세 카지미에슈가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 스타니스와프 란츠코론스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같은 폴란드의 주요 지휘관들과 만나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또한 AD 1655년 12월 31일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동군연합을 주도했던 야누슈 라지비우가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에 얀 2세 카지미에시를 지지하던 파베우 얀 사피에하가 새로운 리투아니아의 대(大) 헤트만이 되었고 이후 케다이네이 협정을 사실상 파기한 채 스웨덴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2.7.3.4. 칼 10세 구스타브의 위기
2.7.3.4.1. 폴란드의 반격과 칼 10세 구스타브의 고립
그동안 프로이센에 있던 칼 10세 구스타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체결한 뒤 전황이 불리해진 폴란드의 남부로 향했다. 그리고 AD 1656년 2월 중순 소(小) 폴란드 지방의 비스와강과 비에프츠 강이 만나는 고웜프 근처에서 진영을 편성한 채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의 폴란드군을 기다렸고 이후 폴란드군이 나타나자 2월 18일 비스와 강을 건너 폴란드군을 기습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어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머무르고 있는 르부프 방향으로 진군하였으나 도중에 위치한 자모시치 요새는 공성 대포 없이는 함락이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을 포기했다. 이에 베우제츠로 방향을 돌렸으나 폴란드군의 끊임없는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결국 3월 3일 칼 10세 구스타브도 어쩔 수 없이 철군을 결정하였다.

그 사이 폴란드군은 마조프셰와 대(大) 폴란드 지방에서 게릴라 전을 벌이고 있었고 리투아니아에서는 파베우 얀 사피에하가 '붉은 루테니아[7]'를 공격하고 있었다. 3월 11일 스웨덴군이 야로스와프에 도착하여 산 강 도하를 막아서고 있던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를 격퇴하였으나 고웜프 전투에서 패배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의 폴란드군이 뒤쫓아 왔다. 그리고 스테판 차르니에츠키가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면서 스웨덴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3월말 북쪽으로 퇴각을 결심하였고 그러자 스웨덴군에 항복하였던 폴란드군이 다시 얀 2세 카지미에시에게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굶주리고 지친 스웨덴군 5,000명이 산도미에시로 향했으나 그 곳은 이미 폴란드군의 수중으로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폴란드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2.7.3.4.2. 칼 10세 구스타브의 포위망 돌파와 바르샤바 상실
바르샤바에 머물던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6세는 칼 10세 구스타브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웨덴군 2,500명을 이끌고 나섰다. 이에 따라 칼 10세 구스타브를 포위하던 폴란드군 일부가 프리드리히 6세를 상대하기 위해 이탈했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는 스스로의 힘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6세에게는 바르샤바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비록 프리드리히 6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에게 추격을 당하여 4월 7일 '바르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가 시간을 버는 사이 칼 10세 구스타브는 무사히 포위망을 돌파하여 4월 13일 바르샤바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감을 회복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AD 1656년 4월 1일 '르부프 서약(Śluby lwowskie)'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선포하며 폴란드인을 종교적으로 결속시켰다. 그리고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대(大) 폴란드 지방의 탈환에 나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칼 10세 구스타브가 바르샤바를 떠나자 4월 21일 루블린의 탈환에 성공한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 군이 4월 23일 바르샤바 근처의 프라가에 도착하여 바르샤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도 5월 7일 '크웨츠코 전투'에서는 패배했으나 그니에즈노에서 병력을 재편한 뒤 5월말 파베우 얀 사피에하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바르샤바 포위전에 합류했다. 이에 바르샤바의 수비를 맡던 아르비드 비텐베르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6월 1일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탈출하였다.
2.7.3.5. 전쟁의 확대
2.7.3.5.1. 루스 차르국의 참전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완전히 멸망하면 균형이 무너질거라고 생각한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와 휴전하고 루스 차르국도 AD 1656년 5월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AD 1656년 7월 스웨덴령이 된 잉그리아 지방을 공격하여 발트해의 주요 두 요새인 뇌테보리[8]와 뉘엔(Nyen)[9]을 석권했고 또 다른 별동 부대는 도르파트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가 지휘하는 주력 부대는 서(西) 드비나 강을 따라 리가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여 도중에 놓인 다우가우필스(7월 31일)와 코크네제(8월 14일)를 각각 함락시킨 후 8월말부터 리가 포위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수비 태세가 굳건한 리가 포위전이 장기화되었고 해군력이 부족한 러시아로서는 바다를 통한 스웨덴군의 식량 보급과 병력 증원을 차단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AD 1656년 10월 5일 러시아군이 리가 포위전을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이제 스웨덴군이 반격을 가하여 잉그리아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AD 1657년 7월 8일에는 '발크 전투'에서 마트베이 셰레메테프의 러시아 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그 해 9월 16일 '그도프 전투'에서 이반 코반스키가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고착화되었다.
2.7.3.5.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본격적인 참전
이제 오히려 위기에 몰린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6년 6월 29일 사실상 지켜내기 어렵게 된 대(大) 폴란드 지방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양도하고 대(大) 폴란드 지방에 대한 종주권도 행사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의 '마리엔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대(大) 폴란드 지방의 수비병이 브란덴부르크군으로 대체되면서 칼 10세 구스타브가 병력 운용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7월 28일 브란덴부르크군과 연합한 스웨덴군 18,000명이 폴란드 군 40,000명을 물리치고 7월 30일 바르샤바를 다시 탈환하였다. 하지만 폴란드 군이 병력을 재편하여 바르샤바 탈환을 노렸고 그 사이 바르샤바가 많이 파괴되어 방어에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프로이센으로 철수했다.

리투아니아의 야전 헤트만 빈첸티 코르빈 고시에브스키가 타타르족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 공국으로 진격하여 AD 1656년 10월 8일 '프로스트키 전투'에서 브란덴부르크-스웨덴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일전에 케다이네이 협정을 통해서 리투아니아를 스웨덴에게 넘기는 데 일조했던 보구스와프 라지비우를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나 이후 크림 타타르족이 철수하면서 10월 22일 벌어진 '필리푸브 전투'에서는 패배하면서 리투아니아로 철수했고 보구스와프 라지비우는 다시 풀려났다. 그 사이 대(大) 폴란드 지방을 회복하고 있던 폴란드군이 이제는 프로이센 공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大) 폴란드 지방을 지키던 브란덴부르크군이 모두 프로이센 공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더욱이 오랫동안 지속된 스웨덴군의 단치히 포위전도 최종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가 차지하고 있는 폴란드 점령지는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절반, 마조프셰의 북부 지역, 워비치, 크라쿠프, 티코친 뿐이었다. 이에 칼 10세 구스타브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11월 20일 '라비아우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 중 프로이센 공국 사이에 끼어 있던 에름란트에 대한 소유권도 넘기기로 했다.
2.7.3.5.3. 라드노트 조약의 체결과 에르데이 공국의 참전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6년 12월 6일 에르데이 공작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자포로쟈 코사크의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까지 끌어들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및 리투아니아 귀족 보구스와프 라지비우와 함께 '라드노트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분할 점령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과 쿠야비, 마조프셰 북부, 사모기티아, 쿠를란트, 인플란티[10]를 차지하고 보구스와프 라지비우가 리투아니아의 나바흐루다크를 차지하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대(大) 폴란드 지방을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자포로쟈 카자크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의 남동부를 차지하며 에르데이 공국의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소(小) 폴란드 지방을 차지하기로 했다.

이제 라코치 죄르지 2세가 AD 1657년 1월부터 에르데이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서 동원한 병력 25,000명과 지원을 온 자포로쟈 카자크 10,000명을 이끌고 폴란드의 남부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57년 3월 28일 소(小) 폴란드 지방의 중심 도시인 크라쿠프에 도착하여 스웨덴 군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비록 그동안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진격 도중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수천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폴란드인의 공분을 샀지만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이를 무시하고 크라쿠프에 일부 수비병력만 남겨둔 채 북진하여 4월 12일 츠미에루브에서 칼 10세 구스타브의 스웨덴군과 합류했다.

이에 대항하여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의 폴란드군과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군이 합류하였고 5월초에는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별동대를 이끌고 복수를 위해 에르데이 공국으로 진군했다. 5월 13일 스웨덴-에르데이 연합군이 브레스트 요새를 함락시키고 3일간의 포위전 끝에 5월 17일 바르샤바를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6월 덴마크가 얀 2세 카지미에시와 동맹을 맺고 갑자기 덴마크가 선전포고를 해왔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가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을 병력을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야 했다.
2.7.3.5.4.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입과 에르데이 공국의 이탈
피난을 떠난 얀 2세 카지미에시가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미 얀 2세 카지미에시는 AD 1656년 12월 1일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빈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병력 지원은 4,000명에 불과하여 불만족스러워했고 AD 1657년 4월 페르디난트 3세가 사망하면서 그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얀 2세 카지미에시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로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레오폴트 1세와 다시 협상을 벌여 AD 1657년 5월 27일 다시 한번 빈 조약을 체결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 병력을 12,000명을 늘리는 대신에 유지 비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부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AD 1657년 6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의 오스트리아군이 폴란드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덴마크를 상대하기 위해 떠났던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7년 6월 20일 폴란드 내의 잔여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에게 라코치 죄르지 2세를 포기하고 슈테틴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다급해진 라코치 죄르지 2세도 서둘러 에르데이 공국으로 귀환하고자 했으나 7월 11일 르부프 근처의 마기에루브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후 7월 20일 포돌리아에서 벌어진 차르니 오스트루브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3일 뒤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서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며 그동안 점령했던 크라쿠프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뒤에야 겨우 에르데이 공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AD 1657년 7월 26일 에르데이 공국의 잔존병이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에게 스카와트에서 포위를 당했기 때문에 홀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에르데이 공국의 병력 25,000명이 전사하거나 타타르족의 포로가 되면서 완전히 괴멸되었다. 하지만 라코치 죄르지 2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는 데 에르데이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기를 원하던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제멋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한 것을 핑계로 에르데이 공국을 공격하면서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폐위당했다. 이후 라라코치 죄르지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아 복위와 폐위를 반복하지만 AD 1660년 5월 최종적으로 사망한다.

2.7.4. 덴마크-스웨덴 전쟁

2.7.4.1. 덴마크의 선전포고
한편 덴마크는 크리스티안 4세(재위 AD 1588년 ~ AD 1648년)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섰다가 AD 1625년 크게 패배하면서 AD 1629년 뤼베크 조약을 체결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AD 1630년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전하자 AD 1634년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편에 섰다가 오히려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AD 1645년 8월 제2차 브룀세브로 조약을 체결하며 스웨덴에게 노르웨이의 옘틀란드, 헤리예달렌, 이드레, 세르나와 고틀란드, 외셀의 영유권을 양도하고 할란드도 30년간 조차해주어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 뿐만 아니라 덴마크는 스웨덴에게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를 완전히 면제해주어야 했고 덴마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페르덴 주교령과 브레멘 대주교령의 영유권까지 스웨덴에게 넘겨야 했다.

이렇게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에게 커다란 영토적 손실을 입어야 했던 덴마크는 절치부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D 1648년 왕위를 이어받은 크리스티안 4세의 차남 프레데리크 3세는 기회를 엿보던 끝에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호기롭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했으나 초기의 대성과에도 불구하고 점차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얀 2세 카지미에시와 동맹을 체결하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하지만 칼 10세 구스타브가 예상과 달리 스웨덴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덴마크를 공격해 오면서 오히려 덴마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2.7.4.2. 스웨덴의 첫 번째 덴마크 공격
2.7.4.2.1. 스웨덴 군의 유틀란트 반도 장악
칼 10세 구스타브는 서둘러 폴란드에서 철수한 뒤 10일 간의 강행군 끝에 스웨덴 군 6,000명이 유틀란트 반도에 도착했다. 비록 스웨덴군은 규모는 작았지만 잘 무장되고 훈련도 충실히 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덴마크의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문에 덴마크군은 스웨덴군과 평지에서 회전을 벌이는 것을 피했다. AD 1657년 8월 25일 스웨덴군이 덴마크 동부 해안의 프레데리시아 요새에 도착했다. 여기는 만들어진 지 얼마되지 않는 요새로써 8,000명의 수비병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칼 구스타브 브랑겔이 2달 간의 포위전 끝에 10월 24일 야간 공격을 통하여 함락에 성공하고 덴마크군 6,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서 스웨덴군이 유틀란트의 덴마크군 전체에 대한 보급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2.7.4.2.2. 빙상도하와 로스킬레 조약 체결
이후 덴마크의 내륙 영토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유틀란트 반도를 장악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나머지 덴마크의 섬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기록적인 한파가 몰려오며 바다까지 얼어붙자 칼 10세 구스타브는 공병 장교 에리크 다흘베르그에게 얼음 두께가 스웨덴군의 기병과 대포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지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동이 가능할 것으로 같다는 보고를 받자 이듬해인 AD 1658년 1월 30일 기병 9,000기와 보병 3,000명을 데리고 과감하게 소(小) 벨트 해협(덴마크어 Lillebælt)의 얼음을 도보로 건너서 건너는 빙상도하를 시도하여 퓐 섬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 때 얼음이 가라앉으며 병사들의 무릎까지 물에 잠겼으나 어쨌든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퓐 섬의 연안 지역에는 덴마크 수비병 3,000명이 있었지만 스웨덴군이 손쉽게 제압하였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는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다시 한번 에리크 다흘베르그에게 다시 한번 대(大) 벨트 해협(덴마크어 Storebælt)의 얼음 두께를 조사시켰다. 그는 대(大) 벨트 해협을 곧바로 건너지 말고 랑엘란 섬과 롤란 섬으로 우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인 칼 10세 구스타브가 또 한번 빙상도하를 실시하여 AD 1658년 2월 8일 무사히 셸란 섬에 도착했고 2월 15일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외곽에 도착했다. 덴마크로서는 봄이 되어야 스웨덴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을 벌여 2월 26일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로스킬레 조약을 체결했다.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서 칼 10세 구스타브는 덴마크로부터 스코네, 블레킹에, 보른홀름 섬을 양도받고 30년간 조차 중이었던 할란드도 넘겨받았으며 노르웨이로부터는 부흐슬랜과 노르뫼레와 로스감을 포함한 트뢰네달라그의 소유권을 이전받는 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덴마크에게 모든 반(反) 스웨덴 동맹을 파기하도록 했고 장차 외레순 해협에 스웨덴을 적대하는 나라의 선박이 들어오는 것도 허용하지 말도록 했으며 칼 10세 구스타브의 처가이자 이미 반(半) 독립 상태에 있었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종주권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 내의 스웨덴군의 주둔을 허용받은 것은 물론 유지 비용까지 지불받기로 했고 향후 스웨덴이 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전쟁을 벌일 때 군대도 제공받기로 했다.
2.7.4.3. 덴마크-스웨덴 전쟁의 재개와 네덜란드의 개입
2.7.4.3.1. 브란덴부르크의 배신과 덴마크-스웨덴 전쟁의 재개
얀 2세 카지미에시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덴마크를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에르데이 공국을 스웨덴과의 동맹에서 이탈시킨 데 이어서 이제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마저 돌려세우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AD 1657년 9월 19일 각 국의 대표가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이 폐지되는 대신에 만일 브란덴부르크 호엔촐레른 가문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는 경우에는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권리가 다시 폴란드 왕실로 귀속되기로 합의하였다. 다만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으로부터 양도받았지만 프로테스탄트인 자신의 지배를 거부하던 로마 가톨릭 지역인 에름란트 지역은 폴란드에게 돌려주었다. 벨라우 조약은 AD 1657년 11월 6일 양 측의 군주에 의해 브롬베르크 조약으로 정식 조인되었고 이에 따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까지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오히려 얀 2세 카지미에시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자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의 전쟁에 복귀하고 자신을 배신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대한 응징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적인 상황이 스웨덴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일단 덴마크가 다시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발트 해를 독점하려는 야심을 품고 AD 1658년 6월 갑자기 로스킬레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덴마크를 재침공했다.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568년 8월 6일 70척의 함대와 5,700명의 병력, 그리고 경포 18문을 이끌고 덴마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 덴마크는 방심하고 있었고 유틀란트 반도와 퓐 섬에는 여전히 스웨덴군이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코펜하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또한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도 스웨덴 남부에서 스코네의 병력을 증원하였다.
2.7.4.3.2. 네덜란드의 개입과 외레순 해전의 패배
AD 1658년 8월 11일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가 코펜하겐의 근교에 위치한 지금의 프레데릭스보르로 진격했다. 이에 놀란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는 코펜하겐 성벽 바깥의 시민들을 성 안으로 들이고 주변을 모두 불태운 후 성문을 닫았다. 이 성문은 앞으로 22개월 간이나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웨덴 해군이 항구를 봉쇄하면서 육상은 물론 해상으로의 보급마저 차단당한 코펜하겐은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시민들은 스웨덴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대규모 포격 때문에 무너지는 성벽을 계속해서 보수하며 항전의 의지를 좀처럼 꺾지 않았다. 그러던 중 스웨덴이 외레순 해협을 장악하여 자신의 발트해 무역이 위협할 것을 우려한 네덜란드에서 함대를 지원보내면서 10월 22일 헬싱외르 북서쪽에 도착했고 바람이 유리할 때까지 기다린 후 10월 29일 공격을 시작하면서 외레순 해전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함대는 총 43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 전투선 총 30척이 3개의 전대로 나뉘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부제독인 비테 데 비트가 9척을 이끌고 돌진하였고 그 뒤를 제독인 야코브 반 바세나에르 오브담의 11척이 뒤를 따랐으며 마지막 전대 10척은 또 다른 부제독인 피에테르 플로리스존이 지휘하였다. 이에 맞서는 스웨덴 함대는 총 45척 중 33척이 전투선이었다. 외레순 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양 측의 사상자가 2,000명이 넘었고 네덜란드 함대가 부제독 두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종국에는 네덜란드 함대가 덴마크 함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함대가 란스크로나로 철수하면서 코펜하겐의 해상 봉쇄가 무너졌고 식량과 새로운 병력을 지원받은 코펜하겐은 포위전을 지속할 힘을 얻었다.
2.7.4.3.3. 코펜하겐 포위전 실패
비록 코펜하겐 포위전이 불리해졌지만 칼 10세 구스타브는 전투를 이어갔고 AD 1659년 2월 총공격을 명령했지만 2월 9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났다. 더욱이 스웨덴 군이 해자를 넘기 위해서 설치한 부교를 그대로 나두면서 덴마크에서 스웨덴군의 부교 길이가 36피트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에 덴마크는 2월 10일 네덜란드군의 도움을 받아 해자의 얼음을 깨서 도하 길이를 44피트로 늘려버렸다. 그것을 모르는 스웨덴군이 2월 11일 자정에 총공세를 펼쳤고 코펜하겐 측의 사격을 무릅쓰고 해자를 건넌 뒤에야 부교의 길이가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비록 스웨덴군이 길이가 더 긴 부교의 가져오며 전투를 이어갔지만 막대한 사상자가 쌓이자 2월 12일 아침 6시에 칼 10세 구스타브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못하고 철수를 명령하고 말았다.

2.7.5. 스웨덴의 위기와 제2차 북방전쟁의 종식

2.7.5.1. 스웨덴의 위기
2.7.5.1.1. 폴란드-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반(反) 스웨덴 동맹군의 공세
AD 1658년 봄이 되자 파베우 얀 사피에하,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함께 그동안 르부프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크지슈토프 그로지츠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라이몬도 몬테쿠콜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여전히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여기에 새롭게 동맹으로 합류한 브란덴부르크군을 프로이센 공국에 머무르고 있던 보구스와프 라지비우가 이끌며 지원을 왔다. 폴란드-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연합군의 공세에 AD 1658년 말까지 토룬을 함락시키면서 스웨덴 점령지는 말보르크, 그루지옹츠(독일명 그라우덴츠), 엘블롱크, 브로드니차(독일명 스트라스부르크) 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속해서 공세를 펼치면서 AD 1659년 8월 그루지옹츠를 점령했고 이어서 굶주림에 지친 브로드니차가 항복했다. 또한 말보르크의 포위전을 계속하는 한편 12월부터는 엘블롱크에 대한 포위전도 시작했다.

한편 AD 1658년 9월 1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브란덴부르크군 14,500명과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의 오스트리아군 10,600명,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의 폴란드군 4,500명이 오데르 강을 건너 스웨덴이 차지한 유럽 대륙의 발트해 연안 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여 슈테틴을 공격했고 이어서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로 향했다. 비록 이들 반(反) 스웨덴 동맹군 사이에 알력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틀란트 반도를 석권하며 스웨덴 군을 계속해서 후퇴시켰다. 또한 덴마크인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AD 1659년 5월 19일이 되면 스웨덴군은 유틀란트 반도의 마지막 거점인 프레데리시아 요새마저 상실하고 퓐 섬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퓐 섬의 스웨덴군은 AD 1659년 5월 31일과 6월 26일에 벌어진 두 번의 공격을 물리쳤고 7월 23일 덴마크 함대와 벌인 에벨토프트 해전에서도 승리하며 퓐 섬은 지켜내었다. 이 때문에 브란덴부르크-오스트리아 연합군도 더 이상의 퓐 섬 공략을 포기하고 스웨덴령 포메른으로 공격 목표를 바꿔야 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오스트리아군은 스웨덴령 포메른으로 들어가 그라이펜하겐를 불태우고 볼린 섬과 돔비에을 점령했다. 그러나 슈테틴과 그라이프스발트의 함락에는 실패한 채 반격을 받아 보급로를 차단당하면서 브란덴부르크군은 그대로 후퇴했다. 또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에서는 AD 1658년말 토룬이 이미 함락되었지만 엘블롱크과 마리엔베르더(폴란드어 크비진)은 버텨내었다.
2.7.5.1.2. 덴마크의 반격과 뉘보르 전투의 결정적 승리
그 사이 덴마크에서는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군이 스웨덴군에게 맞써 싸웠고 특히 스코네, 블레킹에, 할란드에서 일어난 '스나프하네(snapphane)'라고 불리는 봉기군의 활약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AD 1658년말 트뢰네달라그 지역을 탈환했고 보른홀름 섬도 주민 봉기가 일어나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또한 AD 1659년 11월 14일에 퓐 섬 동부에서 벌어진 뉘보르 전투에서 네덜란드의 미힐 드 로이테르가 지휘하는 네덜란드-덴마크 연합함대 및 스테판 차르니에츠키가 이끄는 폴란드-브란덴부르크 육군의 협공에 밀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스웨덴은 퓐 섬과 랑엘란 섬을 포기해야만 했다.
2.7.5.2. 제2차 북방 전쟁의 종식
2.7.5.2.1. 칼 10세 구스타브의 갑작스런 사망과 강화 협상의 진행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는 AD 1659년 12월 발트해를 건너 스웨덴의 예테보리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의회를 소집하며 노르웨이 공격을 위한 군대를 집결시켰지만 AD 1660년 1월 폐렴에 걸려 2월 13일 갑자기 사망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칼 10세 구스타브의 아들로서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1세의 나이가 5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스웨덴의 통치를 위임받은 섭정단은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한 채 서둘러 강화 협상에 나서야 했다. 사실 스웨덴은 이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AD 1659년 가을에 토룬을 상실할 당시부터 물밑에서 강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이번 기회에 스웨덴령 포메른을 점령하려고 했기 때문에 강화 협상에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AD 1658년 루스 차르국이 리투아니아를 재차 침공하고 AD 1659년 10월에는 자포로쟈 카자크족과 페레야슬라프 협정을 체결하며 우크라이나를 종속시키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다시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얀 2세 카지미에시도 서둘러 스웨덴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2.7.5.2.2. 올리바 조약의 체결
이렇게 하여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합스부르크 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모두 참여하는 강화 조약이 AD 1660년 5월 3일 그단스크 부근의 올리바에서 체결되었다. 올리바 조약으로 스웨덴은 칼 10세 구스타브가 일시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반환해야 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점령한 스웨덴령 포메른을 모두 돌려받았다. 반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재개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때문에 아무런 이득을 챙길 수 없었다. 오히려 폴란드 바사 왕조의 등장 이래 줄곧 주장했던 스웨덴 왕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스웨덴령 리보니아에 대한 스웨덴의 권리도 그대로 인정했다.

또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비록 영토 확장에는 실패했지만 AD 1657년 벨라우 조약으로 인정받은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종주권 폐지를 재확인 받았다. 이를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AD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브란덴부르크의 실질적인 자주권을 획득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프로이센의 독립까지 획득하면서 두 영지의 완전한 독립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향후 AD 1701년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2.7.5.2.3. 코펜하겐 조약과 카르디스 조약
올리바 조약으로 제2차 북방전쟁을 종결지은 스웨덴은 덴마크와도 협상도 마무리하여 AD 1660년 5월 27일 코펜하겐 조약을 체결했다. 사실 코펜하겐 조약의 내용은 로스킬레 조약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 데 스웨덴이 외레순 해협 동쪽의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렌과 벤 섬을 그대로 소유하고 외레순 해협의 통행세로 면제받기로 했다. 대신에 노르웨이에게는 트뢰넬라그 지방을 반환하고 덴마크에게도 보른홀름 섬을 양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거의 확정지었다. 또한 스웨덴은 네덜란드와도 화해하였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와도 카르디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을 AD 1617년 당시로 되돌리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서 스웨덴은 칼 10세 구스타브가 즉위 당시의 영토를 모두 지켜내며 아무런 영토적 손실없이 제2차 북방 전쟁을 겨우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2.8. 최전성기(下), 칼 11세

2.8.1. 즉위와 섭정 시대

2.8.1.1. 섭정단의 구성
AD 1660년 칼 10세 구스타브가 급사한 뒤 그의 아들인 칼 11세가 5살에 불과한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칼 10세 구스타브의 미망인이자 칼 11세의 모후인 헤드비히 엘레오노라가 섭정이 되었다. 다만 스웨덴은 이미 30년 전쟁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갑작스럽게 전사하고 그의 딸인 크리스티나 여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경험이 있었고, 1634년 제정된 정부조직법(års regeringsform)에 따라 '추밀원(Riksradet)'을 이끄는 최고위급 관료 5명인 '수석장관(Rikskansler)', '법무장관(Riksdrots)', '국방장관(Riksmarsk)', '해군장관(Riksamiral)', '재무장관(Riksskattmastare)'이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와 추밀원의 최고위급 관료 5명으로 이루어진 총 6명으로 섭정단이 구성되었고 헤드비히 엘레오노라가 명목상 의장이 되었다.

비록 칼 10세 구스타브의 동생인 클리부르크 팔츠백 아돌프 요한 1세가 국방장관이었기 때문에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 역시 물러나야 했다. 더구나 의장인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는 본래부터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의 통치를 사실상 나머지 섭정단에게 위임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고위급 관료들이 섭정단을 구성하여 스웨덴을 이끄는 것은 크리스티나 여왕 시절과 비슷했고 칼 10세 구스타브의 갑작스런 사망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중재 덕분에 '올리바 조약(Treaty of Oliva)'과 '코펜하겐 조약(Treaty of Copenhagen)', '카르디스 조약(Treaty of Cardis)'을 차례로 체결하며 아무런 영토 손실없이 제2차 북방 전쟁을 마무리짓는 데도 성공했지만 문제는 크리스티나 여왕 시절과 달리 이번에는 악셀 옥셀셰르나와 같은 정치력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섭정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법무장관인 페르 브라헤, 외무장관인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 재무장관인 구스타브 본데였다. 그리고 클리부르크 팔츠백 아돌프 요한 1세가 국방장관에서 물러나면서 AD 1664년 해군장관이었던 칼 구스타브 브랑겔이 육군 총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 해군장관은 구스타프 오토 스텐보크로 교체되었다. 이후 스웨덴은 제2차 북방 전쟁 이후의 대외문제를 두고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외무장관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는 친(親) 프랑스 정책을 바탕으로 전쟁을 통한 세력 확장을 선호했지만 법무장관 페르 브라헤와 재무장관 구스타브 본데는 이에 반대하고 평화와 경제 회복을 주장하였다.
2.8.1.2. 브레멘 전쟁
한편 스웨덴은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브레멘과 베르덴 주교구를 할양받고 세속 영지인 공작령으로 재편한 후 칼 10세 구스타브가 브레멘-베르덴 공작 작위를 겸직하였다. 다만 제국 자유 도시인 브레멘 시 자체는 여기에서 빠졌다. 이에 스웨덴은 AD 1654년 브레멘 시를 공격하여 베데르케사와 브레머레에를 빼앗고 브레멘 시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바 있었으나 AD 1665년 칼 11세가 즉위하였을 때 브레멘에서 충성 서약의 갱신을 거절했기 때문에, 1666년 스웨덴은 전쟁을 시작했다.

먼저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에서 칼 구스타브 브랑겔이 1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레멘 시가지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외곽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하지만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와 쾰른이 브레멘으로 증원군을 파견했고 브란덴부르크, 덴마크, 네덜란드도 반(反) 스웨덴 동맹에 가담했다. 더욱이 스웨덴의 오랜 우방인 프랑스도 이번에는 개입을 거절했다. 결국 스웨덴은 브레멘과 강화 협상을 벌여 '하벤하우젠 조약(Treaty of Habenhausen)'을 체결하여 스웨덴이 브레멘-베르덴 공작령에서 브레멘 근처에 설치한 요새를 모두 헐어버리는 대신에 브레멘 시에서는 제국 자유 도시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제국 의회에 참석할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비록 겉으로는 브레멘이 스웨덴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치를 유지하며 제국 자유 도시로서의 위치를 끝까지 지켜내게 된다.

2.8.2. 칼 11세의 친정

2.8.2.1.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
스웨덴은 AD 1660년대와 AD 1670년 초반까지 계속된 전쟁 때문에 재정 위기에 휩싸였다. 이 때 AD 1665년 스페인 왕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카를로스 2세가 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그의 부인인 마리 테레즈가 펠리페 4세의 딸로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를 인정받지 못하자 군사 행동에 나서서 AD 1667년 5월 프랑스 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승 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스웨덴은 프랑스와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원을 기대하며 오히려 네덜란드 및 잉글랜드와 반(反) 프랑스 삼국 동맹을 체결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스페인 군을 몰아붙이며 AD 1668년 4월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을 체결하고 상당 수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대신에 프랑슈콩테만 스페인에게 반환하며 상속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더욱이 AD 1670년 5월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밀리에 '도버 조약(Treaty of Dover)'을 체결하면서 반(反) 프랑스 삼국 동맹도 붕괴되었다. 그러자 이제 스웨덴은 AD 1672년 4월 다시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스웨덴은 독일 내 영토에서 계속해서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스웨덴이 칼 11세의 외가인 덴마크 남쪽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잉글랜드-스웨덴 동맹에 맞서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1세가 덴마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브라운슈바이크-첼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헤센-카셀과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던 중 AD 1672년 5월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시작하여 뮌스터 및 쾰른과 함께 국경을 넘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구성하는 7개주 가운데 3개주(위트레흐트, 헬데를란트, 오버레이설)를 삽시간에 점령했다. 또한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동맹으로서 해군을 파견하면서 별도의 '제3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Third Anglo-Dutch Wars)'을 시작하며 네덜란드를 협공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덜란드가 AD 1673년 8월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와 4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비록 육지에서는 프랑스 군에게 고전했지만 바다에서는 해군이 선전하면서 AD 1674년 2월 '제2차 웨스트민스터 조약(Second Treaty of Westminster)'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AD 1674년 5월 레오폴트 1세가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어서 같은 해 8월 브란덴부르크 군도 프랑스 북동부의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그러자 프랑스가 스웨덴의 참전을 요청하면서 AD 1674년 12월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 구스타브 브랑겔의 이복 동생이자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의 주둔군 지휘관인 발데마르 폰 브랑겔이 국경을 넘어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했다. 알자스에서 레오폴트 1세의 오스트리아 군과 함께 프랑스 군과 싸우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스웨덴의 침공 소식을 듣자 즉시 회군을 결정했지만 겨울이 도래했기 때문에 마르크트브라이트에서 일단 겨울 숙영지를 편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AD 1675년 5월 26일이 되어서야 마그데부르크를 향해 출발했는데 이 때 무려 2주 만에 250km를 주파하였다.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보급마차와 보병대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약탈이 아니라 현지 구매를 통해 조달하며 민심의 이반을 막았다.

이러한 브란덴부르크 군의 강행군을 스웨덴 군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병력이 분산된 채 브란덴부르크로부터 하벨베르크 사이의 하벨란트 습지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게오르그 폰 데플링거에게 명령하여 중간에 해당하는 라테노우를 비밀리에 점령하여 스웨군을 서로 갈라놓도록 했다. 그리고 게오르그 폰 데르플링거는 폭우 속에서 야습을 통해 라테노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발데마르 폰 브랑겔이 엘베 강 건너편의 브라운슈바이크 군과 합류하기 위해서 스웨덴 군을 하벨베르크에 집결시켰으나 계속해서 내리는 여름 폭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AD 1675년 6월 17일 브란덴부르크 군이 나우엔에 접근하였고 동시에 주변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제 스웨덴 군은 페흐벨린에서 고립되었다.

이제 발데마르 폰 브랑겔은 페르벨린에서 린 강을 건너고자 했으나 양안이 이동이 불가능한 습지대였고 유일한 다리마저 파괴된 상태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수리하는 동안 하켄베르크의 남쪽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나 주변의 언덕을 미리 장악하지 않는 실수를 했고 이에 브란덴부르크 군이 주변의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하여 6월 18일부터 스웨덴 군의 오른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군이 다시 다리를 수리하여 언덕 위의 포병을 공격하고자 했기만 번번히 브란덴부르크 군의 기병대에게 번번히 격퇴당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보병대까지 투입하여 스웨덴 군을 몰아붙이고 기병대도 가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군은 다리가 수리될 때까지 버텨내고 어둠을 틈타 린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비록 페르흘덴 전투(Battle of Fehrbellin)는 국지전에 불과했고 실제 스웨덴 군의 피해도 경미했으나 유럽의 강군으로 손꼽히던 스웨덴 군이 그동안 그리 높게 평가받지 않았던 브란덴부르크 군에게 패배했다는 점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이제 스웨덴 군의 강력함에 대해서 의구심이 퍼지면서 스웨덴의 오랜 적대국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가 이번 기회에 예전에 스웨덴에게 빼앗겼던 스코네의 탈환할 기회로 여겼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반(反) 프랑스-스웨덴 동맹에 참여하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제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의 전쟁이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덴마크 사이의 '스코네 전쟁(Scanian War)'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AD 1675년 9월 15일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 중에서 스웨덴령 포메라이나 다음으로 큰 브레멘-베르덴 공작령에 대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덴마크가 공격을 시작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덴마크는 뮌스터 및 브라운슈바이크-뤼네베르크와도 동맹을 체결했다. 동맹군은 스웨덴의 요새를 하나하나 차례로 점령해 나갔으나 스웨덴은 용병들의 대규모 탈영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AD 1675년 말이 되면 스웨덴의 수중에는 슈타데, 칼스버그 만이 남게 되었으나 겨울이 도래했기 때문에 일단 전쟁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AD 1676년 1월 칼스버그가 항복하고 같은 해 9월 슈타데마저 점령당했다.

AD 1675년 10월부터 브란덴부르크 군이 덴마크 군이나 오스트리아 군의 지원을 받으며 스웨덴령 포메라이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브란덴부르크 군이 볼린 섬과 우세돔 섬을 점령한 후 페네 강을 건너 담가르텐을 약탈하고 트리프제스를 점령했으나 덴마크 군과 연합한 슈트랄준트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11월 브란덴부르크 군이 다시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의 주도인 볼가스트를 습격하고 이듬해 뤼겐 섬의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앙클람, 뎀민, 뢰크니츠 등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의 주요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거나 약탈했고 AD 1677년 12월 슈테친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2.8.2.2. 발트해 제해권 상실
2.8.2.2.1. 보른홀름 해전
보른홀름 해전

스웨덴은 고전 중인 북독일에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는 제해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AD 1675년 10월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의 스웨덴 함대가 출항했지만 추위와 폭풍우를 만나면서 2주도 안 돼서 스톡홀름으로 회항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구스타브 오토 스텐보크가 문책을 당했고 그를 대신하여 로렌츠 크로이츠가 스웨덴 함대를 새롭게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계속해서 바다로 나아가려고 했으나 AD 1676년 1월과 2월에 극심한 추위로 바다가 얼어붙었기 때문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AD 1676년 4월 29일 닐스 유엘이 이끄는 덴마크 함대 20척에게 고틀랜드 섬을 점령당했다. 이 때문에 23척의 스웨덴 함대가 5월 4일 출항했지만 역풍을 만나면서 5월 19일이 되어서야 고틀랜드 섬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 덴마크 함대가 이미 고틀랜드 섬을 떠나 보른홀름 섬에서 필리프 반 알몬데의 네덜란드 함대와 합류했다.

이제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는 스웨덴 남단의 스코네와 뤼겐 섬 사이에서 스웨덴이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에 병력을 보내는 것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스웨덴 함대가 덴마크 함대를 뒤쫓았고 5월 25일 아침 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했다. 이를 본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는 스웨덴 함대의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북서쪽의 외레순 해협으로 향했으나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뤼겐 섬 북동쪽에 위치한 야스문트로 향했다. 그렇지만 스웨덴 함대를 떨쳐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5월 26일 아침이 되자 보른홀름 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해전은 제1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First Anglo-Dutch War; AD 1652년 ~ AD 1654년) 이후로 선상전투가 배제된 채 종방향으로 일렬로 늘어선 단종진(Line of battle)을 취하면서 서로 포격만 주고 받는 형태가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스웨덴 함대는 수적 우위를 활용하지 못했고 오히려 항해술이 더 뛰어난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가 스웨덴 함대를 뿌리치고 외레순 해협으로 철수하여 스코네의 남서쪽의 팔스테르보에 도착했다. 이에 스웨덴 함대의 로렌츠 크로이츠는 덴마크-네덜란드 함대를 뒤쫓지 않고 스코네 남쪽의 트렐레보리에 정박한 뒤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2.8.2.2.2. 욀란드 해전
AD 1676년 5월 30일 로렌츠 크로이츠는 고틀란트 섬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욀란드 섬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가 다시 스웨덴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는 네덜란드의 부제독인 코르넬리스 트롬프가 이끌고 온 신규 함대가 합류하면서 숫자가 더욱 늘어난 상태였다. 특히 코르넬리스 트롬프는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Second Anglo-Dutch War; AD 1665년 ~ AD 1667년) 및 제3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Third Anglo-Dutch War; AD 1672년 ~ AD 1674년)을 경험한 유능한 해군 지휘관이었다. 이에 따라 코르넬리스 트롬프가 덴마크 함대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AD 1676년 6월 1일 스웨덴 함대와 그 뒤를 쫓는 덴마크-네덜란드 연합함대가 욀란드 섬과 스웨덴 본토 사이의 좁은 지역을 나란히 항해했지만 이 때 대강풍이 불면서 스웨덴 함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스웨덴 함대가 풍상의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지만 기동력이 좋은 덴마크 함대가 스웨덴 함대와 해안 사이의 좁은 틈을 돌파하면서 풍상의 위치를 빼앗기고 말았다. 더구나 스웨덴 함대의 기함인 크로난 호가 갑자기 기울면서 침몰하는 불운까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스웨덴 함대를 지휘해야 할 로렌츠 크로이츠와 선원 전원이 수장되면서 대혼란이 일어났고 코르넬리스 트롬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붙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스웨덴 함대의 지휘권을 인수한 클레스 우글라도 기함인 스베르데트 호가 포위당하며 집중 포격을 받았고 화선이 충돌하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클레스 우글라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대로 익사하면서 이제 두 명의 지휘관을 모두 잃은 스웨덴 함대의 진형이 와해됐기 때문에 욀란드 해전(Battle of Öland)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2.8.2.2.3. 노르웨이의 참전
욀란드 해전의 패배로 인하여 스웨덴은 발트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덴마크에게 내주어야 했고 북독일에 지원 병력을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덴마크 군이 외레순 해협을 넘어서 스코네를 본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AD 1676년 6월 29일 덴마크 군 14,500명이 헬싱보리의 남쪽의 라에 상륙했고 6월 29일 헬싱보리를 시작으로 스코네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군은 15,000명이었던 데 반해서 스코네에 주둔 중인 스웨덴 군은 5,000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이곳저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더욱이 스코네는 오랫동안 덴마크의 영토였기 때문에 스코네 사람들이 덴마크 군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덕분에 덴마크 군이 삽시간에 스코네의 상당 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고 스웨덴 군은 북쪽으로 밀려난 채 말뫼만이 유일하게 스웨덴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덴마크가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하자 덴마크와 동군연합(同君聯合) 상태였던 노르웨이도 스웨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총독인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5세와는 이복 형제 간이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역사에서는 스코네 전쟁을 '귈덴뢰베 전쟁(Gyldenløve War)'이라고 부르고 있다. AD 1675년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는 우선 만약에 있을 스웨덴 군의 침공을 대비하고 옛 노르웨이 영토인 보후슬렌을 탈환하려는 목적에 프레드릭스할에 노르웨이 군 4,000명을 파견하였다. 이후 스바르테보리(지금의 뭉케달)에 주둔 중인 루트거 폰 아셰베르크의 스웨덴 군과 국지전만 벌인 채 겨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듬해인 AD 1676년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손쉽게 우데발라를 점령한 후 스웨덴 군의 강력한 저항을 무너뜨리고 베네르스보리까지 함락시켰다.
2.8.2.3. 반격
2.8.2.3.1. 할름슈타드 전투
한편 스웨덴에서는 AD 1672년에 칼 11세가 성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섭정단이 대리 통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스코네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이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기는커녕 서로 내분을 벌일 정도로 무능함만 들어내고 있었다. 이에 칼 11세가 친정을 선포하며 통치의 전면에 나섰고 무능한 섭정단은 철저히 배제하였다. 그리고 덴마크에게 빼앗긴 스코네를 탈환하기 위해서 스몰란드에서 새로운 군대를 편성했다. 그러던 중 AD 1676년 8월 야콥 던칸이 이끄는 덴마크 군 4,000명이 할란드 지방의 할름스타드를 점령했는 데 이들의 목적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이제 예테보리까지 진격해 온 노르웨이 군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이에 8월 11일 칼 11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야콥 던칸을 차단하기 위해 나섰다.

칼 11세의 스웨덴 군과 별도로 루트거 폰 아셰베르크도 야콥 던칸의 덴마크 군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이에 야콥 던칸이 남쪽의 스코네로 후퇴하기 시작했는 데 그 때까지도 칼 11세의 스웨덴 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국 8월 17일 할름스타드 전투(Battle of Halmstad)에서 덴마크 군은 포위를 당한 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덴마크 군과 노르웨이 군의 합류가 실패로 돌아가자 9월 5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할름슈타드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 왔으나 3주 간의 포위전에도 불구하고 함락에 실패한 채 스코네로 후퇴하고 말았다.
2.8.2.3.2. 룬드 전투
AD 1676년 10월이 되면 스웨덴 군은 14,000명으로 증강되고 그 중 4분의 3이 기병으로 구성되자 칼 11세가 남쪽으로 진군하여 말뫼의 구원에 나서고자 했다. 하지만 스코네에서 덴마크 군의 선동에 봉기한 농민군의 방해로 보급선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된 상태에서 11월초 룬드로 향하게 되었다. 더욱이 셰블링에 강의 모든 도하 지점을 덴마크 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 11세는 일단 강의 북쪽에 진형을 편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1달여의 시간이 지나간 후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이 얼어붙자 12월 4일 새벽 칼 11세는 휘하 병력 8,000명(기병 6,000기, 보병 2,000명)에게 일제히 강의 얼음을 그대로 건너도록 명령했다.

비록 이 때 강을 방어하고 있던 덴마크 군은 보병 5,000명과 기병 6,000기, 네덜란드 해군 1,300명으로 도합 13,000명이었기 때문에 스웨덴 군을 수적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덴마크 군은 겨울이 도래했기 때문에 다음해 봄까지 더이상의 전투는 없을 것으로 방심하고 있었고 스웨덴 군이 도하를 시작했을 때가 새벽이었기 때문에 아직 자고 있는 중이었다. 경계병이 스웨덴 군의 도하를 알리자 덴마크 군이 허둥지둥 일어나 뒤늦게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만 스웨덴 군이 성공적으로 도하에는 성공했지만 병력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단 지형적인 이점을 얻고자 언덕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덴마크 군이 저지하고자 추격했지만 스웨덴 군이 이를 뿌리치고 일단 언덕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아침 9시부터 본격적인 룬드 전투(Battle of Lund)가 시작되었다. 덴마크 군이 동쪽에 위치했고 스웨덴 군은 서쪽에 위치한 채 서로 1km가 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포병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는 데 덴마크 군은 대포를 56문이나 보유한 데 반해서 스웨덴 군의 대포는 12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칼 11세는 스웨덴 기병의 우수성을 신뢰했고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덴마크 군의 좌익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의 전투 끝에 덴마크 군의 좌익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덴마크 군의 좌익이 그대로 후퇴하기 시작했으나 퇴로가 스웨덴 기병에게 막혔기 때문에 강의 얼음 위로 올라갔지만 얼음이 깨지면서 그대로 익사하고 말았다.

반대편에서는 덴마크 군의 우익이 펼친 공격에 스웨덴 군의 좌익이 밀려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치열한 전투 중에 덴마크 군의 총사령관인 카를 폰 아렌스도르프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프리드리히 폰 아렌스도르프가 지휘권을 인수받아야 했다. 그는 덴마크 군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스웨덴 군의 좌익을 몰아붙이고 있던 상태에서 정오가 되자 갑자기 전투를 중지시키고 병력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군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었고 오후 3시경 패주한 덴마크 군의 좌익을 뒤쫓던 칼 11세가 이를 중단하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덴마크 군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군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이렇게 하여 룬드 전투는 스웨덴 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양 측 모두 피해가 막심하여 덴마크 군은 총 13,000명 중 7,000명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고 승리한 스웨덴 군도 총병력 8,000명 중 절반이 넘는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룬드 전투는 참전한 총 병력의 70%에 육박하는 피해가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어쨌든 룬드 전투에서 스웨덴 군이 승리하면서 이제 21살에 불과한 칼 11세의 명성이 크게 올라갔고 패배한 덴마크 군은 란스크로나로 후퇴해야만 했다.
2.8.2.3.3. 란스크로나 전투
스코네 지방 중 덴마크 군에게 저항하던 말뫼가 AD 1677년 6월말 덴마크 군의 공격을 격퇴해내었다. 그러자 7월초 칼 11세가 덴마크 군이 말뫼 포위전(Siege of Malmö)의 피해를 아직 복구하지 못한 틈을 타고 덴마크 군의 거점인 란스크로나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7월 14일 아침 칼 11세가 스웨덴 군 13,000명(보병 5,000명, 기병 4,000기, 농민군 4,000명)을 4열로 편성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 덴마크 군은 총 12,000명(보병 5,000명, 기병 7,000기)으로서 기병의 숫자가 우세하였지만 크리스티안 5세는 언덕 위의 유리한 지형을 포기한 채 성벽을 등지는 위치로 옮긴 상태였다.

처음에 전투는 대포의 포격을 주고 받으며 시작되었고 칼 11세는 이번에도 직접 기병을 이끌고 덴마크 군의 좌익을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덴마크 좌익이 무너지고 덴마크 포병도 스웨덴 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덴마크 군의 우익도 크리스티안 5세가 측면 공격을 감행하여 스웨덴 군의 좌익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그렇지만 예비대로 있던 스웨덴의 농민군이 가세하면서 스웨덴 군의 좌익이 재편성에 성공했다. 또한 중앙에서도 덴마크 군의 좌측 측면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칼 11세가 이끄는 스웨덴 우익 기병까지 가세했고 스웨덴 군 좌익도 굳건하게 버텨냈기 때문에 덴마크 군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오후 4시경 크리스티안 5세가 먼저 도망쳤고 오후 5시가 되면 모든 덴마크 군이 철수하면서 란스크로나 전투(Battle of Landskrona)는 스웨덴 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칼 11세는 할름스타드 전투, 룬드 전투, 란스크로나 전투에서 연이어 덴마크 군에게 승리를 거두며 반격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란스크로나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불리함은 변함이 없었다. 발트 해의 제해권을 덴마크가 장악하고 있었고 란스크로나도 여전히 덴마크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는 자유롭게 병력을 증원시킬 수 있었다.
2.8.2.4. 지속되는 패배
2.8.2.4.1. 묀 해전
묀 해전

AD 1677년 3월 해전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헨리크 호른이 스웨덴 함대의 새로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코르넬리스 트롬프의 네덜란드 함대가 발트 해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칼 11세는 예텐보리의 전대에게 스톡홀름의 헨리크 호른의 본대와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다만 6월 초까지 헨리크 호른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텐보리의 에리크 시외블라드는 5월 20일 먼저 출항하였고 바람이 잠잠했기 때문에 5월 29일이 되어서야 대벨트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닐스 유엘의 덴마크 함대가 이틀 간의 추격에 나서면서 5월 31일 묀 섬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덴마크 함대가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묀 해전(Battle of Møn)에서 스웨덴 함대는 8척을 잃고 에리크 시외블라드가 사로잡히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2.8.2.4.2. 코이에 만 해전
AD 1677년 6월 9일이 되어서야 헨리크 호른의 스웨덴 함대가 스톡홀름 근처의 달라뢰를 출항했다. 그리고 6월 13일 욀란드 섬 근처에서 에리크 시외블라드의 생존 함선과 합류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 닐스 유엘의 덴마크 함대도 6월 24일 코펜하겐을 출항하였으나 바람이 잠잠했기 때문에 6월 29일이 되어서야 서로 조우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30일 아침 스웨덴 함대가 덴마크 함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으나 이 때 덴마크 함대는 바람의 위치가 불리했기 때문에 닐스 유엘은 일단 회피하기 시작했으나 거리를 벌리는 데 실패하자 7월 1일 아침 코이에 만 해전(Battle of Køge Bay)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때 스웨덴 함대는 45척이었는데 반해서 덴마크 함대는 34척에 불과했으나 스웨덴 함대의 진형에 틈이 생기자 덴마크 함대가 그 틈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성공하면서 스웨덴 함대는 진형이 붕괴된 채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었다. 결국 코이에 만 해전은 스웨덴 함대가 20척의 함선을 잃는 피해를 당했지만 덴마크 함대는 단 1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을 정도로 덴마크 함대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코이에 만 해전의 패배가 결정타가 되면서 스웨덴 함대가 더이상 덴마크 함대와의 전투를 회피하였기 때문에 덴마크가 발트 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웨덴은 바다를 통한 보급이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2.8.2.4.3. 보후슬렌 상실
육지에서는 덴마크 군이 고전하는 것과 별개로 노르웨이 군이 선전을 거듭하면서 스웨덴에게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AD 1677년 초의 매서운 겨울 한파가 지나가자 노르웨이 군이 본격적으로 보후슬렌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AD 1677년 6월 6일 노르웨이 군 1,600명이 마르스트란 섬에 상륙하여 6월 23일 점령에 성공했다. 마르스트란 섬을 차지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부동항을 얻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한층 더 유리해졌다. 그리고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가 이끄는 스웨덴 군 8,000명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노르웨이 군에게 패배하면서 이제 보후슬렌 지방 중 스웨덴 군의 수중에 남은 지역은 보후스 요새가 유일하게 되었다.
2.8.2.4.4. 우데발라 전투 패배
마르스트란 섬이 노르웨이의 수중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예테보리가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는 달라르나의 징집병 1,500명과 신규 기병 1,200기를 포함한 새로운 군대 3,000명을 모집했다. AD 1677년 8월 10일 바네르보리에 집결한 스웨덴 군이 우데발라로 향했으나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가 이끄는 노르웨이 군 5,600명에게 따라잡히면서 8월 28일 우데발라 전투(Battle of Uddevalla)가 벌어졌다.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가 수비 태세를 갖춰지만 덴마크 군이 측면을 공격하여 예타 앨브 강으로의 퇴로를 차단했다. 다만 징창을 든 달라르나 징집병이 스웨덴 군이 예타 앨브 강을 건널 때까지 덴마크의 기병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후 다리를 부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데발라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망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는 칼 11세의 심한 질책을 받아야 했다.
2.8.2.4.5. 옘틀란드 일시 상실
노르웨이의 울리크 프레드리크 귈덴뢰베는 보후슬렌에 대한 공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AD 1677년 여름 트론헤임과 뢰로스의 노르웨이 군을 이동시켜 또 다른 노르웨이의 옛 영토인 옘틀란드의 탈환에 나섰다. 그리고 노르웨이 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스웨덴 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노르웨이는 손쉽게 옘틀란드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옘틀란드가 예전에 노르웨이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옘틀란드 사람들이 노르웨이가 아닌 스웨덴의 지배를 더 선호하며 스웨덴과 연계를 도모했다. 더욱이 스코네의 전황이 덴마크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기 때문에 결국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는 AD 1677년 11월 옘틀란드에서 노르웨이 군을 철수시키게 된다.
2.8.2.5. 포메라이나 상실
코이에 만 해전의 승리로 발트 해를 통한 스웨덴 군의 북독일 증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는 이제 뤼겐 섬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이는 브란덴부르크의 슈트랄준트 공격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이기도 했다. AD 1677년 9월 17일 4,200명의 덴마크 군이 뤼겐 섬의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이 당시 스웨덴 군은 슈트랄준트의 방어에 집중하느라 뤼겐 섬의 병력 대부분을 차출할 상태였기 때문에 덴마크가 손쉽게 뤼겐 섬을 점령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스웨덴의 오토 빌헬름 폰 쾨니그스마르크가 반격에 나서면서 AD 1678년 1월 18일 뤼겐 섬을 되찾아 갔다.

이에 AD 1678년 9월 덴마크가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다시 한번 뤼겐 섬의 공격에 나섰다. 닐스 유엘의 덴마크 함대 27척이 동원되어 병력 상륙을 엄호했고 병력 수송선의 지휘는 네덜란드의 코르넬리스 트롬프가 담당하기로 했다. 브란덴부르크 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직접 함대를 지휘하며 게오르그 폰 데플링게르가 이끌게 될 7,240명의 병력과 함께 9월 22일 도착했다. 스웨덴 군으로서는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뤼겐 섬이 다시 덴마크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이제 슈트랄준트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AD 1678년 10월 브란덴부르크 군이 슈트랄준트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그동안 오토 빌헬름 폰 쾨니그스마르크가 선전을 거듭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10월 10일 브란덴부르크의 포병이 남쪽에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바다에서도 소규모이지만 브란덴부르크 함대가 포위전에 가세했다. 결국 10월 11일 슈틀란준트의 남쪽 절반이 파괴되자 스웨덴 군도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1월 스웨덴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이프스발트까지 브란덴부르크에게 점령당하면서 스웨덴은 포메라이나에 대한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2.8.2.6. 전쟁의 종식
2.8.2.6.1. 생제르맹앙레 조약 및 퐁텐블로 조약의 체결
이제 스웨덴은 북독일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대신에 브란덴부르크가 뤼겐 섬을 제외한 스웨덴령 포메라이나와 브레멘-베르덴 공작령을 차지했으며 뤼겐 섬은 덴마크의 차지가 되었다. 다만 덴마크도 칼 11세에게 할름슈타드 전투(Battle of Halmstad)와 룬드 전투(Battle of Lund)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당초 목표로 했던 스코네 지방의 탈환에는 실패했다. 어쨌든 스웨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와 덴마크에게 압력을 가하여 스코네 전쟁으로 획득한 모든 영토를 스웨덴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즈음 프랑스가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자신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 개입도 불사할 것처럼 압박하기 시작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아직 프랑스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AD 1679년 6월 29일 '생제르맹앙레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을 체결하고 프랑스로부터 배상금 300,000 탈레르(은화)를 지급받고 프리슬란트 동부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를 모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오데르 강 동쪽의 골레니우프와 돔비에는 그대로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덴마크도 AD 1679년 9월 2일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을 체결하고 모든 점령지를 스웨덴에게 반환했다.
2.8.2.6.2. 룬드 조약의 체결
이렇게 하여 스웨덴은 불리했던 전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실지를 회복하면서 스코네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조약에서 스웨덴은 배제된 채 프랑스와 체결되었기 때문에 스웨덴으로서는 자존심이 크게 상하게 되었다. 이에 스웨덴에서는 덴마크와 독자적으로 협상을 벌여 AD 1679년 9월 26일 별도의 룬드 조약(Treaty of Lund)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서 퐁텐블로 조약의 영토 반환이 재확인되었고 덴마크의 스코네 영유권 주장도 철회되었으며 덴마크가 점령한 북독일의 스웨덴 영토인 비스마르와 뤼겐 섬도 모두 스웨덴에게 되돌아왔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발트 해 교역에 대한 네덜란드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스웨덴과 덴마크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이를 보증하기 위해서 AD 1680년 칼 11세가 크리스티안 5세의 누이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칼 11세가 그의 두 처남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사이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을 때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를 지지했기 때문에 AD 1689년 스웨덴과 덴마크의 우호 관계는 다시 깨어지고 만다.

2.8.3. 재건과 개혁 정책

스코네 전쟁이 마무리되자 칼 11세는 더 이상의 대외 정책을 포기한 채 향후 프랑스가 벌이는 모든 전쟁에서 계속해서 중립을 유지하며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스웨덴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 부왕인 칼 10세 구스타브 시절에 시도되었으나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던 토지 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섭정 정부 시절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가 이루어져 예전에 왕실 소유였던 토지에 대한 환수 정책이 추진되어 칼 11세의 통치 말기가 되면 왕실 소유의 토지가 전체 스웨덴과 핀란드 영토의 1%에서 30%로 크게 확대된다.

또한 발트 해 건너편의 영토까지 토지 환수 정책이 추진되었고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에서는 튜튼 기사단에 의해 기증된 토지까지 반납이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왕실 재정이 크게 늘어났는 데 그 중 절반은 발트 해 건너편의 영토에서 징수한 것이었다. 토지 환수 정책에 따라 예전부터 상속된 토지를 보유한 대귀족을 제외한 나머지 중소 귀족들은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채 국가에서 지급하는 봉록으로 생활을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국정 운영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그리고 왕실 토지를 일반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하면서 농민들이 귀족들에게 영속되어 농노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후 칼 11세는 풍족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용병 25,000명을 상비군으로 고용하여 발트 해 건너편의 영토에 대한 방어를 맡겼다. 그리고 AD 1682년 징집제도 개편하여 1,200개의 작은 구역에 1개 연대 병력을 징집하도록 분할하고 각 단위 구역마다 이들을 통솔할 용병 1명을 고정 배치하며 이들에게는 왕실 토지를 부여해 주었다. 이를 통해서 스웨덴은 유사시에 40,000명의 징집병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보조병도 25,000명에 이르렀다. 칼 11세가 재편한 스웨덴의 징집제는 향후 200년간 유지될 정도로 매우 효율적인 제도로 평가받게 된다.

또한 칼 11세는 덴마크에게 대항할 새로운 해군도 창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겨울만 되면 한동안 바다가 얼어붙는 기존 스톡홀름 항구를 대신할 새로운 부동항의 필요성에 따라 AD 1680년 에리크 달베르그에게 블레킹에 지역에 새로운 군항으로 건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소가 건설되고 부두와 창고가 들어서며 스웨덴 함대의 새로운 해군 기지로 삼았고 칼 11세의 이름을 따서 '칼스크로나(Karlskrona)'라고 명명되었다. 이후 칼스크로나는 스웨덴 해군의 중심 기지이자 스웨덴의 주요 대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칼 11세는 AD 1634년 이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추밀원의 권한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스코네 전쟁을 통해서 추밀원의 무능함이 입증되어 추밀원은 반발할 수가 없었다. AD 1680년 칼 11세는 기존 추밀원을 해산하고 새로운 추밀원을 구성한 후 왕은 이제 필요한 경우에만 추밀원의 자문을 구할 뿐 추밀원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추밀원은 최고 법원으로서의 재판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을 뿐 나머지 일상 통치는 칼 11세가 별도의 행정기관(ambetsverk)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감을 얻은 칼 11세가 AD 1693년 '신분 의회(Riksdag)'로부터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받으면서 신분제 의회의 동의없이도 단독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풍부해진 재정 덕분에 많은 관료들을 채용하면서 더 이상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관료들을 통하여 한 전제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힘이 강화된 덕분에 지방 정부의 영향력이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지방 통치자들은 더이상 토지를 부여받지 못한 채 봉급만 받으면서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제한된 권한만 행사하게 되었다.

칼 11세는 친(親) 프랑스 정책에서 탈피하여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위해서 AD 1681년에는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독일의 라인팔츠 선제후령을 무력 점령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영국-네덜란드, 스페인, 사보이아 공국 등과 벌이게 된 '대동맹 전쟁(AD 1689년 ~ AD 1697년)'에서는 중립을 유지했고 이를 종식시키는 AD 1697년의 라이스웨이크 조약(Treaty of Rijswijk)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중립 정책 덕분에 칼 11세 시절 스웨덴은 모처럼 20년 간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2.8.4. 급작스런 사망

비록 칼 11세는 불과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성년이 되어 스코네 전쟁의 국난을 극복하고 왕실 재정을 회복시켰으며 절대주의 왕정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덕분에 오랜 전쟁으로 얻은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강대국으로서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다만 왕비인 울리카 엘레오노라 사이에서 총 7명의 자식을 얻었으나 그 중 3명만이 생존했고 AD 1693년 왕비인 울리카 엘레오노라도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칼 11세는 생존한 아이 중 유일한 아들인 칼 12세를 모든 공식행사에 함께 하며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하지만 AD 1694년부터 칼 11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고 AD 1697년 4월 불과 41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칼 12세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아야 되었다.


[1] 귀족들만 사유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돈만 많으면 땅을 살 수 있었다. 애초에 북유럽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귀족이라고 국왕이 영지를 주거나 그러지 않았다. [2] 현 러시아 실리셀부르크. [3] 현재 라트비아 살라스필스. [4] 현재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의 건립자. [5] 현 폴란드 엘블롱크 [6] 현 폴란드 푸츠크 [7] 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8] 앞서 나온 오레셰크 요새로 현 러시아 실리셀부르크. [9] 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10] 폴란드령 리보니아로 현재 라트비아 라트갈레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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