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라틴어: Gaius Claudius N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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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아버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숙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사촌)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7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동기 |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후임 |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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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귀족이자 장군이었다. 기나긴 전쟁의 대전환점을 만든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리를 이끈 명장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직계 조상이다.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주도하에 재평가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친구이자 역사가인 리비우스로부터 개인적인 군공보다 나라를 위해 명예를 포기하고, 국익을 취한 애국자로 찬사받았다.
2. 생애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의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증손이었다.네로(Nero)라는 이름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뿌리인 사비니인들의 언어로 "강하고 용감하다" 또는 "활기차고 쾌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별칭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막내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처음 받아, 코그노멘으로 애용하면서 가족의 성씨로 자리잡았다.
'장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장남, 차남, 3남은 모두 집정관직에 올랐고, 이들의 후손들 역시 명예로운 경력을 거치며 고위 선출직에 올랐다. 그렇지만 카이쿠스의 막내아들인 네로 가문의 개창자였던, '1대 네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형들과 달리 법무관이나 집정관 등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1대 네로의 아들들도 비슷했는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버지인 '2대 네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그의 동생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모두 사촌형들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는 달리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2대 네로 중 첫째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술했듯이, 그의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의 사촌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기원전 202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 인물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로부터 북아프리카 원정 지휘권을 가로채려 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지난해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일리리아 전쟁때 노획한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두 사람의 죄상을 폭로하고, 증거를 재판정에 제출했다. 파울루스는 가까스로 무죄를 받아냈지만,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유죄 판결을 받고 벌금을 납부했으며, 수년간 로마 정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네로와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서로 원수 지간이 되었다.
기원전 214년,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휘하의 장군을 맡았다. 마르켈루스는 놀라 시에서 카르타고군과 대치하면서, 네로에게 별동대를 맡기고 전장을 우회하여 후방에서 적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진군이 지연되었고, 카르타고군이 이미 전투를 마치고 진영으로 돌아온 저녁 늦게서야 전장에 도착했다. 이 일로 별다른 책망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12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2개 군단과 함께 캄파니아의 스베술라 시로 보내졌고, 나중에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합류하여 한니발의 동맹시인 카푸아를 포위하여 함락에 성공했다.
기원전 211년,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활약하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8,000명의 로마군만 살아남아 에브로 강 북쪽으로 후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네로는 원로원으로부터 히스파니아에 가서 군대를 수습하라는 통보를 받고, 6,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 그리고 라틴 동맹에서 온 6,000명의 보병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타라코나에 상륙한 뒤 스키피오 형제의 잔당과 합세했다.
이후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이며, 카르타고령 히스파니아의 주요 지휘관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일루투르기스와 멘티사 사이에 있는 흑석 근처의 협곡에 가두었다. 하스드루발은 협곡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카르타고군을 히스파니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고, 네로는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온갖 사소한 일로 협상을 질질 끌다가 야밤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길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날이 밝아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그 후 원로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삼아 히스파니아로 보냈고, 네로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마르켈루스 장군의 부하가 되었다.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한 바이쿨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참에 아예 형 한니발과 합류하기로 마음먹고 30,000명의 병력을 수습한 뒤 이탈리아로 출진했다. 그는 진군 도중에 갈리아 부족민들을 용병으로 추가 고용하면서 총 50,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과 민회는 이를 막기 위한 집정관 선거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엔 집정관을 맡을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전후 수습을 해야 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고령의 나이인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더이상 군대를 이끌기 어려웠으며,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등은 전사했다. 일단 네로는 무난하게 기원전 20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두 번째 집정관으로 삼을 인물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에 원로원은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당한 뒤 오랫동안 잊혀졌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집정관에 출마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에 따라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원수 지간이었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로원이 서로 힘을 합쳐 적에 대항하여 행동할 것을 촉구하자,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일단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어렵게 정해진 집정관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임무를 배정받았다. 네로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한니발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고,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하스드루발을 막기로 했다.
10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시민 수가 270,000명에서 137,000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병력을 모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징병 대상 나이를 낮추고 퇴역 장병을 불러들이며, 심지어 죄수를 동원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루카니아로 향했다. 네로는 그루멘툼 마을 근처에서 한니발과 조우하여 수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언덕 뒤에 일부 코호트를 숨겨놓고, 아침에 전면전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양군이 곧 맞붙었고, 전투가 한창 무르익을 때 대대장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케르와 라틴 동맹군 지휘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한니발의 후미를 공격했다. 한니발은 즉시 후퇴했고, 네로는 그를 추격해 많은 적을 죽였다.( 그루멘툼 전투)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날 카르타고군은 8,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며칠 후, 한니발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아풀리아에 이르렀다. 네로는 즉시 추격했고, 베누시아에서 따라잡았다. 이후 소규모 접전이 치러졌고, 카르타고군 2,000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한니발은 다시 남쪽으로 남하하여 메타폰토스에서 군대를 징집했고, 베누시아로 이동한 뒤 다시 카누시움으로 진군했다. 네로는 그의 뒤를 계속 추격하며 함부로 북상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러던 중 로마군 정찰병들이 하스드루발이 형에게 보낸 전령을 사로잡았다. 네로는 페니키아어로 쓰여진 편지를 번역하여 하스드루발이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움브리아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병력이 50,000명에 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네로는 즉시 원로원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병력 30,000명으로는 하스드루발을 당해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자신이 군대 일부를 북상시켜서 리비우스와 합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원로원의 승인 통보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촉박하다고 보고, 정예 보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곧장 북상했다. 물론 한니발이 이를 알아채면 곤란하므로, 부관에게 자신이 지원군을 이끌고 가는 것을 다른 병사들과 적장 한니발이 절대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비밀을 최대한 엄수하며, 전면전을 무조건 피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사전에 지나갈 모든 경로에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도록 했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네로 휘하의 장병들이 진군할 때 주민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축복하면서, 모든 신과 여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네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군대는 이미 메타우루스 강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대치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야밤에 적이 눈치 못채는 사이에 동료 집정관과 합세했다. 이후 군사회의에서, 몇몇 장교들은 군단병들이 며칠간 장기 행군을 하느라 지쳤으니 휴식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로는 한니발이 상황을 알아채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한다며, 다음날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고, 리비우스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전투 대형을 펼친 광경을 살펴보다가, 많은 군단병이 이전에는 없던 낡은 방패를 들고 있고, 일부 기병은 마치 긴 행군을 마친 것처럼 지쳐 있는 걸 보고 로마군이 멀리서 합류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군대를 진영으로 돌려보낸 뒤 정찰병을 통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로마군 사이에서 전투 뿔피리의 신호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보내지는 걸 알아챘다. 이는 두 집정관이 한 진영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하스드루발은 일단 퇴각하기로 했지만, 로마군은 메타우루스 강을 따라 후퇴하는 적을 따라잡고 전투를 강요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당시 로마군의 좌측에는 메타우루스 강이, 우측에는 험한 언덕이 위치했다. 리비우스는 좌측을 맡았고, 우측은 네로가 맡았다. 전투가 개시된 후, 네로는 높은 언덕을 잘 활용하여 갈리아 용병들을 막아냈다. 그러다가 로마군의 좌익과 중앙이 카르타고군의 강한 압박으로 고전하는 걸 발견하고, 여러 코호트를 이끌며 전장을 우회한 뒤, 카르타고군의 측면과 후방을 습격했다. 이 절묘한 공격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대다수의 카르타고군이 섬멸되었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도 죽었다.
전투 직후, 네로는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곧바로 돌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불과 6일 만에 한니발과 대치 중인 아군과 합세했다고 한다. 이후 부하를 시켜 하스드루발의 잘린 머리를 카르타고군 초소 앞에 던지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동생의 수급을 알아보고
"카르타고의 잔혹한 운명이여!"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한니발은 루카니아로 돌아갔고, 그해 내내 숙영지에서 나오지 않았다.한편, 로마 대중은 대승을 거둔 것에 몹시 기뻐했고, 원로원은 3일간의 감사 행사를 선포했다. 네로와 리비우스는 로마에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네로는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걸 인정받았고, 원로원은 허락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다만 리비우스가 배정한 전선에서 승리가 이뤄졌기 때문에, 리비우스는 개선식의 주인공이 된 반면에 네로는 혼자 말을 타고 들어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가 실제로 메타우루스 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리비우스보다는 네로에게 찬사를 보냈다.
기원전 204년, 리비우스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두 사람은 계약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확립하고, 소금세를 도입했으며,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두 감찰관 모두 공적인 비용으로 말을 샀기 때문에 각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기원전 218년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를 끄집어내어 리비우스에게 말을 팔라고 강요했으며, 리비우스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했으니 말을 팔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도덕적인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추려고 했다. 호민관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감찰관들의 추잡한 행동을 기소하자고 제안했지만, 원로원은 일전에 큰 승리를 거둔 두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201년, 네로는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인 필리포스 5세를 찾아갔다. 그들은 로마와 동맹을 맺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무력으로 공략하려 드는 필리포스 5세의 행각은 로마를 적대하는 것이라며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가 듣지 않자, 이집트로 가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접촉해 로마와의 우호조약을 갱신하면서, 필리포스 5세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이후 네로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후손
구국의 명장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자녀와 직계 후손들은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에서도 큰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2세기가 훨씬 지난 뒤, 네로의 후손들은 어떤 클라우디우스 가문보다 위대해졌고, 첫 번째 세습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바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인데, 네로 가문의 직계 남자 혈육인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모두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개인 재산으로 물려받아 이어받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사위이자 양자였던 네로 역시 그를 물려받아 제위를 차지했다.네로 생전, 마지막 직계 혈육인 브리타니쿠스가 살해되어 그 대는 끊겼고, 마지막 남은 후손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 역시 네로에 의해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살해되었다.