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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23:24:13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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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 드루수스
Drusus the Elder
파일:1280px-Drusus_l'ancien_Rome_augGP2014.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생전 이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Nero Claudius Drusus)
사후 정식 이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존칭 게르마니쿠스[1][2]
출생 기원전 38년 1월 14일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9년 여름[3] (29세)
게르마니아
배우자 소 안토니아
자녀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형제 티베리우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2.3. 게르마니아 전쟁
2.3.1. 초기 군공과 업적2.3.2.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쟁2.3.3. 군공과 요절
2.4. 사후 영예
3.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4. 평가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자 장군, 정치가. 보통은 대(大) 드루수스(Drusus the Elder),[4]라고 하며, 네로 드루수스, 드루수스 1세,[5]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고도 불린다.

본래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자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고, 양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어머니의 가계 역시 본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기에 이중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속해 있었다. 친형은 로마 제국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였다. 친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뒤 3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의 결혼식 당시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친부모의 이혼 전 약속에 따라 태어난 이후, 친권을 갖게 된 친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친부가 병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리비아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성장했다.

친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존칭을 얻어 가문의 별칭으로 삼았다. 아내는 안토니우스와 대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 소 안토니아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만이 유년기 이후에도 생존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세습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갖는 위치가 특별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드루수스의 혈통들이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연이어 차지했고, 대 드루수스의 직계들이 로마인에게 공인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손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3대 황제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였으며,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였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양자인 네로는 그의 양손자이면서 혈연적으로는 외증손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북해를 항해한 인물이었으며, 최초로 레누스 강을 건너 로마 주요 요새들을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하면서 베저(Weser) 강[6]과 엘베 강[7]까지 최초로 도달한 로마 장군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했으며, 갈리아 일대의 행정 및 방어 시스템을 정비하고 레누스(라인 강) 방어선을 건설한 장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까닭에 대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레누스 일대 로마군은 3세기 후반까지도 드루수스 부자를 위해 이들 부자를 기리는 탑을 만들어 매년 탑 주위를 돈 뒤, 두 사람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38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리비아가 그를 임신했을 때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이혼할 것을 요청했기에 부모는 곧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1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전남편 티베리우스 네로가 옥타비아누스와 전 부인의 결혼식에 참석해 ‘리비아의 아버지가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아울러 이때 드루수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는 옥타비아누스-리비아 드루실라 부부로부터 장남 티베리우스(당시 3세)와 곧 태어날 아이의 친권을 약속받았다. 드루수스는 리비아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태어났는데 역사가들은 그의 출생일을 대략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태어난 이후 유년기때 이름을 데키무스에서 친부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된 이름 '네로(Nero)'로 개명했다.

어머니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이들 부부의 로마 시내 저택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태어날 당시, 많은 로마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계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라고 의심했고, 실제로 이를 사실로 믿는 로마인들은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이런 풍자시까지 나돌았다.
이들 부모는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아이가 자궁에 겨우 3개월만 있다가 태어났으니.
이 소문과 풍자시는 루머의 당사자 대 드루수스가 태어났을 당시에도 화제를 모았지만, 당사자인 드루수스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이후 세간의 주목을 더 받았다. 때는 그의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드루수스의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사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자이고, 자신이 양친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어했던 목적으로 이를 더 부추겼다고 말한다.[8]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이름 중 드루수스는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는데, 그의 조상 중 처음으로 이 이름을 얻은 ‘첫번째 드루수스”가 BC 283년, 1대1 싸움에서 적군 족장 드라우수스를 죽인 후 얻은 영예로운 이름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드루실라의 남성형 이름이기도 했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9]의 이름이기도 했다. 또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도 계속 전해졌다. 또 다른 이름인 네로 역시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다. 이 유서 깊은 이름은 그의 직계 조상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며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자였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서 따왔으며, 그 뜻은 ‘용감한 자’였다.

드루수스는 결혼식 전의 약속이라면,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같이 살지 않고,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의 집에서 자라야 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과 달리 드루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집에서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와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걸음마를 할 때까지 직접 키웠다. 후일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드루수스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며 친부 집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풍자시와 원로원 내 소문이 로마인들에게 사실로 확정됐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 부부는 이 소문을 무시하고 드루수스를 자신들의 집에서 키웠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더 확산되고,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간절히 호소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드루수스를 친부의 집으로 보냈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젖을 떼고 난 이후 걸음마를 할 때부터 친부의 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드루수스를 거의 매일 찾아가거나 자신들의 집으로 데리고 오며 정을 쏟았다.

그는 아버지 품으로 대략 1살 무렵부터 돌아가서 살았는데, 이때 친부 밑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루수스가 불과 6살에 불과했을 때 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가 BC 33년 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9세였던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권을 가지게 된 어머니가 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했다. 이때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거처를 옮기도록 한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이는 친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한다는 이유와 내전이 갈수록 심해진 탓에 두 사람의 신변까지 위협을 겪고 있던 당시 로마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문자 그대로 명분으로 내세운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풍자작가와 정적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 목적이 컸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떤 뒷말도 풍자시 등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워낙 우애가 좋아 서로를 사랑했다고 하며 실제로 성년이 된 이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티베리우스는 잔정이 없고,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동생 드루수스에게는 진심으로 살갑고, 사랑을 베풀었다. 어느 정도로 사랑을 베풀고, 아꼈는지, 그는 공직 생활 중 동생에게 도움이 될 것을 먼저 찾아준다거나, 본인이 힘든 상황에서도 동생의 부탁이라면 반드시 도와줬다. 또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 사후 대 율리아와 강제 재혼하는 가운데에서, 동생이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사실상 내정되는 가운데에서 있을 미래까지 고려해, 백기투항하면서 원치 않던 재혼까지 했다.

이런 모습처럼 티베리우스는 로마귀족의 관습과 집안 전통상 첫 남자 아이에게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라고 이름을 지어줘야 함에도 굳이 자신의 첫 아이이자 장남에게 동생의 이름인 드루수스를 붙여줬다. 그는 이때 장남의 이름을 동생의 당시 전체 이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똑같이 지어줬다. 이 장남이 후일 소 드루수스로 많이 불리는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이후에도 티베리우스는 소 드루수스의 일란성 쌍둥이 아들이 태어난 때에 두 손자 중 한명에게는 동생의 이름을 조합해 지어 붙여줬다.[10] 이는 드루수스가 자신의 장남으로 후일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유명해질 게르마니쿠스의 입양 전 이름이 본인 이름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같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장남이자 첫 아이 이름을 동생 전체 이름이자 조카의 이름과 굳이 똑같이 지은 티베리우스가 얼마나 동생을 아꼈는지 확인이 될 정도이다.[11]

2.2. 결혼

드루수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둘째 딸이었던 소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판단에 따른 정략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드루수스는 아내 소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정 생활도 화목했다.[12][13] 또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모두 서로에게 충실하고 아낀다는 세간의 평판을 얻었다.

이런 까닭에 미틸레네의 크리나고라스는 찬사 가득한 시를 쓰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드루수스의 아름다운 아내 안토니아의 첫 임신을 언급하며 찬사를 보내며, 이들 부부를 축원하고, 부부의 다산과 화목함을 기렸다.

그는 이 결혼 생활을 통해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아들 마르켈루스를 일찍 잃은 장모 옥타비아는 동생의 의붓아들이며 양아들인 드루수스를 사위로 맞이하기 전부터 아낀 터라, 그가 막내사위가 되자마자 친아들처럼 여겼다. 드루수스는 장모의 후원을 어머니 리비아의 후원 못지 않게 받았고, 그녀의 이탈리아, 그리스, 갈리아, 이집트에 소재한 재산 중 많은 부분은 드루수스 부부의 소유로 넘어갈 만큼, 드루수스는 옥타비아의 다른 사위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장모 옥타비아 장례식 당시, 막내사위임에도 상주가 됐는데, 이때 장모의 생전 유지에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대표해 로스트라에 올라 연설을 했다.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는 총 5명의 자녀 혹은 그 이상의 자녀를 거의 매년 임신해 얻었다. 하지만 이 중 첫째 아들 게르마니쿠스 이후의 아이들은 모두 영아기에 죽었다. 그래서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리비아), 막내이자 둘째 아들인 클라우디우스 만이 성년 이후에도 생존했다. 그러나 드루수스가 생전 마지막으로 얻은 막내 아이인 차남 클라우디우스는 아주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리며 얻은 후유증으로 다리 한쪽이 불편해 평생을 고생했다.

훗날 대 드루수스가 요절한 뒤, 그의 아내 소 안토니아는 재혼하지 않았고 50년여 동안 더 살았다.

소 안토니아는 남편 드루수스가 생전 훌륭한 인품과 군공으로 얻은 인맥을 통해, 다양한 각계 인사들에게 호의를 얻었다. 이중에는 시아주머니로 드루수스의 친형 티베리우스도 있었다. 하여 가문이 세야누스 음모 아래에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절단날 위기에서 안토니아는 기지를 발휘해, 차남 클라우디우스, 손자 칼리굴라, 외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구출해냈다.

2.3. 게르마니아 전쟁

2.3.1. 초기 군공과 업적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친아들인 두 의붓아들들을 일찍부터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이들에게 일찍이 많은 경험과 각종 공적을 쌓도록 기회를 줬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일찌감치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로 대중들에게 소개됐는데, 티베리우스는 친척 마르켈루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기념하는 양부의 정식 개선식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전차에 나란히 타는 영예를 얻었다.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에게 최소 나이 기준보다 5년 먼저 모든 공직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줬다. 드루수스의 어머니 리비아는 남편이 두 아들을 친양자로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입적시키길 원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아들들이 수장으로 있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힘을 온전히 얻고자 자신의 가문에 입적시키길 망설였다. 다만, 이 역시 드루수스는 형 티베리우스와 달리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가문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남성이자 본인의 아들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시켰으며, 조카 소 안토니아와 약혼시킨 뒤부터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후원하며 그 위상이 형 티베리우스와는 3년 터울의 격차가 무의미해졌다.

드루수스는 첫 특권 행사 당시,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 아래 재무관이 됐다. 이때 그는 과거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중 마르켈루스처럼 감찰관 권한 일부를 수여받았고, 안찰관 책무와 법무관 책무 일부까지 경력을 쌓는 일환으로 행사했다. 형 티베리우스가 이보다 한두단계 낮은 형태로 재무관을 하면서 반역법 기소나 곡물 관리 감사를 한 것을 떠올리면, 출발 자체부터 달랐다. 그는 이 책무 경험 후 마르켈루스처럼 법무관 경력을 굳이 맡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전직 법무관 자격을 얻었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특권을 선사받은지 3년 뒤인 기원전 16년, 친형 티베리우스가 법무관(프라이토르) 자격을 얻고 이탈리아를 잠시 떠났을 때 부재 중인 형을 대신해 법을 제정하는 형태로 이를 완성했다. 또 그에게 자신의 행사 진행, 업무 보조 등을 맡게 했다.

이듬해(BC 15) 알페스(알프스 산맥) 일대의 부족들과 전투를 벌여 공적을 쌓으면서, 양부와 원로원에게 형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다. 당시 드루수스는 승기를 잡았지만 완벽하게 이들을 제압할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형 티베리우스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다. 이후 형제는 힘을 합쳐 승리를 거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드루수스의 공로로 원로원 앞에서 치하하고 강조했다. 동시에 이 전투를 기념한 아우레우스를 발행하면서, 아내의 두 아들 중 드루수스가 형보다 앞에 자리한 모습을 강조했고, 그가 티베리우스와 병사들을 배경삼아 자신에게 승리의 가지와 풀잎관을 바치는 형태로 새겼다. 이는 그가 자신의 남성 친족 중 처음으로 주화에 공개적으로 선전한 일로, 드루수스를 티베리우스보다 우선으로 홍보한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3.2.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비교적 내정 위주의 황제인 이미지가 있으나 아우구스투스 역시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확장 위주의 정책을 폈다.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라는 입지의 불안정한 점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는 로마 시민들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보여주길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 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선전하였다.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도 이때 만들어진다. 그는 그러한 선전을 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공석이 된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모두 로마에 편입시켰고, 그 후 유다 왕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일대와 소아시아의 구 폰토스 영토, 히스파니아 반도 북부의 미점령지, 그리고 알페스(알프스) 지역을 모두 점령,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한다. 그 작업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파르티아와 조약을 맺어 시리아 일대의 국경을 확정 짓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리리아와 다누비우스 강[14](도나우 강) 사이에서 살고 있던 달마티아 부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들을 공격한 이유는 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도나우 강을 로마의 북동쪽 국경선으로 확정짓기 위해서였다. 로마인들의 침입에 달마티아 족은 강경하게 반발하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단호하게 공격하였고 마침내 이들을 격파한다. 이후 그 일대를 두개의 속주로 개편, 로마의 영토에 편입시킨다.

그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게르마니아의 정복 사업 역시 추진한다. 이는 레누스 강[15](라인 강) 건너에 있는 알비스 강(엘베 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존의 레누스 강은 다누비우스 강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는 레누스 강(라인 강)과 다누비우스 강(도나우 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지붕 알페스(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오늘날의 엘베 강과 도나우 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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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두 양아들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누나의 큰사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네로의 조부) 등을 파견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여러 장군 중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로 서른도 되지 않은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가 담당했으며, 그들은 각각 일리리쿰, 갈리아 정비의 중책도 함께 맡았다. 따라서 갈리아 속주 전체를 관장했던 드루수스는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 총독 관저를 마련했으며, 기원전 13년 정식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 시기동안 갈리아 행정, 방어체계, 세금징수 문제를 정비했으며, 기원전 9년까지 게르마니아 내 레누스 전선과 게르마니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책임졌다. 그리고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5년부터 동생을 도와 알페스와 갈리아 일대에서의 군사행동을 병행하면서, 다누비우스 전선을 중심으로 영토확장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드루수스의 공식적인 게르마니아 전쟁 수행은 기원전 11년부터 9년까지 총 네 번 진행됐다. 하지만 그는 전쟁 개시 이전부터 실질적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프로젝트를 기원전 27년 처음 담당했던 아그리파의 사례를 참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젊은 드루수스는 기원전 14년 레누스 강변에 항구적인 병영기지 3곳을 건설했고,[16] 정찰 업무와 병참 보급을 위한 활로 확보 및 친로마 세력 포섭을 진행시켰다. 사실 이 시기동안 드루수스는 갈리아 총독으로서 행정과 방어체계 완성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스페스인과 시캄브리인으로 구성된 게르만족이 갈리아에 침공하면서 이는 28년간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3대에 걸쳐 집중한 게르마니아 전쟁 개막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14년 로마군은 드루수스의 지휘 아래 레누스 강을 건너 로마를 공격한 우스페스, 시캄브리 군대를 격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스페스족의 심장부까지 진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군대는 레누스 하류를 도하해 우스페스족의 영토를 공격해 직접 응징한 다음, 그대로 북상해 시캄브리족의 영토를 공격하여 이 일대를 편입했다. 이후 드루수스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북부로 진격해 프리지아인을 정복한 뒤, 독일 북서부에 있던 우치족까지 공격해 이 일대를 사실상 로마령으로 편입시켰다. 이 작전은 불과 1년도 안 된 사이에 모두 이뤄졌고, 첫 원정을 치른 드루수스 군대의 퇴각은 그해 겨울이 될 무렵 끝났다.

이듬해 봄까지 로마로 돌아가 전황 보고를 하고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정치활동을 병행한 드루수스는 갈리아 복귀 직후, 다시 레누스 강을 건넜다. 이때 그는 다시 항거하기 시작한 우스페스족을 공격한 뒤, 베스 강을 지나 북독일 일대를 휩쓴 뒤 로마 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통과해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 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두번째 전쟁에서 그는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던 이셀 호수를 연결한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하고, 이 일대에 숙영기지와 퇴역병 정착촌 등을 만들었다.

기원전 10년 봄, 드루수스는 다시 레누스를 건너 게르마니아 심장부로 향했다. 이때 그는 레누스를 그대로 가로지른 뒤 카티족과 1년 내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차티족의 강한 항거에도 끝내 그들을 로마에 편입시켰다.

드루수스는 매년 겨울이 될 즈음 로마로 귀환해 전황을 보고했는데, 이 시기의 전쟁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은 크게 고무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유독 아낀 드루수스의 전공과 전략에 크게 감탄했고, 원로원은 야누스 신전 문을 닫으면서 그 전공을 기렸다. 그리고 이 시기 드루수스는 개선식까지 허락받는다.

실제 그의 게르마니아 원정은 상대방인 게르만족들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그 이유는 드루수스의 작전이 과거 카이사르처럼 상당히 정공법이면서도 일대의 지리와 부족들간의 이해관계를 통해 전략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인데, 드루수스의 전투들은 28년간의 게르마니아 원정 기간 내내 아우구스투스를 만족케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법무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기원전 9년 양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집정관 자격으로 게르마니아 전쟁을 다시 수행했다.

기원전 9년의 전쟁은 게르만 부족들의 강력한 저항 탓에 꽤 고전했지만, 드루수스는 카티족과 수에비족을 모조리 격파한 뒤 베저 강을 지나 이 일대의 여러 게르만족을 굴복시켰다. 이후 그는 퇴각하면서 저항하는 게르만족들을 다시 한 번 격파하고 그들을 로마 영향권에 굴복시키는데, 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처럼 약탈하고 끝내 진격했다"고 표현했다. 그 결과, 드루수스는 네 번째 원정에서 무려 엘베 강까지 돌파했고, 로마인들은 드루수스 지휘 아래 난생처음 가장 춥고 깊은 게르마니아 동쪽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2.3.3. 군공과 요절

드루수스는 군대를 이끌고 라이티아족, 게르만족들과 싸우면서 여러 전공을 쌓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재무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지냈고, 전쟁 수행 기간 동안 로마 장군들 중 북해 일대를 항해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때 레누스 강(라인 강)과 이셀 호수를 연결해주는 드루수스 운하를 파기도 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는데, 상당히 과감한 정공법과 기습 작전 등을 활용해 게르만족들을 격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족장들의 자제들을 로마로 보내 친로마파 인사로 육성케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질들로는 세기메루스의 두 아들이었던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17] 티베리우스 시대 때 마르코만니족을 이끈 친로마파 족장 마로보두스 등이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공화국[18]의 영광’을 위해서,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장 고귀한 전리품’, 즉 스폴리아 오피마를 얻으려는 야망에 불타올랐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드루수스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용맹하게 적진을 가로질러 게르만 족장들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드루수스의 진격은 “그에게 거대한 야만족 여인의 유령이 나타나 라틴어로 더이상 모험을 할 생각을 말라고 경고를 했을 때” 비로소 멈췄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 기간동안 드루수스에게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영토로 편입된 갈리아 전역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총독으로서 전쟁 수행 기간 내내 이 일대의 행정 사무 등도 도맡아서 처리했다. 이때 드루수스 가족은 루그두눔에 있는 총독 사저에서 다같이 살았는데, 그의 아내 소 안토니아는 황족 신분임에도 로마에 남지 않고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총독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소 안토니아는 4명의 아이들을 낳은 뒤 과거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자녀들을 손수 키웠다.[19] 갈리아에서 1년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와 그 가족들은 원로원과 아우구스투스에게 레누스 전선 내 전쟁 결과와 갈리아 일대의 보고를 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해야 할 경우에만 이탈리아로 잠시 돌아왔다고 한다.

갈리아에서의 훌륭한 노력과 게르마니아 땅에서의 공적들은 드루수스에게 개선 훈장과 약식 개선식의 영광을 수여받게 해줬다. 따라서 그는 법무관 임기가 끝난 뒤,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곧바로 BC 10년 이듬해 집정관(콘술)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곧 전쟁이 재개된 까닭에 집정관 신분임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게르마니아 땅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가 BC 9년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개선 군단을 이끌고 행군 중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얼마 안 가 여름철 주둔 사령부 숙영지에서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20] 이때 그는 친형 티베리우스 품 안에서 숨을 거뒀으며 그가 사망한 숙영지는 로마인들에게 ‘저주받은 숙영지’라고 불리게 됐다.[21]

2.4. 사후 영예

드루수스가 낙마 사고로 요절하고 난 뒤,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한 형 티베리우스는 말을 타지도 않은 채 동생의 관 옆에서 이탈리아까지 묵묵히 걸었다. 이때 유해가 지나가는 경로에 위치한 수많은 식민지와 자치 도시의 유력자들은 드루수스의 관을 교대로 옮겼다. 그리고 로마군이 드루수스의 장례 절차를 벌이는 날, 갈리아 일대의 도시들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도를 지내고 제물을 바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고 하며, 그를 기리는 기도를 드렸다.

티베리우스로부터 이탈리아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아끼던 양아들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잘 타지 않는 말을 급히 몰고 그 유해 옆으로 가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22] 로마 도착 후 로마 행정관들의 서기들이 그 시신을 받아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장작 더미 위에서 엄숙하게 화장했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했다. 그를 기리는 추도사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읽었다.

장례식 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위한 시를 직접 짓고 손수 그의 일대기를 적은 책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또 그는 원로원에 공식 입안을 통해 법령으로 매년 자신의 양아들 드루수스의 생일과 사망을 기리는 축제를 그가 정복한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 모곤티아쿰(Mogontiacum,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에서 열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 리비아와 함께 수많은 드루수스 흉상과 입상을 만들어 이를 황궁 안의 자신의 집무실과 방에 놓고 죽은 드루수스를 그리워 했다.

드루수스의 친어머니 리비아 역시 아끼던 차남의 사망 이후,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23]의 조언에 따라 드루수스 조각상을 놓고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원로원 역시 게르마니쿠스(게르만 땅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수여하고 그 이름을 그의 후손들이 물려받게끔 했다.[24] 또한 전리품이 장식된 아피아 가도 위의 대리석 아치 등을 그에게 수여하고 수많은 영예를 안겼다.

한편 로마 군대는 죽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나서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기렸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그가 이끈 라인 강 일대 로마 군단병들에게 죽어서도 인기가 대단했고 그의 일대기를 담은 책도 많이 읽혀졌다고 한다. 드루수스 사망 후, 로마군과 퇴역병 재향 군인회는 모곤티아쿰에 손수 기념물을 세웠고, 이는 오늘날 독일 마인츠에 여전히 남아있다. 또 로마군 병사들은 최소 3세기 이후까지도 매년 정해진 날에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드루수스를 기리는 기념물을 한 바퀴 도는 의식을 거행했다.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돌아가신 부모님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를 기리는 행사를 매년 로마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벌였다. 이 행사를 통해 클라우디우스는 부친 생전의 업적과 인물됨을 찬양하고 추모했다. 또 그는 브리타니아 정복 당시에도 아버지 드루수스를 위한 축제를 열었고,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승리를 쟁취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3.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

드루수스가 사망했을 때 로마에서 일부 공화정 회귀론자들과 호사가들은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를 독을 이용해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런 주장은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세상에 떠돌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대략 ‘드루수스가 종종 “자신이 황제가 되면 예전 정치 체제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공언했다고 주장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아우구스투스도 양아들이 군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고 다시 체제 전복을 시도할 거라 의심해 결국 양아들을 독살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나도는 풍문들을 기록한 수에토니우스조차도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관계를 따져봐도 이런 음모론은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적어 놓았다. 또한 당대에도 이런 주장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괴담으로 받아들여졌다.[25]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들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꼈고, 두 사람이 친아버지와 친아들일거라는 풍자시 내용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 시절로 불릴 때, 그는 드루수스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자 친아들로 여겨 키우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드루수스는 걸음마를 할 때까지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가 직접 키웠는데,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풍자시나 원로원 내 소문처럼 드루수스가 진짜 옥타비아누스의 아들로 인식됐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당연히 친아들로 인식됐고, 길거리까지 "불륜해서 낳은 자식"라는 소문이 번졌다.[26] 이런 까닭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전 약속에 따라 친부의 집으로 보냈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아내 리비아와 함께 시간을 내 드루수스를 자주 만났고 친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냉철하고 과묵한 성격에 다소 거만해보이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개방적이고 유쾌한 성격을 지닌 드루수스에게 굉장히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사실이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진심으로 대 드루수스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함을 넘어 본인의 아들이라고 여겼다.

이런 부분은 여러 장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아우구스투스가 딸 율리아, 양아들 티베리우스 등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에선, 평소 집무 시간이 끝난 이후 그는 양아들 드루수스와 주사위 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직접 적고 이 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편지들에서 늘 드루수스 형제를 지칭할 때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아들” 등의 표현을 사용했으며,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성년이 된 이후에도 둘을 아들이라고 부르고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정다감했다.

이런 다정다감한 모습은 연출이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아우구스투스 특유의 술수가 아니었다. 진심이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태어난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다섯번째 아이인 클라우디우스 출생이 임박했다는 말에, 손자 탄생의 축제를 루그두눔에서 열어야 된다며 이례적으로 갈리아의 루그두눔으로 떠났다. 이때 행사에는 티베리우스도 소환됐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보다 앞서 클라우디우스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아이 이름이 지어지고 행사가 열릴 때 이를 주관하고 드루수스 부부를 칭찬하고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

이런 모습은 같은 해 후반기에 열린 기원전 9년 집정관 선거 당시에도 계속 됐다.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는 대 드루수스가 자신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측근들에게 언질 중이었다. 그래서 이 선거는 이런 부분에서 원로원에서도 흥미를 가졌다. 그런데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보통의 로마 귀족 중 아버지가 가문과 자신의 지위를 이을 가문 후계자에게 해준 관습 그대로, 대 드루수스의 아버지 자격으로 드루수스의 입후보 접수를 대신하고 선거운동을 대신 해줬다. 이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마르켈루스조차 받지 않은 호의였다. 이런 것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가 게르만 왕 3명을 상대로 스폴리아 오피마를 얻고자 싸웠고, 이중 하나를 애매하게 얻자, 보고를 받자마자 애매모호한 전리품조차 조건이 달성됐다고 결정 내리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즉, 스폴리아 오피마가 달성됐다면서 당장 준비를 명한 것이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에 평소처럼 드루수스의 월계관을 바치지 않고, 스폴리아 오피마가 봉헌된 유피테르 신전으로 달려가서 손수 아들이 봉헌할 자리를 정리하라고 사제들에게 명령하고, 최고 제사장 자격으로 직접 이곳을 보고 개선식과 이어질 매우 중요한 특별한 명령까지 준비했다. 이 말은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가 개선식을 할 때, 크라수스 3세와 달리 스폴리아 오피마를 수여함과 동시에, 개선식 직후 드루수스를 양자의 정식 입적할 행사를 계획 중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부분은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 못지 않게 친누나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를 굉장히 예뻐했던 것도 컸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여러 여조카 중 진심으로 아낀 소 안토니아의 남편이었고 부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27] 여기에 더해서 드루수스는 정략혼임에도 아내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소 안토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다른 상류층 부인들과 달리 남편의 험한 임지까지 함께 따라간 뒤 전통적인 로마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낳고 키워서 아우구스투스를 기쁘게 했다.[28][29] 또 개인적인 능력 역시 탁월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철학을 잘 이해하면서도 원로원과의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무능하고 평범한 두 아들들(외손자들)[30] 못지 않게 양아들 드루수스를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실토했다.[31] 이런 까닭에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낙마 사고 및 죽음이 전해지던 당시,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낼 정도로 격한 반응을 내보이면서 슬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술했듯 양아들의 시신을 이탈리아 국경에서 로마까지 직접 호송해 온 이후, 드루수스의 장례식을 총괄하고 가족대표로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직접 읽었다. 이때 그는 드루수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언급하면서 일찍 죽은 양아들의 생전 업적과 인간됨 등을 찬양한 뒤, 나중에 어른이 될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드루수스 같은 인물로 성장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어린 소망을 말했다. 이어서 자신에게도 양아들 드루수스와 같은 영예로운 죽음을 달라고 신들에게 기원했다. 장례식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그리워해 자신이 양아들을 위해 지은 시를 드루수스 무덤 비문에 새기게 하고 칭송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본인이 직접 산문 형태로 드루수스의 전기를 쓴 뒤 다시 헌정했다. 또 죽은 양아들 드루수스가 완전 군복 차림으로 새겨진 모습을 담은 가족 카메오 등을 남겼다.

4. 평가

대 드루수스는 당대부터 지금까지 제정 이후 원수정기 로마 장군 중 가장 유능하고, 가장 성공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드루수스는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업적론>에서 한 면을 가득 채우며 거론할 때, 그의 공로 아래에서 본인의 이름과 업적을 평하며 이를 극찬했다. 그런데 그는 본인 생전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후광이 아니라, 본인의 역량과 인품으로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리리아 일대 로마군에게 가장 이상적인 로마군 야전사령관으로 평가받았다. 어느 정도였는지, 본국 이탈리아 중부, 북부 일대를 비롯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판노니아에서는 그의 손자 칼리굴라, 아들 클라우디우스 인기의 기반이 아예 드루수스와 그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친혈육이라는 이유가 될 정도였다. 더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드루수스 개선문에서는 그의 일가가 멸문한 뒤에도 프라이토리아니에게 거의 성지 가까운 곳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2세기 하드리아누스 시대까지도 그가 낙마해 치료받다가 사망한 숙영지는 로마군을 넘어 일반 로마인에게도 영웅 드루수스가 요절했다며, '저주받은 숙영지'로 불렸다. 또 서기 3세기 말 ~ 4세기 초까지 대 드루수스와 그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일대와 갈리아 벨기카, 판노니아 일부에서는 이 일대 로마군에게 거의 군신으로 평가받아 제사와 함께, 매년 새해 그를 기린 드루수스 스테인을 도는 의식이 당연시됐다. 이 외에도 그의 전술이나 병참운용 등은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장교들에게 참고가 많이 되었을 정도로 거의 군신 취급을 받거나 기본기 탄탄한 야전 사령관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처럼 군사적 스타일이 본인의 리더십에 바탕한 지휘술과 본인의 무력, 담력을 바탕으로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고, 적을 심리전 속에서 제압하는 야전사령관이었던 것, 갈리아 3개 전역 총독을 맡으며 벌인 체계 정비 및 운용에서 당대 로마인에게 귀감이 된 점이 크다. 하지만 그는 비슷한 유형의 명장으로 평가받은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분명 전술이나 전투대형 등을 통해 성과를 내는 화려함은 떨어지더라도 뛰어난 모습을 많이 선보였다. 맹장처럼 상대를 제압함에도, 부하 희생을 최소화하고, 병참을 확보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적의 심장부를 꿰뚫어 버리는 전술을 자유롭게 구사한 모습은, 동시대에 함께 비교대상이 된 아그리파와 비슷하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다. 다만, 그는 스승 아그리파와 달리, 카이사르나 술라처럼 적도 모르는 기발함으로 허를 찌른다던지, 심리전 속에서도 신뢰를 쌓아 얻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론>에 드루수스의 업적을 기술하면서 단순히 원정의 성공만 거두지 않고, 킴브리 족 등이 사절을 보내어 화해를 하고 그들과 로마인이 우정을 쌓았다고 표현했다. 즉, 드루수스는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1세처럼 화려하지 않은 것 같지만, 알고보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로마 명장들이 가진 야전 사령관의 모습과 함께 외교관, 행정가로의 능력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는 인격적인 평가에서도 같았다. 대 드루수스는 당대 로마인 중 그의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삐딱한 시선으로 본 원로원 의원들까지도 극찬할 만큼의 인격적 완성과 매력을 선보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드루수스도 겪어 본 파테르쿨루스는 자신이 상관으로 가장 오랫동안 모신 티베리우스가 드루수스와 그 능력은 대등할 수는 있어도, 인격적인 완성과 매력에서는 감히 따라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극찬을 했다. 이는 로마군도 비슷해,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 그의 죽음을 기념일로 마인츠, 쾰른 등 게르마니아 일대에 선포하기도 전부터, 자발적으로 드루수스의 생일과 사망일이 재향 군인회와 각 군단에게 그를 기리는 날로 인정받았다. 또 그가 23살부터 6년간 통치한 갈리아의 3개 속주에서는 지역 유지, 일반 속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옷가지를 태우고, 드루수스 관 앞에 꽃을 뿌리고 추모하면서 번갈아 관을 옮겨 매는 등 열정적인 찬사를 쏟아냈다.

따라서 현대 사가 마이클 맥날리의 경우에는 아예 드루수스의 죽음이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제국 확장 동력이 둔화된 결정타가 됐다고 평한다. 이는 다른 연구자들의 평도 비슷한데, 그들은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역시 야전사령관 중 군사적 역량은 나쁘지 않았고, 괜찮았지만, 드루수스와 같지 못했다고 평한다.

이런 군사적 평가와 함께, 드루수스의 요절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의 계획 청사진 자체가 완전히 뒤틀리면서, 종국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심혈을 기울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요절까지 이어진 배경에는 드루수스의 사고사가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1] 대 드루수스가 사후 선사받은 정식 영예, 존칭. [2]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입양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을 정의한 서기 4년 이후부터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와 그 자녀 및 후손의 가족성씨이자,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뜻하는 아그노멘으로 인식됐다. [3] 또는 겨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에토니우스는 <12인의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1>에서 여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 친조카이자 사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이렇게 부른다. 반대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소(小) 드루수스라고 부른다. [5] 친조카이자 사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2세, 본인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3세로 부르는 경우, 이렇게 부른다. [6] 독일 북서 지역을 흐르는 강이며 총 길이는 452km이다. [7] 폴란드, 체코의 국경지대에 있는 리젠 산맥을 그 수원으로 하는 강으로 체코 북부, 독일 동부를 흘러 함부르크 부근에서 북해에 이른다. [8] 아예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위해 모계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확실한 자신의 조카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자신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는 놔두고 소 아그리피나가 재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 즉 자신의 양자와 친딸을 결혼시켜서 후계자로 삼기에 이른다. 이 후계자가 바로 그 유명한 폭군 네로이다. [9] 그의 본가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다. [10] 물론 티베리우스가 두 쌍둥이 손자 중 맏이에게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에는 동생이 사후 받은 존칭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로 정통성 의미를 가지게 된 것도 컸다는 것이 중론이며, 다수설이다. [11] 드루수스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인 티베리우스를 붙여줬다. 이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들이 로마의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이다. 그의 풀 네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된다. 형제간의 사이가 좋아서 각자의 조카에게 이름을 교차로 물려주는 경우는 지금도 종종 찾아볼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사례가 있다. [12] 로마 상류층들의 결혼은 전적으로 양가 어른들의 이해득실과 정략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실제로 로마 상류 사회에서 결혼식 이후 별거 생활을 하면서 서로 정부를 두고 살거나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원수같이 지내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 생활이나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며느리 대 아그리피나의 결혼처럼 화목하고 가정적인 결혼 생활은 가족을 중시 여기는 로마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3]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대 드루수스를 후계자로 좀 더 앞 순위로 놓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드루수스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일 거라는 말들이 나왔고, 성년식 후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와 결혼하면서 아그리파의 사위인 형과 달리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반면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빕사니아와 처음 결혼했고, 아그리파와 동생 대 드루수스가 모두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 의해 자신의 ‘법적인 장모’이자 의붓남매인 율리아와 강제로 재혼했다. [14] 로마인들이 부른 다뉴브 강의 옛 이름 [15] 로마인들과 갈리아인들이 부른 라인 강의 옛 이름이다. 뜻은 갈리아 고어로 ‘~흐른다’를 뜻하는 레노스. [16]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독일 마인츠와 크산텐 [17] 아르미니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로 유학간 뒤, 로마 시민권을 얻고 기사계급에 편입된 게르만계 로마군 장교이다. 그는 형과 달리 로마군에 계속 남았고, 게르마니쿠스의 휘하 부장으로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로마를 제정 체제로 만든 뒤에도 여전히 로마를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본인 스스로를 프린켑스라고 했다. [19]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간 어머니를 따라 루그두눔에서 성장했다. [20] 또는 같은 해 겨울에 낙마 사고가 벌어져서 사망했다고도 한다. [21] ‘저주받은 숙영지’라는 명칭은 수에토니우스가 살고 있던 시절인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22]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가마를 타고 다니기 좋아했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3] 아우구스투스의 개인교사였고, 스토아 철학자이다. [24]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6살, 차남 클라우디우스는 1살에 불과했다. [25] 현대 소설 나, 클라우디우스에서는 형 티베리우스가 드루수스의 공화정 복귀 의지를 누설하자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드루수스를 독살한 것으로 묘사했다. [26] 실제로 드루수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아들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이후까지도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로 믿고 알고 있는 로마인들은 진짜 많았다. [27] 드루수스가 생존했을 당시, 그의 형 티베리우스는 동생과 달리 ‘아우구스투스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와 결혼생활 중이었는데 그렇긴 해도 티베리우스 역시 빕사니아와 금슬이 매우 좋았다. [28]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율리아는 사촌 여동생 소 안토니아와 달리 문란한 사생활과 남성편력 등으로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최악이었다. [29] 물론 율리아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딸과의 사이에서 둔 자식이었으므로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그리 사랑받는 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30]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결혼에서 얻은 외손자 두 명을 친양자로 공식입적해 후계자로 키웠다. 이들이 바로 그의 양자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이다. [31]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누나의 딸 소 안토니아를 드루수스와 결혼시켜 자신의 조카 사위로 삼았다. 더해서 훗날 자신의 외손자들이 모두 죽고 하나 남은 뒤, 아내 리비아의 아들이자 드루수스의 친형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으로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을 당시에도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는 자신의 혈육을 후계자로 집착했던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 보면, 게르마니쿠스가 누나의 외손자인 데다 무엇보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가 자신의 외손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신의 외손녀를 드루수스의 장남과 결혼시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