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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3:06:23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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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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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초대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Saparmyrat Nyýazow | Saparmurat Niyazov
파일:샤파르무라트 아타예비치 니야조프.webp
<colbgcolor=#00843d><colcolor=#ffffff> 본명 사파르므라트 아타예비치 느야도프
(Saparmyrat Ataýewiç Nyýazow)[1]
출생 1940년 2월 19일
소련 투르크멘 SSR 아시가바트 그프자크
사망 2006년 12월 21일 (향년 66세)
투르크메니스탄 아시가바트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0년 11월 2일 ~ 2006년 12월 21일
학력 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대학교
(Ленинградский политехн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2]
정당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
]]
신체 166cm
배우자 무자 니야조바(Муза Ниязова)[3]
자녀 2명
종교 이슬람교

1. 개요2. 대통령이 되기 전3. 통치시기의 각종 기행
3.1. 우상화3.2. 경전 집필 - '루흐나마'3.3. 그 외3.4. 독재 행각
3.4.1. 참고 자료
4. 긍정적 면모
4.1. 민생 안정4.2. 전통 문화 보존
5. 사망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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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자 종신 독재자.

자칭 국부이며 1990년 11월 2일부터 2006년 12월 21일 사망할 때까지 16년 1개월간 투르크메니스탄을 통치했다. 니야조프가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이기에 국부인 것은 사실이나, 우상화로 인하여 이미지는 좋지 않다.

집권기에 그는 투르크멘인의 수령이라는 뜻의 튀르크멘바시(Türkmenbaşy)라고 스스로를 자칭하며 우상화와 기행을 일삼았다. 원래 니야조프는 자신을 투르크멘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멘(Atatürkmen)으로 칭했는데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튀르키예 정부가 항의해서 바꿨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튀르키예에서 아타튀르크의 이미지는 과장 안 보태고 한국에서의 세종대왕 + 이순신도 능가하는 수준[4]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이슬람 카리모프 등과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악명높은 독재자인데, 니야조프는 카리모프와 달리 자국민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1999년에 대통령령으로 사형을 영원히 폐지했을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물론 국민들을 억죄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좋아했고, 재임 시절 워낙 해괴한 짓들을 수도 없이 저질러서 오늘날까지 뭇 사람들에게 크나큰 웃음거리가 된 독재자로 유명하다.

2. 대통령이 되기 전

니야조프는 1940년 2월 19일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시가바트 외곽 그프자크(Gypjak)시에서 태어났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아타므라트(Atamyrat)는 독소전쟁 때 징집되어 1942년 캅카스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이에 대한 공신력 있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어머니 구르반솔탄(Gurbansoltan)과 두 형제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은 1948년 10월 5일 있던 진도 7.3의 아시가바트 대지진[5] 당시 사망했다. 이 지진에서 후임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의 할아버지(그 역시 독소전쟁 때 징집된 인물이었다)도 사망했다. 이 지진으로 고아가 된 니야조프는 그는 먼 친척이 찾아올 때까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소련 고아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959년에 학교를 마쳤고, 1962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해 정치에 입문했다. 1967년에는 전자 공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여 1985년 만 45세의 나이에 투르크멘 SSR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니야조프를 공산당 서기장에 임명한 것은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는데, 고르바초프가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정책 방안을 제시할 때 니야조프는 '자신의 나라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5년 간 서기장으로 재직하였고, 1990년에는 투르크멘 SSR의 초대 직선제 대선에서 압승, 소련 해체 이후 무난하게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4차원적인 행동을 해보일 사람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밑바닥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8월 쿠데타 미수사건때 쿠데타군을 지지하다가 철회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는데 중앙정치로 나아가기에 감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니야조프에게 충언을 해 줄 부하들과 주변인들이 사라진다.그의 영부인인 무자 니야조바(Муза Ниязова, Muza Nyýazowa)는 이미 1980년대 후반에 모스크바에 정착하며 살았고 남편인 니야조프가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었을 때에도 투르크메니스탄에 살지 않고 주 모스크바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남편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별거생활을 해왔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인지 남편이 한창 괴짜 기질을 내보였을 때에도 제어를 할 만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제어해줄 주변인들이 사라지면서 점차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후술할 우스꽝스러운 기행들이 시작되었다. 니야조프가 처음 독립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취임식을 가졌을 때에는 쿠란을 대고 선서했는데 이를 두고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은 니야조프가 독실한 무슬림이라서 이슬람주의식 통치방식을 도입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1992년에 니야조프는 형식적인 국민 투표를 통해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으로 등극했고, 정당을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 하나만 남기고 모두 금지시킨 것은 물론 자신을 총리, 여당 사무총장, 각료회의 의장 겸 '튀르크멘바시'로 등극시켰다. 그리고 1994년에 니야조프는 공식적으로는 99.9%의 찬성율을 보인 국민투표를 통해 2002년까지 임기를 '연장'했으며, 1999년 12월에 니야조프는 자신을 구소련 소속 국가들 중 최초의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하게 된다.

3. 통치시기의 각종 기행

3.1. 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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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 유명한 황금 동상. 대통령궁의 한복판에서 태양 쪽을 바라보며 회전한다. 니야조프 재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의 공식 입장은 동상이 태양을 향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니야조프를 존경하는 태양이 동상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이 동상 건립에 1,200만 달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 실제 높이 # 확대된 모습 # 다른 사진. 그리고 이는 게임 트로피코 시리즈에서 훌륭하게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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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상도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당시 수도에는 50m마다 하나씩 니야조프의 초상화나 동상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니야조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에는 14,000개의 동상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 # 그러면서도 니야조프는 "나는 거리에 있는 (나의) 사진과 동상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논외급인 김씨 3대 마시아스 응게마 정도를 제외하면 니야조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우상화에 집착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그 수준은 영어 위키피디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항목에서 대놓고 ' 북한 김씨 왕조와 유사하다'고 기술될 정도였다.

우선 니야조프는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위의 황금 동상을 비롯한 여러 동상들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독재자들과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이 나라에선 상당한 막장짓이었다. 이슬람권에서 동상을 비롯한 우상숭배 금기이기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인형조차 우상숭배네 뭐네 하며 논쟁이 벌어지며, 이슬람교 국가인 말리는 독립 극초기에 쓰이던 국기에 사람 형상이 있다는 무슬림들의 항의로 인해 독립 1년도 안 되어 국기에서 사람 형상을 제거한 바가 있다. 그러니 사람 동상이 문제시되지 않을 리가 없다.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나라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데에서 그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 서기장 시절의 자신을 기리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의 카스피 해에 맞닿은 항구도시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를 튀르크멘바시(Türkmenbaşy)로 개칭했으며, 모든 국민들에게 자신의 초상화가 새겨진 시계를 선물한 것도 모자라 자기 부모 생일을 각자 국경일로 정했다. 자신의 아버지 생일은 아버지의 날, 어머니 생일은 어머니의 날 국경일로 정하는 식. 거기다가 니야조프는 어머니의 동상도 전국 곳곳에 세웠으며, 카라쿰 사막 한가운데에도 니야조프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4년에 니야조프의 고향에는 니야조프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모스크가 있는 복합 단지가 1억 불을 들여 세워졌다.

2002년 8월 10일에 니야조프는 '러시아어에서 유래한 달 이름과 요일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며 달과 요일 이름을 투르크메니스탄 식으로 변경했다. 그나마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적 위인들 이름을 달 이름으로 삼고 요일 이름을 페르시아식으로 바꾼 것은 그렇다 쳐도, 니야조프는 2월은 국기 이름인 바이다크(Baydak)로 바꾸고 4월은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 '구르반솔탄(Gurbansoltan)'으로 개명한 것도 모자라, 1월은 아예 '튀르크멘바시'로 호칭을 바꿨고, 심지어 9월은 아예 본인이 집필한 경전인 '루흐나마'로 이름을 바꿨는데, 루흐나마를 완성한 날짜가 2001년 9월 19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역법은 그가 사망한 이후인 2008년 7월이 돼서야 폐지되었다. 번외로 2003년은 '구르반솔탄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또 2002년 2월 18일에는 자신의 62번째 생일 기념 행사 때 62세에 죽은 무함마드에게 경의를 표한다[6]는 명목으로, 모든 국민은 62세가 되는 날 정부수당과 함께 3일 간의 휴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생을 12년 주기로 나눈 '니야조프 분류법'에 의하면 노년층은 85세에서 시작하며 73세는 '지혜의 나이', 61세는 '영감의 나이'다. 니야조프는 자신이 쓴 시에서 자신을 투르크멘의 정신이며 황금시대를 가져온 구세주로 자신을 묘사했으며, 심지어 아예 자신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까지도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은 매일 아침 수업 전에 "만약 내가 위대한 사파르무라트 튀르크멘바시를 배신한다면 내 심장이 멎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해야만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rkmenistan_007.jpg

여느 독재자들이 그랬듯 지폐에 초상화를 넣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까지 만들어 유제품과 술, 옷, 양탄자 등을 판매했다고 한다.

그가 집권하던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가 첫 소절은 "Türkmenbaşyň guran beýik binasy", 그러니까 "튀르크멘바시가 세운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니야조프가 직접 쓴 가사로 시작되어 노래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이 나오는 가사였다. 심지어 이 부분은 후렴인데도 1절보다 먼저 부르도록 했다. 절보다 후렴이 먼저 나오는 국가는 남아메리카 스페인어권 나라들 중에 많다. 물론 이 부분은 니야조프의 사후인 2008년에 우상화의 의도가 담긴 부분을 교체하고 '후렴-1절' 순서를 '1절-후렴' 순서로 변경했다.

하다 못해 북한의 국가는 물론이고 김일성, 김정일 장군의 노래나 문화대혁명 시기 동방홍마저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 구절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국가만큼은 김일성 우상화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이던 1947년에 만들어졌기에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 노래 중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체제 선전&찬양 가사를 전혀 넣지 않은 유일무이한 노래가 바로 북한 애국가일 정도.

참고로 이 우상화 가사의 선배는 베니토 무솔리니로, 무솔리니는 당시 이탈리아 국가 '젊음'의 후렴구에 대놓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하여'라는 구절을 넣으며 니야조프보다 더한 모습을 보여줬다.

국영 텔레비전에서 시시때때로 니야조프의 얼굴이 엄청나게 자주 비춰졌던 건 기본이었으며, 텔레비전 오른쪽 위에는 항상 니야조프의 황금빛 실루엣이 자리잡았다. 텔레비전과 언론에서 대통령의 이미지는 항상 선명하게 보여야 했고, 더구나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의 모든 여객기 기내에는 니야조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다못해 북한 고려항공 기내에까지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걸어놓지는 않았다. 기내에 대통령 사진 걸기는 니야조프의 후임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심지어 한 한국인 여행자의 증언에 따르면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화장실에까지 니야조프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경악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니야조프는 공인 시인이라 시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면 국영 텔레비전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매일같이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아시가바트의 한 고등학교 수학 교사는 "대통령의 말(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니야조프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답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 인증을 거절당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히도 니야조프는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니야조프는 유대계 러시아인인 무자 니야조바(Muza Niyazova, 1938~)을 만나 아들 무라드(Murad, 1967~)와 딸 이리나(Irina, 1969~)를 낳았다. 특이하게도 아들 이름은 이슬람식으로 아랍어 무라드로 지었지만, 딸 이름은 정교회식 러시아어 이름인 이리나로 지었다.

3.2. 경전 집필 - '루흐나마'

이러고도 부족했는지 투르크멘의 아버지임을 자칭하면서 루흐나마(Ruhnama)라고 하는 2권짜리 경전까지 썼다. 영혼을 뜻하는 아랍어 루흐(ruh)와 페르시아어로 편지, 책이라는 뜻을 가진 나메(nameh)의 합성어이다. "영혼의 책"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구성은 시와 자서전, 역사, 자기계발서가 합쳐진 것과 같다고 한다.

사실 원래 루흐나마는 이렇게 경전으로 쓰일 예정은 아니었고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과 역사, 풍습에 대해 소개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하는 일종의 지침서 정도로 편찬될 예정이었지만, 니야조프가 자화자찬스러운 내용을 넣을 것을 지시하면서 사이비 경전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책 내용을 보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과 도덕상에 대해 논하거나 이슬람교 관련 내용이 들어있는 정상적인 내용과 니야조프를 찬양하는 이상한 내용이 섞여 있다.

이 책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학자들이 유럽의 기술 및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정상적인 내용도 있다. 사실 중세 투르크메니스탄 학자들이 유럽의 기술 및 문화 발전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몽골 제국 침공 이전까지 메르브가 한동안 과학 연구의 중심지로 유명하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수천 년 전에 투르크메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였으며, 바퀴는 사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등 근거없는 이야기까지 많았다는 점에 있다.

2001년 2월 18일에 제10차 투르크메니스탄 국가원로회의와 국회에서 가결된 후 2001년 12월에 1권이 출간되었고 2004년 2권이 출간되었으며, 시각 장애인을 위해 음성판, 점자판도 출판되었고, 2006년에는 판매량이 100만 부를 돌파하였다.

니야조프는 이렇게 편찬된 책을 보고 만족하며 모든 국민들에게 이를 읽고 암송해야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걸 쿠란, 성경과 함께 3대 성서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무슬림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이맘들이 루흐나마를 왜 쿠란과 동급에 놓아야 하냐면서 반발했지만 니야조프는 이에 대해 해당 이맘들이 근무하는 모스크를 철거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그래서 뭇 모스크에서 별 수 없이 루흐나마를 걸어 놓아야 했다. 또한 이맘들 입장에서 니야조프를 마냥 우습게 볼 수 없었던 것이 정신머리가 이상하게 돌아다닌 인간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전통문화 부흥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교를 권장하면서 모스크를 건축시키는데 돈을 대주거나 튀르키예 이란 등 주변 이슬람국가로 신학 유학보내주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던지라 속으로 어이가 없었어도 그냥 굽힐 수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800px-Big_Ruhnama_Statue.jpg
2003년에는 아예 아시가바트 공원에 루흐나마를 묘사한 조각상까지 세웠는데, 매일 저녁 8시에 책의 표지가 열리고 니야조프가 책의 한 구절을 읽는 영상이 상영되었다고 한다.

또한 니야조프는 루흐나마를 초등학교에서도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했으며, 매주 금요일을 '루흐나마를 읽는 날'로 지정한 것은 물론 루흐나마를 국가의 주요 연구 의제로 삼았다. 투르크멘 주립 대학에서는 아예 '투르크멘시 대왕의 성(聖) 루흐나마 학과(Department of the Holy Ruhnama of Turkmenbashy, the Great)'까지 있었다고 한다. 모스크와 정교회 성당에도 배치하며, 공무원 임명 시험과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암송하게 하여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운전면허 시험시간은 16시간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니야조프는 2006년에 신년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누구나 루흐나마를 한 번만 읽으면 지혜로워지며 아침, 점심, 저녁 이 책을 하루 세 번만 읽으면 자연스레 천국에 갈 것이다. 이는 내가 신에게 여쭤본 일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했다. 이 망발은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루흐나마에 대한 견해를 저술한 책만 출판될 수 있었고, 루흐나마를 집필하는 니야조프의 모습을 묘사한 벽화도 만들어졌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2005년 8월 23일에 러시아 로켓에 실려 카자흐스탄에서 발사된 투르크메니스탄의 인공위성 캡슐에까지 루흐나마 1권을 넣고는 이를 " 지구상의 수백만 명의 마음을 정복한 책이 이제 우주를 정복하고 있다."라고 선전하기까지 했다. 이 위성은 앞으로 150년 동안 지구 궤도를 돌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당시 기사

게다가 탁아소의 어린이들에게 부모님의 이름보다 최고 지도자의 이름을 먼저 외우게 한 북한과 마찬가지로 니야조프는 탁아소의 어린이들에게 글을 배우기 전에 루흐나마의 문구를 먼저 배우게 했으며,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이것만 읽고 외우고 공부해라"라고 루흐나마를 정식 교육과정에까지 포함시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도 세뇌시키듯 강요했고, 학생들은 니야조프를 공부하는 데에 하루에 2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실제로 2006년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학 입학 시험을 위한 57장의 시험 카드 중 26장은 루흐나마의 내용에서 발췌한 내용들이었고, 루흐나마를 잘 외우고 잘 이해하면 장학생으로 우선 선발권을 가지던 판이었으니 뭐 할 말 다했다.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커리큘럼은 루흐나마는 물론이고 니야조프가 쓴 시집과 '영적 지침서', 니야조프를 성인(聖人)으로 묘사한 과목만으로 채워졌는데, 이런 세뇌 교육 때문에 니야조프의 생전에 투르크메니스탄의 학생들은 루흐나마를 읽고 니야조프에게 맹세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정상'이라고 여길 정도였다고 하며, 이 모습을 본 익명의 서구 관리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1~2세대 내에 완전히 쓸모없고 현대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쓴소리를 남기기도 했다.

그나마 궁예보다 나은 것은 궁예만큼 폭정이 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이슬람 신학자들 입장에서는 투르크메니스탄 독립 이전 소련 시대 국가 무신론이 강요되던 시절보다는 이슬람교 탄압이 줄어들었으니 참았던거지, 다른 나라 같았으면 무자헤딘들이 들고 일어나고도 남았다. 이런 황당한 노릇에 다른 이슬람 국가들이 당연히 반발했는데, 이웃 나라들도 죄다 독재자 투성이지만, 그들조차도 이렇게 손수 경전을 쓰며 교주 행세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서 엄청 비웃었다고 한다. 그래도 끼리끼리 논다고 서로 사돈 맺고 가까이 연결되곤 했다.

더 황당스러운 건 이 책을 세계 40여 나라에 50여개 언어로 번역하여 무상으로 수출까지 했다는 점이다. 2007년 2월에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3권짜리 두툼한 책자로 권당 4만 원에 가까운 비싼 값에 팔렸다. 다만 이건 출판사 측에서도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라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로부터 한국어판 출판 의뢰를 받아 찍어낸 것 뿐이다. 그러니까 출판사로써는 그냥 한국어 번역료와 기타 출판에 필요한 제반비용을 받아 책을 인쇄해준 것 뿐이다. 의외로 꽤 많은 대학교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물론 일반 도서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당연히 오늘날에는 절판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제작된 영화는 이와 같이 초반부에 니야조프의 황금동상과 함께 루흐나마의 구절이 나왔으나, 요즘 영화에선 나오지 않는다.

3.3. 그 외

파일:투르크메니스탄 금연령.jpg
니야조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금연을 홍보하는 행진

1997년, 그는 수술로 인해 금연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에 금연령을 내렸다. 이 금연령은 지금도 시행 중이라 흡연자들은 외출하기 전 집안이나 차 안에서 미리 담배를 피우고 나온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 여행자의 글을 보면 이 나라에서 담배를 어떻게 태우는지 나와 있다. 그래도 담배의 해악을 생각하면 다른 기행에 비해 낫다. 또 건강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내게 기도를 많이 해 힘들다며 기도를 줄이라고 국민들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전염병의 존재를 금지시켰다. 이 덕분(?)에 그가 집권할 동안 투르크메니스탄에는 콜레라 에이즈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2023년에도 코로나 19 확진자가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덤으로 길거리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 역시 여전히 시행중인데, 당연히 이것도 사람들은 몰래몰래 잘 어기고 있다. 이것이 기행인 이유는, 해바라기씨는 동구권과 구 소련 지역에서 심심할 때 땅콩처럼 까먹는 국민 간식이기 때문이다. 값도 싸서 길바닥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은 고프닉의 스테레오타입이기도 하다.

우민화 정책도 실시하여 의무교육 과정을 11년에서 9년으로 줄이고 고등교육 과정을 5년에서 2년으로 단축시켜 버리고 학교를 반으로 줄였으며, 1993년 이후 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의사, 교사를 해고했다. 이 부분은 약간의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이, 구소련권 국가들의 엘리트들은 오늘날까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러시아어를 사용하여 학문적 종속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투르크멘인들은 가장 강력히 러시아화를 반대한 민족이기도 하다. 또한, 이와 비슷한 정책은 오직 투르크메니스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역시 독립하고 자국어만 사용하게 했다가 전문인력 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독립 당시 카자흐인이 전국 인구의 50%도 차지하지 못했던 카자흐스탄은 국가 마비 상태까지 가서 결국 포기했을 뿐이다.

의사와 교사를 해고하면서 전문인력이 부족해져서 군인 의사 일을 할 지경이었지만 그는 이를 의료비를 절감한 혁신적 정책이라 자화자찬했다. 그러면서 니야조프 본인은 독일인 의사로부터 심장병 치료를 받았다.

심지어 니야조프는 2005년 4월에는 '대부분의 투르크멘인은 쿠란과 루흐나마만 읽으면 된다'는 믿음으로 수도 밖의 모든 도서관을 없애버렸으며, 유학한 사람들이 지난 10년간 외국에서 딴 졸업증서를 모두 무력화시켰다. 심지어 니야조프는 1998년에는 투르크메니스탄 과학 아카데미를 폐쇄하고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후 투르크메니스탄 과학 아카데미는 2009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러시아어 교육도 폐지되었다. 정작 니야조프 집권 시기 러시아와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투르크메니스탄이 독립국가연합에서 탈퇴한 것도 그가 죽은 지 한참 후의 일이다. 다만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도 러시아와 사이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러시아어 대신 자국 언어를 우대하는 정책을 지금도 펼치고 있다. 러시아어 폐지는 그가 죽은 뒤인 2008년부터 재도입되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선 그래도 재미는 있는 러시아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걸 막으려고 했지만 얼마 안 가서 사망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은 여가 목적으로 위성방송을 수신하는 것은 권장하여, 규제도 사실상 전혀 없었고, 가구당 접시 안테나 보급률이 세계 제일이었지만, 이와 정반대로 케이블 텔레비전은 완전히 금지된 상태였다.

2004년 8월에는 '어린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로 자국의 기후도 무시한 채[7] 1,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얼음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아시가바트 외곽의 산악 지대에 얼음 궁전을 짓기 위한 조사가 실시되기도 했다. 물론 얼음 궁전 건설은 취소되었지만, 실내 아이스링크가 그 대체격으로 2008년에 건립되었다.

멜론을 무척 좋아해서 1994년부터 매년 8월 둘째 주 일요일멜론의 날이라고 기념일로 만들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생산되는 머스크 멜론은 덩치도 크고 씨알도 굵직한데, 과육은 달달한 크림과 같은 짙은 풍미로 꽉 차있어 아주 맛있다고 하기에 구소련권 전역에서 인기 많은 특산품이긴 하다. 니야조프 본인도 2004년에 농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투르크멘 땅을 가장 맛있는 과일이 풍성하게 나오는 비옥한 원천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중 낙원의 과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맛을 가진, 농부들의 노력의 결과인 투르크멘 멜론이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한국으로 치면 ' 치킨의 날'을 공휴일로 만든 포지션이다. 이 때문인지 '멜론의 날'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와 함께 멜론의 이름도 '투르크멘바시'로 바꾸었다는 소문이 있다.

기상청 일기예보에 실패해 그에게 비를 맞게 했다고 기상청 직원들의 월급이 반토막이 났고 2대 대통령을 지냈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보건장관으로 재직했을 당시 의사 간호사들의 월급이 연체 중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몇 개월 간 월급을 받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또한 그의 카레이싱을 위해 도로는 항상 비워져야 했으며, 황량한 산에 도합 37km 길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계단을 만들고 모든 공무원이 1년에 한 번은 그 계단을 걷게 했다.

2001년 6월 4일에는 외국인 남성들이 투르크메니스탄 여성과 결혼할 때 5만 달러라는 거금을 국가에 내도록 했는데, 이게 주변국 가운데서 일부 부유한 산유국 남성들을 제외한 나머지 외국인 남성들에게 엄청난 거금이었다. 2001년 기준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1인당 GDP는 763달러도 되지 않았으며, 한국은 동시기 기준으로 11,561$였고, 미국은 37,133$였으며, 심지어 룩셈부르크의 1인당 GDP가 48,440$였다. 사실상 외국인과의 결혼 금지령을 선포한 셈. 더군다나 소련 시절에 투르크메니스탄을 떠나 타지로 이동을 가거나 투르크메니스탄에까지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엄청난 문제점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외국인 남성과 연애하는 투르크메니스탄 여성들을 반강제적으로 불법체류자로 만든 셈이다.

2001년 4월에는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발레 오페라, 서커스, 연극, 심지어는 영화관까지 금지시키고 공연장을 모두 폐쇄시켰다. 니야조프는 " 오페라는 우리 투르크멘의 예술도 아닙니다. 아내와 저는 레닌그라드에서 ( 알렉산드르 보로딘이 작곡한) 오페라 '이고르 왕'을 보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는 말을 남긴 바가 있다.

2003년 장발과 턱수염을 금지했다. 그런데 정작 투르크메니스탄의 과거 사진이나 과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턱수염은 투르크메니스탄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전통 문화이며, 이웃나라 이란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턱수염을 기른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어른들은 상투를 틀고 아이들은 댕기머리를 하는 것이 전통이었음에도 장발 단속이나 학생들 대상으로 두발단속을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일이다.

이것과 병행해 '이 건강을 지켜야 한다'며 뼈를 씹게 했고, 농학대학을 시찰하던 중 어느 여학생이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금니를 하고 읽는 모습이 기분이 나쁘다며 금니를 금지했다. 게다가 니야조프는 2005년 2월에는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면 수도로 와야 한다'는 말을 하며 수도 밖에 있는 모든 병원을 폐쇄하기도 했다. (이 병원 폐쇄는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같은 해인 2005년 12월에는 폭력적이라며 비디오 게임을 전면 금지시켰다. 게다가 TV 방송에선 오케스트라 등 서양과 러시아 문화를 내보내는 것을 금지시키고 투르크메니스탄 음악의 방송만 허용했다.

2004년에는 '녹음된 음악의 활용이 음악 예술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공개 행사, 결혼식 및 TV에서 녹음된 음악을 재생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니야조프는 라이브 음악 공연은 금지하지 않았다.

2005년 , 힙합, 더 나아가 투르크메니스탄 국민의 예술성과 가창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립싱크까지 금지했다. 물론 실제 이유는 대중문화에서 자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니야조프는 '여자는 밝은 다갈색의 피부가 아름답다'며 TV 뉴스 캐스터의 화장을 금지시켰고, 머리 염색도 금지시켰으나 정작 니야조프 본인은 2002년에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니야조프는 심지어 자동차에서 라디오와 음악을 트는 것과 음악을 녹음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리고 2005년 11월에는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대통령에 대한 선서로 교체했다.

지구온난화로 갈 곳을 잃은 펭귄 북극곰 같은 동물들을 위해 2천만 달러 이상을 들여 전 국토의 90% 가까이가 사막인 투르크메니스탄에 동물원을 건설하기도 했으나 정작 그렇게 세운 동물원에는 동물들이 살지 않아 2천만 달러를 공중으로 날려보내기도 했고, '국민이 걸어야 할 7마일'의 상징격으로 세계 최대의 신발 제작을 명하기도 했으며, 개들에게서 '매력 없는 냄새'가 난다고 수도에서 개를 추방시키기도 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전반적으로 개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고, 모스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개가 보이면 쫓아내는 등 박대하기도 한다. 반대로 고양이는 무함마드가 생전 좋아하는 동물이었기에 특별 대우를 받는다. 살라흐(하루 다섯 번 바치는 기도)를 할 때 사람을 포함한 동물이 앞을 지나가면 예배를 다시 해야 하지만, 고양이는 예외로 취급할 정도.

파일:external/yky.narod.ru/12_04_Ashgabat_intl_airport.jpg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공항'을 짓겠다고 상단의 사진처럼 아시가바트 국제공항[8]의 관제탑을 터미널 뒤에 지어 관제사들 시야를 가려놓고 " 보기 좋다"고 말한 것은 물론이고, 공항 이름도 자기 이름을 붙여 사파르무라트 튀르크멘바시 국제공항(Saparmurat Turkmenbashy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바꿨다. 물론 니야조프가 죽고 난 뒤에는 관제탑도 원위치로 되돌려 놓았고, 공항 청사도 현대화 공사를 했다. 무엇보다 이름도 아시가바트 국제공항으로 개명하였다.

심지어 니야조프는 '빵'을 가리키는 투르크멘어 'çörek'을 금지어로 지정하고, 이 단어를 자기 어머니 이름인 구르반솔탄(Gurbansoltan)으로 대체하는 기행까지 보였는데, 덕분에 그가 집권할 동안에 투르크메니스탄에서 '4월에 빵을 사다'는 ' 구르반솔탄에 구르반솔탄을 사다'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니야조프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빵을 그리워해 그런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3.4. 독재 행각

니야조프는 기행과 함께 엔베르 호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 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억압적인 통치를 했는데, 수도인 아시가바트에서 수만 명의 정치경찰이 돌아다녔다고 하며, 3천 명으로 구성된 국가안보위원회(KNB)를 동원해 야당과 반정부 인사들을 영장 없이 수색하고 납치, 수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한다거나 뭔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가볍게는 면허나 등록증이 취소되거나 무료 공공서비스를 중지시키는 수준에서 심하게는 정신병원에 가두거나 유신 시절 한국의 민청학련 사건처럼 장기징역형을 선고한 뒤 슬그머니 감형해서 1년 정도 징역을 시켜 반정부 운동을 하면 지옥을 맛본다는 걸 가르쳐 주는 등 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외국인한테 니야조프에 대해 가급적이면 좋게 얘기해주는 분위기이기도 한다. 물론 니야조프에 대해 분위기가 풀어진 뒤로는 같이 비웃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이 때문에 니야조프에 대한 불만은 암암리에 있기는 했다. 니야조프가 사망한 2006년에 연금 회수 명령을 내리면서 연금을 받은 노인들을 상대로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안 내놓는 사람에게 연금지급 명령을 내리는 등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 입장에서 매우 어처구니 없는 삽질이 이어졌던 상황이었으므로 이게 장기화되면 니야조프에 대한 불만이 노골적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구 사회주의권 개발도상국들에서 연금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데, 같은 구 소련 공화국이었던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권좌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루카셴코가 실각해서 연금 제도가 개혁된다면 노후는 어떡하나"라는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물론 니야조프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반역죄와 동일시했으며, 노동조합도 어용 노조 하나만 허용했고, 입법심사 없이 판사를 임명, 해임할 권리도 가지며 사법부를 장악했고, 니야조프의 사법부는 공개 재판 및 변호인 접견을 포함하여 적법 절차에 대한 권리를 자주 거부했다. 이런 폭압정치 때문에 2002년 기준으로 인구가 4,700,000명도 되지 않았던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수감 중이던 반정부 인사만 인구의 무려 0.43%에 달하는 20,000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이를 2022년의 한국 인구(51,630,000명)에 대입하면 무려 222,000명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것과 같은 셈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은 의회가 만든 모든 법률과 결정을 취소할 수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장관과 기타 관리를 임명하거나 별다른 설명도 없이 해고할 수 있었다.

종교 탄압도 가해져 1997년 이후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종교도 러시아 정교회 수니파 이슬람교로 제한해 2003년부터는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종교 단체[9]에 가담한 사람은 1년 이하의 노동 교화형을 받게 했으나 이후 국제적 압력 때문에 2004년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니야조프 시절엔 특히 침례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중점적으로 탄압을 당했고, 2005년 6월 니야조프는 아시가바트에 있는 주요 대학의 이슬람 신학부를 별도의 학과에서 제거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덤으로 니야조프는 정당과 종교 단체들을 포함한 모든 단체들을 '공명정대부'에 가입시켰는데, 공명정대부 청사 앞에는 니야조프 어머니 얼굴을 본뜬 거대한 정의의 여신 조각상이 있었다.

당연히 정보 차단을 위하여 대중매체 검열에 대통령이 직접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해외 뉴스와 통신은 죄다 차단했고, 외국 언론인들의 입국도 거의 허용하지 않았으며, 3개의 국영TV 채널과 신문사들은 시종일관 그저 니야조프를 찬양하는데 열중했다. 이 때문에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6년자 언론자유지수에 의하면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은 168개국 중 167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166위는 에리트레아였고, 168위는 북한이었다. 그러나 니야조프 사후에도 투르크메니스탄은 독재가 지속되다보니 투르크메니스탄은 북한, 에리트레아와 함께 언론자유지수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2023년 기준으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76위에 불과하다.

또 2001년 6월에는 인터넷 카페의 개설을 금지하고 극소수[10]만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해 2005년 CIA의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투르크메니스탄의 인터넷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0.7%밖에 안 되는 겨우 36,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95년 기준 대한민국의 인터넷 사용률이 0.8%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낮은 수치인 셈. 그런데 2005년 기준 투르크메니스탄의 인터넷 사용률은 2022년 기준 북한의 인터넷 사용률(0.07%)의 10배에 달한다.

물론 투르크메니스탄의 인터넷 금지 조치는 후임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취임 이틀 뒤인 2007년 2월 16일 아시가바트에 인터넷 카페 2곳을 열면서 사실상 해금되었고, 가정에서의 인터넷 사용도 2008년 6월 해금되었다. 그럼에도 투르크메니스탄은 독재가 계속 이어져 투르크메니스탄의 인터넷 사용률은 2022년 기준으로도 겨우 25.3%에 불과한데, 이는 내전에 시달리는 예멘(27.0%)보다도 낮고, 아시아 내에서는 북한과 아프가니스탄(22.9%)에 이어 3번째로 낮다. 물론 인터넷 사용 허가 후에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인터넷 검열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참고자료 #1 #2

2000년 3월에 투르크메니스탄의 주립 도서관은 국가의 역사를 '부정확하게 묘사'했거나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약 20명의 작가의 작품을 압수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2004년에는 모스크바에 망명한 투르크멘인 언론인 무하메드겔디 베르디예프(Мухамедгельды Бердыев)는 야당 웹사이트에서 니야조프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정황상 니야조프 정부가 사주한 깡패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니야조프는 2000년 12월 6일 서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하여 아시가바트에서도 진동이 보고되고 11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도 니야조프는 인명 피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언론 통제를 한 것은 물론이고 '이 지진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모든 외국 지원을 거부했다. 이는 니야조프가 어릴 적에 지진으로 고아가 된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니야조프는 문자 그대로 국민들의 국내 여행까지 억죄었다. 니야조프는 국민들의 주거 이전의 자유를 넘어 이동의 자유까지 극도로 제한해 구소련 시절의 잔재인 '국내 여권'[11]을 소지해야 국내 여행을 가능하게 했으며, 국내 여행자들은 검문소를 거쳐야 했고, 특히 2000년 3분기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의 5개 지방 중 2개 지방이 '폐쇄'되었다고 선언하고는 이들 지방과 국경 인근 지역을 방문하려면 경찰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했으며, 시골 지역과 도시 사이의 여행도 제한을 받았다고 한다.

국내 여행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한 나라는 북한,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 폴 포트 시기 캄보디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시기 에리트레아 등 당대에 최악으로 꼽히는 독재 국가들밖에 없다. 니야조프가 얼마나 가혹하게 국민들을 억죄었는지 알 수 있는 셈. 그것도 응게마는 니야조프 비슷하게 수도가 있는 비오코 섬과 본토간의 이동에 적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다만 이는 북한으로 치면 주민들이 자강도나 국경 인근 지역을 여행하는 것만(?) 려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물론 국내의 다른 지역을 가는 것까지 국가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인권탄압이긴 하지만.

당연히 해외 여행은 공무원 정도를 제외하면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출국이 금지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 물론 국경 인근 지역을 이동할 때 사전에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치는 니야조프 사후인 2007년 7월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국내 여권 제도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

그리고 니야조프는 외화벌이를 위한 목화산업에 총력을 가해 사람들에게 목화산업체에서 일할 것을 강요했는데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카리모프가 이런 면모로 악명이 너무 높았기에 투르크메니스탄의 목화 강제노동은 묻혔다. 천연자원을 수출하여 얻은 돈을 횡령해 해외 은행에 30억 달러를 은닉했다고 보고되었고, 나라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2005년에 투르크메니스탄의 부패인식지수는 159개국 중 155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이 통계에서 투르크메니스탄과 동점을 차지한 나라가 미얀마 아이티이며, 공동 최하위(158위)는 차드 방글라데시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세계 최악의 빈부 격차 국가인 적도 기니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와 비슷한 152위를 차지했으니 투르크메니스탄의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 그리고 니야조프는 대통령령으로 아시가바트의 일부 지역과 다른 지방의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명령했고, 이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3.4.1. 참고 자료

투르크멘바시의 공포 통치(2005년 다큐멘터리)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2005년 투르크메니스탄 인권 보고서. 니야조프가 얼마나 국민들을 억죄었는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왕이 될 남자 - 2004년 10월 10일 더 가디언 기사

[‘가스왕국’ 투르크메니스탄을 가다] 국내선 왕복 항공료가 3달러

투르크멘 보고서: 2001년 10월 31일

4. 긍정적 면모

4.1. 민생 안정

이렇게 각종 기행으로 주변국에서 엄청난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의외로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는 니야조프는 기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다른 독재자들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장 베델 보카사,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12]와는 달리 민생은 그럭저럭 잘 챙겼기 때문이었다.

일단 니야조프 시기의 투르크메니스탄은 구소련 붕괴 이후 다른 나라와 달리 경제적으로 악화되지는 않았고, 또 분배를 잘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붕괴의 후유증[13]과 낙후된 제조업으로 인해 실업률도 높았던데다가 물가상승률도 높아서 니야조프 당시에는 월급수준이 한국돈으로 몇만원 정도 의 푼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 보면 지독한 민생고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었다.

2001년 10월 기준으로, 아시가바트의 부유층이 한 달에 50달러를 벌었고 한 달에 40달러도 좋은 급여였으며, 일반적인 봉급은 30달러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기준으로 투르크메니스탄 마나트의 공식 환율은 1달러 = 5,200마나트였으나 실질적으로는 1달러 = 22,000마나트였다고 한다. 2006년 기준으로는 이보다는 좀 올랐지만, 그래도 공무원들의 급여가 연 1,000달러 내외였고, 외국계 기업 정도는 되어야 월 150 ~ 300달러의 급여를 탈수있었다. 고임금직 일자리를 지닌 사람도 이 수준의 급여를 받았으니 일반인들의 평균 급여수준이 이보다 더 낮은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도 요새는 좀 높아져서 한국 돈으로 600,000 ~ 700,000원 정도 한다고 한다. 그 대신 보조금을 삭감해서 식료품이나 생필품 가격이 올랐고, 무상이나 다름없었던 공공요금도 상당부분 인상되었다.

그런데 니야조프는 괴짜스러운 행동들과 국민 억압과는 별개로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막장이었던 보리스 옐친과는 다르게 이런 쪽에는 머리를 잘 써서 소련 시절의 복지 제도를 유지시켰기 때문에 사회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어차피 전신인 소련도 독재 국가인것은 매한가지였고, 다른 중앙아시아 신생국과 달리 소련보다도 더 좋은 복지가 주어지는 꼴이었기에 이거에 불만을 품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냥 더 풍요로워진 소련이라고 생각했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덕분인지 소련 시대에 대한 향수나 소련인이라는 인식이 굉장히 빠르게 소멸했으며, 나라가 막장이 된 지금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우선 생필품과 식료품을 매우 싼 값에 풀었다. 2005년 기준으로 미화 1달러면 식사용 빵 20개를 살수있었고, 3달러면 밀가루 50kg 1포대를 살 수 있었다. 때문에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소득 수준에 비해 엄청나게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교통비와 공공요금도 매우 싸게 책정되어 직장인 기준으로 미화 1달러만 있으면 500회짜리 티켓을 사서 1년 내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수 있었다. 심지어 버스도 2000년대 들어서 구 소련제 대신 벤츠로 먼저 갈아치웠고, 항공기도 서방제로 미리미리 갈아치웠다.

투르크메니스탄 동부에서 아시가바트까지 600km 거리를 비행기로 타도 티켓값이 고작 1.55달러였다. 인천국제공항 후쿠오카 사이 거리가 544km이므로, 한국인 입장으로 치환하면 대충 단돈 2천 원만 내고 비행기를 타서 후쿠오카에 가는 셈이나 다를 바 없다. 화폐 가치 변동을 감안하더라도 비행기값이 4,000 ~ 5,000원 정도에 불과했던 셈이다. 참고로 아시가바트-런던 왕복표 가격은 300달러. 반면 동시기 기준으로 우즈베키스탄 테르메즈에서 투르크메니스탄 국경까지 800km 거리를 택시로 갔을 때 택시 요금이 130 ~ 150달러였다고 한다.

휘발유값[14], 전기료, 가스비, 수도요금, 소금값도 2020년까지 면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를 실천했다. 그러나 2020년으로부터 딱 1년 전인 2019년에 투르크메니스탄에 불어닥친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난의 여파로 무료 공공요금 정책은 폐지되었다. # 어느 의미에서는 2020년까지 공공요금을 면제하겠다는 공약은 딱 마지막 1년을 빼놓고는 지킨 셈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미 13년 전에 사망해서 따지고 보면 자기가 깬 것도 아니다.

대중교통과 전화 이용료 역시 거의 무료였다. 또한 교육 수준이 저하되었어도 어쨌거나 무상교육 제도를 유지해서 교육비 걱정을 할 일도 없었고, 대학생이라면 나라에서 직접 용돈까지 주기까지도 했다. 집도 약 10년 가량의 공공근로기간을 채우면 무상으로 주었다.

이 때문에 푼돈으로도 먹고살수있을 정도로 생활비가 절감되어 체감되는 경제 문제가 크게 완화되었고 동시기 러시아 같은 나라처럼 범죄율이 크게 늘어나거나 타지키스탄같은 나라처럼 전쟁이 벌어진다나 하는 일 없이 일단 사회가 크게 요동치는 일이 없어서 국민들도 니야조프의 행동이 어처구니없기 그지없어도 일단 기본적인 생활은 나라에서 보조했으니 들고 일어날 동기가 적어 니야조프의 기행에 대항하는 시위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말라위 헤이스팅스 반다도 1인당 GDP가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낮았던 상황에서도 생필품 구매에 별 지장이 없을 정도로 물가를 싸게 잡아놓고 치안도 안정시켜놔서 반다가 극도로 억압적인 독재를 펼쳤는데도 대부분의 말라위인들은 반다 시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니야조프는 카스피해 연안의 천연가스를 '국가의 부의 원천'으로 여기며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출의 50%를 차지하던 중국과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며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제발전을 촉진시켰다. 참고로 투르크메니스탄의 GDP는 1991년에 32.08억 달러였던 것이 소련 붕괴의 여파로 1996년에는 23.79억 달러로 추락했으나, 천연가스 수출로 회복세를 이어가 2006년에는 102.8억 달러로, 이전의 4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은 IMF의 구조조정 방안을 거절할 정도로 경제상황은 더욱 호전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구소련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 카자흐스탄보다는 덜 하지만 그럭저럭 나라 꼴이 괜찮은 축에 속한다. 천연가스에 경제 정책을 의존하다 보니 쳔연가스 가격에 따라 카자흐스탄 보다 1인당 국민소득도 높게 나올 때가 있다.

그 덕택에 아시가바트를 흰색 건물들로 깔끔하게 정비시켜 니야조프 시대에 아시가바트에 신축된 건물이 543개(대부분 대리석 건물)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정비와 함께 대규모 건축물과 황금 동상을 만들 여유가 있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동상 등 우상화물의 상당수가 그나마 잘나가던 시절 만들어진 걸 고려하더라도 우상화를 위한 건축물도 돈이, 그것도 상당히 많이 투입되어야 지을 수 있는 법이다..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도 같은 이유로 계속해서 지지를 받아 장기집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돈지랄은 의식적인 경제개발이 아닌, 엄청난 광물 및 천연가스, 석유 등 천연 자원이 가득했기에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멋진 신세계 실사판이라고 할 수 있던 셈이다.

니야조프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 가봤던 사람들에 의하면, 투르크메니스탄이 1인당 국민소득으로만 본다면 니야조프가 사망한 2006년 기준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1인당 GDP는 2,074달러에 불과했을 정도로 빈국으로 보이지만, 사람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기는커녕 중앙아시아 국가치고는 잘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웃국가들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잡아죽이지 않은 점도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아무리 기행을 벌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다지만 국민들을 죽이는 것만큼은 하기 싫었는지 오히려 1999년 사형제를 대통령령으로 영원히 공식 폐지했고 라마단 기간 중 범죄자들을 10,000명씩 사면하기를 즐겨했다. 2001년 12월에는 19,000명의 수감자 중 11,774명을 사면하기도 했다. #

즉, 구소련권 치고는 오히려 투르크메니스탄은 형벌이 꽤나 관대한 국가였다. 실제로 2004년 여름에 니야조프를 전복하고 그에게 법정 소송을 하자는 전단지가 나돌았지만, 이에 대한 니야조프의 반응은 내무부 장관과 경찰학교의 교장을 국영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해고시키고, 장관을 무능하다며 질책하는 정도에 그쳤다.

4.2. 전통 문화 보존

파일:아할 테케.jpg

그리고 '소련이 수십 년 동안 훔쳐온 투르크멘의 정체성을 복원해야 한다'며 1994년부터 '투크르메니스탄화' 계획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 문화 보존에 앞장서기도 했다.

일례로 아할 테케(Akhal-Teke)[15]라는 투르크메니스탄 순종 말 보호에 이바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말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마로 징집되어 죽어나가는 바람에 멸종할 뻔 했다. 2차대전 당시에 인명피해가 제일 컸던 나라가 소련이다. 6천만 명으로 추정하는 사망자에서 2천만 이상이 소련군 및 민간인이다 보니 전쟁용으로 차출된 개나 말도 같이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이를 보고 니야조프가 깜짝 놀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간부로 일했던 시절부터 아할 테케 보호 협회까지 만들어갔을 정도로 보호에 무척 힘썼기에 멸종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아할 테케 품종 말들도 니야조프의 은혜를 아는 것인지 후계자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승마중일 때 그를 떨궈서 낙마시켜버렸다. # 니야조프는 루흐나마에다가 아할 테케를 '인내, 아름다움 및 순결의 모델'이라고 적을 정도로 아할 테케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직접 명령을 내려가면서 아할 테케의 보존에 힘을 썼다.

그리고 니야조프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 융단도 자랑스럽게 여겨 투르크멘 융단 박물관과 '융단의 날'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양탄자도 니야조프의 기행을 피해갈 수 없어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카펫을 만들거나 니야조프의 재임 기간을 기념하는 '황금 시대'라는 거대 모티프 카펫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거대 카펫은 세계에서 가장 큰 카펫으로 기네스북에 올라간 적도 있다.

기존에 쓰였던 키릴 문자를 폐기하고 라틴식 알파벳으로 투르크멘어를 표기하게 된 것도 니야조프 시기이다. 니야조프는 집권 직후부터 투르크멘어 표기 문자 교체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1999년에 완료되었다고 한다. 물론 니야조프답게 키릴 문자로 된 구소련 시절의 책은 모두 금서가 되었고, 도서관에는 니야조프의 책들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기를 제작하는 데에도 니야조프가 디자인은 물론, 치수까지 지시할 정도로 개입했는데, 니야조프는 1992년에 만든 자국의 국기를 1997년, 2001년에 걸쳐 2번이나 수정했을 정도로 자국의 국기 제작에 온 힘을 기울였고, 2001년 1월 23일에 현행 형태의 투르크메니스탄 국기가 완성되었다. 다만 이 2번의 수정은 대규모 수정은 아니고 소소한 수정 위주였다. #

물론 그 과정에서 어두운 면도 많았는데, 소수 민족들의 고유 풍습과 언어는 금지되고 국민들이 행정부에 취직하려면 그 사람이 적어도 3대에 걸쳐 투르크멘 출신임을 증명해야만 가능하게 했다.

사실 투르크메니스탄은 1924년 소련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부족 중심으로 살아가며 제대로 된 민족 국가를 스스로 형성한 적이 없었고, 소련이라는 구심점이 붕괴된 후 투르크메니스탄이 다시 부족 중심으로 분열될 것이 두려웠던 니야조프는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의 통합을 위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 문화를 강조하면서 가족주의에 의거하여 자신을 나라의 구심점으로 삼도록 우상화하기도 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적 위인들을 재조명하거나 유적지를 발굴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 #

5. 사망과 사후

하지만 이런 우상화 속에서도 그는 암살을 두려워해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지냈는데, 이는 2002년 11월 25일에 니야조프가 사저에서 대통령궁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행렬을 향해 총탄이 날아온 적이 있던 것의 영향이다. (이 암살 기도에서 니야조프는 어떠한 부상도 입지 않았다.) 니야조프는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공모 혐의자(전직 외무장관 2명과 참모총장 1명도 포함)와 이들의 가족들까지 합해 수천 명을 대규모로 체포하는 무자비한 보복을 했다. 이때 피고들은 '스탈린풍의' 재판이 TV로 중계되는 재판을 거쳤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최대 징역형도 이 무렵에 25년형에서 종신형으로 변경되고는 피고들에게 소급적용되었다.

그런데 이 암살 미수 사건은 니야조프가 반대파 탄압을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투르크메니스탄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 오와단 데페(Owadan-depe) 감옥 건설이 시작된 시기가 바로 이 암살 시도 직전이었다고 한다. 이후 니야조프는 자신의 집에 15m의 담을 쌓고 자신의 경쟁자가 될까봐 아들조차 외국에 내보내지 않을 정도로 심한 편집증에 빠졌다.

그러나 니야조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경비로 인해 심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로 인해 2006년 12월 21일 새벽 1시 10분에 향년 66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전부터 앓던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니야조프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 2인자였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보다 못해 일부러 응급조치를 못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니야조프의 장례식은 니야조프의 사망 3일 후인 2006년 12월 24일에 열렸는데, 대통령궁에 니야조프의 관이 전시되었을 때 많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시민들은 극적으로 운 것은 물론(?) 니야조프의 관에 매달려 기절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니야조프는 고향 마을에 있는 돔 모양의 거대한 영모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고 나서 2인자이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정권을 잡았는데,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처음에는 일반인의 인터넷 사용과 다당제를 허용하는 등 어느 정도 유화책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어도 니야조프 못지 않게 괴상망측한 기행을 일삼고 다니는지라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와 인권 탄압은 사실상 달라진 게 없다. 그리고 베르디무하메도프도 2022년 3월 19일에 사임하고는 대통령직을 아들인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에게 기꺼이 세습했으나, 실제로는 뒤에서 인민평의회 (상원) 의장을 역임하면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우습게도 생전에는 그다지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못했고, 오히려 죽은 다음에서야 더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인물이었다. 기행을 저질렀어도 미국이나 러시아에게 대들지 않으며 외교에서는 중립 노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미국 언론에선 우고 차베스랑 다르게 살아 생전 그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았던 데다 옆나라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나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과 같은 폭력적인 탄압은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등, 적당히 서방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이는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인 탓에 미국 우익언론이 독재자라고 신나게 보도하던 거랑 대조적이다.

미국은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의 논리대로 반미 성향을 보이는 독재자들은 탄압하지만 (주로 남미 등지에서) 친미, 반공 성향을 보이는 독재자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반미 감정을 가질 정도로 지나치게 막 나가지만 않으면 관대하게 침묵하거나 지원해준 이력이 많다. 이것의 극단적인 폐해를 보여준 것이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이다.

니야조프는 국제적으로 딱히 도발을 한 건 없으며, 자국민을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천 단위로 학살하거나 수십만 단위로 수용소에 넣지도 않았다. 1999년에 투르크메니스탄은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고, 사형제가 폐지되기 전에도 사형 집행은 흉악범을 제외하면 일단 소극적이었다. 일단 마지막 공식 사형 집형 년도는 1997년. 다만 전술한 것처럼 정치범들을 만 단위로 수용소에 넣기는 했다.

게다가 복지정책도 상당히 잘 펼쳤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상태로 장기집권한 독재자치고는 의외로 괜찮은 녀석이었다는 평가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니야조프 본인이 학살을 안했을지언정 교도소 수준이 과장 좀 보태면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준하는 수준이기에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고문 속에서 사망한 정치범들은 적지 않다고 한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사형 유예이지만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죄수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니야조프와 비슷한 수준의 독재권력을 지녔던 폴 포트, 이디 아민, 로버트 무가베, 장 베델 보카사 같은 독재자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 제노사이드)을 저지른 경우를 생각하면 니야조프가 정적들을 감옥으로 보내서 죽게 만든 건 '비교적'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니야조프도 위의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찰력과 군부의 통솔권을 완전히 지배했기 때문에 원한다면 학살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피지배인들에게 소수민족과 같은 공공의 적을 만들어 증오의 대상을 지배자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기거나 비논리적인 학살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으켜 반대세력의 탄생을 막는 것이 뛰어난 정책을 통해 사회 만족을 이루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니야조프는 일단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은 니야조프에 대해 딱히 큰 악감정은 없다. 현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저지르는 행각도 우상화를 제외하면 니야조프보다 딱히 낫다고 할 수도 없으므로 더욱 그러며, 덤으로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마지막에는 기꺼이 아들에게 권력 세습을 하고야 만다. 니야조프는 국제적으로도 그저 제 안방 안에서 오로지 권력과 숭배만을 탐한 기인, 이상한 괴짜 정도로만 평가하고 있다.


[1] 투르크멘어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θɑpɑmɯˈɾɑt ɑˈtɑjɛβɪtʃ nɯˈjɑðoβ\]. 투르크멘어에서 y( /ɯ/)는 ý( /j/)와 구분된다. 또한 러시아어 소유접미사 -오프(-ов)를 차용한 투르크멘어 성씨는 무성음화되지 않더라도 관용을 존중해 -오프(-ow)로 표기한다. 또한 투르크멘어에서 s는 무성 치마찰음(thought의 th), z는 유성 치마찰음(they의 th)으로 발음된다. [2] 현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 대학교 [3] 혼전성은 '멜니코바(Мельникова)'. [4] 세종대왕은 신생국가였던 조선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외교에도 힘썼고 새로운 문자 체계를 도입하거나 여러 제도들을 정비는 등 내실에도 많은 신경을 써서 조선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고 태평성대를 이끌어낸 성군이며, 이순신은 국가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대활약하여 자기 군주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게 된 구국의 영웅 출신인데 아타튀르크는 군인 시절에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멸망 위기에서 지켜냈고 정계에 진출해서는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인 활동과 새로운 문자를 도입라는 등의 내실 정비를 다져서 국가를 완성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업적들을 전부 다 이루었다. 이러니 튀르키예에서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지진으로 당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 인구의 1~10%에 달하는 1만~11만 명이 사망했다. [6] 사파르무라트 또한 무슬림이었다. [7] 수도 아시가바트는 여름 평균 기온이 37도이고, 겨울 평균 기온은 1도일 정도로 높다. [8] 공항 IATA코드 : ASB, ICAO코드 : UTAA. 투르크메니스탄 플래그 캐리어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과거 김포국제공항과 직항 노선도 있었다. [9] 니야조프는 타 종교 단체들을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다양한 비토착 종교 단체'로 폄하했다. [10] 허용 대상은 국제 기업의 사무실과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호텔, 대학교, 공무원, 외교관, 연줄이 좋은 사람들 정도였다고 한다. [11] 소유자의 거주지와 국가 안팎으로의 이동이 기록되었다. [12] 이쪽은 니야조프도 정상인으로 보일 정도의 기행을 저지르며 10년 만에 전란도 없이 인구의 절반을 없애버린 잔혹한 독재자였다. [13] 사실 당대 주변국들의 경제사정이 하나같이 좋지 못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줘야 할 가스 대금을 체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14]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을 때에는 한달에 최대 150리터까지 배급받을 수 있었다고 하며, 다 써도 휘발유 값이 혜자나 다름없는 가격인지라 단돈 5달러 정도만 있어도 차를 마음대로 타고 다녀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배급을 탕진하면 그냥 돈 내고서 다시 기름을 채우면 되니까 유류비로 인한 문제가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 또 1달러면 60리터의 휘발유를 살 수 있었는데, 생수 1병 값이 9500마나트(400원)이었으니 물보다 석유가 더 쌌던 셈이다. # [15] 중국 측 사서에는 한혈마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