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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5:55:59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

파일:LBvsMJ1.png
파일:1000007912.jpg
보스턴 셀틱스 No. 33
래리 버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 32
매직 존슨
1. 개요2. 상세3. 구체적인 비교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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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를 다룬 문서.

2. 상세

매직 존슨 래리 버드는 각자의 농구 실력으로도 인정받았지만 이들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이들이 망해가던 NBA를 살렸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라이벌리는 NCAA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둘은 1979년 대학 농구 결승전에서 만났으며 이 경기에서는 매직 존슨의 미시간 주립대가 래리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 했다. 사실 인디애나는 버드의 하드캐리로 결승에 올라온 팀에 가까웠기 때문에 미시간 주립대는 훗날의 조던 룰과 같이 버드만 집중 공격하는 방향으로 잡았고, 결국 인디애나의 버드가 더블팀, 트리플팀을 당하며 무너지자 미시간 주립대는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이 경기를 시점으로 NBA는 대놓고 이들을 앞세우며 망해가던 인기를 다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후세에 이들의 등장을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라이벌 관계", "가장 완벽한 출연진" 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NBA는 결승전마저 녹화를 할 만큼 인기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등장을 앞세우는 건 어찌보면 NBA로서는 당연히 해야할 숙명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대조점을 비교해보면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수가 없는 너무나도 인기를 끌만한 요소들이 많다.
보통 라이벌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우열이 존재한다.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의 경우 매 시즌 근소하게 조던이 우위였고[8], 윌트 체임벌린은 개인기량이 완벽히 우세고, 빌 러셀은 팀승리에서 완벽히 우세이다. 그러나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는 둘 다 개인기량도 뛰어난 팀플레이어란 점에서 같으며, 팀전력 역시 거의 대등했다.[9][10] 커리어에서는 우승이 더 많은 매직이 우위이지만 대체로 비슷한 수준에서 묶이고, 누가 더 잘했냐를 두고 볼 때는 정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 이 정도로 균형이 맞는 라이벌 관계는 매우 드물다. 80년대 초중반은 버드의 셀틱스가 그리고 80년대 중후반은 레이커스가 거의 나란히 나눴다.[11]

이 덕분에 이들이 세번 결승에서 만났을때는 세번 모두 명승부를 연출해냈다. 특히 1984년에 시리즈 전적에서 뒤지던 버드가 팀원들을 강하게 질책하고 케빈 맥헤일의 거친 파울 이후 셀틱스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시리즈를 역전시키고[12][13], 바로 다음해인 1985년에 바로 매직이 복수에 성공하며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셀틱스를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다는 스토리라인은 (매직을 주인공으로 봤을때) 스포츠 영화의 왕도에 가까운 이야기.[14]

당연한 부분이지만 매직과 버드가 서로간에 쌍방향적인 경쟁의식을 품고있었다. 버드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매직의 기록을 확인하곤 했다"라거나, 매직이 "나에게 1년 일정은 셀틱스와의 2경기와 나머지 80경기였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이런 다른 점들 때문에 매직과 버드는 초반에는 정말 라이벌답게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둘이서 같이 컨버스 농구화 광고를 찍게 된 시점으로는 코트에서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사적으로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15] 결국 둘의 실력도 막상막하이고 전적도 일방적이지 않으며 경기장을 벗어나면 최고의 친구인, 정말 만화에서조차 등장하기 힘든 좋은 라이벌 관계가 된 것.

매직이 HIV에 걸렸다는걸 알게 되자 버드는 ''살면서 처음으로 농구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라고 말 할 정도로 이 둘은 서로를 의식했다. 그리고 당연히 경기장 내에서는 전력을 다해 싸웠다. ESPN은 이 둘을 조명해서 Magic & Bird - A Courtship of Rivals 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시청한다면 라이벌이면서도 친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기자는 "사람들이 말하길, 마이클 조던이 NBA를 살렸다고 하더군요. 웃기고 자빠졌네요.[16] 매직과 버드가 NBA를 구했습니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요." 라고 강조할 만큼 이들의 라이벌리가 NBA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추가로 이들은 각각 농구 외적인 이유로 각각의 커리어가 짧아져 거의 완전히 겹치게 되었다는 기막힌 우연도 있다. 원래 버드는 매직보다 세살이 많고, 고등학교 졸업 연도 역시 3년 차이(1974년/1977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설령 버드가 대학을 졸업하고 매직은 그대로 2학년만 마치고 나왔어도 버드가 먼저 데뷔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있다시피 버드는 명문 인디애나 대학에 입학하고도 (농구가 아닌) 번잡한 캠퍼스 라이프에 적응못해 자퇴, 고향에서 1년을 허비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졸업한지 5년만에 데뷔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이 데뷔한 1979년만 해도 원래대로라면 1979년 드래프트 1,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레이커스, 시카고 불스가 둘을 나란히 지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규정을 교묘하게 이용한 보스턴 셀틱스가 1978년 드래프트에 나오지도 않았던(따라서 당연히 어떤 팀도 지명할 생각을 못했던) 버드를 1년 먼저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NBA의 대표적인 라이벌 레이커스와 셀틱스에 각각 뽑혔다. 한 마디로 촌동네 출신인 버드의 적응 문제 때문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둘이 동시에 데뷔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의 은퇴도 마찬가지다. 매직은 1991년, 버드는 1992년에 은퇴했지만 거듭된 부상으로 몸이 아작나 커리어 후반부는 거의 악으로 깡으로 버틴 버드와 달리 매직은 1990-91 시즌 종료 당시 32세가 채 안되었고, 올-NBA 퍼스트 팀에 오르며 건재했다. 본인의 기량과 팀은 명확히 하락세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거구로 인한 과부하나 몸상태를 감안해도 최소 몇년은 정상급 선수로서 더 뛸 수 있었다. 그런데 HIV 바이러스로 조기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즉, 정상적으로라면 버드가 몇년 더 일찍 NBA생활을 시작하고, 매직이 몇년 더 늦게 NBA생활을 끝냈어야 할 것이 농구 외적인 문제로 버드는 데뷔가 늦어지고, 매직은 은퇴가 빨라져 동시에 데뷔하고, 불과 1년 차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막힌 우연이다. [17]
그리고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하던 이 두 사람은 1992년에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둘이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얻게 된다.[18]

3. 구체적인 비교

매직 존슨 비고 래리 버드
5회
(1980, 1982, 1985,
1987-88)
NBA
챔피언
3회
(1981, 1984, 1986)
3회
(1980, 1982, 1987)
NBA
파이널 MVP
2회
(1984, 1986)
3회
(1987, 1989-90)
NBA
MVP
3회
(1984-86)[19]
퍼스트 팀 9회 (1983-91)
세컨드 팀 1회 (1982)
ALL-NBA팀 퍼스트 팀 9회 (1980-88)
세컨드 팀 1회 (1990)
12회
(1980, 1982-92)
NBA
올스타
12회
(1980-88, 1990-92)
2회 (1990, 1992) NBA
올스타전
MVP
1회(1982)
어시스트왕 4회
(1983-84, 1986-87)
스틸왕 2회 (1981-82)
All-Rookie 퍼스트 팀 (1980)
기타
수상실적
All-Defensive 세컨드 팀 3회 (1982-84)
올해의 신인 (1980)
All-Rookie 퍼스트 팀 (1980)


MVP 수상 횟수는 각각 3회로 동일하다. MVP 셰어는 버드가 앞서며, 각각 5.612와 5.104로 버드가 역대 4위, 매직이 5위에 올라있다. 여기에 올-NBA 퍼스트/세컨드 팀 수상과 올스타 선정 경력 역시 전부 동일한데, 이쯤되면 양측의 수상 이력조차 이들이 동급의 라이벌이었다고 대놓고 말해주는 수준.

버드는 매직에게 없는 올-디펜시브 팀을 세 차례나 수상한 바 있고, 반대로 매직은 어시스트왕 4회(+ 스틸왕 2회)를 해내어 버드에게 없는 Stat Leader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밸런스가 매우 좋은 공수겸장이라는 버드의 특성과 팀의 메인 핸들러이자 역대 최고수준의 패서라는 매직의 특성이 드러나는 부분.

또한 양측 모두 NBA에서 역대급으로 센세이셔널한 루키시즌을 보냈는데, 버드는 직전시즌 29승 53패를 기록한 팀을 61승 21패로 정규시즌 1위까지 끌어올리며 루키의 신분으로 MVP 4위에 퍼스트 팀이라는 레전드급 시즌을 보냈다. 이 시절엔 기량면에서는 매직을 압도했던 만큼 신인왕은 역시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매직 역시 루키 신분으로 우승과 파이널 MVP 수상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다.[20]

이들이 동급의 라이벌이면서도 커리어 측면에서 매직이 다소나마 웃도는 이유는 바로 우승 이력 때문. 5우승 vs 3우승 및 3파이널 MVP vs 2파이널 MVP로 반지와 파이널 MVP에 있어서는 매직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파이널 맞대결 역시 2:1로 매직이 앞선다. 다만 우승 횟수의 경우 버드가 뛰던 동부보다 매직이 뛰던 서부가 비교적 수월했던 점, 커리어 전반적으로 매직의 팀원들이 더 강했던 점을 고려할 만 하다. 파이널 MVP 역시 버드가 놓친 1980-81 시즌의 경우 버드가 받았어야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21]

또한 매직이 당시까진 팀의 명백한 1인자이자 매 시리즈에서 최고의 에이스였던 카림 압둘자바를 제치고 파이널 MVP를 수상한[22] 1979-80 시즌, 찰스 바클리가 38대 27로 1위표를 훨씬 많이 획득했음에도 시스템의 허점으로 2~3위표를 많이 받은 매직에게 시즌 MVP가 돌아간[23][24] 1989-90 시즌 등, 매직이 여러모로 굵직한 상을 앞두고 수상 운이 좋았던 면도 있다 보니 '실력은 동등하나 환경과 운으로 커리어 순위가 근소하게 갈린 케이스'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25]

즉, 커리어 측면에서는 매직이 우위를 점하나, 그럼에도 버드를 섣불리 매직의 아래에 깔아두기는 꺼려질 정도로 양측의 기량이 대등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4. 여담


* 래리 버드의 은퇴식에서 셀틱스의 라이벌인 자신의 소속팀 레이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웃으며 등장했는데, 트레이닝복을 벗자 안에 입고있던 셀틱스 유니폼이 나타나는 장면은 역대 모든 선수의 은퇴행사 중 최고의 퍼포먼스로 꼽힌다.

* 매직 vs 버드를 앞세운 80년대 레이커스 vs 셀틱스 라이벌리는 한참 성장기였던 비디오게임으로 이어져, 1989년 MS-DOS 일렉트로닉 아츠가 Lakers versu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를 발매하면서 농구 비디오게임계의 한 획을 그었다. 이 게임은, 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실존하는 팀과 실존 선수의 초상권,명명권을 리그로부터 구입해 사용한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이 게임이 성공하고 1991년 세가 제네시스로 이식되면서 후대 NBA 라이브 시리즈로 이어지는 EA Sports NBA 비디오게임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었다.

5. 관련 문서


[1] 래리버드는 전학생이었기에 2학년이던 77시즌부터 뛸 수 있었다. [2] 3년간 버드의 기록은 30.3점 13.3리바운드 4.6어시스트 2.6스틸 0.9블럭 야투율 53.3% 자유투 82.2%였다. 참고로 인디애나 주립대 역사상 최고 성적은 아직까지도 1979년 준우승이며, 동문 중 디비전 1에서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받은 선수는 오직 버드 뿐이다. Duane Klueh가 올해의 선수상을 1948년에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NAIA의 전신인 NAIB 대학선수상이다. 약팀에 입단해 우승후보급팀으로 만드는 버드의 힘이 대학시절에도 여전했던 것이다. [3]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기 꽤 남아있었다 [4] 더구나 농구는 당시 흑인이 백인에게 유일하게 우세를 점하는 종목이었다. 백인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자랑하는 여타 구기 종목과는 다르게 농구만은 흑인들이 주류를 이루던 스포츠였고 한때 ‘백인들은 점프를 못해{White Men Can’t Jump}’라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이 영화의 감독이 저 유명한 뉴욕 닉스 열성팬인 스파이크 리였다.) 흑인들이 위세를 떨치는 구기 종목이었다. 참고로 이 영화 제목은 후에 밈으로 까지 이용될 정도로 대중화된다. 다시 말해 ’백인들은 농구를 못한다‘ 정도로(…). [5] 1980년대의 NBA는 현대 못지 않게 공격페이스가 빠른 시절이었다. 2019-20 시즌에 NBA평균 페이스가 100.3을 기록하며 1989년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했고, 지난 30년간 100을 넘은 적은 이때랑 2018-19 시즌 (100)까지 두 번 뿐이다. 그런데 1979-80 시즌부터 1988-89 시즌까지 NBA는 단 시즌을 빼고 매번 100 이상을 기록했다. 당시는 수비가 거칠었던 시기였고 득점기술이 현대만큼 발달하지 못해 득점효율은 공격농구의 정점인 2021년만큼 높지 못하지만, 이때 공격페이스만큼은 굉장히 빠르게 흘러갔다. 매직의 최전성기이던 1986-87 시즌 당시 레이커스는 101.6을 기록해 리그 10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2020-21 시즌 13위를 기록한 토론토 랩터스와 같은 수치. 1986-87 시즌 페이스 1위 팀은 106.2를 기록한 덴버, 2020-21 시즌은 106.6을 기록한 워싱턴이었다. 직후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NBA 역사상 유례없는 지공농구 시대가 열려서 묻히는 부분인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NBA는 상당히 페이스가 빨랐다. 현대 농구가 수비에서 신체접촉을 금하기 때문에 공격전술이 수월하게 이뤄져 빠른 거라면 당시는 전술이 현대에 비해 빈약하지만 일단 거칠게 부딫히고 보는 시대라 신체소모도 장난 아니었다. [6] 당시와 그 이전을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하프코트 오펜스를 구사하는 팀이 바로 보스턴 셀틱스였다. [7] 다만 저 소속팀 연고지와는 달리, 두 사람의 실제 고향은 미국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미시건 인디애나 출신이다. 그러나 출신지역만 봐도 두 선수는 대조적인데, 매직이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낸 랜싱시는 2010년 기준 11만명으로 미시건 주에서는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고, 공업과 상업지역이 꽤 발달한 지역이었다. 반면 마찬가지로 버드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낸 프렌치 릭은 소속된 오렌지 카운티(캘리포니아의 있는 동명의 지역과 다르다) 인구를 쳐도 (2010년 기준) 2만명 남짓인데다 프렌치 릭은 고작 2천 명도 안되는 코딱지만한 시골동네였다. 이 때문에 버드가 고향 인구의 열배가 넘는 거대 캠퍼스를 가진 인디애나 대학에 처음 갔을때 적응 못하고 자퇴했던 것. 즉, 출신 지역만 봐도 도시 소년과 시골 소년으로 대비된다. 매직이 클 때만 해도 미시건 주는 미국 공업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지금의 낮은 위치까지는 아니었다. [8] 이 때문에 누적된 커리어는 꽤 차이가 난다. [9] 레이커스가 우승횟수가 많은건 1980년대에는 동부가 더 빡셌기 때문이고, 1980년대 통틀어 꾸준히 정규시즌 성적을 낸 건 셀틱스였다. NBA/역사 항목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80년대 대부분간 동부가 확연히 전력이 우위였으며, 우승권에서 격차는 더 심했다. 이 기간에 셀틱스는 87-88시즌까지 61.1승을 하다가 88-89시즌에 42승으로 말아먹는바람에 80년대 통틀어 평균 59.2승, 레이커스는 59.1승이 된다. 버드가 부상으로 허덕이던 90, 91시즌까지 더해서 둘이 같이 뛴 12년간 승수를 비교하면 레이커스가 59.3승, 셀틱스가 58.3승이 된다. [10] 매직은 제임스 워디 카림 압둘자바, 버드는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시라는 뛰어난 팀원이 있었다. [11] 거의라고 하는건 89-90년 피스톤즈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피스톤즈는 거의 막판에 올라온데다가 이 둘보다는 불스와 더 엮이기에 80년대 강자의 이미지가 레이커스와 셀틱스보다는 옅은 편이다. [12] 둘이 NBA에서 처음 결승에서 맞붙은 이 시리즈를 보면 1985년, 1987년과도 비교불허일 정도로 유난히 과열양상을 보였다. 버드는 비교대상인 매직보다 자신이 확실히 우위란 걸 보여주고자 했고 매직도 마찬가지인데다가 프랜차이즈 역대 파이널 전적 전패 상대인 셀틱스를 꺾고 싶어했다. 셀틱스가 2승 1패로 질질 끌려가고(이것도 2차전을 제임스 워디의 실책으로 운 좋게 이긴 것이다) 특히 3차전에서 33점차 개박살이 나자 버드의 '우리가 계집애들처럼 플레이하고 있다(playing like sissies)' 발언이 나왔고 연장 초접전이던 4차전에서는 케빈 맥헤일의 클로스라인 하드파울과 양 팀간 다툼이 있었다. 버드와 압둘자바 사이 말싸움이나 중간에 버드가 공을 뿌리치며 매직에게 으르렁거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바로 다음 해 파이널만 봐도 (물론 치열했지만) 이 때에 비하면 훨씬 유해진 만큼 매직과 버드가 (서로 싫어하면서) 큰 무대에서 처음 맞붙은 이때가 가장 분위기가 뜨거웠다. [13] 여기에 버드는 개인적으로 매직에 대한 복수가 불타있었는데, 승승장구하던 버드의 선수 생활에 물론 팀 복이 없었다지만 매직이 처음 그를 가로 막아 대학 우승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 기자에 의하면 버드는 매직을 상대로 우승을 거둔뒤, 숨을 고르고는 그 기자에게 "드디어 그(매직)을 이겼어" 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4] 심지어 이 해에도, 전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MVP는 래리 버드였기 때문에 "정상에 위치에 있는 라이벌을 꺾는다"는 점에서도 딱이다. [15] 이 촬영은 버드의 자택에서 하게되었는데 매직은 버드의 어머니가 직접 차려준 음식을 먹었고, 버드와 매직은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버드는 "저는 그때 처음 매직이 아닌 '어빈'을 만나게 됐습니다. 확실히 저는 어빈이 매직보다 좋더군요." 라고 회상했다. [16] 실제로는 욕설을 사용했다. [17] 물론 버드는 매직이 은퇴한 이후 1991-92 시즌을 뛰고 은퇴했고, 매직은 1995-96 시즌에 컴백해 32경기를 더 뛰었다. 그러나 두 시즌 모두 실질적인 커리어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버드는 스탯은 20-9.6-6.8 정도로 훌륭했지만 기동력이 크게 떨어졌고 45경기밖에 못 뛰었고, 매직은 젊은 팀원들과 조화에 실패하면서 기대만큼 위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즉,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NBA전설로서 퇴장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매직의 저 컴백 덕분에 햇수로 두 사람은 13시즌, 정확히 똑같이 되었으며 둘의 정규시즌 출장경기 수는 매직이 단 9경기 많을 뿐이다. [18] 사실 버드는 몸 상태도 그래서 뛰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매직의 설득으로 같이 뛰게 되었고 결국 둘이 공동 주장으로 뛰게 된다. 드림팀 영상을 보면 틈만 나면 누워있는 버드를 볼 수 있는데 사실상 거의 상징적인 의미로 뛴 것이다. [19] 여담으로 이 이후에 3연속 MVP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조던도 3회연속은 받지 못했고, 요키치가 가장 근접했으나 아쉽게 실패했다. [20] 나이 차이 때문에 커리어 초반부는 더 완성된 기량을 지닌 버드가 확연히 뛰어났고, 후반부엔 버드에 비해 아직 젊어 기량을 유지하고 있던 매직이 확연히 뛰어났다. 아이러니한건 대학 마지막해~프로 1년차 둘 다 버드가 매직보다 더 잘하는데 최종목표인 우승은 매직이 거머쥐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 버드 입장에선 똑같은 악몽이 2년 연속 반복된 셈이다. [21] 다만 그러한 여론이 있다 정도일 뿐 당시 파이널 MVP였던 세드릭 맥스웰과 버드의 파이널 MVP표는 6:1로 맥스웰이 큰 표차이로 앞선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득표수와 별개로 당시 버드의 활약이 더 뛰어났던 건 명확하다. 구체적인 것은 래리 버드 문서를 참조. 사실 버드의 1981 파이널과 매직의 1988 파이널은 두 선수 모두 팀내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도 MVP를 다른 선수에게 뺏겼으므로 둘 다 나름대로 억울한 면이 있다. 어쨌거나 둘은 실력은 동급임에도 우승과 파이널 MVP에서는 좀 더 빡셌던 동부에서 뛴 버드에 비해 매직이 더 실적이 좋게 나왔다. 동부와 서부 격차에 대해서는 전미 농구 협회의 '동고서저였던 1980년대' 참고. [22] 파이널 5차전에서 압둘자바가 부상을 당하면서 '6차전은 내주고 압둘자바가 복귀하는 7차전에 승부를 걸자' 라는 기조로 압둘자바에게 한 경기 회복시간을 주었으나, 해당 6차전을 매직이 마무리하며 시리즈가 끝나버렸다. 에이스가 잠시 빠지고 7차전까지 가야 했을 상황을 매직이 엎어버리며 파이널 MVP가 매직에게 가버린 것. 사실 단순히 활약의 정도만을 따지면 압둘자바가 당연히 루키인 매직을 압도했으며, 파이널 MVP표 역시 매직이 4표, 압둘자바가 3표를 획득하여 매우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23] 기존 버전에는 '현재 시스템이면 바클리가 된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 시스템은 현재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현재 시스템이라고 해도 매직이 탔을 것이 확실하다. MVP 투표 시스템은 원래 1979-80 시즌까지 선수들의 투표로 이뤄졌으나, 1980-81 시즌부터 미국과 캐나다의 스포츠 언론인들로 이뤄진 투표단의 투표로 대체되었다. 각 투표단 일원들이 뽑은 1위부터 5위까지 각각 10/7/5/3/1점씩 부여되며, 1위표와 상관없이 총점의 합계가 가장 높은 선수가 MVP가 된다. 2010년에 한 번 개정되면서 바뀐 것은 투표단 중 한 명을 팬들의 온라인 투표가 대체하게 된 것 뿐이다. 즉, 현재 시스템으로 이때 투표를 했다고 치더라도 바뀌는 것은 최대한으로 봐야 바클리가 1위표 하나로 +10점, 매직이 -10점이 되는 것인데(이것도 당시 매직에게 10점, 바클리에게 0점을 준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의 투표권을 뺏어 팬들이 바클리에게 10점, 매직에게 0점을 준다는 극단적인 가정이다), 이렇게 해봤자 당시 두 사람의 득표수는 22점 차이기 때문에 수상자는 바뀌지 않는다. 즉, 검증된 선수에게 그냥 표를 주는 보수적인 투표단의 성향이 문제지 시스템 자체는 2021년 현재나 당시나 같다. [24] 여담으로 당시 MVP레이스는 둘 뿐 아니라 21표를 얻은 마이클 조던까지 해서 3파전이었다. MVP 투표는 보통 수상자가 1위표의 과반 이상을 쓸어담는게 일반적이며, 막판까지 세명 중 누가 탈 줄 몰랐던 당시 MVP레이스는 굉장한 접전이었던 셈이다. 수상자가 차점자의 1위표 득표수의 두 배 이상을 받지 못한 케이스는 시스템이 바뀐 이후 1981년의 줄리어스 어빙 vs 래리 버드(28표 vs 20표), 1989년의 매직 존슨 vs 마이클 조던(42.5표 vs 27.5표), 1997년의 칼 말론 vs 마이클 조던(63표 vs 52표), 1999년의 칼 말론 vs 알론조 모닝 vs 팀 던컨(44표 vs 36표 vs 30표), 2002년의 팀 던컨 vs 제이슨 키드(57표 vs 45표), 2003년의 팀 던컨 vs 케빈 가넷(60표 vs 43표), 2005년의 스티브 내시 vs 샤킬 오닐(65표 vs 58표), 2007년의 디르크 노비츠키 vs 스티브 내시(83표 vs 44표)인데, 대충 득표수만 봐도 수상논란이 있었던 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수상자가 차점자에게 1위표를 적게 받고도 상을 탄 것은 1990년의 매직이 유일하다. [25] 실제로 1990년의 매직은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지 못했던 MVP이고, 반면 1981년의 버드는 위에서 보다시피 상당히 근소한 차이로 상을 놓친(전체 점수는 454점 대 423점이었다) 반면 3연속 수상할때는 논쟁의 여지조차 없이 압도적인 득표를 했다. 이 때문에 두 선수는 거의 같은 수의 정규시즌 경기를 뛰었음에도 통산 MVP 셰어는 버드 5.612, 매직 5.104로 버드가 앞선다. 오직 이름값 때문에 표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버드의 1991-92 시즌(3점 획득)과 매직의 1995-96 시즌(7점 획득)을 빼도 격차가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약간 늘어난다. [26] 버드는 인디애나 토박이로 대학까지 나오며 프로에선 평생 보스턴 소속으로 뛰었고, 이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사장 자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평생 단 한번도 서부팀 소속이었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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